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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명 제9대 황제
홍치제 | 弘治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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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470년 7월 30일 | ||
명
북경 순천부
자금성 서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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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 | 1487년 9월 22일 | ||
명
북경 순천부
자금성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
사망 | 1505년 6월 8일 (향년 34세) | ||
명
북경 순천부
자금성 건청궁 (現 베이징시 둥청구 징산첸제4호) |
|||
능묘 | 태릉(泰陵) | ||
재위기간 | 명 황태자 | ||
1475년 12월 5일 ~ 1487년 9월 22일 | |||
제9대 황제 | |||
1487년 9월 22일 ~ 1505년 6월 8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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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9d537><colcolor=#670000> 성씨 | 주(朱) | |
휘 | 우탱(祐樘) | ||
부모 |
부황
헌종 순황제 모후 효목황후 |
||
형제자매 | 14남 6녀 중 3남 | ||
배우자 | 효강경황후 | ||
자녀 | 2남 1녀 | ||
묘호 | 효종(孝宗) | ||
시호 |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 (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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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 | 홍치(弘治, 1488년 ~ 1505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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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명나라의 제9대 황제.묘호는 효종(孝宗), 시호는 달천명도순성중정성문신무지인대덕경황제(達天明道純誠中正聖文神武至仁大德敬皇帝)였으며 휘는 우탱(祐樘)으로 제8대 헌종 성화제의 아들이었다.
2. 생애
2.1. 신분을 숨긴 어린 시절
홍치제 주우탱은 성화 6년( 1470년) 헌종 성화제 주견심의 3남으로 태어났다. 황자였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행했다. 생모인 기씨(紀氏)는 성화 원년( 1465년) 광서 지방에 거주하는 요족의 반란을 진압할 때 포로로 끌려와 후궁이 된 요족 여자였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성화제의 눈에 띄어 승은을 입었는데, 그 후 성화제는 기씨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기씨는 이미 후궁들을 질투해 낙태시켜버린 만귀비가 두려워 황제의 승은을 입은 사실을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근신하며 지냈다. 얼마 후 배가 점점 불러오자 기씨는 황제의 아이를 회임했다는 사실에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의 회임 소식이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 만정아(萬貞兒), 즉 만귀비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공포를 느꼈다.기씨는 생과 사의 기로에 선 심정으로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소문에 민감한 궁녀들의 입방아를 피할 수 없었으므로, 결국 만귀비까지 기씨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에 만귀비는 은밀히 궁녀를 보내 기씨를 정탐하게 했는데, 궁녀가
"기씨는 회임한 것이 아니라 복부에 혹이 생겨 중병에 걸린 것입니다."
라고 보고했다. 당시
만귀비의 악행에 치를 떨며, 기씨를 남몰래 동정하는 궁녀와
환관들이 있었는데,
만귀비가 보낸 그 궁녀도 기씨를 보호하기 위해 거짓을 보고한 것이었다. 만귀비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기씨를 안락당(安樂堂)에 유폐시켰는데, 안락당은 중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관들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이런 고초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씨는 마침내 황제의 아들을 낳았다.하지만 기씨는 여전히 만귀비의 보복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며, 독한 마음을 먹고 태감 장민(張敏)에게 갓 태어난 자신의 아들을 건네주며
"아이를 물에 빠뜨려 죽이는 게 낫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하지만 장민은 목숨을 걸고 갓난아이를 궁중의 음습한 밀실에 숨긴채 쌀가루와 엿당 등을 먹이며 살려냈다. 만귀비가 수시로 탐문했지만 다행히 발각되지 않았다. 폐후 오씨(呉氏)[1]도 만귀비에게 원한이 있었으므로 어린 주우탱에게 젖을 먹여 가며 키웠다. 주우탱은 6세가 될 때까지 유령인간으로 숨어 지내느라 배냇머리도 깎지 못했다.2.2. 험난한 황태자 시절
성화제의 차남이자 태자였던 주우극(朱祐極)이 성화 8년( 1472년)에 사망했다. 황위를 이을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성화제는 깊은 상심에 빠졌다. 성화 11년( 1475년) 어느 날 태감 장민이 성화제의 머리카락을 빗겨줄 때 성화제가 거울을 보며 아들이 없음을 한탄하자, 장민은 만귀비를 중심으로 한 음해하는 자들 때문에 부득이하게 숨긴 주우탱이란 아들이 있음을 알렸다. 성화제는 크게 기뻐하며 같은 해 11월, 6살 난 주우탱을 황태자로 책봉했다.[2] 이때 주우탱의 생모인 기씨는 어명에 따라 영수궁(永壽宮)으로 거처를 옮겨 복록을 누리는 듯했으나, 아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지 불과 몇 달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일설에는 만귀비에게 독살되었다고도 하고, 스스로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도 한다. 기씨가 죽은 뒤, 목숨을 걸고 주우탱을 지켰던 태감 장민도 금덩어리를 삼키고 자살했다. 기씨는 죽은 뒤 공각장희숙비(恭恪莊僖淑妃)라는 시호를 받았다.만귀비는 여전히 황태자 주우탱을 해칠 기회를 호시탐탐 노렸다. 만귀비의 음모로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태자를 구원한 사람은 성화제의 어머니인 효숙태후(孝肅太后) 주씨(周氏)였다. 주태후는 태자를 자신이 거주하는 인수궁(仁壽宮)으로 데리고 와서 기거하도록 했다. 이는 만귀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 만귀비가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고 간악할지라도, 황실의 최고 어른인 주태후를 능멸하고 태자를 해칠 수는 없었다. 이때부터 주우탱은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위에 후술된 내용은 민간 전설, 즉 야사의 내용이므로 정확한 확인이 필요하다. 주우탱이 태자가 된 이듬해인 1476년에 주우탱의 이복동생인 주우원[3]이 태어났고, 1478년에 주우원의 친동생인 주우륜이 태어났으며, 1479년에도 2명의 황자가 더 태어났기 때문이다. 존재가 드러난 직후라면 몰라도, 이 정도로 성화제의 자손이 번창한 상황이라면 만귀비가 주우탱을 해치기는 쉽지 않다.
주우탱은 황태자가 된 후 황제 수업에 충실했다. 성화 23년( 1487년) 봄에 만귀비가 병사하자, 성화제도 실의에 빠져 같은 해 8월에 붕어했다. 그리고 주우탱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명나라의 황제가 되었다. 황제로 즉위한 후 신하들이
"만귀비의 전횡을 징계해야 합니다"
라고 상소했으나, 홍치제는 이를 그냥 없던 일로 했다. 사실 아버지 성화제 때도 "만귀비를 징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으나, 만귀비를 너무 아꼈던 성화제 역시 이를 그냥 넘겨버렸다. 효성으로 이름난 홍치제였기에 아버지의 결정을 따른 것이라곤 해도, 자기를 핍박했던, 그것도 목숨까지 위협했던 여인을 단죄하지 않고 그냥 넘겼음을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4]또한 홍치제는 어머니 기씨를 효목자혜공각장희숭천승성황후(孝穆慈慧恭恪莊僖崇天承聖) 황후로 추시했다.
2.3. 황태자 교육을 받다
주우탱은 9세 때부터 정규 교육을 받았다. 태자에게 성군의 도를 전수하는 일은 대명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막중한 대사였다. 때문에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 태자 교육을 담당했다. 한림원 시강학사 정민정, 한림편수 유건 등이 주우탱에게 유가의 경전, 제자백가의 학설, 《 자치통감》, 《 대명률》 등 치국의 도를 논한 명저들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강의했다. 태어나자마자 5년 동안 유령인간처럼 살 수밖에 없었던 주우탱은, 황궁 안에서 음모와 모략이 판치는 가운데 겸손하고 근신하며 학업에 열중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정한 현실을 너무나 어린 나이에 깨달았기 때문에, 스승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따랐고, 스승들도 주우탱을 기특하게 여겨 아껴주었다.2.4. 즉위 이후의 선정: 홍치중흥
즉위 후에 이룩한 업적은 제법 볼 만하다. 홍치 원년( 1488년)에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연을 개설했다. 경연이란 원래 학식과 덕망이 높은 신하가 임금에게 유가의 경전과 역사서의 내용을 강론하기 위하여 개설한, 일종의 어전 강석이었다. 그런데 경연은 임금을 위한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임금과 신하가 국정 현안을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의견을 교환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이는 동아시아의 절대군주제 국가인 중국과 조선에서 임금이 독단적으로 국정을 다스리는 것을 신하들이 견제하는 장치였고, 신하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는 길도 되었다.[5] 그렇기에 홍치제는 경연에서 신하들의 의견을 듣고 여론을 수렴하는 방법으로 제국을 다스렸다.홍치제의 부친이었던 성화제는 불교의 열반 사상과 도교의 신선 방술에 미혹한 황제였다. 그로 인해 혼란에 빠졌던 국정을 수습하고자 홍치제는 선친이 남긴 적폐를 청산하고자 했다. 즉위 초부터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궁궐에서 행하는 불교와 도교의 각종 의식을 금지하고, 아울러 성화 연간에 승려와 도사들에게 하사한 칭호를 모두 철폐했다. 또 태감 양방(梁芳), 만귀비의 남동생 만희(萬喜), 내각 수보 만안(萬安) 등 성화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전횡을 부렸던 간신들을 처단했다. 당시 죄질이 가장 무거웠던 계효는 기시형을 당했고, 이자성은 옥사했으며, 부패한 관리 1,000명은 파면을 당하거나 귀양을 갔다. 그런데 홍치제가 성화 연간의 적폐를 일소하기 위하여 옥사를 일으킬 때, 가급적이면 잔혹한 형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형벌이 아닌 관용으로 백성들을 다스리고자 했던 황제였다. 홍치 13년( 1500년)에 《문형조례》(問刑條例)를 제정하고, 홍치 15년( 1502년)에는 《 대명회전》(大明會典)을 편찬하면서, 명나라의 헌법이나 다름없는 《 대명률》 가운데 잔혹한 형벌 조항들을 삭제한 것이 좋은 예이다.
명나라 같은 대국에서는 황제가 처리해야 하는 공문서나 상소문이 하루에도 수백 건씩 올라왔다. 일반적으로 역대 황제들은 중요한 문건만 친람하고 결제했을 뿐, 대부분의 문건은 환관들이 황제를 대신하여 처리하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황제가 방만하면 환관들이 얼마든지 성지를 조작하고 사실을 왜곡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홍치제는 환관의 국정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환관이 황제를 대신하여 비준하는 관례를 폐지했고, 공문서와 상소문은 황제에게 바로 전달하도록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올라온 문건을 일일이 검토한 뒤 조회에 참석하여 대신들과 상의했다.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의 방법으로 국정을 다스렸다.
홍치제는 진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간언이라면 즉시 받아들이는 현명한 군주였다. 홍치 연간의 명나라에 많은 충신들이 배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홍치제의 자질과 인품이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홍치 15년( 1502년) 《 대명회전》이 완성된 후 홍치제는 유건, 이동양, 사천 등의 조정 중신들에게 망의를 하사했다. 망의란 용처럼 생긴 이무기의 무늬가 그려진 관복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용은 임금을 상징하고 이무기는 용에 버금가는 동물이므로, 망의를 입은 신하는 황제 다음가는 존귀한 인물이란 뜻이었다. 신하로서는 무궁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명나라는 홍치제 때부터 조정 중신에게 망의를 하사하는 제도가 생겼다. 그가 얼마나 중신들을 아꼈는지 짐작할 수 있다.[6]
다만 홍치제가 유가의 이념에 충실한 문신을 신임했다고 해서 결코 무신을 박대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강직한 무신을 적극 옹호하고 우대해주었다. 외정적으로 봤을 때 당시 명나라는 비교적 오랫동안 큰 전란이 없었으므로 군기가 문란해지고 방비가 소홀했다. 결국 홍치제가 즉위한 직후에 몽골족이 명나라군의 수비가 허술한 틈을 타서 서북 지역의 변방을 자주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홍치 2년( 1489년) 병부상서(兵部尚書) 마문승(馬文升)이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을 엄격하게 검열하여, 부패하고 나약한 장수 30여 명을 파직시켰다. 그의 단호한 조치에 불만을 품은 간신들이 마문승을 여러 차례 음해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홍치제가 그의 숙군 정책을 지지하고 신변을 보호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건주여진과 몽골족과의 관계를 개선하여 명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갔다. 이런 주목할 만한 치적 덕에 역사상 그의 치세를
홍치중흥
(弘治中興)
이라 부르며 혼란에 빠졌던 명나라가 다시 부흥한 시기로 평가한다.(弘治中興)
명군이었던 홍치제에게는 제법 특이한 기록이 하나 있다.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기 마련이었던 여러 중국 황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황후 1명하고만 혼인했다. 비공식 후궁들은 여러 명 있었으나 정식 혼인 상대는 정실 황후인 효성경황후(孝成敬皇后) 장씨(張氏) 1명만 있었고, 황후와 금실이 매우 좋았다고 한다. 한 번은 부황 성화제의 국장 기간 동안에 어마감좌소감(御馬監左少監) 곽용(郭鏞)이 미녀들을 예비 비빈으로 선발해두었다가, 성화제의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그들 가운데 2명을 비빈으로 책봉하자고 홍치제에게 주청했다. 이에 한림원 시독(翰林院侍讀) 사천(謝遷)이
"3년상도 안 끝났는데 어찌 후궁을 들이겠느냐?"
며 이를 반대했는데, 그는 홍치제의 스승으로 그가 황태자였을 때부터 유가의 통치 이념과 예법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의했던 자였다.홍치제는 스승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랐다. 홍치제의 사후에 그의 묘호를 '효종'으로 정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효'를 국가의 이념으로 삼았을 정도로 중시했다. 홍치제는 그의 스승인 사천의 간언이 옳다고 여기며 비빈을 선발하는 일을 중지했다. 훗날 《효종실록》을 편찬한 초방은
"사천이 장황후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홍치제의 비빈 간택을 막았다."
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홍치제에게 비빈을 책봉하라는 상소가 여러 번 있었지만, 홍치제는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7]이렇듯 업적과 인간성에 딱히 흠잡을 만한 곳이 없고, 모두에게 신망받는 군주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고생을 많이 하고, 황제가 된 후에도 쉬지 않고 과로를 했기 때문인지 오래 살지는 못했다. 홍치 18년( 1505년) 감기를 앓다가 어의가 가져온 약을 마시고 코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결국 병상에서 재상들에게 "태자를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재위 기간은 18년, 향년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런데 문제는 그의 아들이 바로 정덕제였다는 점이다. 그야말로 호부견자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8]
어쨌든 홍치제 본인은 군주로서 모범을 보였고, 그의 치세 동안 경제적 호황과 잠잠한 변방이 함께 해서, 명나라의 태평기를 이끈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 뒤의 암울한 명나라의 황실사를 생각하면, 진정한 황제 구실을 제대로 한 마지막 명나라 황제라 해도 과언이 아닌 군주이다. 말 그대로 한족 왕조의 마지막 성군이었다.[9]
3. 《명사》의 논찬
명나라는 천하를 차지하여 16대를 전했는데, 태조(
홍무제)와 성조(
영락제) 이외에 칭송할 만한 이는 인종(
홍희제), 선종(
선덕제), 효종(
홍치제) 뿐이었다. 인종과 효종의 재위기에는 처음으로 나라의 기세가 오르고 기강이 세워지며, 순박함이 아직 스며들지 않았다. 성화 연간 이래에 이르러 태평무사로 칭송되었으니, 편안하면 태만에 빠지기 쉽고, 재물이 풍성하면 점점 사치에 빠진다. 효종은 홀로 능히 공경하고 검약하며 일정한 제한을 두고, 정무를 근면하게 처리하며 백성들을 사랑하고, 안녕을 지키며 번창하는 도리에 신중하고 삼가며, 조열을 평온하게 부려 백성들이 안락하고 재물이 풍족해졌다. 《
주역》에 이르기를 “비탈지지 않은 평지는 없고, 돌아오지 않는 떠남은 없으니 고난이 오래되더라도 허물이 없다.”라고 했다. 이런 도리를 아는 이는 오직 효종 뿐이었다.
4. 가족
태강공주는 홍치 11년에 사망했으며, 시집가지 않았다.영복공주는 가정 2년에 우경화와 결혼했다. 우경화는 곤산 출신으로, 가정제의 명령을 받아 서원의 관리로 일했으나, 현학의 이치를 잘 알지 못하여 사직을 청했다. 이에 가정제가 기뻐하지 않았다. 당시 청복전에서 제사를 지낼 일이 있어, 관리들과 함께 제사에 참석했으나, 우경화는 제사가 끝나기 전에 나왔다. 이후 여러 관리들에게 상을 내렸을 때, 우경화도 포함되었다. 우경화는 상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상소하여
"공이 없이 상을 받으면 죄가 더해질까 두렵습니다. 상을 사양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훗날 죽어서라도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다. 이에 가정제는 매우 화가 나서, 신하로서 예의를 잃었다고 하여 직위를 박탈하고 본래의 고향으로 돌려보냈다. 당시 영복공주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가정 35년에 가정제의 생일을 축하하러 왔을 때, 우경화는 "신은 5대 조상부터 금의위에 적을 두고, 북방에 거주해 왔습니다. 이제 죄를 입어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어 주인에 대한 충정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고 나서 사적으로 공주의 묘를 찾아갔더니, 봉분에 풀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신은 죽을 때조차 고향을 바라보는 여우처럼, 공주에게 몸을 의탁했으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지 못하여 마음이 찢어집니다. 신의 죄가 무겁기에 감히 은혜를 바라지 않으나, 황제께서 공주를 불쌍히 여기시어 본래의 고향으로 돌아가 함께 지내게 해 주신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라고 했다. 이에 가정제가 가엾게 여겨 허락했다. 융경 2년에 복직했으며, 사후에 소보로 추증되고, 시호를 '영간'이라 했다.영순공주는 사조와 결혼했다.
5. 기타
효종 홍치제의 치세는 조선의 성종 말년과 연산군 전반에 걸친다. 또한 홍치제 즉위 초에 제주도에서 태풍에 휘말려 표류했던 최부가 《 표해록》을 남겨 홍치중흥 당시 중국의 사회상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 사료로 활용된다.홍치제 이전의 황제들의 어진과 그 이후의 어진을 비교하면 같은 황족이 맞나? 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실제로 이전의 성조 영락제, 선종 선덕제, 영종 정통제, 헌종 성화제는 물론, 성격이 유약했다는 인종 홍희제도 거대한 체구에 풍성한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황제들이었지만[10], 효종 홍치제 이후에는 황제들의 얼굴이 마른 체형에 수염도 풍성하지 못하다. 그나마 신종 만력제가 풍채는 비슷하지만 수염이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홍치제는 성화제의 친자식이 아니라 폐후 오씨와 태감 장민이 남의 아이를 데리고 와서 기씨가 낳은 자식이라고 성화제를 속인 것이라는 음모론이 있을 정도이다. 다만 신빙성이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외모는 어머니에게서도 물려받기 때문에 홍치제가 선대 황제들과 다르게 생긴 것이 그가 주씨 황족이 아니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세종 가정제와 그의 뒤를 이은 황제들은 홍치제의 후손이 아님에도[11] 홍치제 이전의 황제들과 그리 외모가 닮지 않은 것을 보면, 그냥 세대가 여러 차례 바뀜에 따라 선대 황제들의 유전자가 옅어지면서 생긴 현상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6세 때까지 만귀비의 눈을 피해 숨겨 기르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영양실조 상태였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있다.
공교롭게도 조선도 성종까지는 태조 이성계로부터 전해진 유전자가 발현된 듯하지만 연산군 때부터 다른 모습이 나온 것 같다. 태조 이성계는 남아 있는 어진을 통해서 얼굴과 체형을 알 수 있다. 태조의 3남 익안대군의 초상, 손자 효령대군의 초상, 증손자 수양대군(세조)의 초상을 보면 얼굴이 네모형이고 기골이 장대했다.
성종은 세종대왕을 닮았다는 평이 있었고, 폐비 윤씨가 "전하는 어찌 그리 키가 크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을 보아, 태조 이성계의 무장 체격을 물려 받았던 모양이다. 연산군의 외모에 대해서는 인조 대의 대신 이덕형[12]이 임진왜란 당시 피난하던 중 97세 노인을 만났는데, 그때 노인이 연산군 시절에 향군으로 한양에 가서 연산군을 목격한 적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노인의 기억으로 "연산군은 살결이 희고 얼굴과 허리가 가늘었으며,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고 한다.[13]
홍치제의 치세 초기에 원말명초를 휩쓴 고려양의 복식을 금지시켜서, 이전의 한족의 한푸로 돌아갔다. 원•명 시기의 한류, 고려양 명나라 관리였던 육용(陸容 1436~1494)이 저술한 《숙원잡기》(菽園雜記) 권10에 이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馬尾裙始於朝鮮國, 流入京師, 京師人買服之, 未有能織者. 初服者, 惟富商, 貴公子, 歌妓而已, 以後武臣多服之, 京師始有織賣者. 於是無貴無賤, 服者日盛. 至成化末年, 朝官多服之者矣. 大抵服者, 下體虛奓, 取觀美耳. 閣老萬公安, 冬夏不脫. 宗伯周公洪謨, 重服二腰, 年幼侯伯駙馬, 至有以弓弦貫其齊者. 大臣不服者, 惟黎吏侍淳一人而已. 此服妖也, 弘治初始有禁例.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어 수도 사람들이 이를 사고 입었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있지 않았다. 처음에 입은 자들은 부유한 상인, 귀족, 기생 뿐이었으나 이후 무신(武臣)들 대다수가 이를 입었으니, 수도에서 비로소 이를 짜서 파는 자가 생겼다. 이에 귀천을 떠나 입는 자가 날로 성해졌다. 성화(成化 1465~1487)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대체로 옷은 하체가 비어있고 펴져있으니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각로(閣老,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뭇 공(公)들은 이를 편안히 여겨 겨울과 여름에도 벗지 않는다. 종백(宗伯, 예조판서) 주홍모(周洪謨 1420~1492)는 두 옷으로 겹쳐 입었고, 나이 어린 후(候), 백(伯), 부마(駙馬)들은 활시위를 옷자락에 꿰놓은 자가 있을 정도다. 대신들 중에 안 입는 자들은 여리(黎吏)와 시순(侍淳, 종)들뿐이다. 이 옷은 요사스러워, 홍치(弘治 1488~1505) 초기에 비로소 이를 금지하는 법례가 생겨났다.
《숙원잡기》(菽園雜記) 卷10
마미군(馬尾裙)은 조선국에서 비롯되어 수도에 유입되어 수도 사람들이 이를 사고 입었으나, 능히 이를 짤 수 있는 직공이 있지 않았다. 처음에 입은 자들은 부유한 상인, 귀족, 기생 뿐이었으나 이후 무신(武臣)들 대다수가 이를 입었으니, 수도에서 비로소 이를 짜서 파는 자가 생겼다. 이에 귀천을 떠나 입는 자가 날로 성해졌다. 성화(成化 1465~1487)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이를 입었다. 대체로 옷은 하체가 비어있고 펴져있으니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각로(閣老, 조정의 원로대신)들과 뭇 공(公)들은 이를 편안히 여겨 겨울과 여름에도 벗지 않는다. 종백(宗伯, 예조판서) 주홍모(周洪謨 1420~1492)는 두 옷으로 겹쳐 입었고, 나이 어린 후(候), 백(伯), 부마(駙馬)들은 활시위를 옷자락에 꿰놓은 자가 있을 정도다. 대신들 중에 안 입는 자들은 여리(黎吏)와 시순(侍淳, 종)들뿐이다. 이 옷은 요사스러워, 홍치(弘治 1488~1505) 초기에 비로소 이를 금지하는 법례가 생겨났다.
《숙원잡기》(菽園雜記) 卷10
홍치 13년(1500년)에는 전국옥새가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예부상서 부한은 이를 위조된 물건으로 봤고, 나아가 전국옥새의 신빙성 그 자체와 그 정당성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부한은 이 사안을 조용히 덮을 것을 주장했고, 홍치제가 이를 따라서 옥새를 찾은 자에게 적당히 상금을 내리는 것으로 끝냈다.[14]
6. 대중매체에서
2016년 드라마 <육선문>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후반에 모후가 성화제를 독살하자 황위에 앉는다. 황권의 강화를 위해 모후를 연금하고 동창의 수장을 독살하며, 스승이자 홍치제 지지 세력의 수장인 수보 대신을 독살하고 형부상서도 독살했다.2018년 드라마 <양릉전>에 조연으로 등장한다. 극초반부터 각혈을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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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농 · 진유년 · 손비양 · 채국진 · 양시교 225권 「장한등전(張瀚等傳)」 226권 「해서등전(海瑞等傳)」 장한 · 왕국광 · 양몽룡 · 양외· 이재(李戴) · 조환 · 정계지 해서 · 구순 · 여곤 · 곽정역 227권 「방상붕등전(龐尚鵬等傳)」 방상붕 · 송의망 · 장악 · 이재(李材) · 육수덕 · 소름 · 가삼근 · 이이 · 주홍모 · 소언 · 손유성 · 사걸 · 곽유현 · 만상춘 · 종화민 · 오달가 228권 「위학증등전(魏學曾等傳)」 229권 「유대등전(劉臺等傳)」 위학증 · 이화룡 유대 · 부응정 · 왕용급 · 오중행 · 조용현 · 애목 · 심사효 230권 「채시정등전(蔡時鼎等傳)」 231권 「고헌성등전(顧憲成等傳)」 채시정 · 만국흠 · 요신 · 탕현조 · 녹중립 · 양순 · 강사창 · 마맹정 · 왕약림 고헌성 · 고윤성 · 전일본 · 우공겸 · 사맹린 · 설부교 · 안희범 · 유원진 · 엽무재 232권 「위윤정등전(魏允貞等傳)」 위윤정 · 왕국 · 여무형 · 이삼재 233권 「강응린등전(姜應麟等傳)」 강응린 · 진등운 · 나대굉 · 이헌가 · 맹양호 · 주유경 · 왕여견 · 왕학증 · 장정관 · 번옥형 · 사정찬 · 양천민 · 하선 234권 「노홍춘등전(盧洪春等傳)」 235권 「왕여훈등전(王汝訓等傳)」 노홍춘 · 이무회 · 이기(李沂) · 낙우인 · 마경륜 · 유강 · 대사형 · 조학정 · 옹헌상 · 서대상 왕여훈 · 여무학 · 장양몽 · 맹일맥 · 하사진 · 왕덕완 · 장윤의 · 추유연 236권 「이식등전(李植等傳)」 237권 「부호례등전(傅好禮等傳)」 이식 · 강동지 · 탕조경 · 김사형 · 왕원한 · 손진기 · 정원천 · 이박 · 하가우 부호례 · 강지례 · 포견첩 · 전대익 · 풍응경 · 오종요 · 오보수 · 화옥 238권 「이성량등전(李成梁等傳)」 239권 「장신등전(張臣等傳)」 이성량 · 마귀 장신 · 동일원 · 두동 · 소여훈 · 달운 · 관충병 · 시국주 · 진백우 240권 「엽향고등전(葉向高等傳)」 241권 「주가모등전(周嘉謨等傳)」 엽향고 · 유일경 · 한광 · 주국조 · 하종언 · 손여유 주가모 · 장문달 · 왕응교 · 왕기(王紀) · 손위 · 종우정 · 진도형 242권 「진방첨등전(陳邦瞻等傳)」 진방첨 · 필강무 · 소근고 · 백유 · 정소 · 적봉충 · 홍문형 · 진백우 · 동응거 · 임재 · 주오필 · 장광전 243권 「조남성등전(趙南星等傳)」 244권 「양련등전(楊漣等傳)」 조남성 · 추원표 · 손신행 · 고반룡 · 풍종오 양련 · 좌광두 · 위대중 · 주조서 · 원화중 · 고대장 · 왕지채 245권 「주기원등전(周起元等傳)」 246권 「만조천등전(滿朝薦等傳)」 주기원 · 요창기 · 주순창 · 주종건 · 황존소 · 이응승 · 만경 만조천 · 강병담 · 후진양 · 왕윤성 247권 「유정등전(劉綎等傳)」 248권 「매지환등전(梅之煥等傳)」 유정 · 이응상 · 진린 · 등자룡 · 마공영 매지환 · 유책 · 이약성 · 경여기 · 안계조 · 이계정 · 방진유 · 서종치 249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0권 「손승종전(孫承宗傳)」 주섭원 · 이운 · 왕삼선 · 채복일 손승종 251권 「이표등전(李標等傳)」 252권 「양사창등전(楊嗣昌等傳)」 이표 · 유홍훈 · 전용석 · 성기명 · 하여총 · 서광계 · 문진맹 · 장덕경 · 방악공 양사창 · 오성(吳甡) 253권 「왕응웅등전(王應熊等傳)」 254권 「교윤승등전(喬允升等傳)」 왕응웅 · 장지발 · 설국관 · 정국상 · 진연 · 위조덕 교윤승 · 조우변 · 손거상 · 조광 · 진우정 · 정삼준 · 이일선 · 장위 255권 「유종주등전(劉宗周等傳)」 256권 「최경영등전(崔景榮等傳)」 유종주 · 황도주 최경영 · 황극찬 · 필자엄 · 이장경 · 유지봉 257권 「장학명등전(張鶴鳴等傳)」 장학명 · 동한유 · 조언 · 왕흡 · 양정동 · 웅명우 · 장봉익 · 진신갑 · 풍원표 258권 「허예경등전(許譽卿等傳)」 허예경 · 화윤성 · 위정윤 · 모우건 · 오집어 · 장정신 · 황소걸 · 부조우 · 강채 · 웅개원 · 첨이선 · 탕개원 · 성용 · 진룡정 259권 「양호등전(楊鎬等傳)」 양호 · 원응태 · 웅정필 · 원숭환 · 조광변 260권 「양학등전(楊鶴等傳)」 양학 · 진기유 · 웅문찬 · 연국사 · 정계예 · 정숭검 · 소첩춘 · 여응계 · 고두추 · 장임학 261권 「노상승등전(盧象昇等傳)」 262권 「부종룡전(傅宗龍等傳)」 노상승 · 유지륜 · 구민앙 부종룡 · 왕교년 · 양문악 · 손전정 263권 「송일학등전(宋一鶴等傳)」 송일학 · 풍사공 · 임일서 · 채무덕 · 위경원 · 주지풍 · 진사기 · 용문광 · 유가인 · 유지발 264권 「하봉성등전(賀逢聖等傳)」 하봉성 · 남거익 · 주사박 · 여유기 · 왕가정 · 초원부 · 이몽진 · 송사양 · 마희 · 왕도순 · 전시진 265권 「범경문등전(范景文等傳)」 범경문 · 예원로 · 이방화 · 왕가언 · 맹조상 · 시방요 · 능의거 266권 「마세기등전(馬世奇等傳)」 마세기 · 오인징 · 주봉상 · 유이순 · 왕위(汪偉) · 오감래 · 왕장 · 진량모 · 진순덕 · 신가윤 · 성덕 · 허직 · 김현 267권 「마종빙등전(馬從聘等傳)」 268권 「조문조등전(曹文詔等傳)」 마종빙 · 장백경 · 송공 · 범숙태 · 고명형 · 서견 · 녹선계 조문조 · 주우길 · 황득공 269권 「애만년등전(艾萬年等傳)」 애만년 · 이비 · 양구주 · 진우왕 · 후량계 · 장령 · 맹여호 · 호대위 · 손응원 · 강명무 · 우세위 · 후세록 · 유국능 270권 「마세룡등전(馬世龍等傳)」 271권 「하세현등전(賀世賢等傳)」 마세룡 · 하호신 · 심유용 · 장가대 · 노흠 · 진양옥 · 용재전 하세현 · 동중규 · 나일관 · 만계 · 조솔교 · 관유현 · 하가강 · 황룡 · 김일관 272권 「김국봉전(金國鳳等傳)」 273권 「좌양옥등전(左良玉等傳)」 김국봉 · 조변교 · 유조기 좌양옥 · 고걸 · 조관 274권 「사가법등전(史可法等傳)」 275권 「장신언등전(張愼言等傳)」 사가법 · 고홍도 · 강왈광 장신언 · 서석기 · 해학룡 · 고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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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원전(文苑傳)」 양유정 · 호한 · 소백형 · 왕면 · 대량 · 위소 · 장이녕 · 조훈 · 서일기 · 조총겸 · 도종의 · 원개 · 고계 · 왕행 · 손분 · 왕몽 · 임홍 · 왕불 · 심도 · 섭대년 · 유부 · 장필 · 장태 · 정민정 · 나기 · 저권 · 이몽양 · 하경명 · 서정경 · 변공 · 고린 · 정선부 · 육심 · 왕정진 · 이렴 · 문징명 · 황좌 · 가유기 · 왕신중 · 고숙사 · 진속 · 전여성 · 황보효 · 모곤 · 사진 · 이반룡 · 왕세정 · 귀유광 · 이유정 · 서위 · 도륭 · 왕치등 · 구구사 · 당시승 · 초횡 · 황휘 · 진인석 · 동기창 · 원굉도 · 왕유검 · 조학전 · 왕지견 · 애남영 · 장부 289·290·291·292·293·294·295권 「충의전(忠義傳)」 화운 · 왕개 · 손염 · 모로 · 왕강 · 왕의(王禕) · 웅정 · 역소종 · 금팽 · 황보빈 · 장영(張瑛) · 왕정 · 만침 · 주헌 · 양충 · 오경 · 곽은 · 손수 · 허규 · 황굉 · 송이방 · 왕면 · 진문시 · 왕부 · 전순 · 주부 · 손당 · 두괴 · 황천 · 왕덕 · 왕일중 · 소몽양 · 장진덕 · 동진륜 · 공만록 · 관양상 · 서조강 · 희문윤 · 주만년 · 장요(張瑤) · 하천구 · 반종안 · 장전 · 하정괴 · 고방좌 · 최유수 · 정국창 · 당환순 · 이헌명 · 장춘 · 염생두 · 왕조곤 · 손사미 · 교약문 · 장병문 · 언윤소 · 길공가 · 형국새 · 장진수 · 등번석 · 장혼방 · 장윤등 · 장광규 · 이중정 · 방국유 · 하승광 · 방유 · 윤몽오 · 노겸 · 공원상 · 왕신 · 사기언 · 양지인 · 왕국훈 · 여홍업 · 장소등 · 왕도(王燾) · 장가징 · 서상경 · 완지전 · 학경춘 · 장극검 · 서세순 · 무대열 · 전조징 · 성이항 · 안일유 · 반홍 · 진예포 · 유진지 · 이승운 · 관영걸 · 장유세 · 왕세수 · 허영희 · 이정좌 · 노세임 · 유인 · 하섭 · 조흥기 · 하통춘 · 진미 · 심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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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장 · 양옥영 · 우봉랑 · 예미옥 · 고형와 · 항숙미 304·305권 「환관전(宦官傳)」 정화 · 김영 · 왕진(王振) · 조길상 · 회은 · 왕직(汪直) · 양방 · 하정 · 이광 · 장종 · 유근 · 장영(張永) · 곡대용 · 이방 · 풍보 · 장경 · 진증 · 진구 · 왕안 · 위충현 · 왕체건 · 최문승 · 장이헌 · 고기잠 · 왕승은 · 방정화 306권 「엄관전(閹黨傳)」 초방 · 장채 · 고병겸 · 최정수 · 유지선 · 조흠정 · 왕소휘 · 곽유화 · 염명태 · 가계춘 · 전이경 307권 「영행전(佞倖傳)」 기강 · 문달 · 이매성 · 계요 · 강빈 · 육병 · 소원절 · 도중문 · 단조용 · 공가패 · 호대순 · 전옥 · 왕금 · 고가학 · 성단명 · 주융희 308권 「간신전(奸臣傳)」 309권 「유적전(流賊傳)」 호유용 · 진녕 · 진영 · 엄숭 · 주연유 · 온체인 · 마사영 이자성 · 장헌충 310권 「호광토사전(湖廣土司傳)」 311·312권 「사천토사전(四川土司傳)」 313·314·315권 「운남토사전(雲南土司傳)」 316권 「귀주토사전(貴州土司傳)」 317·318·319권 「광서토사전(廣西土司傳)」 320·321·322·323·324·325·326·327·328권 「외국전(外國傳)」 조선(← 고려) · 안남( 대우 → 후여조 → 막조 → 후여조) · 일본 · 유구( 삼산 → 유구) · 여송 · 합묘리 · 미락거 · 사요 · 계롱 · 파라 · 마엽옹 · 고마랄랑 · 풍가시란 · 문랑마신 · 점성 · 진랍 · 섬라 · 과왜 · 삼불제 · 발니 · 만랄가 · 소문답랄( 팔석 → 아제) · 수문달나 · 소록 · 서양쇄리 · 람방 · 담파 · 백화 · 팽형 · 나고아 · 여벌 · 남발리 · 아노 · 유불 · 정기의 · 파나서 · 불랑기 · 화란 · 고리 · 가지 · 소갈란 · 대갈란 · 석란산 · 방갈랄 · 소납박아 · 좌법인 · 목골도속 · 불랄왜 · 죽보 · 아단 · 알살 · 마림 · 홀로모사 · 유산 · 비날 · 남무리 · 가이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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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464년에
성화제의 황후가 되었으나, 만귀비의 오만 방자함에 분노하여 뺨을 때렸다가 역으로 폐후가 되었다.
[2]
다만
만귀비의 악행을 알고도 묵인했다.
[3]
세종
가정제의 아버지.
[4]
정작 만귀비는 정신을 못 차린채, 죽는 날까지 '태자를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라고 가슴앓이하며 살았다.
[5]
예외적으로 조선의 명군들이었던
세종과
정조는 워낙 천재여서, 학식이 대단한 왕들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에게 배우는 자리가 아닌 본인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경연을 활용했다. 이렇게 경연에서 본인이 직접 신하들을 가르치던 정조가 경연을 폐지하고 만든 제도가 '초계문신제'이다.
[6]
홍치제의 즉위 초 분위기를 알 수 있는 최부의 《
표해록》을 보면, 홍치제는 지방의 관리들을 죄다 감찰해서 문제가 있으면 모두 파면시켰다. 홍치제는 이들 전직 관리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관로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는데, 이는 '너네 다시는 관직 생활할 생각 마라.' 하는 의미였다고 한다.
[7]
어쩌면 황후를 등한시하며, 후궁인 만귀비를 총애하느라 내명부를 깽판 친 아버지 성화제를
반면교사 삼아서 황후에게만 충실했을 수도 있다.
[8]
다만 그
정덕제도 중국 내에서
가정제와
만력제보다는 훨씬 좋은 평가를 받는데, 사실 저 둘은 재위 기간도 길었던만큼
정덕제보다 국가에 끼친 해악이 훨씬 컸다.
[9]
그러나 무종
정덕제도 하는 짓이 워낙 돌+아이스러워서 그렇지, 각종 향락을 즐기면서도 자기 할 일은 다했고, 심지어 그러면서도 정무를 잘 처리했던 유능한 인물이라서, 점점 주류
역사학계에서 그를
명나라의 숨겨진 명군으로 평가하는 시각이 날로 늘고 있다. 어쩌면
한족 왕조 최후의 명군은 홍치제가 아니라, 정덕제일 수도 있다는 얘기이다. 자세한 얘기는
정덕제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
[10]
그나마 대종
경태제는 거대한 체구가 이전의 황제들과 닮았지만 수염은 관우 수염이 돋보이는 만큼 풍성하지는 않았다.
[11]
가정제는 홍치제의 이복동생의 아들이자, 성화제의 손자였다.
[12]
오성과 한음의 주인공
이덕형과는 동명이인이다.
[13]
물론 연산군 같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후대의 조선 왕들도 태조 이성계로부터 전해진 유전자가 발현된 듯한 체질이었다는 기록이 많고, 조선후기로 가도
효종,
정조,
철종 같은 태조 이성계와 비슷한 체질을 가진 왕들이 종종 등장했다.
[14]
《명실록》 1500년 7월 24일 3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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