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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28 11:01:10

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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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 5대 황제
太宗 高皇帝 | 태종 고황제
<colbgcolor=#483D8B> 묘호 태종(太宗)
시호 고황제(高皇帝)
연호 태초(太初, 386년 ~ 394년)
성씨 부(苻)
등(登)
문고(文高)
생몰 기간 343년 ~ 394년
재위 기간 386년 ~ 394년

1. 개요2. 생애3.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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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오호십육국시대의 16국 중 하나인 전진의 제5대 황제로 묘호는 태종(太宗), 시호는 고황제(高皇帝)였으며 자는 문고(文高)였다.

전진의 황족인 태위 부창의 아들로, 제1대 고조 경명제 부건이나 제3대 세조 선소제 부견의 직계 자손은 아니었다. 그래서 혈통만 놓고 보면 제위와 거리가 멀었지만 제4대 애평제 부비가 동진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고 그 아들들은 나이가 너무 어려 난세에 적합하지 않자 능력껏 잔존세력을 수습한 뒤 제위에 올랐다.

2. 생애

부등은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웅장한 기운이 있었지만 약간 사나운 성격 탓에 부견으로부터 총애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부등이 장성한 뒤 자신의 결함을 알고, 스스로 고치기 위해 노력하자 이를 기특하게 여긴 부견은 그를 양무장군, 장안령으로 삼았다.

부견이 5호 16국시대의 전반기와 후반기를 가르고, 전진의 쇠락을 결정지은 역사적인 비수대전에서 동진군에게 패망한 이후 전진의 광활한 영역이 모용선비족과 강족의 봉기로 큰 혼란에 빠지자, 부등은 수도 장안을 빠져나와 부한(枹罕)에 주둔해있었던 하주자사 모흥에게로 도망쳤다.[1] 모흥의 수하로 들어간 부등은 기발한 계책과 뛰어난 분석력으로 모흥을 감탄시켰으나, 모흥이 오히려 그를 경계하는 바람에 중용받지 못했다.

386년 4월, 모흥에게 불만을 품은 저족 장수들은 위평을 중심으로 하여 모흥을 살해한 뒤, 진양에 사자를 보내 상황을 설명하고 명령을 내려주길 청했다. 당시 전진의 황제였던 부비는 일을 헤아리고 위평을 하주자사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사자가 가는 도중 요장의 후진군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6월이 되어도 진양에서 소식이 없자 장수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면서 서로 누구를 우두머리로 할 지 논의했다. 저족 제장들은 모흥을 죽일 때 앞장섰던 위평의 나이가 많은 것을 우려하던 중, 장수 담청(啖靑)이 용맹한데다가 인망까지 있는 부등을 우두머리로 강력히 추천하자 여러 제장들의 지지는 모두 부등에게로 쏠렸다. 부등은 부한에 있었던 저족들의 추대를 받아 스스로 정서대장군, 도독농우제군사, 옹하이주목(雍河二州牧), 악양공을 자칭한 뒤, 50,000명의 저족 병력을 통솔해 후진의 남안(南安)을 쳐서 빼앗았다. 이후 진양에 다시 사자를 보내 승전보를 전하고 명령을 내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 부비는 부등이 자칭했던 것을 모두 인정해줌과 동시에 악양공에서 남안왕으로 작위를 높이고, 계속 후진의 요장을 칠 것을 명령했다.

386년 9월, 진주자사 왕통이 후진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항복하면서 전진은 진주(秦州)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다. 10월, 부등은 진주를 탈환하기 위해 남안에서 출병하여 상규(上邽)를 공격했다. 후진의 진주자사 요석덕이 부등과 싸웠지만 전황이 불리하게 흘러가자, 요장은 안정에서 나와 직접 군을 동원해 상규를 구원하러 갔다. 부등은 잠시 포위를 풀고, 상규 서쪽에 위치한 호노산(胡奴山)에서 요장의 후진 군대를 맞아 그 군대를 궤멸시키고 후진군의 수급 20,000여 개를 얻었다.(호노산 전투) 호노산에서 직접 전투를 지휘하던 요장은 담청이 쏜 활에 맞아 중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하 장수들의 활약으로 가까스로 패잔병을 수습하여 상규성에 들어갈 수 있었다. 상규에 도착한 요장은 상처가 심해 군을 더이상 통솔할 수 없었으므로 요석덕에게 지휘를 맡겼다. 요석덕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상규는 함락 직전까지 몰렸으나 얼마 안가 황제 부비가 동진의 낙양을 무리하게 공격하다가 전사하는 사건이 터졌다. 결국 부등은 전진의 후계 문제 처리를 위해 남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상규 전투)

상서 구유가 애평제 부비의 두 아들인 발해왕 부의와 제북왕 부창을 모시고 남안에 도착했다. 부비의 장례를 마친 부등은 부의를 제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수와 대신들은 난세이고, 부의의 나이가 어리다며 부등을 제5대 황제로 추대했다. 부등은 몇 차례 거절하다가 386년 11월에 즉위한 후 발해왕 부의를 황태제로 삼고, 전사한 선제 부비를 '애평황제'로 추존했다. 부등은 제위에 오르자마자 제3대 황제 부견의 신주를 모셨고 또, 부견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후진 정벌을 선언했다. 모든 병사들에게는 그들의 창과 갑옷에 (死)와 (休)자를 새겨 목숨이 붙어있는 한 복수에 매진하고, 죽은 뒤에나 쉬겠다는 각오를 다지도록 했다. 부등 휘하의 군대는 모두 저족 최고의 정예병이었고, 항상 방원진으로 싸우며 적군의 수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니, 부등은 후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장안 인근까지 뚫고 나갔다.

386년 12월, 부등의 전진군이 신평(新平)에 도착하자 본래 전진의 장수였던 서숭과 호공이 자신들의 무리를 이끌고 합류했다. 부등은 서숭을 옹주자사, 호공은 경조윤에 임명하고 그곳에서 선제 부견을 천자의 예로 다시 장례를 치렀다. 부등이 승승장구하자 행성(杏城)에서 자신만의 세력을 이끌고 할거하던 황족인 동해왕 부찬이 귀순해왔다. 부등은 그를 노왕(魯王)에 봉하고, 부찬의 동생인 부사노를 삭방공(朔方公)에 봉했다. 부찬은 그동안 자신이 할거하며 길러온 군사력으로 요석덕의 후진군을 격파하고, 후진에게 빼앗긴 진주를 공격해 탈환하는 등 전진군의 기세를 더욱 드높였다.

진주를 되찾은 후 부찬은 동생 부사노와 함께 장안 공략을 의논하다가 사소한 존칭 문제로 시비가 붙더니 이내 동생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부사노는 내친 김에 부찬의 세력을 흡수하려고 시도했지만 원래 부찬을 따르던 빙익태수 난독을 비롯한 부하 장수들은 부사노를 거부하고 모두 후진에 항복해버렸다. 부사노는 어떻게든 부찬의 세력을 회유하려 노력하던 중 내분을 눈치챈 요장이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치자 패배하고 도망쳤다. 부찬이 되찾았던 진주 역시 부찬이 죽고 나서 다시 후진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관중 방면에서 핵심적인 전력이었던 부찬의 세력이 어이없이 와해되어 버리자 장안성 공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388년, 저족의 전진과 강족의 후진은 1년 가까이 장안 인근에서 크고 작은 전투를 벌이며 승패를 거듭하니 서로 승부가 나질 않았다. 10월이 되고 겨울이 가까워지자, 요장과 부등은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본거지로 돌아가 오랜 전쟁 끝에 지친 병사들을 쉬게 하고 군량을 거두었다. 그해 황태제 부의가 병사해 부등은 그에게 '헌애황태제'(獻哀皇太弟)라는 시호를 내리고, 자신의 아들 부숭을 황태자로 삼았다.

389년 2월, 부등은 대계(大界)에 군사 10,000명을 남겨 황후 모씨(毛氏)에게 치중을 맡긴 뒤[2], 직접 기병 10,000여 명을 이끌고 안정을 쳐 강족인 밀조보(密造保) 등을 격파했다.(안정 전투) 요장은 안정에서 부등과 맞서 싸웠으나 계속 패배하자 중군장군 요숭과 오충으로 하여금 대계를 기습하도록 했다. 하지만 부등이 군사를 나누어 기습하러 가던 후진의 군대를 안구(安丘)에서 전멸시키고,(안구 전투) 안정군을 계속 압박했다. 다급해진 요장은 상서령 요민에게 안정을 지키게 하고, 이번엔 자신이 직접 30,0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대계를 야습했다.

안구에서 이미 한 차례 후진군의 기습 공격을 막아낸 부등은 서둘러 진군하다가 경계를 늦추는 실책을 저질렀고, 요장은 부등의 눈을 피해 성공적으로 대계에 이를 수 있었다. 대계를 지키던 황후 모씨는 10,000명의 군사로 요장의 후진군과 격돌해 수많은 적병을 사살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인해 결국 후진군에게 사로잡혔다. 모씨의 아들인 남안왕 부변을 비롯한 여러 군신들이 황후를 구하기 위해 적진에 뛰어들었지만 끝내 구하지 못한 채 장렬히 전사했고, 대계를 지키던 전진군은 그대로 궤멸당하고 말았다.(대계 전투) 요장은 잡혀온 모씨의 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 그녀를 자신의 황후로 삼기 위해 여러번 설득해보았으나[3], 돌아오는 것은 모씨의 욕설뿐이었다. 요장이 그녀를 굴복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음에도 거듭 망설이자, 요장의 장수들이 나서서 그녀를 처형해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요장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처형했다.

후진군은 전진군의 치중을 모조리 불태우고 백성 50,000명을 노략질했다. 기세등등해진 후진군의 장수들은 이대로 남안까지 밀어버리자며 요장을 부추겼지만, 후진군 또한 피해가 적지 않았기에 요장은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여겨 후퇴했다. 부등 또한 후방에 치중이 모두 불 탄 상태로는 보급로를 유지할 수 없어 다시 신평으로 돌아갔다.

390년, 저족 장수 강금퇴(強金槌)가 전진을 배반하고 후진에 항복했다. 뒤이어 강족 뇌악지(雷惡地)도 세력을 이끌고 후진으로 귀순하는가 하면, 전진의 표기장군 몰혁간(沒弈干)이 배반하고 후진으로 도망갔다.

392년, 요장이 병에 걸렸다는 첩보가 도달하자 부등은 뛸 듯이 기뻐하며 즉시 안정으로 출진했다. 부등은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와 병사들을 독려해가며 분투했지만 요장은 장수 요희융에게 군사를 주어 전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았다. 그해 12월, 부등의 철천지 원수인 요장이 병사하고 요흥(고조 문환제)이 그 뒤를 이었다. 요흥이 요장의 붕어 소식을 숨겼음에도, 첩보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부등은
"요흥은 애송이니, 내 몽둥이를 꺾어 볼기를 치겠다."
라며 매우 기뻐했다.

394년 1월, 부등은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한 모든 군사들을 긁어모아 후진을 공격했다. 후진의 요노(姚奴)와 백포(帛蒲)를 무찌르는 등 파죽지세로 나아가며 장안 인근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다. 부등은 위수 북쪽에 위치한 폐교(廢橋)로 향하던 중 후진의 장수 요상에 의해 마외보(馬嵬堡)에서 진격이 막혔다. 이후 요흥이 윤위를 보내 전진군보다 먼저 폐교를 점거한 뒤 위수의 물줄기를 끊게 하자 하루아침에 마실 물이 말라버린 전진군은 갈증으로 죽어나갔다. 윤위와 요상이 이때를 노려 전진군을 습격하니 부등은 패배하여 군사를 모두 잃고, 홀로 옹성(雍城)으로 달아났다.(마외보 전투) 하지만 옹성을 수비하던 부등의 아우 안성왕 부광은 형의 패전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대동한채 어디론가 도망쳤다. 후진의 군사들이 뒤를 끊는 바람에 본거지로 돌아가는 길까지 막히자, 부등은 하는 수 없이 평량(平涼)에서 패잔병을 추스린 후 마모산(馬髦山)으로 들어갔다.

마모산에 들어간 부등은 선비 걸복부의 나라인 서진의 걸복건귀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걸복건귀가 걸복익주와 10,000여 명의 병력을 지원하기로 했고, 그 소식을 들은 부등은 이들을 영접하기 위해 마모산을 나왔다가 요흥이 이끄는 후진군과 만나고 말았다. 부등이 이끌던 병력은 매우 적었으므로 요흥에게 금세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향년 52세, 재위 9년만에 벌어진 일이었다.(마모산 전투)

부등이 비참하게 죽고 후진의 군대가 본거지인 남안까지 밀고 들어오자 태자 부숭은 황중(湟中)까지 달아나 그곳에서 제위를 계승했다. 부등의 시호는 고황제(高帝)였으며, 묘호는 태종(太宗)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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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의 역대 황제
4대 애평제 부비 5대 고황제 부등 6대 부숭


[1] 비수대전이 벌어지기 전 부견은 병주와 하주에 저족을 이주시키고, 자사를 파견해 적게나마 군대를 배치했다. [2] 황후 모씨는 키가 훤칠했으며,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힌데다가 기마술과 궁술에 능했다고 한다. 그 용맹함이 당시 장수들과 맞먹을 정도였는지, 부등은 평소 황후를 아내이자 용장(勇將)으로 대했으며, 이에 그녀를 믿고 군대를 맡긴 것이었다. 여기에 더해 하얀 피부를 가진 미녀였다고 하니,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 무려 정사로 기록되어 있는 셈이다. [3] 당시 요장에겐 정처가 이미 있었음에도 "우리 둘이 사이가 좋아지면, 그대는 국모(國母)가 될 수 있을 것이오."라며 유혹한 것을 보면 상당히 마음에 들어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