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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15:47:36

시리아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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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과
2.1. 2011년 1월2.2. 2011년 3월2.3. 2011년 4월2.4. 2011년 5월2.5. 2011년 6월 - 이슬람 무장단체의 등장과 내전화의 시발점2.6. 2011년 7월2.7. 2011년 8월 - 라마단2.8. 2011년 9월2.9. 2011년 10월2.10. 2011년 11월 - 무자비한 학살과 시리아의 아랍연맹 회원 정지와 각국의 반응2.11. 2012년 2월 - 학살의 확산, 정부군에 의한 언론인 살해2.12. 2012년 5월 - 훌라 학살2.13. 2012년 6월 - 다시 불이 붙다2.14. 2012년 7월 - 내전
3.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왜 파국으로 치달았는가?

1. 개요

2010-2011 아랍권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시리아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이었으나, 이 민주화 운동은 그 규모가 커져 시리아 내전으로 치닫고 말았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강경 진압과 튀르키예, 카타르[1], 사우디아라비아, 미국의 개입으로 결국 대규모의 내전이 벌어지게 된 사건.

처음에는 독재자와 민주주의를 바라는 시민들 사이의 분쟁으로 여겨져 시민들이 국제 여론의 막대한 지지를 받았으나, 2012년부터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과 이슬람주의자들의 대두, 기독교 등 소수종교에 대한 편견, 당시 정부측의 같잖은 음모론으로 치부되었던 국제 사회의 개입이 사실이었음이 드러나면서 여론이 돌아섰고, 2014년부터 시리아 반정부군에서 알 카에다와 ISIS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드러나면서 오히려 아사드 정권을 지지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되었다. 결국 바샤르 알아사드 바트당 시리아 정부가 내전에서 승기를 잡아감에 따라 결과적으로 실패한 운동이 되었다.[2]

한편 아사드 정부는 내전이 격화되던 2012년 2월, 민주주의를 염원하던 반대파들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국민투표를 통해(투표율 57.4%, 찬성 89.4%) ' 바트당 일당 독재 보장, 대통령의 무제한 연선 연임, 민중민주적 사회주의 국가임'을 명시한 조항을 개정 및 삭제한 신헌법을 채택하였다. 이로 인해 대통령 임기가 7년 무제한 → 7년 중임으로 바뀌었다. 물론 이론상 2028년 퇴임하는 바샤르 알아사드가 이걸 제대로 지킬지는 지켜봐야 된다.

2. 경과

2.1. 2011년 1월

2011년 1월 26일 시위 첫 발생. 야당 세력의 시위 예정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대통령 바샤르 알아사드의 인기가 비교적 높은 편인 데다가 군대가 대통령을 뒷받침하고 있고 복잡한 종교 상황(시리아 정교회의 아사드 지지)이 단합을 힘들게 하고 있다. 야당은 절멸한 상황이다. 인구 150명당 1명 꼴로 존재하는 비밀 경찰의 존재도 반대 시위를 어렵게 하고 있다. 하마 학살[3] 때의 기억도 남아있는 동네인지라... 1월 31일 시리아 정부는 SNS에 대한 자국 내 접속 차단을 해제하고 지방 선거 실시와 비정부기구의 권한 확대, 언론 자유를 더 보장하는 미디어법 제정 등의 유화책을 펼치고 있다.

2.2. 2011년 3월

2011년 3월 20일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에서 약 1만 명의 반정부 시위대가 모여서 바샤르 알아사드의 퇴진을 요구했다고 한다, 또한 남부 도시 다라에서도 수천명이 시위를 벌여 경찰과 시위대가 무력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하면서 최소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시위대는 정치적 자유와 반정부 구호를 외치면서 1973년 선포된 국가 비상사태법의 해제를 촉구했는데,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는 3월 20일에 3일째 이어지는 시위다. 첫 번째 시위는 이슬람 금요 예배가 있었던 2011년 3월 18일 3000명의 시위대가 모이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첫 시위에서 시리아 보안군의 발포로 최소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자 19일과 20일 열린 이들의 장례식에서 또 다시 대규모 시위로 확산됐다. 시위대들은 “우리 순교자의 피는 절대 잊혀지지 않을 것” “우리가 원하는 것은 부패를 끝내는 것”이라고 외쳤다. 기사

시리아에서는 3월 20일까지 3일째 시위가 이어지며 정권과 시위대간의 물리적 충돌로 5명이 사망하는 등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2011년 3월 21일 AP에 따르면 시리아에서는 전날 약 1만 명의 반정부 시위대가 수도 다마스쿠스에 모여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는데 시리아 보안군이 강경진압에 나서 유혈충돌이 발생해 1명이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시리아의 민주화 시위는 이날이 3일째로 이슬람 금요 예배가 있던 3월 18일 3000여 명의 시위대에 의해 촉발됐고 보안군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면서 최소 4명이 사망했다. 3월 19일과 3월 20일에는 피해자의 장례식이 시위 형태로 열렸다고 보도했다. 기사

그리고 3월 25일 다시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5만 명의 인파가 모였으며 남부 지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현재 수도에서도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날 보안군의 총격으로 2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국제 인권단체인 앰네스티(AI)가 2011년 3월 25일 지난 1주일 간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를 중심으로 벌어진 반정부 시위로 지금까지 55명이 사망했다고 밝혔다. AI는 성명을 통해 "당국이 시위대 탄압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한 지 하루 만에 사나메인에서 보안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했다""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시위대 일부가 강제 연행됐다"고 전했다. 시리아에서는 이날 이슬람권 휴일인 금요 기도일을 맞아 전역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이어졌는데 알자지라 방송은 목격자의 말을 인용해 보안군이 사나메인 지역에서 시위자들에게 발포해 20여 명이 사망했다고 보도했다. 다라 지역 한 거주민은 5만여 명의 시위대 2011년 3월 24일 부타니아 샤반 대통령 보좌관이 밝힌 개혁 약속을 비난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러자 다마스쿠스 인근 두마 지역에서는 수천 명이 시위를 벌이다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되었으며, 익명을 요구한 한 인권운동가는 시리아 북부의 라타키아와 라카, 홈스에서 금요기도를 마친 수백 명의 시민들이 개혁을 요구하는 거리행진을 벌였다고 증언했다. 기사

2011년 3월 26일에는 하마 시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에 시리아 정부 측은 무슬림 형제단을 비롯한 과격 세력이 배후에 있다며 비난했다. 게다가 이 시위가 과격해지면서 진압 과정에서 사상자 수가 1백 명이 넘었다고 한다. AFP통신에 의하면 시리아 남부 다라에서 2011년 3월 23일 일어난 반정부 시위에 대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인권단체와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해서 2011년 3월 24일 보도했다. 다라의 인권활동가 아이만 알아스와드는 키프로스 니코시아에 있는 기자와의 전화 통화에서 "사망자는 분명히 100명이 넘는다."면서 "이 순교자들을 매장하려면 일주일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목격자들은 보안군이 전날 아침 반정부 시위대가 모여 있는 알오마리 모스크를 공격했고 이후 정부군이 1시간 동안 총격을 가했다고 하며 이 과정에서 11세 소녀도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인권운동가는 "150명 이상이 숨졌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시리아 당국은 뭐 당연하게도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이는 10명에 불과하다고 발표했다. 이날 다라에는 비가 쏟아졌지만 약 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알오마리 모스크에서 희생자들의 장지까지 행진했다. 기사

결국 2011년 3월 29일 시리아 내각이 총사퇴했다. 새 내각이 결성될 때까지는 기존 인원들이 그대로 업무를 볼 예정이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던 중 2011년 3월 31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반정부 시위와 관련해 음모론을 제기했으며, 게다가 예상과 달리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도 거부해 시리아 정국 혼란은 가속화될 것 같다. 한마디로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대에 양보할 뜻이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2011년 3월 31일 시리아 의회 연설을 통해 시리아에서 광범위하게 벌어진 반정부 시위가 외부 음모자들의 행위라고 주장했다. "시리아는 지금 내부와 연관된 외부의 커다란 음모에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지와 통합이 음모와 맞서 싸워 이길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요구했던 국가비상사태 해제 결정은 말하지 않았다. 시리아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2011년 3월 중반에 50년 가까이 지속된 국가 비상사태법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그래도 시위가 수그러들지 않자 2011년 3월 29일 내각을 해산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 발표 이후 고작 하루 만에 바샤르 알아사드는 입 싹 씻고 시위대의 요구를 무시했고, 사실상 개혁안 제시를 거부했다. 이에 시리아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진 시위대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하든 관계없이 아사드의 연설 이후 다음날 대규모 시위를 벌이겠다고 밝혀서 시리아 민주화 운동 사태는 더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 기사 기사2

2.3. 2011년 4월

2011년 4월 8일에는 시리아군이 남부 도시 다라에서 수천 명의 시위대에 실탄을 발포해 최소한 13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했다고 목격자들이 증언했다. 한 목격자는 자신이 사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기는 작업을 도왔으며 13명의 시신을 봤다고 말했다. 보복을 우려하여 익명을 요구한 이 목격자는 AP와의 통화에서 "내 옷이 피로 완전히 젖었다", "자신이 수천 명의 시위군중 속에 있었고 군이 무차별 사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기사

또한 2011년 4월 8일 반정부 시위 도중 보안군의 발포로 37명이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2011년 3월 9일 장례 행렬에도 실탄이 발사돼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AP통신은 시리아 인권기구 대표 아마르 쿠라비의 말을 인용하여 이날 보안군이 남서부 다라시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을 향해 발포했다고 보도했다. 이들의 장례는 2011년 3월 8일 다라시에서 희생당한 17명과 주변 마을의 희생자 10명을 위한 것이었는데 이 행렬에까지 실탄을 발포한 것이다. 이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2011년 4월 9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대단히 불행한 일"이라며 시위대를 향한 발포를 중지할 것을 촉구했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반기문 바샤르 알아사드에게 보안군의 발포에 대한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덧붙였고, 반기문은 "시위대가 보안군을 공격하는 사례도 보고 받았다"며 양측에 폭력 종식을 촉구한 뒤 "포괄적 개혁을 위한 즉각적 대화"를 요구했다. 기사

현재는 시리아 정부가 정치개혁과 구속자 석방 등 유화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반정부 시위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꽁꽁 묶인 시위대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 공개돼 아사드 정권에 대한 분노가 더욱 확산되고 있다. 영상에 의하면 두 손이 묶인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이 가해졌고, 발로 얼굴을 차는 것도 모자랐는지 막대기로 피해자를 사정없이 내려쳤으며, 한 보안군은 자신이 한 짓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듯이 아예 시위대 등 위에서 마구 뛰어서 피해자를 밟기까지 했다. 이러한 정부의 강경진압이 계속되면서 시위대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 이에 시위대는 바샤르 알아사드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 전 대통령의 동상을 부수며 분풀이를 하고 있다. 시위의 중심지로 떠오른 다라 지역 외에 바니아스와 라타키아 등 전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이어졌으며,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에서도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시리아 인권단체 등은 민주화 시위 과정에서 아사드 정권의 유혈 진압으로 지금까지 200명 이상이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 기사2

시리아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자 시리아의 대학생까지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대학생들까지 정부의 강경 시위 진압을 비판하는 집회를 열었고 대학생들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모교인 다마스쿠스 대학에서 숨진 시위자들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학생 1명이 사망했다고 AFP 통신이 보도했다. 기사

심지어 시리아군이 아사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마을에 의료진이 접근하는 것을 차단해서 부상자가 치료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국제인권단체인 '휴먼 라이트 워치'(HRW)가 2011년 4월 12일 주장하기도 했다. HRW는 이날 성명을 통해 시리아군이 지난 8일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남부 지역의 다라와 수도 다마스쿠스 인근의 하라스타 마을에 구급차가 진입하는 것을 통제했다고 밝혔고, 시리아 군의 유혈 진압으로 부상한 사람들에게 치료 기회를 제공하라고 시리아 당국에 촉구했다. 기사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시리아 북동부 마을 두 곳에 2011년 4월 12일 무장한 친정부 세력이 공격을 가했는데, 목격자들은 "이날 늦은 오후까지 바이다, 베이트 즈나드에서 강력한 포격 소리가 계속됐다"며 "바이다에서만 2명이 숨지고 2명이 부상했으며 수십 명이 구금됐다"고 말했다. 한 시리아 야권 관계자는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친정부 세력이 자동소총 등을 이용해 민간인들에게 공격을 가했으며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기사

2011년 4월 14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시위 진압 땐 한 번에 20명 넘게 살해 말라"라는 비밀문건이 공개되기도 했다. 시리아 보안당국이 반정부 시위대 내부에 요원들을 침투시켜 지도부를 체포, 살해하도록 지시한 내용을 담은 비밀 문건이 공개됐다고 미 msnbc방송이 2011년 4월 13일 보도했다. 국제개입을 막도록 살해는 한 번에 20명을 넘지 않도록 한다는 충격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랍어로 쓰여진 문건의 작성일은 반정부 시위가 불붙기 시작한 2011년 3월 23일로 되어 있는데. 문건에서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우리의 최고 존엄"으로 지칭하면서 "이에 도전하는 어떤 행위에도 관용을 베풀어서는 안 된다"고 적혀있었으며, 문건은 대책회의의 목적을 " 이집트 튀니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고 규정하고, 1982년 현 대통령의 아버지인 하페즈 알아사드가 무슬림형제단의 반정부 시위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것처럼 "시위를 초기에 억누르지 않을 경우 정권이 무너진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 비밀 문건은 미디어, 보안, 정치 3개 분야의 대책을 거론했는데,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반정부 시위대를 시오니즘이나 미국과 연계한 세력으로 몰아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릴 것 비밀요원들을 반체제 활동가로 둔갑시켜 페이스북에서 야당관련 정보를 수집할 것 시위대 내부에 사복 보안요원들을 잠입시켜 혼란을 유발할 것 등이다라고 보도했다. 기사

파일:/image/003/2011/04/21/NISI20110418_0004403715_web.jpg
시리아 배니아스에서 2011년 4월 17일 열린 바샤르 알아사드의 퇴진을 촉구하는 반정부 시위.

2011년 4월 17일 정부군의 진압으로 사망한 이들을 위해 2011년 4월 18일 추도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 시위에서 정부군의 발포로 88명이 다치면서 다시 시위가 격렬해지고 있다. 시리아 제3의 도시인 홈스[4]에서는 2만 명이 거리로 나와 대통령이 퇴진할 때까지 거리를 메울 것이라고 외치고 있으며, 다른 도시들에서도 마찬가지로 아사드 대통령 퇴진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수도 다마스쿠스도 친정부 시위와 반정부 시위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어서 정국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2011년 4월 19일 시리아 북부도시 배니아스에서는 300여 명의 어린이들이 "떠나라, 범죄자", "떠나면 우리는 자유를 즐길 수 있다"라고 적힌 풍선을 날려보냈다고 목격자들이 증언했다. 기사

2011년 4월 21일 아사드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48년 만에 해제하고 국가보안법정 폐지, 시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말과는 달리 보안군은 22일과 23일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 약 120여 명이 숨지고 다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국제 사회는 시리아 정부의 유혈 진압에 비난 성명을 발표했으며 의원 두 명이 계속되는 유혈 진압에 반발해 사임하였다. 시리아 대표적인 야당 인사인 하이트함 알 말레(당시 나이 80살)는 21일 "비상조치법 폐지는 독립적인 사법부와 보안기구 책임이 동반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문제는 정부 엘리트와 보안당국이 사법부에 영향력을 미치고 이들이 마련한 법안은 보안부대의 법적 책임을 묻지 않도록 하고 있다"며 주장했다. 기사 기사2 관련기사

2011년 4월 23일에는 시리아의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면서 경찰의 강경진압으로 그날 하루 최소 75명이 숨지고 수백 명이 다쳤다고 22일 AFP통신 등 외신이 보도했다. 이날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등 전역에는 금요예배 후 거리로 나선 반정부 시위대가 경찰과 충돌했다.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 두마에만 4만 명이 모여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으며, 그 밖에도 시리아 남부의 다라, 북부인 카시미리와 중부 홈스 등 전국에서 시민들이 시위에 참가했다고 한다. 기사

시리아 정부는 이제는 노골적으로 반정부 세력 소탕 작전을 시작했다. 시리아 정부군은 이날 새벽 다라 지역 주민들이 새벽 기도를 위해 모인 곳에서 총기를 발사해 5명을 숨지게 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으며, 인권운동가인 압둘라 알 하리리는 보안군 3000여 명이 탱크 장갑차를 몰고 다라에 진입했다고 밝혔다. 2011년 4월 25일 정부는 3월 중순 반정부 시위가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탱크와 군대를 동원한 강경 진압 작전을 했는데 뉴욕타임스는 시리아 군의 포위로 다라의 주민들이 고립 상태에 처해 있다고 보도했다. 주민들은 군인들이 무서워 저항하지 않는다는 표시로 나뭇가지에 스카프를 매달에 걸어 놓고 있으며 한 모스크에서는 응급 반창고와 소독제도 없이 의사들이 바느질용 바늘로 상처를 치료하기도 했다고 보도했다.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2011년 4월 26일 현재까지도 다라에서는 총격이 계속되고 있으며 군이 저격병을 시내 곳곳에 배치해 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NN은 시리아 군의 저격병에 의해 2011년 4월 26일에는 5명, 2011년 4월 27일에는 9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심지어 군인들이 죽은 사람들의 묘지를 점령하고 있어서 장례식도 열리지 못했다고 한다. 또한 국제인권단체인 앰네스티 인터내셔날은 목격자의 증언을 인용해 군이 거리의 부상당한 주민과 그를 구하려는 사람에게까지 총격을 가했다고 전했으며, 심지어 시리아 인권단체인 이안(Ian)의 위쌈 타리프 국장은 시위대에 대한 총격을 거부하는 병사가 총살을 당한 사건도 발생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시리아 정부군은 그 병사가 과격 이슬람주의자에 의해 살해됐다고 밝혔지만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군이 병사를 죽였다고 비난했다. 기사 기사

2011년 4월 25일 보도된 한 시리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시위대가 찍은 영상에서는 시리아 군이 어떻게 시위대를 진압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영성을 보면 갑자기 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곳곳에서 시위대가 쓰러졌으며 함께 행진하던 사람들이 총탄에 쓰러져 있는 걸 확인하곤 행진 대신 부상자 후송에 나섰으며, 심지어 다친 사람을 옮기다 몸에 피를 묻힌 한 시민은 비무장 평화 시위라는 걸 호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총을 쏘는 사람들은 다시 시위대에게 사격을 가하고 또 다른 희생자가 발생했다. 심지어 시위대가 찍은 영상 중에는 탱크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비무장 시민을 상대로 시리아 정부군이 작전을 펼치고 있으며 심지어 소총에 착검한 모습까지 공개되었다. 기사

2011년 4월 24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반정부 인사 수십명이 보안당국에 체포됐다고 인권단체들이 밝혔다. 시리아 인권단체 대표인 암마르 쿠라비는 이날 AP통신을 통해 "수도 다마스쿠스와 홈스 지역 등지에서 수십 명이 체포됐다"며 "이들은 법적 절차에 따라 체포된 것이 아니라 납치된 것이나 다름 없다"고 주장했다. 기사

유엔 사법기구인 국제사법재판소(ICJ)는 긴급성명을 내고 "시위대를 향한 무차별 발포를 지시하고 이행한 이들은 형사상 소추를 받아야 한다."며 알아사드 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회부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정부 관리를 인용하여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시리아 정부 관계자들의 자산 동결 등 시리아 제재 방안을 준비중이라고 보도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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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29일 시리아 보안군에 체포됐던 13세 소년 함자 알 카티브가 고문 치사로 숨진 사건이 벌어져 시위가 격화되는 상황에 접어들었다. 카티브는 반정부 시위에 동참했다가 보안군에 체포됐으며 시신은 그야말로 참혹 그 자체였다. 얼굴은 폭행으로 두꺼비처럼 부어올랐고, 온 몸에서 채찍질 자국이 발견됐으며 손과 발에는 전기고문의 흔적이 남아 있는 데다가 배에서는 권총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정되는 1발의 탄환까지 발견됐다. 그것도 모자라 성기 부분이 예리한 흉기로 완전히 잘려나가 있었다.[5] 그러나 소년의 유족들은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시신의 상태에 대해 침묵을 지킨다'는 함구의 각서를 썼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총기로 무장한 채 시위에 나서는 시민까지 나오고 있다. 당시 시리아 정부측은 이를 부인하며 자세한 검시보고서를 내놓았지만 서방 및 반정부측은 이를 묵살하였다.

새로 나온 보도에 의하면 시리아 보안군은 시위대를 향해 계속해서 실탄을 발포했고, 또한 시위대를 무차별 폭행하고 비밀감옥에 가둔 후 고문했다는 증언이 쏟어지고 있다. 취재를 위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찾았던 도로시 파르바즈는 2011년 4월 29일 보안당국에 체포됐다가 3주 만에 풀려난 후 이렇게 전했다. "비밀감옥의 벽에는 피 냄새가 진동했고, 그곳은 잔혹한 고문을 당하는 사람들의 거친 비명으로 가득 찼다." 참조 기사

2.4.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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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정부가 민주화 시위대를 '테러리스트'로 매도하자 '시리아 시민이 테러리스트란 말인가????'라는 내용의 문구를 들고 있는 시민.

시리아 정부는 반정부 시위가 무장 테러리스트들과 외국의 음모[6]라며 해외 언론들이 호도했다는 이유로 시위지역에 대한 언론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는 상태다.

민주화 시위로 2011년 5월 6일까지 "600명" 넘는 사람이 숨진 시리아에서는 민주화 운동 지도자들이 정한 '저항의 날'을 맞아 수천 명의 시위대가 참석한 가운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 종식을 촉구하는 집회가 열렸다. AP통신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 미단 지역에서 금요 예배가 끝난 뒤 수백 명이 시위대해 '대통령 타도'의 구호를 외치며 시가 행진을 벌였다고 보도했으며, 해안 도시 바니아스에서도 5,000여 명이 평화의 올리브 가지와 시리아 국기를 들고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다마스쿠스 교외에서도 연행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그러나 시리아 군은 곳곳에 탱크를 배치하고 인권단체 대표인 리아드 세이프를 체포했으며 시위 진압과정에서 적어도 5명을 숨지는 등 유혈 진압이 이어졌다고 보도했다. 기사

남부 2개 도시에는 시리아 진압군 증원 부대가 파견됐고, 봉쇄된 지역에서 모든 통신 수단과 전기, 수도 공급이 차단됐으며 반정부 시위대의 주요 근거지인 바니야스와 홈스에서는 14명이 숨지고 수백명이 체포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타임스(NYT)는 2011년 5월 9일 "시위대에 대한 공격이 지중해 해안에서 남부 산악지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다"면서 "11년 통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한 아사드 정권이 무력으로 시위를 종식시키겠다는 의도를 노골화 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리아는 시위 발발 이후 해외 언론인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어 외신들은 시위 상황에 대한 모든 정보를 현지에서 활동 중인 인권그룹 관계자 및 반정부 인사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들어 시리아 정부의 통신 차단으로 인해 홈스와 바니야스의 내부 정부 제공자들은 외부 세계와 접촉할 수 없게 됐을 뿐 아니라 위성전화까지도 두절되면서 완전히 답이 없는 상황이 됐다고 한다.

이 신문은 "시리아 정부가 인접국들 특히 이웃하고 있는 터키 정부에 곧 개혁조치를 단행할 것이며 야권과 대화를 시작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는 수사에 불과하다"면서 "정부와 시위대의 만남은 최루가스 및 실탄을 통해서일 뿐이며 보안군들은 수천명의 시위대를 체포했고 어떤 경우에는 가택수색을 통해 15세 이상 남자를 무작위로 끌고 가고 있다"고 전했다. 기사

2011년 5월에 들어서도 시리아 정부군이 탱크를 동원, 민간인 거주지역을 포격하는 바람에 인명 피해는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AFP통신은 "남부 다라와 알하라 지역에서 시리아 보안군 등의 발포로 8세 남자아이를 포함해 13명이 숨졌고, 중부 공업도시이자 제3의 도시인 홈스에서도 탱크 포격으로 5명이 숨지는 등 민간인 19명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BBC는 "홈스에선 2011년 3월 10일 이후 500명 이상이 체포됐고 밥 아미르 구역에선 물 전기 통신이 끊기고 포격이 이어지며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리아 제2의 도시인 알레포에서도 대학생 2,000여 명이 시위에 나섰으나 곧 해산되기도 했으며, 또 12일에도 바니아스 등에서 시위대 수십 명이 체포됐다고 AFP통신은 전했다.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대변인은 "시리아 당국이 평화적인 시위대에 대해 폭력적 진압을 계속하고 있는데 이런 억압책은 야만적(barbaric)"이라고 비난했다. 기사

2011년 5월 11일에는 시리아군의 탱크가 중부 지역의 홈스에서 민간인 거주구역에 발포하고 있다고 한다. 시리아 인권운동가인 나자티 타야라는 "탱크 포탄의 폭발음과 중기관총의 발사음으로 홈스의 지축이 흔들리고 있다"고 로이터 통신에 말했다. 타라야는 또 군부대 저격수가 홈스의 인샤아트 지역 인근에서 시리아 기독교인의 머리를 조준사격해 숨지게 했다면서 이는 종교 간 갈등을 부추겨 민주화 시위대의 전열을 흩뜨려 놓으려는 군 당국의 술책이라고 주장했다. 기사

시리아 보안군이 2011년 5월 9일 전국 곳곳에서 반체제 인사와 반정부 시위 참가자의 집을 급습해 수백 명을 체포했다고 시리아의 한 인권단체가 주장했다. '시리아 인권 감시소'의 라미 압둘-라흐만 소장은 이날 보안군의 대대적인 검거가 중부 지역의 도시 홈스와 해안도시 바니아스, 수도 다마스쿠스 교외의 위성 도시들, 남부 지역의 다라 등 지난 주말 반정부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진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알 자지라 방송에 전했다. 2011년 3월 15일 시작된 시리아의 반정부 시위에서 630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한 가운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현 위기는 극복될 것이고, 행정과 정치, 언론 분야의 개혁은 계속 추진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현지 일간지인 알-와탄은 이날 전했다. 기사

버락 오바마는 '민주화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퇴임하라며 아사드를 압박했다. 2011년 3월 18일 AFP통신에 따르면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아사드 대통령을 비롯, 시리아 정부 인사 7명의 미국 내 자산과 미국 재판관할권 내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인 및 미국 기업들과의 거래를 전면 금지하는 제재를 단행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국무부 성명을 통해 "민주주의 탄압과 시민들의 체포를 중단하고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적 이양을 시작해야 한다"며 "정치적 변화를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퇴임하느냐는 이제 아사드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기사

시리아 홈스에서 2011년 5월 21일 반정부 시위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열린 가운데 보안군의 발포로 최소 11명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당했다. 기사

'시리아 인권을 위한 국민기구'의 암마르 쿠라비 대표는 2011년 05월 25일에 지난 3월 중순부터 시작된 시위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의 무력 진압으로 숨진 1,062명의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기사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를 비롯해 여러 지역에서 2011년 5월 27일 수만 명의 시민이 반정부 시위를 벌였다고 아랍권 위성방송 알 자지라 등 주요 외신이 목격자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무슬림의 금요 기도회가 열린 이날 다마스쿠스의 카분 지역에서는 1천 500명 이상의 시위대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체제의 퇴진을 요구하는 구호를 외쳤고, 중부 도시인 홈스에서는 주민 수백 명이 거리시위를 벌였다고 목격자들이 전했다. 인권운동가인 무스타파 오소 씨는 북동부 도시인 카미슬리에서 5천 명, 아무다 마을에서는 3천 명, 데르바시야 인근 지역에서는 2천 명이 각각 시위를 벌였다고 AFP 통신에 말했다. 반정부 시위를 지원하고 있는 단체인 `시리아 지역 협동위원회' 측은 이날 남부 마을인 다엘에서 군경의 발포로 4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기사

탱크를 앞세운 시리아군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진 중부 지역 두 마을에서 시민들을 공격해 7명이 숨지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민주화 운동가들이 주장했다. 알 자지라는 시리아군이 2011년 5월 30일 중부 홈스 주의 라스탄과 탈비세흐에 각각 진격해 들어간 뒤 모든 통신을 끊고 도로를 폐쇄한 채 시위대에 발포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전했다. 시리아군은 이들 마을뿐 아니라 남부의 시위 중심지 다라와 해안도시 바니아스, 레바논 국경 인근 서부 도시 탈칼라크에도 수주일 전부터 탱크를 투입해 무력으로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 기사

알 자지라TV는 부상한 병사 5명이 병원처럼 보이는 곳의 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을 촬영한 다라 지역 제보자의 영상을 방영했는데 실제로 시위 진압을 거부한 병사들을 총살당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상황이라 이 영상이 그 증거가 아니냐는 주장이 많다, 실제로 이들 병사는 시위대에 대한 발포를 거부한 뒤 동료 병사들의 총에 맞아 부상했다고 민주화 운동가들은 주장했으나 사실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시리아 정부는 외신 기자들의 시위 취재를 엄격히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기사

2.5. 2011년 6월 - 이슬람 무장단체의 등장과 내전화의 시발점

현지 언론 등에 따르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정부는 최근 시위 확산을 막으려고 수도 다마스쿠스와 해안도시 라타키아 등에서 인터넷 접속을 차단한 것으로 전해지며,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은 2011년 6월 4일 시리아 정부가 최근 시위 확산을 막으려고 주민들의 인터넷 접속을 차단하고 있다는 보도와 관련, "시리아 국민이 가진 표현, 집회, 결사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노력도 비난한다"고 밝혔다. 기사

바샤르 알아사드는 2011년 5월 31일 무슬림형제단을 포함해 정치운동단체의 모든 회원들을 사면한다고 밝혔다고 국영 SANA통신과 국영 TV가 전했다. 1982년 아사드 대통령의 아버지 하페즈 알아사드에 대항한 무장봉기를 주도했던 무슬림 형제단의 가입은 사형선고를 받을 수 있었지만, 이번 사면조치로 31일 이전에 저질러진 일반 범죄자들에 대한 형량도 절반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기사

그리고 시리아의 집권 바스당이 시위 사태 해결을 위해 전국민 대화위원회를 48시간 안에 구성하겠다고 현지 언론이 보도했다. 친정부 성향의 일간지 알 와탄은 바스당의 2인자인 모하메드 사이드 브크헤탄이 모든 정파와 정치 경제사회 등 각 분야의 인사들이 참여하는 대화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또 대화의 방식 등 구체적인 내용이 48시간 안에 발표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이처럼 시리아 민주화 사태는 시위와 강경 진압 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2011년 6월 6일 최초의 무장 단체에 의한 조직적인 정부인사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들리브 북서부의 소도시 지슈르 앗 슈구르에서는 2011년 6월 4일 지슈르 앗 슈구르에서 반정부 시위대는 경찰서를 장악하고 무기고를 털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8명의 보안군이 불에 타 살해되었다. 경찰서와 관공서를 방어하기 위한 경찰들은 시위대와 산발적인 충돌을 벌이고 있었으나, 6월 6일부터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들이 등장했고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0명이 매복에 의해 살해당했으며, 다른 무장 세력과 교전하다 탄약이 다 떨어진 보안대 82명은 경찰 지휘 본부로 퇴각하여 농성하다 모두 살해당했다. 보안대 살해 직전 농성 영상 다시 우체국을 지키고 있던 8명의 경찰도 살해당했고 우체국은 전소되었다. 지슈르 앗 슈구르는 정부 통제에서 벗어나 정체불명의 무장단체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시리아는 내전 이후 처음으로 정부군의 조직적인 군사 작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작전에서 시민들이 피난하면서 최초의 시리아 난민이 발생하였다.

시리아 국영TV는 이날 "무장괴한을 진압하기 위해 군이 지스르 알슈구르와 인근 마을에서 작전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AFP통신은 한 목격자를 인용하여 "군인들이 지스르 알슈구르 주위의 마을들에 포격을 가하고, 지스르 알슈구르에서 15km 떨어진 알지야라 마을의 밀밭에 불을 지르고 있다"고 전했다. AP통신은 현지 반정부 활동가를 인용, 지스르 알슈구르에서 40km 떨어진 마아레트 알누만 마을에서 탱크 포격으로 10명이 사망했다고 전했으며, 또 다른 지역에서도 희생자가 나와 전국적으로 최소 21명이 숨졌다고 덧붙였다. AFP는 시리아군이 헬기를 동원해 공격하고 있다고 밝혔지만 반면 리비아 국영TV는 무장세력이 마아레트 알누만 마을 경찰서를 공격하는 바람에 보안군이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앞서 시리아군은 병력 1만 5,000명과 탱크 40대, 장갑차 수십대를 지스르 알슈구르 인근에 배치했다. 3일전에는 군경 120명이 무장괴한의 매복공격에 희생된 만큼 이들을 진압하고 이 지역에서 질서를 회복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군의 압박이 이어지자 이 도시 주민 5만 명 중 3,000여 명이 20km 떨어진 터키로 피난하고, 대부분의 주민이 도시를 떠나는 등 공황 상태에 빠졌다. 시리아 인권단체들은 군인과 경찰이 무장괴한의 매복공격에 당한 게 아니라 발포 명령을 거부하다 사살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 그러나 2011년 6월 6일 죽음을 기다리던 보안대원의 핸드폰 영상이 복원된 만큼 완전한 낭설이라고 할 수 있다.

명백한 무장 단체의 등장과 이에 따른 정당한 군사 작전에도 불구하고 서방측의 편향 보도는 여전해서, AP통신의 TV뉴스 방송국인 APTN은 2011년 6월 11일 시리아 정부군이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하는 영상을 공개했는데, 그 동영상엔 수도 다마스쿠스 거리에서 반정부 시위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대열을 갖춘 정부군을 향해 걸어가던 한 시민이 총격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장면들이 담겨있었다. 이날 터키와의 접경 도시인 지스르 알 슈구르에서 탈출한 시민들이 AFP통신에 공개한 휴대폰에도 유혈 진압 현장의 참상이 실렸다. 주로 총상으로 피투성이가 된 채 버려진 시신이 널려있는 사진들인데, 일이 이렇게 된 이유는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동생인 마헤르가 이끄는 부대는 이날 탱크와 장갑차 등으로 중무장한 채 도시에 진입했고 테러 단체들을 체포한다며 무차별 공격을 가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아사드 정권이 정부군에 반정부 시위대 측 여성들을 성폭행하도록 명령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이에 성폭행을 하라고 강요하는 명령에 충격을 받고 터키로 피신한 한 시리아 정부군 병사는 "지시를 받고 라스탄 지역의 민가에 투입된 군인들이 무차별 총격을 한 뒤 남편과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여성들을 성폭행하기도 했다"고 2011년 6월 12일 AFP통신에 털어놨다. 앞서 인권단체 '시리아 인권 관측소'는 2011년 6월 10일 진압군 헬리콥터가 시민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고 주장했다. 시위대가 이날 북부 도시 마라트 알 누만에서 금요 기도회를 마친 후 중심가로 모여 들었는데, 인파가 수만 명으로 불어나자 정부군이 이들을 해산하기 위해 헬기에서 기관총을 난사했다. 한 시민은 "5대 이상의 헬기가 나타나 군중에게 몇 시간이나 기관총을 쐈다"고 말했다. 헬기 기관총 난사로 인한 인명 피해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인권단체에서는 시리아 민주화 시위로 올해 들어서 총 1,200여 명이 숨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

시리아군이 2011년 6월 24일 이슬람 금요 기도회를 마치고 반정부 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에게 실탄을 쏘아 최소 5명을 사살하는 등 시위대에 대한 유혈 진압을 이어가고 있다고 인권단체들이 전했다. 기사

바샤르 알아사드는 2011년 6월 20일 개헌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 대화를 제안했지만 반정부 시위대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면서 실질적인 개혁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이날 시리아 다마스쿠스대학에서 대국민 TV 연설을 통해 "시리아의 미래는 모든 정파가 참여하는 국민 대화에 달려 있다"며 "국민 대화는 헌법 개정이나 새로운 헌법의 제정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 반정부 시위는 파괴활동가들의 선동에서 비롯됐다"며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비난했으며, 그는 "파괴활동가들이 정권에 도전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하고 있다"며 "파괴와 혼란 속에서는 어떤 개혁도 있을 수 없으며 파괴활동가들을 고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사

또한 아사드는 현재의 시위 사태는 소수 '난동꾼들'(saboteurs)의 짓이라며, 파괴 활동으로는 개혁을 이룰 수 없을 뿐 아니라 경제 활동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고 비난했다. 심지어 아사드는 "우리는 자비를 베풀 수 없다. (시위로 인한) 피해는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면서 시위대를 "병균"(germs)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리아 시민들은 아사드에 대해 "거짓말쟁이!"라는 함성으로 대응했다. 시민들은 거리로 몰려나와 그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특히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는 수많은 시위대가 거리로 몰려나왔으며, 알레포와 데라, 하마 등 지방 도시에서도 시위가 일어났다.

시위대는 "시리아 민중은 정권 퇴진을 원한다" 등의 구호를 외쳤으며,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원한다. 정권을 몰아내는 것이다"라고 쓰여진 플래카드를 두르고 행진하는 모습도 확인되었다고 하며, 특히 다마스쿠스는 전통적으로 아사드 부자에 대한 지지가 높은 지역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는 시리아 민중의 마음이 정권에서 얼마나 돌아섰는지 보여준다는 관측이라고 한다. 기사

2.6. 2011년 7월

7월까지 시리아에서는 골란 고원 터키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경찰들이 유혈 진압을 벌이고 있기는 하나 정부군의 세력이 하마 시 전투를 벌이던 당시와 비교하면 위축되어 있다는 것이 보일 정도로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6월 27일에는 시리아 수도에서 야권 인사들이 회의를 가질 정도였다.

시리아의 시위 규모가 예상을 뒤엎고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정국은 혼돈에 빠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리비아 혁명에서의 유혈 진압을 계기로 서방 세계가 오디세이 새벽 작전으로 군사 개입을 하면서 리비아 내전으로 번졌고 시리아가 전처럼 하마 시 전투 같은 극단적인 유혈 진압을 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클린턴 장관도 시리아에 비행 금지 구역 설정을 계획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으니 여차하면 시리아도 무력 개입을 당할 수 있다.[7]

시리아 보안군이 현지 중부도시 하마에서 연일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2011년 7월 6일 현재까지 모두 23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7월 3일부터 하마 외곽에 주둔해 있는 보안군은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무작위 발포, 체포 등을 강행해 왔다. 민간인 500여 명이 보안군에 붙잡혀간 것으로 알려지며, 현지 인권단체 대표 아마르 쿠라비는 "전날부터 현재까지 보안군의 공격으로 22명이 숨졌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인권단체 관계자 라미 압벨라흐만은 "지난 24시간 동안 하마에서 23명이 희생됐다"며 "이날 오전부터 식수와 전력도 차단됐다"고 호소했다. 뉴욕 소재 휴먼라이츠워치는 "전날 하마에 있는 하우라니 병원에 실려온 시신만 4구, 부상자는 40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기사

시리아 보안군이 2011년 7월 10일 중부도시 홈스와 하마에 집중 공격을 가해 민간인 1명이 숨지고 20명이 부상했다고 한다, 목격자들은 "이날 반정부 시위 이후 보안군이 들이닥쳐 가정집에 있는 민간인들을 무작위로 붙잡아갔다"며 "보안군은 밤새도록 체포와 공격을 이어갔다"고 주장했다. 이날 하마에서도 총성이 오고 간 것으로 확인되며 지난주에도 보안군과 친정부군이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30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시리아에 있는 인권단체는 "시리아 전역에서 매주 수백 명이 보안군에 의해 체포되고 있다"며 "현재까지 감옥에 투옥된 정치사범만 1만 2000여 명"이라고 호소했다. 기사

시리아에서 2011년 7월 10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제안한 '국민대화'에 앞서 관련 회의가 열린 가운데 현지 주요 야권 세력이 참석을 거부했다. 주요 야권은 이날 "알아사드 대통령이 폭력을 중단하고 정치사범들을 석방해주지 않는 한 협상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이콧했다. 야권 저명인사 파예즈 사라는 "시리아 정부는 대화를 위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다"며 "내 친구들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회의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사라는 "반정부 시위대를 향한 수많은 폭력과 체포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며 "회의에 참석할 이유가 없다"고 강조했다. 기사

시리아 시위대는 2011년 7월 15일부터는 총파업으로 전략을 수정했다고 한다, AP통신은 시리아 전역의 도시와 마을들이 파업에 동참했으며 이는 총파업을 통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고 전했다. 시위 조직을 돕고 있는 오마르 이딜비 지역조정위원회(LCC) 대변인은 총파업을 통해 시위 참여를 주저하고 있는 주민들의 시위 참여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총파업의) 목적은 인명손실을 피하는 방법으로 시위에 동참할 것을 주민들에게 촉구하는 것"이며 또 다른 목적은 "경제적으로 현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물론 아사드 정권의 잔혹한 탄압은 이어져서 다마스쿠스에서는 이날 지식인과 작가 250여 명이 "신이여, 시리아에 자유를"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반정부 시위를 벌였으며, 시리아 보안군은 곤봉을 휘둘러 이들을 해산시키고 4명을 체포했다고 아랍연맹(AL)이 밝혔다. 기사

시리아에서 2011년 7월 15일 반정부 시위가 벌어진 가운데 보안군의 무력진압으로 28명이 숨지고 200명이 부상했다고 16일 현지 인권단체들이 주장했다. 시리아 지역조정위원회(LCC) 모하메드 압둘라 대변인은 "이번 시위로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만 22명이 사망했다"며 "지금까지 가장 많은 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전혔다. 인권단체인 시리아인권관측소는 "다마스쿠스에서 17명이 사망했다"며 "총 22명이 숨지고 2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말했다. 이번 시위는 지난 3월 시위가 시작된 이래 가장 큰 규모인 것으로 확인된다. 기사

그리고 7월 17일 시리아 정부군이 헬기와 전차를 동원해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아부 카멜과 자바다니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아부 카멜은 동부에 위치한 도시이고 자바다니는 레바논 국경지대에 위치한 도시로 두 지역 다 장기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곳이다. 이대로 갈 경우 하마 시 전투처럼 잔혹한 유혈 진압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황. 그러나 그때와는 달리 반정부 시위가 수도 다마스쿠스에서도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을 정도로 확산된 상태이고 야권 단체들도 터키에서 과도 정부 기구를 만드는 회동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현지 시각으로 7월 마지막 날 시리아 보안군이 하마에서 총격을 가해 113명이 사망했다. 다가오는 라마단은 시위대가 모스크에 결집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기선을 제압하려는 것이었다.

2.7. 2011년 8월 - 라마단

8월에 들어서도 시리아 전역은 유혈 사태가 지속되고 있으며 인접국인 터키가 "다국적군이 결성된다면 그 일원으로 참여하겠다"고 하면서 시리아 개입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고 리비아 내전 개입으로 정신이 없던 국제 사회도 카다피가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위치까지 오자 경제 제재를 시작으로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고 몇몇 인사들은 군사 개입까지 거론하기도 하는 듯. 시리아 내 야권도 하나로 뭉쳐 대항할 것을 결의하고 있다.

결국 혁명 후 처음으로 맞는 라마단 첫 날부터 시리아 정규군이 반정부 시위대에게 무차별 발포를 하여 최소 95명이 넘는 사상자가 나오고야 말았다. 2011년 8월까지 사상자는 2천 명이 넘을 정도이며 시리아도 시리아 내전이란 말이 필요할 만큼 시끄럽다.

쿠르드 족은 시위를 찬성하고 나서고 있지만 역시 소수계이며 터키나 이라크나 이란처럼 환영받기 어렵다. 시리아에는 쿠르드족 수는 큰 위험이 되지 않으며 그마저도 분리시켜서 위협이 되지 못하게 대처해버렸기에 이라크처럼 도움이 되지 못한다.

다마스쿠스 소재 아랍 인권기구의 마흐무드 메르히 대표는 8월 1일 인터뷰에서 2011년 7월 31일 “탱크의 대포 공격으로 하마에서 최소 100명이 숨지고 수십 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또 인권 운동가인 오마르 이들비는 “오늘 새벽 군인들이 탱크를 동원해 하마를 습격해 북부지역에 포격을 가했다”며 군인들이 하마의 대형병원들을 에워싸 부상자 이송도 막았다고 폭로했다. 그는 정부군이 시위대 진압에 앞서 전기와 수도 공급도 차단했다고 밝혔다.알 아라비야 방송과 알 자지라 방송 등은 이날 하마에서 검은 연기 기둥이 솟아오르는 현지 장면을 내보냈다. 이 장면에서 총성과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도 했다.

알 아라비야 방송은 또 동부의 데이르 에조르시에서도 군의 탱크 공격으로 19명이 숨졌다고 전했다. 시리아 인권운동 단체인 전국인권기구 대표인 아마르 쿠라비는 남부의 하락 지역에서 6명, 동부의 알-부카말 지역에서 1명이 숨졌다고 보도했다. 이 외에도 남부 데라 지역에서도 3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친 것으로 알려졌고, 시리아 전역에서 최소 120명 이상이 숨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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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8월 8일 수백 명의 요르단 거주 시리아인들이 집결한 가운데, 시리아 국민들에 대한 잔혹한 학살 중단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강력히 촉구하는 시위가 암만 주 요르단 시리아 대사관 앞에서 있었다. 라마단 이프타르가 끝난 오후 9시에 기도로 시작한 시위에서 운집한 시리아인들은 "바샤르, 시리아를 떠나라!",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더 이상 죽이지 마세요!"등의 구호를 외치며 밤 늦게까지 시위를 벌였다. 아이들도 피켓을 들고 시리아 대통령과 정부를 규탄하고 있다. 기사

2011년 8월 10일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은 "우리는 지금 테러리스트와 싸우고 있고 싸움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해 강경 진압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은 이날 강경 진압을 만류하기 위해 긴급 방문한 아흐메트 다부토글루 터키 외무장관에게 "우리나라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테러리스트들에게 우리 군은 어떤 자비도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시리아 국영 SANA 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면서 "시리아는 개혁을 계속해나갈 것이며 형제 국가의 도움은 언제든지 환영한다"고 말해 타협의 여지를 남겨두는 듯한 발언을 했다. 기사 기사2

2011년 8월 4일에는 로이터통신이 "탱크를 앞세운 시리아군의 공격으로 하마에서만 (이번 주 들어) 적어도 45명의 시민이 숨졌다"고 현지 활동가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군대의 포위를 뚫고 겨우 하마에서 빠져나왔다는 이 활동가는 "3일과 4일 이른 시간, 오론테스 강 북쪽에 있는 (하마의) 알 하데르 지구에서 기관총 사격과 탱크의 포격으로 40명이 죽었다"고 말했다. 이 활동가는 이와 별개로, 자동차로 하마를 빠져나가려던 일가족 5명이 살해됐는데 이 중 2명은 아이라고 밝혔다. 시리아군뿐만 아니라 친정부 민병대도 시민들에게 발포하고 있다. 약사로 일하는 한 여성은 "하마를 떠나 도망치려 했지만 샤비하(친정부 민병대)가 주민들에게 마구 총을 쐈다"고 말했다. 이 여성은 탱크의 포격으로 하마 시내의 여러 건물이 불길에 휩싸였다는 증언도 있었다. 시리아 중서부 도시인 하마는 민주화 시위의 중심지 중 하나다. 시리아 정부는 지난주 금요일부터 하마를 비롯한 시위 중심지들에 대한 무력 진압을 더욱 강하게 하고 있고, 이로 인해 2011년 7월 31일에는 하마에서만 100명이 넘는 시민이 숨진 것으로 전해진다. 시리아 정부군은 하마와 다이르 앗 자우르 이외의 지역에서도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하며 진압을 하고 있다. 알부 카말도 지난주에 시리아군의 탱크에 짓밟혀서 사망했다고 하며, 또한 미국의 CBS는 인권 단체인 '시리아 인권 관측소'를 인용해, 해안 마을인 라타키아에서 2011년 8월 2일 밤 아홉 살 소녀가 저격수의 총에 맞아 2011년 8월 3일 숨졌다고 보도했다. 이 소녀는 엄마와 함께 버스에서 내린 후 저격수의 총에 맞았다고 한다. 기사

시리아 정부가 급기야 군함까지 동원해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는 해안 도시를 공격,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AP통신 등 외신은 2011년 8월 14일 시리아 해군 함정 두 척이 지중해를 낀 북서부 항구도시 라타키아 시를 향해 함포를 발사해 최소 21명이 사망했다고 시리아인권관측소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다. 지금껏 시리아 내 반정부 시위와 유혈진압으로 인한 사망자는 약 2천 100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들은 화염에 휩싸였고 이날 해상 군함 포격에 이은 탱크 20여 대의 도심 진격으로 라타키아 지역에선 수많은 시민이 부상하고 일부 주택은 화염에 휩싸였다고 AP는 전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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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N은 2011년 8월 17일 시리아군의 유혈 진압이 계속된 라타키아에서 살해된 세 살배기 여자아이 올라 자블라위에 관한 영상을 보도했다.

CNN은 올라 자블라위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고 이 영상에서 시리아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고 소개했다. "(시위대도 아니고) 그저 아이일 뿐이다. 악마 같은 바샤르 알아사드가 이 아이를 죽였다." "봐라. 이게 바샤르 알아사드가 말하는 개혁이다."

CNN은 시리아 당국이 취재를 막아 "이 아이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지금으로선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조심스러웠지만, CNN은 시리아의 최근 상황을 "자유를 요구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체제 간의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그 와중에 아무 죄도 없는 올라 자블라위가 희생됐다고 보도했다. 기사

2.8.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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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인터내셔널은 납치된 후 처참한 주검으로 발견된 18세의 시리아 소녀 자이납 알 호스니의 이야기를 보도했다.

어머니는 시리아 정부군 병원에서 아들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통보를 받았는데 아들인 무함마드의 시신에는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등에는 멍 자국이 있었고, 몸 곳곳에는 담뱃불로 지진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오른쪽 팔과 다리에 총을 맞았고 가슴에도 세 발의 총상이 있었다.

무함마드의 어머니는 아들의 시신이 있던 병원 영안실에서 우연히 딸의 주검도 발견했는데, 납치된 후 생사를 알 수 없었던 딸의 시신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자이납은 목이 잘리고 양팔이 절단되고 피부가 벗겨진 처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시리아 당국은 자이납의 시신을 가족들에게 바로 돌려주지 않았다. 시리아 당국은 '무장한 범죄 집단이 자이납과 무함마드를 납치·살해했다'고 적힌 문서에 서명할 것을 두 사람의 어머니에게 요구했는데, 시리아 정부군은 그동안 국제 사회에서 민간인 학살을 비판할 때마다, 시리아 당국은 '무장한 범죄 집단'과 '테러리스트'에 맞서 싸우고 있을 뿐이라고 반박해왔던 그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무함마드의 어머니는 나흘 후인 2011년 9월 17일에야 자이납의 시신을 집으로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렇게 자이납은 납치된 지 52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다. 기사

시리아 정부군이 아랍연맹 사무총장의 방문을 앞두고 중부 지역 도시인 홈스를 공격해 사망자가 속출했다고 알자지라가 보도했다. 아랍권 위성방송 알 자지라는 2011년 9월 8일 시리아 정부군이 대규모의 탱크를 앞세워 전날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최소 21명이 숨졌다고 시리아인권관측소의 말을 인용해 보도했으며, 또 다른 시위 거점인 하마에서 북쪽에 있는 사르멘에서도 정부군의 공격으로 최소 2명이 사망했다고 이 단체는 전했다. 인권단체는 홈스에서 시민 2천 명이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를 벌이자 정부군의 진압 작전이 시행됐다고 말했다. 기사

2.9. 2011년 10월

2011년 10월 4일(현지 시간) 반정부 시위에 대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유혈 진압 중단을 촉구하는 UN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결의안을 표결에 부쳤으나 기권할 만한 국가들이 기권했고 반대할 나라들이 반대하는 바람에[8] 9개국이 찬성하고도 거부권으로 인해 부결되고 말았다.

그 직후인 10월 7일 시위대의 중심적 인물이였던 쿠르드계 정치인 타모가 암살되어 현지는 물론 외부 세계에서도 시위가 격화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럽에서는 시리아 대사관이 시위대에게 공격당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9일에는 시리아 정부가 시리아 야권 연대를 인정하는 나라들에게 보복이 있을 것이라고 천명했다.

결국 정치적 절차로 정권 교체 가능성이 사실상 사라진 지금 시리아 국민들은 리비아처럼 무장 조직을 창설해 알아사드를 힘으로 몰아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쯤 되면 천안문 6.4 항쟁(천안문 사태) 아랍권 버전 혹은 중동판 킬링필드나 다름없는 상황.

2011년 10월 3일에는 중부 도시 하마에서 보안군의 발포로 2명이 희생됐으며 시리아 보안군이 2011년 10월 23일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최소 2명이 숨졌다고 한다. 현지 운동가들에 따르면 이날 다라 등 남부 지역에서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반정부 시위대를 향한 보안군의 발포로 최소 2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증언했다. 기사

2011년 10월 25일에는 시리아의 몇몇 국립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영국의 BBC방송이 2011년 10월 24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의 보고서를 인용해 보도했다. 39쪽에 달하는 이 보고서에 따르면 시리아의 최소 4개 국영 병원에서 환자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학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며 실제로 이 때문에 몇몇 부상당한 시민들은 병원에 가지 않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증언하고 있는 상황이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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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네스티인터내셔널에서는 반정부 시위를 하다 다친 시리아 시민들이 병원에서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고 보도했다.

국제 인권 단체인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이 2011년 10월 25일 시리아에 관해 발간한 보고서에서 앰네스티인터내셔널은 39쪽에 이르는 이 보고서에서 "시리아 정부가 환자와 의료진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지적했다. 5월 16일 발에 총상을 입은 28세 환자는 홈즈의 군 병원에서 일하는 한 의사가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난 당신의 상처 부위를 닦아주지 않을 것이다(...). 난 당신 발이 썩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 발을 잘라버릴 수 있도록."라고 증언하기도 했다. 기사

2.10. 2011년 11월 - 무자비한 학살과 시리아의 아랍연맹 회원 정지와 각국의 반응

시리아 정부가 아랍연맹(AL)이 제안한 평화 중재안을 2일 전격 수용했다. 반정부 시위대에 대한 모든 폭력행위를 중단하고 야권과 2주 내 대화를 시작하겠다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반정부 세력과 국제사회는 중재안 수용 약속에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아사드 대통령이 과거에도 정치범 일부 사면, 다당제 도입 등 유화 조치를 내놓은 적이 있으나 자국민을 상대로 한 유혈 진압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보안군은 중재안 합의 다음 날인 2011년 11월 3일에도 중부 도시 홈스에서 민간인 9명을 사살하고 수십 명을 체포했다고 시리아인권관측소가 밝혔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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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1월에도 무자비한 고문과 성폭행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당시 간신히 살아남은 목격자들은 수도인 다마스쿠스의 공군기지 등 구금 시설에서 잔혹한 고문이 일상적으로 가해졌다고 전했다. UNHRC의 조사에 응한 구금 경험자들은 “발가벗겨진 채로 정부군에 성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고, 담뱃불로 항문을 지지는 등 상상하기도 싫은 일들이 자행됐다.”고 말했다. 정부군에 성폭행 당했다는 진술도 이어졌다. 정부 보안군이 한 15세 소년을 아버지 앞에서 강간했고 정부군 3명이 11세 소년을 윤간했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한 증언자는 “정부 요원들이 (고문을 마친 뒤) 다가와 ‘다음은 너야’라고 말했다.”면서 “살면서 그런 공포를 느껴본 적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어린이들마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보고서에 의하면 2011년 3월 중순부터 이달 초까지 최소 256명의 어린이가 하마와 홈스 등에서 정부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고 일부는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고 지적했다. 2011년 8월에는 한 정부군 장교가 “아이가 시위대로 성장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며 두 살밖에 안 된 아기를 총으로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보고서는 “정부는 군인들에 ‘시위대를 무차별 사살하라’고 명령했고 이에 따르지 않으면 고문 등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고 밝혔다. 기사

HRW는 2011년 11월 11일 발표한 보고서에서 시리아군이 민간인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등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밝힌 뒤 아랍연맹이 시리아의 회원 자격을 정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AP 통신이 보도했다. 63쪽 분량의 보고서에 따르면 시리아 보안군은 지난 4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반정부 시위의 거점인 홈스에서만 최소 587명을 학살했다. 특히 보안군은 뜨겁게 달군 철봉과 전기 충격기 등을 이용해 고문을 자행했고 민간인 공격에 대공화기와 장갑차 등 중화기를 동원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기사

이렇게 강경 진압을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계속 번복하고 유혈 진압이 계속되자 결국 11월 아랍연맹( AL)는 카이로에서 긴급 회의를 열어 시리아의 AL회원국 자격을 정지하였다. 반대국은 레바논, 예멘, 그리고 당사국인 시리아밖에 없었으며 이라크는 기권했다. 그래도 이라크는 이 와중에도 시리아를 비호 중이며 비슷한 처지인 예멘과 레바논도 아사드 정권을 옹호하고 있으나 다른 아랍권 국가들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아랍 연맹 상당수 나라들이 독재 및 왕정 국가이며 독재 권력화로 아사드 못지않은 나라도 많음에도 알라위테(알라위)라는 소수 시아파 종파가 정권을 잡은 시리아를 아니꼽게 여기는 게 많다.)

반대한 나라인 레바논은 여당인 헤즈볼라가 시리아와 우호적이라 반대하고 예멘은 아사드와 마찬가지인 독재자인 알리 압둘라 살레가 시위로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기어이 무너졌다.) 이라크는 시리아가 왕창 무너지면 시리아로 간 수백여만 난민+시리아에서 온 난민이 쏟아져 가중될 게 뻔한 점도 있다. 그 밖에 이란이 반대하고 있지만 여긴 아랍 연맹도 아니라서...

로이터통신은 아사드 대통령이 반정부 시위대를 강력하게 진압할 것이라 말했다고 2011년 11월 20일 보도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시리아 사태가 계속될 것이고 시위대를 진압하는 행동 또한 계속될 것이다" "시리아는 외부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2012년 2월 혹은 3월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투표가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그는 "새로운 헌법은 대통령을 선출하는 기초가 될 것이다"라며 "국민들은 투표에 참여해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할지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사드 대통령은 "나는 대통령으로서 테러리스트들이 일으킨 시위를 막을 방법을 알아야 한다"라고 뻔뻔스러운 개드립의 향연을 이어나갔다. 기사

시리아에 대한 유엔 조사위원회는 2011년 11월 28일 "시리아군은 살인과 고문, 성폭행 등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질렀으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부가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밝혔다. 망명자를 포함한 목격자와 희생자 233명을 인터뷰한 유엔 조사위원회는 시리아에 총체적인 인권 위반을 중단하고 구속한 시위자들을 석방하는 한편 언론과 구호요원, 인권 감시자들의 접근을 허용하라고 촉구했다. 독립적인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는 유엔 인권이사회에 제출한 39페이지짜리 보고서에서 "시리아는 보안군이 지지른 반인륜적인 범죄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으며, 조사위원회는 범죄 유형으로 3월 이후 보안군이 민주화 시위자들을 진압하면서 자행한 처형, 고문, 어린이를 포함한 성폭행, 자의적 구금, 납치 등을 지적하고 보안군은 이런 범죄로부터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밝혔다. 조사위원회는 "시민 학대와 발포 명령은 군과 정부의 최고위층에서 나온 것으로 믿고 있다"고 밝혔다. 유엔은 지금까지 3500여 명이 사망했다고 보고 있으며 인권운동가들은 최대 3만 명이 체포됐으며 이들 상당수가 야외 스타디움에 갇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기사

2011년에는 시리아에서 토론을 하던 두 정치인이 생방송 중에 거친 말싸움을 벌이다 서로 싸우기 직전까지 갔기도 했다. 녹취록에 의하면 무스타파 알로쉬, 전 의원 반시리아운동가는 "나는 아사드 대통령을 믿지 않아요. 그는 거짓말쟁이이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하자 파예즈 슈코르, 집권 바트당 당수는 "당신이 거짓말쟁이야. 그리고 너의 두목이 거짓말쟁이야. 부끄러운 줄 알아!"라고 말했고 갑자기 볼펜과 물컵이 날아가고, 의자까지 들면서 서로를 향해 돌진하다 가까스로 제지당하는 일이 있었다. 기사

2.11. 2012년 2월 - 학살의 확산, 정부군에 의한 언론인 살해

2012년이 되어도 시위대와의 갈등은 계속 되고 있는데 이젠 지속적인 학살극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2012년 2월 3일 하룻밤 만에 2백 수십 명이 숨졌다고(인권단체 주장) 알려지고 있다. 시위대가 있는 도시 중심가에 박격포로 다수의 포격을 가하여 난 피해. 다른 도시에는 전차를 진입시키는 등 피해는 계속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시위가 격화일로로 가면서 사망자가 2월에만 5백 명을 넘어가고 있다. 주위에서도 심각한 우려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알 카에다마저 한 목소리로 반정부군을 두둔하고 있는 상황. 아랍 연맹에서마저 UN에 '얘들에게 평화유지군 좀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이제 시리아 정부는 국가와 테러 단체를 막론하고 국제적으로 완벽한 정치적 포위 상태.

2012년 2월경에도 시리아 관련 결의안을 안보리에 부쳤으나 역시나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으로 부결, 그 다음에 총회에서도 역시 반대했지만 총회에서는 찬성 137개국, 반대 12개국, 기권 17개국 이렇게 되어서 가결이 됐다.

2월 22일에는 정부군의 포격으로 서방 기사 둘이 사망했다. 이 중 한 사람은 전설적인 종군기자인 마리 콜빈으로, 꽤 충격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더 충격적인 것은, 이것이 언론인을 노린 정부군의 의도적인 포격이었다는 의심이 있기 때문이다. 데일리메일의 보도에 의하면, 시리아군의 통신을 감청한 결과 '홈스 지역에 들어온 언론인을 살해할 것. 이는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여겨질 것이므로 상관없음'이라는 내용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보도에 의하면, 시리아군은 휴대전화 추적 등을 통해 해당 기자들의 위치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이외에도 여러 기자들이 포격으로 인해 부상당했다.

2.12. 2012년 5월 - 훌라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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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에는 민간인 100명 이상이 희생된 훌라 학살이 있었다. # 관련 기사( 프레시안) 유엔의 공식사망자만 108명에 어린이가 49명(10세 이하 어린이 32명), 여성 34명이며, 추가 사망자는 늘어나는 상황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시리아 대사를 고국으로 추방시키는 서방국가가 대거 늘었다고 한다.

2.13. 2012년 6월 - 다시 불이 붙다

2012년 6월에는 시리아를 지지하던 제스쳐를 보이던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마저도 대권이 확정돼서 그런지 미국과 뜻을 같이 하겠다며 시리아에서 손을 떼겠다는 제스쳐를 내비쳤고 푸틴 "시리아 문제, 미국과 공통 견해 많아" 심지어 푸틴은 "시리아 국민들 지도자 스스로 선택해야"라 코멘트했다.

일부 언론들은 미국의 시리아 군사적 개입까지 보도하고있다. "미국 시리아 침공 결정, 시점 조율 중"

결국 미-러-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아사드가 권력을 이양하면 대량 학살 책임을 사면하는 예멘식 해결인 것. 하지만 맘대로 될까? # 아직도 서방과 러시아는 정권 제제 여부를 두고 심각하게 갈등 중이다.

2.14. 2012년 7월 - 내전

파일:시리아 국기.svg 시리아 내전

7월 12일에는 중부 하마의 트렘사 마을에서 16개월 만에 최대인 150~220명 규모의 학살이 일어났다. 탱크 헬리콥터를 동원한 정부군 폭격과 민병대 샤비하의 즉결 처형 합작품.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과 하마 혁명위원회에서는 아주 난리가 났다.

이 사건 이후 전국적으로 무력 충돌이 확산되면서 14일 국제 적십자위원회에서 현 상황을 내전 상황으로 규정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인도법 위반 대상자를 전범으로 규정하고 기소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진행상황은 시리아 내전 참조.

3. 시리아 민주화 운동은 왜 파국으로 치달았는가?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과격화된 것은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리아 국민들이 민주주의 국가를 경험해보지 못했다는 점에서 발단을 찾을 수 있다. 시위를 많이 해본 사람들은 과격한 행동을 벌이더라도 그 강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라가지 않도록 군중심리를 통제하려 하지 결코 막 나가게 두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도 민주화 이전의 4.19혁명이나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부마 민주 항쟁, 대학교 운동권의 데모는 매우 과격했지만 민주화 이후로는 그 어떤 시위대도 자신들의 메세지를 전하는 차원에서의 분쟁을 일으킬 뿐 공장을 폭파시키거나 무기고를 털어 반군을 결성하고 해방구를 설치하지는 않는다. 여론이나 국가가 용인할 수 있는 한계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리아 국민들은 정권의 불법 체포 및 고문에 맞서 시위를 벌인 것까지는 좋았지만 점차 군중심리를 타고 경찰서를 불태우거나 진압 경찰을 구타 및 살해하는 등의 행동이 벌어졌으며 이를 통제할 지도부도 없었고 노하우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진압의 명분을 얻은 아사드 정부는 시위 첫날부터 전투경찰을 동원해 몽둥이와 방패로 강경 진압을 했고, 일부 시민은 체포되어 끌려가기까지 했다. 사실 여기까지도 2000년대 이전까지 한국의 시위와 크게 다르진 않다.

문제는 시리아 국민들 중에는 열악한 치안과 아랍 부족 특유의 풍습 때문에 총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괜히 미국이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 의심지역 마을 집안 곳곳 지하실에서 개인 무기고가 한도 끝도 없이 나와 고생한 게 아니다. 이들이 폭력 진압에 대항해 총기를 들고 나와 자경단을 자처하면서 시위대를 보호하기 시작했고, 평범한 진압장비를 가진 경찰들은 시위를 진압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한편 시리아 경찰도 모두 AK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어 시위대들을 향해 위협사격을 가하며 빠르게 시위를 해산시키려 했고, 이로 인해 점차 양측에서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알 자지라 같은 카타르 언론이 사태를 선동하기 시작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에 의해 시위는 한층 과격화되었으며, 결국 위수지역의 군부대가 진압에 참가하기 시작했으나 시위가 과격화되거나 관공서로 행진하기 전까지는 선제 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위 알레포 어스퀘이크 다큐멘터리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반정부 시위를 진행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더이상 자경단 수준에서는 군부대가 투입된 시위 진압을 막을 능력이 되지 않았고, 점차 시위 진압에 회의감을 느낀 장교와 병사들이 탈영하여 시민 측에 합류하면서 정부군과의 전투는 본격적인 무장 분쟁 수준으로 올라갔다.

여기에 독재 정치 하에서 강제적으로 봉합되어 있던 수니파의 우월주의, 알라위파에 대한 증오, 그리고 친정부 세력과 반정부 세력이 서로 정치적인 증오를 거듭하면서 각자 자경단을 구성하여 잔혹한 행위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중 친정부 민병대들을 반정부 세력이 싸잡아서 샤비하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샤비하는 1980년 정권의 측근인 나미르 알아사드가 조직한 밀수 전문 깡패 조직으로 하페즈 알아사드 시대에 위세가 대단했으나,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부패를 혐오한 그에 의해 폐지되어버린 조직이었다. 그러나 친정부 깡패였다는 점 때문에 반정부측에서 친정부 민간인들을 모조리 샤비하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었으며, 이는 반정부 편을 드는 서방 및 아랍연맹 측에 의해 정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깡패조직인 것처럼 선전되었다.

여기에 아사드의 오판도 큰 역할을 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무한 연임제 폐지를 골자로 한 헌법 개정을 통해 민주주의 시민들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무슬림 형제단에 대해 전향적인 의사를 피력하면서 이슬람 인사들을 석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즉시 하마, 이들리브, 알레포 등의 자기네 조직으로 돌아가 사우디, 카타르의 지원을 받아 본격적인 반정부 무장투쟁을 개시했고, 심지어 이라크 알 카에다에 지원을 요청하여 알 누스라 전선을 결성하게 만들기도 했다. 2019년 현재까지 남아 있는 반정부 무장단체 중 대다수가 바로 이 과격 이슬람 계열이며,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에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힌 장본인들이기도 하다.[9]

사태가 격화되는 와중에 터키, 프랑스, 사우디, 카타르 등이 계속해서 반정부 세력에 대한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리비아처럼 아사드도 무너질 것이라고 선동하며, 구체적으로 자금과 무기를 지원한 사실 또한 반정부 세력이 거대화된 원인이기도 했다. 시리아 사태가 시민-경찰 수준의 문제를 떠났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탄이 바로 2011년 6월 이들리브 주 지슈르 앗슈구르 시에서의 이슬람 무장단체 등장과 경찰 몰살, 그리고 최초의 군사 작전이었다. 하지만 그후 1년동안 시위-진압-충돌-교전-정부 승리 및 체포-시위를 반복하는 폭력 사태가 점진적으로 전국적으로 빈발했으며, 2012년 7월 반정부군이 수도 교외지대를 장악하고 수도 다마스쿠스 시를 침공하는 "다마스쿠스의 화산"작전을 결행하면서 비로소 내전으로 판정되었다.

결국 내부적인 폭력 사태의 에스컬레이션, 외세의 개입, 언론의 고의적인 사태 과장과 반정부 선동, 이슬람 세력을 풀어준 아사드의 오판, 서로를 증오하던 국민들 사이의 정치 성향간의 충돌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 점진적으로 내전으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즉, 아사드 정권이 시리아 내전이 일어나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시리아 민주화 운동 진행 당시인 2011~2012년에는 철저하게 반정부측과 서방측의 시각에 따른 보도가 중심이었기에 아사드 정권의 사태 수습 방안들이 알려지지 않았던 것. 대표적인 사례는 아사드가 2011년 3월 다라 시의 유혈사태에 대해 책임자를 처형하고 특사를 파견하여 유혈사태를 수습하려고 노력했던 것과 시위대의 총기 사용이나 경찰서 습격 같은 과격 행위나 경찰서 방화, 경찰 사망 같은 사실이 그 예이다.


[1] 특히 카타르는 알 자지라 언론을 이용하여 시리아 사태를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다. [2] 내전 초기 민주화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인사들 대부분이 현재는 사망했거나 외국으로 망명한 상태다. [3] 현 독재자 뱌사르의 아버지인 전 대통령 하페즈 알아사드의 집권에 반대하는 무슬림 형제단이 1979년 아사드와 요인들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한 것(그 대신 아사드의 친구이자 심복인 육군장관이 희생됐다)에 대한 보복으로 본거지인 하마 시를 아우인 리파아트 알아사드 중장에게 명령하여 불바다로 만든 사건. 하지만 무슬림 형제단들도 총기와 자폭 공격으로 응수하여 시리아군도 1천여 명 사상자를 낸 격렬한 전투였다. 추정으로 약 2만여 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이 당시 지휘관인 리파아트는 하페즈가 죽고 나서 권력 싸움을 벌였으나 뱌사르에게 패하고 숙청당하여 모든 권력을 잃고 구금, 귀양당했다. [4] 시민군의 중심 도시가 되었다. 내륙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여러 개의 위성도시를 거느렸다. 5.18 민주화운동에 비견해 "시리아판 광주"라는 시사in의 평가도 있다. # [5] 사실 고문 당한 끝에 사망한 게 아니라 고문 후 배에 권총탄 1발을 쏴서 서서히 죽어가게 만들었다는 정황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어린 소년을 살해했는 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6] 참 여러 독재국가에서 써먹는 논리이다. 광주민중항쟁 때에도 정부에서는 북한의 조종이라는 말이 나왔었고(심지어 종편에서는 최근까지도), 티베트나 위구르 등이 독립운동을 할 때에도 중국정부는 몇몇 분리독립 테러리스트와 중국을 분할하려는 외국의 음모에 의해 일어났다는 식으로 말한다. 그러나 시리아 사태의 경우 터키 카타르 사우디가 외교적 압박을 가함은 물론 레바논 등에서 무장세력이 유입되었고, 특히 카타르는 알 자지라방송을 통해 왜곡보도를 계속하여 알 자지라를 신뢰하던 시리아 국민들을 분노하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결국 2012년 들어 터키 요르단에서 반정부군을 훈련시키고 무기를 지원하며, 사우디 카타르 등이 자금지원, 특히 알 타우히드 여단 같은 과격 이슬람 군벌을 집중 지원하면서 외세의 개입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 되었다. 이 일 때문에 당시에는 아사드를 미워했지만 지금은 비판적 지지로 돌아선 관찰자들도 수두룩하다. [7] 시리아의 시위가 오디세이 새벽 작전 이후 다시 벌어진 걸 보면 영향이 없다고 볼 수는 없다. [8] # 기사 참고. 참고로 중러의 동시 비토 2008년 짐바브웨의 무가베 막장 정권 제제 반대 이후 3년 만에 처음이었다. [9] 대표적으로 2018년 초까지 수도 다마스쿠스를 직접 위협하는 동부 고타의 주요 세력인 "자이쉬 알 이슬람"을 창설했던 자흐란 알루시가 이때 석방된 인사였다. 그가 속한 알루시 가문은 동부 고타 지역의 도우마 시를 기반으로 아사드 정부에서 종교 관련으로 일해 왔으며, 사우디아라비아와 인맥이 닿아 있었다. 자흐란 알루시는 출소 후 즉시 리와 알 이슬람(이슬람 여단)을 창설하고 사우디아라비아와의 인맥을 이용하여 광범위한 자금 지원을 받으며 수많은 무장 단체들을 흡수, 자이쉬 알 이슬람(이슬람의 군대)로 확대 개편했다. 2015년에는 "알라께서는 주인이시다" 작전을 결행하여 다마스쿠스-홈스 고속도로를 차단하고 콸라문 산악지대의 정부군 시설들을 장악, 정부를 파멸의 위기로 몰아넣은 적도 있었다. 작전명이나 출신을 보면 알겠지만 민주주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슬람 극단주의자였다. 2015년 12월 25일, 시리아의 공습으로 자흐란 알루시는 사망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무함마드 알루시가 대표직을 맡아 2018년 다마스쿠스 강철 작전으로 동부 고타가 해방될 때까지 건재한 군사 조직으로 활동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