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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문하시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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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국 문하시중 고려국 팔도도통사 최영 崔瑩 | Choe Yeo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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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심 최대명이 그린 국가 표준영정. | |
시호 | 무민공(武愍公) |
봉호 |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 |
본관 | 동주 최씨(東州 崔氏) |
생몰년 |
1316년(
충숙왕 3년) ~
1388년(
창왕 즉위년) (향년 72세) |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1] 혹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2]으로 추정 |
이름 | 영(瑩) |
아들 | 최담 |
딸 | 영비(寧妃) 최씨 |
아버지 | 최원직(崔元直) |
어머니 | 삼한국대부인(三韓國大夫人) 지씨(智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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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奮威光國鬢星星 나라를 빛내기에 평생을 바치니
學語街童盡識名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一片壯心應不死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千秋永與太山橫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라
변계량이 최영을 추모한 시
學語街童盡識名 어린 아이까지도 그 이름 알고
一片壯心應不死 한 조각 장한 마음 죽지 않아서
千秋永與太山橫 천년토록 태산과 함께 남으리라
변계량이 최영을 추모한 시
見金如石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
아버지 최원직의 유훈.[3]
고려 말의 장수이자 고려 말기를 대표하는 인물. 고려 최후의
충신이다. 문(文)으로는
정몽주가 있다면 무(武)로는 최영이 있었다.[4]아버지 최원직의 유훈.[3]
최영이 생전에 봉해진 봉호는 철원부원군(鐵原府院君)[5]이고 사후 추증된 시호는 무민공(武愍公)이다.
2. 생애
충선왕 제정 재상지종 15가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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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후 가문 | ||||
경주 김씨 순경태후家 |
정안 임씨 공예태후家 |
경원 이씨 인예태후家 |
안산 김씨 원성태후家 |
당성 홍씨 명덕태후家 |
|
재상 가문 | |||||
언양 김씨 김취려家 |
철원 최씨 최유청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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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강 채씨 채송년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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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이씨 이자림家 |
황려 민씨 민영모家 |
횡천 조씨 조영인家 |
파평 윤씨 윤관家 |
평양 조씨 조인규家 |
2.1. 공민왕 시기
아버지는 최원직이고 어머니는 봉산 지씨이다. 최영은 본처 문화 류씨에게서 장남 최담, 차남 최언, 적녀 1명(남편 사공민)을 얻었고 첩인 씨부인에게서 우왕의 아내가 되는 영비 최씨를 얻었다. 최영은 관직에 늦게 발을 들인 편이었는데 30대 중반이 되고 나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하였으며 당시로는 상당히 늦은 나이였다. 고려 연안에 왜구가 출몰하기 시작한 시기와 최영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일치한다. 공민왕의 즉위 직후 고려는 한치 앞도 알기 힘든 엄청난 격변 속에 있었다. 고려 여인의 몸에서 태어난 왕의 입지는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웠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왜구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최영은 젊은 시절부터 양광도[6] 도순문사 휘하에서 당시 쳐들어오던 왜구를 수 차례 격파하면서 이름을 알리게 된다. 공민왕 즉위 후부터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공민왕 재위 초반인 1352년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면서 그 공로로 호군에 임명되었고 대호군으로 승진하였다.1354년 원나라에서는 한족 반란군인 장사성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였다. 이때 공민왕은 원의 요청에 따라 고흥부원군 유탁을 총지휘관으로 하여 우정승 염제신, 대호군 인당, 최영, 최원 등 40여 명의 장수와 함께 중앙의 정예군 2천명을 주어 보냈으며, 고우성 전투에서 최영 등의 고려군은 스물여덟 번의 전투를 치렀다.[7]
그렇게 고우성을 함락하기 직전이었으나, 이때 장사성 세력 정벌군의 사령관인 재상 토크토아의 경질으로 인해[8] 사령관의 부재로 혼란에 빠진 연합군은 완전히 와해되어 버렸다. 당연히 고려군도 피해를 입었기에, 이제 돌아가는 줄 알았지만 잘 싸우는 고려군에게 또다른 미션이 주어지니 바로 황하와 장강 사이에 위치해서, 뚫리면 바로 하북으로 올라갈 수 있는 회수 이남 최후의 방어선인 회안로 수비를 맡은 것.[9]
장사성은 군선 8,000척을 동원해 약 30만 명의 대군으로 고려군 포함 2만명이 주둔하던 회안성을 포위했고 이권, 최원 등 원수 6명과 7,000명의 병력이 전사했으나 최영이 선두에서 공성 병력을 격퇴하고, 여러차례 창과 칼에 찔렸지만 그럼에도 아예 성문을 열고 끝까지 적을 추격, 섬멸하는 공훈을 세웠다.
토크토아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최영은 장사성 진압전에서 복귀한 후 유탁, 염제신 등과 함께 공민왕에게 원나라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했다. 이는 강릉대군으로 원나라에서 생활하는 동안 계속해서 원나라의 쇠퇴 조짐을 감지했던 공민왕의 뜻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공민왕은 이제 스물다섯이었고 최영은 서른아홉이었다. 3년간 숨죽인 끝에 드디어 공민왕과 고려의 반원 자주 정책에 신호탄이 쏘아올려진 것이다.
공민왕은 반원 운동을 일으켜 기씨 일파를 숙청하고 동시에 최영으로 하여금 압록강을 건너가 원의 역참을 공격하게 한다. 최영은 서북면 병마사 인당과 함께 서북 지역으로 출진해 압록강 서쪽의 8참을 공격하여 옛 영토를 수복했다.
이후로도 왜구의 침공은 계속해서 거세졌다. 당대의 왜구 침입은 규모와 피해 면에서 임진왜란에 비견될 정도였는데 무려 수백 차례를 쳐들어왔으며 각지에서 최영은 끝없이 왜구의 침입을 방어하였다. 북쪽에는 홍건적, 남쪽에는 왜구가 날뛰던 시절이었는데 장수들은 제대로 방어를 하지 못했고 겁을 먹고 도망쳐 온 장수들을 옥에 가두는 사태로 빈번했다. 최영은 동북면체복사로 동북면 방어에 참여했으며 양광전라도왜구체복사가 되어 오차포의 왜구들이 배 400척으로 침공하자 복병으로 격파하였다. 공민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동북면과 서북면에서 각각 왜구를 방어하게 하였으며 나중에는 양광도[10]와 전라도의 체복사로 삼아 감찰 임무까지 한꺼번에 시켜가며 어떻게든 왜구를 막아보려 애썼다. 명장 최영은 왜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고려를 돕지 않았다. 1360년 홍건적마저 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 것이다. 홍건적은 1차 침입으로 지금의 평양시 지역인 서경을 함락시키는데 침략에 맞서 최영은 이방실 등과 함께 빼앗긴 서경 일대를 탈환하고 달아나는 적들을 격멸하는 큰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최영은 평양윤 겸 서북면순문사가 된다. 또한 이후 서북면도순찰사 겸 좌산기상시가 된다.
2년 후인 1362년 홍건적이 또 한 차례 고려로 쳐들어오는데 이번에는 10만 대군이었다. 조정 대신들과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난하기 위해 분주히 준비를 이어나갔고 그 상황에 최영은 "주상께서는 조금 더 머무르시며 장정들을 모집하여 종사를 지키소서"라고 하며 개경 방어를 강력히 주장했다.[11] 버티면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강경하게 버틴 것이다. 그러나 결국 공민왕은 경상북도 안동까지 피난갈 것을 결정하였고 개경까지 함락되는 사태가 발생하였는데 이 때 최영은 개경 수복전에서 활약하며 큰 공을 세웠다.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싸워 수도 개경을 탈환한 것이다.
홍건적을 물리친 뒤 공민왕은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중 개경 인근의 흥왕사에서 김용의 쿠데타가 일어난다. 바로 그 유명한 흥왕사의 변이다. 이 때 밀직사의 자리에 있었던 최영은 개경에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밤새 달려와 반란군들을 진압하였으며 김용은 최영의 손에 죽었다. 최영은 왕을 구출한 공로로 일등공신으로 책봉된다. 이 때부터 최영은 그 초상을 공신각에 걸어두게 된다.
이후 1년은 왜구와의 끝없는 전쟁이었는데 213척이라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왜구가 고려 수안현을 공격한 것이다. 이듬해인 1364년 원나라에서는 덕흥군과 최유가 기황후의 후원을 받고 1만명에 달하는 군대를 이끌고 고려로 쳐들어온다. 최영은 이를 격파하는데 나서야 했다. 최영은 이성계와 압록강을 건너온 원나라 군대와 싸워 원나라 군대를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지만 북방과 싸우는 동안 왜구는 엄청난 기세로 침공해오기 시작한다. 2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갈도로 쳐들어온다. 무능한 장수들은 방어전에서 대패를 당하였고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은 쑥대밭이 된다. 그러나 최영은 연주에 칩입한 원나라 동녕로 만호 박백야대와도 싸워야 했다. 최영은 박백야대를 격퇴하고 곧바로 이듬해 교동도와 강화도에 출몰한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동강에 나가 지켰다.
대전란의 시대에 최영은 단 1년도 쉬지 않고 고려 전역을 누비며 최전방에서 피 튀기는 전투를 계속해서 치러야 했는데 이성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혼자서 모든 기록적 대전투를 치른거나 마찬가지였다. 고려 말기에 최영이 있는 전선은 방어가 되었고 최영이 없는 전선은 무너졌으며 최영의 자리는 대체가 되지 않았다.
1365년 등용된 신돈의 모함으로 최영은 처음으로 계림윤으로 좌천당해 임지로 떠나게 된다. 이유는 앞서 나온 동강의 방어전에서 왜구들이 고려 세조 왕륭의 영정을 훔쳐간 사건 때문이었다. 최영은 "내가 죄를 지었음에도 왕이 나를 계림윤으로 임명했으니 이도 왕의 은혜이다."라며 탄식하였고 이후 임지로 떠나는데 신돈의 모함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최영이 이구수, 양백익, 석문성, 박춘과 함께 내신 김수만과 결탁하여 상하를 이간질하는 불충을 저질렀다고 고한 것이다. 당시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은 이 때도 또 신돈의 손을 들어주었다. 신돈의 일파인 이득림이 직접 최영을 국문하였고 이 일로 최영은 관직을 삭탈당하고 가산을 몰수당한채 6년간의 귀양길에 오르게 된다.
6년 후 최영은 신돈이 처형되자 찬성사로 돌아온다. 다시 전함을 만들었으며 공민왕과 수군 양성을 논의하기 시작한다. 당시 고려의 여론을 살펴보면 '적은 선박의 운항에 능하니 어차피 해전으로는 답이 없다. 어차피 질건데 함선을 건조하면 백성들은 안 그래도 힘든데 더 힘들어진다'였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고 수군 양성은 유일한데다가 가장 급한 대항책이었다.[12] 이 무렵 최영은 계속해서 함선 건조에 관심을 보였는데 전선 2000척 건조 계획이라는 엄청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당연히 백성들의 반발로 인해 계획은 철폐되었다. 다만 계획이 당시로선 현실성이 없었지만, 조선 초에도 꾸준히 전선을 건조하면서 기존에 왜구들과 싸우며 높아진 질에 맞는 양을 건조해야 한다는 것은 사관들도 인정은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필요했다는 것이다.
공민왕이 시해될 무렵 최영은 탐라 정벌에 나서 있었다.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13]을 평정하러 떠난 것이다. 야사에는 최영이 갈대씨를 연에 묶어 날려보내 심은 후 몇 개월을 기다렸다가 갈대가 무성히 자라자 이를 이용해 화공법을 써서 반란군을 토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 목호의 난은 1374년 8월 28일 제주도에 도착해 9월 22일 평정을 완료하고 제주도를 떠났을 정도로 단기전이었으니 야사일 뿐.
살아생전 계속 뒤숭숭한 반역 사건에 시달리던 공민왕은 44세의 나이에 홍륜의 손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고 최영은 타지의 전장에서 군주의 죽음을 전해듣는다.
2.2. 우왕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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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대첩(鴻山大捷) 기록화 박창돈 그림 |
왜구만이 아니라 타국에도 명성이 떨쳐져 최영이 죽으면 최영 개인이 죽는 수준이 아니라 국가의 위신 자체도 직결된다고 본인이 스스로 말하기도 했다. 일개 한 장군의 생사에 따라 국가가 위태로워질 정도라 이 때문에 전장에 함부로 나서는 것도 자제해야 할 정도라고 하니[14] 이쯤 되면 진정한 고려의 최종보스이자 수호신이었다. 심지어 당시 권신인 이인임도 이런 문제로 최영만은 절대 건들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당시 고려가 능력있는 개인들에게 의지해야할 정도로 나라가 심각하게 몰락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최영 사후 고려가 무너지는 것에서 사실임을 옅볼 수 있다.[15]
이후 조정에서 영삼사사, 판삼사사등 요직을 겸직하게 되면서 이인임과 함께 우왕을 보좌하게 된다. 최영은 충직함, 청렴함, 용맹함, 준엄함을 모두 갖춘 이견없는 용장이자 충의지사였으나 이인임이 장악한 정권하에서 다소 불안정한 정치 행보를 보였다. 이인임이 지윤 일파, 양백연 일파, 경복흥 일파, 목인길 일파 등 반대파를 차례로 숙청하는 과정에 최영은 항상 자신의 무력을 동원했는데 이를 통해 최영의 지위는 견고해졌다. 다만 이 부분은 나중에 조선 건국 세력에게 비판거리가 됐다.
비록 이인임이 우왕에게 양아버지 대접과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었고 이인임의 의지가 항상 우왕의 어명 형태로 내려왔다고는 하나 이인임은 권모술수를 마다않는 권신이자 간신이었다. 그러나 충신이라는 최영은 정치적으로는 이인임의 행동에 이견이 거의 없었다.
물론 이는 최영이 공민왕 대부터 왕을 섬기는 방식 그대로였다. 그는 충신이었고 군왕의 명령에는 어떤 토도 달지 않는 칼날같은 무인이었다. 최영은 공민왕이 불안정한 시기에 모함을 믿고 벌을 내렸을 때도 마다않고 국문받고 귀양을 떠났으며 적은 군사로 위험한 전장에 내보낼 때도 군말없이 최전선에 나가 피 튀기는 전쟁을 하던 빳빳한 무인이었다. 최영은 핑계도 변명도 없이 모든 명령을 충성으로만 수행하는 무장이었고 심지어 모든 전투를 승전으로 이끌었다. 그의 강직함은 현명한 왕 아래서는 그를 난세의 명장으로 만들었지만 아둔한 왕은 그를 술수에도 사용하였다.
최영은 명령에는 이의없이 따랐으나 우왕의 난행에 간언하기도 했다. 이 중에는 충혜왕과 충숙왕의 사례를 비교해서 심각성을 강조하는 간언도 있다.[16] 공민왕 때도 간언을 하다 유배를 간 적이 있던 최영이었다. 왜구의 침입이 갈수록 심해지자 도성을 철원으로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는데 최영은 굳게 지킬 것을 주장하며 반대했고 교동과 강화 일대의 사전을 혁파하여 군자에 충당하게 하였다.
노년에 다다랐음에도 항상 그래왔듯이 직접 최전방에 나가 왜구를 막다 병에 걸리기도 하는 등 우왕 시기에도 계속해서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무반의 몸으로 수시중, 영삼사사 등 정계의 자리도 함께 겸하게 됐다. 그러나 여전히 큰 전투에는 전장에 나가서 왜구를 격퇴했다.
우왕 12년에 당대의 실권자이자 집정대신이며 권문세족의 대부였던 이인임이 사직했고, 그의 빈자리는 이인임 일파였던 임견미[17]와 염흥방[18]가 채웠다. 두 사람은 이인임의 밑에 있었을 때 높은 권세를 가지고 백성의 토지와 국유지까지 강점하는 등 비행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는데, 이인임이 사퇴한 후에는 도당의 재상이 되어 정계의 핵심이 됐고 여전히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우왕은 이인임은 끝까지 싸고 돌았으나 이인임 일파에 대해선 답답증과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때 조반의 옥사를 계기로 최영도 결단을 내리게 된다. 최영은 우왕의 밀령을 받고 이 난행을 타파할 것을 작심하였고 염흥방, 임견미와 일당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성계를 끌어들였다. 그리하여 우왕 14년에 이인임 일파를 숙청했는데, 이 사건이 일명 ' 무진피화'다. 최영과 이성계는 군대를 동원하여 임견미와 염흥방을 체포한 다음 처형했고 그들의 일가 친척들도 죽였다. 은퇴한 이인임도 무사하지 못하여 체포되어 귀양을 가 창왕 때 귀양지에서 사망한다. 이로써 이인임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공으로 최영과 이성계는 재상직에 올라 고려 정계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무진피화는 이성계에겐 최영을 통한 화려한 권력 핵심 간부로 급상승한 데뷔이기도 했다. 이후 우왕은 최영에게 장인어른이 되어줄 것을 애원했다. 우왕으로서는 최영을 든든한 정치적 후견인으로 삼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난행을 간했던 이를 자신의 정치적인 후견인으로 삼고 걸림돌을 제거한 측면에서 보면 청년기의 우왕은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성향만 제외한다면 정치적인 안목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최영 본인은 본처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19] 거절하며 난색을 표했지만 최영의 부하 정승가, 안소가 그를 설득하여 결국 혼인은 이루어졌고 최영은 왕의 장인이 된다. 우왕과 결혼한 최영의 딸이 바로 우왕의 제2비인 영비 최씨다. 이렇게 최영은 임금의 장인이 되어 늘그막에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20]
2.3. 요동 정벌
중국에서 원나라가 북쪽으로 쫓겨가고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고려와 명나라는 외교적 분쟁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우왕 14년, 명에서 귀국한 설장수가 명나라 황제의 성지를 전한다. 그 내용인즉 "철령 이북 지역을 모두 명나라 땅으로 귀속시키도록 하라"라는 명령. 북변과 그 일대에 거주하는 고려인, 한인, 여진 등 모든 백성까지도 요동에 귀속시키겠다고 통보를 내린 것이다. 철령위 문제로 고려 조정은 발칵 뒤집어졌다. 안 그래도 우왕 기간에 명나라는 기싸움에서 고려를 제압하려고 미친 갑질을 하는 중이었다. 왜구로 탈탈 털린 고려에 명나라가 너무 과도한 공물 요구를 해서 조정과 백성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진 터였다. 더구나 공민왕의 사망에 간접적으로 일조한 목호의 난도[21] 명나라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말을 징발하다가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의 북쪽 영토를 송두리째 빼앗아가겠다는 명의 주장에 고려와 명나라는 영토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이에 반발한 최영은 우왕에게 대대적인 요동 정벌을 진언했고, 결국 팔도도통사의 자격으로 원정을 총지휘했다. 약 5만 정도의 병사와 2만필의 말이 동원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2차 요동 정벌'[22]이다. 생전 공민왕의 북벌은 쌍성총관부를 포함해 동북면과 서북면을 건너 요동까지 이른 바 있었다. 최영과 선대부터 내려온 강경파 무신들은 요동 정벌을 강력하게 원했다.
그러나 최영의 요동정벌의 성공이 가능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북변의 사정이 안정되지 않았으니 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때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들어 반대한 것이 결과적으로 맞아떨어졌기에 불가능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또한 요동정벌에 성공한다치더라도 더 큰 문제는 과연 유지가 가능한가이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정벌에는 성공하였을 것이나 방어하느라 뼛골이 다 빠지고 쇠락했을걸?"이라고 평가했다.[23]
당시 고려에 최영과 이성계라는 걸출한 무장이 있었고 한반도 역사상 유례가 없을 만큼 다수의 전쟁을 치르던 시절이었기에 병사들과 장군들의 실전 경험도 풍부해졌다. 그렇지만 당시 고려는 간신히 여러 전란에서 벗어난 상황이었고[24] 또한 바로 이 해(1388년)에 명나라를 괴롭히던 요동의 군벌 나하추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명에 항복해 요동의 군벌 세력으로 버티는 중이어서 뚫기 만만한 상대가 절대 아니었다. 북원도 명나라 장군 남옥이 이끄는 15만 병력에 박살나는 바람에 크게 쇠약해져 있었고, 애초에 이 영토분쟁도 명나라 역시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 못할 이유가 없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단순히 병력 규모로만 봐도 명의 방어 병력이 고려군의 3배에 달했기에, 고려군이 아무리 백전의 정예군이었어도 상당히 고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고려사에 기재된 병력 5만은 1명 단위까지 정확히 기재된 실 병력수이고, 중앙 정예군의 수로만 센 것이며, 당시의 전쟁에서는 가는 길에 병사를 징발해가며 이동하였기 때문에 다소 높게 쳐야 하기는 한다.[25] 또한 당시 동아시아에서 호왈이 일반적인 관습인 걸 감안하면 명군과 나하추의 15만, 20만의 수치 또한 실병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이유 역시 없다고 볼 수도 있다.[26]
최영은 원래 후배 무장인 이성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여 그를 신뢰하고 있었는데 사불가론을 내세우는 이성계와 정면으로 충돌한 계기로 관계가 상했다.[27] 최영은 상대적으로 적은 병사로 실력을 보이려면 속도전이 답이라고 생각했으며 시기를 미루자는 주장은 시간을 끈 다음 정벌 무산을 노리는 의도로 해석하여 반대파를 처형하면서까지 요동 공격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그런데 최영은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한 출정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본인은 출정하지 않고 우왕과 함께 고려에 남는 이율배반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는 팔도도통사로서 최영 본인이 직접 출정해 군사를 지휘하려는 것을 우왕이 나서서 극구 말렸기 때문이다. "선왕이 시해당한 것은 경이 남쪽(탐라)을 정벌하느라 개경을 비워서 선왕 곁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인데, 이제 경이 북쪽으로 가버리면 내 옆은 누가 지켜주느냐?!"고 땡깡을 피운 것이다. 이는 목호의 난 당시의 사태가 우왕에게 트라우마로 남았기 때문이다. 최영의 출전이 밀리면서 군사의 지휘권은 이성계와 조민수의 손에 들어갔고 이것이 최영의 결정적인 패착이 되고 만다.
2.4.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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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격화된 최영을 묘사한 그린 무신도. 왼쪽은 서울
국사당에 걸려 있다. 참조 링크 글 맨 마지막 무신도 사진 참조. |
부대를 이끌고 북진하던 이성계는 위화도 근처까지 진군하였으나 비가 쏟아져 길이 막히게 되고 개경의 우왕과 최영이 회군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끝까지 거부하자 함께 출전한 조민수와 함께 그 유명한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접한 최영은 도성에 몇 없는 병사를 추려서 반격에 나선다. 그러나 마지막 한 명까지 닥닥 긁어 모두 요동공략군으로 출진시킨 상황인터라, 개경엔 병사도 변변치 않았고 주어진 시간도 너무 짧았다. 게다가 이성계가 이끌던 원정군인 반란군의 회군 속도가 어마어마하여 최영과 우왕이 대비할 시간이 더욱 없었다. 그래서 격문을 지속적으로 보내며 회유를 시도하는 한편 어떻게든 병력을 확보해보려고 애를 썼다.
백전노장 최영은 7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조민수의 부대를 패퇴시키는 등 최후의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되지 않는 병력으로 수만 명의 군세를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최영은 끝까지 저항했다. 이유는 어떻게든 버티며 이성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퍼지면 왜구를 막느라 각지에 남아있던 방어 병력들이 개경으로 집결할 테고, 그러면 이유야 어쨌든 반란군인 이성계로서는 불리해지기 때문이었다. 이성계가 강행군을 하며 빠르게 회귀한 것도 이러한 점을 조기에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결국 머릿수에서 밀려 중과부적으로 패하고 반군이 개경을 점령한 뒤 최영은 체포되고 만다. 이때 최영을 잡은 이성계는 그에게 "이와 같은 사변(事變)은 내 본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의를 거스르는 것은 국가가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힘들게 되어 원망이 하늘까지 이르는 까닭에 부득이했던 것입니다. 잘 가십시오, 잘 가십시오."[28]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성계의 말을 해석하면 "최영 당신에게 원한은 없으나 내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변명에 가깝다.
한편 《 고려사절요》에 보면 이러한 기록이 있다. " 이인임(李仁任)이 일찍이 말하기를 " 이판삼사(李判三司)가 나라의 주인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영(= 최영)이 듣고 매우 노하였으나 감히 말은 못 하였다. 이때가 되어 탄식하기를 "인임(= 이인임)의 말이 참으로 옳다." 하였다."[29]
이후 믿었던 후배 무장 이성계에 의해 고봉현[30]에 유배되었다. 그 뒤 다시 합포로 옮겨졌으며, 창왕 즉위 후 개경으로 압송되어 또 한번 순군옥에서 참혹한 심문을 받고 향년 73세의 나이에 참수형에 처해졌다. 처형되는 순간에도 최영은 낯빛이 전혀 변하지 않은채 태연했다고 《 고려사》는 전한다.
그는 유언으로 "만약 내가 평생 동안 한 번이라도 사사로운 욕심을 품었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풀이 나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실려있는 이야기에 따르면 실제로 최영의 묘에 풀이 나지 않아 그의 묘를 "적분(赤墳)"이라 불렀다고 한다.[31] 최영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에 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난 데다 1976년에 사초(莎草)[32]를 하고 나서는 잘 자라 지금은 풀이 있다. 또한 최영의 묘 바로 뒤에는 아버지 최원직의 묘가 있다.
최영이 처형된 날 백성들은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거리의 아이와 골목의 부녀까지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개경의 상인들은 모두 가게 문을 닫아 이성계 일파에 대한 무언의 항의를 표시했다. 최영 장군의 시신이 길가에 누워 있는 동안 행인들은 최영 장군의 시신을 훼손할까 두려워 모두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고 한다. 무인으로서의 활약도 전설급이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날 백성들의 행동만 봐도 그는 단순한 명장이 아닌 고려의 수호신이자 대들보 같은 존재였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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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 발행한 최영 우표.[33] |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見金如石)"라는 지침을 품고 살았는데 최영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최영에게 남긴 말이다. 최영은 이 말을 인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고, 이를 통해 저 말은 유명해졌다.
이견 없는 고려말 최고의 명장이었다. 전투에 임할 시에 작전 수립과 정보 수집을 치밀하게 하고 복병이나 기습책도 자유롭게 구사했다. 대표적 전투인 홍산 대첩 때의 과감한 돌격은 왜구의 수가 많지 않았음을 정확히 간파하고 감행한 것이었다. 단순무식한 맹장이 아니라 전술적 사고를 겸비한 명장이었다는 소리. 멍청한데 만용만 있었다면 금방 죽어버리기 십상인데 최영은 수십년을 전장에서 살아남으며 많은 전공을 세웠다.
다만 당대 최고 수준의 전술적 능력과는 달리 대전략적으로는 그리 현명하지 못 했다. 명나라를 향해 전면적인 전쟁을 벌인다는 최영의 선택은 일이 잘못되면 명나라 수십만 대군의 침공을 야기시킬 수 있는, 국가적으로 너무나도 위험한 판단이었기에 식견이 모자라다는 악평은 여기에 해당할 수 있다. 게다가 재상의 자리에 올라 군인이 아닌 정치가가 되었음에도 융통성 없이 엄격하게 처리하는 것만을 선호했는데 이 또한 정치인으로써는 현명하다고 말하기 힘든 부분이다. 고려 말에 국가가 부패하고 기강이 해이해져서 정치에도 다소 엄격함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그가 재상으로써 임한 부분들을 보면 명백하게 과한 조치가 많다. 그가 장수로써 세운 많은 군공이 기록 삭제를 당한 것도 아니고 남아있음에도 불학무술이라는 악평을 들을 만한 부분이 그에게는 분명히 존재한다.
최영은 정치 군인이었던 이성계와 달리[34] 순수한 군인에 가까운 인물이라[35] 정치를 함에 있어선 거침이 없고 철저한 상명하복으로 움직이는 군대의 속성을 그대로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일단 일을 시작하면 주변 사람이 아무리 말려도 시행하여 소용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지윤 제거 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한번 작정하면 이인임도 못 말렸다. 요동 정벌을 추진함에 있어 많은 반대를 모두 무시한 채 군사를 일으키고, 정벌에 반대하던 이성계를 기어이 조민수와 같이 보내고 퇴각 불가 방침을 내렸다.
당연히 부하와 백성들에게도 엄격했다. 웬만한 장수들은 군령을 어기면 목이 달아났고, 공민왕 때 6도의 군사를 다스리며 대대적으로 배를 만들고 고려 최초의 대량 수군을 양성하는 만드는 과정에서 70세 이상 된 자에게도 등급에 따라 곡식을 징발하는 바람에 집을 부수고 도망가는 백성이 50~60%에 이르렀으며 원성이 많았던 일도 있었다. 다만 최영은 이 수군을 만들어 왜구를 방어하고 나서야 백성들이 도륙당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라며 물러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이런 엄격함은 그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고 사욕을 추구하지 않았기에 백성들은 그를 두려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국가의 수호신으로 존경해 마지않았다. 실제로 최영은 휘하의 군인이 죄를 지으면 군법을 엄격하게 지켜 참수한 다음 효수하거나 팔을 잘라 조리돌림했으며, 최영의 조카 사위가 살인죄를 지었을 때 그의 인척임을 감안해 죄를 경감해 주려고 하자 법대로 하라고 화를 냈다.
최영의 엄격함에 대한 악평은 주로 공민왕 시기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것도 당시의 시대 상황을 분명히 인지해야만 한다. 공민왕 2년에 홍건적이 발호하여 고려 국경 인근을 휩쓸고 다녔으며, 1360년에는 홍건적이 4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36]하여 지금의 평양인 서경을 함락시키고 학살과 약탈을 벌였다. 최영과 이방실이 나서 겨우 격퇴하였으나, 불과 2년 뒤인 1362년에 홍건적은 10만의 대군으로 다시 고려를 공격하여 결국 수도인 개경을 함락시키고 공민왕은 경북 안동으로 피난을 떠났다.
이후 최영과 이방실, 안우들이 힘을 모아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하였으나, 이와중에 흥왕사의 변이 일어나 공민왕의 목숨이 위협받았다. 최영은 이때에도 다시 병력 일부를 떼내어 흥왕사의 난을 진압하였고, 공민왕을 구출했다. 최영이 공민왕을 구하고 반란군을 진압하는 한편 홍건적 잔당과 싸우는 와중에 1363년에 왜구들이 213척에 달하는 대규모 선단을 끌고 수안현을 습격하여 수령을 죽이고, 양민 약 700명을 학살했다. 왜구의 침략도 최영과 이방실이 격퇴했다. 이듬해(1364)에는 원나라 기황후의 주도로 덕흥군과 최유가 정명 1만여 명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다. 그리고 고려의 주력군이 북방에 집중된 사이 같은 연도에 왜구는 약 200척의 선단으로 갈도를 침공했다. 지방 호족과 장수들이 방어를 했지만 대패하고, 결국 최영은 안 그래도 모자란 병력을 나눠 남북양면에 걸쳐 방어전을 펼쳤다.
이처럼 최영이 경상도와 전라도 지방의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출전한 사이에 북방의 경계가 조금 소홀해진 틈을 타 원나라 동녕로 박백야대 만호가 군사 약 2만을 이끌고 침공했다. 북방의 방어선이 돌파되자 최영은 다시 북방으로 돌아가 박백야대를 무찌르고, 박백야대를 무찌른 그 날에 말머리를 돌려 다시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의 왜구를 격퇴하러 출전했다. 경상도와 전라도 일대 왜구를 격퇴하던 와중에 해가 바뀌고, 1365년 교동도와 강화도에 또 다른 왜구 무리가 침범했고, 최영은 다시 동서강도지휘사가 되어 동강에 나가 왜구들을 무찔렀다.
이처럼 최영은 사서의 기록만 따라도 6~7년 내내 전쟁과 전투만을 거듭하였다. 이는 과장이 아니며 고려를 적대시했던 조선사의 기록에 남은 역사적 기록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병사들과 백성들을 엄하게 다스리지 않고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이성계와 대립하였고, 조선에서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신돈의 혈육으로 주장하면서 반역열전에 기술하는 등 철저히 폄하한 우왕의 충신이었기에 조선 왕조 때 평가절하를 당할 법도 한데 후대까지 고려하면 의외로 크게 폄하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듯하다. 세종 대에 이르러서는 최영에 대해서 한 신하가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자 세종대왕이 옹호한 기록이 세종실록에 있다. 실록에 따르면 왕씨가 아닌 우왕을 세워서 섬겼다면서 비판하는 신하에게 세종대왕은 "후에 태조대왕이 왕이 될 수 있도록 미리 떡밥 깔아준 게 아닐까?"라는 요지로 반론했다.[37] 세종은 최영의 자손 중 쓸만한 사람이 있는지 아뢰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성종은 최영이 아니면 임견미와 염흥방을 주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평했다.[38]
중종 때 시강관 윤지형은 " 전조 말엽에 왜구들이 크게 치성하여 도성까지 들어오게 되므로 민생들이 모두 어육이 되었으니, 최영과 우리 태조대왕의 힘이 아니었다면 나라 사세가 거의 멸망하게 되었을 것입니다."고 아뢰기도 했다. 정몽주가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절이 조선에서 높이 숭상되었던 것과 비슷한 사례. 조선 초기에는 최영에 대한 언급조차 상당히 경계했지만 후대 왕들은 최영, 정몽주를 통해 고려 말의 부패와 망국의 상황을 더욱 극화하여 역으로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한편, 신하들이 최영과 정몽주가 고려에 충성했듯이 조선에 충성하길 바랐다.
덧붙여 뒤에서 지휘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최전선에 뛰어드는지라 최영은 상처도 많이 입었다. 그런 상처를 입으면서도 분투해서 승리를 거두었고 말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강직하고 두려움 없는 무장이었다. 홍산 대첩 때도 그렇고 그 전에 홍건적과 싸울 때도 직접 최전선에 뛰어들어 싸우다 창으로 찔리거나 베여서 여러 번 상처를 입었는데도 싸워 그 전투를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최영의 명성과 높은 평가는 자국에 한정된 게 아니라 타국에도 적용되어 최영이 죽으면 무장 하나 죽는게 아니라 고려 전체에 직결된다고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최영 열전에서 최영의 명성과 용맹이 근방에도 알려져서 최영이 지금 죽으면 개인이 죽는 정도가 아니라 국가의 위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언급했다. 즉, 살아있는 것만으로 외적의 침략 억제력 역할도 하였던 듯하다.
《 고려사》에서도 최영을 청렴강직한 인물이며 명장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건국을 정당화해야 하는 조선의 공식적인 평가는 명장에 충장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인정 외에는 박한 편이었으며, 《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불학무술(不學無術)"이라는 악평도 남겼다. 우직한 반면 학술이 없고 편협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려사는 최영의 전장에서의 활약도 깎아내려 단순무식한 무장으로 몰아가는 면이 있다.
저런 폄하는 왕조 개창 이후 전 왕조의 버팀목이었던 최영을 깎아내리기 위한 서술일 가능성이 있다.[39] 최영은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제공한 인물로, 조선 개국의 직접적 단초가 되었던 최영을 너무 높이 평가할 경우 조선 개국의 명분이 흔들릴 가능성이 있었다. 또한 무력의 측면에서도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할 정도의 실력을 가져, 홍산 대첩에서는 무려 60세 나이에도 입술에 박힌 화살을 뽑으면서까지 선봉에 서서 왜군을 박살내는 용력을 보여주었다. 후삼국시대에 유금필이 있었고, 거란의 침공 때 양규가 있었고, 여진 정벌 때 척준경이 있었다면 고려 말에는 최영이 있었다. 육상에서의 야전 지휘관으로서는 손에 꼽을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의외로 재밌는 것은 이렇게 최영을 폄하하고 반대로 이성계에 대해선 곡필 의혹이 있을 정도로 위상을 높이면서 마치 혹은 당연하다는 듯 이성계가 최영보다 더 나은 장수라는 듯이 적지만 정작 대놓고 둘을 비교할 때는 이성계가 최영장군에 필적하거나 어깨를 나란히 하지. 어디에도 대놓고 최영보다 위라고 적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성계의 위상이나 명성을 강조할 때, 최영을 위상도 언급하고, 혹은 최영의 위상을 언급 후 이성계도 최영에 준하는 위상과 명성도 떨쳤다는 식으로 적어 당대 최영의 위명은 조선시대의 곡필 의혹을 감안하고서도 이성계보다 같거나 위면 위지, 아래는 아니었음을 증명하기도 한다.[40]
3.2. 부정적 평가
매관매직이 성행할 무렵 어떤 사람이 벼슬 자리 구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자 "몰라서 묻나? 상공(商工)을 배우면 간단하네!"라고 독설을 날렸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최영 본인은 우왕 당시 권문세족의 대표였던 이인임과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사실 이인임과 사이가 나쁘지 않았던 이유는 애당초 최영의 가문인 동주( 철원) 최씨가 권문세족이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있다.[41]
실제로 정치적인 모습을 들여다보면 최영이 이인임의 편에 서서 활동한 경우도 상당히 많다. 특히 공민왕 사후에 혼란했던 정치판에서의 모습을 보면 이인임과의 정치적 파트너로써의 모습도 강하다. 예를 들어 이인임이 역모 사건의 처벌로 우왕의 유모 장씨를 죽이려 하자, 이를 알게된 우왕이 "장씨는 자신의 어머니와 같다."며 살려달라며 매달렸으나 최영마저 거절했고, 이에 우왕에게 "그대는 누구의 신하인가!"라는 일갈을 듣기도 했다.
물론 최영, 이인임이 공민왕 밑에서 함께 출세한 인물들이라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전우애가 생길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사실 이인임은 오늘날에는 권문세족의 대표로 일컬어지지만 그의 집안은 철원 최씨에 비견할 정도로 세도가 강한 일족이라는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42] 오히려 조부대에 명신을 배출하며 늦되게 출세한 집안으로, 최영과 권문세족으로 교류가 있었으리란 추측은 큰 근거가 없다. "둘 다 권문세족이라 친했나?"라는 말은 후대에 보기에 왜 최영 같은 충신이 이인임 같은 권신이자 간신과 성격도 다른데 뜻을 같이 했는지 워낙 이해가 안 되고 아무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억지로 따라붙은 말에 가깝다.[43]
오히려 두 사람의 거의 유일한 공통점이라면 고려가 총체적 난국이었던 공민왕 시절에 크게 중용되었다는 점이다. 현재는 다소 축소된 면이 있지만, 홍건적과 왜구의 수백 차례의 침공에다가 내부적으로도 국왕 시해 시도로 인해 공민왕 시절의 고려는 그야말로 막장급 최고 난이도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한마디로 어떤 왕이 즉위했어도 그것보다 잘해내긴 어려웠을 정도였다. 실제로 이전 왕들과 이후 왕들의 실력만 봐도 알 만하다. 그 시절 외침을 막느라 죽어난 게 최영이고, 내부에서 감정 기복 심한 왕과 신하들 사이의 중재며 개혁 정치와 외교까지 한꺼번에 도운게 이인임이다. 우왕 대에 막장을 달린 것과 달리 공민왕 시절의 이인임은 아직 타락하기 전이었고, 실제로 왕과 다른 신료들의 입에서 충신 소리가 나올 만큼 제대로 일했기 때문이다.
공민왕 대에 일했던 신하들은 우왕 대까지 대부분 뜻이 잘 맞아떨어졌다. 애초에 최영과 같이 홍건적 2차 침입 때 경성 수복 공신이 된 신하 중 상당수가 공신이라 더 잘 죽었다. 공민왕은 의심이 들면 그 즉시 신하를 숙청하기를 반복했는데, 특히 최영도 포함되어 있던 흥왕공신들을 수두룩하게 숙청하였다. 그냥 우왕 시절까지 숙청을 당하지 않고 남아서 늙는데 성공한 사람들에게는 나름 한 가지씩은 걸출한 능력이 있거나 최소 처세술이라도 있었다는 소리다. 최영 역시 왜구로 인해 고생하는 동안 녹봉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고 목숨을 건 무료 봉사를 해온 인물이다. 최영은 이런 시절에 어쨌든 고집 한번 안 꺾고 자기 능력 하나로 꼿꼿하게 살아서 전장에서 늙어온 사람이고 잘나서 그런지 고집도 셌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최영은 확실히 젊고 어린 신진 관료들보다는 항상 구신들을 신뢰했다. 특히 함께 전쟁에 나갔던 사람들만 신뢰하고 심지어 더 높게 치는 경향도 보였다. 하지만 최영의 선택도 나쁜 것만은 아니었던게 친원 정권 당시 등용되었던 공민왕 초기 관료층들은 항상 무기력했고, 최영은 전쟁에 나가보지도 않고 나라 사정도 모른 채 백성을 들먹이며 보신에 급급한 문신 관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 격전지마다 직접 고집을 부려서 출전해야 했다. 실제로 최영이 수군을 양성하려고 했을 때, 일부 문신들은 "어차피 질 거 배를 왜 만드느냐?", "그럼 백성만 힘들다. 가만히 있자." 따위로 투덜거렸으며, 개경을 방어해야 한다고 했을 땐 "그런 거 모르겠고 도성도 내주고 피난을 가자."고 했다.
문제는 우왕 대의 젊은 신진사대부 계층과 맞서게 된 상황에서도 최영의 태도가 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최영은 평생 완고하게 살며 나라를 지켜온 사람이었고, 이런 완고함은 크고 작은 전투가 파도처럼 연이어 몰려들었던 공민왕 시기엔 도움이 되었지만 큰 전투가 다소 소강되고 치열한 외교전의 시대로 넘어간 우왕 시기엔 본의는 아니지만 권신의 편을 들게 되기도 하였다.
결국 우왕이 제대로 정사를 돌보지 못 하는 동안 최영은 권력을 쥐게 된 이인임과 함께 나라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44] 젊은 사대부들보다는 변질된 이인임이 함께 일해온 짬이 있기에 최영을 다루는 법을 훨씬 잘 알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훗날 최영이 이인임 일파를 숙청하는 과정에서 이인임만 살려준 것도 두고두고 까이는 부분이다. 이인임을 죽이자는 이성계와 사대부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사사로운 정 때문에 귀향 보내는 걸로 마무리 지은 것은 두고두고 비판받는 부분.[45] 심지어 작은 죄에도 엄격하던 최영이 그랬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더 컸다. 더구나 다른 연루자들은 식솔까지 다 처형했다. 그러나 최영은 끝까지 "이인임은 국가를 안정시켜온 사람이며 허물보다는 공이 큽니다."라고 주장하며 감쌌다.[46]
젊을 때 신돈과의 사이는 굉장히 안 좋았는데, 애초에 최영은 공민왕이 듣보잡이었던 신돈을 등용하는 것부터 매우 싫어했다. 최영이 위화도 회군과 더불어서 가장 큰 정치적 위기를 겪은 때가 신돈과 갈등을 맺던 때였는데, 당시 신돈이 추진한 개혁에 반대하다 귀양 간 사람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최영은 전투에서 영정을 도둑맞은 걸 빌미로[47] 신돈에게 모함을 당해 유배당했는데, 군말 없이 갔다고 한다.
정치적인 모습과는 별개로 개인은 부귀영화를 누린 적이 없지만, 다른 구신들의 타락은 잡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런 점이 위화도 회군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4. 기타
- "최영의 집에 손님이 오면 종일 밥을 주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무래도 그의 집에 올 정도면 귀족 등 높으신 분들인 경우가 많아 체면 때문에 배고프다고 투덜댈 수도 없으니 별 수 없이 그냥 굶었는데, 그러다가 저녁이 되어서야 채소 등으로 간략한 반찬과 밥을 내줬고, 배가 고픈 손님들이 허겁지겁 먹으면서 맛이 좋다고 하면 최영은 웃으면서 "이것도 병법이 아니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 또 다른 야사로 최영 장군의 사당 근처를 지나가면 갑자기 돌풍이 불어 지나가던 사람은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 시대, 마침 그 근처에 정종의 후릉과 그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제릉이 있어 지나던 숙종의 가마가 심한 비바람으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이에 숙종이 "네놈이 똑똑했으면 왜 고려가 망했겠느냐? 바보짓하지 말고 꺼져라!"라고 일갈했고, 그러자 비바람이 잠잠해졌다고 한다. 수십 년 후 영조 때에도 같은 일이 있어 영조 역시 "고려도 500년을 해먹었으면 족하지. 무엇이 부족해서 깽판이냐? 가버려라!"라고 외쳐 역시 또 비바람이 그쳤다고 한다. 숙종과 영조 부자가 다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받을 정도로 성질이 더러웠던 것으로 유명한 것을 생각해보면 그럴 듯한 야사다. 더군다나 그 둘 때는 왕권도 꽤나 강했다. 반면 개화기 말 고종 때에는 좀 이야기가 달라지는데, 고종이 가마를 타고 지나갈 때도 비바람이 불었고 원래 허약했던 고종이 근처의 연못에 빠져버렸다고 한다. 이 때 이항의라는 선부관(= 호위무사)이 달려들어 고종을 구해냈는데 다급한 나머지 하필이면 잡은 곳이 상투였다. 조선 왕의 몸에는 쇠붙이도 대지 않았으니[48] 상투를 잡는다는 건 평상시 대로라면 당연히 사형감이었지만, 위급한 상황이었기에 사형은 면했다고 한다.[49] 선전관은 출처에 따르면 효령대군파 종친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여기에 이런 일화들이 소개되어 있다.
- 목호의 난 진압 당시 제주도와 한반도의 중간에 위치한 추자도에 한동안 정박한 일이 있다. 당시 다른 지역들에서는 왜구의 노략질을 막아주어서 최영 장군에게 고마워했는데, 추자도의 경우엔 그것보다는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라고 한다. 이전까지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추자도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긴 최영 장군이 그물을 엮어 고기잡는 법을 가르쳐준 것이라고. 때문에 추자도에서는 최영 장군의 사당을 만들었고, 현재까지도 매년 성대하게 제사를 올리며 최영 장군의 은덕에 감사하는 한편 지역의 발전과 풍어를 기원하고 있다. 추자 올레길 코스에 최영 장군의 사당이 있으며, 추자도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주민들에게 중요한, 신성한 장소이기에 여기서 허튼 짓을 했다간 큰일난다고 한다. 2014년 2월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 사당이 소개되었다.
- 조선 초기의 명재상인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와 혼인했다. 즉, 맹사성은 최영의 손주사위인 것. 최영이 맹사성의 고향인 아산 근교에서 산 적이 있었는데 최영의 이웃이 바로 맹사성 일가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최씨 가문과 맹씨 가문이 인연을 맺었다고 전해지며 아산에 오늘날에도 맹사성 고택이 남아 있는데, 이 집은 본래 최영이 살던 집이었다고 하며 최영이 죽은 후 아버지 맹희도에게 소유권이 넘어가서 맹사성의 집이 되었다고 전한다.
- 백성들 사이에서는 마치《 삼국지》의 관우처럼 장군신으로 숭배되었다. 지금도 최영이 맹활약을 펼친 삼남 지방[50] 해안 지역에 가면 최영을 모신 사당이 많이 남아 있는데 전라남도 여수시의 영당에는 이순신과 함께 신으로 모셔지고 있으며 풍어를 기원하는 대상이 되고 있다.
- 대한민국 해군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 DDH-II) 6번함이 최영의 이름을 따서 최영함(DDH-981)으로 명명되었다. 대한민국 해군은 구축함 이상급 전투함이나 잠수함을 진수할 때 위용이 뛰어난 장수나 업적이 큰 제왕의 이름을 따서 함정의 이름을 명명하는데 최영함은 있지만 이성계함은 없다는 데에서 두 장수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단편적으로나마 엿볼 수 있다. [51][52] 최영함(DDH-981)은 아덴만 여명 작전 당시 소말리아 해역 호송전대(청해부대)의 기함이었다.
- 전장에서의 맹활약과 우직한 청백리의 면모 때문에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라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시대에 와서도 명장으로 평가받았으며 지금까지도 고려 말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손꼽히고 있다.[53]
- 최영 부자의 묘 주변은 조선 왕족들의 묘가 둘러싸고 있다. 최영의 묘와 같은 산에 태종의 4남 성녕대군의 묘와 소현세자의 아들 이석견의 묘가 위치하고 있으며 그 건너편 산에 경혜공주 내외의 묘와 성종의 서자 이성군의 묘가 있다.
- 40년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고려를 지켜내고 왕실의 존립을 위해 한 몸을 바쳤으며 장군과 재상을 겸했으나 쌀궤는 항상 텅 비어있었고 단 1번도 뇌물과 청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참전한 모든 전투에서 공을 세울 뿐 패한 적이 단 1번도 없었다.[54] 그러나 시대의 영웅이었던 최영은 형장에서 처형당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삶을 마친다. 최영의 죽음과 함께 고려의 운명도 끝에 이르고 있었으며 그의 사후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왕위 찬탈을 향한 행보를 시작하고 새로운 나라인 조선이 건국된다.
5. 대중매체에서
5.1. 드라마
- 1983년 KBS 드라마 < 개국>에서는 배우 신구[55]가 연기했다. 주제 때문인지 우왕이 신돈의 씨임을 알고도 그냥 방치하는 등의 약간 어리석은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 1983년 MBC 드라마 < 조선왕조 500년> 추동궁 마마에서는 원로배우 김길호가 연기했다.
- 1996년 KBS 드라마 < 용의 눈물>에서는 원로배우 김성옥[56]이 연기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대망의 제1회에서 붙잡히고 제2회에 참형을 당하여 사망했는데 특별 출연 1회만에 엄청난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극의 포문을 제대로 열었다.[57] 작품 내에서 드러나는 성향은 강경파로 보이지만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최영의 모습은 자주국으로서의 고려를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온다. 특히 명나라가 이북의 땅을 내놔라고 언급할 때 다른 이들은 유하게 대처하자거나 포기하자 등의 언행들을 보면서 분노가 폭발하는 장면[58]도 그렇고 이성계와의 대화 때 선대 왕인 공민왕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요동에 대한 의지 및 고려의 기상을 꿈꾸는 인물로 볼 수 있다. 우왕을 개경으로 모신 이후에는 왕대비에게 눈물어린 고려 수호를 부탁받자 이후 홀로 외로이 궁 밖에 혼자 남아 1분 가까이 밤하늘을 바라보는 연출을 보여주는데 마지막 남은 고려의 수호자이자 많은 짐을 짊어진 최영의 고단함과 안타까움을 보여준다. 작품 초반에 사망한 인물이니 이후 나오지 않다가 이성계가 사망하는 에피소드에서 임종 직전 이성계가 꾼 꿈에 나타나 껄껄 웃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59] 원래 조사의의 난까지만 그릴 예정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2회만에 퇴장한 배우를 다시 모셔온 셈.
- 2005년 MBC 드라마 < 신돈>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연기했다. 이 작품의 주연이 신돈인 만큼 신돈의 정적이었던 최영은 비교적 악역으로 그려지는 것이 흥미로운 대목. 조일신의 난을 진압하는 것으로 처음 등장하였으며 계속되는 전쟁에서 승전하면서 고려 군부의 중심에 자리하게 된다. 신돈에게 호의를 가진 적도 있었으나 신돈이 추구하는 정치 형태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자 방향을 선회해버렸고 신돈 또한 그런 최영을 견제하여 군권을 빼앗는 등 압박해온다. 특히 이 드라마에서 최영의 캐릭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다음 부분인데 신돈이 처형된 후 패닉 상태에 빠진 공민왕과의 독대를 통해 군권을 반강제적으로 얻어내는 장면을 통해 이제껏 역사에서 나온 독선적인 충신 최영이 아닌 권력의 맛을 알게 된 정치 군인 최영을 그려냈기 때문이다.[60]
- 2012년 SBS 드라마 < 신의>에서는 배우 이민호[61]가 연기했다. 주인공으로 로맨스를 펼치기도 하는데 29세 젊은 시절의 최영 장군이 현대에서 과거로 떨어진 여성 외과의사 유은수와 로맨스를 펼친다. 실제 최영 장군의 부인이 삼한국대부인 문화 유씨인데 유씨 성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고.
-
2013년
SBS 드라마 <
대풍수>에서는 배우
손병호가 연기했다. 최영은 철저히 이성계 편인데 심지어 이성계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자신이 처형당할 때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괜찮다고 오히려 이성계를 위로한다.
-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배우 서인석[62]이 연기했다. 오랜 세월 전우로서 함께 해온 이성계와의 두터운 정리, 무인으로서 위기에 처한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정몽주와의 대담에서 보여준 신념과 신념의 충돌, 온 백성의 추앙을 받는 고려의 수호신다운 카리스마가 어우러져 평생을 외롭게 고려를 지탱해온 늙은 무장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면서 역사 속 최영을 가장 잘 표현했다는 평이 많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고.
- 2015년 SBS 드라마 <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배우 전국환[63]이 연기했다. 기존의 충신 이미지와는 다르게 정치 군인으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최영의 모습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역시 실존 인물인 만큼 간신으로 묘사되지는 않고 애민의 마음과 사사로운 욕심없이 오로지 국가를 위한 충성심만으로 움직이는 인물로 묘사되었다.[64] 하지만 그 엇나간 충성심으로 인해서 결국 자멸하고 만다. 자세한 설명은 항목 참고.
- 2021년 SBS 드라마 < 조선구마사>에서는 백성들의 언급으로 간략히 묘사되나 백성들에게 소, 돼지를 잡게 하면서 백정새끼라고 비하했다고 부정적으로 묘사된다.[65]
- 2021년 KBS 드라마 < 태종 이방원>에서는 배우 송용태[66]가 연기했다.
5.2. 게임
- 코에이의 게임 <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 정식발매판의 시나리오 3(1271년)에서 등장하는데 대놓고 고증 따윈 엿바꿔 먹어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 시기인데도 등장한다. 주인공인 칭기즈 칸, 라이벌인 이성계와 함께 전투 A, 지휘 A를 자랑하는 먼치킨 무장. 정작 징기스칸 4 PK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는 생존해 있을 시기인데도 이성계만 등장하고 최영은 등장하지 않는다.
5.3. 만화
- < 사신소년>에서 고유한의 코어로 등장한다. 수식어는 '백색의 명장'.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노익장의 모습이 아닌 젊은 모습으로 그려졌으며 사용자의 영향으로 이도류를 사용한다. 이후 고유한과 방위조장의 결투에서 유물 동주검[67]이 등장한다.
6. 같이 보기
[1]
#1
#2
[2]
#1
#2
[3]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때문에 최영이 한 말로 알고 있지만 그의 아버지 최원직의 말이다.
[4]
다만
우왕이 무능하고 미욱한건 잘 알지만 최영은 그런 우왕을 끌어안고 최선을 다해보려는 입장이라면, 정몽주는 우왕을 폐하는데 적극적이었다. 물론 정몽주는 일단 새로 옹립한 공양왕과 함께 개혁을 하려했지,
정도전처럼 아예
새 왕조를 세우는데는 반대하였다.
[5]
철원 지역을 하사받은 가신, 즉
부원군이다. 철원은 본관인 동주를 가리키는데, 이렇듯 작위명에 본관을 넣는 경우는 조선시대에 흔히 보인다.
[6]
지금의
경기도 남부,
강원도 일부, 충청도 일대를 이르던 고려 시대의 행정 구역 이름이다.
[7]
기록상으로는 스물여덟 번의 전투를 치렀다고 했을 뿐 27승을 거뒀다는 기록은 없다.
[8]
많은 전공을 세운 원나라의 마지막 명재상. 간신의 모함으로 해임되고 좌천된 후 심지어 유배가는 길에 독살까지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9]
참고로 이곳이 삼국지의 수춘, 합비 지역이다.
[10]
현재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11]
고려사절요 제27권.
[12]
이전에나 이후에나 전쟁에서 방어군의 가장 큰 장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보급이고 하나는 지형이다. 보급이야 말할 필요가 없으니 빼고 보자면 지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한반도의 바다는
일본의 바다와 특징이 다른데다가 일본군은 먼 뱃길을 항해해서 와야 했기에 연근해의 전투에 상대적으로 덜 적합한 배였기 때문이다. 이는 이후
이순신 장군이 입증한바 있다. (다만 부산, 울산쪽 항구는 일본이 장악했기에 예외였다)
[13]
원나라
목동(하치)들의 반란. 제주도 땅은 고려에 반환되었으나 말농장은 계속 원나라의 것이었고 목장의 목호들은 원나라 본국에 계속해서 제주도에 만호부를 설치해줄 것을 요구하는 중이었다.
[14]
출처: 고려사 최영 열전.
[15]
엄밀히 따지면 최영 사후 일부의 난 들이 있었고, 고려가 무너진 것은 정몽주가 사후였지만, 정몽주 외에는 제대로된 알력조차 보이지 못하고 무너졌고, 정몽주가 분투할수 있었던 것도, 정몽주의 정치술도 정치술이지만, 이성계가 다른 정적들과 달리 정몽주를 적으로만 보기보단 그래도 포용하려고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이방원은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낮에 정몽주를 죽인 시점에서 당시 고려에서 이성계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고, 정몽주 사후에는 얼마 뒤 이성계가 왕이 된것만봐도 세력이나 조정의 구도는 이성계의 손에 들어온 상태였고, 정몽주는 그 다 끝난 조건에서 어떻게든 명분과 자신의 얼마 안남은 유리한 입지를 적절히 이용하여 이성계를 몰아붙인 것이라고 할수 있다.
[16]
고려사 최영 열전에 나오는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충혜왕께서는 여색을 좋아했으나 반드시 밤에만 즐김으로써 남들의 이목을 피했습니다. 충숙왕께서는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으나 반드시 농사철을 피해 백성들에게 원망을 사지 않았습니다. 지금 전하께서는 절도가 없이 노시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상하였는데 제가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바로잡지 못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남들을 대하겠습니까?"
[17]
최영이 목호의 난을 토벌하던 당시 부원수로 따라온 이력이 있었다. 더 이전에 홍건적의 침입 때도 함께 공신이 되었던 오래된 무신이자 최영과 전장에서는 이런저런 인연이 있던 자였다. 그러나 우왕 시절 이인임의 일파가 되면서
매관매직 및 토지의 편취와 겸병 등을 일삼게 되었다.
[18]
원래는
사대부의 일원으로 최영이 홍건적을 격파하고 개경을 탈환하던 당시 지신사로 함께했으며 목호의 난에도
도병마사로 함께 출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에 맞서 직언을 하다 유배를 당하자 유배에서 풀려난 후 변절하여 이인임의 심복이 됐다.
[19]
영비의 어머니 은씨는 최영의 정식 부인이 아니기에 영비는 최영의
서녀다.
[20]
특히 영비와 혼인하기 전에 우왕이 최영의 저택을 자주 방문하지 않았으나 혼인한 이후에는 우왕이 최영의 저택에 자주 가게 되었다.
[21]
최영이 난을 진압하려고 개경을 떠난 터라 공민왕을 지키지 못 했다.
[22]
제1차 요동 정벌은
공민왕 때 이루어졌으며, 이 당시의 최영은
신돈에 의해 좌천된 상황이었기에 요동 정벌에 참전하지 못했다. 참고로 1차 요동 정벌에 종군한 장수 중 한명이 바로 이성계였고 사령관은 이인임이었다.
[23]
실제로
예종 때도 동북 9성을 어렵게 차지했지만 방어가 힘들어 다시 돌려준 적이 있다. 심지어 그 때는 우왕 때보다 국력이 더 세던 때였는데도 말이다.
[24]
물론 몇년 후인 공양왕 대의 전답 등록수가 조선 후기보다도 많아 경제적으로는 어느정도 나아진 것이 사실이나 왜구의 노략 등 군사적 방비에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아 대규모로 군사력을 동원하면 무리가 올 상황이기는 했다.
[25]
당시에는 호왈로 10만이라 했다.
#
[26]
그러나 초원으로 쫓겨간 몽골군은 당시에도 최강의 부대들로 영락제는 이들을 조기에 제압하겠다고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나서서 정벌을 벌여야 했다. 또한 나하추의 병력은 숫자는 확실히 많은 편이지만 명나라가 이들을 확실히 자신들 병력으로 여겼을지도 알 수 없다. 나하추의 병력은 원말 혼란기에 나하추가 가진 사병집단으로, 원나라가 쫓겨가고, 명나라의 위협에 나하추의 투항에 귀속된 것 뿐이었다. (그리고 나하추의 병력은 몇 차례 고려를 공격해 왔음에도 패배하고 돌아갔다. 고려군으로서는 요동정벌에서 1차적으로 제거해야 하는 병력으로 이기지 못할 것은 없었다.) 또한 당시 요동 상황에서 명나라는 요동의 반도 끝을 시작으로 북상해 가면서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는데, 만약 요하 일대의 고려인 거주 집단(심양일대)들에 도움을 받아서 요하일대의 주요지역들을 점거하고, 나하추의 병력이 요하를 건너는 것을 저지시켜, 북상한 고려군 주력으로 격멸시킨다면 명군은 요동으로 들어 오는 것이 매우 어려워진다. (요동반도는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여 이동할 여건이 좋은 편이 아니고, 초원의 몽골군이 장성과 요하 사이에 육상 이동로를 그때까지는 작전권 아래에 두고 있었다, 다만 명군이 요동으로 가지 않고, 산동에서 장산곶으로 직공하여 개경으로 공격할 수 있다는 위험성은 존재한다.)
[27]
사실 이성계도 반대하다가 타협할 생각으로 "지금(여름)은 시기가 나쁘니 가을로 잡자."고 권유했지만 무시됐다.
[28]
《
고려사》
우왕(禑王) 14년 6월
[29]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자네, 이제 왕이 되려는가?"라고 말하고 나서 하늘을 보며 "이인임 대감, 당신이 옳았소이다!"하며 웃는 장면이 있다.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식은땀을 흘리며 최영을 바라본다.
[30]
고양 시청 늘 푸른 고양 > 고양 소개 > 고양 역사 중세 조선
태종이 고봉현을 고양현으로 개명하였다.
[31]
토성을 쌓을 때처럼 흙을 두들겨 단단하게 만드는 판축 공법으로 무덤을 만들면 풀이 잘 안 난다고 한다. 고인이 뱀을 싫어하면 무덤에 뱀 꼬이지 말라고 이런 식으로 무덤을 조성하기도 했다고. 당연한 얘기지만 최영의 무덤에 풀이 나지 않는 것을 본 후세인들이 창작한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32]
무덤에 떼(흙이 붙어 있는 상태로 뿌리째 떠낸 잔디)를 입혀 잘 다듬는 일. (출처: 네이버 사전) 쉽게 말해 인조적으로 무덤에 잔디를 심는 것.
[33]
고려 우표가 아닌데, 그 이유는 북한이 자신들을 칭할 때 대한민국이 한국이라고 부르듯이 '공화국' 혹은 '조선'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34]
드라마 등에서는 이성계가 순수한 군인상으로 미화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이성계는 이미 회군 이전에도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사대부 세력과 상당한 인맥을 쌓고 있었다.
[35]
이성계와는 달리 최영은 본인 파벌을 만드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듯한데,《
고려사》에는 "최영은 평생을 군문에 종사했지만 아는 얼굴이 두서넛 밖에 없었다."고 적고 있을 정도다.
[36]
단순히
비적 떼가 아니라 정규군들이 합류하여 철기(鐵起)병 약 1만여 기를 운영할 정도로 정예병이었다.
[37]
그러자 신하들은 "그땐
태조대왕께서 왕위에 오르실 낌새도 없었는데요."라고 반박했다.
[38]
참고로 이에 신하들이 최영뿐 아니라 태조도 같이 싸웠다며 태클을 걸었다.
[39]
반대로 이성계 경우에는 전공과 능력을 추켜세우기 위한 곡필 의혹이 있다. 이성계의 곡필 의혹은 없는 사건을 넣거나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있는 사건 자체를 이성계 개인이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의 초점 전환과 서술 방식의 문제 등에서 나온다.
[40]
당장 최영 열전에서 최영과 이성계의 위엄과 명성이 명나라에도 전해져있다고 할 때, 최영과 이성계라고 함께 나란히 설명하고 있는데, 해당 구절의 내용이 이성계를 만나 안부를 물으려는 명나라 사신을 우왕이 최영을 시켜 대신 만나게 하여 대면못하게 했다는 식으로 우왕 일행때문에 사신과 이성계가 만나지 못했다며 내용임을 감안하면, 그냥 이성계의 명성이 외국에도 떨쳤는데, 우왕이 막았다고 하면 그만일 것을, 굳이 최영의 위엄과 명성을 함께 언급한 것은 당대 어느 쪽이 명성의 척도가 되었는지 알수 있다.
[41]
조준,
민제 등도
권문세족 출신이다. 사실 권문세족에 대해서는 몇가지 이론(異論)이 있다.
권문세족 문서 참조. 다만 교과서에서는 기본적으로 최영을 신흥 무인 세력으로 분류한다.
신진사대부 문서에도 알 수 있듯이 기존 세력이 신진 세력에 합류하는건 매우 평범한 일이다. 최영이 권문세족 출신이라 하더라도 신흥 무인 세력이라 칭해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
[42]
철원 최씨에 대면 성주 이씨는 그냥 유력 호족 집안 출신이다. 의외겠지만 권문세족 목록에도 없다.
[43]
심지어 최영, 이인임이 공민왕과 뜻을 함께 하는 바람에 원래 권문세족 집안이던 자신의 가문엔 해만 되었다.
[44]
비록 정치적인 부분에서 충돌하는 부분이 없진 않았으나 최소한 그들의 주장을 강력하게 반박하거나 반발하는 모습은 딱히 없었다.
[45]
여담으로 최영은 처형당할 때 "내가 생전에 탐오를 부린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염흥방,
임견미
등을 죽일 때는 확실히 지나쳤었다."라고 탄식했다는 이야기가
용재총화에 실려 있다.
[46]
그런데 사실 타락하기 전 기준엔 꼭 틀린 말도 아니고 타락했음에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란 게 어떤 의미에선 무섭다. 그러나 타락한 후 안정시키고 지킨 공은 막장이 된 고려가 멸망만은 하지 않게 권신들과 탐관오리들의 주체 못 하는 행동에 스톱퍼와 한계를 두고 크게 군권을 건들지 않게 한 거라 그냥 병 주고, 약 주고다.
[47]
그런데 이 영정도 그냥 영정도 아니고
태조의 아버지인
세조의 어진과
충선왕,
한국공주의 어진이었다. 공민왕에게는 집안 어른이자 할아버지이고 선왕의 어진을 도둑맞은 것이라 충분히 처벌 명분은 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도 어진을 훼손하거나 잃어버린 경우 중죄로 처벌되었다.
[48]
그래서 외과적 수술이 거의 불가능했다.
[49]
원래 유학에서 위급 상황이라면 예를 어길 수 있다고 가르친다. 가령 《
맹자》 〈이루 상〉 17장에서 맹자가 "남녀가 직접 손을 잡지 않는 것은 예(禮)이지만 형수가 물에 빠져서 허우적댈 때 손을 잡아서 구하는 것은 권(權: 이치에 맞게 잘 저울질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왕을 구하기 위해 상투를 잡은 것은 권도에 맞는 셈.
[50]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51]
광개토대왕급 구축함(
DDH-I)은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양만춘.
충무공이순신급 구축함은
충무공 이순신,
문무대왕,
대조영,
왕건,
강감찬, 최영.
세종대왕급 구축함은
세종대왕,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이성계 등은 무용이나 업적 면에서는 충분히 함정 이름으로 붙을만 하지만
역성혁명을 통해 새로운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 역사적 평가 때문에 함정 이름으로 쓰는 것은 보류한 것으로 보인다.
[52]
군주 이성계에 대한 평가와는 별개로 군인 이성계만 평가한다면 그의 충성심을 높게 평가할 수는 없다. 군인 이성계는
고려의 군인이었고, 충성을 맹세한 국가를 자기 손으로 멸망시켰기 때문.
[53]
조선의 경우 전 왕조를 무너뜨렸기에 역으로 고려를 지키려 했던 인물들인
정몽주,
이색 등을 충신으로 받들어세웠다. 대신
정도전을 비롯한
역성혁명의 주모자 일부가 역신으로 격하됐으며 정도전의 경우 비공식적으로는 죽고나서 얼마 되지 않아 복권됐지만 공식적으로는 조선이 망하기 직전인
흥선대원군 섭정기에 가서야 복권된다.
[54]
그의 유일한 패전이
위화도 회군이다. 이 전투마저도 애초에 적군인 공요군이 고려의 모든 국력을 쏟아부은 군대였으니 패전이 당연한 전투였고, 그 전투에서마저 조민수의 군대를 패퇴시키는 활약을 펼쳤을 정도.
[55]
1980년 KBS 드라마 <
파천무>에서는 마찬가지로 왕을 지키려다가 역적에게 죽임당하는 명장이자 충신
김종서를 맡았는데 여기서도 왕을 지키려다가 역적에게 죽임당하는 명장이자 충신 최영을 연기한 것이다.
[56]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궁예의 장인
강 장자 역, 2002년 KBS 드라마 <
제국의 아침>에서는 시중
권직 역. 김성옥은
손숙의 남편이자 연극배우 출신으로 <용의 눈물>
PD인 고
김재형이 각고의 설득 끝에 데려온 특별 출연자였다. 김재형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2회만 나오는 단역임에도 역할과 비중이 매우 중요한 역할인 만큼 인지도에 의한 배우 섭외는 생각도 안 하고 오직 감정의 묘사를 구현 가능한 중년 배우로 섭외하려 했지만 몰락해 가는 고려 왕조의 비운을 표현해야 하는 중대한 역할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아 다들 거부하던 와중에 노모 간병차 내려왔던 김성옥을 직접 섭외했는데 감독의 바람대로 엄청난 연기력을 보여줌으로써 1화부터 명장면을 뽑아주셨다고 한다. <용의 눈물> 종영 이후 <용의 눈물> 드라마 제작 과정과 NG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도 출연하였다.
[57]
짧게 나왔음에도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이 가능했던 게 최영이 없어서라는 부분과 견제를 대비한
조민수에게 내린 임무, 이성계가 달려가면서 최영에게
4불가론을 주장하며 애절하게 만류할 때 이성계를 믿기에 보내는 부분이라는 세심한 점은 다 챙김으로써 2명이 얼마나 돈독했는가를 유추할 수 있게는 해놨다. 특히 처형된 이후에는 자신의 아버지같은 분이셨다고 정말 괴롭다는 듯이 그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으로 꾸준히 묘사해온다.
[58]
이후에 혼자 나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하게 기둥을 잡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약해진 고려와 강경한 주장은 커녕 이북의 땅을 주거나 그와 관련한 협상말고는 할 수 없는 관료들의 반응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59]
고려의 인물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딱히 원망하는 모습으로 나오지 않는다는 게 꽤나 인상적인 부분. 어쩌면 이성계의 수난과 고통을 비웃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묘사는 꽤나 반갑다라는 느낌이 더 크다.
정몽주조차도 심란한 표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부분.
[60]
그 이전에도 공민왕의 개혁을 반대하고 공민왕이 충신
정세운을 의심 때문에 죽였다고 불신하는 등, 충신 면모와 거리가 있는 모습을 자주 드러낸다. 하지만 딱히 최영이 간신으로 그려지지는 않는 것도 특징.
[61]
2009년
KBS 드라마 <
꽃보다 남자>로 스타덤에 올랐다.
[62]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견훤 역.
[63]
2013년
MBC 드라마 <
기황후>에서는
연철 역인데 최영의 이미지와 영락없이 비슷하다. 최영이 실제로 기황후가 보낸 군사를 격파한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묘하다.
[64]
또다른 고려의 마지막 충신인
정몽주 역시 최영처럼 나라에 대한 충심이 더 앞서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하지만 정몽주의 경우 비교적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캐릭터로 묘사된 반면에, 최영의 경우 정몽주에 비해 상당히 평면적인 캐릭터로 그려진 감이 있다.
[65]
사실 드라마 자체가 이것 외에도 비판할 점이 한 두가지가 아니라서 결국 2화를 끝으로 종영하게 된다.
[66]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홍유 역, 2014년
KBS 드라마 <
정도전>에서는
배극렴 역.
[67]
실제 최영의 유물이 아닌 사신소년 내에서만 존재하는 검으로 추정되며 이름 자체는 최영의 가문인 동주 최씨 가문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