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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14:03:31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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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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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푸르니우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프루기
가이우스 유니우스 실라누스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루키우스 타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누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우구르
기원전 13년 기원전 12년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2년 보결 기원전 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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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년 기원전 9년 기원전 8년 기원전 7년 기원전 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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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루스 안토니우스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 술피키아누스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이우스 안티스티우스 베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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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퀸투스 하테리우스 가이우스 칼비시우스 사비누스 가이우스 카일리우스 (루푸스)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비니키우스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루키우스 파시에누스 루푸스 갈루스 술피키우스
기원전 3년 기원전 2년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기원전 2년 보결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 ⅩⅢ 가이우스 푸피우스 게미누스 퀸투스 파브리키우스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 마르쿠스 플라우티우스 실바누스 루키우스 카니니우스 갈루스
기원전 1년 기원전 1년 보결 연도 불명
코수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 판사 카이트로니아누스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아울루스 카이키나 세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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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color: #4A3800; margin: -5px 0px"
제1차 삼두정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제2차 삼두정치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Gnaeus Pompeius Magnus
파일:external/lh6.ggpht.com/Rome%20-%20Day%2013%20060.jpg
<colbgcolor=#800080><colcolor=#ffffff> 출생 기원전 106년 9월 29일
로마 공화국 피세노 지방 피케눔[1]
사망 기원전 48년 9월 29일 (향년 58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펠루시움[2]
관직 집정관 (기원전 70년, 55년, 52년)
칭호 마그누스
국가 로마 공화정
종교 로마 다신교
가족 안티스티아 (기원전 86 ~ 기원전 82, 첫 번째 배우자)
아이밀리아 스카우라 (기원전 82 ~ 기원전 79, 두 번째 배우자)
무키아 테르티아 (기원전 79 ~ 기원전 61, 세 번째 배우자)
율리아 (기원전 59 ~ 기원전 54, 네 번째 배우자)
코르넬리아 메텔라 (기원전 52 ~ 기원전 48, 다섯 번째 배우자)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장남[A])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차남[A])
폼페이아 마그나 (장녀[B])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아버지)
클로디아 풀크라 (첫째 며느리)
스크리보니아 (둘째 며느리)
참전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세르토리우스 전쟁
제3차 노예 전쟁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카이사르의 내전
직업 로마 공화정 군인 & 정치가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70년
전임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수라
그나이우스 아우피디우스 오레스테스
동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후임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크레티쿠스
퀸투스 호르텐시우스 호르탈루스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55년
전임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마르켈리누스
루키우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
동기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후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로마 공화정 집정관
임기 기원전 52년
전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루푸스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동기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후임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1. 개요2. 생애
2.1. 등장2.2. 희대의 재벌 2세 군사천재2.3. 전성기2.4. 제1차 삼두정치2.5. 카이사르의 내전과 폼페이우스의 실책2.6. 최후
3. 평가
3.1. 정치적 평가3.2. 군사적 평가3.3. 종합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인. 부유한 유력가문 출신으로서, 탁월한 군사적 능력과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젊은 시절부터 술라의 휘하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지중해 해적 소탕과 동방 재편을 비롯한 지중해 각지에서의 빛나는 전공으로 명성을 떨쳤다.

이후 율리우스 카이사르,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삼두정치를 통해 원로원파를 무력화시키고 로마 정계에서 사실상의 1인자와 같은 위치에 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갈리아 원정을 통해 크게 성장한 카이사르와 긴장 관계에 접어들어 원로원파로 전향하고 내전에 돌입하였으나 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 이집트로 도주하던 중 살해당한다.

그의 아들 역시 이름이 같기 때문에 보통 술라가 붙인 별명인 폼페이우스 마그누스[6]로 부른다.

2. 생애

2.1. 등장

그의 아버지는 BC 89년에 집정관을 지냈던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Gnaeus Pompeius Strabo). 스트라보는 이탈리아 북동부 피케눔 지역에 막대한 땅과 클리엔테스 조직을 보유한 대지주이자 거물 정치가였다. 하지만 넘치는 야망에 비해 인성으로는 평가가 좋지 못해서, 당시 대립 중이었던 마리우스파와 술라파 사이에서 이리저리 간을 보고 배신도 서슴치 않는다는 비난을 양측에서 받기도 했다.

폼페이우스가 18살일 무렵, 로마는 동맹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로마는 아직까진 형식적이나마 로마라는 도시국가였고, 이탈리아반도 전체의 도시국가와의 동맹 형태였다. 로마에 자발적으로 복속한 국가, 형제국이었던 국가, 정복 후 항복한 국가 등 차등 대우가 있기는 했지만 결속력은 매우 좋았고, 그 유명한 천재 전술가 한니발 바르카조차도 그 결속력 앞에 고배를 마셔야 했다.

포에니 전쟁 동안 로마 시민병과 같이 피를 흘리며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 동맹은, 원로원이 부의 공평한 분배를 거부하여 내전의 불씨를 갖게 된다.

그라쿠스 형제 호르텐시우스 법을 동원하여 당시 문제가 됐던 라티푼디움을 개혁하는 법안을 상정함과 동시에, 로마 동맹국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는 법안도 민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당시 국유지였던 북아프리카의 대농장을 사실상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었던 원로원파의 반발로 암살당하고 개혁은 실패하고 만다.

기원전 91년, 이번에도 호민관이었던 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로마 시민권의 분배를 다시 상정하자,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사 다시 암살당하고 만다. 그러자 로마 동맹시들은 그동안의 분노가 폭발하여 드디어 들고 일어나 내전이 발생하게 됐다.

똑같은 전술과 똑같은 군 체제를 갖고 있는 동맹시들과 벌인 동맹시 전쟁에 로마는 국운을 건 총력전으로 대응했지만, 고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훗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삼촌뻘 되는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등 쟁쟁한 장군들이 모두 투입되어 있었고 심지어 은퇴한 것으로 여겨졌던 마리우스까지도 등장한다. 이 중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버지인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도 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아버지와 함께 지휘관으로 참전한다.

18세의 나이였지만 그는 군단 전체에서 카리스마적인 인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분노한 군단병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효과적으로 제지하는 등 지도력과 통솔력을 보여 술라 등 당대의 정치인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2.2. 희대의 재벌 2세 군사천재

동맹시 내전이 끝나고 술라가 원정을 가 있는 사이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로마를 장악, 술라파를 숙청한다. 아버지는 내전으로 죽었지만 아직 어린 폼페이우스는 숙청에서 살아남아, 83년 술라가 원정을 끝내고 돌아오자 마리우스파 공격의 선봉에 선다. 술라가 이탈리아에 상륙하자 폼페이우스는 3개 군단을 이끌고 왔는데 이것으로 술라와 많은 이들이 놀랐다. 이 3개 군단은 아버지 폼페이우스가 동맹시 전쟁 때 이끌던 이들을 승계받은 것으로,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한 군단의 사병화가 얼마만큼 심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7][8]

물론 사령관이 죽으니 사령관의 아들에게 충성을 바친다는 식의 세습은 아니었다. 아무리 당시 로마군이 사병화 현상이 심했다지만 결국 로마군 장병들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시민계급이었고 전투에서 자신들을 개죽음하게 만들 수도있는 지휘관이 조금이라도 미심쩍으면 그냥 전역해버릴 자유가 있었다. 그런데 어린 폼페이우스는 지나치게 높은 군사적 재능과 지휘력을 타고난데다 재벌2세 특유의 자신감과 특히 부하들에게 관대하게 베풀수 있는 재벌의 재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병사들이 섬기고 싶은 주군의 이상형이 되어버려, 3개 군단이나 되는 대병력이 그것도 본국 내에서 폼페이우스 한명에게 충성을 바치게 된 것이다.

물론 폼페이우스 가문이 자기 돈으로 모병한 군단이라면 충분히 '폼페이우스 가문의 관할'이라고 볼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의 소집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부군으로써였고 이 당시 폼페이우스는 술라가 고집스럽게 만든 공직 연령 제한에도 한참 미달했고, 초급 선거직 경험조차 없어서 정부군을 이끄는 것 자체가 완벽하게 불법이었으니 앞뒤 다 따져봐도 어린 폼페이우스가 이 군대를 이끈다는 것은 완전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이 군단을 지휘하는 것을 술라에게서부터 정식으로 허락받고 술라 편에서 싸운다. 그 냉혹하고 강경한 원로원주의자이자 연공서열주의자인 술라도 골머리를 앓으면서까지 어린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특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술라의 원로원파도 그닥 인재가 충분하다 할 수없는 상황에서 재능과 돈과 시간이 모두 넘쳐나는 폼페이우스를 굳이 박대해 적으로 돌려서 얻을 손실이 너무나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행인 점은 정치적 이념에는 딱히 관심이 없는 폼페이우스에게 권력욕 때문에 민중파로 돌아설 위험이나 왕위에까지 욕심을 부릴 위험이 있지는 않았다는 점으로, 그 점 덕분에 술라 체제에서 어린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특권은 겨우 용인될 수있었다. 폼페이우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만큼 저명해지고 싶어한 것 뿐, 직접 왕중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술라는 어린 폼페이우스의 뛰어난 결단력과 전투 수행능력을 보았고, 때문에 자신의 딸을 폼페이우스와 혼인시킨다.[9][10]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이 술라의 승리로 끝나자 술라는 폼페이우스에게 시칠리아로 도망간 마리우스파의 처리를 맡긴다.

폼페이우스는 시칠리아의 카르보를 무찌르고 아프리카에서 아헤노바르부스를 격파한다. 폼페이우스는 마메르티니인들을 특히 불공정하고 가혹하게 대우했는데 그들의 대표가 로마법에 어긋나는 처사라며 항의하러 찾아오자 "칼을 차고 있는 우리에게 법 따위는 집어치워라!"라는 패기넘치는 답을 주며 쫓아냈고, 이로 인해 십대 백정[11]이라 불리며 인기과 반감을 동시에 받았다. 그는 술라의 잔인한 숙청 정책을 충실하게 이행해 2년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철저하고 잔인하게 마리우스파 인물들을 숙청했다.

아프리카의 우티카에 주둔하고 있던 폼페이우스에게 술라가 휘하에는 1개 군단만 남기고 나머지 병력은 우선 돌려보낼 것을 요구하는데, 폼페이우스에게 완전히 매료된 휘하의 군단병들은 회군하지 않은 채 장군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고 폼페이우스가 먼저 가라고 명령하자 그들은 술라 같은 학살자를 믿어서는 안된다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12]

술라는 이 때 폼페이우스에게 '마그누스'라는 칭호와 개선식을 허가한다. 이 때 폼페이우스는 코믹할 정도로 허세에 충만한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로마 근처에 진주한 폼페이우스군의 기세를 본 술라[13]는 내키지 않았지만 폼페이우스가 로마 근처까지 진군해 공손한 태도를 취하자 선수를 쳐서 앞장서 마중을 나가 따스히 맞이하며 그에게 일생 동안 따라붙게 되는 "마그누스"라는 별호를 붙여 준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대담하게도 개선식까지 요구하자 술라는 그건 거부한다.[14]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당신은 지는 해이고, 나는 뜨는 해입니다."라고 거만하게 선언했고, 그 꼴을 본 술라는 기가 막혀 "이분더러 개선식 하시라 그래라!"하고 두 번이나 말해 승낙했다.[15][16][17]

물론 이것들은 오만함이나 과대망상이라기보단 마침 병권과 수도가 손에 있는 상태에서 후일을 위한 정치적 홍보효과를 노린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개선식 이후 로마의 민중, 기사계급들은 개선식 반대파까지도 젊고 돈많고 군사적 재능까지 뛰어난 '영웅' 폼페이우스를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되었고, 실권자인 술라는 골머리를 싸매게 되었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죽었다.

기원전 77년 술라가 죽은 해에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레피두스가 에트루리아 시민들의 반란에 동조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폼페이우스가 진압하게 된다.[18] 이전에 술라는 자신의 군단병에게 땅을 주기 위해 이탈리아 도시들의 땅을 몰수하였는데[19] 이에 불만을 품은 에트루리아 시민들이[20][21]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를 진압하기 위해 집정관들이 군단을 이끌고 출동하였다.

이 때 집정관으로서 출진한 레피두스는 숨기고 있던 민중파 성향을 드러내면서 반란군과 합류하였고 로마를 공격하기 위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맡겨 맞서게 하였고 폼페이우스는 레피두스군을 격파하고 로마를 지켜낸다. 레피두스는 사르데니아 섬으로 망명을 갔고 그곳에서 죽는다.[22]

반란이 정리되자 로마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군을 해산하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가라고 하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였고[23] 이 군대로 스페인에서 반란을 일으킨 퀸투스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겠다고 대답한다. 세르토리우스는 킨나파의 일원으로 킨나 정부 때 법무관 자격으로 스페인의 총독을 지내다가 킨나가 죽고 술라가 정권을 장악하자 그대로 스페인에 눌러앉아 독립을 선언하고 정부를 구성한 것이었다. 이때 세르토리우스는 이를 진압하러 온 로마군을 여러 차례 격파하였으며 그 뒤 스페인 원로원을 창설하고 화폐를 주조하는 등 이미 스페인의 왕처럼 굴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레피두스를 격파한 시점에서 로마군은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24]에게 군단을 맡겨 세르토리우스를 상대케 하였는데 세르토리우스는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우세를 점해 이미 남쪽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스페인을 점령한 상태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으로 스페인의 메텔루스를 도우러 가겠다고 말한 것이었다. 폼페이우스의 제안은 스페인이 고전하는 상황에서 타당하긴 하였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이 불법이었다. 바로 폼페이우스가 지금껏 로마 공직을 단 한 차례도(!) 겪은 적이 없는 데다 29세밖에 안 되기 때문에 법적으로 군대의 지휘권을 갖는 건 완벽한 불법이었다. 게다가 이 나이 제한은 옛날부터 있었지만 사문화된 조항이었는데, 이것을 다시 부활시킨 게 정작 술라다.[25] 한니발을 패퇴시킨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조차도 이 법 때문에 형식적으론 다른 집정관 휘하의 졸병으로 종군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특히 술라가 로마를 뒤엎은 다음 공화정을 강화하겠다고 민중파의 씨를 말린 뒤 엄격한 나이제한을 만들었는데 술라가 죽자마자 즉각 뒤엎어 버리는 것은 시기적으로 너무 일렀다.

하지만 다른 전직 집정관들이나 전직 법무관 등 자격있는 자들은 대부분 술라나 마리우스가 다 죽여버렸거나, 레피두스처럼[26] 군대를 주면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원로원파는 폼페이우스에게 군대를 맡기려고 했다. 이미 폼페이우스에게 레피두스를 막으라고 군단병을 맡긴 것 자체로 원로원 스스로 술라의 법을 무시한 것이었기 때문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요구대로 그를 스페인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여기에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전직 집정관'직을 주는데, 일단 이게 얼마나 코미디면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을 한 적도 없고, 집정관을 할 나이도 안 되었고, 집정관을 하기 전에 거쳐야 할 관직도 지낸 적이 없었으며, 게다가 결정적으로 원로원은 집정관을 임명할 권리 자체가 없었다. 이 당시 원로원이 얼마나 개막장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27]

폼페이우스는 곧바로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싸웠는데 마리우스의 장교였던 세르토리우스의 군사적 재능은 상당하여 2년간 폼페이우스를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막상막하를 넘어 우세한 형세로 버텨내고 전장에서 폼페이우스에게 두 차례의 패배를 안겼으며 이중 한 번은 폼페이우스의 목숨까지 위협했다. 그 이후로도 세르토리우스는 전장에서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패배다운 패배를 한 적이 없다.[28] 폼페이우스가 가져온 물자가 상당한데다 스페인의 부족들을 훈련시켜 당대 최강의 무장을 갖춘 로마군을 상대해야 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선전. 이 때문에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추가적인 물량공급을 요청해야 했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는 물량의 차이 때문에[29] 점점 밀리고 말았고 마침내 부하에게 암살당함으로써 5년만에[30] 스페인 진압이 완료된다.

이때 이탈리아에서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로마의 코앞인 베수비오 화산에 터를 잡고 있었다. 로마는 처음엔 이를 산적떼 소탕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법무관에게 맡겨 처리하려고 하였는데 두명의 법무관이 3-4천씩 이끌고 갔다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빡돌은 원로원은 정식으로 군단병을 편성해 두 명의 집정관에게 2개 군단씩 주어 출동시켰다.

스파르타쿠스는 집정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아 지역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7만의 무리와[31] 함께 북상하고 있었던 스파르타쿠스의 군을 집정관 렌툴루스가 막았고 스파르타쿠스는 이를 정면으로 공격해 렌툴루스의 군을 격파한다. 그 뒤 뒤이어 쫓아오고 있었던 집정관 겔리우스의 군을 공격해 이를 격파해버린다.

두 집정관이 박살나자 스파르타쿠스와 그의 일당들은 방향을 바꿔 이탈리아 반도의 남쪽을 약탈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남하하던 것을 수석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가로막는다.[32] 로마의 최고 부자였던[33] 크라수스는 원로원에게서 받은 돈에 자신의 사비를 보태 8개 군단을 편성한 뒤 이들을 쫒아왔다. 2개 군단을 이끌던 집정관들과는 달리 8개 군단이나 되므로 스파르타쿠스군은 수에서 밀려 격파되고 스파르타쿠스 본인은 전사함으로써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진압된다.

이때 스페인의 원정을 마무리지은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 욕심을 냈으므로 매우 빠른 속도로 로마로 귀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알프스 국경에 진입했을 때 크라수스의 승전보가 전해졌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잔당들이 달아난다는 첩보를 포착했고 이들을 추격해 5 ~ 6천여 명 정도를 전사시킨다. 폼페이우스는 원로원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스파르타쿠스의 전쟁을 마무리지었다고 선언했다.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의 주장을 인정하였고 폼페이우스에겐 스페인 원정의 공 + 스파르타쿠스 반란 마무리를 겸해 개선식을 거행케 하였고 크라수스에겐 오베이션이라는 개선식보다 한 단계 아래의 군사퍼레이드를 하게 한다. 이로써 크라수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적대감을 갖게 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군공을 폼페이우스가 훔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34]

이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령하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거부하고 집정관에 출마하고 싶다고 말한다.[35] 그러자 크라수스도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집정관에 출마하겠다고 하였고 이 둘은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서 버틴다. 이에 원로원은 이를 허락하였고 따라서 이들은 그 다음해의 집정관 선거에 출마했다.[36]

당시 집정관 연령제한에 8년이나 미달했던 폼페이우스의 입후보 자격을 검증하겠다고 원로원이 개최한 청문회의 전설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위원단: 참전경험은 있습니까?

폼페이우스 : 참전경험요? 저는 지휘경험밖에 없는데요.
(좌중 박장대소)[37]

2.3. 전성기

기원전 70년 집정관에 선출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사실상 사문화되어 있었던 호르텐시우스 법을 부활하는데 이는 원로원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폼페이우스는 휘하 군단병들의 몰표로 당선된 호민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를 앞잡이로 내세워 각종 특혜를 법으로 통과시켰다.

이 시기 지중해엔 해적이 날뛰고 있었다. 이 당시 로마의 통제력이 약해졌고[38] 또한 다른 동방의 국가들은 로마에게 얻어터진 이후로 힘이 없었다. 따라서 해적들이 판을 치면서 로마에 수입되는 곡물들마저 위협받자 이를 해결하길 원했던 것이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67년 호민관 가비니우스가 제안한 법률이 걸작이었다. 폼페이우스에게 모든 지중해와 지중해 해안선의 50마일 이내를 관할하는 권한( 임페리움)을 주고 임기를 3년이나 주자고 한 것이었다. 로마는 여지껏 군사지휘권을 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준 적이 없었다. 모든 장군들은 그들이 관할한 영역이 있었으나 폼페이우스는 제한없이 지중해 전체를 관리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은 로마의 생사여탈권을 폼페이우스에게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가지게 될 군사지휘권의 규모가 다른 장군들을 압도했고, 또한 모든 선단을 장악하게 되므로 다른 장군들의 해양 보급 라인도 폼페이우스가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은 이것을 반대했지만 해적 문제가 심각했고, 폼페이우스의 인기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이 법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39]

폼페이우스는 3년의 임기를 가진 해적 소탕을 단 3개월 만에 일소하는 포스를 보였다. 그는 지중해 전체를 13개의 구획으로 분할하고, 이를 휘하 장교들에게 각각 맡겨 해적들을 한 곳으로 몰아붙였다. 그 뒤 킬리키아에 집결한 해적들을 한 번에 일소함으로써 지중해 전체를 깨끗이 청소했다. 이때 해적 소탕 방법의 전술은 일단 기본적으로 직접적인 소탕을 피하고, 항구를 점령한 후 물과 식량 보급을 끊고, 이 짓을 반복해 해적의 움직임을 쉽게 노출시켜 3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내에 제압에 성공한 것이다.

3년의 임기 중 폼페이우스가 사용한 임기는 1년밖에 안 되었으므로 아직 2년이 남아 있었다. 이때 호민관 가이우스 마닐리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이 남은 임기를 사용하여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를 제압하게 하자고 제안했고 이는 민중의 환영을 받았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와 싸운 바로 그 미트리다테스 로 원로원의 막장 행각에 로마가 붕괴해가는 걸 눈치채고 있었기에 치밀한 계획으로 로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는 아르메니아를 포섭하고 중동권의 승인 반 묵인 반을 등에 업으며 게릴라식 장기전과 소모전으로 로마를 동쪽에서 무너트리고 있었던 강자였다.

이때 동방엔 이미 루쿨루스가 파견되어 미트리다테스 6세를 상대하고 있었다. 루쿨루스는 기원전 74년에 부임하여 무려 7년에 걸쳐 미트리다테스 6세와 전쟁을 벌였다.(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그는 휘하 5개 군단을 활용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의 침략을 격파하고 도망가는 그를 뒤쫒아 폰토스를 공격했다.(기원전 71년) 미트리다테스 6세는 아르메니아로 도망가서 티그라네스 2세와 동맹을 맺은 뒤 함께 루쿨루스와 싸웠는데, 루쿨루스는 상당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술로 연합군을 격파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하지만 뒤이어 두 왕을 쫒아 아르메니아의 영토로 진입한 루쿨루스에게 로마 군단병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전리품의 배분 문제로 불만을 품었으며 또한 오랜 전쟁으로 지쳤기 때문에 그리한 것이었다.

루쿨루스는 당시 기축통화인 은화를 병사들에게 충분히 나눠줬다. 하지만 장기적인 동방 통치를 위해 그리스인과 척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리스계 도시를 약탈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가 부하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의 약탈은 허용했지만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가 병사들을 선동했다. 안팎으로 파국을 맞은 루쿨루스는 군사 반란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때 총반격을 감행해서 그동안 잃은 걸 거의 다 복구한 상황이었다. 물론 겉으로만 그렇고 전성기 폰토스의 군사력은 술라와 루쿨루스가 박살을 내놔서 복구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아무튼 병사들이 싸우길 거부하자 로마군에 내분이 일어났다는 정보를 들은 미트리다테스 6세는 소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폰토스 영토로 슬그머니 들어가 반란을 선동했다. 이런 소동 때문에 루쿨루스는 퇴각했고, 이러는 동안 미트리다테스가 폰토스 내의 젤라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던 로마군 본부를 공격해 점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루쿨루스는 폰토스로도 돌아갈 수 없게 되는 바람에 자신의 속주로 되돌아갔다. 7년에 걸친 미트리다테스 전쟁이 모두 무위로 돌아간 것이었다.

폼페이우스는 5년 임기를 부여받았고, 로마령 아시아 속주에 부임하여 루쿨루스로부터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때 루쿨루스와 폼페이우스는 말다툼을 했는데 루쿨루스는 지휘권을 양도하기 전에 폼페이우스를 사냥개가 쓰러뜨린 사냥감을 낚아채는 새라며 비난했고,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의 탐욕을 비판했다. 사실 폼페이우스의 공적을 보면 유난히 전임자가 상당수 해놓은 걸 마무리만 지은 게 꽤 있는데, 폼페이우스의 스페인 정복도 그의 전임자에 의해 많은 부분이 진척된 것을 폼페이우스가 마무리지은 것이었으며[40] 스파르타쿠스 반란의 잔당들이 알프스를 넘어 북상하려는 것을 폼페이우스가 처리한 뒤에 이것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그리고 루쿨루스가 거의 다 해놓은 동방 원정을 폼페이우스는 단지 마무리지으면 되는 것 등을 포함하면 이러한 비난을 듣는 것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하여 마무리를 짓는 것 역시 중대한 책무이며 결코 쉽지 않은 일이므로 폼페이우스의 업적이 작다고 평가절하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이렇게 자꾸 반복되면 이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으며 실제로 영어 위키백과 문서에서도 폼페이우스는 다른 장군들의 전공을 훔친 것으로 명성을 쌓았다고 했다(...).[41]

지휘권을 양도받은 후 폼페이우스는 본격적으로 미트리다테스 6세를 토벌하기 시작했다. 루쿨루스가 철수하긴 했으나 그가 폰토스와 아르메니아 두 왕국의 군대와 재산을 거의 전부 소멸시켜 놨기 때문에 이는 꽤나 수월한 작업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보다 두 배나 많은 군단병을 데리고 왔기 때문에 루쿨루스보다 더 편안하게 진압할 수 있었다. 그는 파르티아 왕에게 사신을 보내 아르메니아를 돕지 말라고 했고 이 약속을 받아낸다. 이 때문에 아르메니아도 폼페이우스쪽에 붙기로 결심하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관계를 청산했다. 이렇게 외교적인 문제를 마무리지은 뒤 폼페이우스는 폰토스 왕국으로 진입했고 미트리다테스 6세는 이를 저지하려고 북서쪽의 국경으로 나왔으나 금세 격파당하여 폰토스를 버리고 달아났다. 폼페이우스는 루쿨루스와 달리 이를 추격하지 않고 놔둔 채 폰토스 정리 작업에 착수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자신이 모아놓은 재산을 모두 털어 군대를 다시 편성해 폰토스에 진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고 생각한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폼페이우스는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진압하라는 임무만 받았을 뿐이었으나 그는 시리아까지 진격하여 팔레스티나의 하스몬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를 합병해버렸다. 이는 월권행위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이를 두 왕조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로마가 안 먹으면 파르티아가 먹을 것이라며 정당화했다. 하지만 더 큰 동기는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적 성취를 더 돋보이게 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4년 뒤인 기원전 62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미트리다테스 6세의 폰토스, 셀레우코스 왕가의 시리아, 하스몬 왕가의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그동안 정복한 국가의 수는 저 두 왕조외에 자잘한 왕조까지 합쳐 14개나 되었다. 이런 영토의 확장으로 인해 폼페이우스는 로마에게 엄청난 수입을 안겨주었는데 이로써 로마의 1년 예산이었던 2,000만 세스테르티우스가 3,400만 세스테르티우스로 증가하게 되었다.

이때 로마에서는 집정관이었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카틸리나 반란을 진압했다. 이런 소동을 처리한 원로원은 폼페이우스가 임기를 마치고 그의 군대와 함께 귀국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원로원과 시민들은 촉각을 곤두세웠는데 그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원로원과 로마의 운명이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그와 휘하 군대의 규모 및 그들이 보유한 동방의 전리품들을 포함하면 로마는 그들에게 맞설 능력이 없었다. 폼페이우스가 이때 마음먹으면 로마를 점령한 뒤 제2의 술라가 되어 최고 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폼페이우스는 모두를 놀라게 했는데, 그는 자신의 군단을 바로 해산해 버린 것이었다. 이것은 폼페이우스가 정치적인 야심이 그다지 크지 않았거나 혹은 원로원이 로마를 다스려야 한다는 술라의 신념을 추종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폼페이우스는 어떠한 정치적인 움직임조차 시도하지 않았고, 단지 원로원이 자발적으로 자신이 처리한 동방의 일을 승인해주고 또한 군단병에게 토지를 배분해 주길 원했다.

하지만 원로원은 폼페이우스를 시기했고 또한 그가 군대를 해산했으므로 그에게 겁먹지도 않았다. 폼페이우스의 요청이 지극히 합리적이었고 또한 그가 정부를 뒤엎지 않는 것만으로도 원로원은 큰 빚을 진 것이나 다름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하고 근시안적인 원로원은 단지 인기가 높은 폼페이우스의 체면을 구기는 것에 집중했다.[42]

이로써 폼페이우스의 요청은 무려 3년간이나 결정되지 않고 시간을 끌게 되었다. 폼페이우스가 거느렸던 대규모의 군단병들은 모두 실업자 신세였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저택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폼페이우스가 개편한 동방은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소 카토를 위시한 로마 원로원은 이것을 개의치 않았다. 결국 이러한 원로원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출현을 낳아 이들을 자폭하게 만들었다.

2.4. 제1차 삼두정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당시 반 술라파의 아이콘쯤 되는 사람으로,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순 있겠지만 일단 친 원로원파였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에게 항명하고도 살아남은 몇 안되는 사람이었고, 키케로를 제외하고는 가장 빠르게 '명예로운 경력'을 밟고 있던 유망주였다.

그렇게 카이사르는 알게 모르게 정치적인 업적을 조금씩 쌓아왔고, 사실 동료 정치가들 중에선 매우 성공적인 편이였다.[43][44] 그는 안찰관을 맡으면서 거대한 규모의 서커스와 검투 경기를 개최하여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매우 높았으며[45] 법무관의 자격으로 총독으로 부임해선 지금의 포르투갈 지역에 해당되는 곳을 군사를 이끌고 제패하기까지 한다. 훗날 갈리아 지역을 제패한 것을 보면 야만족을 제패하는 솜씨는 아마도 타고난 듯. 참고로 카이사르가 제패한 갈리아 지역은 이탈리아반도보다 더 넓다.

또한 30대의 나이에 이미 종교 최고 지도자인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되었다. 중대한 실권은 없으나 그래도 명함에 찔러넣기에 이보다 근사한 것은 없었는데, 이것은 종교의 최고 책임자라는 타이틀의 무게 때문이었다. 그리고 실권이 아주 없다고 하는 건 오해인게, 로마는 의외로 종교 제의(祭儀)와 전통을 매우 중요시하였고, 정치에도 그런 요소들이 합법적으로 적용됐다. 카이사르는 최고 사제직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반대파들이 후에 불길한 징조 드립을 쳐가면서 태업하는 것도 '종교 지도자'로써 죄다 씹어버릴 수 있었다. 게다가 기원전 200년경부터 영향력 있던 집정관들은 대부분 폰티펙스 막시무스를 겸임했다. 괜히 카이사르가 폰티펙스 막시무스 선거에서 지면 죽어버리겠다고 언급한게 아니다.

하지만 이런 출세가도를 달리면서도 카이사르 뿐 아니라 동시대의 인물들은 전혀 카이사르의 출세가 빠르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폼페이우스는 둘째치고 카이사르는 정상적으로, 술라가 정한 법에 따라서 제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46] 그래서 집정관 출마할 때는 나이가 벌써 40이 다 되어있었다. 어찌 되었건 카이사르는 옵티마테스(Optimates)라 불리는 원로원 기득권 파가 득세하는 원로원 내에서 민중파( 포풀라레스, "Populares") 출신이었다는 핸디캡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에서의 총독 임기가 끝난 뒤 귀국하여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나 원로원의 강한 견제를 받아 당선이 불확실하였다. 이 위기를 해결하고자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에게 접근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는 그야말로 눈이 휘둥그레지는 전과를 안고 로마 장군이 한 번 해도 영광이라는 개선식을 세 번이나 했지만, 자기 휘하 병사들에게 제대로 봉토 한 번 지급해주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원인은 역시나 당시 막장이었던 로마 원로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연합은 서로에게 이득이었는데 카이사르는 집정관 선거와 그 이후의 정치활동에서 폼페이우스가 동원할 수 있는 확실한 표와 무력의 뒷받침을 받을 수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그의 입장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집정관을 원로원 내에 두게 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시 상공업과 중산층의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크라수스를 끌어들임으로써 이들 계급의 지지도 얻을 수 있었다.[47]

크라수스가 이 두 연합에 끼어든 과정을 살펴본다면 당시 로마는 세금을 정부가 거두는 것이 아닌 징세청부업자에게 맡겼다. 이들 징세업자들은[48] 로마 정부에게 그들이 거둘 수 있는 세금의 최대 양을 제시하였고 이들 중 가장 높은 징수액을 제시한 징세업자를 로마 정부가 지정하게 된다. 그러면 그 징세업자는 이 액수를 알아서 징수한 뒤 로마 정부에게 납부하고 나머지는 그들이 먹는 것이었다.[49]

그런데 삼두정치가 구성될 때 이 동방의 징수를 낙찰받은 징세업자들은 동방의 경제가 워낙 안좋아 도저히 로마 정부에게 제시한 양을 납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로마 원로원에게 좀 할인해 달라고 통사정하였는데 로마 원로원은 매우 완강하게 이것을 거부하였다.[50] 크라수스는 이 일에 상당히 깊이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삼두 정치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가담한 것이었다.

이들은 여기에 키케로를 가담시키려고 유혹하였는데 이는 키케로는 당시 로마의 대표적인 석학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키케로는 이것을 야합이라고 생각하여 가담을 거부한다.

이렇게 삼두정치가 형성되자 카이사르의 집정관 당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시 로마의 풍조는 카이사르와 비슷할 정도로 빚을 진 젋은 정치가가 수두룩했다. 가령 카틸리나의 음모를 주도한 카틸리나도 카이사르와 비슷한 규모의 빚을 지고 있었으며 훗날 카이사르의 오른팔로 활약한 가이우스 스크리보니우스 쿠리오도 카이사르보다 더 젋은 나이에 카이사르보다 더 많은 빚을 지고 있었다. 이는 당시 로마의 선거가 돈질로 승부가 나는 경향이 횡행했기 때문이며[51] 때문에 야심찬데다 유망한 젊은이들이 빚더미에 허덕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실 카틸리나가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던 것도 그가 집정관 선거에서 두 번씩이나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로마인 이야기에 따르면 키케로가 그를 탄핵할 때 시정잡배처럼 묘사하나 실은 꽤나 능력있는 인물이었으며 실제로도 매우 아슬아슬하게 집정관 선거에서 3등으로 탈락하였다.[52] 이로써 빚으로 유지한 그의 출세길이 파탄이 난 것이었다.[53]

이는 카이사르도 마찬가지라, 그가 최고제사장 선거에 나섰을 때 선거에서 지면 집에 돌아오지 않겠노라라고 말했던 것은 낙선은 곧 정치적 종말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당시 로마 정치인들의 상황은 빚더미에 앉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되었으며 따라서 카이사르가 특별하게 취급받아 채권자가 돈셔틀이 되는 상황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사실 이때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라는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당대에 그보다 더 잘나간 인물은 드물다.[54] 여기에 크라수스가 카이사르에게 빌려준 돈은 크라수스 재산의 일부에 불과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최고 제사장에 오른 전도 유망한 젊은이였으며 크라수스에게 카이사르는 돈을 얼마를 빌려가든 여전히 쓸만한 말이었다. 즉 크라수스와 카이사르는 어느 일방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관계가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과 자금을 주고 받는 공생 관계였다.[55]

원래부터 인기가 많았던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지지까지 받자 어렵지 않게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군단병에게 토지를 주기 위한 법안을 내놓았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전직 집정관으로 크라수스랑 원로원에서 이 농지법에 대한 지지선언을 하고, 민회에서는 자신들의 퇴역병들을 동원하여 표를 싹쓸이하면서 농지법을 통과시킨다.[56][57] 이 과정에서 카이사르가 법안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나랑 토론해보자는 카이사르에 반박을 못한 카토가 장광설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면서 카이사르가 릭토르들을 시켜 카토를 밖으로 끌어내리는 소동이 벌어졌으며, 민회에서는 동료 집정관인 마르쿠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가 역시 토론해보자는 카이사르를 씹고 매수한 호민관들과 함께 거부권을 행사하려다가 폼페이우스의 퇴직병들과 민중들에게 몰매를 맞고 쫓겨나기까지 한다.

그 이후 비불루스는 폼페이우스의 정치깡패들 때문에 사실상 정치적으로 거세되었고, 그마저도 카이사르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소문이 돌아[58] 집정관 직을 수행하지 못했으며 카이사르가 모든 직을 수행하였다.[59] 당시 로마에서는 해당되는 연도를 집정관의 이름을 따서 불렀다. 따라서 원래 그 해당되는 연도를 비불루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러야 했는데 로마 시민들은 비불루스가 아무런 영향력을 못갖게 된 것을 풍자하여 율리우스와 카이사르의 해라고 불렀다.

카이사르는 삼두정치의 약조였던 폼페이우스의 병사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해주는 문제와 징세업자들의 세금 계약 문제를 해결한 뒤,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프로콘술로서 임페리움을 주어 갈리아 키살피나와 일리리쿰의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법안[60]을 통과시켰는데, 때마침 갈리아 트란스알피나의 총독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여 공석이 되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장인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카이소니우스[61]는 원로원에게 갈리아 트란스알피나의 총독직을 카이사르에게 맡길 것을 제안을 빙자한 협박하였고, 원로원은 이를 승낙했다.

카이사르가 갈리아로 부임한 뒤 수도에 남은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에 대해 원로원은 이간질을 하였고 이것이 거의 성공 직전까지 갔다. 애초에 앙숙이었던 둘은 원로원이 조금만 손을 써주자 금세 동방 속주의 지배권을 놓고 서로를 격렬하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이걸 눈치챈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 겨울철에 이탈리아로 내려와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회담을 가지고,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집정관에 출마할 것을 제의한다. 그리고, 폼페이우스에게 동방 대신 스페인의 총독 직위를 제시하면서 불안한 삼두관계를 다시 묶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갈리아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고 있는 카이사르의 인기는 사실상 폼페이우스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망이 높아지고 있었다. 따라서 지지 기반인 민중의 지지와 군대의 지지 둘 다 밀려가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62][63]

문제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자극을 받아[64] 크라수스도 군사적 업적을 쌓으려고 무리수를 두고 만다.[65] 바로 파르티아 원정. 애초에 크라수스가 시리아 따위의 부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었지만, 훗날 크라수스보다 군사적 재능이 훨씬 뛰어났던 안토니우스마저 나중에 실패하고 만 원정길을 군재가 빈약한 크라수스가 성공할 리 없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래도 병력은 제대로 건져서 돌아왔지만 크라수스의 원정은 재앙 그 자체였다. 카르헤 전투에서 로마군은 궤멸당했고 크라수스도 전사했다.

삼두정치의 한 축이었던 크라수스의 죽음을 계기로, 로마의 정계를 주물렀던 사적 동맹인 삼두정치는 결국 끝이 나게 되었다. 크라수스의 죽음으로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가 바로 서로를 적대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당대의 인물들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권력욕과 명예욕을 가지고 있었던 두 영웅간에는 타협이 있을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서로를 향한 정치적 견제와 대립이 수위를 더해가다가, 궁극적으로 카이사르의 외동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였던 율리아가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 이 둘 사이의 개인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되었고, 폼페이우스는 점점 카이사르의 정적이었던 원로원파로 넘어가게 되면서, 로마에는 또다시 내전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2.5. 카이사르의 내전과 폼페이우스의 실책

폼페이우스는 이미 60줄이었고, 그가 동방원정을 성공시킨 뒤 군사를 해산한 것을 보면 권력을 독점하는 것에는 별로 욕심이 없었던 듯 하다. 이는 계속해서 야심을 드러내는 카이사르와 대조되는 모습이었고, 거기다 카이사르는 대표적인 민중파였으나 폼페이우스는 원래 술라의 부하로 옵티마테스 출신이었다. 바로 이때문에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붙어서 카이사르와 이간질했다.

더구나 원로원과 더욱 사이가 가까워진 폼페이우스는 옵티마테스의 핵심 멤버 메텔루스 스키피오의 딸과 결혼하였으며[66][67], 이로 인해 카이사르와의 관계는 완전히 멀어지게 된다.

그 뒤 로마 군단에 식량보급이 지연되는 문제가 생겼다. 원로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단독으로 집정관이 된 폼페이우스는[68] 식량보급 문제를 빌미로 카이사르에게 불리한 법안을 상정한다. 당시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그가 총독 자리에서 물러나고 나서부터 집정관 재선까지는 한 달이라는 시간공백이 있었다. 이 기간동안 카이사르는 형식상 군대 지휘권이 없는데, 평소 같으면 융통성을 발휘해서 묵인해줄 수 있는 사안이었지만 카이사르가 눈엣가시 같았던 원로원은 이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원로원과 손잡은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집정관 재선에 출마할 때 군대를 해산시키고[69]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해야 한다는 법안을 상정한다. 비무장 상태로 로마에 입성하면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민간인 신분의 카이사르가 무슨 짓을 당하게 될지는 뻔했는데, 그라쿠스 형제의 최후를 생각하면 딱 맞을 것이다.

따라서 바보가 아닌 카이사르가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는 자신 휘하의 호민관 등용시켜 지속적으로 법안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했다. 호민관은 집정관과 같이 합법적인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 상정에 대해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는 와중에, 카이사르는 한 발 양보하기로 결심하고 협상안을 제시한다. 자신의 군대를 해산하는 대신 폼페이우스 역시 그가 거느리는 군대를 해산한다면, 법안에 대해 찬성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카이사르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온건한 제의였으나, 옵티마테스파의 집정관들이 펄펄 뛰면서 반대해 결국 무산된다.[70] 특히 폼페이우스가 적극적으로 반대했으며 그와 동시에 자신의 장인 스키피오를 통해 카이사르에게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시키라고 재촉하였다. 대화로 풀면 되지 내전까지 벌어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온건한 성향의 원로원 의원들이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을 자신의 자택에 불러모아 훈계와 질책을 하며 결단을 촉구했을 정도. 이때 폼페이우스는 자신에게 10개 군단병이 있음을 과시하고 자신의 장교단을 보여주면서 압력을 가하였다.

그런 폼페이우스의 재촉 끝에, 마침내 원로원은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최고 권한인 원로원 최종권고를 발동한다. 이로써 호민관의 거부권과 신변 보호 권리는 무력화되었다. 다만 원로원도 카이사르에게 갈리아를 제패한 군단병이 휘하에 고스란히 있었으므로 그가 권고를 순순히 따를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심지어 골수 원로원파인 소 카토나 마르켈루스까지 내전까지 치르는 건 어이없다면서 반대하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가 일방적으로 이를 밀어붙였다.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업적이 카이사르에게 밀리자 아예 카이사르와 군사적 대결을 벌여 자신의 위업을 또다시 보여주려는 호승심을 품었던 듯하다.[71]

원로원과 폼페이우스 일파와의 협상이 결렬되고, 결단을 내릴 수 밖에 없게 된 카이사르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고 루비콘 강을 건너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때 결단을 내리며 한 말이 당대에까지 명언으로써 회자되곤 한다.
Alea iacta est.
( 주사위는 던져졌다.)

쿠데타 소식을 접한 폼페이우스는 처음에 북상해서 카이사르와 이탈리아에서 싸우려고 했다. 폼페이우스 본인은 카푸아에 2개 군단을 배치시킨 후, 로마시 인근에서 징집을 시도하였다.[72] 그리고 자신을 지지하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각각 대대를 이끌고 루비콘 강 인근을 수비해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런 폼페이우스의 계획은 시행하자마자 난관에 부딪치는데, 이탈리아 주민들이 모두 카이사르군에 가담하길 원했던 것이다.

이는 불과 50년전에 벌어졌던 동맹시 전쟁의 영향이 컸다. 이탈리아 주민들은 고작 50년여 전까진 라틴 시민권자였다가 동맹시 전쟁에서 패하고 로마 시민이 된 사람들이었다. 이때 로마와 전쟁을 치렀으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이 전쟁의 결과 로마 시민권을 얻긴 했지만 로마 전체의 35개 선거구 중 겨우 4개만을 배정받았기에 원로원파를 향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그런데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주장했던 민중파의 마지막 거두인 카이사르가 남하를 하니 계속 차별을 받았던 이탈리아 도시민들은 당연히 카이사르에게 지지를 보냈다.

뿐만 아니라 원래 로마에 속해 있던 시민들조차 카이사르를 지지했는데,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완료하자마자 원로원이 카이사르에게 노골적인 적대성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본토보다 더 큰 갈리아를 통째로 로마의 영역으로 만든 전쟁 영웅에 대한 터무니없는 대우는 로마 시민들을 적잖이 실망시켰고, 사람들이 원로원에게 등을 돌리도록 만들기 충분했다.[73]

결국 이탈리아 북쪽에 주둔한 폼페이우스 쪽의 군대는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점점 병력이 감소하는 기현상을 보인다. 병사들이 계속 탈영하거나 항복하면서 군단이 공중분해된 것이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민심이 극히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폼페이우스는 결국 브룬디시움에서 배를 타고 이탈리아를 탈출하게 된다.

폼페이우스로서는 당장 동맹시들이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그들을 여러가지 수단으로 매수한다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동맹시들의 이탈 속도는 너무 빨랐으며, 실시간으로 카이사르의 군대가 계속 진군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폼페이우스의 크나큰 실책은, 계속 카이사르를 몰아붙이면서도 정작 전쟁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원로원파와 폼페이우스의 발목을 잡았다.

갈리아에서 무려 8년이나 실전을 겪으며 일당백의 용사 집단이 된 카이사르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폼페이우스 쪽에서도 미리미리 최정예 군단을 준비해두고 이탈리아 본토에서 결전을 벌이는 것이 최선의 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미리 소집해둔 이탈리아 군단을 그리스로 데려가는 것이 차선책이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군단을 미리 소집하지 않았기 때문에 둘 중에 어느것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결국 이탈리아의 정예 병력은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흡수된다.

당시 날짜를 보면,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측에서 카이사르에게 최종권고를 선포한 것이 1월이었다. 선거는 3월에 시작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여유가 충분한 상황이었다. 카이사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생각해봤을 때 궁지에 몰리면 전쟁이라는 최후의 수단을 택할 가능성은 충분했고, 따라서 미리 군단병을 모집해 로마의 방어를 해두는 것이 우선이었다. 실제로 당시 원로원 토의에서 일부 원로들이 '우선 군단병을 모집하여 로마에 주둔시킨 후 최종권고의 선포 시기에 대해 논의합시다' 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묵살하고 바로 최종권고부터 선포한 뒤에 군자금과 군단병을 모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선후가 뒤바뀐 판단으로 인해 군단병은 모이지 못했고, 폼페이우스군은 와해되었으며, 군자금 역시 카이사르에게 고스란히 넘어갔다. 훗날 소 카토는 시칠리아를 떠나면서, 준비도 안해놓고 최종권고를 선포한 폼페이우스에게 멍청이라는 비난을 퍼붓는다.

그러면 다음으로, 정치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명분을 등에 업고 싸울 수 있었는지 알아보자. 우선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 이후로 원로원과 실제 군역을 부담하는 평민 및 기사 계급간의 관계는 더이상 우호적이지 않았다. 원로원이 권고를 하고 호민관이 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시에는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상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카이사르와 원로원 양측이 군대를 해산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고히 한 이상, 원로원은 군역 계급과 명백히 등을 돌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의 정통성과 명분에 기대어봤자 병사가 모일 턱이 없으며, 크라수스와 함께했던 폼페이우스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다.

급하게 시민군을 징집해 방어전을 펼치면서, 이탈리아 외부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단이 소환될 때까지 버틴다는 전략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방어전이라 할 지라도, 장기간 원정으로 단련된 카이사르의 군대를 상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카이사르가 이끄는 군대는 사실상 카이사르의 정예 사병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정예 사병들의 가공할 전투능력은 이미 폼페이우스도 술라와 2차 로마 진군을 함께했을 적에 직접 경험한 바 있었다. 폼페이우스에게도 다수의 사병 집단이 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74] 이탈리아 외부의 식민지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의 통신 및 교통 수준으로는 이들을 필요한 기한 안에 긴급히 소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동맹시를 매수한다는 방법 역시 해당 지역의 권력층을 매수한다는 것이므로, 정작 필요한 군사력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였다. 무엇보다 술라에 의해 잔혹한 경험을 한 이들이 술라파였던 폼페이우스보다 마리우스파였던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마디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 바로 폼페이우스 자신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의 명분에 의지하여 이탈리아 본토에서 싸운다 한들, 카이사르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병력이 모일 가능성은 낮았다. 폼페이우스는 최종권고를 선포하고 나서 움직여도 시간적 여유가 충분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라틴 동맹시들은 상당수가 빠르게 이탈해버렸다. 미리 대비해두지 않고 최종권고 선포를 해버린 탓에 민심이 흔들린 것이 주요 실책이었고, 때문에 더이상 병력을 모을 수 없는 이탈리아를 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동맹시민들의 이탈이 이토록 빨랐던 이유는 폼페이우스의 최종권고 선포부터가 별로 명분이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동맹시 입장에서는 그저 파벌싸움의 결과물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 폼페이우스 파벌이 최종권고의 이유로 삼은 것은, 카이사르가 '민간인 신분으로 로마에 입성하여 집정관 선거에 입후보해야 한다는 법을 어겼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규정은 당시에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사문화된 규정에 불과했다. 폼페이우스 본인조차 크라수스와 함께 군단병을 이끌고 와서 로마 원로원을 협박해 집정관 직을 얻어낸 적이 있었다. 이미 사문화된 데다가 본인마저 신경쓰지 않던 규정인데,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가 끝날 무렵에 난데없이 끄집어내서는 '너 이거 어겼으니 역적' 운운했으니 의도가 빤히 보이는 짓이었다. 이런 걸 이유로 삼은 최종권고였으니 정당성이 느껴질 턱이 없었다.[75]

또한 이 당시에는 카이사르가 총독 임기 안에 갈리아를 통째로 흡수하는 기적같은 업적을 이뤄냈기 때문에 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전무후무한 대업적을 세운 전쟁 영웅을 역적으로 취급하며 토사구팽했으니 민심이 이탈할 수 밖에 없는데, 그 최종권고의 이유랍시고 내민 규정마저 너무나도 유치한 것이었다. 이렇게 유치한 파벌싸움의 결과를 지켜본 당시 사람들 입장에서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의 편을 들어주기는 힘들었다. 생각해보면 무리수가 많았음에도 굳이 폼페이우스가 감행한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 식견은 상당히 뒤떨어진다.

어쨌든, 폼페이우스의 실수 덕분에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서 손쉽게 승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른 상황이었다. 비록 민심을 손에 넣었으나, 카이사르의 군사적 기반은 여전히 폼페이우스보다 불리했다. 게다가 여전히 폼페이우스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기에 전쟁 수행 능력도 무시할 수 없었다.[76]
또한 로마 원로원 중에서도 기득권을 쥔 귀족들 대부분이 폼페이우스를 따라 망명을 한 상태였다. 이들의 존재는 폼페이우스측이 '명분상 카이사르가 틀렸고 내가 옳다'고 주장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큰 강점이었다.

또한 로마 외부에 있는 속주민들은 폼페이우스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들은 정복을 당한 입장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람들과는 달리 카이사르의 정복 업적에 대해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에 꽤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폼페이우스를 지지하고자 한 것이다. 젊은 시절의 폼페이우스는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지중해 전역을 누볐다. 스페인에서는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였고, 아프리카에서는 민중파를 소탕하였고, 그리스와 아시아 지역에서는 미트리다테스 원정을 수행했다. 또한 과거 이집트에서도 폼페이우스가 보내준 동방원정군의 도움을 받아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라오로 즉위할 수 있었다. 쉽게 말해 카이사르가 직접 제패하고 10년간 총독 노릇을 한 갈리아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 속주는 모두 폼페이우스에게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폼페이우스가 얼마나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는지를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이다.[77]

이런 상황이었으니, 폼페이우스가 한 번은 패하고 도망치긴 했어도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동방에서 군대를 끌고 와 이탈리아를 점령하는 사례 역시 존재한다. 이미 당시에도 술라가 성공시켰던 적 있는 일이고, 훗날 베스파시아누스도 같은 일을 성공시킨다. 폼페이우스는 자기 휘하의 부대가 7년간 갈리아 원정을 치러낸 카이사르의 최정예 병력에 비해서 실전 경험이 적은 것을 알고, 그리스에서 혹독한 훈련을 통해 군사를 단련시키며 겨울을 보낸다. 또한 어떻게든 지휘계통을 확립하기 위해 애썼는데, 로마의 정규군을 대부분 데리고 간데다 속주민들의 지원군까지 모여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규합해야만 했던 것이다. 다만 이럴 때 원로원 의원들은 별로 도움이 안되었다. 정통성 확보라는 면에서는 크나큰 도움을 주었지만 군대 통솔 측면에서는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폼페이우스를 괴롭혔던 것이다.[78]

폼페이우스가 가지고 있던 최대의 장점은 지중해를 누비며 자연스레 육성된 강대한 해군력과, 그를 통해 얻어지는 우월한 보급선이었다.[79] 폼페이우스는 무력을 앞세워 적을 제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기본에 충실한 타입이었기 때문에 보급선의 활용을 중시했다. 이는 해적을 소탕하던 시절부터 그가 꾸준히 강조하던 기본이었다. 이런 폼페이우스의 강점은 전쟁 초기에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카이사르는 전쟁을 빠르게 끝내야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적극적으로 승부수를 던졌는데, 보급선이 확실한 폼페이우스가 버티기를 시전하며 제대로 카운터를 친 것이다. 철저한 정보수집으로 포위망의 약점을 파악한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9군단이 지키는 가장 약한 부분에 5개 군단과 모든 기병을 투입하는 초강수를 띄웠고 이것이 적중하여 포위망을 뚫는데 성공한다. 그 이후 카이사르가 행군중인 폼페이우스의 1개 군단을 기습하였는데, 이때도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단병 대부분을 이끌고 협공하여 카이사르 군을 패주시킨다. 이 두차례의 패전으로 인해 속전속결로 끝내려던 카이사르의 전략은 패착이 되고 말았다.[80] 두 차례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병력 손실은 크지 않았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한다. 실수에서 배운 그는 폼페이우스의 보급선을 차단하기 위해 그리스 동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행군하였고, 폼페이우스에게로 가는 보급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거쳐 구축된 보급선을 흔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무엇보다 해상 병력을 동원하지 못하는 카이사르로서는 폼페이우스의 해로 보급선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의외의 변수로 인해 상황이 카이사르에게 유리해졌다. 폼페이우스가 데리고 있는 원로원 귀족들이 전쟁을 빨리 끝내라고 재촉했던 것이다. 폼페이우스야 최대한 싸움을 피하면서 전쟁을 질질 끄는 것이 유리함을 알고 있었으나, 원로원 의원들은 달랐다. 그들은 타지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군 기지에서 생활하는 것에 계속해서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시 폼페이우스의 사령기지 안엔 옵티마테스 파벌이라 불리는 원로원의 핵심 인물들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이들은 대대손손 로마를 다스려온 기득권의 중핵들이었고, 폼페이우스는 그들에 비하면 신참자에 해당되는 세력이었다.[81] 로마 시내에서의 호화로운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으니 엄격한 군율이 지배하는 부대 내 생활이 그들 성미에 맞을 턱이 없었다. 폼페이우스는 하루가 멀다하고 원로원의 압박에 시달렸다. 명분과 정통성을 원로원에 기대고 있는 그의 입장을 생각해봤을 때 귀족들의 요구를 거스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때 시리아를 지키던 시리아 총독이자 폼페이우스의 장인인 메텔루스 스키피오가 2개 군단을 이끌고 합류하자 폼페이우스도 회전을 준비하기로 마음먹는다.[82] 여러가지 정황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는 당시 카이사르 군단의 군량 상황은 처참했다. 폼페이우스가 계속 버티기를 시전했을 경우, 군량이 바닥나 식물 뿌리라도 캐서 먹어야하는 힘겨운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자유롭게 지휘하였다면 오래 지나지 않아 이길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을 것이고, 카이사르의 군단은 보기 좋게 압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은 이것을 알지 못했고, 혹은 알았다하더라도 디라키움에서의 두번의 승전으로 인해 한번만 더 치면 이길 수 있다고 자만하고 폼페이우스가 회전을 준비하게끔 내몰았다. 병력 면에서도 우세했기 때문에 폼페이우스가 답답해보이기도 했을 것이다. 전략적인 이유를 들어 설득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벌어진 회전이 파르살루스 전투이다. 폼페이우스는 좋게 말하면 기본과 정석에 충실한 지휘관답게, 바꾸어 말하면 고지식하게 정면에서 충돌해 모루가 버티는 동안 기병으로 측면을 찌른다는 고전적인 전술을 들고 나온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기병을 보유한 상황에선 확실하고 강력한 전술이었으나, 파르살루스 평원의 넓이는 7천이나 되는 기병이 진군하기에 적절하지 못했다. 게다가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의 진형을 보고 그의 전술적 의도를 쉽게 읽어냈다. 양측의 운명이 걸린 일대 회전에서 상대가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전술을 사용했음은 폼페이우스의 군사적 재능에 대해 다소 의문을 품게 만든다. 폼페이우스의 주요 군사적 성과는 스페인 정복, 동방 정벌이나 지중해 해적 소탕 등의 임무에서 나왔는데, 이 사례들을 잘 살펴보면 기본적인 부대 운용과 튼실한 전법으로 차근차근 승리를 쌓아나가는 식이었다. 대규모 회전을 벌이고,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기회를 잡아 승리를 일궈내는 능력은 오히려 전임자였던 루쿨루스에게 있었다. 더군다나 파르살루스 회전 시점에서 폼페이우스는 회전을 치른지 20년이 넘어 대규모 군대를 지휘하는 감각도 떨어진 상태였다. 게다가 전쟁이라기보다는 토벌에 가까웠던 해적 소탕을 제외한 히스파니아 반란 진압이나 동방 정벌도 따지고 보면 폼페이우스가 참전하기 전에 이미 메텔루스 피우스나 루쿨루스 같은 전임자들이 이미 어느 정도 유리한 판을 깔아주었다는 지적도 높다.[83] 비록 군사적 재능이란 것이 반드시 야전지휘의 우수함으로만 입증되는 것은 아니고, 커다란 전략을 세워놓고 자신에게 유리한 조건을 하나하나 쌓아가면서 승리로 나아가는 것 역시 뛰어난 군략가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며 폼페이우스가 이 부분에서 매우 뛰어난 모습을 보여왔으나, 전술적면에서는 히스파니아에서 그랬고, 다키아에서도 그랬고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건 사실이다. 특히 스페인에서 세르토리우스와 벌인 대결에서는 양측이 군단을 이끌고 벌어진 회전에서 세르토리우스에게 완패를 당하는 등, 군사적 재능이 우수하기는 하나 천재적 전술가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는 자기 군단의 기병 전력이 열세라는 점을 알고 있었기에 임기응변으로 강을 좌측에 두고 병력을 포진시켰다. 이로 인해 폼페이우스의 기병대가 노릴 수 있는 곳은 카이사르 군단의 우측 뿐이었다. 이 우측의 방어를 위해서 카이사르는 군단의 최정예 보병을 배치해 두었다. 여기에 더해서 카이사르는 젊은 병사들 1천명을 선발하여 기병의 뒤에 타고 싸우는 훈련을 시켰고, 이들이 폼페이우스 군 기병에게 돌을 던지는 식으로 유인했다. 폼페이우스 측 기병들이 접근하자 미리 차출해두었던 보병대가 폼페이우스의 기병부대가 충분한 돌격 속도를 확보하기 전에 전면에 뛰어들어 진로를 가로막은 뒤 창으로 기병의 얼굴을 향해 찔렀다. 경험 부족에 다수의 귀족으로 구성된 폼페이우스의 기병부대는 카이사르 보병의 공격에 급속히 움츠러들며 와해되었다.[84] 폼페이우스의 7천 기병 전력은 한 번 돌격이 저지되자 후방에서 재집결하려는 움직임도 없었고, 총사령관인 폼페이우스도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아 순식간에 전장에서 이탈했고 와해되어 버렸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이사르 군의 4열은 바로 폼페이우스 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중앙의 보병간 힘싸움은 막상막하 상태였으나 로마군의 편제상 정예였던 카이사르 군의 3열이 1, 2열을 대체하여 전투에 뛰어들자 폼페이우스 군은 이들의 전투 기술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전열이 무너지고 패색이 짙어지자 지켜보고 있던 폼페이우스는 서둘러 군을 진영내로 철수시키고 진영을 사수하도록 한다. 뒤이어 벌어진 세시간에 걸친 진영을 둔 공방전에서 마침내 폼페이우스군은 패주하고 폼페이우스는 기병 20명과 함께 달아난다. 다른 장교들이 그래도 남아 패주한 군을 수습한 뒤 그날밤 진영을 다시 꾸리긴 하였으나 총사령관이 내뺐으니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2.6. 최후

다음날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마침내 카이사르에게 전원 항복하였고 카이사르는 자신의 내전기에 폼페이우스 군단의 전사자수가 1만 5천여명, 그리고 2만 4천명이 항복하였다는 기록을 남긴다.

폼페이우스 본인은 소수 기병과 퇴각하면서 그리스 도시에 군무서약을 지키기 위해 집결하라는 통보를 보넀으나 그리스 도시들은 전부 거부하고 카이사르 편에 섰다. 그는 라리사까지 이동하다가 지나가던 곡물 수송선을 타고 몇몇 핵심 인물들과 함께 그리스를 벗어났다. 처음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로 향하려 했으나, 안티오키아 측에서 망명을 거부하여 이집트로 발길을 돌리게 된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 13세 클레오파트라 7세간의 내전이 프톨레마이오스 쪽의 승리로 끝나 클레오파트라가 추방당한 상태였다. 한편 예전에 이들의 아버지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파라오 자리에 앉게 폼페이우스가 도와준 적이 있어 폼페이우스는 망명 의사를 이집트에 전달한다. 그런데 폼페이우스 측의 사절들이 이때 쓸데없는 짓을 했다.

과거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집권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파견한 로마인 장군 아울루스 가비니우스(Aulus Gabinius)는 2,000명의 로마 군단병과 500명의 속주 보조병들을 프톨레마이오스에게 남겨 군사적 도움을 줬다. 시간이 흘러 이들은 이집트 문화에 동화된 상태였고, 가비니아니(Gabiniani)란 이름으로 파라오의 정예병으로 자리잡은 상태였다. 그런데 폼페이우스의 사절들이 이들을 찾아가 옛 상관의 밑으로 다시 돌아오라는 바람을 넣은 것이다.

이 사실이 이집트 조정에 알려지자, 조정의 대신들은 폼페이우스의 망명 목적이 이집트를 자신의 손에 넣고 카이사르와 다시 대결을 벌이려는 게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게 되고 그를 암살할 음모를 꾸몄다. 당시 폼페이우스에겐 자기 세력권으로 아프리카가 남아있었는데, 망명지로 아프리카를 고르지 않고 굳이 이집트를 택했다는 건 아마도 그 의도가 사실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에 도착하자 아킬라스와 옛 부하이자 가비니아니 대장인 루키우스 셉티미우스가 그를 맞았고, 폼페이우스는 그들에게 살해당했다. 패기 넘치던 전성기에 비하면 다소 허망한 최후였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폼페이우스가 칼에 찔렸을 때 토가를 뒤집어 쓰고 비명조차 없이 그 고통을 참아냈다고 한다. 이런 점을 보면 영웅다운 풍모는 있었다고 하겠다. 그와 함께 왔던 전 집정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크루스는 감옥에 갇혔다가 나중에 살해당했다.

이후 폼페이우스의 목은 승자를 환영한다는 메시지를 위해서 이집트 왕가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 그러나 카이사르는 기뻐하긴 커녕 오히려 비탄에 잠겨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85] 그리고 이를 빌미삼아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끄는 이집트 세력을 박살내버린다.[86] 이때 손을 잡았던 상대가 바로 클레오파트라 7세. 처음에는 단순히 '이집트의 지배자가 될 수 있게 해줄테니 너도 나한테 이득될만한 것을 바쳐라' 하는 거래관계였으나 나중가서는 푹 빠져버렸다고 한다.[87]

3. 평가

카이사르만 없었더라면 폼페이우스는 로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장이자 권력에 연연하지 않았던 위대한 인물로 남았을 것이다. 경쟁자였던 카이사르와 비교해보자면 폼페이우스는 장군으로서의 활약에 비해 정치적 감각이 떨어지고 결국 대결에 패해 몰락했다.

내전 이전까지 폼페이우스가 장군으로서 남긴 활약상은 카이사르보다 뛰어나면 뛰어나지 뒤지지는 않았다. 로마 역사 전체를 놓고 비교해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수준이다. 술라의 휘하에서 카르보와 아헤노바르부스를 무찌르고, 세르토리우스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압도적인 작전으로 보기 좋게 킬리키아 해적들을 제압했다.

3.1. 정치적 평가

수십 년 간 로마를 집요하게 괴롭혀왔던 폰토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숨통을 끊었으며, 파르티아와의 우호관계를 수립해 로마의 동방 정책의 기틀을 놓았다. 전후처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소아시아[88]와 시리아[89], 팔레스타인 일대를 완전한 로마의 영토로 만들었다. 이 때 차지한 영토는 동로마 때까지 갔다. 레반트 지역은 폼페이우스 시절부터 거의 딱 700년 뒤인 630년대까지, 소아시아 중·동부는 1100년도 더 뒤인 1070년대까지 유지했다.[90]

정책 면에서의 감각도 상당했다. 폼페이우스는 해적 소탕 과정에서 사로잡은 해적들에게 땅을 주어 정착시켰는데, 이후 이 도시들은 소아시아 지역의 경제 회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파르티아와의 우호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로마의 오리엔트 정책의 기본 방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첫 번째 인물이기도 하다. 폼페이우스가 세운 기본 방침은 사산 조 페르시아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바뀌지 않고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이러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감각이 뛰어나지 못하였고 군사적 재능이 자신보다 못한 크라수스보다도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였다.[91] 그 결과 원로원에게 계속 끌려다니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동방원정을 마친 뒤 원로원에게 어떠한 확약을 받은 바 없이 군단을 해산함으로써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의 속주편성안, 고참병 퇴직금 문제를 승인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또한 이를 로마시민들이 불만족스럽게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동원하여 평민집회를 통제한 뒤 원로원과 대결하는 수완을 발휘하지도 못하였다. 3년 뒤에서야 비로소 그는 이런 수순으로 그의 요구를 관철시키는데 정작 실질적인 지휘는 삼두정 하의 카이사르가 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수완은 그다지 뛰어나지 못하였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그리고 삼두정파를 지휘하였던 것은 로마 인근에 머물던 폼페이우스가 아니라 갈리아 전쟁을 위해 자리를 비운 카이사르였다. 당시 호민관에 선출된 뒤 폭력단을 조직해 평민집회를 장악한 클로디우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전혀 협조적이지 않아서 카이사르의 말만 들었고 또한 원로원이 클로디우스를 막기 위해 밀로를 매수하였을 때도 그는 손놓고 있었다. 결국 로마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었으나 폼페이우스의 존재가 이것을 해소하는데는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게다가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에 남았지만 원로원파가 정국의 주도권을 조금씩 되찾아오는 것을 방관하였다. 결국 상황이 심각해지자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가 나섰고 그는 루카 회담을 열어 다시 정국을 삼두정이 되찾아오게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폼페이우스는 그가 만족한 결과를 얻었다. 그런데 애초부터 폼페이우스가 이렇게 카이사르에게 끌려다닐 위상과 입지가 아예 아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가 삼두정의 실질적인 리더같이 행동하게 된 것은 역설적인 일이었다.

3.2. 군사적 평가

훗날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가 사이가 벌어진 것도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의 정치적 입지를 조금씩 갉아먹으면서 그를 대신하였고 갈리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이 확실시되자 군사적 평판에서마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를 능가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폼페이우스는 일인자로서의 자신을 입지를 누군가가 대체하는 것을 참을 수 없이 불편하게 여겼으며 때문에 그는 카이사르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카이사르와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대결을 할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폼페이우스는 군사적으로 대결하길 원하였다.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참고하면 폼페이우스는 그 누구보다도 카이사르와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것을 원하였는데 이는 골수 원로원파였던 카토나 역시 골수 원로원파였던 전직 집정관 마르켈루스조차 반대하였던 극단적인 조치였다. 아무리 폼페이우스가 그의 군사력과 그의 군사적 능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하더라도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보인 군사적 능력 또한 매우 비범하였으며, 결정적으로 카이사르에겐 10년에 걸친 갈리아 정복을 해낸 8개 군단이 고스란히 휘하에 있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폼페이우스의 이러한 판단은 현명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물론 폼페이우스가 정치인보다는 무골이었다는 점과, 원로원파에는 카이사르만한 정치인이 없어 정치 싸움으로 이기기 쉽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그냥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으로 승부를 내려는 생각이었다'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 하지만 그렇게 판단해 승리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겠지만, 결국 패배했으니 결과적으로 잘못된 선택이었다.

또한 폼페이우스가 원로원 의원들을 거의 협박해 얻어낸 원로원 최종권고의 시기 역시 상당히 적절해 보이지 않는데, 카이사르의 총독 임기는 3월 1일에 끝나고 최종권고는 1월 초에 발발하였으므로 원로원에게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던 상황이었다. 이때 논의가 벌어졌을 땐 로마는 비무장 상태였고 카이사르에게 통보를 할 시간적 여유도 충분히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급하게 카이사르에게 선전포고나 다름없는 원로원 최종권고라는 최후통첩을 할 이유가 없었다. 위의 토의에서 원로원 의원 중 하나가 우선 원로원을 지킬 군단병을 모집한 뒤 다시 토의에 붙이자는 제안을 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배경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카이사르가 루비콘에 1개 군단과 함께 주둔한 상황이면 그가 즉각적으로 남하할 것이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이 가능한데도 폼페이우스는 바로 최종권고를 선포하게 함으로써 결국 싸움없이 이탈리아를 허무하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뒤 곧이어 벌어진 카이사르와의 대결에서 폼페이우스는 스페인을 내주고도 그리스에서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해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격파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승전을 제대로 이용하지도 않은 채 그는 곧바로 파르살루스 회전을 벌여 격파당하고 그 결과 몰락하게 된다. 카이사르의 내전기를 보면 폼페이우스는 패주하면서 내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한 게 틀림없다라고 한탄을 여러 번이나 하였다는데 그 말대로 당시 군량보급이 힘든데다 디라키움의 패배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우호적인 그리스 도시들도 모두 등돌려 고립된 카이사르군에게 회전을 건 것은 중대한 실책이었다. 당시 두 장군은 당대의 명성이 매우 높은 명장들이었고 또한 내전의 경우 전투의 승패에 따라 도시들이 입장을 결정하게 되었으므로 폼페이우스의 디라키움에서의 승리는 카이사르군을 더더욱 고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즉 디라키움 공방전으로 인해 폼페이우스가 애초에 생각했던 지구전에 더 적합하게 판이 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갑작스럽게 회전을 건 것이었다.

폼페이우스가 그의 병력의 우세를 믿었다고는 하나 카이사르의 군대는 11년에 걸친 전투를 통해 갈리아, 스페인 정복의 업적을 이룬 최정예 병력이었으므로 사기가 높았고 전투기술이 매우 뛰어난 병력이었다. 카이사르군의 전투력의 우수함은 카이사르가 쓴 내전기를 보면 자세히 나오는데 히스파니아 전쟁에서 카이사르 휘하의 9군단은 폼페이우스의 군단병들을 상대로 골짜기로 내몰려 포위당한 상황에서 5시간이나 호각으로 버티면서 최후엔 언덕을 기어올라 공격해 적병을 격퇴한 뒤 유유히 빠져나갔다. 또한 디라키움에서 소수의 병력으로 다수의 병력을 포위한 상황에서도 폼페이우스군을 수차례에 걸쳐 격퇴하고, 어느 진영에서는 250명의 병력이 2만 명의 폼페이우스 군대의 맹공을 네 시간이나 버팀으로써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파라오가 카이사르가 머무는 자택을 습격하였을 때 그의 휘하에 있었던 단 3천의 병력이 파라오의 2만여 병력의 공격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이때 파라오의 병력 중 전직 로마 군단병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음을 감안한다면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다.

이런 카이사르의 병력과는 달리 파르살루스에서 폼페이우스가 이끈 병력은 실전이 처음인 병사들이 대다수였다.[92] 이들의 경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폼페이우스가 겨울캠프를 차린 뒤 혹독히 훈련시켰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훈련으로 갈리아에서 8년간 생사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데다 그 이후 내전에 꾸준히 참여한 막강한 정예인 카이사르군의 전투기술을 따라잡는 것은 무리였다.[93][94]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폼페이우스의 군단병 역시 포위에 강한 로마군의 편제를 따르고 있었으므로 카이사르군이 측면을 친 것만으로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수가 없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에 따르면 그가 보유한 3열의 군대가 공격하자마자 폼페이우스군은 급격히 무너졌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결국 폼페이우스의 군대는 측면을 공격당해 당황한 가운데서도 한동안 버텼으나 3열의 고참병[95]이 1, 2열의 병사를 교체해 들어오자 이 고참병들의 전투력에 폼페이우스군이 밀려 그대로 끝장난 것임이 분명하였다. 이를 본다면 위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병력의 전투력의 차이가 승부에 기여한 면이 의외로 많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을 파악하는 것은 총사령관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폼페이우스가 이 점을 충분히 고려치 않은 채 병사들을 회전으로 내몬 것은 총사령관으로서 경솔했다고 말할 수 있다.[96]

이렇게 회전을 건 판단착오를 둘째 치더라도 이때 파르살루스 회전에서 보여준 폼페이우스의 전시작전 역시 의구심을 자아내는데, 카이사르군에게 지나치게 단순하고 정석전인 전술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폼페이우스가 기병전력으로 측면을 치면 쉽게 이긴다 했지만 카이사르의 군단병은 의외로 기병의 측면 공격에 대응했던 경험이 풍부하였다. 갈리아 전쟁 초기에서도 헬베티족이 측면을 급작스럽게 치고 들어왔고,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기병이 대다수인 갈리아 병력을 이끌고 와 보병이 대부분인 카이사르군의 측면을 치고 들어왔다. 이러한 상황을 맞을 때마다 카이사르군은 재빨리 전열을 분리 기동해 기병의 협공을 막고, 격파하고,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렇게 측면을 기병으로 습격당한 상황에 대한 경험이 있었던 카이사르의 고참병들이 폼페이우스에게만 기병이 측면을 치고 들어왔다고 우왕좌왕하다가 급격히 무너질 거라고 생각할 수 없으며 그토록 기병 습격에 고생이란 고생을 다했던 카이사르가 7천이나 되는 폼페이우스의 기병이 자신의 측면을 치기 위해 반드시 기동할 것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그들의 군단병 중 2천의 최고참 병사들을 차출하여 7천의 기병대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대응했고[97] 그렇게 폼페이우스의 7천 기병대는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기병의 측면돌격은 정석적이고 그렇기에 약점도 없고 사실 7천이라는 대규모 병력이면 누구나 쉽게 선택할 작전이었기 때문에 작전을 선택한 것은 이해하더라도 그 다음이 문제다. 폼페이우스는 기병을 통한 우회작전을 노렸지만 기병들은 돌격이 실패하자 너무 허무하게 무력화되었다. 한 차례 돌격이 막히자 우회기동도 없이 후속 부대부터 전부 전장을 이탈했다. 7천의 기병대 중에서 다시 본진에 합류해서 재정비하는 움직임도 없었고 폼페이우스는 그 무너지는 기병을 재조직하려는 움직임도 없었다. 심지어 그 7천 기병의 지휘관이 카이사르의 부장으로 8년간 복무한 라비에누스였으니 더더욱 어처구니가 없을 수 없다.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전장 상황에 맞추어서 대응해야 하는 야전지휘관으로써는 실격인 셈.[98] 전략가로서 그의 능력을 생각하면 기병이 통제되지 않고 전투의지도 없이 붕괴된 것은 이해가 안 가는 대목이다. 폼페이우스가 무능했다보기보다는, 카이사르와 달리 파르살루스 회전까지 약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 그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스포츠 감독도 오래 현장을 떠나있으면 감이 떨어지게 마련인데 군 지휘관도 마찬가지다.

3.3. 종합

이렇듯 폼페이우스는 그가 가진 정치력의 결여, 그리고 훗날 카이사르와의 대결을 군사적으로 결판짓고자 하였던 호승심, 그리고 여러 차례 보여준 여러 판단 착오 등으로 인해 카이사르에게 패배하여 몰락하게 되었다. 폼페이우스는 분명 카이사르를 상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군이었고[99] 디라키움 공방전에서 카이사르군을 보기 좋게 격퇴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결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가 내전 상황에서 보여준 약간의 판단 착오들은 카이사르라는 걸출한 장군을 상대로는 중대한 손실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었으며 그 결과 폼페이우스는 몰락하고 공화정 말기의 역사적 승자는 카이사르가 되었다.

정리하자면, 군사적인 능력에서는 카이사르에 맞먹을 정도로 뛰어났으나 정치적인 능력, 특히 인간 심리를 헤아리는 부분에서는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이 점이 폼페이우스의 몰락과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제패라는 위업을 달성하고 그의 업적이 이탈리아 전체를 휩쓰는 시점에서 대놓고 그를 적대하는 건 그다지 타당하지 않았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고 동맹시 전쟁의 여파까지 겹치면서 내전이 시작되자 아무 저항도 못해보고 이탈리아를 그대로 카이사르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폼페이우스의 최후 역시 이런 인간 심리를 헤아리는 부분이 떨어져서 발생한 결과인데, 폼페이우스가 살아있는 이상 어디로 가든 내전이 계속될거라는 건 분명했다. 그런데 자기 세력권으로 있는 아프리카를 내버려두고 굳이 망명지로 이집트를 골랐다는 건 이집트를 자기 손에 넣고 내전을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었다.[100] 그런데 당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오늘내일 하는 상태일 정도로 안 좋았지만 엄연히 수백년간 이어져 내려온 왕조였으므로 폼페이우스의 의도대로 움직일 리가 없었다. 파트리아-클리엔테스 관계를 생각했을 수도 있겠으나, 이집트라는 하나의 왕조가 몰락해버린 개인을 상대로 의리관계에 매일 거라고 보는 것도 무리수에 가까웠고 결국 목숨을 잃게 된다.

4. 대중매체에서

여담으로 카이사르 역시 탈모가 오기 전의 젊은 시절에는 상당한 미남으로 유명해서 비티니아 왕과의 섹스 의혹이 평생을 괴롭혔을 정도였다.

[1] 이탈리아 마르케주 [2] 이집트 포트사이드 [A] 세 번째 부인 간의 아들 [A] 세 번째 부인 간의 아들 [B] 세 번째 부인 간의 딸 [6] 위대한 폼페이우스라는 뜻이다. 마그누스를 대(大)라고 번역하는 것은 이것이 (大) 카토, (小) 카토와 같은 사례라는 오해를 낳을 수 있으므로 적절한 번역이 아닐 수 있다. 참고로 술라와 폼페이우스가 살았던 시대에 사용되었던 상고 라틴어로는 '마그누스'보다 '망누스'로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7] 물론 이 일의 전부가 마리우스의 잘못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게 원래 로마의 군단병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들 중에서 징집하게 되어 있는데 포에니 전쟁 이후로 이런 중산층 로마 시민들이 몰락하면서 징집 자원이 씨가 말랐기 때문이었다. 당장 군 병력은 필요한데 거기에 해당되는 인적 자원이 없다보니 지휘관이 자비를 들여서라도 빈민층 중에서 병력을 구성하고 이들은 자기 의식주를 지휘관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 결국은 사병화가 될 수밖에 없는 것. [8] 또한 일부에서는 꼭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때문이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흘러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위에서 말한 그대로. [9] 친딸은 아니고 양딸인 아이밀리아를 혼인시켰다. 아이밀리아의 친부는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로 마리우스 시대의 거물이었다. [10] 폼페이우스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때문에 이혼하고 술라의 딸과 결혼한다. 그 뒤 술라가 죽고 술라의 끔찍한 정치적 숙청에 대해 단죄하는 목소리가 높아지자, 술라의 딸과 이혼하고 다른 유력 집안과 결혼한다. 폼페이우스는 훗날 카이사르의 딸과도 결혼하는데, 즉 폼페이우스는 정치적 입장을 바꿀 때마다 결혼을 하였으며 역사학자들은 폼페이우스의 결혼을 확실하게 입증된 것만 해도 최소 6번, 최대 8번까지라고 추측하고 있다. [11] adulescentulus carnifex(teenage butcher) [12] 공화정 말기에 만연한 사회현상이었던 군단병의 사병화이다. 이 폐해는 아우구스투스 대에 가서나 해결된다. [13] 술라는 "이렇게 나이든 내가 꼬마들이나 상대해야하다니"하면서 한탄했지만 이 단락이 무척 아이러니한데, 마리우스와 술라 자신도 한때는 같은 관계였기 때문이다. [14] 나라를 구원한 영웅인 스키피오조차도 그런 영광을 요구하진 않았다. 우선 개선식에는 원로원 의원이라는 자격 요건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나이 제한이 있다. 폼페이우스는 연령상 애송이에 불과했고 집정관은커녕 법무관조차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폼페이우스가 그런 원칙 위반을 저지르면 술라 정권은 물론이고 폼페이우스 자신의 꼬락서니까지 우스워 보이는 짓이었다. [15]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탈법적인 판에 폼페이우스는 백마 4마리가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코끼리 4마리가 자기 마차를 끌게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기까지 했으나, 결국 로마 성문을 코끼리가 지나갈 수 없어서 포기하고 말았다. [16] 개선식과 집정관 후보자 등록 사이에서 하나만 고를 것을 강요당하자 원칙을 존중하기 위해 원로원이 원하는 대로 개선식을 포기하고 집정관 후보 등록을 한 카이사르와 비교되는 에피소드. [17] 다만 이 에피소드는 허례허식을 좋아하는 폼페이우스와 실리를 취하는 카이사르를 대비한 것이지 원칙 문제는 아니다. 안 그래도 카이사르는 둘 중 어느 쪽이든 고를 수 있는 상황에서 집정관 출마를 고른 것이기 때문. [18] 2차 삼두정치 때 한 축을 담당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아버지로, 겉으로는 옵티마테스 파인척 행세를 하던 레피두스는 민중파 호민관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 사투르니누스의 딸과 결혼하는 등 민중파 성향을 숨기고 있다가 술라가 죽자 반기를 든 것. 이 때 레피두스의 밑에서 종군한 브루투스는 마르쿠스 브루투스의 아버지였다. [19] 군단병에게 땅을 주기 위해 애꿎은 시민들의 땅을 몰수한 것으로 이는 술라의 법을 존중하지 않는 성격을 보여주는 한 예였다. 그를 벤치마킹한 카이사르도 이런 횡포를 부린 적은 없었다. 사실 카이사르는 비교적 합법적인 방법을 우선시했고 불법적인 방법은 정말로 궁지에 몰렸을 때나 사용했던 편이었다. 당장 술라,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에 비교하면 뭐... 군단병의 정착지는 주로 새로 정복한 영토에 도시를 건설하는 방식을 쓰는데 술라는 자신의 군단병을 자신의 근처에 두기 위해 이탈리아의 로마 시민에게서 땅을 몰수한 것이었다. [20] 에트루리아는 로마를 끼고 있는 테베레 강 북쪽의 지역으로, 로마와 아주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맺은 지역이었다. 이 시대엔 이미 로마와 같은 나라라는 취급을 받은 도시들이었는데 술라는 이들에게서 땅을 몰수해 군단병의 정착지를 건설한 것이었다. [21] 다만 옥타비아누스는 비슷한 방법을 쓴 적이 있었다. 사실 이 때는 옥타비아누스가 가장 위험할 때였는데 옥타비아누스는 군대와 시민 중 한쪽을 선택해야 했고 군대를 선택하여 술라와 마찬가지로 에트루리아를 털었다. [22] 이 결과 출세길이 막힌 아들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를 눈여겨보다가 클리엔테스로 들어가게 된다. [23] 이는 완벽히 불법이었다. 심지어 당해 집정관이었던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카피톨리누스는 극렬 술라파였다. 그리고 술라가 제정한 법들 중 그나마 남은 것들은 대부분 나중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을 역임할 때 다 없애버렸다. 술라의 '개혁'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기가 없는 폭거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24] 그는 마리우스의 파트로네스이자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했던 메텔루스의 아들이었다. 마리우스가 메텔루스에게 집정관 선거를 위해 군대에서 제대해 줄 것을 허락하자 메텔루스는 20세였던 자신의 아들이 선거에 나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조롱했는데 이 아들이 바로 여기 나오는 메텔루스 피우스이다. [25] 술라가 정한 법에 따라서 제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나이에 맞게 밟은 카이사르와 대조되는 부분. [26] 레피두스는 원래 술라파였음에도 배신당했다. [27] 당장 얼마 전에 민회가 마리우스에게 군대를 맡겼다고 원로원파였던 술라가 득달같이 달려와서 조국인 로마를 침공했던 적이 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을 역임한 적이 있으니 원래는 전직 집정관으로서 군대를 지휘하는 게 반드시 불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내로남불. [28] 이건 세르토리우스가 게릴라전으로 주로 임한 것 때문이기도 하지만 몇 번의 회전에서 모두 승리했다는 것부터 그의 군재가 상당했음을 시사한다. [29] 로마는 당시 지중해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포에니 전쟁 때보다 더 부유하였다. 포에니 전쟁 때 쌍벽이었던 카르타고조차 로마의 물량에 밀린 것을 감안한다면 한줌밖에 없는 자원으로 싸워야했던 세르토리우스의 패배는 필연적이었다. [30] 기원전 77년부터 73년까지. [31] 처음엔 30여 남짓의 산적떼가 7만으로 불어난 것이었다. [32] 로마의 법에 의하면 집정관의 바로 아래 직위가 법무관이었기에 두 집정관이 격파되자 수석 법무관인 크라수스가 나선 것. [33] 당시 로마는 지중해 최강국이었다. 그 로마에서 최고 부자였던 크라수스의 재산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당시 로마 국가예산의 절반 이상이나 전체에 육박했다는 설부터, 심지어 로마의 예산보다 많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2008년 포브스 지에서 현재 가치로 환산한 크라수스의 개인 재산은 약 1,700억 달러에 달한다고 한다. [34] 그리고 엄연히 따지면 군공을 훔친게 맞다. 스파르타쿠스 반란 진압은 실제로 크라수스가 한 것이기 때문이다. [35] 이는 당시 로마 정계에 충격을 가져다 준다.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이 되기 위해 필요한 법무관 등의 명예로운 경력을 하나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술라가 제정한 법을 어기는 처사였다. 게다가 나이도 이 때 고작 35세라 나이제한에도 걸렸다. [36] 이래놓고 정작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에서 승리했을 당시에는 절대로 군대를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버텼다. 얼마나 원로원이 원칙이 없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 [37] 폼페이우스는 보병이나 기병 복무경력은 커녕 초급 장교가 맡는 참모 부관도 전혀 해본적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회계감사관이나 안찰관 호민관같은 기초 공직도 못해봤다. 따라서 입후보 기본자격인 원로원 의석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려서부터 타고난 군사적 재능과 막대한 재산으로 방면군 사령관만 맡아서 백전백승했는데 결국 원로원의 전현직 장성들을 모조리 합쳐도 폼페이우스 하나만 못할 정도로 원로원의 무능이 드러난 것이다. [38] 지루한 내전을 벌인데다가 정국 불안정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39] 사실 원로원에서 민중파를 탄압할 때 가장 잘 써먹었던 레퍼토리가 바로 '왕이 되려는 자'였는데, 정작 이때 원로원이 폼페이우스에게 준 권한만 놓고 보면 정말로 왕이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역시나 원로원의 무원칙을 상징하는 조치다. [40] 특히 스페인 반란군의 지휘자 세르토리우스는 탁월한 게릴라전 지도자였다. 폼페이우스도 혼자 덤볐을 때는 세르토리우스에게 탈탈 털리기도 했다가 메텔루스 피우스의 지원을 받은 뒤에야 세르토리우스를 물리쳤다. 하지만 세르토리우스는 여전히 로마군을 괴롭혔으며 세르토리우스가 암살당한 뒤에야 스페인의 안정이 가능해졌다. [41] 'While being a superb commander, Pompey also earned a reputation for stealing other generals' victories.' [42] 원로원의 환심을 사고자 폼페이우스는 소 카토에게 정혼을 제안했지만 소 카토가 거절하며 폼페이우스의 체면을 제대로 구겼다. [43] 당시 카이사르보다 빠르게 출세한 인물은 사촌인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키케로, 불법덩어리 폼페이우스 외에는 없다. [44] 이들 중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일찍 죽었고 키케로는 군 경력이 없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부족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상술한 대로 불법적인 경로를 통해 승진한 경우가 매우 많았다. 그에 비해 카이사르는 모든 경력이 합법적이면서 군 경력도 충분했다. [45] 참고로 이 축제 비용은 전부 크라수스를 비롯한 기사계급 사람들에게 빌린 돈으로 충당했다.(...) [46] 반면 폼페이우스는 그 출세에 불법, 탈법이 꽤 많았다. 나이도 문제지만 단독 집정관 문제도 있었다. [47] 참고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크라수스는 술라 밑에서 군대에 종군하고 법에 따라 제대로 명예로운 경력을 쌓았다는 것에 대해서 자부심이 대단했으며,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사적 업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아예 삼두정치 초반에는 비교적 '애송이'였던 카이사르를 메신저로 시켰을뿐 정작 둘이 단독으로 만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48] 사실상 징세 기업에 가까웠다. [49] 참고로 이런 징세업자들은 당연히 이미지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당장 천 년 이상 지난 후 천재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가 프랑스 혁명 정부에 처형당했는데 그 이유는 라부아지에가 악명높은 징세청부업자이기도 했기 때문으로 이렇듯 징세청부업자는 민중의 적이었고 성경에서는 천국에 가기 어려운 직업으로 창녀와 투탑이라고 여겨졌을 정도였다. [50] 완강하게 거부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소(小) 카토. [51] 물론 당시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고 뇌물로 유권자 매수하는 것은 불법도 아니고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52] 집정관 선거는 대략 10명 정도가 경쟁한다. 3등이면 매우 유력한 후보라는 의미인 것이다. [53] 거기다 키케로는 민중파였던 카틸리나를 눈엣가시로 여겨서 일부러 선거일을 바꾸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면 로마 외 라틴 도시에서 선거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헛수고를 하게 되므로 이들의 표는 전부 나가리가 되는데 이런 로마 외 라틴 도시들은 대부분 민중파를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키케로가 카틸리나에게 거하게 엿을 먹인 셈이다. [54] 카이사르는 당시 빠른 속도로 출세한 것으로 여겨진 키케로보다 각각 2년씩 빨리 공직에 선출된다. 키케로 항목 참고. [55] 물론 이 때 카틸리나를 변호하다가 좆망 직전까지 몰릴 뻔한 카이사르를 끝까지 후원한 크라수스도 어느정도 그에게 우호적이었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적 경험을 아들에게 쌓게할 목적으로 보낸 것이긴 하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아들을 보내 종군케 했고 카이사르도 후원자의 아들이 가진 재능을 총애하여 '젊은 크라수스', '청년 크라수스'로 부르며 총애했다고 한다. [56] 왜 폼페이우스는 자신이 집정관일 때 이 농지법을 통과시키지 못했나 의아해할 수 있으나, 일단 같은해 집정관이었던 크라수스와 사이가 나빴고, 둘째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 등에 비해서 정치감각이 떨어졌던 데다가, 셋째 카이사르나 키케로같은 달변가가 아니었다. [57] 당장 농지법을 가결할 때 카이사르의 활약(?)을 보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카이사르가 없었다면 통과시키기가 매우 어려웠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58] 카이사르가 소문을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어차피 그게 아니더라도 농지법과 관련해서 폼페이우스 휘하 퇴역병들한테 단단히 찍혔으니 대낮에 돌아다니는 것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이후 비블루스는 집에 박혀서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59] 여기서 비불루스가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부당하게 당한 선량한 피해자라고 오해할 수 있으나, 전혀 그렇지 않다. 당시는 공화정 말기라 이런저런 개혁이 필요했는데, 특히 이 농지법같은 경우 너무 오래 질질 끌어서 폼페이우스 무산자 계급 퇴역병들이 로마 시내의 부랑아들 내지 정치깡패로 전락한 상황에서 원로원파의 지지를 업은 비불루스는 단순히 카이사르가 집정관일 때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들겠다며 올해에는 아무런 개혁도 없을 것이라고 천명한 상태였고 카이사르가 직접 이 농지법에 대해서 토론해보자는 말조차 씹어버렸다. 즉, 이 작자가 집정관 임기 내내 한 일이라고는 일하겠다는 다른 집정관 발목을 잡은 것과 (앞서도 말했듯이 이 작자는 난 일은 안 하고 카이사르의 발목만 잡겠다고 선언까지 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러다 민중으로부터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서 집 안에 숨어 지낸 것 밖에 없었다. [60] Lex Vatinia, Lex Vatinia de provincia Caesaris 혹은 Lex Vatinia de imperio Caesaris [61] 칼푸르니아의 아버지 [62] 카이사르는 폼페이우스를 당장 내칠 만큼 잘나간 건 아니었지만, 7년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사실상 갈리아를 평정한 카이사르가 그야말로 혁명적인 전과를 올리면서 모두를 놀라게 한 건 사실이다. 분파는 조금 다르지만 갈리아의 켈트족들은 여러 번 로마의 국운을 위협한, 아주 강대한 세력이었다. 물론 카이사르 때 되면 갈리아의 양대 부족인 하이두이와 아르베르니가 싸우다가 둘 다 큰 피해를 입고 그 전까지 듣보잡 취급하던 수에비족에게 공물을 바치는 등, 둘 다 궤멸 직전까지 간 상황이긴 했지만 여전히 무시못할 세력이었다. [63] 중요한 것은 애시당초 삼두정치 초반에는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사이를 조정하는 역할이었던 카이사르가 이제는 크라수스, 폼페이우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의 세력가가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갈리아 원정을 성공시켜서 군공 면에서는 폼페이우스에게도 꿇리지 않았고 또한 크라수스의 돈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64] 카이사르는 원래 크라수스의 후원을 받는 파트로누스(후원자) - 클리엔테스(피후원자) 관계였다. [65] 크라수스는 재산은 많았지만 로마 정치가에게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이 고작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진압이었을 정도로 상당히 초라했기 때문이었다. 그에 비해 다른 두 삼두인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로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다. [66] 원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딸과 결혼하였고 금슬도 좋았지만 병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재혼하게 된 것이다. [67] 물론 로마인들 사이에서 이런 일은 빈번했고 이혼도 흔한 편이었다. 당장 정적인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와 마찬가지로 이혼, 재혼을 반복한 적이 있었고 아우구스투스의 황후인 리비아 드루실라도 재혼이었다. [68] 원래 집정관은 한 해에 두 명을 뽑아야 하므로 이는 사실 심각한 불법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독재관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필요할 때는 한 명이서 집정관에 맞먹는 권한을 휘두를 수 있었기 때문. [69] 사실 술라,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같은 이들이 다 무시해서 그렇지, 원칙대로라면 로마 국내에(루비콘 강 이남) 총독이나 집정관이 무장 해제하지 않은 군대를 끌고 오는 건 명백한 불법이고 반역죄 급의 대죄다. 허용되는 경우는 개선식 뿐. 그나마도 개선식 전까지는 로마(시) 밖에서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70] 만일 이것이 받아들여졌으면 독재관 카이사르는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며 원로원 주도의 로마는 계속 유지되었을 것이다. [71] 사실 폼페이우스가 너무 서두르긴 했지만 그와 별개로 이미 갈리아의 영웅을 그렇게 엿먹여놓은 주제에 이제와서 내전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어이없는 노릇이긴 했다. [72] 흔히 마리우스 이후 모병제로 바뀐 것으로 알고 있으나 공화정 시대에도 징병은 유지되었다. 단, 마리우스 개혁 이전과 큰 차이가 있었는데 마리우스 개혁 이전엔 순수히 중산층인 병사들을 징병하였으나 개혁 이후엔 무산자 계급을 중심으로 징병한 것이었다. [73] 뻔히 눈에 보이는 수작으로, 민중파로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왔고 갈리아 정복이라는 큰 공을 세운 카이사르를 대상으로 협잡질을 했으니 화가 나지 않는게 더 이상했을 것이다. [74] 폼페이우스의 사병집단이 로마에 상주한다면 당장 원로원에서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멀리멀리 보내놔야만 했다. [75] 거기다 사실 동맹시 문제는 거의 포에니 전쟁때부터 내려오던 고질적인 것으로, 원로원파는 사실상 로마 영토나 다름없던 라틴 동맹시에 대해 로마 시민권을 내주는 것에 매우 인색했지만 민중파는 이들도 로마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줘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76] 아직까지는 여전히 로마 전통의 파트로누스-클리옌테스 관계가 건재했고 폼페이우스는 그 거대한 명성에 걸맞게 해외의 식민지나 로마 영향 하의 다수 국가에 클리엔테스를 두고 있었다. [77] 실제로 폼페이우스 잔당들은 카이사르가 죽어서도 로마를 괴롭혔다. 폼페이우스 사후 그의 아들인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도 시칠리아를 점거하고 로마로 들어가는 식량 공급을 막을 정도로 세력을 떨쳐서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를 상대하느라 쩔쩔맸다. 결혼 동맹도 시도했고 안토니우스의 함대를 사기쳐서 빼오는 등 손을 많이 썼다. [78] 이는 원로원 의원들 한 명 한 명이 최소한 군사 장교 지위를 지낸 장군들이었기 때문이다. 군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키케로도 군복무를 하기는 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이 실전을 치른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물론 군사적 경험이 없지는 않겠지만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처럼 대규모 원정을 치른 경험을 거의 없는 인물이 대부분일 것이다. 당장 소 카토나 키케로같은 인물들은 군대 경험은 있었을 지 몰라도 실전에서 군대를 지휘한 경험은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험한 군생활에 질려서 얼른 압도적인 전력으로 카이사르를 물리치고 로마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79] 카이사르에게는 해군이 없었기 때문에 아드리아 해를 건너 그리스에 상륙할 때 죽을 고생을 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아주 여유로웠다. [80] 사실 이 전투는 조급했던 카이사르의 무리수긴 했다. 거의 2배 가량 되는 폼페이우스의 병력을 억지로 포위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급선을 충실하게 활용한 것이 폼페이우스의 승리요인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81] 폼페이우스의 아버지가 집정관이었으므로 아주 새파란 신참내기는 아니었지만 권력의 중심에 서 있던 역사가 달랐다. [82] 다만 이때 스키피오와 대치하던 칼비누스의 2개 군단은 갈리아 전쟁을 치른 베테랑들이라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고 있었고, 스키피오의 군단이 합류하자 바로 카이사르 진영에 합류했기에 딱히 우위를 얻진 못했다. [83] 특히나 동방 정벌은 이미 그 당시에도 "루쿨루스가 다 해놓은 거 폼페이우스는 숟가락만 얹었을 뿐"이란 비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 [84] 플루타르크의 영웅전에 실린 이야기로 이 서술은 왜곡이라는 의견도 있으니 참조할 것. [85] 옛 사위이자 한때 삼두정치의 동맹이었던 그의 죽음을 슬퍼했던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퍼포먼스로서의 '악어의 눈물'이었는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폼페이우스의 사후 수습과정을 보면 싸울때는 살벌하게 싸우더라도 승패가 결정나고 승복한 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었던 것을 보면 정치적 싸움과 사적인 관계를 별개로 보던 성향, 그리고 내전 후에 항복한 자들에게는 대개 관용과 포용을 베풀던 카이사르의 경향을 생각해 보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정말 슬퍼하는 마음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많이 있다. [86] 당연하지만 이 시기 이집트는 명백히 로마의 보호를 받고있었다. 감히 보호국이 감히 지배국 시민을 죽였으며 더 나아가 개인적으로 폼페이우스의 호의를 받았던 이집트가 폼페이우스를 배반한 것이기 카이사르로서는 개인의 측면이 아니라 로마의 자존심적 측면으로써 이집트를 당연히 응징해야 했다. [87] 실제로 아들 카이사리온까지 낳았을 정도니 나름 푹 빠졌다고 할 만하다. 그렇긴 해도 선은 확실하게 그어놓아서 자기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리온에 대해서 전혀 언급해두지 않았다. [88] 오늘날의 튀르키예 [89] 오늘날의 시리아 레바논 [90] 소아시아 서부는 기원전 133년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루스의 유증 이후 폰토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치르고 나서, 즉 폼페이우스가 나서기 이전에 영유가 안정되었다. [91] 크라수스는 카이사르같은 유망한 청년들을 돈을 통해 불러모아 자신에게 유리한 정책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재주를 부렸던 사람이었다. 정치가로서는 몰라도 정치적 감각 자체는 나름 뛰어난 편이었다. [92] 카이사르는 테살리아로 건너가기 전에, "나는 군대가 없는 지휘관과 싸우러 간다."라고 말한 바 있었는데 이는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꼬집은 것이었다. 여담으로 카이사르는 스페인에서 우수한 군대를 보유했던 루키우스 아프라니우스 마르쿠스 페트레이우스와 싸울 때는 "지휘관이 없는 군대와 싸우러 왔다."라고 언급한 바 있었다. [93] 당대에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기간은 매우 길었으며(기초적인 무술이나 진법 훈련 정도는 단기간에 배울 수 있으나 전투력 문제는 단기간에 극복할 수 없다), 냉병기의 특성상 훈련도에 따른 전투력은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 게다가 훈련기간이 획기적으로 줄어든 현대에도 실전을 겪어보는 것은 단순히 모의훈련만 받는 것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훈련도의 차이를 가져오는데, 당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94] 물론 폼페이우스측도 카이사르 군단의 정예도를 아예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를 대응하는 방법이 굉장히 한심했는데 카이사르의 부장이었다가 배신하고 폼페이우스에게 붙은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고참 군단병들이 갈리아 전쟁기 동안 아주 많이 죽어서 걱정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켰으나 카이사르의 위기였던 원정 7년차를 극복하고 난 이후 카이사르의 군단이 전멸에 달하는 참패를 당한 적이 없었다. 카이사르의 첫 패배로 기록된 게르고비아 공방전과 갈리아의 운명을 결정지은 알레시아 전투를 고려하더라도 3만이 넘었던 카이사르의 군단병들의 결원은 라비에누스가 주장한 것처럼 치명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95] 마리우스 개혁으로 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알리 구분이 없어진 이후에도 로마군은 전통을 이어받아 1열은 신참 병사, 2열은 중견급 병사, 마지막 3열은 최고참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카이사르의 3열 병사들은 갈리아 전쟁기부터 카이사르 휘하에서 종군하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정예 중 정예였다. [96] 사실 폼페이우스 휘하에도 폼페이우스의 동방원정에 함께했고 훗날 문다 회전에서 전멸한 제1군단이라든지 카이사르 휘하에서 전향한 13, 14군단 같은 정예부대가 있긴 했다. 하지만 1군단은 폼페이우스의 리즈 시절에 활동했던 부대를 다시 편성한 거라 너무 평균 연령이 많은데다가 오랜만에 실전에 투입된 부대였고, 13, 14군단 등은 카이사르의 정예부대 중 갈리아 전쟁 1년차부터 투입된 9, 10군단에 비해 상대적으로 후발주자라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97] 말은 본질적으로 뾰족한 것을 싫어하는데 2천이나 되는 카이사르의 최정예 병사들이 말 앞에서 쫄지 않고 창을 들이댔다. [98] 이는 좀 다르게 해석해볼 여지도 있다. 기병대는 한 번 돌격이 저지당하면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는다.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파르메니온이 이수스에서 해낸 기병 지휘나 칸나이에서 한니발 휘하의 하스드루발의 기병 지휘처럼 수준 높은 기병 지휘를 하려면 지휘관의 높은 역량과 우수한 기병이 필요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수스에서 페르시아의 중무장 기병대가 파르메니온의 그리스 기병대를 상대하다가 갑자기 앞을 막아선 폴리스 출신 호플리테스 지원병 때문에 순식간에 그 기세를 잃어버린 점을 감안하면 폼페이우스의 오합지졸 기병대가 순식간에 붕괴된 건 폼페이우스의 자질 문제가 아니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당연하지만 다리우스의 페르시아 기병대가 폼페이우스의 기병보다는 훨씬 정예부대였다). 물론 그런 기병대를 믿고 승리를 기대했다는 잘못은 변하지 않지만. 어찌 보면 폼페이우스의 진짜 잘못은 피아간의 힘의 차이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전면전을 걸었다는 전략적 실수다. [99] 정말이다. 로마 및 히스파니아에서 카이사르는 같은 로마 장군들을 상대로 폼페이우스를 제외하면 전승을 거뒀다. 로마 내전 당시 카이사르에게 국지전에서나마 패배를 안겨준 건 폼페이우스 뿐이다. [100] 당장 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본거지로 한 폼페이우스의 둘째 아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가 거의 십여 년 정도를 옥타비아누스와 맞서 싸웠다는 점을 생각해보면(이것도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를 결국 물리치지 못해서 정치적 공세를 통해 해결한다.) 굳이 이집트에 갈 필요가 있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 [101] 둘 다 이원복 교수가 참여한 책이다. 학습만화세계사 같은 경우엔 작화는 박흥용 화백이 담당. [102] 그리고 여담으로, 능인에서 발간했던 "세계 역사 1000년"에서는 위와는 달리 폼페이우스를 카이사르보다 더 나이 많아보이게 그렸다. [103] 폼페이우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그를 회유하러 찾아온 카토에게 카이사르는 로마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군대는 국경에 닿기 전에 해산할 것이라고 일축하는데 "그는 군대와 함께 올 겁니다. 우리를 제거하러요."라는 마르켈루스의 말에 "그것도 괜찮겠지. 모두들 정신이 번쩍 들 테니까."라며 비웃는다. 심지어는 "지금 당신들은 같은 로마인끼리 편을 가르고 있다"며 발끈하고 내쫓기까지 한다. [104] 카이사르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작중에서도 계속 폼페이우스를 전장으로 끌어내려고 시도하며, "원로원의 정치꾼들은 참을성이 없으니 폼페이우스는 떠밀려서 곧 나오게 돼 있다"고 한다. [105] 실제로 이러한 말을 했는지 전해지진 않는다. 오히려 폼페이우스는 자신감 넘치게 초장부터 카이사르를 박살내겠다며 주변을 놀라게 했고 라비에누스를 따라 제일 먼저 이기지 않으면 진지로 돌아오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기에 BBC의 미화에 가깝다. [106] 폼페이우스 가문은 평민(Pleb)까지는 아니지만 조상은 그에 준하는 출신이며, 아버지 대가 되어서야 촌구석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로마 정계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늦깎이 기사계급에 속하는 인물이라 취향도 다소 서민적 성향을 띄는 것이다. 반면 브루투스는 작중에도 몇 번이나 부심을 부리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명문 유니우스 가에서도 핵심 성골인 공화정 건국의 아버지 브루투스의 직계 후손이어서 혼맥으로 긴밀히 얽힌 귀족계급의 핵심에 있었다. 성골이 하층민을 싸잡아 비하하면 자신에 대한 비아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107] 여담이지만 안토니우스도 집안이 평민귀족 출신이란 점을 반영했는지 (광기어린 성격에 더해)천박한 취향을 갖고 있고 비슷한 가면극을 즐겨 보는 장면이 있다. 이런 미묘한 점까지 다 의도한 것이라고 하면 디테일이 대단한 부분. [108] 보레누스를 죽이지 않은 것은 그가 예전 도둑맞은 자신의 군단기를 찾아온 공로가 있었던 데다 험한 풍랑 속에서도 살아남았고 폼페이우스를 발견한 것 등을 보면 강력한 신들의 가호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온다. 강력한 신들이 보호하고 따라다니는 사람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109] 로마 4군단의 백부장으로 예전에 속주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를 섬겼다고 한다. [110] 로마에서 전직 집정관은 대단히 존경받는 위치다. 폼페이우스는 전직 집정관이자 원로원 의원으로서 내전을 일으켜 카이사르와 대립하다 패배했기 때문에 반란죄를 이유로 죽더라도 로마인의 손에 죽어야 하고, 전직 집정관이라는 지위를 생각해보면 명예롭게 자살할 (칼을 땅에 꽂고 그 위에 뛰어들) 기회라도 줬어야 했다. 이집트 입장에서 가장 현명한 방법은 폼페이우스를 체포해 카이사르에게 신병을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집트는 치졸한 방법으로 폼페이우스를 살해한데다 시체를 모욕까지 했으니 정치적으로도 외교적으로도 어리석은 처사였다. 영상에서는 저급한 도둑놈처럼 가둬둔 뒤 추악한 방법으로 죽이다니 부끄러운 줄 알라고 카이사르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