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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점령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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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국 군정청 설치 지역
파일:연합군 점령하 독일 상선기.svg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독일
(1945~1949)
오스트리아
(1945~1955)
일본
(1945~1952)
이탈리아
(1943~1945)
{{{#fff {{{+1 일본국[1]미군이 제작·공포에 참여한 ' 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 대일본제국'은 정치학적으로는 미군이 진주한 1945년 9월 2일, 법적으로는 일본국 헌법을 시행한 1947년 5월 3일에 소멸하였다.]}}}
日本国[2] | Japan}}}
연합국( 미군 주도)의 군정청
파일:연합군 점령하 일본 상선기.svg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상선기[3]
(1945 - 1949)
국기[4]
(1945 - 1952)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United_States_Army_Forces_Command_SSI.svg.png 파일:일본 황실.svg
최고사령부휘장 국장[5]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024px-Occupied_Japan.png
지도의 ①[6]
1945년 ~ 1952년
성립 이전 국권회복 이후
일본 제국 일본국
<colbgcolor=#808080> 국호 대일본제국 (1945년 10월 2일 ~ 1947년 5월 2일)
일본국 (1947년 5월 3일 ~ 1952년 4월 28일)
위치 일본 열도 일대[7]
수도 도쿄도
정치체제 군정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1945년 10월 2일~1951년 4월 11일)
매튜 B. 리지웨이 (1951년 4월 12일~1952년 4월 28일)
천황 쇼와 덴노
내각총리대신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제43대)
시데하라 기주로 (제44대)
요시다 시게루 (제45, 48, 49대)[8]
가타야마 데츠 (제46대)
아시다 히토시 (제47대)
언어 일본어, 영어
주요사건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1946년 11월 3일 신헌법 공포
1947년 5월 3일 신헌법 시행
1950년 7월 26일 경찰예비대 발족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
통화

1. 개요2. 설립3. 막강한 권한4. 연합군 군정의 정책들5. 제국 해체
5.1. 군정청5.2. 점령지 반환5.3. 영토 할양5.4. 독립
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The authority of the Emperor and the Japanese Government to rule the state shall be subject to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who will take such steps as he deems proper to effectuate these terms of surrender.

천황과 일본 정부의 국가 통치 권한은 이 항복 조건을 실행하는 데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조치를 취하는 연합군 최고 사령관에 종속된다.
항복 문서(Instrument of Surrender)의 일부, 1945년 9월 2일[9]
연합군 최고 사령부(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또는 GHQ(General Head Quarters)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7년 동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부를 말한다.

정식 명칭은 'The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이며 'SCAP'이라는 약자를 사용하고 당시 일본에서도 스캬프(スキャプ)로 불렀으나, 현재 일본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로, 대신에 'GHQ'로 지칭한다.[10] 'GHQ(General Head Quarters)'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총사령부'이다. 본래 미 육군의 본토 주둔 병력 지휘와 교육, 훈련, 병참 등의 업무를 맡는 사령부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육군 제101공수사단의 제506공수연대도 101사단 편성 전에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 직할 연대였다.

2. 설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HQ_building_circa_1950.jpg
1950년,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본부 건물로 징발되어 사용되었던
도쿄도 치요다구의 '다이이치 생명관'
[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50px-DN_Tower_21.jpg
2008년, 'DN Tower 21.
기존 건물 뒤에 신축 고층 빌딩을 이어 붙여 증축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이후 전쟁을 버텨낼 수 없었던 일본 제국 무조건 항복으로 미국 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일본 점령과 통치를 위한 미군의 신속한 전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전[12]을 발동했다. 그 후 아시아-태평양 전선의 최전선 곳곳에 있던 미 육군 미 해병대의 사단들은 신속하고 재빠르게 일본 본토로 공수 및 상륙한다. 오키나와섬에 머물던 미 육군 제11공수사단[13]이 수백대의 수송기, 폭격기에 분승하여 가장 먼저 일본 경내의 아츠기 비행장으로 공수되었고, 이후 제1기병사단이 전개되어 도쿄에 배치되었다.

그 뒤로 미 해병대의 제6사단의 제4해병연대[14] 요코스카 일본 해군 기지에 상륙하여 기지 주변을 접수하고 제5상륙군단은 규슈에 상륙하여 점령군으로 배치된다.[15][16] 그 뒤로 1945년 연말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 사단 16개 이상[17] 미군 총 500,000명 이상[18]이 후속 부대로 상륙하여 일본 곳곳에 배치되어 일본 경찰/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집행하고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영국군을 비롯하여 호주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등으로 구성된 영연방 군대들도 시코쿠와 주고쿠 지역을 점령군으로서 통치했다. 장제스의 중국 국민혁명군의 경우 주부 지방을 군정 지역으로 배정받아 제67사단을 보냈으나, 선견대가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공내전이 격화됨에 따라 파병이 중지되었다.

한때 최대 4만 명까지 달했던 영연방군은 한국 전쟁에 배치되는 등의 이유로 1951년까지 일본 본토에서 모두 철수하고 미군만 남았다. 미군도 전후 군축으로 1946년 여름까지 많은 부대들이 순차적으로 미국으로 복귀함에 따라 6.25 전쟁 발발 시점에 주일미군의 규모는 약 8만 5천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 정부를 통해 간접 통치를 실행했고 쇼와 덴노를 처벌하지 않았기에 부담을 덜고 주둔군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시점에서 미군 4개 사단(제1기병, 제7/24/25보병)이 여전히 주둔했으나, 이들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함에 따라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훗날 자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

3. 막강한 권한

더글러스 맥아더와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일본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명목상 천황의 조정에 대응되는 일본 정부는 존재했지만[19]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명령은 헌법과 법률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즉 이 당시 일본 정부의 내각총리대신은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일개 과장보다도 권한이 없는 존재였다.

일례로 토지 개혁과 재벌 해체를 규정한 법률안이 일본 국회( 중의원)에서 12월 31일에 회기종료와 함께 폐기되자 법안을 당장 성립시키라는 명령이 연합군 최고 사령부에서 내려왔다. 이 '명령'을 전달받은 여야의 국회의원들은 일본 국회의사당의 시곗바늘을 몇 분 뒤로 돌리고 회기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임시국회 소집 같은 절차를 시행할 기간도 주지 않은 셈이다.[20] 이는 일본인들에게 굴욕이었지만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불평하지 못했다.

또한 대일본제국 헌법을 대체하는 일본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하고 이를 도입시킨 것도 GHQ인데 이 헌법이 도입된다면 기존에 상원 역할을 하던 귀족원이 폐지되는 구조인지라 귀족원은 헌법 개정안을 내심 반기지 않았고 원칙적으로는 귀족원이 개헌안을 부결시키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귀족원에서 GHQ에서 만든 헌법을 부결시킨다면 천황도 폐위될 수 있다는 분위기였기에 귀족원이 폐지되는 헌법을 스스로 가결시켰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전쟁을 최종 승인한 쇼와 덴노에게 전쟁 책임을 직접 묻지는 않았으며, 천황과 황실이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20세기에 만들어진,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막부에 비유된다.[21] 게다가 군대를 기반으로 한 정권이라는 점에서도 막부와 일맥상통한다. 일본에서 이 시기의 역사에서 농반진반으로 이 기구를 말할 때 비유적인 의미에서 ジーエッチキュー 幕府(GHQ 막부)라고도 부른다.[22]

4. 연합군 군정의 정책들

강력한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통제에 따라 일본 제국 시절의 중범죄 피고(반평화범죄)들이 대부분 처벌되고 협력자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각종 근황파, 일본군[23] 거대 재벌들이 해체되었다. 일본군의 육군성과 해군성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고,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으로 이름이 바뀌어 해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병력들의 귀국과 무장 해제 업무를 연합군 최고 사령부 감독하에 수행했다.[24]

그리고 화족 제도가 폐지되고 천황의 직계를 제외한 방계 황족들은 모두 신적강하(황적이탈)되어 평민 신분으로 전락했으며 화족들의 권력의 근간이었던 귀족원 또한 귀족원에서 가결하여 해체되었다.

또한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지주 계급이 해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언론의 자유와[25] 좌익 탄압 전면 금지, 민주주의적 선거제도, 지방분권화[26]가 도입되는 등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 3S정책 포함)가 일본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더해서 대일본제국 헌법 일본국 헌법으로 개정되었으며 노조 활동이 인정되고 일본 제국 시절 각종 탄압의 도구로 쓰이던 치안유지법 특별고등경찰 역시 전면폐지되었다.

그 외 의료 개혁이 실시되어 의약분업 정책이 취해졌고, 교육제도 역시 일변하여 국가신토 해체, 교육칙어 폐지, 천황 신격화 금지, 각종 군국주의적 교육 금지 등이 시행되고 미국식 6 · 3 · 3 · 4 학제가 도입되었다. 미군은 또한 일본군을 무장해제하여 전차를 모두 소각했다. 연합군 최고 사령부 통치 초기를 다룬 2012년작 영화 <엠퍼러>의 작중 묘사에 따르면 도쿄만에서 비무장의 구 일본군들이 미군의 감독하에 온갖 병기들을 바다로 수장했다.[27]

다만 이러한 개혁과는 별개로 경제상황은 대단히 나빴다. 우선 금엔화 블록 붕괴에 종전 직전 일본 정부의 통화 남발로 인해 시작된 물가폭등이 1949년까지 지속되었고, 전후 일본 정부는 일본 국민들의 예금을 몰수해서 국채를 갚았다. 그래서 이대로면 1950년대에 화폐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이 나왔다. 1949년에 물가를 잡기 위해 닷지플랜이라는 정책이 도입되었지만 물가는 잡힌 대신에 실업률이 급속히 올라서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도 이때 일어나서 흉흉한 분위기는 지속되었다. 또한 식민지 거주 일본인들이 일본 본토로 추방되었고, 전후 베이비붐이 일어남에 따라 인구는 매년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에[28] 사회인프라의 부족이 큰 문제점이었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이 시작되자, 연합군 최고 사령부도 1948년부터 이른바 역코스라 불리는 점령정책의 전환이 시작되었다. 그 전까지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전쟁을 일으킨 구 일본 제국의 엘리트들을 견제하고자 좌익들의 활동을 자유로이 두었으나, 이 때부터 레드 퍼지(Red Purge. 빨갱이 숙청)[29]라고 해서 공직추방 및 공민권 제한을 실시했다.[30] 그 결과 좌익 관련자들도 공직과 사회 각층에서 추방 또는 활동이 제한되었다. 이 사건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인사들의 기세가 완전히 꺾였다.

일본의 재무장과 재부흥을 전면적으로 막고자 했던 방침도 바뀌어, 국공내전 한국전쟁 이후 공산권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과 경제력 향상이 필요하다는 판단에 따라 일본에 대한 해체 정책 및 경제 억압을 능동적으로 해제하여 일본 기업들에 대한 정책들을 폐지하였고, 제한적인 재무장을 허용하면서 경찰예비대가 출범하였고 이것은 자위대로 발전한다. 이 때 전범을 포함한 구 일본 제국의 엘리트들이 6.25 전쟁 이후 매카시즘이 강성해지자 이 틈을 타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31] 이 민권 제한조치를 영구적 추방으로 안 사람들은 황당하게 자기 자식들을 자기 자리에 앉히는 등 수많은 음모를 꾸몄다. 6.25 전쟁을 기점으로 일본으로 수많은 외화가 유입되면서 일본의 경제는 회복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오일쇼크 직전까지 일본의 경제는 고도성장 기조를 유지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비준으로 일본은 공식적으로 국권(주권)을 회복하였고, 연합군 최고 사령부도 주일미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른다. 일본군 출신들 및 구 제국 시기의 수뇌부 인사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후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정부 요직을 비롯한 사회 각층에 복귀했다.

5. 제국 해체

5.1. 군정청


5.2. 점령지 반환

5.3. 영토 할양

5.4. 독립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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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정기 마지막으로 쓰인 국호로 [2] 1949년 문부성 국어심의회에서《당용한자자체표》를 발행하며 신자체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3] 점령 초기 일장기는 제한적으로만 게양이 허용되었다. 1949년 1월 1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장기를 전면 허가하기 이전, 제한적으로 사용될 때는 국제법상 깃발을 달아야 하는 일본적 상선에 이 깃발을 게양하도록 승인하였다. 이 당시 학교 교과서 삽화에 일장기가 있으면 삭제 대상이 되었고 아동의 문방구에 일장기의 디자인이 붙어 있는 경우, 학교에 감시하러 온 군사경찰에 몰수되거나 지울 것을 명령받았다. # 한편 금지 기간 동안 영국군이나 미군의 점령 지역에서는 각국의 국기가 게양되었고, 연합군 최고 사령부가 경찰서장이나 시장을 통해서, 일본 시민들에게 경외심을 담아 성조기에 경례하도록 명령한 사례가 전국 각지에 있었다.(출처: 『에히메 신문』 1945년 11월 22일 기사 등) [4] 1949년 1월 1일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전면 허용되었다. 단, 일장기가 성문법적으로 국기로 지정된 것은 일본국이 성립한 뒤 한참 지난 1999년 들어서였다. 다만 허용 반년 전인 1948년 6월, 국기 게양 제한령을 모르고 요코하마에서 국기를 게양한 남성이, 미군 군사법정에서 중노동 6개월의 판결을 받는 등의 판례(출처: 『日本の百年』1967年、他)가 있었기에, 형벌을 받거나 "군국주의자" 딱지가 붙을 것을 두려워하여 1952년 군정이 끝날 때까지 실제로 일장기를 게양한 일본인은 매우 적었다. 일본어 위키 문서 [5] 일본 황실은 더글러스 맥아더 등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전략적 판단 및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그 조직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쇼와 덴노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The Diplomatic History of Postwar Japan", Makoto Iokibe. 1999 참조.) [6] 당시 일본제국이 통치하고 있던 영역들을 나타낸 것이다. 2는 타이완 섬, 3은 사할린 섬의 북위 50도 이남 지역 쿠릴 열도, 4는 조선, 5는 관동주, 6은 만주국, 7은 남양 군도. [7] 부속 도서의 경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그 지위와 범위가 불분명했다. [8] 요시다 시게루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45대, 48대~51대까지 연임했지만 50대 이후부턴 연합군 점령하 일본이 아닌 일본국의 내각총리대신이다. [9] 사실 이 문구는 주권이 없을 뿐, 천황과 정부가 형식상으로는 존재한다는 의미로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나 대한제국 조정이 기유각서 이후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형식상으로 존재한 것과 같이 연합군 최고사령부 아래의 일본 정부 또한 존재할지언정 그저 꼭두각시 신세였다. GHQ가 허락만 해준다면 어느 정도 자치를 하는 것도 가능했지만 GHQ가 정한 것을 일본 정부가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0] 요시다 시게루 내각총리대신은 이에 대해 'Go Home Quickly(얼른 집(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농담을 했는데, 지금은 방과 후 클럽(동아리)활동 같은 걸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른바 '귀가부' 혹은 '귀택부')을 일컬어 'GHQ'라 부르기도 한다. [11] 본래 1933년 농림중앙금고 사옥으로 건축되었고 1938년에는 다이이치(第一) 생명보험 회사가 입주하였다. 지금도 농림중앙금고(農林中央金庫)와 다이이치 생명보험의 공동 소유이다. 오늘날까지도 증축을 거치면서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DN Tower 21'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다이이치 생명관 앞의 강처럼 보이는 것은 고쿄 해자다. 일본 정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천황의 거처인 고쿄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12] 이 작전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1945년 6월에 미군 합동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했다는 가정 하에 일본과 남한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담긴 내용이었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 변형이 되어 시행되었다. 이때 남한에 배치된 미 육군 제24군단의 전개에 대한 작전은 "베이커-포티"(블랙리스트 포티)라는 코드네임이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 정확히는 아직 소련군이 도달하지 않은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으로 일본 본토 뿐만이 아니라 남한과 중국 북부에도 미군이 배치되었다. [13] 사단은 일본의 항복이 발표된 8월 초에 필리핀에서 오키나와로 이동해서 대기하다 8월 30일에 일본으로 재이동한다. 종전 후 1949년 5월까지 점령군으로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에 주둔, 이후 남한 미 군정 종료로 한국에서 철수해온 제7보병사단에게 교대받고 미국 본토로 철수, 6.25 전쟁 이전에 일본에서 철수한 마지막 사단이었다. 한국전쟁 시점에 사단은 본토 예비부대로 지냈고 예하 부대인 제187공수연대가 참전함 [14] 일본의 항복 직후 제6해병사단의 주요 부대는 중국으로 이동했지만, 연대는 후술된 임무에 배정, 사단에서 분리되어 일본으로 향했고 45년 연말까지 점령군으로 지내다 연대장병의 70%은 전역점수 및 인사이동 기준을 충족하여 미국 본토로 돌아갔고, 이 과정에서 연대 본부와 제1, 2대대는 해산, 제3대대는 현지에 잔류, 해군 시설 경비대로 개편됨 [15] 미 해병대의 제2,5 해병사단으로 전후 군축의 영향으로 45년 11월에 사단 간 인적 교환작업을 통해 베테랑 장병들은 본국으로의 인사이동과 전역을 위해 제5해병사단으로 전출되어, 제5사단은 12월 초에 미국으로 귀국하여 해산되었고, 군단본부와 직할대는 연말에 점령임무에서 해제되어 46년 초에 귀국 후 해산 및 재배치가 되었다. 제2사단은 46년 6월까지 잔류 후 제24보병사단에게 교대받아 미국으로 재배치됨 [16] 제3상륙군단(1,6해병사단)은 중국 북부( 베이징 톈진, 산둥성)에 상륙하여 47년까지 점령군으로 지내고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 [17] 일본에 배치된 미 육군의 주요부대는 제1기병사단, 제11공수사단, 아메리칼사단, 제24, 제25, 제27, 제32, 제33, 제41, 제43, 제77, 제81, 제97, 제98보병사단, 제112기병연대, 제158보병연대 [18] GHQ, 미 육군 제6군과 제8군 + 육군 항공대 극동 공군 부대 + 주일 미 해군 + 미 해병 제5상륙군단과 주일 미 해병 항공 부대들을 도합한 수치이다. [19] 미국은 원래 독일의 경우와 같이 일본 정부를 해산하여 직접 통치를 실시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한 다수의 군정부대(역할은 민사여단과 비슷)도 준비했으나, 이후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로 방향을 바꾸면서 필수적인 정부 조직도 유지했고 각료들도 전범이 아니면 현직에 유지시켰다. 반면 일본 직접 통치를 위해 준비한 군정부대들이 남한으로 전개되었다. 방향이 바뀐 이유는 소련과 이미 합의가 끝나 안정되었던 독일과 달리 동아시아 국공내전, 6.25 전쟁 등으로 너무 혼란스러워 그나마 체계를 갖춘 일본 정부 체계를 완전히 갈아엎을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20] 이 '시계 돌리기' 기술은 2009년 멕시코 국회에서도 선을 보였다. # [21] 둘의 차이를 살펴보면 그간의 막부는 형식상 천황이 군권을 내린 쇼군이 통치하는 것으로, 실질적으로는 막부의 권한이 강했지만 어디까지나 천황이 계통상으로는 그 위에 있었으며 조정의 권위는 어느정도 인정하긴 했고, 천황에게 무례를 범하지 않는 시도는 했다. 하지만 연합군 최고 사령부는 관념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문서상으로든 천황을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래에 '종속'시키고 그 위에서 통치하였는데, 이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형태였다. [22]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편에 같은 뉘앙스로 "외국인 쇼군 맥아더"라는 표현이 있다. [23] 1차 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군 규모가 10만 명 선에서 엄격히 축소되었지만 독일 군대의 존재 자체는 인정되었다. 반면 나치 독일의 항복 직후 체결된 포츠담 의정서는 독일군과 일본군 해체, 이들 국가의 비무장화 및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시했다. [24] 다만 일본 해군이 영해에 깔아두었던 수많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해군의 소해부대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이렇게 잔존한 해군 인원을 기반으로 해상자위대가 창설되었다. [25] 물론 반미, 반서방적인 보도는 엄격히 검열되었다. [26] 태평양 전쟁 이전의 일본에서도 제한적인 지방자치제가 시행되고 있었는데, 1947년에 지방자치법을 제정하여 본래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던 지자체장을 주민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는 등 지방자치를 강화하였다. [27] 무기들은 일단 바다에 빠지면 바닷물의 염분으로 인해 쉽게 녹이 슬어 삭아버리기 때문에 설령 다시 인양해도 무기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고철덩이에 불과하다. [28] 1947~1949년, 길게보면 1952년까지)에 태어난 세대들을 일명 단카이 세대라고 불린다. [29] 전범들의 공직추방과 레드 퍼지는 다르다. 레드 퍼지는 어디까지나 좌익계 인물들을 공직 등에서 추방한 것을 말한다. 종전 직후 미쳐 날뛰었던 일본 내 우익(극우)의 전쟁책임을 물은 것이 전범 공직추방이라면 우익의 거물들이 전범혐의로 공직에서 대거 추방당하고, 전쟁 당시 일본 정부가 자행했던 좌익 탄압이 중지되면서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여 연합군 군정이 일본을 통제하기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 레드 퍼지이다. [30] 이른바 일본의 밤과 안개. 동명의 소설도 있다. [31] 한국전쟁에 반대한 사람도 체포되었다. # [32] 1952년 토카라 열도 반환, 1953년 아마미 군도 반환, 1972년 나머지 류큐 열도 최종 반환. [33] 1968년 반환. [34] 원래 프랑스에 반환되었지만 공산게릴라였던 베트남독립동맹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와 1954년 7월 공산권 수장 소련의 항의, 그리고 베트남에 영향권을 뻗치고자 했던 미국의 압박에 따라 완전독립을 이루었다. [35] 남부 베트남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을 예정이었으나 구시대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뿌리뽑고 새로운 반공자유진영 구축을 원했던 미국에 의해 남부 베트남에 대한 독립선거가 실시되고 1955년 베트남 공화국이 설립되었다. [36]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원래 주인이었던 네덜란드에 반환되었고 4만의 네덜란드 병력이 다시 인도네시아에 돌어갔다. 무기가 빈약했던 인도네시아 독립군들은 밀리기 시작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를 뿌리뽑고 새로운 자유진영의 구축과 영향권 확대를 위해 미국이 2차 대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네덜란드에 경제원조를 빌미로 압박한 결과 결국 1949년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에서 완전히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