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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 카이로 | ||||
정치 체제 | 입헌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시조
메흐메드 알리 (
1805~
1849) 초대 국왕 푸아드 1세 ( 1922 ~ 1936) 2대 국왕 파루크 1세 ( 1936 ~ 1952) 3대 국왕 푸아드 2세 ( 1952 ~ 19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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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994,000km2 | ||||
인구 | 15,933,000명 (1937) | ||||
민족 | 이집트인, 수단 아랍인 | ||||
언어 | 표준 아랍어, 이집트 아랍어 | ||||
종교 | 이슬람교 | ||||
통화 | 이집트 파운드 | ||||
주요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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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이집트 왕국 국가 | ||||
현재 국가 | 이집트, 수단, 리비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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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직후의 이집트로, 고대 이집트와는 다른 나라다. 법적으로는 1922년부터, 실질적으로는 1841년부터 1952년까지 존속했다가, 1953년에 가말 압델 나세르의 쿠데타로 왕국이 해체되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집트 최후의 외래 왕조이자 이집트 최후의 왕조이다.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후에 이집트는 다시 독자적인 자주국으로 거듭났다. 물론, 무하마드 알리 당대에는 대외적으로는 '오스만 제국령 이집트'로 간주되었으나 이미 이 시기에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1922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더불어 국제 사회로부터 독립국임을 인정받고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엽에 미국산 면화가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등지로 값싸게 유입되면서 이집트의 국가 기간 사업이던 면화 농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었고, 수에즈 운하 건설 당시에 막대한 채무를 진 바람에 그 소유권이 영국과 프랑스에 넘어가면서, 1881년부터는 경제적으로 영국에 종속되면서 1922년까지 사실상 보호국이 되었으며, 1922년 독립 이후에도 영국의 간섭은 계속되었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근대 이집트의 독자적인 역사는 1805년에 메흐메드 알리가 이집트의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알리는 1799년, 프랑스의 이집트 원정[2] 당시 큰 활약을 펼치면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탈환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이집트의 태수로 임명된 것이다.그런데 메흐메드 알리는 본래 알바니아계 튀르키예인으로, 이집트에서 널리 쓰이던 아랍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하여 어지간한 대화는 전부 오스만어로만 했던 사람이다. 이 점이 그가 이집트의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는 이슬람 근본주의에 적대적이었고 이집트의 세속화와 근대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알리는 우선 이집트의 전통적인 무사 귀족인 맘루크[3]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리고,[4] 이미 콥트 정교회의 전례 언어로 격하된 콥트어에 대한 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거기에 와하비즘을 토벌하고 헤자즈, 수단까지 차지하였으며 유럽식의 무기 공장과 세속주의 성향의 학교를 설립하는 등의 세속주의 정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독자적인 개혁 조치는 이미 같은 성격의 탄지마트 운동을 추진 중이던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건드리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그리스 독립 전쟁이 발발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각지의 태수들에게 참전을 요구하자, 메흐메드 알리가 이에 응하는 조건으로 크레타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지배권과 이집트 태수직의 세습을 요구하는 등 노골적으로 야심을 드러내었다.[5] 결국 참다못한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침공하지만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패한 이후 군대를 급하게 재정비한 상태이다보니 되려 이집트군에게 격퇴당하고, 거꾸로 이집트군이 프랑스에서 파견된 군사 고문단의 자문 하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하는 등의 역관광을 가했다. 심지어 오스만 제국 함대가 변변한 싸움도 없이 메흐메드 알리에게 투항하기에 이르자,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마흐무트 2세는 화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메흐메드 알리는 자신만만해하며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다고 선포했다. 더 이상의 확전을 반대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이집트 및 다마스쿠스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선에서 중재하려 했지만, 알리는 단칼에 거절했다. 결국 1841년에야 점령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반환하는 조건으로 이집트의 자치권과 태수직의 세습을 인정하기로 합의를 보았고, 이 때부터 이집트의 독자적인 근대사가 시작되었다.
2.2. 자치 이후에서 독립 직전까지
독립은 실패했지만 이집트를 오스만 제국 내의 자치령으로 만들고 태수직 세습에도 성공하는 등 소기의 목적을 거의 달성한 메흐메드 알리는 이후로도 개혁 정책을 꾸준히 추진했고, 1849년에 메흐메드 알리가 사망한 후에 즉위한 태수들 역시 개혁 정책을 지속했다. 문제는 제4대 태수이던 무하마드 사이드 파샤가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면서 시작되었다.[6] 당시에 산업 혁명으로 인한 생산력의 증대로 인해 유럽 열강들 사이에서는 상품의 운송비를 절감하는 문제가 대두되었으며, 이에 따라 수에즈 운하의 건설을 추진하고자 이집트 정부에게 공사를 제안했다. 당시 태수는 이 수에즈 운하가 군사적, 경제적으로 이집트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서 운하의 건설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제5대 태수인 이스마일 파샤의 치세이던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완공되었다.하지만, 10년이나 걸린 공사로 인해 이집트 정부는 막대한 채무에 눌려 파산 직전에 몰렸고,[7] 이때문에 이집트의 국영 회사였던 수에즈 운하의 운영사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의 주식의 상당수를 영국에게 팔아버려야 했다.[8] 이때부터 이집트는 영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고, 1922년에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정식으로 독립하기 직전까지 영국의 보호령 신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이집트의 민족주의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이 시기에 오늘날까지 이집트인들의 국가적인 영웅으로 칭송받는 아라비 파샤가 등장하게 되었다. 일전에도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령으로 간주되던 이집트를 완전히 독립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했던 그는 1882년에 영국이 이집트를 사실상의 보호령으로 만들자, 이에 격렬하게 반발했다. 동년 이집트의 군사 대신으로 임명된 후에는 영국이 군사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막고자 했고, 이를 위해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반영(反英) 봉기를 후원했다. 그러나 이내 영국 정부에게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이집트 정부는 아라비 파샤를 강력하게 처벌하라는 압력에 시달렸고, 결국 아라비 파샤는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이내 국외로 추방되는 조건으로 감형되었다.[9] 이렇게 영국의 사실상의 식민지가 된 이집트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수단의 공동 통치를 제안받았고,[10] 이때 수단과 이집트 간의 국경선이 결정되었다가 1902년에 국경선이 재조정되었는데, 이 때문에 오늘날에 사실상 무주지가 되어버린 비르 타윌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2.3. 독립과 그 이후
그러던 중에 1914년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였고, 전쟁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이 패전하였다. 이 사건은 이집트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그때까지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태수령에 불과했던 이집트가 1915년에 공물 납부를 중단하기로 선언하였다. 1914년에 이미 이집트의 마지막 태수인 아바스 헬미 2세[11]의 후계자인 후세인 카멜[12]이 즉위와 동시에 스스로를 이집트와 수단의 술탄이라고 선포하면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한 상황이었다. 그러자 당시 사실상 이집트를 지배하던 영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이집트를 식민지로 병합하려고 하였으나, 이집트인들의 격렬한 반대로 무산되고 앞서 말했던 후세인 카멜을 술탄으로 하는 영국의 보호국인 이집트 술탄국이 선포된다. 영국은 전쟁에 협력하면 이집트를 독립시켜주기로 했으나, 전쟁이 끝나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에 따라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에 반영 감정이 고조되었고, 반영 민족주의 정당인 와프드당이 탄생했다. 이집트인들은 이 와프드당을 중심으로 독립혁명을 일으켰고, 영국은 이집트를 독립시키기로 했다. 1922년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로잔 조약을 통해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고 터키 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면서 이집트의 독립이 국제 사회에서 공인되었고, 이집트는 입헌군주정 왕국인 이집트 왕국으로 독립되었다.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는 영국에 종속된 상태였고,[13] 수에즈 운하 역시 영국과 프랑스가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으로부터 운하를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을 통해 수에즈 운하의 주변 지역에 군대까지 주둔시키자[14] 이집트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사실상 영국의 허수아비로 전락한 왕실에 대한 증오가 하늘을 찌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바로 옆에 리비아 식민지를 두고 있던 이탈리아 왕국은 1940년에 이집트를 침공한다. 이후 나치 독일도 개입해서 같이 이집트를 침공한다.[15] 이집트군은 독일군이 개입하자 대처하지 못해 서부 지방을 이탈리아·독일군에게 점령당했고 일시적으로 이탈리아가 지배하게 된다. 초기에는 이탈리아군과 독일군이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유리한 듯 했으나 결국 영국이 아프리카 전선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영국군에 패배하고 이집트는 승전국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수에즈 운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이집트 영토에 대해 영국이 손을 떼자, 이집트 내에서는 반(反) 왕실 여론이 팽배해졌다. 이집트 공화주의 운동이 결정적으로 큰 탄력을 얻게 된 것은 제1차 중동전쟁에 의해서였다.
2.4. 멸망과 공화국 성립
1948년에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포하자, 이를 저지하려는 아랍 국가들에 의해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이스라엘이 수도인 텔아비브와 예루살렘 서부 일대만 남기고 패퇴했을 정도로 수세에 몰렸으나, 이내 서방 국가들의 지원으로 이스라엘군이 오히려 군사력으로 우세하게 되면서 결국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나고 이스라엘의 독립이 확정되었다.[16] 이 전쟁의 와중에 이집트도 이스라엘 공군으로부터 숱한 폭격을 받았기 때문에, 왕실은 패전에 대한 갖은 원망에 시달려야 했다.결국 당시 이집트 육군의 대령이었던 가말 압델 나세르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실권을 잡자, 당시 국왕이던 파루크 1세는 급히 아들인 푸아드 2세에게 왕위를 넘겼지만, 이내 나세르는 공화정을 선포하고 왕실을 이집트에서 축출해 버렸다. 이때가 1953년 6월 18일로, 이 날에 장장 5천여년을 아우르던 이집트의 군주제는 종결된다. 그리고 나세르는 제2차 중동전쟁을 통해 영국의 영향력을 축출해 버리고 이집트인들의 숙원이던 수에즈 운하의 반환도 성사시키면서 이집트에 공화정이 확고하게 뿌리를 내렸다. 한편 공화제로 전환된 이후 이집트의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권위주의적인 행보를 보이면서 장기집권을 함에 따라 독재 정권이라는 비판이 국내외적으로 끊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파루크 1세의 기행이 워낙 악평이 많아서인지 현재 이집트에서 왕정복고 여론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17]
3. 역대 국왕
이집트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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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리
- 메흐메드 알리 (1805년 6월 18일 ~ 1848년 7월 20일)
- 이브라힘 파샤(이집트) (섭정 : 1848년 4월 15일 ~ 1848년 7월 20일, 단독 : 1848년 7월 20일 ~ 1848년 11월 10일)
- 아바스 힐미 1세 파샤 (1848년 11월 10일 ~ 1854년 7월 13일)
- 무하마드 사이드 파샤 (1854년 7월 13일 ~ 1863년 1월 13일)
- 이스마일 파샤 (1863년 1월 13일 ~ 1867년 6월 8일)
- 헤디브
- 이스마일 파샤 (1867년 6월 8일 ~ 1879년 6월 26일)
- 무함마드 타우피크 파샤 (1879년 6월 26일 ~ 1892년 1월 7일)
- 아바스 힐미 2세 파샤 (1892년 1월 7일 ~ 1914년 12월 19일)
- 술탄
- 후세인 카멜(이집트) (1914년 12월 19일 ~ 1917년 10월 9일)
- 아흐메드 푸아드 1세 (1917년 10월 9일 ~ 1922년 3월 15일)
- 국왕(말리크)
- 아흐메드 푸아드 1세 (1922년 3월 15일 ~ 1936년 4월 28일)
- 파루크 1세 (1936년 4월 28일 ~ 1952년 7월 26일)
- 섭정 모하메드 알리 테우피크, 아지즈 에자트 파샤, 셰리프 사브리 파샤 (1936년 5월 8일 ~ 1937년 7월 29일)
- 아흐메드 푸아드 2세 (1952년 7월 26일 ~ 1953년 6월 18일)
- 섭정 알위 마헤르 파샤 (1952년 7월 26일 ~ 1952년 8월 2일)
- 섭정 무하마드 압델 모네임, 바헤이 엘 딘 바라카트 파샤, 라샤드 메한나 (1952년 8월 2일 ~ 1952년 10월 14일)
- 섭정 무하마드 압델 모네임 (1952년 10월 14일 ~ 1953년 6월 18일)
이후 통치자는 이집트 대통령 참조.
[1]
현재의
수단 지방은 이집트와
영국의
공동 통치하에 있었다. 저 면적을 다 합치면 영토가 무려 300만Km2을 넘어가는 대국이 되지만 수단은 공동 통치였고 실질적으로는 영국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에 저걸 온전히 이집트 영토로 쳐주는 경우는 별로 없다. 한편 사라 삼각지대는 1934년
이탈리아령 리비아에 할양한 지역이다.
[2]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주도한 전쟁이며, 이 원정 당시에 발견된
로제타 석이
고대 이집트 연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3]
사실
맘루크는 중세
이슬람권 국가라면 어디에나 있었지만, 19세기까지 맘루크 계층이 남아있는 곳은
이집트가 유일했다. 이는
오스만 제국이 황제 중심의 절대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각지의 귀족들을 숙청하거나 평민으로 격하했기 때문이다.
[4]
공교롭게도,
맘루크 숙청이 있던 1811년으로부터 15년 뒤인 1826년에
오스만 제국에서도
예니체리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렸다. 맘루크나, 예니체리나
노예나 비(非)
이슬람교 신자들을 강제로 개종시켜서 결성한 군사 집단이 그 기원이란 점이 흥미롭다.
[5]
다만
메흐메드 알리가 아무 행동 없이 무리한 조건을 내걸고 뻗대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집트 해군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상륙,
그리스인을 대대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이 학살이 서양 열강의 개입을 초래하면서 오히려
그리스의 독립을 도운 꼴이 되어버렸지만, 21세기에 그리스와
이집트가
튀르키예에 대한 반감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점을 생각하면, 상당히 묘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6]
수에즈 운하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고대 이집트 시대에도 이미 있었지만, 8세기 경에 군사적인 이유로 운하를 폐쇄하고 물길을 메우면서 운하가 없어져 버렸다. 현대의 운하는 이것을 재발굴한 것은 아니고 새로 파낸 물길로 되어있지만, 운하 건설 도중에 발굴된
고대 수에즈 운하는 운하 건설 당시에 일하던 일꾼들의 식수를 공급하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7]
어처구니없게도
이스마일 파샤가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축하하는 사치스러운 개통식을 치르면서
이집트가 더더욱
국가 막장 테크를 타게 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이 수에즈 운하의 개통을 기념하여
이탈리아의 국민 작곡가인
주세페 베르디가 이스마일 파샤에게 헌정한
오페라가 바로
아이다이다.
[8]
당시
수에즈 운하의 운영사였던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의 최대 주주는
이집트 정부와
프랑스 정부였다.
[9]
나중에
아라비 파샤는
이집트로 귀국하긴 했으나, 돌아온 지 얼마 안된 1911년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끝내
이집트의 완전 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10]
근데
수단은
메흐메드 알리의 치세에 이미
이집트에게 정복되어 이집트령이 된 지 오래였고, 여기서 수단 현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선포하자
영국이 이를 진압하고 멋대로 자국령으로 선포한 상태였다. 남의 땅을 일방적으로 뺏은 셈이라서, 수단 지배의 근거를 만들고자
이집트와 공동 통치를 한 것이다. 참고로 당시의 수단 지역은 오늘날의
수단 공화국과
남수단을 모두 아우르는 지역이었다.
[11]
아바스 헬미 2세는
오스만 제국과 내통했다는 혐의로 영국에 의해 폐위되었다.
[12]
전술한
이집트 경제를 파탄내버린
이스마일 파샤의 아들이다.
사담 후세인의 친척인 후세인 카멜과는 다른 사람이다.
[13]
사실상 영국의 보호국으로 취급되었다.
[14]
이후에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한 것을 계기로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이 완전히
영국에게 넘어갔다.
[15]
그런데도 이집트는 대독 선전포고를 1945년에 했다. (1945년 이탈리아 왕국은 항복하여 연합국으로 전향환 상태였다.)
[16]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는 애써 건국한 나라가 멸망하면 또다시
홀로코스트와 숱한
유대인 차별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떨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목숨 걸고 싸웠다. 만일
제1차 중동전쟁에서 패했다면,
아랍인들의 보복으로
중동에서
유대인 세력이 씨가 말랐을 것이고,
유대인 경찰연합의 내용이 현실에 도래했을 것이다.
시오니스트들의 병크를 옹호해 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도 살겠다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대거 이주해 들어온
유대인들을 무조건 내쫓으려고 했던 아랍인들도 잘한 건 없는지라, 전쟁 당시에도
아랍 국가들은
영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게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비난을 받았다.
[17]
참고로 이집트의 마지막 왕인 푸아드 2세는 현재까지 생존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