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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르 왕조 제2대 샤한샤
파트 알리 샤 카자르 فتحعلىشاه قاجا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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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16765><colcolor=#fff,#fff> 이름 |
파트 알리 샤 카자르 فتحعلىشاه قاجار |
출생 | 1769년 5월 |
잔드 왕조 담간 | |
사망 | 1834년 10월 24일 (향년 65세) |
카자르 왕조 이스파한 | |
재위 기간 | 카자르 왕조 샤한샤 |
1797년 6월 17일 ~ 1834년 10월 23일 (37년) | |
전임자 | 아가 모하마드 칸 |
후임자 | 모하마드 샤 카자르 |
종교 | 이슬람 시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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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자르 왕조의 제2대 샤한샤.거의 4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페르시아를 통치했지만 그의 재위 내내 카자르 왕조는 쇠락을 거듭했다.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만차이 조약으로 현재의 조지아, 다게스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등이 있는 캅카스 북부를 모조리 러시아에게 빼앗겼으며, 페르시아의 국제적 위상은 수직추락했다. 그렇다고 내치를 잘했냐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경제는 망해갔고 군사적, 기술적 부채 때문에 정부는 해체 직전에 내몰렸으며 그가 남긴 수많은 왕자들 때문에 죽음 이후 왕위 쟁탈전이 일어났다. 여러모로 카자르 왕조의 암흑시대를 열어젖힌 암군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2. 일생
2.1. 즉위 이전
파트 알리 샤는 1769년 5월 담간에서 태어났다. 증조부의 이름을 따서 '파트 알리'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사람들은 주로 그를 '바바 칸'이라고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호세인 콜리 칸이었는데, 당시 페르시아 지방을 다스리던 잔드 왕조에 반란을 계획했으나 붙잡힌 바람에 파트 알리 샤도 이때 카림 칸의 궁정으로 끌려갔다. 파트 알리 샤가 자신의 백부이자 훗날 카자르 왕조의 개국시조가 될 아가 모하마드 칸을 처음 만난 곳도 이 카림 칸의 궁정이었다. 어쨌든 파트 알리 샤는 1775년 카림 칸에게서 풀려나 담간으로 돌아왔고, 이후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친분이 있던 아가 모하마드 칸의 세력에 합류했다. 아가 모하마드 칸은 어릴 적 거세를 당해 고자였지만 파트 알리 샤의 어머니와 재혼을 했기에 파트 알리 샤는 사실상 아가 모하마드 칸의 아들 대접을 받으면서 살 수 있었다.파트 알리 샤는 '바바 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담간 지방을 재확보하는 등 군공을 쌓으며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결국 1786년 3월 21일에 아가 모하마드 칸이 테헤란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이란 전체의 샤로 등극했고, 이와 거의 동시에 바바 칸 역시 아가 모하마드 칸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다. 바바 칸은 이후 왕조 교체기라 혼란스러운 페르시아 곳곳을 안정시키느라 10년 정도의 세월을 보냈다. 그러다가 아가 모하마드 칸이 1797년 암살당하자 마침내 바바 칸에게 제위권이 돌아온다. 아가 모하마드 칸이 하도 괴팍한 성격으로 노예들을 학대하다가 이에 앙심을 품은 시종들에게 살해당해 버렸던 것이다.
2.2. 통치
아가 모하마드 칸이 허무하게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조카였던[1] 파트 알리 샤 카자르가 제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카자르 왕조는 이 파트 알리 샤 재위기부터 러시아 제국에게 온통 털려나가기 시작한다. 파트 알리 샤는 아가 모하마드 칸이 죽었을 당시 파르스의 총독이었는데, 그가 죽자마자 샤 자리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 내내 페르시아 문화가 꽃을 피웠고 극도로 엄격한 궁정 문화가 발전했지만 정작 외치는 최악이었다. 그는 그의 사촌 에브라힘 칸을 황폐해진 케르만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했지만 상태가 좋지 못했고, 특히 호라산 지방에서는 나디르 샤의 증손자 나데르 미르자가 반란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호라산 지방에서 카자르 왕조의 영향력이 어찌나 제한적이었는지 1800년~1801년 카자르 왕조의 세무기록을 보면 그 많은 호라산의 주들 가운데 겨우 2개만이 카자르 정부에 세금을 납부할 정도였다.2.2.1. 러시아 제국과의 연이은 전쟁
저 붉은색으로 빗금 쳐진 부분이 러시아 제국에게 빼앗긴 페르시아의 영토들이다.
이미 이전부터 조지아, 다게스탄 일대를 노리고 있던 러시아 제국은 아가 모하마드 칸이 세상을 떠나자마자 발빠르게 움직였다. 사실 조지아는 예로부터 이란의 속국으로 살아왔지만 사파비 왕조 이래 하도 많이 탄압을 당해왔던터라 이란에서 떨어져 러시아에 붙고자 하는 움직임이 강했다. 그랬기에 아가 모하마드 칸을 배신하려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이 너무 호전적이어서 성공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아가 모하마드 칸이 죽자 러시아는 슬금슬금 조지아로 재진입했고, 심지어 전통적으로 이란의 일부로 여겨지던 다게스탄까지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게스탄 침공은 대놓고 페르시아의 영유권을 무시하는 행위였기에, 파트 알리 샤는 러시아가 간자를 함락해 수많은 페르시아인들을 강제로 몰아낸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1804년 파트 알리 샤는 대군을 모아 조지아 침공을 명령했다. 시아파 성직자들 역시 러시아에 대한 결사항전을 주장했기에 명분은 차고 넘쳤다. 전쟁은 초반에는 페르시아가 승승장구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페르시아에게 불리해졌다. 러시아가 카자르 군대에게는 없는 근대식 대포와 무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술적으로 우위를 점한 러시아는 신나게 카자르 군대를 밀어붙였다. 열세에 몰린 파트 알리 샤는 예전에 영국과 맺은 군사 협정을 근거로[2] 근대식 무기를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영국은 그 조약의 대상이 프랑스가 적일 때에만 한정된다는 핑계를 대며 카자르 왕조를 도와주기를 거부했다.
영국에게 청한 도움의 손길이 좌절당하자 파트 알리 샤는 프랑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핀켄슈타인 조약'을 맺고 군사 원조를 요청했는데, 막 나폴레옹이 무기를 준비해서 보내주기 직전에 프랑스와 러시아가 휴전 협상을 맺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당연히 무기 원조는 허사로 돌아갔다. 그나마 영국이 마음을 바꿔서 카자르 왕조를 지원해주나 싶었지만 이마저도 무위로 돌아갔고 영국은 오히려 카자르 왕조에게 조지아를 포기할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프랑스와 전쟁을 끝내며 한숨돌린 러시아는 페르시아 전선으로 군대를 쏟아붓기 시작했고, 전쟁은 이란에게 불리하게만 돌아갔다. 1813년 초반에 러시아 군대가 란카란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고 같은 해에 타브리즈까지 다다랐다. 전쟁에서 패퇴한 카자르 왕조는 그해 '굴리스탄 조약'을 맺어 조지아의 모든 영토, 캅카스의 다게스탄 남부, 아제르바이잔 거의 전체를 러시아에 뺏겼다. 러시아는 파트 알리 샤가 죽으면 그가 지정한 후계자 아바스 미르자 왕자를 샤로 지지한다는 약속을 했지만 파트 알리 샤와 카자르 왕조에게 굴리스탄 조약은 역사에 남을만한 엄청난 치욕이었다.[3]
굴리스탄 조약이 체결된지 13년이 지난 1826년, 파트 알리 샤는 지난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로 결심한다. 영국의 조언가들이 계속 샤의 귀에 러시아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말들을 늘어놓았기 때문. 파트 알리 샤는 왕세자 아바스 미르자 왕자에게 3만 5천에 달하는 대군을 맡기고 7월 16일 전쟁을 선포했다. 초반에는 저번 전쟁과 마찬가지로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쿠, 쿠바, 렌코란 등 아제르바이잔 지방의 주요 도시들을 대부분 석권하는 데 성공했고, 저번 전쟁에서 잃어버린 영토 대부분을 되찾았다. 하지만 겨울이 닥치면서 상황이 또 역전됐다. 1827년 5월에는 러시아의 캅카스 총독이던 이반 파스케비차가 역으로 돌격하기 시작하며 다시 영토를 빼앗더니 10월 1일에는 예레반까지 뚫어버렸다. 예레반 함락 14일 후에는 타브리즈도 함락당했다. 1828년 1월에는 페르시아 내륙까지 진출해 러시아군이 우르미아 호수까지 진격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아바스 미르자 왕세자는 눈물을 머금고 1828년 2월 2일 황급히 '투르크만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투르크만차이 조약은 일전의 굴리스탄 조약보다 더 페르시아에 괴멸적인 결과를 몰고 온 조약이었다. 아르메니아, 아나톨리아 동부에 위치한 예레반 칸국, 나흐츠반 칸국, 아제르바이잔 남동부의 타일리시 칸국, 오르두바드와 무간 지방이 통째로 러시아 제국에게 넘어갔다. 이 조약으로 페르시아는 캅카스 영토 전부를 러시아에게 헌납했다. 게다가 이번 전쟁은 페르시아가 먼저 러시아를 침공한 것이었기에 1천만 루피의 금을 배상금으로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까지 붙었다. 그야말로 혹 때려다 혹 붙힌 셈. 러시아는 대신 아바스 미르자 왕자를 파트 알리 샤의 후계자로 인정해주었는데, 이는 연이은 전쟁 패배로 하도 파트 알리 샤와 아바스 미르자 왕자의 권위가 흔들리는 통에 러시아의 지지마저 없으면 파트 알리 샤 사후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랐던 탓도 컸다. 이 조약으로 수많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이란에서 캅카스 지방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1795년부터 이란으로 강제로 끌려와 살고 있었던 아르메니아인들 대부분이 사실상의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물론 반대로 카자르 왕조와 페르시아의 힘은 날로 약해졌다.
두 번이나 러시아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한 파트 알리 샤는 이후 러시아에 바싹 굽히면서 지냈다. 심지어 1829년 러시아 외교관이자 극작가였던 알렉산드르 그리보예도프가 테헤란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쿠스라우 미르자 왕자를 직접 니콜라이 1세에 파견해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보내고 그가 가진 보석들 중 가장 거대한 '샤 다이아몬드'를 전달할 정도였다. 고작 외교관 하나 죽었다고 이 정도로 사과하는 건 페르시아의 권위가 얼마나 실추되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파트 알리 샤가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박살난 이후 딱히 특기할 만한 행적은 없다.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 충격을 만회하기 위해 예술가들을 불러모아 자신의 치적을 미화한 '샤한샤나마'를 편찬하고 1833년 왕세자 아바스 미르자가 급사하자 그 대신 그의 아들 모하마드 미르자를 새로운 후계자로 지명한 것 정도? 파트 알리 샤는 모하마드 미르자를 새 후계자로 지명한 지 1년만에 사망했다. 이후 페르시아의 왕위는 모하마드 샤 카자르가 계승한다.
3. 여담
- 무엇보다도 이색적인 외모로 유명한 샤한샤이다. 잘록한 허리 아래까지 닿는 기다랗고 검은 수염이 워낙 눈에 띄기 때문. 이 수염 덕분에 그 어떤 초상화에서도 한 눈에 알아보는 게 가능하다. 패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기다란 로브, 하이힐, 기다란 수염 등 페르시아의 전통적인 옷차림을 고수했던 마지막 샤이기도 했다. 후임자들은 모두 서구화와 근대화의 영향을 받아 서구식 예복을 차려입었기 때문이다. 외모에 신경을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인상 자체는 확실히 뚜렷했던 걸로 보인다. 스코틀랜드의 정치가 존 말콤이 '중간 체격 이상, 나이는 30살이 조금 넘는다. 안색은 오히려 정정하며 이복구비는 단정하고, 민첩하고 지성적인 표정이다'라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을 정도였다.
- 안타깝게도 위의 호의적인 평가는 그의 치세 초반부에만 해당되는 내용이다. 파트 알리 샤가 러시아에게 두 번이나 털려나가자 유럽의 역사가들도 그에 대한 평가를 대폭 하향수정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파트 알리 샤가 지성적이고 현명한 명군이라고 칭송하다가 나중에 가면 게으름이 많고 탐욕스러운 왕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 테헤란의 네가레스탄 궁전 지하 욕탕에 있던 하렘 미끄럼틀이 유명하다. 여색을 좋아하던 파트 알리 샤가 애용하던 미끄럼틀이라는데, 하렘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알몸으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샤의 품 안으로 다이빙하는 용도였다고 한다. 미끄럼틀 자체는 카자르 왕조가 망한 뒤 들어선 팔라비 왕조의 레자 샤 팔라비가 없애버렸다고. 다만 이 하렘 미끄럼틀은 유럽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에로틱 환상이 뒤섞인 근거없는 주장이라 확실한 건 아니다.
- 여색을 대단히 밝혔다. 아내가 1,000여 명이 넘었고 공식적으로 기록된 왕자만 57명, 공주가 46명, 손자가 296명에 손녀가 292명에 달한다. 공식적인 황후는 4명에 그쳤지만 하렘에는 수 백여명에 달하는 첩과 비빈들이 상주했고 그가 죽을 당시 그의 자손들은 5,000여 명이 넘어갔다. 일부다처제를 인정했던 무슬림임을 감안할지라도 웬만한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다. 정력 하나는 대단했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