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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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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 (1933–1943)
Deutsches Reich

대독일국 (1943–1945)
Großdeutsches Reich

나치 독일
NS-Staat [1] / NS-Deutschland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나치 독일 국장.svg
국기 국장
Ein Volk, ein Reich, ein Führer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2]
상징
국가 독일의 노래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3]
위치
파일:나치 독일 지도(1942).svg
본토 | 국가판무관부 설치지 | 군정청 설치지 및 점령지
1933년 1월 30일[4] ~ 1945년 5월 9일[5]
수권법 통과 이전 히틀러 사망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 플렌스부르크 정부
연합군 점령하 오스트리아
역사
1920년 2월 24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창당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총리 취임
1933년 3월 24일 수권법 제정
1934년 8월 2일 아돌프 히틀러 퓌러 취임
1936년 3월 7일 라인란트 재무장
1938년 3월 12일 안슐루스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폴란드 침공)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사망
1945년 5월 2일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
1945년 5월 9일 완전 항복 및 멸망
지리
위치 중부유럽(영토), 서유럽, 동유럽, 북유럽, 남유럽 일부, 서아시아 일부, 북아프리카 일부(점령지)
수도 베를린[6] (1933 ~ 1945.5.23.)
인문환경
인구 86,755,281명(1939년)
109,518,183명(1940년)[8][9]
민족 독일인을 비롯한 각종 유럽인
언어 독일어
종교 가톨릭, 개신교
군대 독일 국방군
정치
정치체제 공화제, 일당제, 전체주의, 일당독재[10], 국가사회주의
여당
국가원수 대통령 (1933 ~ 1934)
퓌러[11] (1934 ~ 1945)
대통령 (1945)
정부수반 총리 (1933 ~ 1934)
퓌러 (1934 ~ 1945)
(1945)
경제
통화 라이히스마르크(ℛℳ)

1. 개요2. 서론3. 상징
3.1. 국호3.2. 국기 국장3.3. 국가
4. 경제5. 군대6. 역사
6.1.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1인 독재 수립6.2. 팽창주의
6.2.1. 전성기
6.2.1.1. 1942년 - 1943년
6.2.2. 몰락
6.2.2.1. 1943년 - 1945년
6.3.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과 멸망
7. 행정구역
7.1. 1937년까지의 행정구역7.2. 안슐루스 이후 추가된 구역7.3. 뮌헨 협정 이후 추가된 지역7.4.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가된 지역7.5. 그 외 지역7.6.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8. 역사적 손실
8.1. 독일인이 입은 손실8.2. 학문 문화의 손실
9. 대외 인식
9.1. 다른 시각
10. 정치
10.1.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10.2. 일당 독재10.3. 사회 분위기
10.3.1. 전통적 인식: 전체주의론10.3.2. 새로운 해석: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11. 대외 관계12. 나치 독일의 동맹국( 추축국)들13. 나치 독일이 침공한 나라들14. 나치 독일의 괴뢰국, 국가판무관부, 군정청, 보호령들15. 미디어
15.1. 기타 창작물15.2. 나치 전문(?) 배우
16. 관련 인물17. 나치 독일의 근간이나 사상 정립에 영향을 준 인물들18. 용어 및 사건

[clearfix]

1. 개요

파일:독일국 국회의사당.jpg
나치 독일 시기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던 크롤 오페라하우스(Krolloper)[12]
나치 독일 1933년부터[13] 1945년까지 유럽에 존재했던 나치당 치하의 독일을 이르는 말이다.

명목상 바이마르 헌법에 따른 통치를 하였으므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의 연장선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없앤 독재 국가였다. 당대 스스로를 칭한 국명은 제정이나 기존 공화정과 동일한 독일국(Deutsches Reich)이었고, 1943년부터 멸망할 때까지는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이라는 국명을 사용했다.

현대 독일은 이 시기를 NS-Staat[14]혹은, NS-Deutschland라고 부른다.

2. 서론

1930년대 나치의 사상적 기반과 선전 활동
나치 독일의 시작은 일반적으로 1933년 1월 30일 아돌프 히틀러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로 취임한 날로 여겨진다. 그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수권법을 통과시키며[15] 독일의 민주주의 체제를 무력화시킨 뒤, 독일 내 모든 야당들을 숙청했다. 1934년 8월 2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히틀러는 그의 대통령직까지 차지했고, 1934년 8월 19일 국민투표에서 히틀러가 독일의 퓌러가 되자 완전한 독재 국가인 나치 독일이 완성되었다.

집권 초기 나치 독일은 당시 대공황으로 심각하게 침체되어 버린 독일의 경제를 국가 주도의 군수산업, 중공업 육성 및 아우토반 건설과 같은 대규모 공공 사업으로 성공적으로 활성화하였고, 이를 통해 당시 독일에 만연하던 대규모 실업 문제를 해결하여 대중들의 폭넓은 지지를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나치의 극단적이고 호전적인 정치 이념으로 인해 나치 집권 후부터 독일에서는 유대인,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같은 나치에 반대하는 이들이 노골적인 탄압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다.

나치당의 주요 이념인 나치즘 인종차별 우생학, 반유대주의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세계 인종 중 백인계 아리아인, 특히나 독일인이 가장 우월한 민족이라 믿었다. 나치는 정신적·신체적 장애가 있는 자국민 수십만 명을 불임화시키거나 강제 격리했으며, 1935년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여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결혼 및 성관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유대인의 공무원 임용도 금지시켰다. 이러한 나치의 잔혹한 탄압으로 인해 예술, 과학, 경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 많은 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피해 해외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는 곧 독일의 국가적인 손해를 초래했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으로 자신감을 얻은 나치 독일은 독일어권 지역을 독일의 영토로 포함시키려는 목적으로 주변국들을 향한 팽창주의적 행보를 거듭하며 1938년 안슐루스를 시작으로 뮌헨 협정을 통해 주데텐란트를 획득하고 폴란드 침공을 통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게 된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승전을 거듭하면서 나치의 인종주의 정책은 더욱 극단화되었는데, 전쟁에서 얻은 광대한 점령지에 존재하던 많은 유대인들에 대한 탄압이 더욱 가혹해지다 못해 끝내 1942년 1월 20일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해결책(Endlösung der Judenfrage)이 절멸로 정해지자 유대인들과 나치에 반대했던 인물들은 모두 강제 수용소로 보내져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기계적으로 몰살 당했다. 현재 홀로코스트라고 알려진 이 학살은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규모의 조직적인 제노사이드였다.

독일이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자, 연합국은 나치당이 엄청난 규모의 전당대회로 세를 과시하던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범들을 처벌하기 위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나치가 무리하게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은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었고, 많은 영토들을 빼았겼으며 그곳에 살아가던 많은 독일인들은 강제로 쫒겨나게 되었다. 두동강 나버린 독일이 다시 통일이 되기까지는 4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야만 했다.

3. 상징

3.1. 국호

언어별 명칭
독일어 Großdeutsches Reich / NS-Deutschland
영어 Greater German Reich / Nazi Germany
한국어 대독일국 / 나치 독일( 표준어)
파쑈도이췰란드( 문화어)
일본어 大ドイツ国 / ナチス・ドイツ
중국어 大德意志國 / 納粹德國
프랑스어 Grand Reich allemand / Allemagne nazie
러시아어 Великогерманский рейх / нацистская Германия
스페인어 Gran Imperio Alemán / Alemania nazi
이탈리아어 Grande Reich Tedesco / Germania nazista
공식 국호는 이전 제2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때와 마찬가지로 Deutsches Reich(도이체스 라이히, 독일국)이었고 1943년에 Großdeutsches Reich(그로스도이체스 라이히, 대독일국)로 국호를 바꾸었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 독일(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land)이라는 명칭도 쓰길 바랐다고 하며, 2차대전에서 승리할 경우 국호를 대게르만국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으나 독일이 패망하며 실패했다.

본래 나치라는 표현은 민족사회주의 또는 국가사회주의, 국민사회주의(Nationalsozialismus) 등으로 번역되는 이념의 약칭으로, 당대에도 이러한 줄임말은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쓰였다. 전후에 와서는 당시 나치가 제창했던 '민족', '사회' 등의 명칭 자체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왜곡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공식 명칭보다는 '나치 독일(Nazi Deutschland)' 또는 '나치 정권(Nazi Regime)'으로 통칭한다. 나치 독일이 존재했던 시기를 부를 때는 ' 나치즘 시대(Zeit des Nationalsozialismus)'라고 부른다. 북한에서는 '파쑈도이췰란드'라고 한다. 대한민국 표준어로 풀이하면 ' 파시스트 독일'이라는 뜻.

" 라이히(Reich)"는 흔히 제국이라 번역하지만 오역으로, 제국에 상응하는 영향력이나 통치 체제를 전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한자에서의 '나라 국(國)[16]'과 유사한 의미를 가지며, 실제로 제국이나 왕국을 일컬을 때도 Kaiserreich(카이저라이히) 혹은 Königreich(쾨니크라이히)처럼 라이히 앞에 접두사를 붙인다. 그래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나치도 독일 제국 시대의 '도이체스 라이히'라는 국호를 그냥 뒀다. 그리고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이 공통적으로 독일국이란 국호를 사용한 것을 보면 여기서 쓰이는 라이히는 제국이나 왕국이 아닌 그냥 국(國)이나 국가(國家)라는 번역이 더욱 어울린다. 더불어 나치 독일은 명목상으로는 바이마르 공화국을 연장한 공화제 국가였기 때문에 군주국의 국호인 제국이란 국호는 어울리지 않는다.

제3제국(Drittes Reich)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제3'이란 의미는 신성 로마 제국 독일 제국에 이은 3번째 단일국가( 라이히)라는 의미다. 이 명칭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1933년 수권법을 제정한 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 이후 퓌러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1939년까지 스스로를 일컬을 때 쓰던 명칭이다. 흔히 히틀러나 나치당이 " 제3제국"이라는 명칭을 썼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연합군의 선동 등을 방지하기 위해 1939년부터 독일 안에서 금지한 명칭이었다. # 하지만 나치도 초기에는 엄연히 쓰던 명칭이고, 역시 연합군도 같은 뜻에서 나치 독일을 가리키는 대명사로 써서 현재 역사서나 전기(戰記), 다큐멘터리 등에서 공식 명칭이 아님에도 널리 쓴다.

제3제국이라는 표현은 현 독일에서는 사용을 지양하며, 꼭 사용해야 할 경우 무조건 큰따옴표 안에 넣어서 쓴다. 영어권에서는 'The Third Reich'라고 하며, Reich라는 독일어를 번역 없이 그냥 쓰고 있다. 나치 집권 과정을 직접 겪고 쓴 미국 저널리스트의 윌리엄 샤이러의 명서 '제3제국의 흥망'도 원제는 'The rise and fall of the Third Reich'이다.
국가사회주의적 의미
1938년 오스트리아와 주테텐란트 합병 이후 독일국을 뜻하는 단어

나치 정권 초기 대독일(Großdeutschland) 또는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이라는 용어는 비공식적인 용어였으나, 나중에는 이상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대독일국이라는 말은 특히 나치 정권의 팽창주의와 패권주의적 정책을 내포하고 있다. 전후 시기 이 용어의 사용은 주로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했다. 다양한 담론에서 사용되는 이 표현은 독일연방공화국이 독일 제국의 전통을 잇는 강대국이 되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기인한다. 오늘날 이 표현은 보통 역사적 담론에서만 보복주의와[17] 우익 극단주의 환경 밖에서만 사용된다. 그리고 때로는 정치적 적이 보복주의적이거나 우익 극단주의적인 환경에 가깝다고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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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sozialistisch
Deutsches Reich nach Annexion Österreichs und des Sudetenlands im Jahr 1938

Der vom NS-Regime zunächst inoffiziell, später als Fahnenwort verwendete Ausdruck Großdeutschland bzw. Großdeutsches Reich steht in erster Linie für die Expansions- und Hegemonialpolitik des NS-Regimes. Die Weiterverwendung des Ausdrucks in der Nachkriegszeit erfolgte mit überwiegend negativer Konnotation. In unterschiedlichen Diskursen schreibt dieser Ausdruck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unter anderem Großmachtbestrebungen in Fortführung der Traditionen des Deutschen Reiches zu. Der Ausdruck ist heute außerhalb revanchistischer, rechtsextremer Milieus nur im Diskurs über historische Gegebenheiten üblich und wird darüber hinaus gelegentlich gebraucht, um dem politischen Gegner eine Nähe zu revanchistischen, rechtsextremen Milieus zu unterstellen.}}}

- DWDS 사전의, '대독일' 및 '대독일국'의 국가사회주의적인 의미에 대한 설명 부분. #
같은 의미에서 대독일국(Großdeutsches Reich) 역시 나치 이데올로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간주하여 현 독일에서는 당연히 사용하지 않는다. 상술한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 독일 최대의 어휘정보시스템인 DWDS에서는 이 단어가 국가사회주의적인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동시에 '대독일'이라는 표현은 현 독일에서 우익극단주의적이나 보복주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현상이나 상대방을 지칭하는 경멸조의 단어로도 쓰인다. ' 나치'가 욕설로 쓰이는 것과 같은 맥락인 셈이다. 인터넷에서는 이 단어의 어감이 멋지다거나 공식 명칭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사용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데, 내포된 의미를 따져보면 사용을 지양하는 게 옳을 것이다.

3.2. 국기 국장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파일: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당기.svg
국기 당기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기. 문장이 왼쪽에 치우쳐 있으면 국기, 문장이 가운데에 있으면 당기였다.
파일:나치 독일 국장.svg
파일:파르티아이들러(당수리).svg
라이히스아들러(Reichsadler) 파르타이아들러(Parteiadler)
고개를 왼쪽으로 돌린 것이 국가수리인 라이히스아들러(Reichsadler), 오른쪽으로 돌린 것이 당수리인 파르타이아들러(Parteiadler)였다.
파일:나치 독일 국기(1933-1935).svg 파일:독일 국장.svg
1933년부터 1935년까지 동시에 사용된 국기와 국장
국기를 흑적금 삼색기로 규정한 바이마르 헌법 1조 3항 자체는 개폐정된 적이 없으나, 1933년 3월 12일 나치당 집권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포고령[18]에 따라 흑적금 삼색기는 더이상 사용하지 않고 비율만 3:2에서 5:3으로 바뀐 옛 독일 제국의 흑백적 삼색기와 하켄크로이츠가 그려져 있는 나치당기 두개가 이중 국기로써 채택되어 공식 석상에서 통용되었고 독일 국적 선박도 두 기를 다 달고 다녔다.

흑백적 삼색기는 나치당원들에게 소위 구 프로이센 융커들로 대표되는 "반동분자들의 깃발"로 지속적으로 공격 받아왔으며,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한 지 1년 후인 1935년 9월 15일에 사용이 종료되어 하켄크로이츠 기만이 나치 독일의 유일한 국기로 인정되었다. 새로운 국기법은 1935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연례 전당대회에서 발표되었는데, 이때 헤르만 괴링은 흑백적기가 오랜 영광을 누리긴 했어도 지나간 시대의 상징일 뿐이고 반동주의자들이 사용함에 따라 존재의 위협을 받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와 같은 변화의 또 다른 한가지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는 것은 1935년 7월 26일의 '브레멘 사건'이다. 상선 SS브레멘이 정박 중이던 뉴욕에서 일어난 반나치 시위로 인해 배에 게양되어 있던 나치당기가 훼손돼 허드슨 강에 던져진 SS 브레멘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독일은 미국에게 이 사건이 독일에 대한 모욕이라고 항의했으나 미국이 나치당기는 국기가 아니라 응답했다. 이처럼 흑백적기는 나치 독일 시기 사용되기는 했어도 정작 나치가 아니라 옛 독일 제국과 연관이 있었고 이것으로 나치들에게 "반동"이라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에 인해 일반적으로 나치 독일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다.

국기의 뒷면은 앞면의 좌우 반전이 아니라 180도 회전한 상태이다. 따라서 뒷면에서도 卍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오늘날 독일에서는 독일 형법 86조와 86a조[19]에 의거해 나치를 연상시키는 사물을 소지하고 내보이는 것은 학술 연구나 당시를 반영하는 영화 촬영 등의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불법이므로[20] 하켄크로이츠를 들고 다니다간 경찰에 체포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독일 내 네오나치 또한 하켄크로이츠를 함부로 들고 다니지 못한다.

서구권 내 다른 지역에서도 공공장소에서의 하켄크로이츠 게시는 불법으로 지정된 경우가 있으며, 불법이 아닌 지역에서도 대개 혐오 문장으로 취급된다. 이 문제 때문에 서구의 불교에서도 불교 상징물로 만()자 대신 오해를 살 여지가 없는 법륜을 쓴다. 만자는 세계적으로도 거부감 없이 쓰여지던 심볼이며, 전간기까지만 해도 유럽과 미국에서 행운의 상징으로 여겨져 새해 연하장에 자주 쓰이던 문자였다. 참고로 당시 독일에선 하켄크로이츠를 아리아인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기원은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툴레 협회의 상징을 사용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3.3. 국가

국가는 현재 독일의 국가인 ' 독일의 노래[21]'였지만 나치당의 당가인 '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도 사실상 국가처럼 쓰였다. 나치당 공식 행사에서는 1절을 부른 후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1절 혹은 2절을 부르는 순서로 주로 이루어졌으나, 그래도 독일 국방군 입단식이나 국제 대회에서는 '독일의 노래'만 제창한 빈도가 높았다.

4.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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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 시기 건설된 아우토반[22]
1941년의 베를린
나치는 대공황을 해결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상태였고, 이에 따라 대공황의 여파부터 해결해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패전 여파 및 대공황 등으로 실업률이 30% 수준으로 경제가 최악인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히틀러는 파탄난 경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규모 공공 사업을 벌였다. 그 결과, 경제성장률은 9%대로 치솟았고, 수백 만의 고용 인력이 창출되었으며, 실업률은 매우 낮아졌다. 그리고 독일 국가 은행 총재 얄마르 샤흐트 메포어음(Mefo-Wechsel)을 발행해 재정 적자를 해결해나갔다. 나치 정부가 기업에 상품을 발주하게 되면 나치 정부는 기업에 화폐 대신 이 메포어음을 지급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독일 국가 은행은 화폐를 추가로 발행함으로써 감내해야 하는 인플레이션 리스크를 더 이상 지지 않아도 되었다. 나치 지도부도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미래에 대한 막연한 약속만 있는 메포 어음으로 단기간에 빠른 경제 성장과 군사력 증강을 이루어냈고, 독일 기업들도 이자가 좋은 메포 어음을 신뢰하고 받아들였다. 그 덕에 전간기 기간 동안 무려 204억 마르크의 메포 어음이 발행되었다. #

한편, 나치는 기업과 정경유착을 단행했고 기업들과 노조간의 단체 교섭을 중단하고 임금을 낮은 수준에서 동결하고 국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의 막대한 편의와 혜택을 부여했다.[23][24] 그 결과 수많은 공공기업들이 민영화되었고 재벌들이 형성된다. 특히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에 독일의 자동차 산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 대가로 독일 기업들은 나치의 군비 증강 계획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이 금융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고 굳게 믿었고, 이에 따라 독일 증권 거래소는 폐쇄되고 독일인의 외국 주식 거래를 금지하는 법을 선포하기도 했다.

나치 정부의 이러한 노력 덕으로 독일은 단숨에 유럽 1위이자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 그러나 원자재가 부족한 것이 약점이었고, 또한 민간 노동 시장 창출을 위한 지출의 3배 이상, 독일 국민 소득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군사비 때문에 인플레이션 위험을 감내하고서라도 추가적인 화폐 발행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국가 예산을 훨씬 상회하는 정부 지출이 발생해 나치는 막대한 부채에 당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메포 어음을 막대하게 발행하긴 했는데 막상 독일 기업들에게 보증한 대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나치의 국가사회주의가 한계에 다다랐다.

얄마르 샤흐트는 군사비를 줄이는 것이 경제를 회생시킬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지만 히틀러와 나치 지도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전쟁을 통한 전시경제-약탈경제로 자국의 경제를 성장시키겠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었다. 히틀러의 생각에 전쟁을 통해 레벤스라움을 확보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하고 빠르게 메포 어음을 받은 독일 기업들에게 보증한 대로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진 뒤로 독일은 점령한 주요 유럽 국가들에서 국부와 자원, 노동력을 몽땅 약탈해가 경제력에 투입했으며,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업 지대도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유대인, 반체제주의자, 전쟁포로 등을 강제수용소나 기업들에 배치해 강제적으로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러나 독일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의 경제도 악화일로를 걷게 된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패전 이후 전시경제로 전환되고[25] 기존의 비효율적이었던 생산력도 급속도로 증가되긴 했으나 1944년 기준으로 독일의 군사비 지출은 국민 소득의 75%까지 오르게 되며 그 부담은 날로 커지고 있었다. 주요 산업 단지와 도시들은 연합군의 전략 폭격으로 인해 초토화되었다. 거기다가 특히 취약한 원유 수입을 비롯한 원자재는 루마니아 왕국 헝가리 왕국에 의존하고 있었는데, 그 두 나라들이 소련군의 공격에 의해 점령 또는 나치 독일과의 관계를 단절해 연합국 측으로 전향하게 되면서 독일의 생산 능력은 극도로 급감했다. 게다가 군수 무기 생산에 필요한 크로뮴, 니켈, 몰리브데넘, 망간 등의 주요 희귀 금속들이 고갈되어가는 바람에 더 이상 정상적으로 무기들을 생산할 수 없었다.

파일:Dresden-Bombing.png
초토화 된 드레스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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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베를린
1945년, 독일의 주요 도시는 전략 폭격에 더해 연합군과 소련군의 진격 아래에 철저히 파괴되었고,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 당하면서 독일의 경제와 사회는 처참하게 완전히 붕괴되었고 유럽의 최빈국 수준으로 전락했다. 결국 나치 독일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침략 전쟁을 결정했으나, 그 전쟁으로 오히려 경제가 철저히 파괴 당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었다.

5. 군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일 국방군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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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사

6.1.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1인 독재 수립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한 독일 제정이 무너지고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정 민주주의를 최대한 보장하려고 노력하였으나, 군주정에 익숙한 독일인들은 공화정 체제가 승전국들에 의해 강요된 체제라고 생각하며 거부하였다. 그나마 정부와 집권 사회민주당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애썼지만, 그때마다 대공황의 여파와 베르사유 조약의 독소 조항을 들먹이며 정부를 흔드는 좌우파의 극단 세력에게 시달렸다.

베르사유 조약의 경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미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너무 과하다고 여겨서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많은 금액을 탕감해주거나 해서 그렇게까지 무리가 되지는 않았다. 그리고 초인플레이션이 독일 국민에게 많은 고통을 안기긴 했으나 그 고통에 가린 중요한 이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런 초인플레이션 덕분에 1차대전 당시의 빚을 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가 정부가 망해버려 대금을 한 푼도 못 받게 되어 부채에 허덕이던 많은 독일 기업들은 부채를 사실상 탕감 받으면서 되살아났다는 점이다.[26] 그리하여 초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미국의 차관이 들어오자 독일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하며, 1920년대 후반이 되면 이미 서유럽에서 가장 많은 공업 규모를 다시 보유했다. 문제라면 당대의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적 발전은 미국의 도움이 크게 작용했는데, 세계 대공황이 미국에서 터지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경제를 뒷받침해주던 미국의 달러가 대거 이탈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졌고 정치적으로도 혼란스러워졌다. 사실 이것은 (소련 등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나라가 마찬가지였는데, 상당한 독일 국민들은 이런 위기는 극우나 극좌에 의해 모두 '무능한 정부' 탓으로 돌려졌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강력한 정치 세력을 찾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 때까지만 해도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다가 제대로 데이는 바람에 숨 죽이고 지내던 나치당과, 그 나치당을 이끌던 아돌프 히틀러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대공황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데다가 하인리히 브뤼닝 내각이 경제적으로 긴축 정책을 지속하여 지지율이 폭락해버렸고, 기준 좌우파 정당에 실망한 독일 국민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그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할 만한 대안으로 인식되어 1932년 7월 선거에서 대승을 하게 된다. 그 후 1932년 대선에서 다 늙어가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대통령이 되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를 포섭하여 1933년 힌덴부르크가 의회를 해산하게 만들고, 프란츠 폰 파펜과 연정을 통해 수상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가 제정한 법은 바로 수권법(授權法). 이런 상황에서 실질적으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는 붕괴되었다. 이후 나치당 외 정당을 해산하고 정당 신설을 금지하여 나치당은 국가 유일의 독재 정당이 된다.

1933년 3월 총선의 결과로 나치당이 득표율 44%, 의석수 45%를 차지해서 1당이 되었고 히틀러가 수상 자리에 올랐다. 즉 그때까지만 해도 과반수의 국민들은 나치당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반 년 후인 11월 총선 때는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이 금지돼서 의석수 100%를 달성한다.

사실 집권 초기나 3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인식이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 미국 학생들도 무솔리니, 히틀러 등을 존경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완전히 주적이 되는 영국 윈스턴 처칠,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도 이때까지는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한편 1936 베를린 올림픽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을 치르며 나치 독일에 대한 홍보도 크게 했다.

6.2. 팽창주의

재무장 시기에 군수공장을 시찰하는 나치 관료들

케인스적 경제 회생 정책을 통해 국내 사정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나치 독일은 외부로 시선을 돌린다. 첫 번째 목표는 국제 연맹이 관할하던 라인강 연안의 공업도시 루르를 되찾아오는 것이었다. 이곳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비무장지대가 된 곳이었다. 1936년 히틀러는 빈약한 무장[27]의 독일 국방군을 진주시키는 도박을 한다. 이는 조약의 위반 사항이었으나 전쟁을 피하려는 영국과 프랑스의 묵인 속에 이곳을 피 없이 되찾는 데 성공했다.

1938년 오스트리아 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선동하여 혼란을 조장, 오스트리아 정부를 무력화시켰다. 이후 독일 국방군을 진주시켜 오스트리아 국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오스트리아 연방국을 독일의 '오스트마르크 주'로 병합시켰다. 이를 안슐루스라고 한다.

1939년 3월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일인이 다수였던 주데텐란트를 독일령으로 할양하라고 체코슬로바키아에게 협박을 했고, 동년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를 달래기 위해 체코 영토였던 주데텐란트에 대한 독일의 합병을 수용하는 뮌헨 협정을 맺었다. 이로서 히틀러는 다시 협상에서 승리했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게 '더 이상 다른 유럽 이웃나라들의 영토를 요구하지 않겠다'라고 말했고, 그 서약서까지 영국과 프랑스에 제출했으나 실제로는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서약서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인 1939년 여름, 히틀러는 폴란드에게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국을 잇는 (역시 독일계가 상당수인) 단치히 회랑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전쟁을 염두에 두며 총동원령을 내리는 등 독일의 단치히 회랑 요구에 강하게 반발했다. 이에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또 방관할 것[28]이라는 생각을 했고, 폴란드와의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맺고 독일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을 개시했다. 더 이상 나치 독일의 깡패짓을 방관할 수 없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이 개막되었다.

6.2.1.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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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9월 1일에 시작된 폴란드 침공에서 독일군은 고작 1달만에 육군력이 강력했던 폴란드를 철저히 격파하고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으나 군사적 침공을 가할 생각은 없었던지라 가짜 전쟁이 이어진다. 이후 나치는 1940년 4월 9일에는 하루만에 덴마크를 점령하고 전광석화처럼 바다를 넘어 노르웨이도 침공, 점령했다. 이로써 발트 해에 갇혀 있었던 독일 해군은 대서양으로 나갈 출구를 확보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함대의 길을 열기 위한 이 작전으로 인해 독일 해군의 전력 태반이 파괴되었고 이 손실로 인해 독일 해군의 자랑인 샤른호르스트, 비스마르크, 그나이제나우 등 주력함이 보조함의 지원없이 작전을 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북방을 평정한 독일군은 1940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을 시작하였다. 프랑스군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마찬가지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예상했다. 그러나 낫질 작전으로 독일군은 프랑스군을 6주만에 패퇴시켜 항복을 받아냈고, 이는 당사자인 독일을 포함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히틀러는 영국과 종전 협상을 맺으려 했으나 영국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고[29], 독일은 공군을 동원하여 영국을 폭격하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 소기의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이에 히틀러는 공군을 늘리기보다는 먼저 소련을 정복하기로 결심했고, 몇 달간 부대들을 동부로 이동시켜 소련 침략 준비를 했다.

그 사이 이탈리아 왕국은 히틀러를 본떠서 친독 성향인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거꾸로 지면서 도리어 이탈리아의 식민지인 알바니아 남부까지 그리스에게 점령당하는 상황이 되자 독일에 구원을 청했다. 히틀러는 화가 머리 끝까지 났지만 동맹인 이탈리아를 구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1941년 4월에는 쿠데타로 친독 정권이 뒤집어진 유고슬라비아를 침공 크로아티아 독립국 등의 괴뢰국들을 세우는 한편 그리스를 순식간에 점령했다. 또한 발칸반도 국가들이 연합국으로 넘어가면서 지중해에서의 연합국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군단을 리비아로 파견해 이집트의 엘 알라메인 지역까지 몰아내는 성과를 거두었고 공수사단을 투입해 크레타를 점령하고 몰타섬의 영국군을 봉쇄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크레타섬에서 공수사단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이에 충격받은 히틀러는 공수작전을 금지시키기에 이른다.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동맹국 병력을 포함해 380만이란 대병력을 동원한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며 독소전쟁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초반에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30] 소련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독일 육군은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이래 프랑스군에게 당한 패배 이후로 거의 없던 참패를 겪었다. 거기에 일본 제국 진주만 공습으로 미군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나치 독일은 전략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31][32] 나치 독일이 자발적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버텼으면 미국 국내 여론의 압박으로 일본이 무너지기 전까지는 나치 독일에 대해 대대적인 공세를 단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고, 수 년 정도 시간을 벌고 소련전에만 전념하면서 대비책을 마련할 기회가 있었음을 고려한다면 제 무덤을 팠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는 기존의 학설이었고, 최근엔 오히려 히틀러가 최적의 시기에 소련을 침공했다는 의견도 있다. 만약 수 년 정도 시간을 두고 공격했다면 소련 또한 대숙청에서 회복할 시간을 얻을 테고, 그렇게 되면 승리하기가 어려워지기 때문.[33]
6.2.1.1. 1942년 - 194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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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6월의 전황.[34]

이듬해인 1942년 봄과 여름에 나치 독일은 다시 전세를 회복했다. 수도 모스크바 대신 소련의 남부를 공략하여 석유와 기타 지하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블라우 작전(청색 작전)이 진격 속도를 높이며 성공을 거두었지만, 무난히 점령할 것이라 생각했던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붙들리고 말았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결국 여기서 소련군의 역포위에 걸려 자국 군대와 동맹국 군대를 포함하여 최소 수십만의 인명 손실이 발생했고 장비의 손실도 막대했다.[35] 이로써 동부전선의 균형추는 소련 쪽으로 기울어 버렸다. 그러는 동안 이탈리아를 구원하기 위해 북아프리카 전역으로 파견한 에르빈 롬멜 북아프리카 군단도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선과 영국 해군의 지중해 장악으로 힘을 잃어버렸고 이를 기다린 몽고메리의 제8군이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전선이 붕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이 횃불 작전을 펼쳐 튀니지를 점령하며 북아프리카 군단 전체가 영국군과 미군에 섬멸당하며 북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지중해 전선에서 완전히 연합국에게 밀리게 된다.

6.2.2. 몰락

6.2.2.1. 1943년 - 1945년
파일:1943-07-01GerWW2BattlefrontAtlas.jpg
1943년 7월 1일의 전황.[36]

1943년으로 넘어오면서 전황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아직은 독일군이 건제했던 1943년 2월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홀리트 분견군이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잠시 소련군의 예봉을 꺾기도 했으나, 히틀러는 이걸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가져온 것으로 오판하고 역으로 무리해서 성채 작전을 벌였다가 1943년 7월에 벌어진 쿠르스크 전투에서 참패하고 8월에 소련군이 역으로 벌인 드네프르 강 공세로 인해 전선이 드네프르 강까지 밀려버린다. 이후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잡는 일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없어지게 된다.

이후 한 번 기울어진 전세는 다시는 뒤집히지 않았다. 서방 연합군은 독일군이 쿠르스크에 정신이 팔린 틈을 타서 이탈리아에 상륙했고, 베니토 무솔리니 정권은 무너져 버렸다. 무솔리니 정권이 무너지자 독일은 이탈리아 북부를 재빨리 점령하고 이탈리아군을 무장해제시킴과 동시에 오토 스코르체니를 투입해 무솔리니를 구출, 괴뢰국 살로 공화국을 건국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의 남북으로 길쭉한 지형을 이용해 방어 태세에 나서는 발 빠른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결국 1943년 겨울 소련군의 드네프르-카르파티아 공세로 인해 남부집단군이 격파 당하면서 우크라이나를 빼앗겨 버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44년 6월 6일에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서방 연합군이 프랑스에 진출했고, 6월 22일에는 동부에서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펼쳐 독일 중부 집단군을 분쇄해 버렸다. 이로 인해 나치 독일의 영토는 독소전쟁 이전의 수준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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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부터 1945년까지 소련군과 연합군의 유럽 공세를 정리한 지도. 위 지도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쫙쫙 밀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와중에 1943년과 1944년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이탈리아, 루마니아, 불가리아,[37] 핀란드[38]가 독일과의 동맹 조약을 파기하고 연합국에 항복하여 연합국의 편에 서서 총부리를 독일 쪽으로 돌렸는데[39], 이로써 독일의 편은 헝가리와 일본만 남았다. 그나마도 태평양은 별개의 전역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헝가리를 제외하면 유럽 전역이 독일에 등을 돌린 것이다. 이들 동맹국들을 잃게 되자 독일 공군과 육군 기갑부대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게다가 헝가리 역시 1944년 10월, 루마니아와 비슷하게 호르티 미클로시의 지휘 아래 연합군에 투항하려고 했으나 슈코르체니가 호르티 제독의 아들을 납치한 데다가 독일군 역시 적극적으로 개입했기에 이는 실패했고 헝가리에는 친독 괴뢰국 헝가리 국민단결정부가 수립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역시 부다페스트 공방전으로 소련군에게 점령 당하며 멸망하여 독일의 노력은 수포가 되었다. 한편 남은 또 다른 동맹국 일본 제국은 애초에 멀리 떨어져 있어 독일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게다가 영원히 독일 통제 아래에 있을 것 같았던 폴란드에서조차 바르샤바 봉기가 벌어지는 등 나치 독일의 상황은 혼란스럽게 그지없었다. 그나마 바르샤바 봉기는 독일이 성공적으로 진압하기는 했지만, 얼마 뒤 독일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폴란드를 상실하면서 큰 의미가 없었다.

이에 히틀러는 동부전선의 정예부대들을 다수 서부전선으로 차출하여 병력을 모은 뒤 연합군의 보급 물자가 들어오던 네덜란드의 안트베르펀 점령을 목적으로 1944년 12월 아르덴 대공세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히틀러와 알프레트 요들 등 일부 독일군 장성들은 안트베르펀을 점령하면 노르망디를 제외하고 북프랑스 인근에 연합군의 보급항이 없으므로 보급을 끊어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무리한 공세를 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고, 당시 미군의 아르덴 방면 방비가 허술했으며, 날씨 또한 매우 좋지 않아 연합군이 공군을 적극적으로 동원하지 못했기에 여기에 약간의 희망을 걸어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발터 모델이나 핫소 폰 만토이펠 등이 수없이 경고했듯이, 당시 독일군의 보급 문제는 처참했고 본질적으로 제공권도 연합군 측에 완전히 장악되었던지라 결국 공세는 얼마 못 가 실패했다.

오히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 구멍이 나 버렸고, 이에 소련군은 쉽게 독일 영내로 진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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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5월 8일 항복 시점에 독일군이 통제하고 있던 지역.[40]

1945년 1월 소련군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실시, 비스와 강을 건너 독일 본토로 진격했다. 이 즈음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봄의 새싹 작전이라는 마지막 발악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했다. 이후 소련군은 1945년 5월 2일 베를린을 함락시켜 베를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았다. 히틀러는 베를린에서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4월 30일 지하 벙커에서 자살했으며, 1945년 5월 8일에 카를 되니츠가 수반으로 있는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국에게 무조건 항복을 했다. 단, 이와는 별개로 플랜스부르크 정부 자체는 5월 23일까지 존속했으며 이후 해체되고 독일의 전 지역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놓인다.

참고로 항복 당시 독일군의 통제하에 놓여 있던 지역은 노르웨이,[최북단] 덴마크 및 북독일 극소수 지역, 남독일,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 일부 지역,[42] 그리고 저 멀리 있는 쿠틀란드 포켓[43]이 전부였다. 이 외에도 네덜란드 북부나 프랑스의 항구도시 라 로셸[44]등 유럽 전역에 소수의 독일군이 잔존하며 통제를 이어가고 있었지만 전황에는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45]

6.3. 플렌스부르크 정부 수립과 멸망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으로 나치 독일은 사실상 멸망했으나 그 껍데기는 며칠 더 수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4월 20일, 자신의 마지막 생일을 맞고, 4월 29일 자살 하루 전에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4월 30일에 히틀러는 자신의 퓌러 자리를 총리와 대통령으로 나누어 총리직은 파울 요제프 괴벨스에게, 대통령직은 카를 되니츠에게 맡기라는 유언을 남기고 에바 브라운과 자살했다. 곧 괴벨스가 히틀러의 뒤를 따라 자살하면서 얼떨결에 나치 독일의 수장이 된 되니츠는 자신의 사령부가 있는 덴마크 인근의 발트해 군항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구성했다. 다른 나치 고관들과 마찬가지로 되니츠는 서방과 단독 강화를 맺고 소련군과는 계속 싸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은 독일의 주권은 보전하되 서방과 소련 모두에 대한 무조건 항복을 선행조건으로 하기로 합의했고, 단지 항복 이후 처리에 대해서만 논의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이는 되니츠의 망상에 불과했다.

5월 4일 되니츠는 자신의 부하인 프리데부르크 제독을 랭스에 있는 아이젠하워 사령부로 보내 항복 협상을 개시했으나, 실제로는 의도적으로 협상을 질질 끌었다. 다만 이것은 독일이 무슨 협상력이 남아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하고 싶었다기 보다는 이미 패배가 확정된 상황에서 독일군 장병이나 독일 민간인들이 소련군이 아니라 서방연합국 관할 지역으로 도피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미 서로 이 문제에 대해 협의까지 했던 연합국 측에서는 이것을 용납할 수 없었고, 서방 측으로 도망 오는 독일군은 발포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그리하여 5월 7일 랭스에서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은 연합국에 대한 항복 문서에 정식으로 서명했다. 다만 서명이 랭스 현지 시각으로 새벽 2시 30분에 이루어지면서 약간의 문제가 생겼는데, 이게 모스크바 기준으로는 새벽 4시 30분의 일이라 소련 본국에서 훈령을 보내줄 만한 수뇌부들이 모두 자고 있었던 것. 사인을 안 하면 소련이 공식적인 항복 문서에 참여하지 않은 것이 되고, 그렇다고 스탈린의 허가 없이 사인하면 서방연합국 주도의 항복 조인식을 인정한 셈이니 어느 쪽으로 결정하건 매끄러운 해결책은 아니었다. 만약 스탈린이 이것 때문에 분노할 경우 최소 굴라그 행이요, 재수 없으면 처형까지도 갈 수 있었다. 아이젠하워 사령부에 파견 나왔던 소련군 연락장교 이반 수슬로파로프 대장은 고민 끝에 결국 서명에 참여했다. 다행히 모스크바에서도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여 일단 전쟁이 이렇게 끝난 셈이 됐다.

다만 스탈린은 어찌됐건 전쟁을 이끈 국가로써 독일의 항복을 직접 받고 싶었는지 "항복은 적국의 수도에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하며 베를린에서 다시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다음 날 독일의 수도이자 주코프의 사령부가 위치한 베를린에서 다시 동일한 항복 문서에 대한 조인식이 열렸다. 이번에는 빌헬름 카이텔이 독일을 대표하고 게오르기 주코프가 소련을 대표하여 조인하였다. 물론 이전에 결정된 항복을 소련이 다시 추인하는 것에 불과했기에 그 하루 동안 소련이 독일을 상대로 뭘 하지는 않았다.

이런 결과는 소련을 배제하고 서방연합국만을 상대로 항복 협상을 진행하려던 독일측의 계획[46] 때문이었다. 문제는 소련군은 1000만에 가깝고 독일군은 100만 이하인 데다 이미 수천 만을 갈아넣어 좀 더 죽어도 감수할 만한 상황이던 소련이 서방과 휴전하고 그쪽 병력을 투입해서 전력으로 저항하는 정도를 크게 의식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저항한다고 쳐도 결국 소련에도 무조건 항복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게 뻔했고, 둘 다 항복으로 끝내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인 결정이었다.

플렌스부르크에는 서방 연합국이 들어왔고, 당시 서방측은 되니츠 정부를 정식 정부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한동안은 슈츠슈타펠 대원이 미군 트럭의 교통정리를 하고, 독일군과 미군이 함께 정부청사의 경비를 서는 기묘한 광경이 10일 남짓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 때문에 2,900만 명이나 사망해서 전범들을 철저히 처벌하려고 이를 갈던 소련은 이런 행태를 참지 못하고 서방연합국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후 서방연합국과 소련은 플렌스부르크 정부를 해산하기로 합의하고 5월 23일 각료들을 체포, 전범 혐의자들은 기소하고 나머지는 돌려보냈다. 이것으로 나치 독일은 완전히 멸망하였다.[47]

7. 행정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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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91919><width=33%> 베를린 ||<width=33%>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width=33%> 메클렌부르크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함부르크 베저 엠스
동하노버 남하노버브라운슈바이크 쿠르헤센
헤센나사우 베스트팔렌노르트 베스트팔렌쥐트
에센 뒤셀도르프 쾰른아헨
모젤란트 베스트마르크 바덴
뷔르템베르크호엔촐레른 슈바벤 뮌헨오버바이에른
바이로이트 프랑켄 마인프랑켄
튀링겐 막데부르크안할트 할레메르제부르크
작센 오버슐레지엔 니더슐레지엔
포메른 동프로이센 단치히서프로이센
바르텔란트 주데텐란트
오버도나우 니더도나우 슈타이어마르크
캐른텐 잘츠부르크 티롤포어아를베르크
}}} ||

본래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까지 독일은 주(Land / Staat)와 같은 행정 명칭을 사용했지만, 나치가 집권한 이후 가우(Gau)라는 명칭을 도입[48]하여 행정 구역을 재편성했다. 이러한 행정 구역 재편성에는 크게 2가지 목적이 존재했다. 하나는 신성 로마 제국 시기에 사용됐던 행정 명칭을 재도입하여 과거의 향수를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자극시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무부 관할의 행정구역과 나치당 휘하의 당 관구를 일치시켜 당의 업무를 좀 더 손쉽게 진행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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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이 여러 차례에 걸쳐 침략 전쟁을 통해 팽창해갔으므로, 가우도 시기에 따라 조금씩 변화해갔다. 위의 지도에서 보라색 영역은 총독부(General Government)를 제외한 1937년까지 독일의 영토였으며, 녹색 영역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폴란드를 합병한 이후에 새로 추가된 구역이다. 이 외에도 프랑스 침공 이후 획득한 알자스-로렌 영역 및 기존 가우에서 새로운 가우를 신설하려는 계획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 대전이 격화되면서 실현되지 못한 경우도 존재한다.

7.1. 1937년까지의 행정구역

명칭 주도 비고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Holstein
베저엠스
Weser-Ems
올덴부르크
오스트하노버
Osthannover[49]
뤼네부르크
함부르크
Hamburg
함부르크
메클렌부르크
Mecklenburg
슈베린
포메른
Pommern
슈테틴
동프로이센
Ostpreußen
쾨니히스베르크
에센
Essen
에센
베스트팔렌노르트
Westfalen-Nord[50]
뮌스터
쥐트하노버 브라운슈바이크
Südhannover[51]-Braunschweig
하노버
마그데부르크안할트
Magdeburg-Anhalt
마그데부르크
마르크 브란덴부르크
Mark Brandenburg
베를린[52]
베를린
Berlin
베를린
뒤셀도르프
Düsseldorf
뒤셀도르프
베스트팔렌쥐트
Westfalen-Süd[53]
보훔
쿠어 헤센
Kurhessen
카셀
튀링겐
Türingen
바이마르
할레마그데부르크
Halle-Magdeburg
할레
쾰른 아헨
Köln-Aachen
쾰른
모젤란트
Moseland
코블렌츠 원래 명칭은 코블렌츠 트리어(Koblenz-Trier). 1940년 룩셈부르크 합병 이후 명칭이 변경되었음
헤센나사우
Hessen-Nassau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54]
마인 프랑켄
Mainfranken
뷔르츠부르크
작센
Sachsen
드레스덴
니더 슐레지엔
Niederschlesien[55]
브레슬라우
오버슐레지엔
Oberschlesien[56]
카토비츠[57]
베스트마르크
Westmark[58]
자르브뤼켄 라인란트-팔츠에다 자르(Saar), 로렌(Lorraine) 지역을 합쳐서 편성
바덴
Baden
카를스루에 알자스 지역과 합쳐 나중에 오버라인[59]으로 재편성. 주도도 스트라스부르로 변경.
뷔르템베르크 호엔촐레른
Württemberg-Hohenzollern
슈투트가르트
프랑켄
Franken
뉘른베르크
슈바벤
Schwaben
아우크스부르크
바이에른오스트마르크
Bayern-Ostmark[60]
바이로이트
뮌헨오버바이에른
München-Oberbayern[61]
뮌헨

7.2. 안슐루스 이후 추가된 구역

명칭 주도 비고
케른텐
Kärnten
클라겐부르크 1941년 이후로는 슬로베니아 속령으로 편성.
니더 도나우
Niederdonau[62]
크렘스 1939년 이후로는 모라비아 속령으로 편성.
잘츠부르크 잘츠부르크
슈타이어마르크
Steiermark
그라츠 1941년 이후로는 슬로베니아 속령으로 편성.
티롤포어아를베르크
Tirol-Vorarlberg
인스브루크
오버도나우
Oberdonau[63]
린츠[64] 1939년 이후 보헤미아 속령으로 편성.

7.3. 뮌헨 협정 이후 추가된 지역

명칭 주도 비고
주데텐란트
Sudetenland
라이헨베르크[65] 뮌헨 협정에 따라 편성됨.
뮌헨 협정을 파기하고 독일에 의해 점령된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영토는 가우가 아니라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과 괴뢰국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이 된다.

7.4.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가된 지역

명칭 주도 편성연도 비고
단치히베스트프로이센
Danzig-Westpreußen
단치히 1939년 베르사유 조약 이전 독일의 영토.
바르테란트(편성 당시에는 포젠)
Wartheland
포젠 1939년 베르사유 조약 이전 독일의 영토.
플란데른
Flandern
안트베르펀 1944년 벨기에 영토 중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플란데런 일대를 묶어서 편성.
발로니엔
Wallonien
나뮈르 1944년 벨기에 영토 중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왈롱 일대를 묶어서 편성.

7.5. 그 외 지역

이 외에도 레벤스라움의 확보를 위해서 덴마크, 네덜란드, 세르비아, 폴란드 곳곳에 가우를 신설할 계획이었으나 2차 대전으로 인해 무산됐다. 해외 영토로는 남극 노이슈바벤란트가 있었으나, 실제로 영유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7.6. 세계수도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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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역사적 손실

체코 또한 특유의 공업 때문에 무기 생산 기지용으로 노예 수준의 취급을 받긴 했으나 절멸 정책은 이루어지 않았다. 그러나 나치 독일이 독일 민족의 역사적 진출 방향이라는 이유로 처음부터 레벤스라움의 중심지로 설정했던 동유럽이야말로 본격적인 강제 추방, 집단 학살, 노예화 삼박자의 제노사이드 정책의 중심지가 되었다. 예외적으로 크로아티아 발트 3국[66]처럼 어쩌다 히틀러 눈에 들어서 피해를 면하고 우등국민 취급을 받거나 헝가리처럼 대전 전부터 최우방인 국가도 있었다. 역설적인 점은 이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독일 제국, 러시아 제국이 분할하고 있었던 중동부 유럽은 실제로 중세 이후로 독일계 이주민들을 대거 받아들이고, 지속적인 문화적, 경제적 교류를 따라 2차 대전 이전만 하더라도 독일어가 인텔리 계층의 보편 언어로 대접 받을 정도로 독일의 문화적 영향력이 깊숙한 곳이었다. 그러나 2차대전의 시발점이 된 단치히(지금의 그단스크)만 하더라도 전후 재건 과정에서 일부러 '독일색'이 나는 건물들은 다 싸그리 밀어 버리고 죄다 '폴란드 민족 전통적'이라고 판단된 디자인으로 구시가지를 다시 지었을 정도이다.[67] 종교적인 면에서도 독자적인 종교개혁 역사를 갖고 있는 체코 정도를 제외하면 아일랜드 공화국과 비슷하게 종교개혁[68]에 대한 인식이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전후 독일인들은 심지어 나치와 전혀 관계 없는 수백 년 전의 프로이센 왕국의 역사마저도 군국주의의 색채가 짙으며, 민족주의를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69] 제대로 역사 교육을 시키는 걸 학교에서 주저할 만큼 철저하게 민족주의와 국가주의가 거세되어 버렸다.

또 여기에 더해 오데르-나이세선 이동의 모든 영토를 상실 했으므로 독일인의 영역은 중세의 동방식민운동이 이루어지던 12세기 즈음으로 축소되고 말았다.

8.1. 독일인이 입은 손실

독일의 재앙
Die deutsche Katastrophe
- 나치 독일에 대한 독일 사학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평가이자 그의 저서의 제목. 제5대 독일 총리 헬무트 슈미트가 인용한 말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독일은 다른 나라들 이상의 거대한 손실을 입었다.[70] 영토가 연합국의 의도와 냉전이라는 시대상이 겹치며 독일연방공화국 독일민주공화국으로 분단되었으며 반 세기가 지난 1990년에 가서야 다시 통일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계 기술과 철학의 요람이었던 독일에서 수많은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이 빠져나가게 되면서 미국은 물론 변방 국가로 취급되던 소련과 비교해도 순수 학문과 기술 분야에서 확연히 뒤쳐지게 되었다.

인명 피해도 심각했는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사망하거나 실종된 독일인은 최소 500만에서 많게는 700만 명에 이르렀다. 그나마 전후 동부 지역, 외국에서 피신하거나 추방된 독일인들이 대부분 서독에 정착하여 전쟁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메꾸고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긴 했으나, 전후 초기에는 오히려 부양 부담이 증가하여 사회 혼란이 더 심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독일어권 국가인 오스트리아와도 다시는 합칠 수 없어진 것은 덤이다.

또한 동서독 분단 및 오스트리아의 재독립 외에도 또 다른 영토 손실이 뒤따랐는데, 동프로이센 전역과 슐레지엔,[71] 포메른의 중동부 3/4(힌터포메른),[72] 브란덴부르크의 동부 1/3(노이마르크) 및 작센의 극히 일부가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되었다. 즉, 패전으로 인해 독일은 중세와 근세에 걸쳐서 독일인들이 꾸준히 넓혀왔던 국토의 대부분을 잃었다.[73] 1914년의 독일 제국의 영토 대비 현재의 독일 영토는 66%에 불과하며 1/3 이상이나 줄어들었다. 물론 서독은 냉전 기간 내내 동프로이센이나 포메른, 슐레지엔 등 이전 영토들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했지만, 1990년 독일 재통일 과정에서 독일 통일의 최종 권한을 가지고 있던 미영불소 4개국이 2차 대전 이후 설정된 독일-폴란드 국경선인 오데르-나이세 선을 승인하지 않으면 독일의 통일을 허락해주지 않겠다며 압박했고, 결국 독일은 통일을 조건으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이들 지역에 대해서 정부 차원의 영유권 행사는 영구적으로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74]

게다가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등 외부 영토에서 살던 독일계 주민들이 해당 영토에서 완전히 쫓겨나면서 동유럽에 광범위하게 남아 있던 독일어권은 소멸하였다. 수십 개의 국가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유럽, 그 중에서 중앙 부분에 위치한 독일이 동유럽의 독일어권을 잃은 건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손실이다. 이렇게 구 동부 영토를 상실하고 주데텐란트를 비롯한 외국의 독일계 커뮤니티가 축출되면서 약 1,200~1,600만 명의 독일인 실향민들이 발생하였다.

나치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는 전후 독일인들에게 영구적인 죄의식을 남기기도 했다. 아무런 잘못이 없는 현세대와 미래 세대에도 이러한 나치 시대에 대한 낙인은 굴레처럼 남아있다. 현재 독일은 세계 4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음에도 추축국이라는 오명으로 인해 외교 정책에서도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서유럽 열강들처럼 강경한 입장을 독자적으로 견지하지 못하고 설령 하더라도 영국과 프랑스를 따라서 행동하고 있으며 자국의 역량을 온전히 펼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독일 재통일 이후에 감축했던 독일 연방군에 대한 국방 예산 재증강에 나서고 반러시아 강경 노선으로 외교 정책을 전환한 것이 그나마 위안인 상황이다.

'당대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영웅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다소나마 만회한 것도 사실이고, 대공황으로 발생된 빈곤 문제도 해결하고 있었으며 윈스턴 처칠조차 히틀러 집권 초기에는 국가 안정 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전쟁 이전에만 하더라도 베를린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국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의 선망을 얻었고 심지어 노벨 평화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또한 1940년 프랑스를 꺾고 영국을 빈사로 몰아넣던 때만 하더라도 독일 민중들은 히틀러와 나치당의 능력을 신화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국제 정세와 국력을 고려하지 않은 비현실적 팽창주의는 필연적으로 전쟁으로 이어졌고, 초기 승리에 취한 히틀러 등 몇몇 인사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결국 패배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예정된 파멸로 끌려갔다. 결과적으로 중후반부의 실정으로 인한 국가적 손실이 전반부에 이룩한 약간의 성취로는 도저히 덮을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다 보니, 현대 독일에서 나치는 금기어이자 가장 모욕적인 욕설 중 하나로 여겨진다.[75]

나치 독일은 영내의 유대인이나 롬인들 뿐 아니라 독일인 반체제 인사들도 가차 없이 숙청했다. 전술적으로는 동부전선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 고수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들을 내림으로써 피해를 가속화했으며, 막판에는 노약자들까지 포함한 전 국민 징병제를 실시했다.[76] 이런 형국이니 일반 군인들로서는 목숨 걸고 조국에 반하여 싸우든가, 아니면 울며 겨자 먹기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아돌프 히틀러의 광기가 저지른 죄악이 전황이 역전됨에 따라 아무 잘못 없는 민간인들에게 돌아왔으니 소련군과 현지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77] 뿐만 아니라 전쟁을 질질 끌다가 결국에는 패전하여 전 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독일 민족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독일의 정치적 위상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사실 '과거보다 더 안정적인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다. 원래 외교에서 약속이란 공허한 것이라, 미래에 정말 그 땅이 필요하고 그럴 역량도 충분하다면 과거의 조약 따윈 엎어버리면 그만이다. 현대 독일이 영토 회복을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옛 독일이 군사적 팽창을 통해 달성하고자 했던 대전략 목표 대다수를 유럽 연합 체제 하에서 실질적으로 성취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럽 연합이나 NATO의 동방 경계는 독일 제국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보장받았던 수준에 필적하며,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강압적인 통치로 온갖 파르티잔들에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훨씬 안정적으로 협조적인 현지 정부와의 교섭이 가능하다. 독일인의 생활권이라는 취지의 레벤스라움은 좁은 의미에서 유럽연합 솅겐 협정을 통한 이동의 자유로, 경제적 영토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에서 유럽의 경제적 통합을 통해 실현되었으며, 보호무역주의가 판치던 당대와는 달리 자유무역이 대세가 되면서 주변국을 무력으로 압박하지 않고도 물건을 판매하는 것이 가능하다. 게다가 역내 다른 열강들이 몇몇을 제외하곤 죄다 적성국이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독일은 프랑스의 혈맹이고 영국과도 좋은 관계이며, 네덜란드, 폴란드, 체코 등 기타 유럽 주변 국가들도 독일과 관계를 개선해 현재는 우방이 되었으니 외교적 지형도 과거보다 훨씬 유리하다. 유럽 연합을 두고 제4제국 소리도 나오는 판에, 독일이 미치지 않은 이상 이제 와서 실지 회복을 외칠 이유는 없다. 지금은 오히려 러시아가 팽창주의적인 목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큰 사건을 일으켜 스스로 나치의 길을 걷고 있으며, 지금은 오히려 독일 폴란드가 합세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며 러시아를 막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리고 서방연합국들 또한 독일의 비나치화를 철저히 요구하되 독일이 원하는 바를 일정 부분 들어줌으로써 독일 내 극단주의 세력이 발호할 명분을 없애주고 있다.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의 범죄에 보복하고 압박하고 모욕하는 것으로는 결코 제2차 세계 대전과 같은 미래의 전쟁을 막을 수 없으며, 독일은 물론 역내 모든 주요국들에게 '전쟁보다 더 나은 평화'라는 이상을 보여주어야 영속적인 평화가 보장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8.2. 학문 문화의 손실

나치당 휘하의 독일은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유대인 탄압을 피해서,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스위스, 프랑스, 그중에서도 특히 영국 미국 등 타국으로 망명했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조차 중립국인 스위스에서조차 위험함을 느껴서 미국으로 가지 않았는가? 미국의 로켓 기술은 독일의 V2를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 밑천을 닦고. 물론, '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 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나 수학에서 이런 경향이 심한데,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수학의 중심이었던 괴팅겐 대학이 나치 때문에 몰락하고, 학자들은 모두 타국으로 가게 된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이런 상황을 보고 괴팅겐에 더 이상 수학은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그래도 현재는 순수 과학 분야의 막스 플랑크 협회 연구소와 응용 과학 분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MP3도 알고 보면 독일 '프라운호퍼'의 기술이기도 하다. 말인 즉슨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의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과학 기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퍼붓는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걸로 보인다. 특히나 로켓 기술 분야는 개발진이 미국과 소련, 영국으로 넘어가버렸고 각종 규제도 가해지면서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78]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받았으며, 결국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79]

프리츠 하버 비료를 개발해 인류를 배고픔에서 구해내고 조국을 위해 독가스까지 개발한 사람이건만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했고 결국 하버도 망명해야했다. 남아있던 하버의 친족들은 하버가 만들어낸 치클론 B에 의해 학살당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 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겨졌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이자 심리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섭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프로이트와 정신분석학에 대한 서적들이 분서되었다. 나치 집권 이후에 처음으로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될 뿐만 아니라 베를린 정신분석 연구소도 유대인들의 모임이라며 폐쇄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이후로 프로이트는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되자[80],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 고향인 오스트리아를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고 1939년 그곳에서 숨을 거둔다.

문화계로 보면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출판, 영화, 연극 분야에 활동을 많이 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나 영화 산업은 1920년대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 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서 두 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당의 집권 이후에는 괴벨스가 영화 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기업들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다. 독일 영화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견디다 못한 프리츠 랑이나 빌리 와일더같은 내로라 하는 독일 영화 인재들이 영국이나 미국같은 곳으로 망명해버렸다. 오죽하면 나치 독일이 영미권 영화계에게 인재를 퍼다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81] 후폭풍도 매우 심해서 전후 프랑스랑 비교하면 "유럽과 아프리카" 수준으로 차이가 나버렸다는 분석도 있으며 뉴 저먼 시네마로 대표되는 독일 전후 영화는 나치 독일 영화의 철저한 안티테제를 내세울 정도였다.

연극계는 우익이나 민족주의 성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역시 직격탄을 맞았고, 문학계에서도 <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국가공인 좌빨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선고 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좌파 예술가들이 탄압받다가 망명했으며, 망명하지 않은 케테 콜비츠는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82] 2차대전 시기에는 러시아와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 당한다.

다른 예술 분야에도 나치당의 잣대로 '유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 공부를 게을리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미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표현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에 나치는 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낙인찍고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유네스코 문화유산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박살났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83]도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됐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 역시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서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런 인재들을 받아들이기 불쾌하게 여기기는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됐다. 나치 집권 이후에는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대학 교수급 석학들도 800명이나 빠져나갔는데, 이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었다고 한다.[84] 실제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 연구소 중 3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에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

9. 대외 인식

유일하게 나치 독일이 긍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라면, 극단적인 전체주의 국수주의가 나라를 어떻게 망치는가를 국민들 스스로 깨닫게 해줬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6년간이나 처절하게 한 끝에 독일 본토가 쑥대밭이 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배후중상설 따위가 나올 여지도 없이 누가 봐도 확실한 패전을 경험한 덕분에 독일인들은 전체주의에 관해서라면, 역사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증거가 네오나치 세력들 뿐만 아니라 극좌파 공산주의자들과 이슬람주의자들도 가차없이 조직화되어 사회에 위협을 주는 족족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냉전 시기 극좌파 공산주의 세력들을 가장 철저하게 때려잡은 나라는 프랑스도 미국도 영국도 아닌 서독이었다. 그리고 그 명분은 반공 국가여서가 아니라, 단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자들에게 정치적 권리를 줄 수 없다는 입장과 명분을 강경하게 견지했기 때문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서의 독일은 '막대한 영토 손실 + 전후 복구 + 승전국의 지나친 배상 청구'로 말 그대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죽어가던 나라를 살린 것은 사실이며, 재무장을 하고 라인란트 점령 등으로 독일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제로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의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지지율은 98.8%였다.[85] 그 시점까지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합병 등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충격을 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혼돈이 멈추고 안정되어 보이는 '듯한' 독일을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만약 이쯤에서 평화롭게 해결했다면 오늘날의 비판은 없었고 독재자이지만 혼란을 잘 수습한 유능한 지도자, 제2의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독일 제일의 정치가 정도로 기억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 더 나가서 프랑스 전역 종결 직후, 아니면 영국 본토 항공전의 패배 후 어떻게든 평화 조약을 체결시키고 내치에 힘 썼다면 최소 공칠과삼의 지도자로 평가 받았을 것이다.[86]

다만 이 단계에서도 경제 회복이란 게 빚잔치와 삥뜯기, 이중장부 등으로 만들어낸 마법의 시간에 불과했고, 몇 년 있으면 결국 전부 갚아야 할 운명이었다. 빚 내서 키운 군수공업과 돈 잡아먹는 군대를 유지하고 국민들에게 약속한 막대한 부를 약속했는데 견실한 경제 성장 없이 그 돈을 주려면 결국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부를 빼앗는 방법 말고는 없었기 때문에 침략전쟁을 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87] 또 다른 해결책은 전부 다 사기였다고 인정하고 국민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결국 전쟁하다가 죽는 거 말고는 아예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소련을 이기고 미국을 막아냈다고 쳐도 독일인의 최대 10배가 넘는, 불만과 분노로 가득 찬 피지배민족들을 어떻게 할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았으며, 이들을 밑도 끝도 없이 탄압하기 위해 독일인들에게 스파르타식 생활을 무한정 강요하자니 전쟁 중에 전쟁 경제로 들어가는 것이 싫다고 할 정도였고[88] 특권 의식까지 겹친 독일인들이 납득할 리 만무했다. 즉 히틀러가 사기 쳐가며 경제 회복을 했다고 선전하던 그 시점에 나치의 미래는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이미 패망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을 전세계로 확대시켰으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것도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의 '히틀러 비판은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히틀러가 승리했더라면 인권 말살과 인종주의, 그리고 세계적 레벨의 민간인 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물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 등 추축국이 연합국에 승리해서 온 세상이 나치와 일제의 지배 하에 떨어졌다면 충분히 권력자에 오른 나치나 일제는 자기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고 찬양하게 강조시키고 모든 국가적 교육에서 자기들 찬양만 해댈 것이고 반대는 무조건 숙청 탄압 사형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히틀러 비판이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즉 객관적인 윤리적 도덕적 지표에서 본다면야 히틀러가 설령 승리했다고 쳐도 많은 억압 받는 세계 사람들은 겉으로야 처벌과 보복이 두려워 말 못할 뿐 속으로는 히틀러 개새끼라는 걸 다 알고 그렇게 생각하지만, 객관적 윤리적인 관점에서 정당화가 아니라 단지 겉으로 보여지는 정당화라면 만약 나치가 세계를 지배했을 때 자기네들이 강제적으로 "야 우리가 한 게 옳아 아니야?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옳다고 얘기해!"라고 강요하면서 억지로 정당화 시킬 수는 있다는 것이다. 결과론적이란 말은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이 행위의 결과에 따라 판명될 뿐이란 말이다. 무력이나 협박에 의한 억지 정당화가 결과론적 정당화와 같은 뜻인 양 써서는 올바른 논의가 될 수 없다. 차라리 결과론적이란 표현 대신 나치가 이겼었다면 나치에 대한 평가도 역사는 승자의 논리로 쓰여진다는 관점에서 달라졌을 수 있다는 식으로 썼으면 한다.

물론 나치 독일이 경제, 군사, 인구 비율, 영토 면적, 상대적 기술력 등 국력상 독일의 최전성기 시대였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국가가 계속 유지될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랑스 제국, 일본 제국, 소련, 근현대 사회와는 배경이 다르지만 몽골제국 등을 비롯한 막강한 제국들 역시 과대한 군비 지출, 스스로의 모순, 피지배층의 항쟁 등으로 결국 몰락했는데 하물며 앞서 소개한 국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정신 나간 이념과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학살, 테러 등을 저지른[89] 나치 독일이 오래 유지될 리도 없을 것이고, 전쟁이 벌어지지 않거나 설사 전쟁에서 승리했더라도 그 동안 노예 노동에 시달리던 수많은 피지배국 민중의 저항이나, 나치당과 기업간의 정경유착에 의한 각종 부정부패 및 과도한 군비지출 등으로 스스로 몰락했을 것이다. 오히려 이런 짓까지 하면서 모든 역량을 모조리 국가 유지에 불태우고 국가 자체가 사라지기 전에 강대국들에 의해 전쟁에서 지는 걸로 끝났기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독일의 패전 이후 1960년대만 해도 서독 지역에서는 과거사 청산이 좀 더디게 이루어지기도 했지만 빌리 브란트 집권 시기 처음으로 국가 지도부가 독일의 옛 만행에 대해서 공식 사과했고 통일 이후로도 지금까지 꾸준히 반성과 사죄의 태도를 보여오고 있으며, 동독의 경우 애초에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의 전신인 독일 공산당이 나치당에 의해 철저하게 탄압을 받다가 결국 강제 해산을 당했으며 기존 독일 공산당의 지도부들도 모두 투옥이 되는 등 나치 독일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질래야 가질 수가 없었기에 어렸을 때 부터 나치의 여러 만행에 대해 의무적으로 배우게 하는 등 나치 독일에 대해서 철저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한편 소련을 '독일을 히틀러라는 이름의 악마로 부터 해방시키고 서방 세력의 전 독일 점령을 막은 구세주'로 평가했다.[90] 다만 나치 독일 시절 독일 국방군의 군복 만큼은 그대로 물려 받았는데, 대표적인 예시가 헬멧 이였다.

물론 독일에도 히틀러가 전성기를 열었다는 의견에 동조하는 네오나치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만의 주장이다. 히틀러가 다스렸던 나치 독일은 그나마 독일 국민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을지는 몰라도 전쟁으로 인해 많은 국력을 소모한 데다가 많은 국가들을 적으로 돌려 포위되어 수도까지 점령 당하는 와중에도 항복은 하지 않았고, 그 대가는 온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다. 거기다 전쟁 후에는 독일은 연합국에 따라 분할되었고 홀로코스트라는 비인륜적인 짓을 저질러서 한동안 많은 국가에게 눈초리를 당해야 했던 것과 동시에 독일 국민들 스스로 반성의 태도를 보이기 전까지는 통일도 꿈도 꿀 수 없었다. 차라리 지금의 독일이 더 전성기라고 봐도 좋은데, 이들의 주장은 그저 히틀러의 매력에 심취해서 현실을 왜곡한 주장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학살과 세계적 전범이라는 원죄는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도 독일 전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이 때문에 현재의 독일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히 있는 애국심 교육 자체가 없다. 아무래도 자국의 역사를 가르칠 때는 어느 나라나 애국심 보정으로 약간씩이라도 화려하게 치장하기 마련인데, 독일 역사 교육 시간에는 감성적인 측면은 철저히 배제하고 진짜 있었던 일 위주로만 가르친다. 심지어 나치의 만행에 대해서 배울 때는 이러한 일이 있었으니 우리는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면 안 된다고 교육한다.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것도 전혀 없다. 국사적인 행사에 무조건 들어가는 국가 합창도 없다.[91] 심지어 국제 경기에서 독일 국기를 들고 응원하는 행동이 옳은가에 대한 국민적 토론이 벌어질 정도로 불편해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철저하게 국가와 민족, 애국이라는 단어를 교육에서 아예 배제시켰다. 미르야 말레츠키는 국방일보에서 연재 중인 병영 칼럼에서 나는 독일인이라 애국심이 없습니다라는 글을 올렸을 정도.

유럽 재앙의 근본이던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92]를 국민성에서 완전히 배제시키고, 이를 자유주의적이며 평화주의적으로 바꾸었다. 그 결과 권위주의적이었던 동독 체제는 밑에서부터의 반발로 자발적으로 서독에 흡수·합병되었다. 그리고 현재 독일은 전쟁 피해를 받은 국가들의 이의제기 없이 유럽 연합의 지도국의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에서 이런 변화는 매우 긍정적이고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민족주의적이며 권위주의적인 요소를 없애버렸다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봉인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교육으로 심어진 게 아니라 진짜로 자기 나라가 좋아서 애국심을 가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누군가에 의해 영향을 받은 인위적인 감정일지언정 그것이 내셔널리즘과는 다른 건전한 방향의 애국주의일 수도 있는데[93], 그런 것들을 지나치게 억압하다 보니 오히려 그 반발로 닥치고 위대한 독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네오나치 네오파시스트들이 등장한다는 것. 즉 어떤 형태로든 국가나 공동체를 강조하기만 하면 싸잡아서 나치니 전체주의니 하며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이것이 정말 옳은 방향인가'라는 반론들이 꽤 있다. 특히나 1990년대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유지되던 동독 지역에서는 좌파당(독일)이나 독일을 위한 대안과 같은 극단주의 성격을 가진 당이 많은 지지를 얻는 등, 이른바 억압적 민주주의 체제의 반향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독일 제3제국이나 히틀러에 대한 현대 독일인의 인식에 대한 관련 기사( 이코노미스트), 원본.

파괴 당할 뻔했던 나치 포스터들이 미국의 대학교에 보존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기사.

나치에 의한 희생자 후손들에게 조건 없이 독일 국적을 준다고 한다. 기사.

9.1. 다른 시각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식민지 지배를 받은 제3세계 국가들이나 칠레,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나 이란, 아랍 등 중동 몇몇 국가들은 반미나 반서방, 반유대주의라는 관점에서[94]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다. 일부는 아예 대놓고 히틀러를 긍정적으로 여겨 그를 옹호하기도 한다. 영국, 프랑스 등 서구 열강의 지배로 수탈당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국가들 중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와 착취에 심하게 시달렸던 국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에 말려들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한 덕분에 이게 이후의 독립에 도움이 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아르헨티나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과 이슬람 문화권, 특히 이슬람 극단주의 집단들은 히틀러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을 위시한 서방 국가들의 국제 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자신들에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던 모양이다. 이스라엘, 유대인을 증오하는 감정이 강한 곳에서도 히틀러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반유대주의 문서로.

인도에는 아돌프 루 히틀러 마락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부모가 히틀러를 존경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상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사회이다 보니 각종 독재자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도 많다고 한다. 그러나 2차대전 당시의 인도의 관점에서 영국이 적이면 나치 독일은 적의 적이었다. 실제로 찬드라 보스 등 일부 인도 독립운동가들은 추축국과 야합하여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자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유럽의 핀란드[95], 아이슬란드, 발트 3국 같은 국가도 마찬가지. 핀란드, 발트 3국 등은 나치 독일의 후원자였고[96]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히틀러가 독립시켜 주었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에 시달렸던 발트 3국에서도 가끔씩 나치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아예 에스토니아 쪽에서 대놓고 나치 친위대를 자유의 전사로 성역화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나라들은 (발트 3국을 제외하면) 현재 중립적으로 보는 경우는 있어도 결코 대놓고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인 정치인으로 여기지 않는다.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의 적을 동맹 비슷하게 맺고 공공의 적을 견제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고, 겨울전쟁 당시의 핀란드도 적(소련)의 적(독일)과 손 잡고 같이 소련을 공격하기도 했다. 물론 핀란드는 제 2차대전 전기 때나 독일과 손 잡았지 이후 전쟁 후기에 가면서 전세가 연합국에게 유리해지자 독일과 관계를 끊고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은 뒤 독일군과 싸우기는 했다( 라플란드 전쟁). 그리고 일본과 손 잡고 인도를 독립시키려던 찬드라 보스만 해도 나치와 손 잡을 준비도 얼마든지 했다. 이들에게 나치나 히틀러는 나쁜 놈이라고 해봐야 우리에겐 영국이 나치이며 윈스턴 처칠이 히틀러와 같다고.

그런데 히틀러도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대해서 '저항을 멈출 때까지 처형하라'는 막장 해답을 외무장관인 헬리팩스에게 전달한 사실이 있다. 나치 독일이 비난 받는 이유는 T4 작전을 벌이는 등 자국민들까지 탄압하고 억압했으며 산업적인 방법으로 체계적인 학살을 했기 때문이다. 영국을 비롯한 식민 제국들의 폭압적 지배가 나치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지는 않는다.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자 자국의 이익을 위해 나치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던 국가가 있다는 사실은 전세계적 측면으로 봤을 때 나치의 만행이 더 큰 탓에 묻혔다. 핀란드는 소련에게 먼저 선빵을 맞고 영토를 잃었는데 영국, 미국은 소련과 동맹이어서 독일과 손 잡아야 했고,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독일에 종속되다시피 하여 히틀러의 추축국 참전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97] 나라에 따라서는 역사를 얼마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봐야 하는지 제대로 알려준 예시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제3세계라도 에티오피아 등 추축국에게 제대로 깨강정 된 나라들은 당연히 히틀러, 나치가 악의 축이라고 인정한다.

아프리카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식민지였던 나미비아 탄자니아 같은 경우 독일 식민지 시대에 헤레로족 학살, 마지마지 반란 등 독일군에게 자국 흑인들이 학살 당하기도 했었고 나치가 흑인-독일인 혼혈아들을 라인란트 사생아(Rheinlandbastard)라 부르며 박멸 대상으로 삼은 데다, 홀로코스트 문제와 달리 2016년과 2023년에 독일 정부에서 이들 식민지내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하기 전까지 제대로 된 식민지 사과나 보상을 안 했기에 이 나라들도 독일과는 사이가 몹시 나쁘다. 심지어 독일 정부가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 독일 군대가 직접 안 죽이고 칼라하리 사막에서 굶어죽었다, 현지 흑인들끼리 서로 싸움질하다 공멸해 죽은 사망자들이다"라는 식의 망언들을 하자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는 나치 시대 독일의 홀로코스트를 꺼내며 "유대인과 집시도 직접 독가스로 안 죽이고 폴란드 아우슈비츠에 보내서 거기서 죽었냐?"라고 맹렬히 비판하기도 했다. 위에서 언급한 중남미에서도 독재 정권이 나치와 연계되었다는 점 때문에 8~90년대 민주화를 주도했던 사람들은 당연히 나치를 혐오한다.

반서방 국가이고 추축국으로부터 피해를 받지 않아 나치를 그리 부정적으로 볼 필요 없는 나라 가운데도 각국 정부 차원에서 반서방이면서 반추축국 진영인 (예 : 중화민국[98]) 러시아와의 관계를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흑역사로 취급하며, 오히려 눈치를 보아서라도 나치 관련 인사를 처벌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서 괜히 러시아 눈치를 안 보고 나치를 옹호했다가는 상임이사국 전체를 적으로 돌리게 되어서 외교적으로 매우 곤란해지기도 할 것이고 말이다.

놀랍게도 현존하는 네오나치들 가운데 상당수가 러시아에 있다. 이에 대해 러시아 국영 신문인 이타르타스에서는 2차대전에 참전하여 훈장을 가득 받은 노병이 승리의 날 행사에 참여하며 우는 사진과 같이 나치식 경례를 하는 러시아인 네오나치의 사진을 같이 실으며 '조상의 무덤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 투자가나 관광객 등이 중요해지자 당시 총리였던 푸틴이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경찰이 출동하여 시위 현장에서 네오 나치를 신나게 패주고 연행하는 강압책을 보여주며 제재할 필요성을 느낀 듯 하다.

자동차계에서는 히틀러가 은근 옹호를 받고 있는데, 그 이유가 폭스바겐의 전설 폭스바겐 비틀의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기 때문. 주로 당시 독일의 국민차가 비틀이였으며, 후방 엔진 후륜구동을 최초로 채택한 자동차라는게 추가로 언급된다. 하지만 막상 비틀은 1938년 출시된 이래 전쟁이 끝날 때까지 고작 630대만이 생산되었으며, 널리 알려진 기념 우표사업으로 지급된 차량은 단 한대도 없었다.[99] 수천 수만 독일 국민이 열심히 투자한 기념 우표 값은 전부 군자금으로 쓰이고, 비틀을 생산하겠다던 공장은 전부 군수물자 생산 공장이 되어버린 것은 덤이다. 당연히 고작 630대만 생산된 차량이 이름만 그렇게 지었다고 이른바 '국민차' 개념에 근접할 수 있을리가 없다. 여기에 더해 후방 엔진 후륜구동 구조는 비틀이 최초도 아니며, 이미 체코 타트라 T77 등에서 먼저 고안된 개념이었다. 비틀이 타트라 T97을 거의 배끼는 수준으로 참고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항이다. 비틀의 실제 대량 생산과 판매는 전후 독일 복구 지원차원에서 영국이 2만여대에 가까운 비틀을 주문하면서 이뤄졌다. 오늘날의 폭스바겐 비틀의 명성은 차라리 영국군의 지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0.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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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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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일당 독재

나치 독일은 바이마르 체제를 외견상 유지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와해했다. 나치당은 독일을 일당 독재 국가로 만들었으며, 아무리 사소한 단체라도 나치당 이외의 정치 결사를 허용하지 않았다. 우선 독일 사회민주당[100], 독일 공산당 등의 라이벌 정당들은 나치의 집권 즉시 해산되었다. 이는 우익 정당이나 단체도 마찬가지였는데, 철모단 같이 나치와 비슷한 성향이고 공투도 했던 극우 정당, 툴레 협회와 같이 초창기 나치에 큰 도움을 주었던 우익 비밀 결사도 존속하지 못했다. 기존의 모든 정당을 해산한 후에 나치당 이외의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것도 금지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양원제 의회는 해산되어 단원제 의회로 개편되었고, 북한의 선거처럼 선거는 나치당이 국회의원 후보 명단을 제출하면 찬반 투표를 하는 방식으로 치러져 찬성률 90%로 전석을 나치당이 채울 수 있었다.

모순적이게도 정작 나치당의 지위는 모호했다. 초기에는 나치당의 지위를 공법인으로 하여 법률적으로 국가 사상의 담당자로 정의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1942년 12월 12일 명령에 따라서 나치당의 지위를 정의한 모든 법률을 삭제했다. 당과 국가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이후에도 종종 있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최후까지 나치당은 모호한 상태로 남았다.

나치당의 세계관에서 당은 국가와 같이 지도자 원리를 구현하는 조직이었으나, 동시에 국가보다 우월한 존재로 여겼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관청과 관료 정치를 이용하여 나치당에 주어진 사명을 경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10.3. 사회 분위기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병합을 축하하는 '대독일의 날' 기념식 영상[101]

10.3.1. 전통적 인식: 전체주의론

총통(퓌러) 신앙은 계급과 직위를 망라하여 철두철미한 확신에 가까웠다. 이와 관련된 많은 발언은 마치 화자가 히틀러와 개인적 관계가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대중 스타가 닿을 수 없을 만큼 저 멀리 있고 남다른 특징을 지니면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친밀하고 가까운 느낌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다. 프로파간다에서 철저한 계산을 통해 총통을 디자인하고 대중에게 선보이는 것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모든 자기 연출과 마찬가지로 실상 매우 현대적인 특징을 지닌다. 처칠이 히틀러처럼 연서를 수천 통 받는다거나 괴링처럼 딸이 태어났을 때 전보를 10만 통 이상 받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우리라. 제3제국의 지도자들은, 아니 적어도 이 두 인물은 대중 매체의 전문적 연출로 나타나는 대중문화 현상을 매우 뚜렷하게 미리 보여 준다.

소박하고 선량하면서도 신비롭고 전능한 느낌을 주는 총통의 아우라는 대중 스타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퍼뜨린 무수한 일화들을 통해서 늘 손에 땀을 쥐는 흥미진진함을 유지한다. 가령 연설 중에 소리를 지르는 것 같은 히틀러의 다소 특이한 습성, 금욕적인 식습관, 그리고 분을 못 참아 양탄자를 물어뜯었다는 저 유명한 일화[102]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총통과 아주 가깝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면, 한 번이라도 총통 옆에 앉았다거나 (장군들에게는 드물고 특이한 일은 아니지만) 총통과 군사적 문제를 논의한 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 일화는 언제나 자세하게 이야기되고 이야기 중에는 언제나 히틀러의 특별한 점들을 지적한다. 이를 통해 총통과 친밀하게 알고 지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물론 (사실이건 거짓이건) 총통을 직접 만났다는 사람에게 총통 이야기를 듣는 것은 언제나 청자들의 흥미를 끌었다. 총통의 매혹이라는 토포스는 되풀이되어 등장한다. 히틀러는 말 그대로 사람을 마취시키는 것처럼 자신의 매력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총통과 진짜 만난 사람은 다른 인상도 받았다. 가령 루트비히 크뤼벨(Ludwig Crüwell) 기갑대장은 이야기에 홀딱 빠져 귀를 기울이는 영국 측 첩자 폰 발데크(von Waldeck) 중위에게 이렇게 말한다.

크뤼벨: 확신합니다. 총통이 당을 지휘하면서 거둔 상당 부분은 그가 대중에게 암시를 거는 것 같은 절대적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최면과도 같지요. 그는 이런 최면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걸었죠. 솔직히 말해서, 제가 아는 사람들 중에도 지적으로는 히틀러보다 우월하면서도 이런 마력에 홀딱 빠진 사람들이 있어요. 왜 저는 안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남자가 짊어진 책임이 그야말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는 사실은 저 자신도 아주 잘 알고 있지요. 그가 제게 아프리카에 대해 한 말은 저를 깜짝 놀라게 했어요. 그렇고말고요. 하지만 그래도 저는 그 정도는 아니었고 왜 그런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주 특이한 건 손이에요. 아름다운 손이지요. 사진으로 보면 눈에 안 띄죠. 진짜 예술가의 손이라니까요. 저는 그 손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지요. 아주 아름답고 예사롭지가 않은 손이었어요. 섬세한 손이었지요. 손의 종류 자체가 달랐어요. 소시민의 손은 그렇지 않아요. 제가 특히 놀랐던 건, 그는 독수리처럼 사람을 응시하면서도 긴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이 곡엽 훈장을 받아 주시겠습니까?"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이에요. 이해하겠어요? 사실 그 전에는 완전 다르게 상상했거든요.[103]

히틀러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크뤼벨은 총통을 개인적으로 만났음을 증명하기 위해 친밀하고 가까운 거리에서만 알 수 있는 세부 사항들을 내세운다. 총통은 "아름답고" "섬세한" 손을 가졌다. 아주 특이한 손이다. 그리고 아주 정중하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는데, 크뤼벨이 상상했던 것과는 아주 달랐다. 그러니까 총통을 그처럼 개인적으로 만나 보면 공적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최면을 거는 총통보다 한결 매력적이다. 크뤼벨의 설명에는 우스꽝스러운 점도 있다.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히틀러의 마력에 홀딱 빠지지 않았다고 강조하지만,("왜 저는 안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다음에는 마치 구세주를 눈 앞에서 영접하듯이 총통을 묘사하는 것이다.

그가 이 만남에 대해 지녔던 커다란 기대는 충분히 실현되었다. 총통은 자신을 "깜짝 놀라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상상하던 것과 다른 방식으로 그렇게 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오락적인 요소도 깃드는데, 화자는 이런 요소를 가지고 자신이 총통 가까이 있던 사람이라고 과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는 다소 냉랭하게 대답한다.

폰 발데크: 그의 모든 행동은 감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크뤼벨은 이 말을 비판으로 받아들이고 곧바로 반박한다.

크뤼벨: 그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려 한다면 그냥 자기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면 됩니다. 어떤 모습을 보여 줄까 생각한다면 벌써 잘못되어 버리지요. 제 말은 이런 뜻입니다. 어떤 군인들은 아주 훌륭한 군인인데도 늘 어떤 사람을 골라서 그를 모방하려 합니다. 그런 건 모두 잘못입니다. 총통은 유연하게 걷습니다. 옷을 아주 잘 입지요. 아주 소박하게요. 검은 바지에 외투를 입습니다. 이것보다 좀 더 회색인데 국방색은 아니지요. 뭐로 만든 건지는 모르겠어요. 그리고 괴링처럼 훈장을 주렁주렁 달지 않아요![104]

크뤼벨은 히틀러의 감정에 사로잡힌 행동을 오히려 진정성의 증거로, 그가 지닌 개인적 설득력의 일부로 평가한다. 그 다음에 총통의 두드러진 소박함과 겸손함에 대한 자신의 내밀한 지식을 계속 늘어놓는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또 다른 사실은, 이런 만남 이전부터 가지고 있는 총통의 위대함과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를 실제 만남을 통해 충족하여 그 후에는 다시 새로운 일화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총통과의 만남은 이런 식으로 '자기 실현적 예언'이 된다. 즉 총통 신앙은 일종의 '정서적 영구기관'이 되는 것이다. ...(후략)...
-《나치의 병사들: 평범했던 그들은 어떻게 괴물이 되었나》 죙케 나이첼, 하랄트 벨처. 민음사. p320 ~ p323 에서 발췌
한나 아렌트와 같은 저명한 학자들에 의해 수립된 설로, 나치 독일 수권 당시부터 7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을 지배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 요제프 괴벨스와 같은 소수의 나치 수뇌부들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되는 군국주의적이며 전체주의적인 사회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치 정권의 입장에 반하는 세력들, 대표적으로 공산주의와 사민주의를 망라한 좌파 계열[105]에게는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위시하여 무자비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러한 탄압을 두려워 한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체념한 채 나치 정권에게 순응하는 길을 택하였고, 그 결과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늪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이 이러한 전체주의론의 골자이다.

10.3.2. 새로운 해석: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파일:external/www.gerhard-richter.com/9127.jpg 파일:2547.jpg 파일:2569.jpg
《루디 삼촌》
Onkel Rudi, 1965
《마리안네 이모》
Tante Marianne, 1965
《하이데 씨》
Herr Heyde, 1965
위 세 그림은 독일 현대미술 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1932 ~)가 1965년에 발표한 가족초상화 연작들이다.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된 1960년대 즈음 현대미술계에서는 '아우슈비츠 이후의 예술가의 책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에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예술 작품들을 이용해 폭로하였는데, 리히터 또한 이 물결에 참가했다.

리히터의 가족초상화 연작은 이 시기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는 이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개인적 가족사를 과거 비극적 시대의 역사와 연결짓는다. 우선 가장 좌측의 작품은 1965년작 《 루디 삼촌(Onkel Rudi)》이다. 친족어로 구성된 제목과 사진 속 모델의 순박하게 웃는 얼굴은 가까운 가족 중 누군가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이 어딘가 친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색감과 나치 독일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국방군 제복은 이와 상반된 불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루엣처럼 흐릿하게 번진 듯한 질감은 이 대상이 정확히 누구인지 모호하게 만들며, 단순한 배경도 장소의 구체성을 약화시킨다. 제목 '루디 삼촌' 역시 그렇다. 1차적으로는 이 작품의 모델이자 실제 작가의 외삼촌이었으며 2차 대전 당시 국방군에 복무했던 루돌프 쇤펠더(Rudolf Schönfelder)를 지칭하지만,[106] '루디'는 한국의 '철수'처럼 많은 독일인들이 쓰는 애칭이기도 하다.

이 모든 인상들이 한데 어우러져 어디에나 있을 법한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 하지만 전쟁범죄자일지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풍긴다. 다시 말해 '루디 삼촌'은 당대 독일군으로 참전하여 나치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했으나 동시에 누군가의 가까운 가족이기도 했던 불특정 다수, 즉 악의 평범성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현재는 체코 리디체[107]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독일 - 체코 양국 화해의 대표적인 증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작품 《 마리안네 이모(Tante Marianne)》는 작가의 이모인 마리안네 쇤펠더(Marianne Schönfelder)의 사진을 가지고 만들었다.[108] 독일군 군인인 동생 루돌프와는 반대로 마리안네는 나치즘의 피해자였는데, 1945년 2월에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T4 작전의 두 번째 페이즈인 브란트 작전(Aktion Brandt)의[109] 대상이 되어 살해당했다.

마리안네를 죽인 인물은 드레스덴 지역에서 브란트 작전을 감독하던 친위대 의사 하인리히 오이핑어(Heinrich Eufinger)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리히터의 장인이기도 했다. 리히터는 결혼하고 나서야 이 충격적인 사실을 알았다. 루디 삼촌이 당대의 독일 군인들을 상징한다면, 마리안네는 나치 정부의 희생자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리안네는 현재 독일에서 조피 숄, 그리고 안네 프랑크와 함께 나치 정권의 대표적인 희생자로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작품이자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의 사진을 이용한 《 하이데 씨(Herr Heyde)》는 이 복잡한 가족사를 더 심화시켜 보여 준다.[110] 의사였던 하이데는 리히터의 장인인 하인리히 오이핑어의 친위대 시절 동료였다. 그는 친위대 의무부대장으로써 T4 작전 수립에 참여하고 각종 강제수용소와 절멸수용소에서도 근무했다. 그 역시 1945년 리히터의 이모 마리안네의 죽음에 관여되어 있다.

베르너 하이데는 전후에 프리츠 사바데(Fritz Sawade)라고 이름을 바꾸었으나 그가 친위대 의사 '베르너 하이데'라는 사실은 전후 독일 의학계에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었다. 그는 한동안 일상을 영위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독일 사회의 과거 청산 분위기가 무르익자 결국 1959년에 재판장에 자진출두했다. 그리고 1964년 본격적인 재판이 열리기 전 감옥에서 스스로 목을 맨 채 발견되었다. 리히터의 작품 '하이데 씨'는 베르너 하이데가 법원에 출두하던 모습이 찍힌 사진을 원본으로 한다. 당연하게도, 하이데뿐만 아니라 나치 전범들 모두를 상징한다.[111]

리히터 일가의 이 복잡하고 기구한 과거사는 그의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초상화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흐릿한 실루엣은 당대 다른 많은 독일인들의 가정과 인간관계에도 루디 삼촌과 마리안네 이모, 그리고 하이데 씨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위르겐 슈라이버의 미술사 서적인 《한 가족의 드라마(Ein Maler aus Deutschland)》,[112] 그리고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의 영화 《 작가 미상(Werk ohne Autor)》이[113] 리히터 일가의 이야기를 다룬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역사학계에서는 연이어서 전체주의론에 대해 반박이 가해졌다. 이러한 수정주의적 역사 인식의 포문을 연 것은 마르틴 브로샤트였다. 독일 역사학계를 뒤흔든 저서 <히틀러 국가(Der Staat Hitlers)>에서 마틴 브로샤트(1926~1989)는 나치 정권이 결코 하나의 단일한 목표를 바탕으로 결집한 세력이 아니라는 점을 밝혀냈다. 나치당 내의 다양한 세력이 다양한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저마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이전투구를 벌이는 모습을 지적하면서 브로샤트는 나치 정권이 전체주의적인 정권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다극 혁명이었다고 주장한다.[114]

한편 브로샤트의 뒤를 이은 알프 뤼트케, 데틀레프 포이커트를 필두로 한 일련의 소장 역사학자들 역시 브로샤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다. 인류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역사(Geschichte von unten)'을 기치로 내걸고 나치 정권 시기에 실제 청~장년기를 보낸 노동자 계층[115]들과의 인터뷰 및 그들이 남긴 무수한 회고록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나치 시대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연구 결과는 매우 놀라웠다. 먼저, '숨도 못 쉴 만큼 억압적인' 나치 정권 시기라는 기존의 통념이 완전히 무너졌던 것이다. 나치 정권에 대해 가장 적대적이었던 노동자들에게조차도, 전쟁 발발 이전이었던 1933년부터 1939년까지의 시기의 나치 정권에 대한 기억은 지극히 긍정적이었던 것이다. 이들의 기억 속에서 초기 나치 정권 시기는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과 궁핍이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상당수 해소되었던 기간이었다. 나치 정권은 (공공연하지는 않지만 내심) 자신들을 적대하는 노동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노동자들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이들을 달래고자 노력했다.[116] 게다가 나치 정권이 전통적인 가부장제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젊은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억제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남성들에게 많은 일자리가 돌아갔으며, 노동자들은 다시 사회적 지위 상승(중산층으로의 계층 상승이 아니라, 노동자 계층 내에서의 지위 상승 -예를 들어 숙련공 대우-)을 꿈꿀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나치 정권이 도입한 복지 정책인 기쁨을 통한 힘(KdF, Kraft durch Freude)을 통하여서 노동자들에게는 이전까지 경험할 수 없었던 새로운 여가 생활(가령 인근 영국/ 프랑스로의 해외 여행이라든가, 베를린 필하모닉이 연주하는 클래식 청취)을 향유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수많은 당대 독일인들의 회고록에 따르면 나치 독일은 결코 정권의 일방적인 통제에 의해 돌아가는 국가가 아니었다. 나치 정권의 통제력은 오로지 국가 차원의 정책이 평범한 독일인들의 이해 관계와 수렴할 때에만 제대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1936년 이후 나치 정권이 대외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4개년 계획(Der Vierjahreplan)을 수립하고 노동자들의 근태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노동생산성이 급락하는 한편 불량품 발생률이 치솟기 시작한다. 노동자들이 의도적으로 사보타주를 펼쳤던 것이다. 도시 노동자들 의외에도 다양한 세력들이 자신의 이해 관계와 반하는 정부 정책에 대항하였다. 농촌에서는 농민들은 자신의 농작물을 군수물자로 공출하려는 정권의 움직임에 대해 암시장 반출과 같은 지하 경제 행위로 저항하였고, 도시의 청년들 역시 획일적인 히틀러 유겐트 문화에 반발하여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모이텐과 같은 조직을 자발적으로 조직하고 히틀러 유겐트 간부들에 대항[117]하였다. 북아프리카 전역과 노르망디 전역에서 제21기갑사단 소속 장교로 복무한 한스 루크도 회고록에 전쟁 이전 나치 지도부를 개그 소재로 써먹은 코미디언 이야기가 소개되며 1939년 이전까지는 나름 경직적이지 않은 사회였음을 보여준다.[118]

다시 말해서 나치 정권 독일 사회는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119]이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알프 뤼트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치 정권에 대한 대다수 독일인들의 입장은 (자신의 이익이 보존되는 한에서 암묵적으로 정권을 인정하는) 유보적 수용(Abwartendes Hinnehmen)에 가까웠던 것이다. 요컨대, 나치 독일 시대는 결코 순응하는 대다수 국민 對 처절히 저항하는 소수의 영웅[120] 이분법 구도로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바꿔 말해서 체제 자체에 대해서는 적당히 순응하면서도, 부분적인 일탈과 저항 역시 만연한 회색 지대(Grauzone)가 당대 독일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이 이들의 시각이다.[121]

이러한 일상사의 수정주의적인 시각은 독일의 역사관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기존의 전통적 역사관은 나치 정권 그 자체를 철저한 악이자 입막이로 묘사해왔다. 그로써 많은 독일 국민들은 ("악마적인 정권이 폭압을 해서 나는 어쩔 수 없었다."라는 식의) 면죄부를 스스로에게 부여해왔지만, 일상사가들에게 이러한 도식은 도덕적으로는 유의미할지라도 당대 독일 사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치가 탄압했던 정치적 반대 세력, 유대인, 집시, 성 소수자들은 일반 독일인에게도 똑같이 혐오됐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122] 그래서 현대에는 이러한 유대인에 대한 혐오가 나치에 의해 조장된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당시 독일인들이 가지고 있던 유대인 혐오 심리를 나치가 자극하고 이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 내부적인 결속을 꾀하는 일종의 포퓰리즘 정책이었던 셈. 사실 그게 나치즘의 실체기도 하다. 또한 더 나아가 이러한 유대인 혐오 심리가 독일뿐만이 아니라 당시 전 유럽에 만연해 있었음이 보여지기도 했다.

한편 나치 지도부 역시 나치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태도를 면밀히 주시하며 관리하고자 했다. 애초에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은 뮌헨의 작은 지방군소정당에서 전국적인 지지를 받는 거대 정당으로 극적인 성장을 이뤄냈음에도, 널리 퍼진 편견과는 달리 독일인들의 100% 지지는 커녕 50%의 벽도 넘지 못했다.[123] 게다가 히틀러의 집권부터가 독일 국민의 직접 선출이 아닌 파울 폰 힌덴부르크의 총리 임명,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수권법 통과를 위한 폭력행위를 통해 이루어졌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음에도 국민들의 눈치를 끊임없이 살펴야 했다. 예를 들어 괴벨스의 일기나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엔 당시 나치의 정책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반응을 나름대로 해석하려는 내용도 있다. 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독일 국민들은 안슐루스,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찬사를 보냈지만 히틀러 자체라기보단 히틀러가 가져온 '눈부신 성과'때문에 지지를 보였으며, 이를 위한 전쟁 준비 기간엔 과격한 대외 정책에 대한 불안을 은연중에 드러냈다. 프랑스를 침공하기도 훨씬 전인 뮌헨 협정 당시에도 이미 전쟁 분위기에 대한 동요가 감지되었고 아예 독소전쟁 직전엔 히틀러를 향한 환호는 커녕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이지도 않았다고 기록할 정도. 결국 흔히 생각하는 것 처럼 '히틀러가 하는 일이면 무조건 지지하는 독일 국민들'의 사회 까지는 아니더라도 안슐루스부터 독소전쟁까진 과격한 대외정책→국민들 불안 호소→기적적인 대성공→지지율 상승 4단계의 무한반복이었던 것. 다른 나라를 짓밟아야만 작동할 수 있었던 이러한 전쟁의 순환은 소련과의 전쟁이 점점 지지부진해지며 금이 가다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참패를 당하며 깨졌다. 나치 지도부를 끝까지 지지하거나 방관했던 독일 국민들은 무조건적인 예스맨이라기보단 범죄를 알면서도 방관하다 점점 동조하는 길로 빠진 것이었고 나중에는 그 값을 치르게 된 셈.

다시 말해서 나치의 범죄 행위에 배경에는 나치 정권이 제공해주는 자그마한 이권에 취해 정권으로부터 박해 받는 이들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외면한 독일인 모두의 책임이 존재하는 만큼, 나치 독일이란 결코 역사상의 일탈[124]이 아니라 현대 독일 사회에서도 언제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에, 소수자에 대한 또 다른 박해와 몰이를 막기 위한 철저한 주의와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치 시기와 비슷한 일이 현재 러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11. 대외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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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치 독일의 동맹국( 추축국)들

13. 나치 독일이 침공한 나라들

14. 나치 독일의 괴뢰국, 국가판무관부, 군정청, 보호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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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미디어

미디어에서는 대표적인 적대 세력으로 등장한다. 거의 모든 작품에서 나치 독일은 현실과의 큰 차이가 없이 세계 정복을 꾀하고, 가끔씩은 오컬트에 심취해있는 모습[140]으로 대부분 최대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피카레스크, 몰락과 같이 주역이 되는 일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막장 역사를 그대로 따라가며, 대체역사물을 제외하면 패배하거나 격퇴당하는 식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편이다. 이는 실제 역사에서 이들이 벌인 만행이 거의 대부분 잔인하거나 끔찍한 경우가 많고, 홀로코스트처럼 반 인륜적인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실이 대중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탓이 크다.

미디어에서 나치 장교를 묘사할 때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경우가 매우 잦은데, 이는 일단 캐릭터에게 흉악한 인상을 주려는 것이 1차적인 원인이긴 하겠지만 실제 역사적으로도 나치 장교들은 얼굴에 흉터가 많았다. 이는 당시 독일 대학의 결투 문화인 멘주어(Mensur) 때문인데, 눈만 보호하고 얼굴에는 별다른 방어구 없이 펜싱으로 싸우는데다 상처가 나도 그 자리에서 대충 소독하고 꿰메어 처리했기 때문에 얼굴에 흉터가 남기 쉬웠다. 당시 독일에서는 이런 결투 흉터가 멋으로 여겨졌다.[141]

한편 당사국인 독일에서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엄청난 검열을 거쳐 출시된다. 사실 독일은 매체의 폭력성에 대한 검열 기준이 빡빡하지만 나치 독일 관련 매체는 더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42]

대중매체 속의 나치 독일 캐릭터들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Deutsche Soldaten Wiki를 참고하는 것도 좋다. 게임, 영화, 만화 가릴 것 없이 나치 또는 제1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 제국 관련 캐릭터들이 수록되어 있으며 적지만 네오나치 캐릭터 항목들도 있다. 해당 위키는 나치즘을 비롯한 파시즘을 신봉하는 위키가 아니므로 오해하지 말 것. 다만 단순히 나치풍이거나 모티브를 얻은 캐릭터는 등재 대상이 아니다.[153]

15.1. 기타 창작물

모티브로 삼거나 그 후예임을 내세우는 집단도 포함한다.

15.2. 나치 전문(?) 배우


단, 위의 배우 대부분은 독일인 또는 독일계 배우라서 나치 역할을 맡은 것이고, 연극 및 TV 드라마, 영화에서 왕성하게 활동하였거나 현재 활동 중이다. 나치 인물 배역은 이들의 필모그래피에서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16. 관련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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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나치 독일의 근간이나 사상 정립에 영향을 준 인물들

18. 용어 및 사건



[1] 국가사회주의 국가라는 뜻으로, 나치 독일을 독일로 인정하지 않는 표현이다. [2] 이는 정식 표어가 아니다. 처음 이 표어가 만들어진 것은 국가의 표어가 아닌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선전용으로 만들어진 표어였다. [3] 본래 나치당의 당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국가의 역할도 겸했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노래'를 선창하고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를 후창하는 식이었다. [4] 아돌프 히틀러 총리 취임 기준. 나치 독일이 완전한 독재적 권력을 쟁취하는 것은 수권법의 통과나 아돌프 히틀러가 퓌러가 된 이후로 볼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 모든 것의 시발점은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날을 기준으로 본다. 나치 통치(홀로코스트 백과사전), Third Reich(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5] 승리의 날 기준. [6] 이후 게르마니아라는 새로운 수도로 재탄생될 계획이었다. [실질적] 헌법상 수도는 여전히 베를린이었다. [8] 당시 세계 7위 [9] 점령 지역 포함. [10] 나치 독일은 히틀러가 퓌러에 집권 한 뒤부터 전체주의 국가로 변질된 것이 맞기는 하지만, 그 전까진 나치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소속된 하나의 당으로서 범 민주주의 체제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11] 가끔 총통이라고 번역되는 독일 단어 퓌러(Führer)는 '지도자'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일종의 고유명사라고 할 수 있으며 '총통'이라는 단어는 의미 그 자체라기보다는 의역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퓌러로서의 히틀러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모두 갖고 있었다. 덧붙여 총통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나치의 이미지가 있지만 중국 대만, 베트남에서는 'president'를 대통령이 아닌 총통(總統)으로 번역하며, 대만은 과거에도 지금도 국가의 수장을 총통이라고 하고 있다. [12] 사진 속 상황은 아돌프 히틀러가 대미 선전포고를 하는 1941년 12월 11일의 모습이다. 중앙에서 연설하는 이가 히틀러, 그 위의 의장석에 앉아있는 인물은 라이히스탁 의장을 겸했던 공군최고사령관 헤르만 괴링, 그리고 야전원수 3명( 빌헬름 카이텔, 후고 슈페를레, 에리히 레더)이 앉아있는 연단 왼쪽 맨 앞줄의 왼쪽 끝이 바로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이 독일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타크)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국회의사당은 방화 사건 이후 나치 집권기 내내 폐쇄된 상태를 유지했으며 의사당 맞은 편의 크롤 오페라하우스가 대체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었다. 크롤 오페라하우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게 파괴되었고 전후인 1951년 철거되었으며 현재 그 자리에는 연방총리청 남쪽의 잔디밭이 조성되어 있다. [13] 아돌프 히틀러 퓌러 취임을 기준으로 하면 1934년부터. [14] nationalsozialistischer Staat( 민족사회주의 국가)의 약자이다. 나치 독일을 독일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 표기는 독일어 위키백과에서 나치 독일을 다룬 문서의 표제어이기도 하다. [15] 수권법 통과 이전까지 나치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존재하는 많은 정당들 중 하나였으며, 유권자의 투표에 따른 민주적 절차로 선출되었다. 당대 독일 국민의 민심은 나치당이 권력을 잡는 것을 허락했을 정도로 극단주의화되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배, 그에 따른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들끊는 분노와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 정당 정치의 폭주를 막을 시스템이 없었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패전 이후 독일이 기본법 1조에 인간의 존엄성을 넣고 헌법수호청을 설립한 이유가 되었다. [16] 공화, 제 같은. [17] 원문은 revanchistisch-라고 쓰여 있는데, 보복주의(Revanchism)를 뜻하는 말이다. 원래 1871년 알자스-로렌을 상실한 후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불타오르던 독일에 대한 정치적 보복 심리를 뜻하는 말이었다. 독일 역사학과 정치학에서는 동방영토를 상실한 전후 독일에서 퍼져나갔던 보복 움직임을 뜻한다. 즉 이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개념이다. [18] 수권법에 따라 당시 독일에서는 대통령 포고령이 헌법의 효력을 가질 수 있었다. [19] 이는 독일 형법 각론 맨 첫 부분이다. 독일법을 비롯한 대륙계 법은 판덱텐(pandekten) 체계에 의해 앞쪽에는 법을 구성하는 원리 등을 담은 총론을 배치하고 그 뒤부터 세부 조항인 각론을 배치한다. 즉 독일 형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나치를 금지하는 부분이라는 의미이다. [20] 3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21] 지금처럼 3절만을 부르지 않고 1절과 2절을 포함하는 형태였다. [22] 일자리 창출과 물류의 원활한 이동을 위해 지은 고속도로로, 전시 상황에는 군용기에 활주로로 이용 할 수 있게 중간중간에 도로 옆에 군용기를 위한 주기장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23] 그래서 1930년대 초반과 비교해서 1939년에는 독일의 임금 수준이 평균적으로 25% 가량 적었다고 한다. 새로 창출되는 일자리들의 임금 수준이 저임금 일자리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치당에서 이러한 불만을 감지하지 못한 것은 아니라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여가생활을 누릴 수 있거나(명칭 '기쁨을 통한 힘') 염가에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보급시키는 식으로 불만을 해결하려 했다. [24] 사실 이렇게 해서 산업 부양력이 급등할 수 있긴 했으나, 문제는 정경유착을 형성한 기업들이 뒷돈을 해먹기 바빴기 때문에 결국 전쟁 후반에는 생산 효율이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25] 나치 정권은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이었기에 어느 정도는 국민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합법적 정통성은 있으므로 쿠데타나 외세의 힘 등으로 집권한 정부에 비해 안정적이고 당당하므로 정권이 불안정하지는 않지만 선출을 통한 집권의 근원이 국민들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독일 국민들은 1차대전 트라우마로 총력전 체제를 혐오했고, 나치 정권은 그런 국민들의 시선을 의식해 총력전 체제로의 전환을 일부러 늦췄다. [26] 그래서 오히려 인플레이션이 안정되고 나자 파산하는 기업이 속출하여 실업자가 늘어났고, 이는 무산(노동) 계급에 치명적이었다. [27] 군비 확장 선언을 한 지 얼마 안 지나서 당시 독일 국방군의 무장은 아직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오죽하면 호전적인 독일 국방부도 프랑스군의 개입을 우려해 참패할까봐 이 도박을 말리려고 했다. [28] 가짜 전쟁을 보면 히틀러의 예상이 아주 틀린 것만은 아니었다. [29] 사실 영국은 됭케르크에 포위된 병력이 전멸당했으면 진지하게 항복을 고려하려 했으나 그 병력들이 모두 살아온 탓에 항복하지 않고 버티게 된다. [30] 이는 스탈린이 대숙청이라는,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정치인, 군인들을 모두 없애버린 대사건이 문제였다. 숙청 당한 사람들 가운데 1차대전, 러시아 내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은 장성-장교들도 포함되어 있었고, 남은 장교들도 숙청당할까봐 몸을 사린 탓에 독소전쟁 초기에는 유능한 장교들의 공백과 군 조직의 경직이라는 악재가 겹쳐 엄청난 피해를 보며 후퇴할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대숙청으로 인한 소련군의 질적 하락은 독소전쟁 발발 1년 전 핀란드와 치뤘던 겨울전쟁에서 잘 드러났기에 스탈린의 오랜 친우 클리멘트 보로실로프가 회의에서 "네가 대숙청 때 군사 장교들을 많이 죽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거 아니야?!"라며 다그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31] 이 경우는 '설상가상'이란 표현이 적합하지 않은 것이, 삼국 동맹 조약에는 동맹국이 선제공격을 했을 경우에 대한 참전의 의무가 없었다. 그래서 헝가리와 불가리아가 독소전쟁에 참전 안하겠다며 뻐기는 근거가 되기도 했다. 단 헝가리는 1941년 6월 27일 커셔 폭격이 발생해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32]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시작했다고 해서 나치 독일이 미국에게 선전포고를 할 '의무'가 없었으며, 일본 역시 독일이 연합국이나 소련과 싸우는 동안 이들 국가에게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특히 소련, 그러나 일본은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할 '의리'도 없었다. [33] 한마디로 히틀러는 대숙청으로 엉망이 된 소련군의 상태와 그에 비해 월등한 독일군의 전력을 봤을 때 1941년에 소련을 치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의 판단은 옳았지만 한가지 간과한것은 소련의 거대한 국토와 자원, 2억이라는 막대한 인구에서 나오는 생산력이 상상을 초월했던 것. [34] 청색 작전 직전의 전황이다. [35] 사실 정치적 의미로 스탈린그라드를 차지하려던 오판 말고도 이미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었는데, 전선이 두 곳이나 생겨버린 것도 있고 무엇보다 히틀러는 소련 곳곳의 작은 마을까지 점령하려고 들었다가 오히려 병력을 지치게 만들었다고 한다. 애초에 히틀러가 불가침 조약을 맺었던 소련의 뒤통수를 친 것이 문제였다. 러시아는 그래도 석유 등 독일 내에서 자체 생산이 힘든 천연자원 등을 보내줘 전쟁에 큰 보탬이 되었는데, 문제점은 이들까지 등을 돌렸으니 엄청난 실수다. [36] 성채 작전 직전의 전황이다. 위의 전투에서 오룔(Orel) 남쪽에 튀어나온 돌출부가 바로 성채 작전의 대표격인 쿠르스크 전투가 벌어진 쿠르스크. [37] 이들은 나치 독일의 반강제적인 참전 요구에 의해 추축국에 참전했기에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38] 핀란드는 독일이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추축국이 되지 않았다. [39] 루마니아는 독일의 가장 큰 석유 공급원이었다. 루마니아를 잃어버린 이후 독일은 헝가리에서 나오는 소량의 석유와 석탄을 액화시켜 얻은 석유 대용품만으로 싸우게 된다. [40] 이들 지역 말고도 독일 영토 대부분에서 독일군 패잔병과의 전투가 이어졌다. 하지만 나치 독일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저항 세력과 시민들이 오히려 연합군을 돕거나 같이 싸우기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이미 나치 독일이 점령했었던 영토 자체 내에서도 전투가 계속 오갔다고 한다. 이터성 전투와 같은 경우로 반나치 독일군들도 연합군에 가담한 경우가 있다고 한다. [최북단] 일부가 핀란드를 통해서 건너온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제하에 있었다. [42] 베를린 함락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특히 프라하 인근의 독일군은 서방 쪽으로 탈출을 시도했으나 이반 코네프가 이끄는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공격으로 인해 싸그리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43]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하고 라트비아 지역에 고립된 독일군들을 뜻한다. 이들은 숫자가 꽤나 되었기 때문에 소련군도 제압하자면 큰 피해를 각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결국 대치를 이어가다가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소련측에서 전하고 나서야 항복했다. [44] 1945년에도 나치 독일이 점거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군이 이 지역을 네이팜탄으로 폭격하여 최소 1,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죽기도 했다. [45] 아예 전황에 영항을 못 미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이 항구를 통제함으로서 연합군이 통제하는 항구와 전선까지의 거리가 늘어나 보급의 효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46] 항복을 통해 서방연합국과의 전쟁을 일단 끝내고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소련군을 밀어내거나, 서방과 먼저 합의했다는 명분을 들이대며 소련과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추진하려던 듯하다. [47] 다만 나치 독일의 구성원들 중 전범 수준이 아닌 일부는 서방과 소련에 의해 새로운 정부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게 된다. 나치 물이 독일에서 완전히 빠진 게 1970년대 이후인 이유도 이들까지 영향력을 상실하고 정계에서 사라진 시점이 이 시기였기 때문이다. [48] 다만 가우라는 단어 자체는 고대/중세 독일어에서부터 존재했으며, 실제로 행정 구역을 지칭했었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부/목/현 정도의 어감. [49] 동(東)하노버로 번역 가능. [50] 북(北)베스트팔렌으로 번역 가능. [51] 남(南)하노버로 번역 가능. [52] 독자 행정 구역인 베를린에다가 주도를 정한 게 어색해보이지만, 불과 최근까지도 경상북도 도청이 독자 행정구역인 대구광역시에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편할 것이다. [53] 남(南)베스트팔렌으로 번역 가능. [54] 원래 자유시였지만 1937년에 히틀러가 헤센나사우 주의 주도로 격하한다. [55] 하(下)슐레지엔으로 번역 가능 [56] 상(上)슐레지엔으로 번역 가능 [57] 대전쟁 이후에 폴란드 정부의 폭동 지원으로 떨어져 나간 지역으로, 폴란드어로는 카토비체. [58] 서부 변경으로 번역 가능 [59] Oberrhein. 상(上)라인. [60] 동부 변경으로 번역 가능. [61] 상(上)바이에른으로 번역 가능. [62] 하(下)도나우로 번역 가능. [63] 상(上)도나우로 번역 가능. [64] 히틀러 본인의 고향이다. [65] Reichenberg, 현재 체코의 리베레츠. [66] 특히 리투아니아에 가혹한 정책이 펼쳐졌다. 게네랄플란 오스트에 의하면 절멸될 리투아니아인 비율은 85%에 달하였다. [67]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그단스크는 여전히 독일풍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그만큼 그단스크는 폴란드 민족주의 성향인 이들조차 독일 문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지역이었다. [68] 특히 루터교회 [69] 실제로 이 점과 반공주의가 프로이센 군부와 나치당의 공통점이었다. 그러나 이걸 빼면 둘의 사이는 매우 나빴다. 단적인 예로는 군부의 독일 국방군과 나치당의 슈츠슈타펠 간의 불화가 있다. [70] 2차 대전 최대의 인명 피해를 겪은 소련은 승전국이었기 때문에 영토 및 상임이사국 지위 등 보상이라도 받았지만, 독일은 침략국이었자 패전국이었기 때문에 인명 피해와 별개로 전후에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나마 독일보다도 더 피해를 입은 나라는 2차 대전에서 소련 다음의 인명 피해를 겪은 직후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륙을 상실한 중화민국뿐인데, 대륙 상실은 2차 대전의 나비 효과이지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71] 괴를리츠 지역 등 전체 슐레지엔의 4% 정도만 독일에 남아있으며 현재 작센 소속이다. [72] 남아있는 포메른 서부 1/4(포어포메른)은 메클렌부르크와 합쳐져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으로 재편성되었다. [73] 엘베 강 동쪽부터 오데르 강 서쪽까지만 독일에 잔류했다. 대표적으로 베를린을 비롯한 브란덴부르크 일대도 본래 슬라브의 영역이었으며 동방 식민 운동을 통해 독일 문화권에 편입되었다. [74] 물론 독일이 패전에서 부활하여 오늘날의 지위를 획득하기까지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의 실패를 반추하여 안으로는 특수노정(Sonderweg)을, 밖으로는 세계전략(Weltpolitik)을 포기하고 자국의 현실적인 역량 한계를 파악하고 철저하게 경제적 우위를 바탕으로 명분을 확실하게 다진 상태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무너진 국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미국은 이런 기조를 동아시아에도 적용하려 했다. [75] 나치 집권 시절은 전간기까지 있었던 성과들이 결과만 놓고 봐도 전쟁의 폐허 속으로 깡그리 사라진 걸 넘어 분단과 영토 상실, 그리고 전 국토의 초토화로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보다 훨씬 후퇴한 나라를 후손에게 남겼다. 흔히 독재자를 평가할 때 민주주의 훼손과 인권 유린이라는 공통적 과오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공적이 있다면 보통 공과로 평가하지만, 나치 독일은 후손들에게 아직까지도 주변 국가의 눈치를 봐야 하는 과오만을 남겼다. [76] 물론 징병제 자체야 프랑스 혁명 이래 영국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유럽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지만, 선제 공격은 보통 제한적인 징병으로 어느 정도 전략적 목표의 달성이 가능하다고 판단될 때에나 이루어졌고, 총력전은 대부분 자국이 의도치 않게 침공 당해 멸망의 기로에 놓였을 때로 한정되었다. 전쟁의 역사라는 유럽 근현대사에서도 나치처럼 먼저 침략 전쟁을 벌이는 주제에 개전 극초기부터 국가의 다른 영역은 고려하지 않고 오직 전쟁만을 위한 체제를 만든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77] 독일의 잔혹 행위에는 못 미치지만 현재 독일 동부국경 동부의 발칸 발트해 연안 도나우 강변, 폴란드, 러시아 등지에 살던 독일계 주민 1,300만 중 약 200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얼마나 심각했느냐면 소련군이 진주한 뒤 현지 주민들의 독일인에 대한 보복이 너무 심해서 막아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니얼 퍼거슨 저 '증오의 세기'에는 소련군이 독일인에게 점령지에서 독일군이 했던 짓의 단 10%만 해도 '독일인은 다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78] 단적으로 전투기만 봐도 현재 독일군이 전차나 다른 육상병기는 자체 개발해서 쓰지만 전투기는 아닌 것만 봐도 답이 나온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독자개발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기술, 자본 등)이지 유로파이터 타이푼처럼 유럽 합작 전투기는 잘만 만들어내고 있다. [79] 히틀러가 핵물리학을 '유대인 물리학' 드립치면서 폄훼하기도 했다. [80] 노령의 프로이트 본인을 직접 건드리진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가 체포되어 하루 동안 심문을 받고 나서 풀려난 일이 있었다. [81] 이렇게 흘러 들어온 독일 영화인들은 표현주의가 할리우드에 정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실, 이전부터 무르나우같은 예도 있었지만 뇌관을 제대로 때린 셈. [82] 동상 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는 시장직에서 짤렸고, 나중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다. [83] 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 [84] 니얼 퍼거슨 저 <증오의 세기> 서적으로. [85] 물론 이 시기 총선은 나치당만 있었다. [86]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그렇게 단시간에 군부의 지지를 얻었던 것이 "프랑스에게 복수한다."라고 천명했기 때문. 제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은 전쟁을 지속할 만한 힘이 없었지만 전장 자체가 독일 밖에 있어서 당시 국민들 다수는 전황이 패색이 짙은것을 잘 인식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군부가 개구라를 쳐 놨던데다가 종전시점까지 독일내로 연합군이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을 그렇게 굴욕적이라 느낀 것. 그리고 2차대전 초는 1차대전보다 상황이 더 좋았는데 먼저 1차대전동안 밀어내지도 못했던 프랑스를 6주만에 밀어났고 소련을 침공할 시점에서는 스위스, 스페인, 포르투갈, 이탈리아, 핀란드, 스웨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를 제압했고 그나마도 스위스와 스웨덴은 살짝 나치에 협조적인 중립국, 스페인은 친독 국가, 이탈리아는 추축국 동맹이며 핀란드도 소련과 맞서자는 의미로 나치와 가까운 편이었다. 포르투갈은 진짜배기 중립국인데다 어차피 거기까지 갈 이유도 없었다. 상황이 좋아도 너무 좋으니 굳이 협상할 필요성을 못 느낀 것. 물론 스탈린 식으로 군부인사도 싹 다 숙청한 뒤 국가를 철저하게 봉쇄하고 국민을 가축으로 전락시켜서 총력전할 돈과 시간을 세뇌에 쏟아부었으면 정권유지가 가능했겠으나 히틀러 본인부터 범게르만주의를 표방한 대전쟁을 진심으로 신봉했기에 결국 나치의 국가규모 자살전은 필연적으로 일어났을 일이었다. [87] 물론 나치도 아우토반을 건설하려는 등 인프라 투자가 없던건 아니었지만 그 수준은 군수공업 같은 분야에 비하면 못미쳤고 이마저도 어떻게 보면 군수산업의 일종이었다. 아우토반 역시도 향후의 전쟁에 대비한 건설이었기 때문. [88] 사실 독일은 의외로 1944년 이전까지 전쟁 경제로 들어가지 않았는데, 그 이유가 히틀러가 1차대전 당시 트라우마로 여론이 전쟁을 반대할까봐 전쟁경제 전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89] 물론 스탈린이 통치하던 소련 또한 대숙청, 카틴 학살을 벌이는 등 어느정도 나치에 비교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지만, 스탈린은 얼마 후에 죽었고 이후의 소련은 나치와 비교하면 훨씬 온건한 권위주의 체제로 전환했다. [90] 물론 이는 동독이 소련의 위성국 이였기에 이렇게 가르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91] 그냥 노래만 틀어주고 따라 부르지는 않는다. [92] 유럽이 다른 대륙보다 월등히 발전이 빨랐기 때문에 지금 유럽의 대부분의 국가가 선진국이라는 것을 들어 은근히 우월감을 고취시킨다거나, 약탈과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인 대항해시대를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하는 등. [93] 이를테면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헌법적 애국주의(헌법을 사랑하는 것이 곧 애국이다) 등은 내셔널리즘과는 그 방향이 많이 다르다. [94] 다만 아르헨티나 등에서 나치 잔당을 받아준 건 그 나라들이 친독이라서보다는 다른 부득이한 이유로 받아줬을 가능성이 더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문서로. [95] 계속전쟁 당시 나치와 동맹을 맺고 협력했다. [96] 단,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렸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던 것이다. [97]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나치 독일과 추축국이었음에도 자국이 히틀러의 강압에 의해 나치 독일의 총알받이로 추축국에 참전해야 했던 정치적 피해국이었다고 주장하며 현재 독일이 폴란드와 체코 등 나치 독일에게 피점령을 당했던 주변국가들에게 매년 과거사 사과를 하는 것처럼 제2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사과를 독일 정부가 자국에게도 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다만 독일 정부에서는 2차 대전 당시 나치의 직접적인 피점령국이던 체코, 폴란드와 주권국가였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동일선상에 올릴 수 없다며 사과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98] 사실 중국과 독일은 상대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악감정은 별로 없다. 오히려 중일전쟁 초반기에는 나치 독일이 중국에게 고문관 파견과 무기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99] 이 시기 실제 독일 국민차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팔린 차량은 오펠 올림피아였다. [100] 현재의 독일 사회민주당과 창당일자(1875.5.27.)도 그대로 계승한 동일한 정당이다. 물론 나치 집권 이후 법적으론 사라졌지만 지하 조직이나 망명으로 세력과 인사들은 유지되었고 나치 패망 후 영국 군정청의 승인으로 부활한 뒤 빠르게 재건했다. 이 정당은 현재도 원내 제1당이자 여당으로 당당히 활동하고 있다. [101] 괴벨스 휘하의 우파(Ufa) 영화사에서 제작했다. [102] 히틀러가 분노 발작 때문에 양탄자 귀퉁이를 물어뜯었다는 소문은 1938년 9월 22일 히틀러와 체임벌린 회담에 대한 William Shirer 기자의 보도에서 기인한다. Shirer는 단지 히틀러가 신경쇠약으로 쓰러졌다고만 썼다. 물론 '양탄자 무는 자'라는 이미지는 매우 오래 지속되었다. Kershaw, Hitler, p. 169. [103] "예사롭지 않은 손"과 같은 총통의 특징은 물론 그에 대한 공적 이미지의 한 부분이기도 했고 대중 매체에서도 다루었다. 다음을 참고할 것. Kershaw, op. cit., p. 410. 이러한 이미지들이나 풍문으로 널리 퍼진 히틀러의 분노 발작 이야기들은 총통이 대중문화의 의미에서 '공인'이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히틀러와 직접 만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사람들이 총통의 공적 이미지에 들어맞는 바로 그 특징들을 강조했음을 보여 준다. [104] SRX(통합 특별보고서) 1167, 15. 10. 1942, TNA, WO 208/4161. [105] 물론 백장미단으로 대표되는 중도/우파 성향 세력이나, 1944년 7월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난 구체제 융커/군부들의 반대 움직임 역시 존재하였으나, 나치 정권 시기 내내 가장 뚜렷하게 저항 움직임을 펼친 세력은 아무래도 좌파 계열이었다. [106] 루돌프 쇤펠더는 1944년 7월 31일 노르망디에서 전사했다. [107] 1942년 친위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암살되자 나치 독일이 보복 학살을 벌였던 마을이다. [108] 사진 속 여성이다. 앞의 아기는 어린 시절의 작가 본인. [109] 친위대 의사 카를 브란트에게서 따온 작전명이다. [110] 그림 아래에는 "1959년 11월, 법원에 출두하는 베르너 하이데(Werner Heyde im November 1959, als er sich den Behörden stellte.)"라고 적혀 있다. [111] 김승호. (2020).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가의 책무 -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가족초상화시리즈>(1965)를 중심으로 -. 석당논총, 76, 5-36. [112] 원제는 '독일의 한 작가'. 국내에는 도서출판 한울을 통해 번역 출판되었다. [113] 2018년작. 국내에는 2020년에 개봉했다. 도너스마르크 감독은 동독 독재정권의 감시를 그린 영화 타인의 삶의 감독으로 유명하다. [114] 여담이지만 마틴 브로샤트가 사망한 이후 브로샤트 본인이 나치 당원이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다시 한 번 역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학계 일각에서는 브로샤트가 본인의 흑역사를 부정하기 위해서 자기 입맛에 맞춘 역사관을 제창한 것 아니냐는 견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그의 일생과 성과는 구별하는 것이 학계 내의 입장이다. [115] 물론 노동자 계층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 계층이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나치 정권의 집권기 내내 가장 큰 잠재적 반대 세력이 노동자 계층이다 보니 이들의 주 연구 대상은 노동자 계층일 수 밖에 없었다. 이 외에도 포이커트의 경우에는 중산층 청소년 집단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나치 정권에 대한 중산층 청소년들의 입장은 본 항목의 하부 서술 및 스윙 청소년 문서로. [116] 앞서 여러번 언급됐듯이 나치 정권은 민주주의 선거로 집권한 정당이었기에 제아무리 독재 체제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노동자 계층의 민심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117] 히틀러 유겐트 간부들에게 야유를 퍼붓고 도망가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대범해져서 두들겨 패는 경우도 급속도로 늘어났다. 오죽하면 루르 지역의 나치 관구 담당자가 이를 갈면서 질서경찰에게 검거 협조를 요청할 정도. 심지어 전쟁 말기였던 1944년에는 쾰른에서 일부 청소년들이 무장봉기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118] 물론 전쟁이 터지고 1942년부터 전황이 심상찮게 돌아가자 통제가 강화되면서 이전의 생기넘치던 독일의 모습이 없어졌다고 한다 [119] 체제 자체에 대한 항쟁(Widerstand)과 구분하기 위해서 브로샤트의 경우는 소극적인 일탈 행위를 설명하기 위해 Resistenz라는 개념을 창안해냈다. [120] 예를 들어 백장미단. [121] 심지어 일부 일상사가들은 백장미단과 같은 나치 독일에 항쟁한 일부 인물들에 대해서 박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이들 역시 그저 소극적인 저항을 펼치다가 나치 정권에게 시범 사례로 걸렸을 뿐인데, 전후 새로운 국가 정체성을 위해 동독 정부와 서독 정부에 의해 국가적인 차원의 영웅으로 신격화됐다는 것이다. 이게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백장미단의 체포일은 1943년 2월 18일로 괴벨스의 저 유명한 총력전 연설과 동일한 날이다. 나치는 아리아인이 확실한 반나치 인사들을 처리할 때 무작정 죽이기보다는 치부를 찾아내 사회적으로 매장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적당한 고위직을 줘 입막음하는 선에서 끝냈는데 백장미단은 이례적으로 4일만에 신속하게 처형당했다. T 계획에 반대하던 성직자들은 함부로 못 건들던 나치가 본보기로 대신 처형시켰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122] 특히 동성애자와 같은 성 소수자들은 나치가 패망하고 서독이 세워진 후에도 나치즘의 희생자로 분류되지 않았던 데다, 오히려 정신병원 같은 곳에 끌려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참고로 본 단락 서두에 언급된 저명한 일상사 연구자인 데틀레프 포이커트는 본인도 동성애자여서, 나치 치하의 동성애자들의 삶을 연구하는 데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23] 1932년 독일 대통령 선거에선 아돌프 히틀러 후보 36.8%(낙선), 수권법 통과 이전 바이마르 공화국 마지막 총선에선 나치당이 총원 647석 중 288석으로 44.5% [124] 산업화에는 성공했지만 정치적 측면에서 근대성이 결여됐던 독일 제국의 1871년 성립부터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로의 이행이 역사적 필연인지, 우연인지에 대한 논쟁은 독일 사학계에서 1945년 뒤로 오랫동안 격렬한 논쟁거리였다. 이를 특수여정( Sonderweg) 테제라고 부른다. [공동교전국으로] 연합국들에게 대항했지만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축국이 아니다. [공동교전국으로] 추축국의 편에 섰지만 추축국은 아니다. [A]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유지하여 독일 제국의 침공을 면하였다. [A]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유지하여 독일 제국의 침공을 면하였다. [129] 주변국인 스웨덴이 중립국을 표방하나 실질적으로 친독 성향이었고 철광석 수급을 위한 목적으로 침공하였다. 노르웨이 왕실도 이러한 점 때문에 스웨덴이 아닌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A]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중립을 유지하여서 독일 제국의 침공을 면하였다. [B]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을 받았으며 이로써 또 침공을 당하였다. [B]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을 받았으며 이로써 또 침공을 당하였다. [133] 1867년 영세중립국으로 보장받았으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의 침공을 받고 또 침공을 당하였다. 이번에는 아예 독일 본토로 강제로 합병되었다. [134] 원래는 히틀러가 추축국으로 편입시키려 했지만 친독 세력들이 전멸되고 친영반독 세력들이 집권하면서 침공당한다. [135] 당시 그리스 총리 메탁사스가 독일 유학파라 친독 성향이 짙어서 이 당시에는 친독 노선을 지향하였으나 메탁사스가 급사하고 반독 세력이 주도하고 이전에 이탈리아가 침공하였으나 패전하면서 독일에 도움을 요청함에 따라 침공하였다. [136] 벨라루스 SSR, 우크라이나 SSR, 리투아니아 SSR, 라트비아 SSR, 에스토니아 SSR, 러시아 SSR 일부 까지 [137]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당초에는 침공을 하지 않기로 했지만 히틀러가 일방 파기하였다. [138] 1943년 연합국에게 항복하고 무솔리니 정권의 실각으로 인해서 바돌리오 정권이 세워지면서 감금된 무솔리니를 구해내고 독일군을 통해서 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하고 북이탈리아에 친나치 괴뢰국인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39] 1944년 호르티 미클로시가 단독으로 연합국과 협상하려하자 헝가리를 침공해 헝가리 국민단결정부를 세운다. [140] 사실 나치 독일은 오컬트에 부정적이었으나, 나치당의 한 축이었던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힘러 때문에 이미지가 그쪽으로 굳어져 버렸다. [141] 대표적인 실제 사례로는 친위대 국가보안본부장이었던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친위대 대장, 친위대 공작원이었던 오토 슈코르체니 친위대 대령 등이 있다. [142] 독일에서 나치 독일이 검열없이 그대로 나온 사례가 없는 건 아닌데 나치 독일이 철저하게 역사대로 패배하는 악역으로만 나와야 한다. 그 외의 경우는 얄짤없이 검열된다. [143] 예: 아돌프 히틀러 → 알베르트 힐러. [144] 초상화를 어둡게 만들어 실루엣만 보이게 만들었다. 독일을 제외한 국가들은 제대로 나오게 하는 무료 DLC를 설치하면 그대로 나온다. [145] 물론 이것은 히틀러를 도와주는 척 했던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헬보이를 소환하기 위한 것이었다. [146] 정확히는 2014년부터 발매된 더 뉴 오더 이후. [147] 게임 자체와 별개로 나치가 전쟁에서 이긴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묘사도 매우 충실하다. 가상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한 번쯤은 둘러볼 가치가 있는 게임. 대중 가요, 일반 시민들의 대화 내용과 그걸로 짐작할 수 있는 가치관, TV 광고, 신문 기사, 도시의 모습 등에서 수준 높은 완성도의 가상 세계관을 볼 수 있다. 당연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 건 순수한 '기술/공학' 말곤 없는 암울한 세계. [148] 하지만 독립된 국가들이라고 멀쩡하다고는 못하는 게, 히틀러가 죽을 시 발동되는 세계 멸망 장치 때문에 전세계적으로 기상악화 재해에 휘말려있다. [149] 지금도 일본 극우단체 집회때 하켄크로이츠가 욱일기와 함께 등장하기도 할 정도다. [150] 나치를 쏴죽이는 게임을 하다가 하켄크로이츠를 보고 경악하는 등 나치였다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 있다. [151] 심지어 모티브가 모티브인 만큼 대부분이 나치 독일 시절 군인들의 복장을 하고 있다. [152] 이쪽은 슈츠슈타펠 복장과 붉은 완장까지 있었으나 MP40의 붉은 완장은 검열당했다. 다만 MP41의 붉은 완장은 그대로다. [153] 예를 들어 철십자 군단, 쿠로모리미네 여학원 등의 경우이다. 이들은 진짜 나치가 아니므로 등재되지 않았다. [154] 기후와 문화는 현실의 대영제국과 흡사하며, 국가의 지리적 위치와 제식 병기류는 옛 독일(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에서 따온 듯 하다. [155] 다만 쿠로모리미네는 숙청이 존재하는 프라우다라든가 반자이 돌격만 외치는 치하탄과 달리 전차도복과 학원함, 전차, 전술만 나치 독일의 것을 사용했다. 진짜 나치 풍의 쿠로모리미네가 2차 창작에서 가끔식 나오긴 하지만. [156] 사실 미국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실행되었던 제 3의 물결이라는 이름의 사회 실험을 모티브로 했다. [157] 나치의 선전 영화 의지의 승리에서 레퍼런서를 따왔다. [158] 독일을 모티브로 한 전체주의 경찰 국가로 소설을 보면 완전히 나치 독일을 모티브로 한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회 체제나 문화가 일치하는데, 문제는 이 소설이 나치 독일이 탄생하기 20년 전인 1918년에 출판되었다. [159] 러시아의 네오나치가 그 모티브. [160] 이름만 다를 뿐 실제 모티브는 물론 작중 행적 역시 사실상 독일 제국과 나치 독일이랑 판박이며, 나치 독일 해군 소속 함정(최근에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군함도 합류하긴 했지만)들로만 이루어져 있다. 심지어 동맹국인 중앵(사쿠라 엠파이어)의 모티브는 일본 제국이다. [161] 스타워즈 전체에 혐나치 요소가 있다. 악역들은 뭔가 나치풍이라고. 팰퍼틴 황제와 아미티지 헉스는 아예 히틀러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한다. 거기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7에 헉스가 연설하는 장면은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162] 지구 출신의 인류 우월주의를 보이는 것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다만 민족주의 종교를 금지하는 등 소련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나치 정권 역시 점차 기독교를 부정하고 대체하고자 고대 게르만 신화, 북구 바이킹 신화(오딘과 발할라 등)을 가르쳤기 때문에 어느쪽으로 봐도 무방하다 [163] 독일 제국의 특징 또한 있다. [164] 알 카포네 아돌프 히틀러에서 모티브를 따온 아르투로 우이가 시카고에서 세력 확대를 하는 내용의 희곡이다. [165] 검열판 울펜슈타인 시리즈에서는 독일을 나치당이 아닌 '볼프스클란'이라는 가상의 조직이 장악했다는 설정이다. [166] 정확히 말하면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제국으로 시작해서 작품 후반으로 갈수록 나치 독일에 가까워진다. [167] 전투바보 설정 등 허접함과 황제 중심주의 설정은 일본 제국을 모티브로 따온 것 같다. [168] 나치 독일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동로마 제국 특징 또한 보유하고 있다. [169] 독일을 중심으로 독일어권 여러 국가들(토메니아(Tomania, 위대한 독재자에 나오는 국가. 모티브는 독일.), 메카니아(Meccania, 오웬 그레고리의 책 '메카니아: 초국가(Meccania: The Super-State)'에 나오는 전체주의 경찰국가. 모티브는 역시 독일.))을 합병하고, 폴란드, 오스트리히(Osterlich, 위대한 독재자)에 나오는 국가. 모티브는 오스트리아)를 침략하여 강제 합병하며, 박테리아(Bacteria, 위대한 독재자에 나오는 국가. 모티브는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어 만든 연합국가다, [170] 점령지의 포로들을 중철기 개발에 관련된 인체실험에 강제 동원하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를 연상시키게 하는 악랄한 행보를 보인다. [171] 정확히는 유대인들은 로, 독일인들은 고양이로 표현했다. [172] 독일 제국의 특징 또한 보유하고 있다. [173] 나치당과 비슷하게 국수주의, 보복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예거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174] 작중 국가적으로 보이는 악행과 막장 사상은 영락없이 나치를 비롯한 추축국과 똑같으나 대영제국의 요소도 좀 가미되었다. [175] 현실 세계의 미국과 달리 하는 짓은 오히려 나치에 가깝다. 그리고 이세계의 중국은 일본 제국이 모티브다. [176] 나치 독일과 소련, 프랑스, 영국 등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177] 목소리만 출연하지만, 일단 캐스트 상 배역은 유보트 함장이므로 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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