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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얄마르 샤흐트 Hjalmar Schac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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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 |
호러스 그릴리 얄마르 샤흐트 Horace Greeley Hjalmar Schacht |
출생 | 1877년 1월 22일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팅글레프[1] | |
사망 | 1970년 6월 3일 (향년 93세) |
서독 뮌헨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 |
가족 | - |
학력 | 킬 대학교 경제학 박사 |
IQ | 143 |
직업 | 경제학자 |
정당 |
,(1918년 ~ 1926년), ,(1926년 이후),[2] |
서명 |
|
[clearfix]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의 경제학자이자 국가은행(Reichsbank) 총재이다.2. 생애
2.1. 출생과 성장
샤흐트는 팅글레프에서 태어나[3] 양친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는데 아버지인 윌리엄[4]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후 미국 저널리즘의 선진성에 감명받아 장남인 얄마르의 이름에 미국의 언론인이자 《뉴욕트리뷴》의 편집자인 호러스 그릴리[5]의 이름을 붙였다.1895년부터 1899년까지 샤흐트는 독일의 킬, 베를린, 뮌헨 등의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해 1899년에 킬 대학교에서 중상주의에 관한 연구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땄다. 이후 1903년에 드레스덴 은행에 입사하여 경제 실장으로 일한 샤흐트는 1908년에 부고문이 되었고, 1916년에는 사립은행인 독일 국가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그는 통화 위조 사건에 휘말리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인 1918년에 독일 민주당(DDP)의 공동 설립자가 되었는데, 1922년에는 독일 국가은행을 다름슈타트 은행과 합병시켜 다름슈타트 & 국가은행을 설립했다. 1923년 1월 11일에 "독일 정부가 베르사유 조약에서 정한 배상금 지불 의무를 불이행한다."라는 이유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이러한 프랑스의 횡포에 독일은 우익부터 좌익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당이 분개하여 빌헬름 쿠노(Wilhelm Cuno) 내각이 주도하여 루르 지방의 공장 정지 등 소극적인 저항을 실시했지만 그 영향으로 독일의 마르크는 순식간에 폭락하여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을 맞이하고 말았다.
결국 1923년 8월 12일에 쿠노 정권은 붕괴되었고 인민당, 가톨릭 중앙당,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이 모두 참여한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총리의 연립 내각이 성립했다. 슈트레제만은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아가면서도 루르 지방 점령지의 저항을 중지시키고 마르크화 안정의 길을 택했다. 마르크화의 안정을 위해 샤흐트는 민주당 내에서 새로운 마르크화의 발행을 주장했다. 재무장관인 루돌프 힐퍼딩[6](Rudolf Hilferding)과 한스 루터(Hans Luther)도 마르크화 안정책의 검토를 진행했지만 샤흐트의 주장이 채택되어 1923년 11월 13일 샤흐트는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으로부터 라이히 통화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은 독일의 중앙은행인 국가은행(Reichsbank, 라이히스방크) 총재 루돌프 하펜슈타인(Rudolf Havenstein)의 역할을 기대했지만 그는 정부와 경제인들의 신용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였고 결국 새로운 통화위원인 샤흐트가 나서 화폐개혁을 단행했는데 그가 제안한 렌텐마르크는 금본위제를 제안했지만서도 일단 독일의 부동산과 상공업 자본을 기초로 하는 보조통화여서 1923년 11월 20일부터 1조 마르크는 1 렌텐마르크로 교환되었다. 이에 의해 초인플레이션이 멈추면서 기적적으로 마르크화의 신용은 회복되었고, 이듬해인 1924년에는 금본위제의 라이히스마르크로 교환되었다.
하펜슈타인이 사망(1923년 12월 20일)하면서 공석이 된 국가은행(Reichsbank)의 총재로 취임한 샤흐트는 프랑스가 배상금 배상 문제에 군사력을 사용한 일에 반감을 가진 영국 은행 총재 몬터규 노먼(Montagu Collet Norman, 1st Baron Norman)과 접근했다. 프랑스는 거듭 루르 지방을 점령했지만 영국은 이에 반발하여 독일의 배상방법에 대한 전문 위원회의 창설을 요구했다. 이 제안을 미국도 찬성하자 프랑스는 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미국의 찰스 도스(Charles Dawes)를 위원장으로 하는 도스 위원회가 창설되었다. 샤흐트는 이 위원회와의 협상에 참가했는데 도스 위원회는 1924년 4월에 새로운 배상금 지불안인 도스 안을 작성했다.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이 벌어지자 샤흐트는 폴란드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는 절대로 독일이 폴란드한테 무역전쟁에서 밀리면 안 된다며 보복관세 지속부과를 주장했다.
1929년 2월 11일에 독일의 새로운 배상금 지불 방식에 관한 전문가 회의가 미국 은행가인 오언 영을 의장으로 하여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의 수석대표로 출석한 샤흐트는 조약체결 후 우파로부터 받을 비난을 두려워하여 슈트레제만 수상의 방침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했다. 대안각서엔 독일 식민지의 반환요구와 폴란드 회랑의 반환요구를 조건으로 내걸었는데, 당장이라도 회의를 결렬시킬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샤흐트는 책임회피를 위한 공작을 실시했지만 1929년 6월 7일에 영이 제시한 안건을 받아들였다. 이에 독일의 배상금액은 대폭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독일은 그 후에도 59년에 걸쳐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게 되었다. 이것은 나치당을 비롯한 독일 내 극우파의 반발을 촉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샤흐트는 그 자신이 독일 측 대표로 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영 플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영 플랜 도입의 책임을 슈트레제만 한 사람에게 전가했다.
2.2. 나치당 활동의 시작
1929년 10월 24일에 미국 뉴욕의 월가 증시가 대폭락하면서 대공황이 발생했다. 독일도 실업자가 넘쳐났는데 실업보험법이 개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재정의 균형은 회복되지 못했다.루돌프 힐퍼딩 재무장관과 재무차관인 요하네스 포피츠(Johannes Popitz)는 외채를 발행하기로 결의하여 미국의 은행이 이에 응대했지만 라이히스방크 총재로서 정부에서 독립적인 입장이던 샤흐트는 적자를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에 반대했다. 샤흐트는 이 때 국가인민당의 후겐베르크 및 나치당의 히틀러와 연대했다. 이 탓에 외채에 관심을 보이던 미국은행도 손을 놓아버려 1929년 12월 21일에는 힐퍼딩과 포피츠는 사직했다.
1930년 3월 6일에 샤흐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대담하며 영 안에 반대했다. 힌덴부르크는 샤흐트를 설득했지만 샤흐트는 3월 7일에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을 사임했다. 야심가였던 샤흐트는 이 때 힌덴부르크를 이어 대통령이 되려고 생각하여 본격적으로 나치당에 접근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도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1931년 10월에는 하르츠부르크 전선(Harzburger Front)[7]에 참가하여 자신의 지인인 은행가와 실업가를 히틀러에게 소개해 나치당의 활동 자금 유치에 노력했다.
크루프, 유나이티드 스틸, 이게파르벤 등 중공업계의 나치당 지원은 샤흐트의 추천에 힘입은 바가 컸다. 1932년 11월 29일에 정재계 인물들을 연대하여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라는 탄원서를 냈는데, 결국 1933년 1월 30일에 히틀러는 힌덴부르크로부터 수상에 임명되어 나치당은 정권을 장악했다.
1933년 2월 20일에는 히틀러가 괴링의 집무실에서 샤흐트를 비롯한 실업계 수뇌부 25명을 소집했다. 마르크스주의의 근절과 재무장을 약속하는 대신 나치당에 대한 헌금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담에서 나치당은 300만 마르크의 헌금을 모았다.[8] 1933년 3월 16일에 샤흐트는 다시 라이히스방크 총재로 취임했다. 그리고 1934년 8월 2일엔 경제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5월 21일에 전시 경제에 대한 전권위원이 된 샤흐트는 나치 정권 초기에 아무런 제약없이 독일 경제를 주물렀다. 시장경제 신봉자였던 샤흐트는 대기업이 나치당의 지배 및 간섭을 받지 않도록 노력했다. 경영자단체, 상공회의소를 아우르며 제국 경영자단체 연합의 창설에도 관여했는데 샤흐트는 나치당 최후의 부르주아 대표이기도 했다.
재무장으로 군사비가 늘어나자 국민들의 인플레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비를 조달하는 방법으로 메포어음(Mefo[9]-Wechsel)을 도입했다. 메포어음이란 독일 국방군으로부터 수주를 받은 기업이 채권의 발행인이 되어 정부가 이 채권을 사들이는 의무를 지며 라이히스방크가 채권의 재할인을 보증하는 증서였다.
전간기 당시 나치 독일의 경제를 성장시킨 주역은 샤흐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에서 대공황이 일어나고 전 세계의 국가들이 크나큰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을 당시 샤흐트가 경제장관으로 지내고 있었던 독일은 케인즈의 경제이론을 어떠한 국가보다 우선적으로 실시하여 대공황의 늪에서 비교적 빨리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당시 독일의 실업자 수는 수백만에 달했는데, 일련의 경제정책들로 길거리에 넘쳐나던 노숙자들은 사라지고, 민간인들에게 일자리가 대량으로 제공되어 국민들의 구매력이 올라갔다.
만약 아돌프 히틀러가 군비에 온 힘을 집중시키지 않고 민간사업에 예산을 크게 할당했다면, 독일은 현대의 독일처럼 유럽의 경제 맹주가 되거나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아서)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포메른 이동 지역 등 구 동방 영토의 영유권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간기 당시 독일의 경제는 표면적으로는 실업률이 줄어들고 시장이 활성화되었으므로 성장 중인 듯이 보였다. 그러나 실상은 히틀러가 군비에 지나치게 투자했기에 '군수산업'과 '민간산업' 간 격차가 심화되고 있었다.
군수공장이 늘어나니 일자리도 그에 맞추어 많아졌지만, 군수공장이란 장기적으로는 아무런 생산성이 없다. 사실상 국가 예산으로 공장 노동자들에게 '월급'이란 이름이 붙은 '취약계층 지원금'을 퍼붓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군수산업 부흥이 경제적 발전으로 이어지려면 전쟁이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면 감당해야 할 인력과 여러 물자의 손실을 고려한다면, 군수산업 성장이 과연 경제적인 이익을 가져다줄지는 의문스럽다. 실제 역사에서도 나치 독일은 프랑스 침공 이후 프랑스의 경제력을 그대로 흡수하였으나 독일인들이 겪어야 할 경제 상황은 결과적으로 악화되었다.
2.3. 몰락
1934년부터 1937년 사이 메포어음의 총액은 204억 마르크를 상회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이후가 되자 인플레이션을 피할 길이 없게 되어 1938년 이 채권은 중지되었다. 4개년 계획의 주도자였던 헤르만 괴링과의 마찰이 급증하자 샤흐트는 1937년 11월에 경제장관과 전권위원직에서 해임당했다.이후로도 라이히스방크 총재직은 계속 유지했다. 그러나 1939년 1월 7일 인플레이션이 초래된다는 이유로 전쟁에 반대하면서 결정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1939년 1월 19일 총재직에서 해임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을 중심으로 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체포되어[10] 1944년 7월 29일부터는 강제수용소 라펜스브뤼크(Ravensbrück)에, 이어서 플로센뷔르크(Flossenbürg)에 특수 수형자로 구금, 마지막에는 다하우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4월에 미군이 진주하면서 풀려났다.
2.4. 전후
풀려난 샤흐트는 나치 협력 혐의로 미군에 다시 체포되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샤흐트는 반평화적 범죄(Crime against peace)를 위한 공모죄와 침략 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로 기소되었다. 당시 피고인들의 지능검사[11]에서 샤흐트는 가장 높은 143점을 기록했었다.[12] 샤흐트는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재판 증언석에서도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응수했다.샤흐트에 대해 소련 측 재판관인 이오나 니키첸코 소련 육군 소장은 유죄를 주장했고, 미국 측 판사 프랜시스 비들도 이에 동의했지만 소련의 대리 판사 알렉산드르 볼치코프를 포함한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에게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요?"라는 핀잔을 들었다.[13] 결국 재군비의 계획 자체만으로는 범죄가 아니라고 평가되어 무죄로 방면되었다. 재판에서 그는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전범재판 이후 샤흐트는 서독 정부 하의 재판을 받아 슈투트가르트에서 5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으나 1년 후 출옥하였다. 그후 뒤셀도르프 은행에서 브라질, 에티오피아 제국, 인도네시아, 이란 제국,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등의 경제발전 참모로 활동하다가 1970년에 뮌헨에서 93세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 사망하기 전 전쟁의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는데 나치를 빨고 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듣고 극도로 분노하여 찢어죽일 놈들이라고 욕하였다고 한다.[14][15]
전후 문관으로 재직하며 서독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 때문에 뉘른베르크 재판 때 몇몇 피고들이 반성과 연합국에 대해 협조적인 샤흐트의 모습을 두고 "나중에 쟤들한테 훈장 받으시겠네."라며 비웃음을 산 게 현실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그의 조카딸 일제(Ilse Lühtje)[16]는 오토 스코르체니의 배우자다. 나이 차이가 좀 나는데. 스코르체니는 1908년생, 일제 폰 피스켄슈타인은 1918년생으로 10살 차이이다.
3. 대중매체에서의 얄마르 샤흐트
- Hearts of Iron IV에서 역시 정치 고문으로 등장하며 민간 공장/기반시설/합성 정유 공장 건설 속도에 버프를 준다. 원래는 그냥 정치력 150을 지불하고 고용할 수 있는 일반적인 고문이었으나 패치 후 4개년 계획 중점을 찍어야 한다는 전제조건 하에서 필요한 정치력이 75로 바뀌었다. 그가 만든 MEFO 역시 게임에 등장하며, 군비 증강에 필요한 모든 생산 및 건설에 25% 버프를 받는다. 만일 전쟁을 통해 영토 하나를 흡수할 시 MEFO 채권은 그 즉시 만료되어 금액을 지불한다. 적어도 안슐루스와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때까지는 기다리는 게 이득. 얄마르 샤흐트 역시 뮌헨 협정을 찍고 주데텐란트를 합병하면 자동으로 쫓겨난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 주역으로 등장하는데, 주인공 디트리히 샤흐트의 아버지로 등장한다.[17] 나치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나치즘에 경도되어 국방군에 입대한 디트리히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했던 것으로 등장하며, 주인공의 빙의 후 주인공의 주선으로 검은 오케스트라에 합류해 쿠데타 계획에 참여하고, 이후 나치 축출 및 제 4제국 성립 후에는 빌헬름 3세 황제의 명령으로 재상부 장관으로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이 된다.[18] 이후로는 주인공이 외교와 군사 쪽에서 뛰는 동안 내정과 경제 회복 등 주인공의 뒷받침을 해주고 있다.[19] 1942년 총선거에서 기민당이 과반수를 먹지 못하고 사민당-자민당 연립정권이 세워지자 경제장관직에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추천하고 자신은 국회의장을 맡게 되었다. 이후 주인공이 딸을 낳자 냉철한 천재에서 손녀 바보로 변해버리고, 원 역사보다 2년을 더 살다가 죽는다.
-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군비 지출로 독일 경제가 한계에 봉착하자 전쟁을 포기하고 군비 지출을 줄일 것을 청하나 거부당하자 사임 의사를 표하지만 히틀러의 설득으로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또한 독일군 미니어처 세트에 희귀 미니어처들과 히틀러의 친필 사인을 무작위로 집어넣어서 홍보하는, 그러니까 가챠 시스템을 탄생시켰다. 주인공의 로켓 개발 지원에 처음에는 핏대를 세우며 반발했으나 나중에 재정이 풍족해지자 꼭 필요한 거냐며 수위를 낮췄고, 또한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든다며 전함을 해체해야 한다고 했으나 주인공은 관광상품으로 쓰기 위해 퇴역 전함들을 해상 박물관으로 이용하자는 것과 다른 전함들은 일정 기간까진 유지하고 나중에 해체하자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1]
Tingleff, 현
덴마크
오벤로 시의 팅글레우
[2]
1934년부터 1943년까지
나치당 측에서 '명예당원'으로 대우하였으나, 샤흐트가 나치당에 직접 공식 입당한 적은 없다.
[3]
그의 이름과 출생지를 보면 알겠지만 그의 어머니는
덴마크 혈통
남작 가문의 딸이었다.
[4]
독일어로는
빌헬름이다.
[5]
원래 공화당 성향이었으나 1872년 미국 대선에 자유공화당이라는 신생정당에 후보로 나오기도 했는데 당시 계파 싸움으로 대선후보를 정하지 못한
민주당의 지원을 받았지만 공화당
율리시스 S. 그랜트에게 패배하였다.
[6]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10년 출판한 《
금융자본(Das Finanzkapital)》은 후대 경제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7]
나치당,
독일 국가인민당,
철모단(Stahlhelm)의 반(反)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 내각 공동전선.
[8]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샤흐트는 자신의 모자를 돌려 자금을 모았다고 증언했다.
[9]
명칭의 유래는 야금회사 Metallurgische Forschungsgesellschaft mbH.
[10]
당연하지만 증거도 없는데
눈엣가시를 제거한다는 심정으로 뒤집어 씌워버렸다. 이 당시 그 악명높은
롤란트 프라이슬러에게 심문받았는데,
결백 + 뛰어난
언변으로 프라이슬러를 포함한 재판관 전원의 말문을 막기도 했다.
[11]
웩슬러-벨뷰 지능검사였다.
[12]
지능 지수 상위 0.2%, 당시 독일 고위직 중에선 최고의 천재이다.
[13]
볼치코프는 니키첸코에게 "이보시오, 동무. 저 자가 유죄라는 근거가 있습니까?" 라고 묻기까지 했다. 심지어 영국 측 대리 판사 노먼 버켓은 프랜시스 비들을 향해 "이 사람아, 약 빨았어?" 라며 비웃었다고.
[14]
전쟁이 끝난지 25년밖에 안 된 시점이기도 했고 1930 ~ 40년대 나치를 열광적으로 지지하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15]
사실 그의 입장에서도 나치를 증오하며 분노해할 이유는 산적해있다. 2차대전 직전 독일의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공로는 모조리 자기가 소속된 적도 없는 나치당과 히틀러가 가로챈데다, 그 경제적 성과가 전쟁에 휘말리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음을 짐작하여 전쟁에 반대했더니 오히려 자신을 내쫓아버린 장본인들이다! 게다가 그 결과는 자신이 예측했던대로, 또는 자신의 예측보다도 더한 최악의 형태로 돌아와 온 독일과 베를린이 양면전선의 화마에 휘말리는 파국으로 귀결되버렸다. 전후에 고향 땅이 넘어간 덴마크도 아니라 독일에 남아서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는게 기적에 가까울 지경.
[16]
일제 폰 핑켄슈타인(Ilse von Finkenstein)으로 불리기도 한다.
[17]
원 역사에서는 아들이 없었다.
[18]
원래 황제 즉위 전의 빌헬름 황태자는 디트리히를 자신의 비스마르크라 부르며 재상으로 삼고 싶어했지만, 본인이 겨우 20대인 데다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진 디트리히와의 의견 충돌, 결정적으로 자신의 딸과 결혼해 황족이 되라는 제안을 약혼녀가 있다는 이유로 거절하면서[20] 사이가 틀어졌지만, 그래도 디트리히 만한 거물이 없었고 시대가 바뀌었음을 통감하며, 디트리히가 옳음을 인정하고 알마르 샤흐트를 재상부 장관, 디트리히 샤흐트를 재상부 차관으로 임명한다.
[19]
이후 사흐트가 독일의 재정과 경제정책을 담당하면서 독일 내정에 온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고, 독일 제4 제국은 이탈리아의 독일 내전 개입에서 2차 대전 종전때까지 큰 잡음없이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