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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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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베를린 올림픽
제 11회 올림픽 대회
Spiele der XI. Olympiade
Olympische Sommerspiele 1936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Games of the XI Olympiad Berlin 1936
파일:1936 베를린 올림픽 로고.svg
[1]
파일:1936-olympic-games-poster.jpg
대회기간 1936년 8월 1일 ~ 8월 16일
개최국
[[나치 독일|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독일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독일
]] 베를린
참가국 49개국
참가선수 3,963명[2]
경기종목 19개 종목, 129개 세부 종목
개회선언 아돌프 히틀러
나치 독일 퓌러
선수 선서 루돌프 이스마이어
성화 점화 프리츠 실겐
개·폐회식장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1. 개요2. 경기 종목3. 특징 및 분위기4.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조선 선수5. 기타6. 주제가

[clearfix]

1. 개요

Ich verkünde die Spiele von Berlin, zur Feier der 11 Olympiade der neuer Zeitrechnung als eröffnet.
나는 오늘 제11회 현대 올림픽을 기념하여 베를린 올림픽의 개회를 선포합니다.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개회 선언문.
1936년 8월 1일부터 8월 16일까지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1회 하계올림픽. 나치 독일 시절에 개최되었다. 다만 베를린은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 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었다. 히틀러가 유력 정치인으로는 부상했지만 아직 정권을 잡기에는 미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1930년에 유치했다. 올림픽 포스터에는 베를린의 상징물인 브란덴부르크 문이 그려져 있으며 19개 언어로 인쇄되어 배포되었다.

개최지 발표는 1932년 7월에 있었으며 로마, 마드리드, 알렉산드리아를 제치면서 확정되었다.

그러나 1933년 나치 집권으로 인한 보이콧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46개국 3,738명의 선수가 참여했으며 올림픽의 권위는 이 때부터 기정사실이 되었다.[3] 10만명 규모의 경기장과 2만명을 수용 가능한 수영장, 베를린 교외에 선수촌을 지었다. 베를린 올림픽의 최대 공로자는 정치와 예술을 구별하자는 관점에서 보이콧국들을 설득한 미국 NOC 위원장 브런디지다.

히틀러가 친히 경기장에 나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확인하려 했지만 정작 미국 선수, 그것도 서구인들이 사람이 아닌 짐승이라고 경멸해 마지 않았던 흑인이었던 제시 오언스 금메달 4개[4]를 휩쓸어 버렸다.[5]
파일:Olympictorche-Berlin.jpg
개막 전야 베를린에 도착한 성화를 맞고 있는 루스트가르텐 광장. 절대 나치 전당대회 사진이 아니다. 초대형 나치 깃발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는 가운데 히틀러 청년대 및 유년대 단원들과 군인들이 무겁게 정렬하고 있다.

2. 경기 종목

3. 특징 및 분위기

1928년 암스테르담 대회부터 성화가 들여졌지만 이 대회부터는 그리스 아테네 올림피아신전에서 시작해 올림픽 개최 도시까지 성화를 옮기는 성화봉송이 진행된 최초의 올림픽이다. 총 3,000km를 운반하였으며, 성화는 도로 한가운데에 지펴 놓았다.

또한 이 대회는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현장 중계이자 세계 최초의 텔레비전 생방송이 이루어지게 된 대회이다. 현장에서 촬영한 영상을 별도의 기록 매체에 저장한 뒤 방송국으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전파로 주조정실로 무선 송신하는 형태였다. 때문에 이 대회는 방송 자료는 현전하지 않으며 스틸컷 3장만이 남아있다.

당시 나치 언론당국은 올림픽 개회식 및 주요 경기들에 대한 텔레비전 생중계를 실시하였다. 나치는 올림픽 이전에도 라디오 생방송을 최초로 시행하기도 하였는데 히틀러의 주요 연설들은 라디오 생방송으로 방송하였고 베를린 올림픽 시행 당시에 독일에는 이미 라디오 생방송은 일반화되어 있었다. 베를린 전역에 28개의 간이 상영실을 설치하고 텔레풍켄사의 상영장비들을 설치하여 경기 모습을 베를린 시민들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영국 BBC에서도 이 전파를 받아 중계하기도 하였다. 문제는 중계 카메라의 종류가 세 가지라서 카메라가 통일이 안 되는 바람에 자주 화면이 끊기고 화질도 들쭉날쭉이었다는 것. 당시 뉴욕 출신 기자의 말에 따르면 "폴로 게임에서 서로 다른 색깔의 말이 뛰는 장면이나 되어야 뭔가 좀 확실히 보였다". 독일에서 최초의 기계식 텔레비전이 발명되기는 하였으나 이것을 상용화한 것은 영국이었다.[13] 독일은 흔히 브라운관이라 불리는 음극선관을 이용한 전자식 텔레비전 기술을 국가적으로 육성하였고 1933년부터 시험방송을 시작하여 1935년 정규 전자식 텔레비전 방송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독일의 텔레비전 기술은 발터 브루흐(Walter Bruch)라는 당대 가장 높은 전자공학자에 뜻하여 연구되고 있었고 PAL(독일, 영국 등)과 SECAM( 프랑스, 소련 등) 신호 전송 표준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1930~40년대 독일의 텔레비전 방송은 당시 기술 수준에서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품질로 이름났다. 기계식 텔레비전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모두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신세로 전락했고 SECAM, PAL, NTSC 등의 TV 표준이 제정되면서 전자식 텔레비전으로 통일되었다.

파일:CJea3GWUkAQV--t.jpg

올림픽 주경기장에 입장하는 미국 선수단을 향해 나치식 경례를 하는 관중들. 참고로 그 뒤로 입장하는 흰색 옷을 입은 선수단이 나치 독일 선수단이다.

그리고 처음에는 전 세계가 반대했는데 이유는 당연하지만 이 대회는 철저하게 아돌프 히틀러가 마개조한 올림픽이기 때문이다. 나치 정권이 수립된 뒤에 개최된 올림픽이라 독일의 국기로 하켄크로이츠를 사용하였으며 대회장과 시내 곳곳에 이 깃발을 게양해 두는 등 심혈을 기울여 대회를 열었다. 개회식 때 독일 대표팀의 입장 시에는 정복을 빼입은 장교들을 기수 뒤에 세워 행진하게 했으며 심지어 독일 선수단 입장에 맞춰서 독일의 국가인 독일인의 노래가 연주되었다. 몇몇 유럽 국가들도 입장 시에는 나치식 경례를 한 채로 입장하였다.

인종 차별적인 분위기도 있었지만 독일도 대외관계와 국제여론을 의식하여 대회 기간 중에는 생각보다 심한 편은 아니었다. 올림픽 기간을 비롯해 외국 선수들이 베를린에서 체류하는 기간에는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각 상점마다 걸린 유대인 출입 금지 간판을 모두 내리게 했고 유대인들의 사회 활동도 올림픽 기간에는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 하지만 나치가 그랬듯이 이 모든 조치는 올림픽이 끝난 뒤 원상복구되었다. 또 올림픽에 유대인 선수가 출전하는 것은 철저히 막았기에 몇몇 선수들은 독일 최고기록 보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참가가 불허됐다. 오직 미국에 머물고 있던 헬레네 마이어라는 유대계 독일인 선수만 독일 펜싱 선수로 참가해 은메달을 받았다.[14]

아프리카계 미국인 선수인 제시 오언스(1913~1980)는 이 대회에서 육상 4관왕(100m, 200, 4×100m 계주, 멀리뛰기)이 되었다. 400m는 원래 미국팀 우승 후보가 2명 있었는데 그 두 명이 유대인 탄압을 이유로 대회를 보이콧하여 제시 오언스는 금메달을 하나 더 딸 수 있었다. 이 기록은 84년 LA 올림픽에서 칼 루이스가 깨기 전까지 육상 단거리 기록으로서는 철옹성과 같았다. 특히 나치 당국이 미국 선수단의 보조 노무자로밖에 생각하지 않은 목화 노예 노동자의 손자인 오언스는 개막 첫날부터 그 '우월한 아리안족'의 트랙을 마음껏 누볐다.

그러나 바로 그 아리안족 육상 선수인 루츠 롱(Carl Ludwig ,,Lutz‘‘ Hermann Long 1913~1943)이[15] 아니었다면 오언스의 신화는 완성되지 않을 뻔했다. 오언스의 넓이뛰기 라이벌인 롱이 이어지는 실격으로 탈락 위기에 놓은 오언스에게 도약 지점을 손수건으로 표시해 줌으로써 마지막 시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인종차별이라는 따가운 눈빛에도 무릎꿇지 않고 올림픽 정신이 우월하다는 것의 작은 예증이다. 멀리뛰기 결선에서의 루츠 롱과 제시 오언스.

하지만 세월이 지나 오언스는 히틀러는 적어도 흑인 선수인 자신에게 미소를 보여주며 악수라도 하고 축하해 줬으나 되려 미국 대통령인 루스벨트가 나를 냉대했다면서 마치 히틀러가 날 무시했다고 왜곡하는 미국 영상 자료나 주장을 비난했다.
" 운동답고 기사다운 시합은 사람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 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개회사 연설을 당시 올림픽 준비위원회 위원장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쓴 뒤 아돌프 히틀러가 읊었다. 다만 의도야 어떻든 진짜 개회사대로 역사에 남을 드라마 같은 올림픽이었다. 아리아인을 위한 경기에서 유색인종인 손기정과 제시 오언스가 영웅이 되었고 경쟁 상대임에도 제시에게 충고한 독일선수 루츠 롱과 손기정 항목에도 나오는 영국의 어니스트 하퍼 선수 같은 경우들이 있었다.

파일:external/onefoottsunami.com/airship-before.jpg

훗날 힌덴부르크호 폭발 사고로 전소되긴 했지만 힌덴부르크 비행선에도 오륜기를 그려 놓을 정도로 나치 독일의 올림픽 홍보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전의 대회들보다 경기 운영 면에서 혁신적인 대회로 평가받고 있다. 위 영상에서 보다시피 도시 전역에 설치된 폐쇄 회로 화면을 통해 많은 시민들이 경기를 관람했고 뛰어난 제반시설의 개발, 시간을 측정하는 장비들도 정확해지는 등 당시 독일의 산업과 기술력을 과시하는 장이었다. 위 영상의 출처가 되는 레니 리펜슈탈이 감독한 기록영화 올림피아도 역대 어떤 올림픽 기록영화보다 예술성과 기술력에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다.

1904년 1908년 시범종목까지 갔다가 한동안 제외되었던 골프는 이 대회에서 다시 시범종목으로 지정되었다. 1936년 당시에는 개인전이 아닌 국가별 팀전으로 시행했다. 1홀당 기록을 비교하여 승리, 패배, 무승부를 기록하고 그 기록상에 나타난 승리 숫자가 많은 팀이 이기고 올라가는 방식이었다. 단 빠른 경기를 위해서 9홀로 제한했다. 독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12개 국가가 참가해서 3개국 1조의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렀다.(4개국은 1회전 부전승) 골프에도 취미가 있던 히틀러는 골프 종목에도 관심을 기울였으나 결승전에서 미국이 독일을 이기는 바람에 체면을 구겼다. 그리고 골프는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드디어 정식 종목으로 지정되었다.

베를린의 경쟁지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였고 여기에서 베를린에 밀린 인민전선 정부는 인민 올림픽을 열려고 했으나 스페인 내전으로 인민전선 정부가 붕괴되면서 무산되었다. 그리고 56년 뒤인 1992년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이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마라토너인 황영조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얻게 된 지 56년 만에 금메달을 얻게 되었다.
=

4. 베를린 올림픽에서의 조선 선수

이전 1932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 이어 조선 출신 선수들이 일본 대표팀 소속으로 출전하였다. 전술한 손기정과 남승룡을 포함하여 축구의 김용식, 농구의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복싱 웰터급의 이규환 등 7명이다.

마라톤 경기에서 당시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조선에서 손기정 남승룡이 일본 선수로 출전하여 금메달 동메달을 차지하였으며 일장기 말소사건이 이 때 일어났다. 자세한 사항은 손기정 문서를 참조.

손기정은 난공불락의 담으로 생각되던 2시간 30분의 담을 최초로 돌파한 마라토너며 베를린 올림픽 우승기록 2시간 29분 19초 2는 마라톤 세계 기록 사상 가장 오랜 시간을 두고 세계기록으로 군림한 위대한 업적이다. 한국인 육상 세계기록 보유자는 손기정, 1945년 보스턴 마라톤에서 25분대의 기록을 세웠던 서윤복과 북한까지 확대하면 1960년대 중반 여자 800m 기록을 연이어 갈아치우며 최초로 2시간 30분 벽을 돌파했던 신금단 등 단 3명뿐이다.[16] 그가 일본에서 기록한 2시간 26분 42초는 전세계 육상인들을 경악시켰으나 그들은 이 기록을 인준하는 대신 '기록이 수립된 도쿄의 마라톤 코스는 정규 거리보다 짧았을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세계 기록을 5분 위로 당겨버린 이 경이의 업적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손기정의 기록이 더욱 빛났던 까닭은 마라톤 출전권 두 장이 모두 조선인에게 넘어가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일본육상협회가 손기정, 남승룡, 일본인 후보 선수를 대상으로 '현지선발전'이라는 기상천외한 경기를 실시한 데서 온 체력 소모를 극복하고 거둔 승리라는 데 있다. 코치가 페이스 조절이라도 해 줬다면 손기정은 가히 불멸의 기록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의 마지막 100m 구간 기록은 지금까지도 그 유례가 없는 13초대의 초고속이다.

당시 독일의 라디오 보도를 보면 언론에서 손기정이 조선인임을 알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17] 손기정은 금메달을 받은 다음 날 아돌프 히틀러와 만났다. 그는 이 순간을 "160cm인 내 키에 비해 그의 손은 크고 억셌으며, 체구는 우람했고 독일을 이끌어가는 통치자답게 강인한 체취를 풍겼으나 얼굴에는 야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고 회고했다.

사실 손기정, 남승룡에 대한 견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조선인 선수들을 최대한 뽑지 않으려고 했다. 축구에서는 김용식뿐만 아니라 김영근도 선발됐는데, 김영근이 '실력에 비해 조선인 축구 선수들이 차별받았다'며 차출을 거부한 바 있다. 농구에서는 11명의 선수단 중 3명이 조선인으로 선발됐는데, 이는 당시 일본 농구협회 상무이사이자 일본 선수단 총무였던 이상백의 존재 때문이었다. 만약 일본 축구나 농구가 메달을 땄다면 이 조선 선수들도 당연히 메달리스트가 됐을 건데 그랬다면 이 선수들은 어쩌면 메달리스트면서도 개인 종목의 손기정, 남승룡과는 달리 이를 대놓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국민체육진흥공단에서는 손기정과 남승룡이 살아 있을 적에 한국 대표로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들과 똑같은 연금을 지급했는데 만약 일본 농구, 축구가 메달을 땄다면 당시 선수단의 일원였던 조선 선수에 대한 한국에서의 처우가 어땠을지는 모른다.[18]

5. 기타

그리고 이 올림픽이 열린 지 2년 뒤인 1938년 개최국이었던 나치 독일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더니 급기야 또 다시 1년이 지난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그로 인해 다음 올림픽도 12년 뒤인 1948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영국 런던에서 다시 개최하게 되었다.

한국인 선수, 특히 손기정의 문제로 독일이 일본의 동맹국이었다는 걸로 동맹국이라서 한국인 선수를 좋게 봐 준 거라는 식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추축국은 이 올림픽에서 3개월 뒤인 1936년 11월의 일-독간 방공 협정 체결을 시작으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베를린 올림픽 시기의 독일과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국과 승전국의 관계일 뿐 동맹 관계가 절대 아니었고 오히려 비우호국에 가까웠다. 당시 독일은 장제스 중국국민당에게 이런저런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19]

미국의 대학팀인 워싱턴 허스키스 조정 대표팀이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을 누르고 금메달을 딴 대회이기도 하다. 히틀러는 이것도 현장에서 보고 언짢아했다고 한다.

당시 리히텐슈타인 아이티의 국기가 같다 보니 자주 혼동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은 이듬해 국기에 왕관을 추가하면서 현재의 국기가 되었다.

다음 대회는 일본 제국 도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지만[20] 중일전쟁으로 말미암아 올림픽 개최가 안되는 것을 우려한 국제사회의 여론 악화로 인해 핀란드 헬싱키로 개최권이 이동되었으나 결국 국제사회의 예상대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올림픽은 열리지 못했다. 게다가 전쟁이 길어지면서 다다음 대회(1944년)도 넘겨졌으며 1948년이 되어서야 겨우 다시 개최할 수 있었다. 참고로 1940 올림픽 개최지로 예정되었던 일본 도쿄는 1964년에 올림픽을 개최하게 된다.

주경기장인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은 패전 뒤 1916 올림픽과 같은 이유로 해체될 위기에도 처했지만 나치 상징들을 떼어내거나 그에 대한 비판적인 설명을 덧붙이는 등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계속 쓰이고 있으며 정확히 70년 뒤 2006년에 FIFA 독일 월드컵 결승전 경기장으로도 쓰였다. 2009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 트랙, 필드경기도 열렸다. 나치 독일의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 중 하나다.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피에르 드 쿠베르탱의 생전에 열린 마지막 올림픽이기도 하다. 쿠베르탱은 베를린 올림픽이 열린 다음 해인 1937년 9월에 사망했다.

펜싱으로 출전했던 튀르키예의 할레트 참벨[21] 수아트 아샤니는 여성 무슬림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가 되었다.

6. 주제가


제목은 올림픽 찬가(Olympische Hymne). 현재 사용되는 올림픽 찬가와는 이름만 같을 뿐 다른 곡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했다. 개막식과 폐막식에서 연주되었는데, 기록영화의 마지막 부분의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과 올림픽 종의 모습, 오륜기의 모습과 함께 이 곡이 연주되는 장면의 연출은 가히 압권이라 할 만하다. 재미있는 점은 슈트라우스 본인은 이 곡을 졸작이라 생각했다는 것이다.
OLYMPISCHE HYMNE
올림픽 찬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작곡
로베르트 루반[22] 작사

Völker! Seid des Volkes Gäste,
푈커 자이트 데스 폴케스 개스테
사람들이여! 우리의 손님이 되라
kommt durch's offne Tor herein!
콤트 두어흐스 오프네 토어 헤어라인
열린 문을 지나 이리로 들어오라
Friede sei dem Völkerfeste!
프리데 자이 뎀 푈커페스테
사람들의 축제에 평화가 깃들기를
Ehre soll der Kampfspruch sein.
에어레 졸 데어 캄프슈프루흐 자인
명예가 축제의 표어가 되도록 하라
Junge Kraft will Mut beweisen,
융게 크라프트 빌 무트 베바이센
젊음은 용기를 보이려 한다
heißes Spiel Olympia!
하이세스 슈필 올림피아
뜨거운 용기를, 올림피아
deinen Glanz in Taten preisen,
다이넨 글란츠 인 타텐 프라이센
그대의 영광에 진심어린 칭송을
reines Ziel: Olympia.
라이네스 칠 올림피아
순수한 목표, 올림피아

Vieler Länder Stolz und Blüte
필러 랜더 슈톨츠 운트 블뤼테
자부심과 번영이 온 나라들로부터
kam zum Kampfesfest herbei;
캄 춤 캄페스페스트 헤어바이
이리로 와서 열심히 싸우네
alles Feuer das da glühte,
알레스 포이어 다스 다 글뤼테
모든 타는 불들은
schlägt zusammen hoch und frei.
슐래흐트 추사멘 호흐 운트 프라이
드높고 자유롭게 함께 빛나네
Kraft und Geist naht sich mit Zagen.
크라프트 운트 가이스트 나트 지히 미트 차겐
힘과 영혼이 떨리며 다가오고 있다.
Opfergang Olympia!
옵퍼강 올림피아
희생의 올림피아
Wer darf deinen Lorbeer tragen,
베어 다어프 다이넨 로어베어 트라겐
누가 당신의 월계관을 쓸 수 있을까
Ruhmesklang: Olympia?
루메스클랑 올림피아
명예의 소리 올림피아여?

Wie nun alle Herzen schlagen
비 눈 알레 헤어첸 슐라겐
이제 모든 심장이 뛰는 것처럼
in erhobenem Verein,
인 에어호베넴 페어라인
고고하게 하나된 마음으로
soll in Taten und in Sagen
졸 인 타텐 운트 인 자겐
행동과 말에서
Eidestreu das Höchste sein.
아이데슈트로이 다스 회흐스테 자인
맹세가 가장 높은 것이 되도록 하라
Freudvoll sollen Meister siegen,
프로이트폴 졸렌 마이스터 지겐
기쁨과 함께, 승리자는 승리할 것이다
Siegesfest Olympia!
지게스페스트 올림피아
승리의 축제, 올림피아
Freude sei noch im Erliegen,
프로이데 자이 노흐 임 에얼리겐
기쁨은 여전히 우리에게 있다
Friedensfest: Olympia.
프리덴스페스트 올림피아
평화의 축제, 올림피아
Freudvoll sollen Meister siegen,
프로이트폴 졸렌 마이스터 지겐
기쁨과 함께 승리자는 승리할 것이다
Siegesfest Olympia!
지게스페스트 올림피아
승리의 축제, 올림피아
Olympia! Olympia! Olympia!
올림피아 올림피아 올림피아
올림피아! 올림피아! 올림피아!

[1] 그림 속의 문구는 'Ich rufe die Jugend der Welt'. 세계의 젊은이들을 부른다는 뜻이다. [2] 남자: 3,632명, 여자: 331명 [3]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나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3년 후에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나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다. [4] 100m 육상, 200m 육상, 400m 계주, 멀리뛰기 종목 [5] 그러나 히틀러는 제시 오언스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거나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언스와 밝게 악수와 환담을 나누며 축하인사를 건넸다. 심지어 동양에서 온 금메달리스트인 손기정에 대해서도 축하인사를 건네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제시 오언스는 "히틀러는 자신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며 악수를 나눴지만 본국에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면담이나 공식석상에서의 언급은커녕 서한 한 장도 받아보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히틀러가 이미지 정치에 매우 능함을 고려하면 철저히 속내를 가린 것일 수도 있고 사적으로는 소탈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었다는 평가도 있으므로 어느 쪽으로 해석해도 이상할 건 없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본인만 알고 있을 것이다. [시범] 시범 경기 종목 [시범] 시범 경기 종목 [시범] 시범 경기 종목 [비공식] 비공식 경기 종목 [시범] 시범 경기 종목 [시범] 시범 경기 종목 [시범] 시범 경기 종목 [13] 1929년 기계식 텔레비전 방송 시작. [14] 유대인에 대한 박해 때문에 올림픽 불참 움직임이 있자 면피용으로 뽑았다고 한다. 헬레네 마이어는 아버지가 유대인이긴 했으나 독일인 어머니에 의해 기독교인으로 키워졌기 때문에 스스로를 유대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15] 올림픽 은메달을 딴 국가의 영웅이었지만 그 역시 징병을 피해가지 못했고 국방군 육군으로 복무하던 1943년 7월 10일 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을 방어하던 도중 부상을 입고 3일후 사망하였다. [16] 이에 대해서는 세계 기록이 아니라 올림픽 기록이라는 주장도 있다. 단, 같은 42.195km라고 해도 동등한 조건이 아닌 코스에 따라 다양한 영향을 받는 마라톤의 특성상 기록을 엄청 중시하는 종목이 아니다 보니 세계 기록 또는 올림픽 기록 달성 여부를 주요 쟁점으로 삼지는 않는다. [17] 독일 측 해설위원이 '조선 학생인 일본 육상선수'라고 언급한다. [18] 당시 일본 축구는 8강까지 갔으며, 현재 한국에서는 올림픽 6위까지 체육연금 점수를 준다. [19] 실제로 당시 국민혁명군은 독일군 장교들이 참모로 앉아 있는 것도 모자라 슈탈헬름을 방탄모로 사용하고 독일제 소총을 면허생산해 제식 채용하는 등 여러모로 독일과 많이 연관되어 있었다. [20] 개최지 확정이 알려진 1935년에는 중화민국에서조차도 기뻐하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21] 1916~2014. 튀르키예의 대표적인 고고학자 중 한 명이다. [22] Robert Lubahn(1903-1974). 베를린의 실직자 출신으로, 원래는 게르하르트 하웁트만이 작사를 하기로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불발되었고 대신 치러진 공모에 나온 그의 가사를 슈트라우스가 낙점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이것으로 1,000 라이히스마르크의 상금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