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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 분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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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보호령에 대한 내용은 자르 보호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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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르 분지 지역
Saarbeckengebiet
Le Territoire du Bassin de la Sarre
국제 연맹의 보호령
파일:자르 분지 지역 국기.svg 파일:자르국장.png
국기 휘장
파일:자르지도.gif
국제연맹 관할 하 자르 분지 지역의 지도
1920년 ~ 1935년
위치 자를란트
수도 자르브뤼켄
정치체제 특수지역
지도자 통치위원회 의장
언어 프랑스어, 독일어
성립 이전 독일 제국
멸망 이후 나치 독일

1. 개요2. 역사3. 멸망4. 자르에서의 프랑스화 정책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자를란트는 베르사유 조약이 발효된 1920년 1월 10일부터 1차 자르 국민투표가 이뤄지는 1935년까지 존속한 국제연맹의 보호령이었다. 자를란트의 땅은 독일 제국의 프로이센 왕국 바이에른 왕국에게서 영토를 분리하여 만들어졌고,[1] 이는 자를란트의 국기를 만들 때에 반영되어 프로이센을 상징하는 검은색과 바이에른을 상징하는 파란색을 넣게 되었다.

2. 역사

위의 개요 단락에서 예상할 수 있듯이 자를란트라는 지역은 과거에 존재하였던 행정구역도, 문화적인 지역도 아니었고 단순히 이 공업지역을 독일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프로이센령 라인란트 바이에른령 팔츠에서 각각 땅을 분리하여 만들어진 땅이었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의 패배 이후 주요 협상국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석탄이 많이 나는 자르의 공업 지대를 독일에서 분리해야 한다고 동의하였으나, 그 독일에서 분리한 자르 분지 지역의 향방에 대해서는 합의가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자르 분지 지역을 프랑스가 합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영국은 이를 지지, 이탈리아는 이에 중립을 표명하였으나 미국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이에 1919년 4월 9일에서 4월 10일로 넘아가던 밤, 협상국은 자르 분지 지역을 국제연맹 관할 하의, 프랑스와 독일 모두에게서 분리된 지역으로 남기되, 자를란트의 석탄 광산들은 프랑스 하로 넘겨 프랑스의 전후 재건에 보태기로 합의하였다. 또한, 자르 분지 지역은 조약이 발효되는 1920년부터 15년간 존속 이후 향방에 대해 국민투표를 치르기로 하였다.

본래 존재하지 않던 지역을 인위적으로 분리한 땅이고 국제연맹의 보호령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프랑스 관할 하에 통치된 땅이었기에 자르 분지 지역은 시작부터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지역이었다. 새로운 자르의 경계는 지역의 가족, 행정, 경제관계를 분단시켰고[2] 자르는 프랑스의 군정 하에 존속을 시작하였기에 이런 강압적인 관계에 주민들의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추후에 자르의 통치위원회가 생긴 후에도 통치위원회의 의 3인 중 자르 출신 대표는 단 한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프랑스인과 제 3국인 (비독일 비프랑스)으로 이뤄졌기에 불만이 존재했다. 1922년에는 자를란트에서 최초로 지역 의회 선거가 치러졌으나 이 선거에서 뽑힌 지역 대표들은 실권은 없었고, 단지 통치위원회에서 자문을 구하기 위한 목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에 자를란트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정당들은 자르에서의 권위적인 통치의 끝을 요구하였고, 민족자결주의에 의거하여 독일로의 환원을 요구하였다.

3. 멸망

결국 1935년, 예정된 국민투표가 치러지자 자르의 주민들은 압도적인 차로 독일로의 환원을 요구, 이 15년간 존속했던 국제연맹 자르 분지 지역도 막을 내리게 된다. 이에 관해서는 자르 국민투표 문서 참조.

4. 자르에서의 프랑스화 정책

위에서 1919년 프랑스가 자르 합병을 요구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본래 프랑스는 자를란트를 합병하려고 하였다. 그만큼 프랑스는 자르 분지 지역의 존속기간 동안 자르에 눈독을 들이며 강경한 프랑스화 정책을 펼쳤는데, 프랑스는 광물, 선철, 석탄 수송을 모두 장악함과 동시에 자르에 있는 공장의 약 60%를 프랑스 지분 하에 두었다. 또한 프랑스 본토와의 철도 도로 교통 연계도 강화하였으며 프랑스와 프랑스의 경제블록으로 종속화를 강화하였다. 문화적으로는 프랑스인들의 자를란트로의 이주를 장려, 지원하였으며 독일인들 거주 지역에 프랑스어 학교들을 설립하며 프랑스 교육과정을 강요하며 문화적으로도 지역 주민들을 프랑스화하려 하였다.

하지만 정작 프랑스인들과 관리들은 자를란트를 프랑스의 식민지와 비슷한 취급을 했다. 프랑스인과 독일인들의 거주지를 분리하고 건설적이기보다 수탈적인 경제정책들을 펴며 지역 주민들의 반감을 샀으며, 1925년 수도 자르브뤼켄에서의 독일로의 환원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을 북아프리카인들로 구성된 군인들을 보내어 강경진압을 통해 굴복시키면서 독일로의 환원 요구는 강해져만 갔다. 독일 본토에서는 히틀러 나치당이 집권해가던 중에도 결국 이 자를란트 프랑스화 정책은 수포로 돌아가고 1935년, 자르는 독일에 환원되었다.

여담으로 이렇게 강경한 프랑스화 정책의 일환으로 강제적인 프랑스어 교육이 실시되었던 지역이지만 현재 자를란트 주정부는 자발적으로 2043년까지 자르를 독일어-프랑스어 이중 언어 지역으로 만드는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전간기와 2차대전 이후의 역사를 보여주는 정말로 격세지감적인 부분.

5. 관련 문서



[1] 독일 제국은 나라 안에 여러개의 소속국이 존재하였다. [2] 예시로, 자를란트의 일부였던 장크트 벤델, 홈부르크와 츠바이브뤼켄 시는 도시의 외곽이 자르의 경계로서 분단되는 상황도 발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