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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4 16:41:18

찰스 코글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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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찰스 코글린
Charles Coughlin
파일:Charles_Coughlin.jpg
본명 찰스 에드워드 코글린
Charles Edward Coughlin
별명 라디오 신부
Radio Priest
출생 1891년 10월 25일
캐나다 자치령 온타리오주 해밀턴
사망 1979년 10월 27일 (향년 88세)
미국 미시간주 블룸필드 힐스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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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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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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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
직업 신부, 라디오 방송인, 정치인
학력 토론토 성 미카엘 대학교 (졸업)
종교 가톨릭
서품 1916년

1. 개요2. 생애
2.1. 라디오 진행자가 되다2.2. 정치 방송인으로 전향하다2.3. 파시즘과 반유대주의 옹호2.4. 이후
3. 매체에서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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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 가톨릭 신부이자, 라디오 방송인이자 파시스트. 반유대주의적인 방송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부였던 만큼 교권 파시즘 성향이었다.

2. 생애

캐나다 온타리오의 해밀턴에서 아일랜드계 가톨릭 신자 가정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집을 성당 근처에 잡을 정도로 독실한 가정이었다. 수녀가 되지 않은 걸 후회한 코글린의 어머니는 대신 가정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강한 가톨릭 신앙을 아들에게 불어넣었다. 1911년 성 미카엘 대학교[1]에 입학하고 이후 졸업한다. 1916년 사제서품을 받았다. 1923년 디트로이트 강을 건너 미국으로 이주해 자리를 잡는다.

2.1. 라디오 진행자가 되다

KKK가 성당을 폭파해 미사를 진행할 수 없게 되고 빚도 갚을 수 없자, 지역 라디오에서 주일 강론을 방송하면서 라디오 진행자가 된다. 매주 1시간씩 진행된 방송은 이런 배경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KKK 비판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1929년 방송사가 인수되고, 새 사장은 코글린에게 정치적인 것에 집중해 보라고 조언하게 된다.

2.2. 정치 방송인으로 전향하다

초기 정치 방송부터, 미국의 금권세력과 유대인,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며 반유대주의, 반자본/반공주의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1930년 CBS가 판권을 사들여 전국 방송으로 확장되었는데, 1931년 설교 방송을 진행하기 위한 전용 탑이 완성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인다.

자유시장경제의 강력한 반대자이자 부의 재분배의 지지자였던 코글린은 허버트 후버 정부를 대공황의 원흉으로 비판하며 19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지지했다. 루스벨트의 취임 이후 뉴딜 정책을 '그리스도의 거래'라고 호평했으며 의회에서 대통령의 통화정책을 의회가 강력히 지지해줄 것을 요구했고 '하느님께서 루스벨트 대통령을 인도하고 계신다'는 말까지 했다.

코글린은 은본위제로의 회귀를 기반으로 한 통화개혁, 연방준비제도와 필수산업 국유화, 부자 과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 노동조합 보호, 공익을 위한 개인의 재산권 제한 등 당시 기준으로나 현재 기준으로도 매우 급진적인 경제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을 그는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보았다. 그는 루스벨트가 예상보다 온건하고 친금권적인 정책을 펼친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으며, 1934년 민족주의 노동자단체인 전국사회정의연맹(NUSJ)을 설립하면서 루스벨트에 대한 지지를 완전히 철회했다.

그는 자신과 유사한 경제관을 가졌던 당시 루이지애나 주지사 휴이 롱을 1935년 암살당하기 전까지 적극 지지했다. 또한 롱의 슬로건 중 하나인 'Share Our Wealth' 운동의 지도자이자 극우 기독교 정치인이었던 제럴드 L. K. 스미스, 의사 출신 정치인 프랜시스 타운젠드와 함께 연합당(Union Party)을 조직하여 윌리엄 렘케의 대선 입후보를 도왔다. 캠페인 슬로건 중 하나는 '국제주의에 대한 관심을 줄이고, 국가의 번영에 관심을 가지자'였다. 물론 입후보는 실패했고 선거 후 코글린은 2개월간 휴식을 취했다.

2.3. 파시즘과 반유대주의 옹호

1936년 선거 이후 코글린은 공산주의에 대한 해독제로서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과 베니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유대인 배후자본설을 주장했고 러시아 혁명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었다고 믿었으며 기독전선(Christian Front)이라는 극우 조직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가 출판하던 잡지 Social Justice에서는 시온 의정서를 매주 재인쇄했으며, 나치 독일로부터 간접적으로 자금을 지원받기도 했다. 다만 그는 자신이 반유대주의자라는 것을 부인했으며 나치 옹호 역시 부정했다. 미국의 나치 조직이 뉴욕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도 라디오 연설에서 '인종적 적대감과 증오를 선동하는 조직은 부도덕하며 악한 조직일 뿐이다'라며 연결성을 적극 부인했다.

수정의 밤 이후 코글린은 러시아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살해당한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언급하며 '유대인들 이전에 이미 박해받은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라디오 연설에서 말했다. 연설 이후 뉴욕의 WMCA, 인디애나주의 WIND, 시카고의 WJJD 등은 인종적 편견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그의 프로그램을 중단시켰으며 코글린은 반발하여 그들을 유대인이라고 비난했다. 1938년 수천 명의 코글린 추종자들이 WMCA 스튜디오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고, 일부 시위자들은 "유대인들을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라", "히틀러가 곧 이곳에 올테니 기다려라"며 유대인들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2.4.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 이후 코글린은 무기 금수를 지향하는 중립법(Neutrality Acts)의 폐지에 반대했고 청취자들에게 '평화의 군대'로서 워싱턴으로 출격할 것을 호소했다. 그의 반대자들은 코글린이 내전을 조장하는 선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으며, 업계 로비 조직인 전국방송협회(NAB)가 최종적으로 코글린을 방송에서 제거하기 위해 개입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율규제위원회를 구성하여 비개입주의를 포함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토론 주제를 금지시켰으며, 프로그램이 방송되기 전 사전에 원고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이후 코글린과의 계약은 대부분 종료되었으며 1940년 코글린은 방송을 강제로 중단시켰다며 반발했지만 별다른 소용은 없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함께 미국이 전시상태로 들어서면서 비개입주의 운동은 급격히 힘을 잃었으며, 코글린과 같은 고립주의자들은 적에게 동정적이라며 비판받았다. 간첩법(Espionage Act)에 따라 Social Justice 잡지는 보스턴 지역으로만 배포가 제한되었고, 그 역시 개인 배달 트럭으로만 이뤄져야 했다. 코글린은 '폭동죄'로 기소될 수도 있었지만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Francis Biddle)이 잡지의 출판 금지 선에서만 끝내기로 결정하면서 신문 폐간 정도에만 그쳤다.

정치활동에서 물러난 코글린은 1966년 은퇴 때까지 본당 신부로 남았으며, 1951년 그의 방송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함께 싸우다가 오랜 법정 소송 끝에 사망한 조지 A. 리차즈(George A. Richards)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1979년 미시간주 블룸필드 힐스에서 88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우스필드의 성묘묘지에 안장되었다.

3. 매체에서

4. 여담



[1] St. Michael's Colle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