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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란트 재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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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Versailler_Vertrag.png
베르사유 조약 로카르노 조약 이후 독일의 영토
빨간 점선으로 그어진 부분이 독일이 잃은 영토와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다.

1. 개요2. 배경3. 삐걱이는 반(反)독일 전선4. 독일의 결단5. 각국의 대응6. 결과7. 기타

[clearfix]

1. 개요

Rheinlandbesetzung / Remilitarization of the Rhineland

1936년 3월 7일 나치 독일 퓌러 아돌프 히틀러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전격적으로 독일 국방군을 주둔시켜 무장을 다시 선포한 사건이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나치 독일이 벌인 최초의 무력도발로 베르사유 조약 로카르노 조약에 위배되는 행동이었다. 이 사건은 나치 독일의 군비 증강 계획이 처음으로 실제 결과로 나타난 사례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정치적 입지를 한 층 더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2. 배경

파일:Occupation_of_the_Rhineland.png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의 모습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인 벨기에 프랑스는 자국의 안전 보장을 위해 서부전선에서 싸웠던 독일 라인 강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라인강 동쪽 60km까지 포함하는 대규모 비무장지대를 설정하였으며 이를 베르사유 조약에 명문화시켰다. 뒤이어 1925년 로카르노 조약으로 라인란트 지역의 비무장지대화는 다시 한 번 명문화되었다.

하지만 베르사유 조약 하의 라인란트 비무장지대는 라인란트 지방뿐만 아니라 라인강 동쪽 60km까지로 독일 최대 공업지대인 루르 지방을 포함하여 알자스 지방과 접경인 바덴 지방까지 독일과 접한 모든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국경지역이었다.

독일인들에게 라인란트는 단치히 단치히 회랑과 함께 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자 트라우마였다. 그나마 단치히 및 단치히 회랑은 독일 영토에서 완전히 떨어져나간 곳이지만,라인란트는 명백히 독일 영토였고 독일의 주권이 행사되는 지역임에도 군대의 주둔 및 무장은 불허된 비무장 지대였다. 이는 1차 대전 때 공격받은 벨기에와 프랑스에겐 지극히 당연한 조치였으나[1] 배후중상설이 지배하던 독일에서는 치욕스런 일이었다.

이 때문에 1933년 이전부터 많은 독일 엘리트들은 라인란트의 비무장 상태를 일시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외교적으로 기회가 있을 때 재무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1929년 독일 외무장관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당시까지도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주둔하던 연합군의 철수를 협상하는데 성공했고 영국군은 1929년 말, 프랑스군은 1930년 6월에 라인란트를 떠났다. 이는 마지노선이 건설되며 프랑스의 안보 관점에서 라인란트 비무장화 상태의 중요성이 감소된 게 한 원인이였다.

라인란트에서 영국, 프랑스군이 철수함에 따라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을 더욱 공개적으로 위배할 것으로 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독일의 분야를 막론한 엘리트들은 라인란트의 재무장이 1937년 이전에는 불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이런 인식은 1933년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과 나치 독일이 1935년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군 재무장을 선언한 뒤로도 한동안 이어졌다.

3. 삐걱이는 반(反)독일 전선

파일:Stresa-Front_1935.svg
스트레사 체제의 구성국(파랑)
1935년 들어 나치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과 대대적인 군 재무장을 실시하자, 제1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이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이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들은 1935년 4월 14일, 이탈리아의 스트레사에 있는 마조레 호수에 모여 스트레사 전선이라는 대(對)독일 동맹을 체결하게 된다.

프랑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련과의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독일 인근 동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었다. 프랑스는 원조 조약을 통해 독일 뿐만 아니라 소련의 동유럽 진입도 차단할 수 있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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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Mussolini_truppe_Etiopia.jpg
파일:Ethiopia_War_Map_(1935-feb_1936)_it.svg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군대를 시찰하는 베니토 무솔리니 이탈리아군의 에티오피아 침공 경로 }}}
이 대독일 포위망은 영국과 이탈리아가 삐걱이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실 이탈리아에게 스트레사 전선이란, 단순히 독일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이 두 열강이 곧 있을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는 외교적 목적을 노린 것이었다. 영국 또한 스트레사 전선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막대한 인적, 경제적 피해를 입은 영국에서는 종전 이후 10년이 넘게 국방비 긴축이 이어졌고 이는 대공황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은 독일에 대항하여 대규모 군대를 배치하는 것에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 영국은 프랑스와 달리 동유럽에 대한 안보 보장을 상당히 경계 했다. 동유럽 지역의 안보를 보증하는게 잠재적으로 영국이 원치 않는 분쟁에 끌려들어 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영국은 현실적으로 서유럽에서의 작고 제한된 교전만 수행할 수 있다 보았고, 동시에 독일-폴란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해 독일과 폴란드간 긴장을 평화적으로 해결한 아돌프 히틀러를 외교적으로 타협이 가능한 인물이라 평가하기 시작했다.

결국 영국은 독일을 군사-외교적으로 고립시키는 것 대신 1935년 6월 18일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베르사유 조약으로 묶여 있던 독일의 주력함 건조를 완전히 풀어주게 된다. 유일한 제한은 당시 세계 1위이던 영국 해군 전체 주력함들 총 배수량의 35%는 넘지 말라는 것 뿐이었다. 이는 독일의 재무장을 막자는 스트레사 전선의 근간을 뒤흔드는 조약이었고, 이탈리아는 영국의 무력함에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독일에서는 이러한 스트레사 전선의 균열을 기회로 여겼다.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이 영국-이탈리아 관계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전망해 에티오피아에 무기를 지원하며 장기전으로 끌고 가고 싶어했다. 독일은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서 장기간 전쟁을 벌이게 되면 영국이 국제연맹에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를 가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될 것이라 예상했고, 이후 영국-이탈리아 관계에 위기가 초래되면 독일이 영국에 실망한 이탈리아에게 접근해 베니토 무솔리니를 동맹으로 확보하고 스트레사 전선을 파괴해버릴 수 있었다.

4. 독일의 결단

1936년 2월 히틀러는 외무부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군부에 라인란트 재무장의 뜻을 밝혔다. 군부는 국방장관이며 군부의 1인자인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Werner von Blomberg) 원수를 중심으로 한 세력만 찬성하고 나머지는 결사반대하였다. 라인란트를 가고 싶어도 프랑스가 쳐들어오면 절대 못 막는다는 게 핵심적인 반대 논조였다. 군부에게도 라인란트 재무장은 숙원이었으나 최소한 이들에게 현실적인 감각은 충분했다. 외무부에서도 군부만큼은 아니지만 반대 기류가 강했다. 베르사유 조약 파기로 분위기가 형성되어 몇 년 지나면 외교적으로 기회가 올 수 있는 상황에서 괜히 서두르다간 역풍만 맞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반대에도 히틀러는 프랑스는 겁이 많고 나약해서 절대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는 주장만을 되풀이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밀어붙였다. 결국 군부는 타협하여 최소한의 병력만을 보내고 만약 프랑스가 행동하려는 모습이 보이면 즉각 철수하고 화해 신호를 보내기로 하였다. 한편 독일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시도할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 되었다. 히틀러는 이미 1935년 영국 및 프랑스 외교관들과의 접견에서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관해 슬쩍 떠보았고, 이 시점에서 영-프는 이탈리아 왕국 에티오피아 침략을 해결하는 것을 우선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의 예상대로 라인란트 문제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 히틀러의 바람대로 영국과 프랑스는 국제연맹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에 호응했고,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큰 배신감을 초래했다. 사실 영-프도 이를 고려했기에 이탈리아에 대한 제재는 형식적일 뿐 딱히 가혹하지는 않았으나, 이것만으로도 대독일 포위망을 붕괴시키기는 충분했다. 무솔리니는 결국 영국, 프랑스가 아닌 독일에게 붙기 시작했고 히틀러는 이런 상황들을 종합해 라인란트 재무장 계획을 가속화 했다.

마침내 1936년 3월 1일, 히틀러는 국제연맹이 이탈리아에 대한 석유 제재 관련 논의로 인해 에티오피아에 시선이 쏠린 틈을 노려 1936년 3월 7일 아침 독일 국방군 22,000명, 지역 경찰 14,000명을 라인란트에 진주시켰다. 그 중 3,000여 명만이 라인 강을 건너고 나머지 27,000여 명은 라인 강 동쪽의 비무장지대에 머물렀다. 이들은 프랑스군이 대응할 경우 즉각 비무장지대를 벗어나기로 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프랑스가 만약 강경대응한다면 라인란트 재무장 진행을 중지할 가능성도 보고 있던 것이다.

5. 각국의 대응

독일에 대한 대비 때문에 거금을 들여 국경지대에 마지노선까지 구축한 프랑스가 독일군이 국경 너머에 나타나는 일을 반가워할 리 없었다. 그러나 군 수뇌부에서는 절망적인 보고를 했다. 총참모장 모리스 가믈랭 장군은 수뇌부의 의견을 종합하여 대공황 이후 국방예산 삭감으로 프랑스군은 크게 약화된 반면 독일군은 질적으로 숫적으로 크게 증강되어 우리보다 우세에 있다는 독일군을 과대평가하는 결론을 내렸다. 실제 1935년의 독일 국방군은 이제 막 발걸음을 내디딘 아기 수준이었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기존 군사동맹국과의 공동 대응을 고려했지만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 침략 전쟁의 마무리에 골몰하고 있었고 폴란드는 1921년의 프랑스-폴란드 군사동맹을 준수하겠지만 프랑스 본토가 침략당했을 경우를 약정했기 때문에 독일 대사에게는 프-폴 군사동맹 조약이 발효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프랑스 대사에게는 프랑스와 함께하겠다고 말하는 외교적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폴란드는 로카르노 조약에서 배제된 바가 있었기에 로카르노 조약 위반인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반대할 명분도, 1934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으로 인해 뚜렷한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다른 동유럽 동맹국인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도 비슷한 논조였고 오직 체코슬로바키아만 프랑스가 라인란트 진입 시 같이 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뿐이다. 프랑스 정부는 어떻게든 대응방안을 모색해 보려고 했으나 군 첩보부가 라인란트에 투입된 독일군 병력을 30만 이상으로 오판하는 바람에 의지를 상실했다. 군사행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시 프랑스는 아직 청년 인구의 3분의 1을 잃었던 제1차 세계 대전 참호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곧 있을 프랑스 총선거에서 집권 내각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결국 프랑스는 대독 강경대응을 포기하며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고 말았다. 마지막 발악으로 국제연맹에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를 제소했으나 이에 찬성한 나라는 오직 1935년 체결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을 지키려고 했던 소련뿐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국가들에게 독일에게 경제 제재를 가한다는 건 아직 대공황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자국 경제에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에 주저했다. 소련 역시 한 달 뒤인 1936년 4월에 독일 - 소련간의 무역협정이 체결된 점에서 보듯 어디까지나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제스처에 불과했고 실제로 독일을 적대시할 생각은 없었다.

영국의 반응은 엇갈렸지만 육군도 부족하고 전쟁 준비도 안 되어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독일을 달래서 전쟁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으므로 일반적으로는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하는 방향이었다. 당시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프랑스가 독일에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을 반대했고 프랑스 대사를 소환해 군사적 행동을 자제할 것을 촉구했다. 영국 총리 스탠리 볼드윈은 의회에서 영국 여론이 전쟁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영국 전쟁장관 더프 쿠퍼는 독일 대사를 소환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면 영국이 참전하겠다고 경고했지만 독일 땅인 라인란트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결국 영국은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에 대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영국 역시 프랑스처럼 전쟁을 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독일에 유화적인 태도는 오스트리아 병합 뮌헨 협정까지 계속 이어졌다.

이탈리아 왕국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1935년 국제연맹에서 이탈리아에 대한 경제제재(형식적인 수준이었다)를 가하기로 결의한 것에 대한 앙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무솔리니가 직접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한다는 연설까지 했다.

벨기에는 1차 대전 이후 오랜 중립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와 군사 동맹을 맺어 대독전선에서 공동대응을 하고 있었으나 프랑스가 라인란트 재무장을 용인하는 것을 보고 도저히 프랑스를 더는 믿을 수 없겠다 싶어 군사 동맹을 파기하고 중립 정책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독일은 1923년 프랑스와 함께 루르 공업지대를 점령했던 벨기에를 가만 둘 생각이 없었고 결국 벨기에는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폴란드 1921년에 체결된 프랑스-폴란드 방위 협정을 준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라인란트는 독일 땅이었으니 방위협정의 대상이 아니라고 천명했고 국제연맹에서 독일에 대한 경제제재 투표에서 기권했다. 1935년에는 기나긴 무역분쟁을 종결하고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히틀러를 폴란드는 위험요소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의 선택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불러일으키는 악수가 되었다.

미국 먼로 독트린 정책으로 유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혀 관심도 없었고 설사 관심이 있었다고 해도 대공황의 여파에 한창 시달리고 있던 때라 전혀 행동할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이해관계에 있던 모든 나라들이 라인란트 재무장을 인정했으며 히틀러의 도박은 성공했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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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r sind doch wieder ein so anständiges Volk geworden!
우리는 다시 올바른 국민이 되었습니다!

Wir sind doch jetzt wieder ein so fleißiges und tatkräftiges Volk geworden!
우리는 지금 다시 근면하고 활기찬 국민이 되었습니다!

Was schaffen wir jetzt nicht wieder in Deutschland?
지금 독일이 해낼 수 없는 것이 무엇입니까?

Was haben wir nicht für Aufgaben? Man hat uns die ganzen Jahre schon eingeredet, dass der Deutsche sowieso nicht ganz gleichwürdig sei den anderen Völkern in der Welt.
우리가 할 수 없었던 것이 무엇입니까? 그동안 우리는 독일인들은 세계의 다른 민족들과 전혀 동등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Was haben wir heute für Aufgaben? Was für gewaltige Werke bauen wir? Wir bauen heut' die schönsten Straßen, gewaltige Anlagen industrieller Art, neue Erfindungen haben wir gemacht, ungeheure Wohnhauskolonien. Sie werden entstehen und sind bereits entstanden. Was wird nicht überall gearbeitet auf allen Gebieten.
우리가 해온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짓고 있는 위대한 작품들이 무엇입니까? 오늘날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로 거대한 공장시설을 짓고, 새로운 발명품들을 만들고 있으며, 어마어마한 주택가를 건설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완성되고 있거나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모든 분야 중에 잘 해내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Wir haben in diesen drei Jahren bewiesen, daß wir ein Volk sind, das sich sehen lassen kann vor den anderen.
지난 3년간 우리는 독일 국민이 다른 국민보다 훌륭히 해보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습니다.

Und darum bitte ich nun deutsches Volk: Darüber gib nun dein Urteil ab! Der Welt unterstell ich mich nicht! Die kann mich nicht richten! Nur dir unterwerfe ich mich, Urteile du über mich!
그렇기 때문에 저는 독일 국민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이제 판단해주십시오! 저는 (다른) 세계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세계는 저를 심판할 수 없습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저를 예속하고, 심판할 수 있습니다!

Leg du ein Bekenntnis ab, Ob du meine Arbeit für richtig hältst, ob du glaubst, dass ich fleißig gewesen bin, dass ich gearbeitet habe, dass ich mich in diesen Jahren für dich eingesetzt habe, dass ich anständig meine Zeit verwendet habe, im Dienste meines Volkes. Gib Du jetzt deine Stimme ab, wenn “JA” dann tritt für mich ein, so wie ich für dich eingetreten bin!
숙고해주십시오. 만약 제가 해온 일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실히 일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그동안 여러분을 위해 일해왔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국민 여러분을 위해 시간을 바쳤다고 생각한다면. 부디 찬성 투표해주시길 바랍니다.[3] 제가 여러분을 위해 힘차게 일어섰던 것처럼!
1936년 3월 27일[4] 독일 국민들에게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5]
전 독일이 열광했고 나치와 히틀러를 지지하지 않던 사람들조차 퓌러를 연발하면서 히틀러를 찬양했다. 독일 국방군이 쾰른으로 진군하자 환호하는 수많은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군인들을 환영하고 꽃을 던졌다. 재무장의 엄청난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히틀러는 1936년 3월 29일 총선에서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한 국민 투표도 함께 실시했고, 여기서 독일 유권자 대다수가 재무장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을 표했다. 비록 국민투표에서 99%의 달하는 찬성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치이긴 하나, 실제로 압도적인 다수의 유권자가 정말 재무장에 찬성 투표를 했다는 건 분명한 사실로 보였다.

라인란트 재무장은 히틀러 최대의 업적으로 소개되었고 독일 국민들은 지난 패전의 울분을 상당 부분 떨쳐낼 수 있었다. 당시 망명 중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국내 지하 조직마저 독재자에 대한 국민들의 열광적 지지는 진짜라며 한탄했다. 이러한 열광적 지지와 히틀러의 주장대로 프랑스가 대응을 포기했다는 점 때문에 히틀러 독재 체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군사적, 외교적 이유로 라인란트 재무장을 반대했던 관료 및 군부는 총통의 천재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7. 기타

과거 한국에는 '라인란트 재점령'으로 많이 알려졌으나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라인란트를 타국에게 잃은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비무장지대로 설정되어 군대가 주둔할 수 없게 된 것이므로 재점령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 사건은 단순히 라인란트 지역에 독일 군대가 진주한 사건이며 독일의 베르사유 조약 파기 및 군비 증강 계획 일체를 일컫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증강 과정에서 나치 독일이 행동으로 보여준 최종 결과에 가깝다. 어쨌거나 재무장이라는 단어가 워낙 임팩트가 크다 보니 라인란트 재무장은 나치 독일의 '패전국' 잔재 청산 및 군국주의화 과정 중 가장 유명한 사건으로 남았다.

여러모로 사건 이전 및 이후의 전개가 마오쩌둥 6.25 전쟁 참전 결정과 닮았다. 마오쩌둥과 히틀러 둘 다 주위 사람들이 극구 말린 결정을 내렸고 그것이 의외로 큰 성공[6]을 거두어 그 둘의 권위 강화에 큰 역할을 했다.

Hearts of Iron IV에서 독일 중점으로 등장한다. 1936년에 시작하기도 하고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이후 히틀러의 정치적 행보나 유럽 내부의 정세와 긴밀하게 닿아 있기 때문에 역사적인 나치독일 루트와 독일제국/민주독일 대체역사 루트(히틀러 축출)의 결정적인 분기로 구현되었다. 라인란트 진행 이전에는 사단이 진입할 수 없고[7] 대공포도 지을 수 없지만 라인란트 중점 완료 시 혹은 전쟁을 시작한 이후에는[8] 이후에는 가능해진다.

라인란트 재무장 이벤트에서 프랑스가 반대할 수 있는데, 이를 독일이 받아들인다면 잠시의 디버프와 함께 라인란트가 계속 비무장지대로 남으나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프랑스와 전쟁이 터지며 영국이 참전할 수 있다. 대신 프랑스도 코뮌 세력들이 안정도 부족을 틈타 칼레- 됭케르크 지역에서 봉기해 내전을 벌인다. 프랑스로 플레이하는 경우 루앙 쪽에 군대를 배치해 코뮌 반군이 내려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전함이 꼴랑 2척, 그것도 엄청나게 구식함인데다 총 함선수가 38척밖에 안 되는 독일 해군은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도버 해협에 짱박혀 있는 영국의 홈플릿과 전 세계에서 급하게 달려온 영국 해군의 237척한테 쥐어터져 독일 앞바다까지 텅 비어버리므로 상륙당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차피 135척이나 되는 프랑스 해군만 있어도 독일을 압도하고도 남는다. 독일과의 전선은 마지노선이 주 전선이 되는데 마지노선은 무려 10레벨, 즉 만렙 요새기 때문에 40년대에 온갖 버프를 받은 독일도 쉽게 못 미는 걸 1936년의 비실비실하고 장비 충원률이 개판인 시작 독일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지노선 주둔군의 반절 정도만 빼서 반군 쪽 전선에 배치해 미는 것만으로도 반군을 손쉽게 잡을 수 있다.[9] 독일은 전쟁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만렙 요새선인 마지노선을 끼고 방어전만 벌여도 독일군은 오합지졸처럼 갈려나가고, 반군을 때려잡은 뒤 강력한 요새선에 무지성으로 돌격하는 독일군을 충분히 갈아주고 북부에 상륙 박고 함부르크, 킬, 프랑크푸르트 등 주요 도시를 따는 동시에 베를린까지 쭉 달리면 베를린 벙커에서 시체로 발견된 총통을 볼 수 있다. 잘만 하면 36년에 독일을 바로 엘리시켜버릴 수 있는 날빌.

'재무장'이라는 단어가 가져오는 임팩트가 워낙 크기 때문에 현대 독일도 군비를 증강한다거나 관련된 뉴스가 보이면 항상 '재무장' 드립이 따라붙는다. 한 예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을 때 독일이 실제로 군축을 멈추고 '재무장'을 하겠다고 선언해 관련 드립이 쏟아져나왔다. 하지만 라인란트 재무장과는 달리 지금의 독일은 민주주의 국가이고 오히려 지나친 군축으로 약해졌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이러한 독일의 결정을 환영했다.


[1] 국경에 군대를 배치하지 못하게 하면 상륙 등의 경우를 제외하면 침략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2] 하지만 독일은 역으로 이 조약이 로카르노 조약을 위반했다고 주장했고, 차후 라인란트 재무장의 명분으로 이용했다. [3] 이틀 후에 1936년 총선 및 라인란트 재무장에 관한 국민투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4] 라인란트 재무장 20일 뒤이다. [5] 연설이 진행된 곳은 에센 크루프 공장으로, 이곳은 불과 한달 전까지 비무장지대였던 곳이다. [6] 중국이 6.25 전쟁에서 상당한 대가를 치르긴 했지만 결국 ' 순망치한'의 고사에 따라 북한을 지켜내는 데 성공하여 완충국으로 만들었고 세계 최강 미군과 호각으로 겨루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제2세계에서의 발언권을 키웠다. [7] 당연하지만 공군을 라인란트 쪽으로 옮기는 것도 불가능하다. [8] 독일 내전 포함 [9] 이상한 뻘짓을 해서 무한내전을 터뜨리는 게 아니면 코뮌 내전은 한 번 뿐이기에 빨리 밀어버리는 게 좋다. 어차피 코뮌 반란군은 별 거 없는 깡보병이므로 디버프 붙은 프랑스군에게도 잘만 얻어터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