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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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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정 이전 중화민국 임시 국가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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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color=#0b1728,#fff> 파일:1170px-Unofficial_emblem_of_the_Republic_of_China_(1912).svg.png 임시정부 임시대총통
초대
쑨원
제2대
위안스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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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양정부
<colbgcolor=#b69400> 대총통
초대
위안스카이
대행
리위안훙
대행
펑궈장
제2대
쉬스창
대행
저우쯔치
대행
리위안훙
대행
가오링웨이
제3대
차오쿤
대행
황푸
임시집정 돤치루이
대행
후웨이더
대총통
대행
옌후이칭
대행
두시구이
대행
구웨이쥔
육해군대원수 장쭤린
<colbgcolor=#000095> 파일:중화민국 총통기.png
국민정부
국민정부주석
초대
탄옌카이
제2대
장제스
대행
제3대
린썬
대행
제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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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총통 · 중화인민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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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국의 주요 지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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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샤를 드골 알베르 르브룅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조지 6세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소련 국기 (1936-1955).png 소련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칼리닌 장제스 린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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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 Person of the Year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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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time_1930.jpg 파일:Person Of The Year 1931.jpg 파일:attachment/time_1932.jpg 파일:Person Of The Year 1933.jpg 파일:attachment/time_1934.jpg
1930
마하트마 간디
1931
피에르 라발
1932
프랭클린 D. 루스벨트
1933
휴 S. 존슨
1934
프랭클린 루스벨트
파일:attachment/time1935.jpg 파일:Person Of The Year 1936.jpg 파일:attachment/time_1937.jpg 파일:external/www.history.ucsb.edu/391-02hitlertime.jpg 파일:attachment/time_1939.jpg
1935
하일레 셀라시에
1936
월리스 심프슨
1937
장제스
쑹메이링
1938
아돌프 히틀러
1939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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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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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color=#555,#bbb> 파일: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부장.png
1949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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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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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
밴 플리트
파일:미국 국기.svg
1953
장제스
파일:대만 국기.svg
1955
하일레 셀라시에
파일:에티오피아 제국 국기.svg
1957
응오딘지엠
파일:베트남 공화국 국기.svg
1958
아드난 멘데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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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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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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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오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2
조병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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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중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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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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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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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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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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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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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신익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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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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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손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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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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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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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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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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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64
더글러스 맥아더
파일:미국 국기.svg
1964
해리 S. 트루먼
파일:미국 국기.svg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파일:독일 정부기.svg
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파일:차드 국기.svg
1965
다비드 다코
파일:중앙아프리카공화국 국기.svg
1965
수루-미강 아피디
파일:베냉 국기.svg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파일:세네갈 국기.svg
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파일:코트디부아르 국기.svg
1965
레온 음바
파일:가봉 국기.svg
1965
아마두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기.svg
1965
하마니 디오리
파일:니제르 국기.svg
1965
조모 케냐타
파일:케냐 국기.svg
1965
무테사 2세
파일:우간다 국기.svg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파일:마다가스카르 국기.svg
1965
툰쿠 압둘 라만
파일:말레이시아 국기.svg
1966
타놈 키티카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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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쑹메이링
파일:대만 국기.svg
1966
천궈푸
파일:대만 국기.svg
1968
쑨원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8
천치메이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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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
조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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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
임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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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필립 제이슨
파일:미국 국기.svg
1979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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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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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시리낏 끼띠야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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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푸미폰 아둔야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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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두환(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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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김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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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조소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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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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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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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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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49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대한민국
1960년 8월 13일 윤보선 대통령 대한민국
1963년 12월 5일 12월 17일 박정희 대통령 대한민국
1967년 6월 23일 육영수 영부인 대한민국
1979년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 대한민국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1979년 12월 7일 홍기 영부인 대한민국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전두환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0년 8월 29일 8월 29일 이순자 영부인 대한민국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노태우 대통령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1988년 2월 24일 2월 25일 김옥숙 영부인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김영삼 대통령 대한민국
1993년 2월 11일 2월 23일 손명순 영부인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 대한민국
1998년 2월 17일 2월 25일 이희호 영부인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대한민국
2008년 1월 28일 권양숙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2013년 2월 12일 김윤옥 영부인 대한민국
2013년 2월 19일 박근혜 대통령 대한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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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 연도 결정일 수여일 이름 직책 국적 비고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하인리히 뤼프케 대통령 독일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4년 12월 3일 12월 8일 빌헬미네 뤼브케 영부인 독일 외국인 최초 상훈자
1966년 2월 1일 2월 7일 이스마일 나시루딘 국왕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7일 틍쿠 인탄 자하라 왕비 말레이시아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0일 시리낏 끼띠야콘 왕비 태국
1966년 2월 1일 2월 15일 장제스 총통 중화민국
1968년 5월 10일 5월 18일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에티오피아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반티에우 총통 남베트남
1969년 5월 23일 5월 27일 응우옌티마이아인 제1부인 남베트남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하마니 디오리 대통령 니제르
1969년 10월 28일 10월 28일 아이샤 디오리 영부인 니제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대통령 엘살바도르
1970년 9월 25일 9월 28일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영부인 엘살바도르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오마르 봉고 대통령 가봉
1975년 6월 27일 7월 5일 조세핀 봉고 영부인 가봉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대통령 세네갈
1979년 4월 17일 4월 23일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영부인 세네갈
1980년 5월 11일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국왕 사우디아라비아
1980년 5월 14일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1981년 6월 25일 수하르토 대통령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5일 시티 하티나 영부인 인도네시아
1981년 6월 29일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1년 6월 29일 틍쿠 아프잔 왕비 말레이시아
1981년 7월 6일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필리핀
1981년 7월 6일 이멜다 마르코스 영부인 필리핀
1981년 10월 13일 로드리고 카라소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1년 10월 13일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영부인 코스타리카
1982년 5월 10일 사무엘 도 국가원수 라이베리아
1982년 6월 7일 모부투 세세 세코 대통령 자이르
1982년 6월 7일 보비 라다와 영부인 자이르
1982년 8월 25일 압두 디우프 대통령 세네갈
1982년 12월 21일 케난 에브렌 대통령 터키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대통령 수단
1983년 3월 10일 3월 15일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영부인 수단
1983년 9월 10일 후세인 1세 국왕 요르단
1983년 9월 10일 누르 왕비 요르단
1984년 4월 9일 하사날 볼키아 국왕 브루나이
1984년 4월 21일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국왕 카타르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 감비아
1984년 8월 30일 9월 13일 치렐 자와라 영부인 감비아
1985년 5월 17일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대통령 파키스탄
1985년 5월 20일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대통령 코스타리카
1986년 9월 4일 4월 10일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영국
1986년 9월 4일 4월 16일 보두앵 국왕 벨기에
1987년 4월 7일 아메드 압달라 대통령 코모로
1988년 11월 3일 이스칸다르 국왕 말레이시아
1988년 11월 3일 자나리아 왕비 말레이시아
1989년 11월 3일 11월 20일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대통령 서독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 프랑스
1989년 11월 3일 11월 30일 다니엘 미테랑 영부인 프랑스
1990년 6월 21일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대통령 파라과이
1990년 11월 5일 괸츠 아르파드 대통령 헝가리
1991년 9월 13일 아즐란 샤 국왕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13일 투안쿠 바이눈 왕비 말레이시아
1991년 9월 25일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대통령 멕시코
1992년 8월 13일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대통령 과테말라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피델 발데즈 라모스 대통령 필리핀
1993년 5월 20일 5월 25일 이멜리타 마르띠네즈 라모스 영부인 필리핀
1994년 11월 7일 11월 21일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대통령 칠레
1994년 12월 5일 12월 9일 레흐 바웬사 대통령 폴란드
1995년 2월 7일 2월 16일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 우즈베키스탄
1995년 2월 21일 3월 6일 로만 헤어초크 대통령 독일
1995년 3월 28일 4월 3일 젤류 미테프 젤레프 대통령 불가리아
1995년 6월 26일 7월 7일 넬슨 만델라 대통령 남아프리카 공화국
1995년 9월 26일 9월 29일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 아르헨티나
1996년 7월 23일 9월 4일 알바로 아르수 대통령 과테말라
1996년 7월 23일 페르난두 엔히크 카르도주 대통령 브라질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스페인
1996년 10월 8일 10월 20일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왕비 스페인
1996년 11월 26일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국왕 말레이시아
1996년 12월 10일 12월 15일 레오니드 쿠치마 대통령 우크라이나
2000년 2월 22일 3월 3일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대통령 이탈리아
2000년 2월 22일 3월 6일 자크 시라크 대통령 프랑스
2006년 3월 12일 압델라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 알제리
2007년 3월 26일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국왕 쿠웨이트
2007년 3월 28일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국왕 카타르
2009년 5월 13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 카자흐스탄
2009년 11월 12일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 페루
2012년 5월 30일 칼 16세 구스타프 국왕 스웨덴
2012년 11월 21일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대통령 아랍에미리트
2018년 10월 8일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프랑스
2019년 하랄 5세 국왕 노르웨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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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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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정부 초중반기(1928~1937) 시절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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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1-5대 총통
장제스
蔣介石 | Chiang Kai-shek
<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출생 1887년 10월 31일
청나라 저장성 닝보부 펑화현 시커우진
(現 저장성 닝보시 펑화구 시커우진)
사망 1975년 4월 5일 (향년 87세)
중화민국 타이베이 스린구 스린 관저
묘역 중화민국 타오위안시 다시구 츠후 능침
재임기간 초대 총통
1950년 3월 1일 ~ 1954년 5월 20일
제2대 총통
1954년 5월 20일 ~ 1960년 5월 20일
제3대 총통
1960년 5월 20일 ~ 1966년 5월 20일
제4대 총통
1966년 5월 20일 ~ 1972년 5월 20일
제5대 총통
1972년 5월 20일 ~ 1975년 4월 5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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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95><colcolor=#ffffff> 본관 계구 장씨
본명 장중정(蔣中正)
제스(介石)
부모 아버지 장조총, 어머니 왕채옥
형제자매 이복형 장제친
동생 장루이칭
배우자 마오푸메이(毛福梅, 1번째 부인, 기간: 1901-1921)
야오예청(姚冶誠, 첩, 기간: 1913-1921)
천제루(陳潔如, 2번째 부인, 기간: 1921-1927)
쑹메이링(宋美齡, 3번째 부인, 기간: 1927-1975)
자녀 아들 장징궈, 장웨이궈[1]
딸 장젠화, 장야오광
학력 봉록학당
금천공학
용진학당
바오딩 육군군관학교 (1기)
일본육군사관학교 산하 진무학교 (중퇴)
최종 계급 특급 상장(特級上將)
종교 개신교 ( 감리회)
신체 169cm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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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iang_Jieshi21.jpg

1. 개요2. 상세3. 약력4. 생애5. 평가6. 사상과 성격
6.1. 권위주의 성향6.2. 반공6.3. 파시즘
6.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6.3.2. 장제스 정권 분석
7. 대인관계8. 이름 표기법9. 여담
9.1. 종교9.2. 중국사 유물 보존9.3. 증손 장여우보9.4. 증손 장완안9.5. 생전 육성9.6. 야사
10. 기타11. 한국과의 관계
11.1. 카이로 회담 및 지원 여부11.2. 이승만과의 관계11.3. 건국훈장 수여11.4. 박정희 시기11.5. 이후 행보
12. 매체에서
12.1. 역사서12.2. 창작물
13. 참고 문헌14. 관련 문서
14.1. 인물
14.1.1. 국민당 계열14.1.2. 공산당 계열14.1.3. 군벌14.1.4. 가족14.1.5. 열강
14.1.5.1. 미국14.1.5.2. 일본14.1.5.3. 영국14.1.5.4. 소련
14.2. 사건14.3. 단체14.4. 기타
15. 갤러리1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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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의 혁명가, 정치가.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의 제2·4대 국민정부주석이자, 헌정 실시 이후 중화민국의 초대 총통을 역임하였다.

2. 상세

장제스는 청나라의 붕괴와 위안스카이의 만행으로 붕괴된 대륙을 통일한 인물이며, 역사상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스승인 쑨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중국으로 귀환해 장제스의 북벌을 감행하여 마지막 군벌인 봉천군벌의 항복을 받고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는데 성공한다.

분열된 근대 중국을 통일하고 그 후에 쳐들어오는 일본 제국을 방어, 2차대전의 승전국 연합국으로부터 여러 지위를 받아 중국의 입지를 올렸다는 점에서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 없으며, 국부천대 이후 대만으로 쫒겨났을 당시에도 포기하지 않고 대만의 경제력, 사회 시설을 발전시켜 현대 대만의 기반을 만들었기에 본토에서의 행적뿐만 아닌 대만에서의 행적 또한 중요시되는 인물이다. 단적으로 대약진운동으로 피폐해진 동시기 중화인민공화국과는 다르게 그가 통치하던 대만은 빈부격차의 완화, 교육열 증가, 컬러 TV의 방영, 선진국의 반열에 드는 등 미국보다 큰 발전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을 정도다.

그러나 그가 이룬 통일은 전대의 대표적 통일 군주들인 시황제, 한고제, 조광윤, 주원장에 미치지 못한, 군벌들이 세를 유지한 채로 중화민국의 일원이 되는 외형적 통일에 그쳤을뿐만 아니라 내부에서의 갈등조차 제어하지 못해 반장전쟁이 일어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내전은 결국 진압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2]가 지속된 외형상 통일의 한계는 곯아 터져 시안 사건으로 드러나고 만다.

이후 일본 제국이 본토를 공격했고, 난징 대학살같은 비극을 견뎌내 8년간의 항쟁 끝에 중국사를 지켜냈으나 시안 사건으로 살아남은 공산당을 비롯한 마오쩌둥에게 중국 대륙을 빼앗기고 작은 대만섬만 통치하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최악의 상황에도 장제스는 본토 수복을 목표로 삼고 중국을 구하고자 하는 열정을 보여주었지만 그 과정에서 잘못된 민족주의에 반발한 대만인이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장제스는 결국 일본과 똑같은 짓을 답습해 군대를 동원하여 무고한 대만인들을 죽음으로 유린한다.

3. 약력

그가 젊었을 시기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지지만, 군벌의 난립으로 중국이 난세에 빠진다. 장제스는 쑨원 사후 국민당의 지도자로 등극한뒤, 국민당의 북벌 반장전쟁으로 외형적으론 군벌들을 굴복시켜, 외형상 중국통일을 완성한다. 국공내전에서 패한 이후 국부천대 대만으로 건너간다.

유년기엔 일본으로 유학하여 군관학교를 졸업했고 1912년 본토에서 제정을 폐지시키는 신해혁명에 가담했으나 손문을 속이고 황제를 선포한 위안스카이의 축출엔 실패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간 다음, 그곳에서 전전하다 중국으로 돌아와 황포군관학교를 세워 자신만의 기반을 만든다.

이후 스승인 쑨원이 사망하자 중산함 사건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에서 힘이 강했던 왕정위를 몰아낸 다음 국민당 1인자가 되어 북벌을 감행해 원세개 이후 중국의 마지막 전국시대인 근대 군벌시대를 종식시켜갔고, 최종적으론 봉천군벌[3]의 장학량이 일본의 압박으로 국민당에 투항하자 중국을 다시 통일했으며 법 제정의 통과를 두고 그것에 반대한 염석산, 풍옥상의 반란을 진압해 1인자의 입지를 다졌으나 곧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장학량의 만주를 빼앗고 그곳에 전(前) 청나라의 황제였던 선통제를 꼭두각시 황제로 세워 만주국을 선포, 중국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소멸 직전의 공산당을 치기 위해 서안까지 이동하여 국민당군을 지휘하려 했으나 빼앗긴 만주 수복이 아닌 공산당 축출만을 앞장서는 장개석에 반감을 품은 장학량이 그를 감금하여 강제로 항일을 목적으로 하는 국공 합작을 체결시킨다. 곧 노구교 사건이 일어났고, 일제가 이를 빌미삼아 중국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한다.[4] 낙후된 인프라, 미발달된 농업 국가, 보급의 한계에 부딪혀 화북, 수도인 난징까지 빼앗겨 난징대학살이란 피해까지 겪었으나 약 8년간의 긴 항쟁에 일본이 연합국에게 항복하여 중국 보존에 성공한다.

하지만 이전 중일전쟁의 후유증과 여러 개혁정책의 실패,부정부패에 대한 관리실패로 인한 민심 하락은 국민당을 약화시키게 했고 공산당에게 처참하게 밀리는 모습을 본 미국마저 지원을 중단하기까지 이른다. 서서히 대륙을 상실하자 마지막엔 대만 타이페이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본토 수복을 꾀한다. 하지만 수복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고 대만으로 이동한 후 자신에게 반발하는 원주민들을 학살해 자신의 독재를 강화했다.

비록 커다란 대륙을 잃고 국가적 위신마저 실추당하기까지 했으나 명(命)을 보존한 국민당의 발전을 위해 경제 성장, 문맹 퇴치, 부정부패 척결을 실시, 성공했고 대만을 용(龍)의 반열에 올리기까지 하는 대업을 이루기도 했다. 죽을 때까지 대만을 통치하던 장개석은 1975년 89세로 사망하였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본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중국을 구한 항일 영웅 또는 민주주의를 탄압한 독재자, 심각한 부정부패로 압도적인 전력을 가지고도 대륙을 중국 공산당에 뺏긴 무능한 지도자,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학살을 자행한 철권통치자라는 다양한 평가가 공존한다. [5]

4.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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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5.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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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사상과 성격

6.1. 권위주의 성향

장제스의 권위주의 사상은 1912년경 스스로 발행인을 맡은 군사학 잡지 군성잡지(軍聲雜誌)에서 최초로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장제스는 "우리 당이 중국을 강대한 공화국으로 건설하고자 한다면 바로 이 10년 안에, 단지 미국과 프랑스 공화정의 껍데기만을 치리(治理)하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마땅히 개명전제의 정신을 이용하여 계획을 세워야한다." 라고 언급했다. 개명 전제론은 중국의 사상가 량치차오가 공화 혁명론에 대항하여 내놓은 입지로 "중국이 급하게 공화제를 도입할 경우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으니 개명한 군주가 우선 민도를 향상시켜야한다."는 주장이었다. 즉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우선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통치자가 있어야한다고 보았고 쑨원의 삼서론에 입각하여 국민당의 총재인 본인이 그 역할을 맡아야한다고 보았다.

이를 위해 장제스가 기본적으로 추구한 것은 유교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 대가정'이었다. 장제스는 일본 유학 과정에서 영향을 받은 일본의 초국가주의와 유년 시절에 받았던 전통 교육, 국민당원으로서의 쑨원의 사상 등의 영향을 모두 받았는데 이 사상들의 공통점들은 바로 강력한 권위를 통한 질서의 확립이었다. 장제스는 쑨원의 발언을 언급하여 "중국인은 자유를 이미 충분히 누리고 있으며[6] 지금 필요한 것은 빈곤의 격퇴(와 이를 위한 권위)."라고 주장하였다. 즉, 장제스는 인민의 자유가 사회의 발전에 비례한다고 보았고 그래서 의회 민주주의가 언젠가 중국에 도입돼야 함은 인정했지만 당대 중국의 상황에는 언감생심이라면서 도입을 거부했고[7] 이 과정에서 헌법 제정을 추구한 쑨커나 다른 지식인과 충돌하기도 했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 훈정 시기 국민당은 언론과 교육을 국민당이 총괄하고 쑨원의 이론과 삼민주의 사상을 국가 전체의 이데올로기로 확립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그의 지지자들은 강력한 지도력을 좋아하다 못해 준 파시스트화하여 여러 인권 문제를 일으켰다. 장제스를 위한 첩보 / 테러 조직 남의사는 백주 대낮에 반대파 암살이나 납치하여 고문과 같은 테러를 저지르고 다녔고 CC단도 한 몫 했다. 중국의 강제 수용소는 이미 국민당 시절에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며, 국민당 치하에서도 정부에 비판적인 지식인들은 이런데 끌려와서 코로 마라탕을 먹고 있었다. 이것은 지식인의 반발을 불러오며 이후 국공 내전에서 일부 지식인들이 공산당으로 전향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6.2. 반공

장제스의 정치를 말할 때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반공 성향이다. 국민당은 1차 국공 합작에서 보듯이 공산주의에 꽤 우호적이었지만, 장제스 본인은 소련 방문을 기점으로 오히려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품어 여러번 쑨원에게 국공 합작을 끝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한 가지 재밌는 것은 장제스는 중산함 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대표적인 친소, 용공 성향으로 평가받았다는 것이다. 소련 고문인 보로딘은 장제스의 성향을 의심의 여지 없이 믿을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고 스탈린은 자신의 사진에 사인을 해서 장제스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중산함 사건도 장제스가 국민당 내부 공산당원과 좌파들의 쿠데타를 선동하여 역이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또 장제스의 사상은 반공적이었으나 그의 정책은 자본주의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그 당시 군벌들이 다 그러했지만 장제스는 자신의 적들과 손을 잡아 이용하는 것을 전혀 주저하지 않던 사람이다. 장쉐량을 비롯한 만주 군벌들도 북벌 시절엔 적이었고 펑위샹, 옌시산과는 천하를 놓고 한 번씩 다투어봤으며 리쭝런, 바이충시는 반란을 두 번이나 일으켰던 사람들이다. 룽윈, 천지탕 등의 지방 군벌들과도 이합집산과 반목을 반복했다. 그 장제스가 국공 합작을 깨기 전까지 일관되게 적대했던 것이 공산당이었다. 편하게 헤쳐모여가 가능한 군벌들과 공산당의 성격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국민당이 군벌들에 우세한 점이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한 혁명 사상인데 공산당은 국민당보다도 혁신적이라 위협적인 경쟁자였다. 이를 알기에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목을 매달았다. 더불어 장제스는 공산당 토벌에 군벌군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중앙군을 지방에 박아 군벌들의 영향력을 제거하려 했는데, 이 때문에 쓰촨, 윈난, 화북의 군벌들은 장제스하면 치를 떨게 되고 아예 공산당과 내통하여 태업 행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장쉐량의 시안 사건이다. 하지만 장제스가 공산당과의 합작을 아주 거부한 것은 아니어서 대장정 이후 공산당에 홍군을 해체하는 조건으로 국민당에 다시 받아주겠다고 제안한 바도 있고 시안 사건으로 강요된 합작도 번복하진 않았다. 이미 반일 감정이 너무 고조되어 합작을 거부했다간 국민당의 집권 기반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 컸다. 그래도 공산당은 결국 없애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사라진 건 아니었고 중일 전쟁 이후 무리한 공세를 취하다가 망했다.

6.3. 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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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1943의 이탈리아 왕국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파일:whattheydo.png 파시즘 여부 논란 있음
" 국민정부 초중반기(1928~1937) 시절 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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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의미에서 가족은 단지 한 가정을 뜻한다. 하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 가족은 민간 및 정부의 모든 조직을 포함하고 여기에 혁명당과 학교까지 든다.”
“우리 개인의 모든 말과 행동은 국가와 민족을 유일의 전제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권위주의 + 반공 성향 정치가였고 대륙에서 장제스의 시대가 세계적으로 파시즘이 날뛰던 1930 ~ 1940년대였던 것에 주목하여 장제스가 파시즘을 추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국민당의 유력 정치가 왕징웨이 장쉐량 등은 유럽을 방문하면서 히틀러, 무솔리니를 칭송하며 파시즘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쉐량은 장제스를 중국의 히틀러로 옹립 하여 중국을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후 천리푸, 다이리 등 장제스의 측근들이 지휘한 CC단, 남의사 등은 게슈타포, SS와 같은 파시즘 단체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중화민국과 나치 독일이 밀접한 교류를 하면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협력한 것 역시 장제스 파시스트 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저 시기는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평가가 좋았던 시절인 만큼 파시즘이나 히틀러, 무솔리니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전 세계적으로 있었다. 윈스턴 처칠 총리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도 무솔리니와 파시즘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사례가 있었다.

6.3.1. 장제스의 공식적인 입장

분명히 장제스 정권이나 장제스를 옹호하는 다이리 남의사, 천리푸, 천궈푸 CC단 등에서 파시즘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며 흑룡회를 비롯, 일본의 파시즘 성향이 짙은 비밀결사와의 연계가 있었으며 1932년 남의사 결성 이후 중국 내부에서 장제스와 파시즘의 연계에 관한 의혹이 제기된 바가 있다. 예컨대 1932년 7월 대공보는 장제스에게 '귀하가 파시스트 당을 조직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라는 공개 질문서를 제출했고 왕징웨이 계통의 황포동학구국단은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은 공개질문을 보냈다.
작년 이래의 외모, 수재, 비화는 귀하의 6년 간에 걸친 전정의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 귀하는 조속히 하야하여 국민에게 사과해야 할 처지인데도 오히려 불한당들을 이용하여 파시스트 당을 조직하려는 것은 위로 쑨원 총리의 유언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아래로 동지의 기대에 배반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귀하에 대하여 다음의 제항목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1. 귀하는 어찌하여 황포동학을 자기옹호에 이용하고, 혁명을 돌보지 않는가.
2. 귀하는 국민당의 영수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당 외에 파시스트당을 조직하여 국민혁명을 파괴하려 하는가.
3. 삼민주의를 고취함에 있어서 폭력정책을 사용해서는 안됨에도 불구하고 귀하는 어찌하여 철혈대로 하여금 민중을 압박하는가.
4. 귀하는 황제가 되어 인생의 부귀를 누리려고 하지만 황포동학을 이용하여 혁명군인의 이름을 더럽히지는 말라.
5. 만약 혁명구국을 위하여 파시스트당을 조직한다고 하면 바야흐로 항일을 위해 출병하라.
6. 파시스트 당의 유일한 수단은 암살에 있으나 귀하는 3천명의 사병으로 4억 민중을 모조리 살해할 수 있다고 사료하는가.
7. 파시스트 당의 경비는 1개월 120만 원에 달한다고 하는데 귀하의 강회 지역의 영세민이 날마다 초근목피로 끼니를 떄우는 궁핍한 상태를 염려한 일이 있는가.
8. 귀하는 파시스트당의 조직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어째서 중앙군관학교의 군관특별연구반, 교육총대 및 단경반에 대해 파쇼적인 훈련을 하고 있는가.
9. 귀하는 무솔리니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탈리아 정부의 내부는 무솔리니의 친척으로 충만되어 무솔리니 일가의 천하로 보이지 않는가.
10. 귀하는 파시스트당을 존경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국 파시스트당은 대외 무저항주의를 국민에게 강제할 것인가.

이에 대해 장제스는 "나는 파시즘을 아주 싫어한다."라고 답변할 뿐 입장표명을 하지 않았다. 이어 대공보에 다음과 같은 답변을 보냈다.
"중국혁명의 조직과 방략에는 쑨원 총리가 정한 조직과 방략만으로도 국민혁명의 사명을 완성하기에 충분하다. 외국의 혁명방략을 좇아서 중국의 민족성과 상반되는 조직을 사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노력할 뿐이다. 만약 내가 사욕을 품는다면 국가도 민족도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국혁명이 실패한 이유는 쑨원 총리를 배반한 반혁명분자가 국민당 고유의 조직과 방략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고유, 유일한 혁명조직을 회복하지 않고 파시스트의 조직을 좇아서 이를 중국에 강행하려고 함은 공산당이 중국을 적화하려고 함과 다를 것이 없다. 나는 살아서도 중국 국민당원이요, 죽어서도 당귀가 될 뿐이다. 중국혁명의 조직에는 국민당의 조직이 있을 뿐이며 중국혁명의 방략에도 역시 국민혁명의 방략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중국혁명 완성을 위한 유일무이의 도립이다. 이외의 조직은 절대로 반대한다. 나의 유일한 소망은 민국 13년에 성립한 국민당의 혁명정신과 국민혁명의 조직 및 방략을 부흥시킴으로써 삼민주의의 실현을 기대함에 있다."

하지만 장제스는 공산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파시즘이 필요하다는 연설을 하기도 했으며 파시즘의 혁명적 열기에 관심을 보였다. 1924년 1차 국공합작 이후 기존 국민당원들에게서 혁명적 열기가 사라지고 오히려 중국 공산당에게서만 열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장제스의 맹우이며 반공 이데올로그 다이지타오도 한탄했던 문제였는데 장제스는 혁명열기를 고취시키고 경제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방법이 파시즘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고 분명 관심과 희망을 가졌었다.
" 1931년 9월 18일 이후, 이탈리아 파시즘을 모방하자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앞으로 중국 혁명에 대한 협의체는 삼민주의와 파시즘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국민당의 삼민주의 원칙이 파시즘이라는 새로운 피를 수혈 받아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파시즘은 중국의 미래입니다. (...) 우리는 내용면에서 삼민주의를 활용하고 기능면에서 파시즘을 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중국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1934년에는 이렇게도 말했다.
"유명한 정당이 있는 외국에서는 그 당이 통치권을 갖고 있으며, 중국의 경우 유명한 정당은 국민당입니다. 그러나 국민당은 권력이 없는 형식적인 기관일 뿐입니다. 다른 나라의 파시스트 정당은 성공을 거두었으며, 최근 더 큰 성공을 거두며 세력을 넓히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중국에도 파시스트 정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이는 장제스가 파시즘의 사상적 면을 이해하고 공감했다기보다는 혼란스러웠던 정국을 안정시키는 기능적 수단에 주목했던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당시 중국 엘리트들에게 파시즘은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매우 진보적인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정두음 박사는 장제스가 유럽 파시즘에 관심을 보인 분야는 조직에 있지 '사상'에 있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런 부분적인 기능적 수단을 차용하는 경우는 비 파시즘 계열의 여러 국가[8]에 대해서 얼마든지 보인 경우이다. 사상면에서는 장제스와 국민당 엘리트들은 유교 사상이 근반이 되었다.

하지만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장제스의 파시즘에 대한 관심은 예전과 달라졌고 1938년 인민정치위원회에서 장제스는 자신의 정치사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명했다.
'"중화민국을 설립한지 27년이 지났습니다. 이 시기 동안 소위 대중집회가 여러번 있었지만 진정한 민주주의나 헌정주의는 없었습니다. 또한 불행히도 이런 초기 집회들이 몰고 온 수많은 부패 관행들이 직접적 또는 간접적으로 국가를 혼란과 허약한 상태로 내몰았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금 우리나라는 우리의 적들로부터 억압과 굴욕을 받고 있습니다. 물론 인민정치위원회는 의회가 아니지만 여러분은 정당정치가 빚어낸 과거의 실수들이 지속적인 경고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동시에 이 나라에 진정한 민주 정부를 세울 수 있는 굳걷한 기반을 세울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약해서 장제스가 20년대 후반~30년대 중후반에 파시즘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근대화의 수단 중 하나로 관심을 보인 수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다만 실제로 장제스의 통치방식은 파시즘적인 색채가 있었던것은 확실하다.

6.3.2. 장제스 정권 분석

중국 국민당이 권위주의 정권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은 정치학적 분석에서 의심할 여지가 없고 중국 파시즘에 대한 연구도 남의사, CC단, 그 중에서도 남의사에 집중되어 있다. 당시 중국에서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 준동한 세력으로 그나마 지목되는 것이 남의사이기 때문이다. 맨 처음 남의사와 파시즘의 연대를 연구했던 것은 로이드 이스트만인데 그는 이렇게 규정한다.
남의사가 파시스트 조직이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때 역행사의 지도층이 국가를 되살리기 위한 명시적인 방법으로 파시즘에 전념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파시즘이 역행사에 뚜렷하고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은 잠깐이었다.

우선 이런 문제는 무엇이 파시즘이냐는 파시즘의 정의 차원에서 상당히 민감한데 권위있는 파시즘 연구자들인 로버트 팩스턴이나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는 남의사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파시즘 단체는 아니라고 보고 있다. 소위 '파시즘의 최소치'에 중점을 두는 팩스턴의 경우 구조주의적 파시즘 연구에 입각하여 일본 제국조차도 파시즘이 아니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는 장제스나 남의사나 파시즘 얘기를 꺼낼 건덕지가 없게 된다. 케빈 패스모어의 경우에도 남의사는 대중정당이 아니라 비밀결사로 파시즘식 대중정당으로는 볼 수 없다고 분류한다.

물론 일본 학계에서 주장하는 일본식 파시즘의 존재를 긍정할 경우에 이야기는 조금 달라지긴 한다. 일본식 파시즘을 긍정할 경우, 현양사, 흑룡회를 비롯한 비밀결사들의 행동이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며 일본 파시즘은 대중운동보다는 위의 군사, 정치 엘리트들이 주도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의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로부터의 파시즘은 파시즘 정당이 대중운동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서구와 달리 기존의 국가조직과 지도자를 탈바꿈하는 식으로 집권하기 때문에 없잖아 국민당의 통치에도 맞아 떨어질 건덕지가 있긴 하다.

하지만 남의사는 1938년 이후로 해체되어 중일전쟁을 위한 정보기관에 흡수되었고 그 이전의 남의사의 첩보활동들도 단순히 권력 탈취와 국가 개조를 위한 행동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다. 정두음 박사의 경우, 남의사를 파시스트 단체로 정의하지만 이는 남의사의 공식적 이념보다는 선전자료, 출판물을 중심으로 정의하고 있다.

7. 대인관계

장제스/각국 정상들과의 관계

8. 이름 표기법

구분 명자(名字) 설명
족보명 저우타이(周泰, 주태) 장제스의 족보 이름.
초명 루이위안(瑞元, 서원) 초명
학명(學名) 지칭(志淸, 지청) 학생 시절 이름.
본명 중정(中正) 본명
제스(介石, 개석) 자. 실제 이름인 중정보단 장제스로 유명하다.
한국에선 자를 그대로 읽은 장개석으로 통용되기도 한다.
별명 노장(老蔣) 어린 아들 장징궈[9]와 구별되는 존칭.

그의 이름 표기는 다양한데,

9. 여담

9.1.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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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 신 대만 달러 지폐에 나온 장제스. 밑의 건물은 타이베이 총통부다.

종교는 기독교(감리교)였다. 아내인 쑹메이링과 아들인 장징궈도 기독교인. 원래 쑨원을 포함한 중화민국 및 중국 국민당의 초기 정치적 주요 인사들 가운데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았다. 장제스가 처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건 아니고 쑹메이링과 결혼하면서 개종을 한 것이다. 쑹메이링이 장제스와 결혼할 때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고.

9.2. 중국사 유물 보존

비록 대만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자금성에 있던 진귀한 역사적 유물의 핵심을 보존해 대만으로 실어왔다. 이 유물들은 중국의 여러 황실에서 계속 모아온 보물 중의 보물로 지금까지도 중화민국이 가진 가장 큰 보물로 꼽힌다.

정말 문화적인 면에서는 중화민국의 유물 보존 노력이 많이 도움이 되었고 현재 유물을 전시 중인 고궁박물원을 세계 4대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장제스가 유물을 이전한 이후 자금성은 그야말로 껍데기만 남아 관광객을 맞이하기도 했는데, 이후 중국 정부가 대륙 전체에서 유물을 수집해 양적으로는 과거의 규모를 능가했지만 질적으로는 국립 고궁 박물원의 그것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장제스가 자금성의 유물을 가져가지 않았다면 그 유물들은 문화대혁명 시기를 무사히 넘기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대만 고궁박물관과 북경 고궁박물관을 비교한다면 대만쪽이 명, 청 및 근대시기 유물이 많고 본토에는 고대시대 유물이 많다고 한다. 당연한 것이 장제스가 유물들고 대만에 넘어갔을 쯤에는 전제왕조 시절 부터 쌓여있던 오리지널 유물을 가져간거고 그 후에 대약진운동이야 문혁이야 를 거치고 난 뒤 좀 안정됐을때 좀 더 발전된 고고학 기술을 이용해 발견된 유물들이 많기 때문이다.

9.3. 증손 장여우보

증손자인 장여우보(장우백, 蔣友柏)가 매우 미남이라 한때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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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주간 - 나의 증조부 장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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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여성이 뽑은 멋진 남자 2위에 올랐던 적도 있다. 그는 장징궈의 3남 장샤오융(장효용, 蔣孝勇)의 아들로, 장징궈의 아내 장팡량(장방량, 蔣芳良)이 소련 출신이라 장제스의 손자 대부터 혼혈 외모가 나타나는 것.[11] 그는 미국 유학 후 대만에서 광고 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진정한 엄친아.

반대 급부로 마오쩌둥의 유일한 손자인 마오신위 후덕한 외모로 비교가 되기도 했다. 대만과 대륙의 여성 네티즌 사이에선 얼굴로 대륙을 탈환해달라는 반응도 있다.

정치와는 큰 관련을 맺지는 않지만 장제스의 대만 통치에 대해 반성의 태도를 나타내는 등 장제스에 대해 여타 장씨 가문 인사들과 다른 인식을 보여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한편 장여우보의 동생인 장여우칭(장우청, 蔣友青)은 모교인 타이베이 아메리카 스쿨에 "교사와 학생을 다 죽이겠다", "학교를 폭파하겠다"는 등의 협박을 일삼은 죄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9.4. 증손 장완안

장제스의 증손자 중 하나인 장완안(蔣萬安, 장만안)은 장징궈(장경국)의 비서이자 내연녀 장야뤄(章亞若) 사이에서 난 자식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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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궈의 본처 장팡량이 장징궈의 친자식으로 인정하는 것을 반대하는 바람에 내연녀의 성을 따라 章씨였다. 후에 장팡량이 죽고 장씨 가문에서 인정받아 2005년 3월에 蔣씨로 성을 바꿨다. 이후 2007년도에 2.28 사건의 최고 책임자가 장제스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 나오자 명예 훼손이라며 저자를 고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장완안은 2016년 제9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에서 타이베이시 3선거구( 중산구, 쑹산구)에서 중국 국민당 후보로 국회의원(입법위원)에 당선되어 국회 의원으로 활동중이다. 수려한 외모와 참신한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매우 높아 정계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 국민당의 차기 주자 중 하나로 예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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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港的學生及年輕人,無懼港警強力鎮壓,為了捍衛自由與民主,向全世界發聲及吶喊,對於這樣的勇敢,我必須要給予最高的敬意。

在臺灣,一國兩制沒有存在的空間,民主自由憲政體制也不容任何破壞及妥協。政府除了要密切注意並維護在香港就讀的臺生、在港工作的臺灣民眾人身安全,必要時也該提供香港民眾人道救援。
홍콩 학생들과 젊은이들은 홍콩 경찰의 강경 진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전세계에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강력히 지지할 것입니다.

대만에는 일국양제가 있을 곳이 없으며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헌법 체계는 어떠한 탄압도 타협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대만 정부는 홍콩에서 유학중인 대만 학생들과 홍콩에서 일하는 대만 국민들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홍콩 주민들을 위한 인도적인 지원을 해야 합니다.

- 장완안(蔣萬安, 장만안) 중화민국 입법원 국회의원( 중국 국민당) 출처
그는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위해 뛰쳐나온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며 일국양제를 거부하는 논평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 장제스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에 대만 정계에 충격을 몰고 왔고, 해당 글에 대한 댓글 중국에서 몰려온 우마오당들은 "장개석 얼굴에 먹칠할 거면 민주진보당으로 꺼져라"등 각종 패드립을 치고 있고, 범록연맹 지지자들도 "진정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며 까고 있다. 링크

9.5. 생전 육성



장제스의 실제 육성 연설 중 하나. 중일전쟁 승전 연설(중 일부)이다. 표준중국어로 하긴 하는데 발음이 영 좋지 않은데 저장성 지역의 방언인 오어를 오랫동안 썼기 때문이었다.

장제스는 열혈 중앙집권주의자로 표준중국어를 유일 국어로 밀었지만 본인은 국어가 어색했다. 이는 숙적인 마오쩌둥과 이 둘의 대선배인 쑨원도 마찬가지였는데 마오쩌둥도 역시 표준중국어만 유일한 공용어로 지원했지만 정작 자신은 사석에서는 고향인 후난성의 샹어를 주로 썼고 공식석상에서 표준중국어를 쓰긴 하는데 상당히 서툴렀다. 쑨원의 경우 광동어가 모어이고 정치활동에 쓰던 주 언어는 영어였다. 참고로 중국어 방언들은 소통이 안되는 외국어 수준으로 각자 다르다.

타이베이에 있는 중정기념당에서 전문을 재생해주니 갈 수 있는 위키니트는 들어보자.

9.6. 야사

한국에서 정재계 부정부패 사건이 터질 때 가끔 언급되는 장제스에 대한 야사가 있다. 야사에서의 시점은 중일전쟁이 한창일 시기이거나, 국부천대 이후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국민당 정권을 개혁할 때로 꼽힌다. 야사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장제스의 며느리가 밀수 등 심각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장제스는 며느리의 집을 강제 수색하라고 명하였는데, 집을 수색하자 각종 보석들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 결과를 보고받은 장제스는 며느리를 불러서 한 상자를 선물로 주었는데, 며느리가 집으로 돌아와 상자를 열자 권총이 나왔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압박을 눈치채고 그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이야기.

이 야사는 의외로 오래되었는데, 한때 중화민국 주재 대사를 지냈던 김신의 회고록에서 이 내용의 기반이 된 썰이 나오며, 김영삼도 대통령 시절 금융실명제를 시행하면서 김현철에게 이를 언급한 적도 있다. 장제스의 며느리 중 한 명인 스징이(石靜宜, 장웨이궈의 첫번째 부인 )는 실제로 사치와 밀수 등의 행위 때문에 장제스가 매우 싫어했다. 스징이는 1953년에 사망했는데, 이 때 전후 사정이 석연치 않아서 장제스가 스징이를 암살, 혹은 비밀리에 처형했다는 설이 크게 나돌았다. 김신은 아예 회고록에서 이 설을 사실이라고 소개했다. 이 살해설이 앞서 언급한 부정부패 야사로 발전한 것.

10. 기타


국내 남성 잡지 맥심 2020년 9월호 168쪽에 따르면, 대한민국 국방부는 중화민국의 장제스(蔣介石)를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으로 바꿔버렸다.
 같은 해 6월, 국방부의 관리를 받는 전쟁기념관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도왔던 '중화민국'(현 대만)에 엄청난 외교 결례를 범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총통이던 장제스를 '광복군의 든든한 후원자'로 소개하면서 국적을 중국으로 홀라당 바꿔버린 것. 중화민국의 국기 '청천백일기' 대신 그들의 적이자 1945년 광복 전까지 건국되지도 않았던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의 '오성홍기'를 때려 박았거든. 우리로 치면 이순신 장군 사진에 일장기를 박아넣고 "위대한 일본인 이순신!"을 외친 수준이다. 온라인 게임하다 만난 중국인에게 "타이완 넘버원!"을 외쳤을 때 분노하는 중국인을 만나본 독자라면 대만과 중국이 서로에게 얼마나 큰 반감을 품는지 잘 알 거다. 그런 대만에 중국 국기를 들이밀었으니... 이 사건으로 국방부는 중화권 언론에서 신나게 조롱을 받야야 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국방부가 이와 흡사한 사건을 불과 1년 전에 겪어놓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는 거다. 2018년, 국방부는 국군창설 7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국군의 뿌리를 찾아서'라는 웹툰 홍보물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근데 이 게시물에서 중화민국의 국기를 중공의 국기처럼 보이도록 색을 입혀놨던 사건이었다. 이 게시물의 원안인 1940년 광복군 창설식 사진이 흑백이라서 깃발의 색을 몰랐대도 그렇지, 인터넷으로 몇 초만 찾아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정보를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도 못 한다는 말인가?

11. 한국과의 관계

11.1. 카이로 회담 및 지원 여부

장제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국인 후원자로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해주었으며 얄타 회담에서 이를 재확인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에서 장제스의 역할은 크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서 한반도 독립에 관해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 조차도, 장제스가 카이로에 오지 않았다면, 한반도 문제는 언급될 기회가 적었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18]

1932년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남의사 계열이나 CC파를 통해 지원하였고, 난징 중앙 군관 학교 분교 지원금을 김구에게 보내줘서 이범석 등의 걸출한 독립 운동가들이 나올 수 있었다. 한국 광복군 창설에도 장제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물론 장제스가 생색도 냈고 광복군 창설 당시에는 "한국 광복군 9개 준승 사항"이라 하여 활동을 제약한 편이라고는 하나, 별다른 기반이 없었던 망명 정부에 불과한 임시정부와 광복군은 그것만 해도 받아들여야 했다. 난립하는 지방 군벌과 공산당 때문에 골치를 썩던 장제스의 입장에서는 또다른 군사 세력이 중국 땅에 생기는 셈인데 이 정도도 크게 인심 쓴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장제스가 임시정부를 지원한 이유는 한국이 독립하면 한국을 중화민국의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것이었다는 설도 있다. 장제스의 원 계획은 통일하고 나서 한국, 일본, 몽골, 베트남, 미얀마, 태국, 인도 등을 위성국으로 만드려는 속셈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임시정부의 조소앙과 미국 정부 측 인사들은 장제스가 이들 나라들을 장차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다는 정황들을 목격했다고 하는데, 미국 국무부에서는 장제스가 한반도를 병합시킬 야심을 가지고 있다는 내용의 기밀이 공개되었는 주장도 있다. 관련 기사 다만 장제스가 장래에 한반도를 병합하려고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 관련 연구는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의 오해로 본다.[정병준,2014,315-318]

1942년 11월 장제스의 처남이자 외교 부장이었던 송자문(쑹쯔원)이 외교 부장으로 취임하고 가진 첫 기자 회견에서 만주 타이완 섬의 중국 복귀를 주장하고, 조선을 전후에 독립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7월 장제스는 임시정부 간부들을 맞이한 자리에서 한국의 독립을 강대국 정상들과의 회의에서 합의를 얻도록 "힘써 싸우겠다(力爭)"고 약속했다.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 출발 전에 휘하의 군사위 참사실에서 올린 의제로 중국 영토 회복 다음으로 한국 독립 승인 건이 올라 있었고, 국방 최고위 비서청에서 올린 의제에도 정치 부문에서 첫머리에 한국 독립 건을 내세웠다. 장제스가 카이로로 떠나기 바로 전날의 일기(1943년 11월 17일)에도 회담의 의제를 기록했는데 조선 독립 항목이 들어가 있고, 의제 전 항목도 국방 최고위에서 제출한 내용과 같았다. "중국, 미국, 영국, 소련이 즉시 한국의 독립을 공동 혹은 개별적으로 승인하거나, 전후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선언을 한다"는 조선 독립 조항을 위한 교섭 지침까지 제시되어 있었다.

장제스의 한국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강고했다. 회담 중 걸림돌이 발생할 경우의 전략까지 언급했는데 "한국 독립 조항이 미·영의 반대로 합의가 되지 않아 선언에 삽입할 수 없게 된다면, 중국 단독으로 일방적으로 일본 패망 후에 한국의 즉시 독립을 지지한다"는 강경한 방침을 정했다. 당시 영국은 인도 문제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염려하여 한국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소련 역시도 일본과 중립 조약을 맺은 관계로 의견 제시가 어렵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장제스는 영국 때문에 미·영이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게 되면 미국이 주저하게 되겠지만, 중국이 독단적으로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면 세계는 연합국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고 보게 되고 이러한 사태가 오기 전에 결국 영국과 미국의 타협안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치밀한 시나리오였다. 결과적으로 카이로 선언은 중국의 판단대로 흘러갔고 장제스의 강경한 태도에 반대 입장을 피력한 영국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회담 후에 장제스는 한국 독립 조항을 넣은 것을 자신의 '유례없는 외교적 성공(Unprecedented Diplomatic Success)'이라고 일기(주간 회고 부분)에 적었다. 출처

11.2. 이승만과의 관계

이승만과의 관계는 처음에는 좋지 않았다. 해방 직전에 한국이 해방되면 누가 한국의 대표로 UN에 출석할 것일가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장제스의 처남이자 중국의 외교 부장인 송자문(쑹쯔원)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표로 나섰던 김구, 이승만, 한길수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한길수야 처음부터 송자문에게 줄을 대고 있었고 김구는 장제스의 지원을 받는 입장이니 당연히 응했지만 이승만은 이 요청을 씹었고 기분이 상한 송자문은 이승만에 대해 장제스에게 안 좋게 말했다. 당연히 장제스는 이승만은 무시하고 한국의 차기 지도자로 김구를 지지했다. 장제스가 김구에게 준 20만 달러의 독립 자금의 사용처를 두고도 두 사람은 충돌했었다.

이후 기선을 잡은 것은 이승만이었는데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1949년 8월에 이승만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장제스가 방문하자 이승만은 그에게 "당신처럼 분열이나 조장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고 차라리 마오쩌둥이 훨씬 믿음직하니 앞으로 한반도 문제는 마오쩌둥 주석하고만 논의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고. 근데 마오 주석과 회담했으면 아마 한국이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수도 이에 이미 그에게 밀려 타이완으로 쫓겨나기 직전이던 장제스는 송자문 탓을 하며 이승만을 대형이라고까지 부르면서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아... 안습 근데 이 일화에 너무 의미를 둘 것은 없는 것이 대형이란 칭호 자체가 당시 중국에선 굉장히 헤픈 칭호였다. 장제스가 형제 운운했던 사람들 중에선 그와 적이 된 사람도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펑위샹이나 리쭝런. 그 둘과도 의형제 결의를 맺고 하하호호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그의 의도가 어쨌건 현실에서는 중화민국이 대륙에서 밀려난 결과, 한국을 위성국화 할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작금에 와선 물 건너간 소리가 되어버렸다. 한국도 결코 큰 나라라고 할 수는 없지만, 중화민국의 남은 영토인 타이완 섬은 거리도 멀 뿐더러 한국의 1/3을 조금 넘는 수준의 섬이 영토의 거의 전부인, 한국보다 많이 작은 나라로 전락해버렸기 때문.

11.3. 건국훈장 수여

파일:external/cfs1.blog.daum.net/download.blog?fhandle=MEJHaGhAZnMxLmJsb2cuZGF1bS5uZXQ6L0lNQUdFLzAvNjIuSlBHLnRodW1i&filename=62.jpg
장제스에게 수여된 대한민국 건국 공로 훈장. 중정 기념당에 전시되어 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에서 한국의 독립에 대한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공헌을 기려서 건국 훈장을 수여하였다. 북한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6.25 전쟁을 말아먹어 중공의 타이완 침공을 무산시켰다 카더라.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는 그의 부인 쑹메이링, 쑨원, 천궈푸, 천치메이와 같이 임시 정부와 한국의 독립 운동을 도운 중화민국의 정부 요인들에게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이 수여되었다.

6.25 전쟁 때에도 장제스 국부군을 한반도에 파견해 한국을 지원하고자 하였다. 이는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에 의해 거부당했지만 그 대신 정보부대 등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들 중심으로 소수의 부대를 파병했다. 여기에는 이를 통해 본토 수복을 꾀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11.4. 박정희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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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타이베이를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과의 모습. 왼쪽의 익숙한 얼굴이 박정희, 군복을 차려입은 하얀 수염의 노인이 장제스이다.
박정희 대통령과는 이념적 반공 동맹을 유지하는 우호 관계였다. 대만이 국제 연합에서 추방당하고 미국에게도 버림받자 박정희 정권도 슬슬 중국과 접촉을 시도하는 등 장제스의 애간장을 태웠지만 한중 수교 때까지 한국과 대만은 현실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한미정상회담이 개최됬을때도 후술하는 김신 대만 대사를 통해 미국은 대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달라고 친필 편지를 보낼 정도로 대만은 미국과 소통하려면 한국의 도움이라도 있어야할 처지였기 때문이다.[20]

11.5. 이후 행보

김구와는 상당히 가까운 사이였고 김구의 아들인 김신의 안가를 주선해 주는 등 인연이 깊었다. 1962년 김신이 공군에서 예편하여 대만 대사로 부임하자 몹시 반가워했으며 김신에게 "나는 자네를 일개 대사로 생각하지 않네. 자네 부친과 나는 항일 투쟁 동지였으니 자네는 나의 집안 사람이나 다름없네."라고 환대했으며 복잡한 의전을 생략하고 김신과는 정말 가족을 불러올 때처럼 허물없이 자주 대화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 장징궈(장제스의 아들)와 너의 의형제와 다름 없지 않냐"라며 상당히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장제스는 김신에게 털어놓길, 중국 대륙에서 패배한 이유는 주변에서 좋은얘기만 하고 안좋은 국가상황에 대해 말해주지 않아서라고 후회하며 대만에 고칠점이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거나 자주 대만 내정에 대해 이야기한것으로 보인다. 이때문에 김신은 아무리그래도 이건 내정간섭이라고 말을 자주 피했고 김신에게 뇌물을 주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과묵하고 웃지도 않는 장제스였지만 김신과 함께 있을 때는 자주 웃고 떠들었으며 장제스가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경호원들이 김신을 데려와서 장제스 기분을 풀어줄 정도였다 한다.[21] 임시정부 수립 50주년을 기념하여 1969년(김구의 서거 20주기이기도 했다) 남산공원에 세워진 김구 동상에는 장제스가 현직 총통 자격으로 보낸 추모 글귀가 조각되어 있다.

1963년 한국에 대흉년이 들어서 긴급히 쌀을 사와야 할 일이 있었는데 박정희 국가 재건 최고 의장은 김신 대사에게 대만에서 쌀 5만 톤을 사올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대만에서도 흉년이 들어서 한국에 쌀을 팔 여유가 없었던 상황이었다. 결국 대만 행정원장은 쌀을 팔 수 없다고 김신을 돌려보내야 했는데 그 소식을 들은 장제스가 즉각 국무 회의를 소집하여 한국에 쌀을 팔 것을 지시했다. 장관들이 반대했지만 장제스가 막무가내로 밀어붙여 김신을 쌀 5만톤을 사서 한국에 보낼 수 있었다. 이에 김신이 장제스에게 감사를 표하자 장제스는 우리가 대륙을 아직까지 갖고 있었다면 그까짓 5만 톤이 아니라 55만 톤 정도는 거저로 주었을 것이라고 한국 같은 각별한 나라에게 쌀을 돈 받고 팔아야 하는 것이 애석하다며 오히려 미안해했다고 한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과 회담했을 때는 박정희의 손을 잡으면서 "내 나이가 이제 80이 다 되어가니 아시아의 반공 지도자는 박 대통령이 이으시오"라고 말했다 한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하자, 한국 정부에서는 당시 국무 총리였던 김종필을 대표로 조문단을 파견했다. 관련 영상

결론적으로는 중국을 통치했을 당시에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물주였으며 생색도 많이 내기는 냈지만, 위에 언급된 김구 이승만말고도 김규식, 김원봉, 이시영. 이동녕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장제스의 후원을 받아 활동했기에 결론적으로 매우 큰 도움을 받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있어서 일정부분 공헌을 했다. 또한 제국주의 시대 이후 냉전기에도 남한과 대만은 같은 반공을 표했던 동맹국이기에 현재까지도 양국 간의 이미지는 우호적인 편이며, 서로간의 관광과 교류도 꽤나 활발한 편.[22] 혹여나 장제스가 세간의 의혹처럼 당초 품었던 속셈[23]이 있었더라도, 2차 대전 후 마오쩌둥에게 쫓겨 대만으로 도주하게 되면서 그것을 실행에 옮길 기회가 없어졌기 때문에, 결국 정말 한국에 도움만 준 인물이 되었다. 또한,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고 한들 김구-김신과의 관계에 대한 일화들을 보면 인간적인 진정성도 없진 않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12. 매체에서

12.1. 역사서

12.2.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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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참고 문헌

14. 관련 문서

14.1. 인물

14.1.1. 국민당 계열

14.1.2. 공산당 계열

14.1.3. 군벌

14.1.4. 가족

14.1.5. 열강

14.1.5.1. 미국
14.1.5.2. 일본
14.1.5.3. 영국
14.1.5.4. 소련

14.2. 사건

14.3. 단체

14.4. 기타

15. 갤러리

파일:장개석 초상.jpg 파일:장개석 결혼사진.jpg
장개석 초상 컬러버젼 쑹메이링과의 결혼 기념 사진.

16. 둘러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난징 국민정부 역대 정부주석
파일:대만 국장.svg
초대 2대 대행
탄옌카이 장제스
( 1928년 10월 10일 ~ 1931년 12월 15일)
린썬
3대 대행 4대
린썬 장제스
( 1943년 8월 1일 ~ 1943년 10월 10일)
장제스
대행 4대 ( 중화민국 총통 선출)
장제스 장제스
( 1943년 10월 10일 ~ 1948년 5월 20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행정원장
파일:대만 국장.svg
대행 2대 대행
쑹쯔원 장제스
( 1930년 11월 24일 ~ 1931년 12월 15일)
천밍수
대행 5대 6대
쿵샹시 장제스
( 1935년 12월 16일 ~ 1938년 1월 1일)
쿵샹시
6대 7대 8대
쿵샹시 장제스
( 1939년 12월 11일 ~ 1945년 6월 25일
쑹쯔원
8대 대행 9대
쑹쯔원 장제스
( 1947년 3월 1일 ~ 1947년 4월 23일)
장췬
국민혁명군 역대 총사령관
파일: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_Army.svg.png
총사령관직 신설 초대 총사령관직 폐지
장제스
( 1926년 6월 5일 ~ 1927년 4월 1일)
국민혁명군 역대 제1집단군 사령관
파일:900px-Flag_of_the_Republic_of_China_Army.svg.png
1집단군 신설 초대 1집단군 폐지
장제스
( 1927년 4월 5일 ~ 1929년 1월 22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역대 위원장
파일:800px-Flag_of_the_Chairman_of_the_ROC_Military_Affairs_Commission.svg.png
1대 2대 편견회의로 폐지
왕징웨이 장제스
( 1926년 4월 14일 ~ 1928년 11월 10일)
위원회 신설 초대 위원회 폐지
장제스
( 1932년 2월 8일 ~ 1946년 5월 31일)
난징 국민정부 역대 외교부장
파일:ROC_Ministry_of_Foreign_Affairs_Emblem.svg.png
11대 12대 13대
궈타이치 장제스
( 1941년 12월 27일 ~ 1942년 10월 20일)
쑹쯔원 }}}

[1] 친부가 다이지타오라는 의혹이 있다. 예전엔 아예 정설로 받아들여졌으나 현재는 찬반여론이 엇갈린 상태. [2] 중화민국 몰락의 원인은 군벌과 장제스의 갈등 외에도, 낙후된 사회시설, 그리고 공산당 토벌과 항일운동 중 의견차로 내부분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다만 시안사건을 일으킨 장쉐량은 순수하게 항일으로써 목적이 아닌,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빼앗겨 영향력이 소실되가자 궁지에 몰려 장제스를 감금한 것에 가깝다. [3] 만주 일대를 장악했다. [4]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 문서 참조. [5] 장제스는 반공주의자임에도 이런 면에서는 오히려 마오쩌둥보다 이오시프 스탈린에 가까운 평가를 받고 있다. [6] 이것은 량치차오의 신민설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7] 거부하긴 했지만 중일 전쟁 발발 직전에는 이미 제헌 의회를 위한 총선거가 완료된 상황이었고 1937년 12월 입법원이 열릴 예정이었다. [8] 예컨대 팩스턴의 견해를 따르면 후안 페론이나 안토니우 살라자르. [9] 장징궈는 노장인 아버지처럼 소장(小蔣, 작은 장)이라 불렸다. [10] 2008년 칭화대 교수 왕치(王奇, 왕기)가 Chiang Kai-shek이 장제스임을 알지 못하고 창카이선(常凱申, Cháng Kǎishēn, 상개신)이라는 가공의 인물로 번역하여 크게 망신을 사기도 했다. # 그 이후 '창카이선'과 '창공(常公, 상공)'이 중국 내에서 장제스를 가리키는 별칭으로 쓰이고 있다고... [11] 다만 장징궈에게는 비서와 사통해서 낳은 쌍둥이가 있었기 때문에 이쪽 계통 자손들은 해당되지 않는다. 장징궈 항목 참조. [12] 한국에는 청와대 안에 대통령의 살림집(공관)이 있으나, 중화민국은 밖에 있으며, 거기에서 총통부로 출근한다. 현임 차이잉원의 관저는 리덩후이 집권기 때부터 쓰이는 곳으로 총통부와 약 1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13] 주로 자수, 그림을 했으며, 관저에 걸린 미술품의 상당수가 쑹 여사의 작품이다. [14] 비슷하게 이승만도 자신에 대한 호칭 중에서 '박사'라는 호칭을 좋아했다고 한다. [15] 일설에는 폴란드 침공 때도 있었다고 한다. [16] 짱개(중국인) + (조)석 이라서 짱개석이라고 한다... [17] 다만 중일전쟁 중에는 담배를 조금 피우기도 했다. [18] 카이로선언의 국제정치적 의미, 최영호, 영토해양연구, p. 72. [정병준,2014,315-318] 정병준, 카이로회담의 한국 문제 논의와 카이로선언 한국조항의 작성 과정, 역사비평, 2014, p.315-318 [20] 여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회담에서 이에 대해 물어보자 리처드 닉슨은 "대만은 중국대륙의 마지막 자유의 보루"라고 대답했고, 이를 듣고 장제스는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1] 1975년 4월 7일자 장제스 사망을 다룬 동아 일보 기사. [22] 다만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 위해 대만과 단교하며 한국에 배신감을 느끼는 등, 반한 감정도 꽤 있는 편이다. 한국-대만 관계 참조. 다만 2020년대 들어서 중국의 과감한 세계 정책과 여러 공정 등을 통한 움직임이 강화되면서 한국인들의 중국에 대한 이미지가 더 나빠진지라 이 역시 귀추가 주목되는 편이다. [23] 작게는 영향력 확대, 크게는 위성국화. [24] 기밀 문서 열람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장제스의 일기를 비롯한 장제스의 개인 기록들까지도 제공하였다. [25] 다만 1917년에 푸젠성 지역의 전투에 휘말리면서 1917년 이전의 자료는 일부 망실되었다. [26] 이렇게 자세하게 기록한 일기는 시안 사건 때 장제스의 목숨을 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장쉐량은 장제스를 체포했지만, 장제스의 일기를 읽어본 후, (항일을 기피하던) 장제스가 생각보다는 애국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장제스를 처형하려는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27] 장제스 생가와 모친 묘까지 모든 것이 박살나던 시기에 이 일기가 발견되어 어떠한 문제도 없이 남아있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라 할 수 있다. [28] 본명은 황런위(黄仁宇)로 중일 전쟁에도 참전했던 중화민국군 장교 출신이다. 1950년대 미국으로 유학한 이후, 2000년에 타계할 때까지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전공은 중국 근현대사는 아니고 명나라 경제사다. [29] 2004년에 원고를 받았는데 중국어 판과 영어 판이 너무도 다른 등 번역에 애로 사항이 꽃피어 2009년에야 완성됐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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