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 | 일본 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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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세기 초중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관계에 대한 문서이다.2. 역사적 관계
2.1. 초반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이탈리아 왕국과 더불어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해 추축국을 결성했다.[1] 그리고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은 폴란드 침공과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2] 하지만 양국은 추축 동맹이 맞나 싶을 정도로 따로 놀았고 양 전역 역시 별개의 독립적인 전선으로 전개되었다.2.2. 중반
일본 제국은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만주에는 만주국이란 일본 제국의 괴뢰국이 세워졌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상하이 전투가 치러졌다. 나치 독일은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중부유럽과 발칸 반도를 침공해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를 추축국에 가입시키고 나머지 지역을 점령해 괴뢰정권들을 세웠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의 점령하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학살당하고 탄압당했다.[3]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에 동남아시아와 뉴기니, 서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점령하고 현지 주민들을 학살하고 착취했다. 또한,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점령지에서 괴뢰 정권들을 세웠다.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서 수용소를 설치하면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으며 히틀러는 소련을 기습했고 단일 전역으로는 인류사 최대 규모인 독소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히틀러는 일본 제국에게 소련을 공격하라고 요청했지만, 일본 제국은 소련에 대해 중립 정책을 유지하면서 소련과는 할힌골 전투를 제외하고는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4]
2.3. 후반
1943년을 주로 연합국과 추축국의 운명이 결정된 해로 평가하는데 이해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이 승리하고 미국과 영국, 호주 등이 전투에서 연승하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또한 같은 해 태평양 전역에서도 미국이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승한 이후 1943년 무렵이 되면 과달카날 전역이 끝나고 미군의 일본 방면으로의 진출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나치와 일제의 동맹국인 이탈리아 왕국이 연합국에 항복하였다.이듬해인 1944년 루마니아 왕국, 불가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도 항복을 하고 연합국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나치 독일이 점령한 곳들을 차례차례 해방하면서 나치 독일은 패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은 서태평양에서 패전을 계속하면서 일본 제국이 점령한 섬들이 차례차례 해방되었고 이러한 섬들을 기점삼은 일본 본토 공습이 막을 올렸다.
2.4. 종결
1945년 히틀러가 자살하고 베를린이 소련군에 의해 점령된 이후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5월 나치 독일은 멸망했다. 그리고 3개월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인류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다. 결국 양국은 연합군의 점령을 받는 신세가 되었으며 뉘른베르크와 도쿄에서 군사 재판이 열려 전쟁과 학살을 주도한 전범들이 처벌되었다. 그리고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는 운명을 맞이했고 일본 또한 군대를 해산하고 개헌이 이루어졌다.3. 기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나치 독일 역시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피해국이었다.태평양 전쟁 전선에서 라바울 일대에서 벌어진 미네카제급 구축함 아키카제 승무원들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이른바 카비엥 학살이 발생했다. 자료1, 자료2 학살 이유는 "연합군에게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애매한 이유에서였다. 피해 민간인들의 국적도 다양했는데 여기까지 쓰면 흔한 일본의 전쟁 범죄였겠지만, 어이없는 것은 이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독일 국적의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역에 병원을 건립하고 의료기술을 전파하던 선교사, 수녀들이었다. 아무리 민간인이라고는 하지만 적국도 아닌 동맹국 민간인까지 눈에 뵈는게 없을 정도로 일본의 광기는 패색이 짙어질수록 극에 달했다.[5]
마닐라 대학살 당시에도 일본 제국군은 학살 과정에서 동맹국인 나치 독일의 갈고리십자 깃발이 당당히 걸린 마닐라 독일인 클럽에도 쳐들어가서 건물에 불지르고 탈출하려는 사람들은 총살하는 방식으로 800명 가량이나 학살했다. 출처는 스페인의 주요 일간지 ABC(스페인어) 당시 20여 명 가량의 일본 군인들이 독일 클럽 내 여성들을 노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 강간했으며, 소녀 한 명을 강간하고 살해한 뒤 시체를 훼손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였다고 한다. #
하지만 나치 독일은 유럽에서의 전쟁으로 인해 이러한 사정을 모르거나 관심이 없었고 현대 독일에서도 이러한 역사는 잊혀졌다.
4. 관련 문서
- 제2차 세계 대전
- 폴란드 침공 / 만주 사변
- 중일전쟁 / 독소전쟁
- 마닐라 대학살
- 독일-일본 관계
- 나치 독일
- 나치 독일/외교
- 일본 제국
- 추축국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1]
참고로 일본 제국은 추축국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과 가까운 관계였으나
만주국에 반유대주의 탄압을 피해 달아난 유대인 망명자들을 받아주려는
복어계획을 입안했을 정도로 의외로 나치 독일의
반유대주의 정책에는 그다지 동의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일본 제국은 이미
러일전쟁 당시 유대계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 전비 조달을 위해 국채를 발행했지만 동양국가인 일본을 깔보던 서구에서는 당연히 일본제국이 러시아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어느 누구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려 하지 않았는데, 그때문에 전비 고갈로 패배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일본 제국을 구원한 것이 바로 거물
유대인 금융가인
제이콥 쉬프로, 쉬프는
포그롬으로 유대인을 탄압하여 유대인의 적이었던
러시아 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하고 있던 일본의 국채를 매입했다. 이때 쉬프는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서 일어난
대일본제국은
하나님의 지팡이였다!"라고 말하며 일본 제국을 찬양했다. 쉬프가 일본 국채를 매입하고 다른 유대인 금융가들에게도 일본 국채를 매입하도록 주선하여 일본의 전비를 조달해준 덕택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제국은 조선에서의 경쟁세력인 러시아를 물리치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아 명실상부한 제국으로 거듭났으며 서구국가들에게서도 인정받게 되었다. 즉 일본 제국이
열강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순간에 이른바 '유대인 금융자본'의 도움을 크게 받은 것이고 이때문에 복어계획 등 의외로 나치의 반유대주의에는 그다지 동조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2]
사실 2차 대전의 양대 전역이 유럽 전역과 동아시아 전역이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유럽을 주 전선으로 보는 편이다. 따라서 절대 다수의 서술에서 2차 대전의 공식적인 개전 시점을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이 아닌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한 1939년으로 둔다.
[3]
나치의 학살은 주로 중앙 정부의 주도 하에, 일제의 학살은 개별 군대의 주도 하에 발생해 그 성격이 서로 다르다.
[4]
사실 이는 이유가 있는데 전략적으로 소련보다 동남아 방면이 더 중요했던 탓도 있지만 또한 과거 독일이 일본에 공지없이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고 독소전쟁의 발발 역시도 일본에 대한 통보가 없이 일방적으로 발생해 일본이 독일에 굉장히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 역시 독일과 이탈리아에 통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진주만 공습을 벌였다. 이러한 추축국간 상호 소통의 부재는 이들의 몰락을 앞당긴 원인이 되었다.
[5]
원출전은 다나카 유키의 <히든호러>. 자세한 내용은 영문 위키피디아
아키카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