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 폴란드 |
deutsch-polnische Beziehungen
Stosunki polsko-niemieckie
1. 개요2. 상세3. 분야별 교류 현황4. 역사
4.1. 960년~1225년
신성 로마 제국 -
폴란드 영지 /
폴란드 왕국4.2. 1226년~1795년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왕국 -
폴란드-리투아니아4.3. 1772년~1795년
폴란드 분할4.4. 1795년~1918년 폴란드 분할 ~
제1차 세계 대전4.5. 1918년~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
폴란드 제2공화국4.6. 1933년~1945년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4.7. 1949년~1990년
냉전4.8. 1990년~현재
동서독 통일 -
폴란드 제3공화국
5. 대사관6. 관련 기사7. 관련 문서1. 개요
독일과 폴란드 관계의 기초에는 2차 세계대전의 기억이 여전히 존재한다. 독일의 침공과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이는 오랜 기간 동안 감정적인 상처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전후 양국은 화해와 협력을 모색했고, 특히 1989년 냉전 종식 이후 양국 관계는 큰 발전을 이루었다.오늘날 폴란드인들은 독일을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여기며 많은 폴란드 노동자와 이주민이 독일에서 일하고 있다. 독일인들은 폴란드를 동유럽에서 중요한 파트너이자 EU와 나토의 핵심 동맹국으로 인식하지만, 최근의 정치적 변동 때문에 우려가 생기기도 했다.
2. 상세
유럽에서 가장 거대한 인구 집단 중 하나인 독일인과 서 슬라브인의 국가인 만큼 역사적으로 얽혀온 세월이 길다. 특히나 독일인은 중근세에 동방식민운동으로 지속적으로 슬라브인의 영역으로 침투해왔기 때문에[1] 동유럽 전역에서 독일인-슬라브인의 혼재 현상이 나타났다. 그런 이유로 독일계 왕국의 폴란드인 신민, 폴란드계 왕국의 독일인 신민 등 다양한 관계가 나타났다. 쾨니히스베르크를 주축으로 한 동프로이센도 역사의 첫 시작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신하였을 정도이다. 다만 오랫동안 얽혔던 것치고는 역사적으로 그렇게 유혈 분쟁으로만 가득했던 것은 아니다.[2] 근대사에 겪은 폴란드의 치욕이 너무나 강렬해서 그렇지, 양국간에 그 정도로 격렬한 대립관계가 시작된건 길게 봐줘도 200년을 넘지 않는다.한편 근대 민족주의의 기반이 될 만한 중세 왕국인 신성 로마 제국이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등은 프랑스와는 달리 근세 시기에 붕괴해버렸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 민족주의의 양상은 매우 복잡하게 나타났고, 양국의 근대사에 걸친 악연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3] 신성 로마 제국이 유명무실화된 후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독일계 국가는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이었고, 이 일대의 오랜 지배국으로서의 영향력으로 주도권을 확보했다. 그리고 급기야 독일 통일에서 보듯 민족국가를 한발 앞서 이룩한 프로이센 왕국의 침탈로 이어졌다.[4] 여전히 중세적 질서에 머물러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8세기에 이웃 세 왕국(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3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로 소멸하였다. 삼국의 폴란드 지배는 100년도 더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종결되었고, 근대를 피지배국으로 지낸 폴란드는 20년 만에 독소 불가침조약 후 독소 양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다시 멸망했고 전후에야 다시 독립할 수 있었다.[5] 이처럼 폴란드 입장에서는 1번 당하기도 어려운 국가 멸망을 독일(과 러시아)[6]에게 2번이나 당했으니 감정이 좋을 리가 없다. 동서 분단 시기에는 소련의 영향권 하에서 좋든 싫든 서독을 적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여전히 반감은 극심했고, 1970년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바르샤바에 찾아가 무릎을 꿇은 사건이 폴란드의 대독 감정을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그나마 20세기 후반에 소련 붕괴와 함께 폴란드가 유럽연합에 들어오고서부터는 같은 경제 공동체가 되면서 과거에 비해서는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오죽하면 독일의 병력 증강을 폴란드 쪽에서 촉구할 지경이다.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은 다른 국가들도 숄츠 내각의 국방비 증액 결정을 환영하는 것에서 보아 독일은 나치 시대의 팽창 야욕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상실한 옛 영토들에 대한 재합병 야욕을 완전히 버려 신뢰를 회복했음을 제2차 세계대전 시기 나치 독일에게 피해를 입었던 유럽 국가들에게도 인정받은 셈이다. 또 거기에 러시아가 공산권 붕괴 이후에도 냉전 시절의 팽창주의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이들의 입장에서는 현재로서는 독일보다 러시아를 더 위협적인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서유럽의 강국인 독일과 전형적인 동유럽의 역사를 밟아온 폴란드 사이의 정치적, 사회적 스탠스의 차이는 여전히 막대하다. 폴란드는 전통적 보수주의 + 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한 반면,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 + 친유럽주의 + 안티내셔널리즘 성향이 강하다.[7] 그리고 외교적인 부분에서도 러시아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친미와 친영을 중시하고 EU, 러시아와는 거리를 두려는 폴란드와[8] EU의 주도 국가로서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 공동체의 단결을 중시하는 독일 사이의 입장 차이가 상당히 크다. 20세기 후반에 독일이 군축을 과도하게 진행해 폴란드로부터 비난을 샀던 것도 이러한 맥락으로 생각할 수 있다. 난민 문제와 폴란드인 이주민 노동자, 유럽연합 보조금 문제 때문에 EU 지도국 독일과 EU의 이단아[9] 폴란드 간 충돌이 많다. 독일은 제4제국 소리를 들을 정도로 유럽 경제의 핵심을 이루는 경제 대국이고, 최근에 발전했다곤 해도 아직 독일 급은 되지 못하는 폴란드로서는 독일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면서도 여러모로 차이점은 많은 나라라서 폴란드 입장에서 독일에 대한 관심은 (좋든 나쁘든) 매우 지대하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앙금이 완전히 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독일이 폴란드에 대해 제대로 된 전쟁 배상을 실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폴란드와 이미 전쟁 배상은 끝난 얘기라는 독일 사이에 갈등이 존재한다.
독일에 대한 폴란드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실로 구글에서 각 국가별로 자주 검색되는 국가를 살펴보면 2004~2022년 동안 폴란드는 항상 독일이 1순위이다.[10] 반면 독일은 여타 서유럽 국가처럼 대체로 미국이 1순위이다. 폴란드의 독일에 대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높은 관심을 알 수 있다. #
3. 분야별 교류 현황
3.1. 문화 교류
폴란드에서는 반대로 폴란드 영화가 독일 영화 시장으로 대거 수출되고 있다. 폴란드 영화들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기도 했다. 그리고 독일 영화가 폴란드에 많이 상영되는 등 양국간 문화교류가 활발하다. 독일어는 폴란드에서 영어 다음으로 주요 외국어로 지정되어 있다. 독일어의 경우에는 폴란드의 일부 지역에서 지역공식어로도 지정됐다. 독일어 시험은 폴란드에서 실시되고 있고 폴란드어 시험은 베를린에서 실시되고 있다.3.2. 경제 교류
양국간의 경제교류가 활발하다. 양국은 유럽연합에 속해 있기 때문에 독일 기업들이 폴란드에 많이 진출했다.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독일과 프랑스 정부가 바르샤바 지하철 건설에 대해 재정 및 기술 지원을 하였다. 이것이 바로 독일- 폴란드 간 경제 협력의 시작이었다. 근래 독일 기업들이 인건비가 저렴한 폴란드에 많은 공장을 세우고 있다. BMW, 포르쉐 등 자동차 기업과, 독일 머크 등의 생산 공장이 폴란드 포즈난 및 그단스크, 루블린 등에 위치해 있다. 폴란드인들 중에는 독일로 일하러 가는 폴란드인들이 많이 있다.2006년 10월 30일, 메르켈 총리는 카친스키 대통령과 회담한 뒤, 러시아가 폴란드에 공급하는 가스를 끊을 시 독일이 폴란드에 에너지를 공급한다고 밝혔다. #
3.3. 교통 교류
양국을 잇는 항공노선, 도로, 철도 등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오데르)같은 국경도시에는 국경을 넘나드는 시내버스가 있다. 양국은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어서 노동자를 포함한 이동의 자유를 보장하며 왕래도 활발한 편이다.양국은 솅겐 협정에 가입되어 있어 역내 이동을 국내선에 준해 처리한다. 바르샤바와 베를린을 연결하는 고속 철도가 운영되고 있는데 열차의 이동 소요 시간은 5시간 정도로, 가격도 저렴하여 저가 항공 대신에 많이 이용되는 편이다.
3.4. 갈등
최근 몇 년간, 독일과 폴란드는 다양한 이슈로 인해 갈등을 겪었다. 독일의 환경 정책,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 문제와 관련하여 폴란드 석탄 산업과 마찰이 있었다. 또한, 독일의 이민 정책은 폴란드와 의견 차이를 낳았으며, EU 내에서 폴란드의 법치 문제와 관련된 갈등 역시 독일과 폴란드 관계에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 국민들은 여전히 대체로 서로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경제적 교류는 이를 더욱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4. 역사
4.1. 960년~1225년 신성 로마 제국 - 폴란드 영지 / 폴란드 왕국
독일 전반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의 관계는 꽤 양호한 편이었다. 960년 독일 동부에 폴란드라는 나라가 등장하면서 당시 신성 로마 제국과 바로 마찰을 빚었다. 결국 965년 신성 로마 제국이 폴란드 영지의 독립을 인정하고 966년 폴란드도 가톨릭 국가가 되면서 분쟁은 마무리되었다.중세 기간 동안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는 몇 차례 분쟁을 겪기는 했으나 뚜렷한 갈등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12세기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폴란드 침공 이후 두 나라가 분쟁을 벌인 사례는 없었다. 두 나라 모두 중앙집권이 덜 되어 서로보다는 내부의 적이 더 위협적인 상대였기도 하고, 신성 로마 제국은 서유럽의, 폴란드는 동유럽의 적들이 더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근세에도 두 나라 간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한 편이어서, 30년 전쟁, 대홍수, 대튀르크 전쟁 등에서 두 나라는 서로 동맹을 맺고 공통의 적에 대항해서 싸웠다. 그러면서도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간 무역 문제는 서로 계속 충돌을 일으켰다. 폴란드는 농산물을 수출하고 독일의 공업품을 수입했는데, 폴란드는 슐라흐타(귀족)들의 반발로 독일산 공산품에 관세를 매기지 못한 반면, 독일은 폴란드산 농산물에 관세를 매겼다. 덕분에 폴란드는 계속해서 독일한테 무역적자를 봤고 독일-폴란드 간 무역분쟁이 잦았다.
4.2. 1226년~1795년 독일 기사단국/ 프로이센 왕국 - 폴란드-리투아니아
반면 현대 독일의 정신적 기원이라 할 수 있는[11] 프로이센 왕국은 역사적으로 내내 폴란드와 마찰을 빚었다. 역사적인 두 나라 간의 악감정은 주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1236년 세워진 독일 기사단국은 15세기 이후 급격하게 쇠퇴했는데 과도하게 영토를 확장하다 보니 주변 국가들의 어그로를 단단히 끈 게 컸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요가일라 대공이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며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로 즉위하였고, 사촌인 리투아니아 대공 비타우타스와 연합하자 기사단은 폴란드와의 전쟁을 결의했고, 결국 1410년 벌어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국은 폴란드에 대패를 당해 폴란드에게 많은 영토를 할양하게 되었고 이후에도 계속 마찰을 빚다 1454년에 치러진 13년 전쟁으로 1466년 완전히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이 되었다. 그 후 1525년 기사단장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알브레히트가 루터교회로의 개종을 선언하며 프로이센 공국을 출범시켰고 외숙부인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승인을 받았다. 1618년 알브레히트 공작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같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친척이었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국을 물려받아 동군연합으로 통치했다. 대홍수를 기회로 삼아, 1657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벨라우-브롬베르크 조약으로 폴란드 왕국과의 봉신관계를 청산했다.
뒤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선제후의 아들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바탕으로 프로이센 왕국을 출범시켜 본인은 프로이센 초대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대관식을 치렀고,[12] 명 군들의 출현으로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자가 되었다. 반면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왕권이 매우 약했고, 권력은 귀족인 슐라흐타들에게 집중되었다. 국왕은 입법부인 세임과 극한 대립에 이르게 되었고 결국 혼란 끝에 연방은 유럽의 약소국으로 추락했다.
4.3. 1772년~1795년 폴란드 분할
18세기 들어 폴란드-리투아니아 내부 정세가 혼란해지자 프로이센 왕국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찢어먹었다. 폴란드는 가장 큰 위협이었던 러시아에 대항해 프로이센과의 동맹을 추구했으나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로 폴란드의 땅 1/3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3국이 따먹었고, 1791년 폴란드가 헌법 제정으로 나라를 안정시키려 하자, 1795년 제3차 폴란드 분할로 독일은 폴란드를 완전히 멸망시켰다.4.4. 1795년~1918년 폴란드 분할 ~ 제1차 세계 대전
프로이센 왕국은 서프로이센[13]에 남프로이센과 신동프로이센이라는 주를 신설하여 폴란드 점령지를 배분했고, 대대적인 민족 말살정책을 통한 동화를 추구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폴란드 국권의 상징이었던 볼레스와프의 왕관(korona Chrobrego)과 폴란드의 대관보기를 크라쿠프에서 탈취해와 모두 녹여 없애버리고 남은 금으로 동전을 주조해 나폴레옹 전쟁으로 박살난 재정을 복구하는데 써버렸다. 이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저항은 거셌다. 폴란드인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 제1제국을 도왔고 바르샤바 공국이 세워졌다. 그러나 러시아 원정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파멸했고 결국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빈 회의에서 폴란드 대부분은 러시아 제국에, 포젠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에 소폴란드와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배속되었다.1848년 혁명 당시 포즈난 공국을 중심으로 1848년 대폴란드 봉기가 발발하였으나 프로이센군에 의해 진압당하였다. 이후 프로이센 왕국을 포젠 대공국이 공식적으로 해체하여 프로이센의 일개 주로 편입시켰다.
4.5. 1918년~1933년 바이마르 공화국 - 폴란드 제2공화국
자세한 내용은 바이마르 공화국-폴란드 제2공화국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1918년, 1795년 이후 123년만에 폴란드 제2공화국이 독일에서 떨어져나가 독립했다. 그러나 독일은 폴란드를 외국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계속해서 단치히 자유시, 상부 슐레지엔, 폴란드 회랑을 내놓으라며 떼를 썼다. 폴란드 입장에서 베르사유 조약에 "바다로의 출구"가 적힌 상황에 독일의 이런 요구는 결코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자 1925년, 독일은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을 일으키며, 독일, 폴란드 경제를 자해하면서까지 영토를 내놓으라는 요구를 계속했다. 무역 전쟁 와중에 세계 대공황이 터지자 독일과 폴란드는 계속해서 디플레이션 상황이 악화됐다.
4.6. 1933년~1945년 나치 독일 ~ 제2차 세계 대전
자세한 내용은 나치 독일-폴란드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이 독일에 집권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과 달리 폴란드에 유화적인 행보를 보였다. 1934년 폴란드의 실권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협상을 하여 서로간의 불가침조약과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성사시킨 것이다. 폴란드 제2공화국은 소련과 독일 양 강대국 사이에 끼인 입장이었으므로, 히틀러가 무역분쟁을 끝내자고 할 때 환영했다. 심지어 1938년 체코슬로바키아를 삥뜯는 뮌헨 협정을 할 때 폴란드 제2공화국에 하부 실롱스크의 테신 지방을 가져가라고까지 하는 히틀러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단지 침략 야욕을 일시 연기하기 위해 폴란드에 잠시 유화책을 썼을 뿐이었다. 다음해인 1939년, 히틀러는 숨겨왔던 본색을 드러내며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롱스크를 내놓으라고 협박을 시작하자 폴란드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꼴이 되었고, 결사 반대했다. 그러나 1939년 8월 25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독일과 소련은 1939년 9월 1일,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 폴란드 침공을 통해 폴란드 제2공화국을 멸망시켰다.
독일은 구 프로이센 지역의 폴란드 영토는 나치 독일 직할령으로 편입했고, 그 이외 지역은 총독부라는 이상한[14] 이름의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인 유태인 홀로코스트의 중심지로 삼았다. 아우슈비츠, 트레블링카, 베우제츠, 소비보르, 헤움노, 마이다네크 등등 대대적인 인종청소 기지를 세우고 유태인을 시작으로 폴란드인, 러시아 포로 등에 대한 대대적인 학살을 시행한다.
폴란드 망명 정부와 망명 유태인들이 주도한 1943년 4월의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1944년 8월의 바르샤바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한 히틀러는 더욱 폴란드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그러나 1944년 12월, 독소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소련의 스탈린이 폴란드에 진주하여 폴란드를 소련 지배하로 접수한다.
4.7. 1949년~1990년 냉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독소전쟁을 이끌었던 소련 이오시프 스탈린의 요구로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영토와 단치히, 동프로이센은 소련의 위성국인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들어갔고, 반대로 폴란드의 빌노, 핀스크 등 커즌 선 동쪽과 르부프, 갈리치아 일대는 죄다 소련이 삥을 뜯었다(...).4.7.1. 서독 - 폴란드 인민 공화국
전후 서독은 콘라트 아데나워를 위시로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서독과 폴란드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그러나 1970년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방정책을 펼치면서 관계가 크게 개선되었다. 빌리 브란트는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맺고 동독-폴란드 국경을 인정했다. 물론 이 조약으로 빌리 브란트는 매국노란 소리를 정적으로부터 들어야 했지만..4.7.2. 동독 - 폴란드 인민 공화국
당연히 동독 역시 처음엔 오데르-나이세 선까지 폴란드가 가져가는 것에 반대했으나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동독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은 반 강제적인 협력관계를 맺게 된다. 1950년 7월 6일 폴란드와 동독은 국경 협정을 맺었다. 유제프 치란키에비츠 폴란드 총리와 오토 그로테볼 동독 총리가 서명한 협정의 정식 명칭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현존하는 국경을 확정하는 협정’. 줄여서 ‘평화와 우정의 국경협정’이라고 불렸다. 물론 이름과 달리 이 협정은 우정과 신뢰로 맺어지지 않았다. 동독은 소련의 압력에 굴복한 것이기 때문이다. 폴란드도 내키지는 않았다. 그러나 강철의 대원수가 까라면 까야지 별수 있겠는가..동독 입장에서야 오데르-나이세 선을 인정하고 싶었을 리 없고, 폴란드 입장에서는 더 복잡한 문제가 끼어 있다. 폴란드 입장에서 평화-우정의 협정에서, 소련이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노를 뜯어간 건 그렇다 쳐도 르부프와 갈리치아는 빼도박도 못하는 폴란드 땅인데 이걸 소련이 강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적 이유도 있었는데, 폴란드 입장에서 갈리치아 일대는 가난한 지역이긴 했지만, 폴란드 농업의 60%를 차지하는 비옥한 땅이었다. 독일 땅을 얻은 대신 갈리치아를 소련에 빼앗기자 폴란드는 식량 부족국가가 되어서 만성적인 식량난과 물가 상승을 겪게 된다. 1956년 포즈난 항쟁, 1970년 봉기, 1981년 폴란드 연대노조 등 결국 공산 정권 붕괴 원인이 되기도.
4.7.3. 서독 - 폴란드 망명 정부
폴란드 망명 정부는 서독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폴란드 망명 정부는 독일연방공화국이라는 체제가 들어서는 것 자체가 나중에 나치 독일의 재림이 될 수 있다고 연합국들에 계속해서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당시도 아니고, 전후 연합국들은 아무도 폴란드 망명정부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15] 결국 1960년대가 되어서야 서독의 존재를 인정했다.4.7.4. 동독 - 폴란드 망명 정부
동독 입장에서는 폴란드 = 폴란드 인민 공화국인지라 폴란드 망명 정부는 인정도 안 했고, 당연히 접촉도 없었다.4.8. 1990년~현재 동서독 통일 - 폴란드 제3공화국
1000년 넘게 피를 피로 씻는 독일과 폴란드의 관계는 동서독 통일과 폴란드 제3공화국 수립 이후 거의 사상 처음 맞는 평화기를 보내고 있다.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 독일 정부는 폴란드와 다시 국경에 대한 협약을 맺기로 했다. 독일은 과거 동부 독일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서독 기본법 23조를 폐지하고, 오데르-나이세 선을 폴란드-독일 국경으로 확정했다. 이 조약은 1991년 6월 체결된 우정 조약과 함께 1992년 1월 16일 발효됐다. 우정 조약에서는 국경 양쪽에 살고 있는 독일 및 폴란드계 소수의 문화적 및 정치적 권한 등을 보장했다. 대표적인 유명인이 바로 독일의 축구선수 미로슬라프 클로제인데, 아버지가 독일계 폴란드인인데 독일인으로 정착한 케이스다.
폴란드는 현재 1999년 북대서양 조약 기구, 2004년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등 친서방 정책을 고수하면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친미 국가다. 미국 입장에서는 폴란드가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최전선이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러시아 견제라는 동일한 목표를 가진 독일과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인 편이다. 폴란드 뿐 아니라 냉전 이후 대부분의 동구권 국가들이 북대서양 조약 기구와 유럽 연합에 동시에 가입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우방국은 유럽에서 사실상 벨라루스를 빼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물론 양국간의 역사가 역사인지라 다소 정치적인 목적으로 폴란드가 함께 침략받았던 그리스와 목소리를 높여 독일 정부가 나치 점령 피해에 대해 보상하라고 유럽의회에서 주장하기도 했지만 독일정부는 이미 “배상은 법적으로, 정치적으로 완전히 마무리됐다”며 선을 긋고 있다.[16]
독일의 하이코 마스 외무장관은 2019년 8월 1일에 바르샤바 봉기 75주년 기념식에 참석해서 폴란드에 또다시 사죄를 했다. #
안제이 두다 폴란드 대통령을 소아성애자처럼 보도한 독일 타블로이드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
2022년 9월 1일, 폴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야기한 피해가 1조 3,000억 유로(1천752조원)에 달한다며 피해배상을 요구했다. 독일은 이미 배상 문제가 끝났으며 황당하다는 반응이다. #
2022년 12월 12일,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면한 폴란드 동부 국경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기로 했다. #
2023년 1월 9일, 프랑스와 폴란드 양국이 독일의 레오파르트 전차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라고 압박하기 시작했다. #
2024년 1월 15일 독일군이 2차 대전 후 처음으로 폴란드에 주둔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놀라운 것은 도날트 투스크 총리가 갓 취임한 폴란드 정부가 "러시아 막는 데 있어서 과거의 역사는 일단 접어두겠다"는 취지로 거기에 "찬성"을 표했다는 것. #[17] 우크라이나 전쟁이 유럽의 정세를 얼마나 뒤바꿔놨는지 알 수 있는 증거인 셈.
2024년 3월 14일, 독일, 프랑스, 폴란드 3국 정상이 회담을 열면서 '바이마스 삼각동맹'을 만들기로 합의했다. # 그리고 3국 정상이 우크라이나 무기 공급을 하기로 한목소리로 모았다. #
5. 대사관
바르샤바에 주 폴란드 독일 대사관, 베를린에 주 독일 폴란드 대사관이 존재한다.6. 관련 기사
- 바이마르 삼각동맹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 세계일보
7. 관련 문서
- 독일/외교 / 독일-다른 유럽 국가 관계
- 폴란드/외교
- 유럽 연합 / 발트해 국가 이사회
- 독일/역사
- 폴란드/역사
- 상임이사국[18]
- 독일/문화
- 폴란드/문화
- 독일/경제
- 폴란드/경제
- 독일계 폴란드인 / 폴란드계 독일인
- 독일인 / 폴란드인
- 독일어 / 폴란드어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중부유럽 국가
- 한일관계
[1]
그러나
나치 독일이
레벤스라움 운운하다가 대패한 영향으로 1945년 이후에는 모조리 현 독일 영역으로 추방되었다.
[2]
이는 앞서 언급했듯 두 민족이 오랫동안 섞여 지내온 영향이다. 수십 년도 아니고 몇백 년을 섞여 살았으니 기준이 불분명했고, 독일어를 쓰면서 독일인처럼 지내는 슬라브인(이 문서의 경우 폴란드인)들도 매우 많았다. 흔히 독일-폴란드 관계를
한일관계로 비유하는 것이 여러 오류를 낳는 것이 이 때문으로, 한국인과 일본인은 가히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경계가 명확했기에 사정이 매우 다르다.
[3]
그나마 신성 로마 제국의 존재는 독일 민족의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주도권을 지녔지만 같은 서슬라브 계열인
체코인은
중세 시절을 제외하면 오랜 기간 독일계 왕국의 피지배 민족으로 있어왔다. 가령
신성 로마 제국과의 관계 역시 폴란드는 근대에 와서야 폴란드 분할을 겪었지만 체코는 14세기
보헤미아 왕국 시절부터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되어 있었다. 남슬라브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까지 겹치면서 민족주의의 형성이 더욱 어려웠고, 결국
유고슬라비아는 실패한 민족국가로 끝났다.
[4]
<강철왕국 프로이센>에서는 이 시기의 변화를 "
호엔촐레른 왕조에 충성하는 프로이센의 신하 폴란드인은 가능했지만,
독일 제국의
국민
폴란드인이라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식으로 표현했다. 독일인은 프로이센이라는 지배국으로서 민족국가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지만, 폴란드인은 시작점부터 피지배 상태일 수밖에 없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5]
그나마 두 나라가 마지막으로 맞붙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폴란드가 속한
연합군 진영이 승리했기 때문에 독일은 힌터포메른과 슐레지엔, 동프로이센 남부 등을 비롯한 많은 구 프로이센 지역들의 영유권을 폴란드에 할양했고 지금 폴란드 영토의 서부 지방의 상당부분과 동북부 지역의 절반은 이 때 독일에서 떼어온 것이다. 폴란드로서는 복수인 셈이긴 한데, 사실 이는
러시아의 판단에 입각한 것으로 폴란드가 주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폴란드인이 거주했던 지역 중 러시아가 원했던 지역은 독일에게서 얻은 영토만큼이나 빼앗겼다.
[6]
분할 당사국까지 치면 오스트리아도 1번 폴란드를 뜯어먹은 셈이다. 다만 폴란드 분할 문서에서 보듯 그나마 오스트리아가 지배했던 지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통치를 받았다고 한다.
[7]
의외로 종교적인 보수성은 생각보다 차이가 미묘한 편인데, 중부유럽의
독어권 국가들은 폴란드보다 세속적일 뿐 서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그리스도교의 교세 방어가 성공적이기 때문이다. 즉
영국,
프랑스 등 서유럽의 세속적인 분위기와
폴란드의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 사이의 중간 어딘가에 중부유럽
독어권의 종교 성향이 있다고 보면 된다. 한 예로, 청년층(16~29세)의
종교 통계에서 독일은 거의 포르투갈과 동급으로 종교적인 편이다.
[8]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야 EU도
반러일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러시아가 전쟁이라는 대형 사건을 터뜨리기 전까지는 러시아와 바로 마주한 EU로서는 러시아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전쟁이 지속되고 있는 2020년대 중반에도
미국,
영국에 비해 EU의 대러시아 발언은 수위가 좀 더 낮은 편이다. 그런 태도가 반러의 최전선인 폴란드로서는 미덥지 못할 수밖에 없다.
[9]
사실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다른 동유럽 EU 회원국도 폴란드와 입장이 크게 다르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의 발언권은 폴란드에 비하면 매우 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나마 폴란드는 EU의 전반적인 방향성에 찬동하면서 다른 의견을 내니까 눈에 띄는 것이고, 헝가리는 아예
친러로 어깃장을 놓고 있어서 EU 내에서 더욱 논란을 크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10]
국제적 사건이 발생하면 폴란드 역시 1순위가 바뀐다. 2008년 8월
남오세티야 전쟁 당시에는 폴란드도 미국이 1위였다. 2022년 이후로는 물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가 1위이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유럽 각국이
일본을 검색한 반면 폴란드는 여전히 독일로 뜨는 것이 눈에 띈다.
[11]
프로이센 왕국의 본체는 프로이센이 아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었고
호엔촐레른 가문과 프로이센 왕국의 주요 귀족들, 당대 독일인들 역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을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으로 보았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고향이었던 현재
작센안할트의 북쪽 지역인 옛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불렀다.
독일 기사단국과
프로이센 공국이 프로이센 왕국의 기원이라 생각했던 것은
영미권과
소련 사학계가
독일사를 피상적으로 연구한 결과였다.
[12]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중심이었지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이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국가로서 왕을 칭할 수 없는 문제로 제국 외부의 국가였던 프로이센의 이름을 따 왕국을 칭했다.
[13]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도 서프로이센 주는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결과 서프로이센 주의 땅 거의 전부가 폴란드에 귀속되었다. 게다가 동서독 분단으로 서프로이센주의 관할구역이 전멸했다. 서독에서는 서프로이센 주를 명목상 유지했으나,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에 따라 서프로이센 주를 폐지하고, 동서독 통일 때 잔여 지구를 브란덴부르크 주에 통합해서 완전히 없앴다.
[14]
브라이언 포터-슈치, 폴란드 근현대사, 오래된생각. 2017.
[15]
당장 소련의 위협이 점점 커지고, 미국이
나토 결성하려는 판국에 폴란드도 아니고 폴란드 망명 정부의 말이 먹힐 리가 없었다.
[16]
서독은 1960년 그리스에 1억1500만마르크(지금 가치로 약 3000억원)를 지급했다. 독일은 또 소련의 요구로 오데르-나이세선 동부 영토를 폴란드에 넘긴 뒤 1953년 폴란드가 동독에 대해 배상권을 포기했다는 것, 그리고 통일 뒤 폴란드 강제노역 피해자들 및 폴란드 전쟁고아들에게는 일부 배상을 했다는 점을 내세운다.
[17]
참고로 바로 전임 당인
법과 정의의
야로슬라프 카친스키 대표는 총선 유세에서 "독일군이 폴란드 땅을 밟기까지는 7대가 걸릴 것"이라며 독일에 대한 노골적인 증오를 표출했다.
[18]
독일의 상임이사국 진출에 대해 폴란드는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