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오스트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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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스트리아의 성립
오스트리아의 지형도 |
오스트리아 지역은 과거에는 켈트족이 살던 땅으로 켈트족이 세운 노리쿰 왕국이 있었다. 노리쿰 왕국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고대 로마에게 점령되었으며 그 자리에 노리쿰 속주가 세워졌다. 로마의 지배를 받으면서 게르만 바바리족(Bavarii)이 오스트리아에 정착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었다. 게르만족의 이동과 훈족의 등장으로 로마는 오스트리아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고 이후 동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이 차례대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다. 이어서 아바르 칸국이 오스트리아 지역의 패권을 잡았으며 이 시기를 전후로 슬라브족이 유입되었다. 슬라브족은 아바르 칸국에 저항하여 사모 왕국을 세우기도 했으나 국가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오스트리아로서의 이 지역의 역사는 796년 카롤루스 대제가 판노니아 지역의 아바르족을 복속하고 해당 지역을 바이에른 동부 지방이라는 이름으로 편입시키며 시작되었다.[1] 799년에 아바르족이 봉기를 일으키며 해당 지역의 총독들이 전사하는 등 굉장히 불안정한 시기가 되었는데, 803년 마침내 이를 완전히 진압한 카롤루스 대제는 더욱 효율적인 통치와 외침의 방어를 위해 805년에 바이에른 지역에서 이 지역을 분리하여 새로운 변경주를 설치하였다.[2] 당초 아바르 변경주라고 불리던 이 지역은 왕국의 동쪽 끝에 있다는 이유로 점차 오스틀란트, 오스트마르크, 오스타리히 등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의 시초가 된 것.[3] 이 변경주의 행정적인 중심지는 원래 로마 시대에 군사 요새이기도 했던 오버외스터라이히 주의 엔스에[4] 설치되었으며,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의 틀른안데어도나우에는 국경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 거점이 설치되었다. 828년에는 당시 바이에른 공작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이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대 모라비아 왕국과 불가리아 제1제국의 대대적인 침공을 막아내기도 하였다. 이후 동프랑크 왕국의 왕이 된 루트비히 2세는 자기 후계자인 아들 카를로만에게 군사적, 행정적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 이 지역을 바이에른 공국 산하로 완전히 편입시키면서 이 지역은 다시 바이에른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907년에 동프랑크 왕국이 프레스부르크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바이에른 공국은 헝가리 대공국에게 이 지역을 통째로 빼앗겨 버린다. 하지만 955년에 오토 1세가 레히펠트 전투를 통해 이 지역을 재수복하게 되면서, 다시금 독일 왕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된 동방 변경 지역은 늦어도 970년에서 972년 사이에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서 성립하게 되었다. 이후에는 부족 사회를 완전히 통합하고 세력을 확장한 헝가리 왕국을 상대하는 역할을 해왔다.
2. 바벤베르크 가문의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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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2년 독일 왕국의 오토 1세가 교황의 대관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 이때 바이에른의 공작 하인리히 2세는 황제와 대립하는 세력이었다. 마침내 하인리히 2세를 굴복시킨 오토 2세 황제는 976년 바이에른 공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바이에른 공국의 남쪽과 동쪽을 각각 케른텐 공국,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으로 분리시켰다. 이 두 개의 국가는 현재의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지역이었다.
이 중 빈(Wien)을 둘러싸고 있는 ' 오스트리아 변경백국'(Markgrafschaft Österreich)에서 오스트리아라는 명칭이 나왔다. 당시 이 지역은 과거 고지대 독일어로 Ostarrîchi라고 불렸으며 여기서 현재 독일어로 오스트리아를 지칭하는 Österreich가 유래했다.[5] 현재 오스트리아의 국기인 적백적 문양은 합스부르크 시대 이전에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던 바벤베르크 가문의 문장에서 비롯된 것이다.[6]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이 만들어졌을 때 황제 오토 2세는 바벤베르크 가문(Die Babenberger)의 레오폴트 1세를 오스트리아 변경백으로 임명했고 오스트리아를 통치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레오폴트 4세와 하인리히 2세의 시대인 1139년부터 1177년까지 바이에른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기도 했다.
1156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Privilegium Minus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시켰다. 그동안 바이에른 공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오스트리아는 바이에른과 동등한 공국이 되면서 바이에른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난다.
1180년 신성 로마 제국은 케른텐 공국의 동쪽 지역을 분리하여 슈타이어마르크 공국[7]을 형성했다. 1192년 바벤베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가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의 공작을 겸임하면서 슈타이어마르크 공국과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통합되었다.
1243년 프리드리히 2세가 헝가리 왕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하면서 바벤베르크 가문은 대를 이어가지 못하고 끝을 맺게 되고 오스트리아 공국은 공작 직위가 비게 된다.
3.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작
오스트리아가 공위시대(Interregnum, 1243 ~ 1278)를 맞은 시기는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1254 ~ 1273)와 시기가 겹치는데, 신성 로마 제국의 혼란과 함께 오스트리아도 혼란에 빠졌다. 이때 여러 유력 가문들이 오스트리아의 지배권을 획득하려고 시도했는데 바덴(1248~1251)의 체링겐 가문에 이어 중부 유럽의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프르셰미슬 왕조 보헤미아 왕국의 오타카르 2세가 오스트리아를 장악했다.(1251 ~ 1278)한편 신성 로마 제국의 대공위시대는 1273년 스위스 일대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백작 루돌프 4세가 독일왕 루돌프 1세로 선출되면서 종결되었다. 도나우강 유역으로 확장을 원했던 루돌프 1세는 1278년 마르히펠트 전투에서 오타카르 2세를 전사시키고 그가 차지했던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회수하여 맏아들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오스트리아를 차지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91년 스위스가 반란을 일으켜 결국 1315년 떨어져 나가게 되고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를 가문의 본토로 여기게 되었다.
1335년 케른텐 공국과 카르니올라 변경백국[8]이 합스부르크 가문에 병합되었다.
1356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4세가 금인칙서를 공포하며 그동안 관례적으로 이어오던 선제후를 7명으로 명문화하여 고정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7인의 선제후에 포함되지 못했다. 그러자 오스트리아의 공작 루돌프 4세는 장인인 황제 카를 4세에게 불만을 품고 1156년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 황제가 오스트리아를 변경백국에서 공국으로 승격시킬 때 내린 문서(Privilegium Minus)를 위조하여 Privilegium Mainus를 작성한 후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의 오스트리아의 특권적인 지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카를 4세는 이것을 위조로 판정하여 루돌프 4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1140년 바이에른 공국에서 독립했던 티롤 후백국이 상속 문제로 혼란을 겪자 루돌프 4세는 1363년 티롤 후백국의 백작 부인 마르가레테에게 접촉하여 티롤 후백국에 대한 상속권을 얻어냈다. 1364년 루돌프 4세는 카르니올라 변경백국을 카르니올라 공국으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1369년 마침내 티롤 후백국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에 병합되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는 잘츠부르크 주를 제외한 현재 오스트리아를 구성하는 모든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잘츠부르크는 교회에 소속된 영지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4.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성립과 합스부르크 제국
1789년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 |
1438년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인 알브레히트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왕에 오르고 이어서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대관을 받아 정식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마침내 다시 신성 로마 제국 제위에 오르게 된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된다.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황제에 오른 프리드리히 3세는 100년전 선조 루돌프 4세가 위조한 Privilegium Mainus을 승인했다. 이것에 따라 오스트리아 공국은 1453년 오스트리아 대공국(Erzherzogtum Österreich)으로 승격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인구는 2,000,000명 정도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기반이 되기 충분한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대공국이 되어 선제후국을 포함한 다른 공국들과는 격이 다른 특권적인 위상을 부여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고 이미 인구 수만 명을 보유했던 빈도 인구 이 시기에 위상이 엄청나게 상승하게 된다.
막시밀리안 1세 황제 시절 합스부르크 가문은 과감한 결혼 정책 덕분에 유럽 각지에서 엄청난 영토를 상속받아 일거에 유럽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공이 스위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한 후 부르고뉴 공국은 그의 유일한 자녀인 딸 마리 드 부르고뉴에게 상속되었다. 마리는 프랑스 왕국의 압박으로부터 부르고뉴 공국을 지키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막시밀리안과 결혼하였다. 그녀의 영지인 부르고뉴 공국 본토와 저지대 지방을 아들 필리프가 물려받으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왔다.
막시밀리안 1세와 마리 드 부르고뉴의 아들 필리프는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가톨릭 공동왕( 이사벨 1세 여왕과 페르난도 2세 국왕)의 계승자 후아나 왕녀와 결혼시켰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왕조는 스페인을 획득했다. 필리프의 맏아들 카를은 할아버지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과 함께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고 합스부르크 영지를 모두 지배하면서 카를 5세(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에서 오스트리아에 이르는 제국의 수장으로 등극하였다.
자신과 아들의 결혼을 통해 막대한 영토를 획득했던 막시밀리안 1세는 노년에 손자이자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를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안나 공주와 결혼시켰다. 그런데 1526년 야기에우워 왕조의 러요시 2세[9]가 모하치 전투에서 후사없이 전사하면서 이미 1521년에 형 카를 5세로부터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물려받았던 페르디난트 1세는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페르디난트 1세가 획득한 영토는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엄청나게 증가시켰다.[10] 역사적으로 합스부르크 제국이라 부르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토는 중부 유럽에서 광활한 크기를 자랑했다.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엄청난 영토를 확보해 나간 오스트리아는 수천만명에 달하는 인구를 보유했다. 이들 동유럽 영토들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고 해체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결혼 정책과 상속을 통해 이어받은 영토로 성립된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군연합 상태로 여러 지역이 한 군주에 의해서 통치되는 것일 뿐, 내부적으로는 통합되어 있지 않았다. 다른 국가와 달리 합스부르크 제국이 강력한 통일 세력을 이루지 못하고 느슨한 연합 체제로 이어진 것은 독일인( 오스트리아인)이 제국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작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스페인, 부르고뉴, 저지대 국가는 곧 오스트리아와는 무관한 영토가 되었는데, 부르고뉴 공국의 본토는 카를 5세가 프랑스에게 넘겨 주었고, 스페인, 네덜란드는 카를 5세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상속시켜 스페인 합스부르크로 분가했다.
이후 16세기와 17세기의 종교 개혁, 30년 전쟁, 제2차 빈 공방전과 대 튀르크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친 오스트리아는 4국 동맹 전쟁(1718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1735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1737년) 등을 수행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특히 대 튀르크 전쟁에서 맹활약한 사부아 공자 외젠의 활약에 힘입어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16세기에 쉴레이만 1세에게 빼앗긴 오스만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수복하여 헝가리 왕국의 영토를 회복하였고 인구 수천만명을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였던 빈도 이 시기부터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해서 1683년에는 110,000명, 1804년에는 230,000명이 될 정도였다.
그러던 중 카를 6세가 1740년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계승자로 선언하고 사망하자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서로 계승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기회를 노린 프로이센 왕국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침공을 개시하여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고 슐레지엔을 상실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복수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자 프리드리히 2세는 선제 공격을 감행하여 1756년에 7년 전쟁을 일으켰다. 이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수백년간의 적대 감정을 버리고 루이 15세의 프랑스, 러시아 제국을 끌어들여서 포위 전선을 구축했다.
이때 이 동맹국들의 지도자들이 여성들이라, 프로이센의 왕 프리드리히 2세는 '세 자매의 패티코트 동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11] 프로이센의 패배로 끝날 만한 상황이었으나 프리드리히 2세의 필사적이었던 기동 덕분에 시간을 6년이나 끄는데 성공했고 러시아에서 옐리자베타 여제가 사망하고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 출신의 표트르 3세가 제위를 계승하여 전쟁을 중단했다. 때문에 전쟁에 지쳐 있던 다른 동맹국들도 철수해 버렸고, 마리아 테레지아도 어쩔 수 없이 슐레지엔을 포기했다. 이후 오스트리아는 30여년에 걸쳐 프로이센을 본뜬 개혁을 시작하며 내정에 힘썼고 동유럽으로 진출하여 오스만 제국의 봉신국인 몰다비아 공국 서북부를 빼앗아 부코비나 공국으로 명명하였으며, 세 차례에 걸친 폴란드 분할에 참여하여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과 크라쿠프 대공국을 손에 넣었다.
5. 오스트리아 제국
181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 |
나폴레옹 전쟁 중이었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를 자칭하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권위가 무색해지자 황제인 프란츠 2세는 기존의 동군 연합 상태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들을 통합하여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로 선언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806년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패배해서 신성 로마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프랑스 제1제국과 동맹국들에게 영토를 할양해야했다. 1809년에 오스트리아는 복수를 위해 다시 참전했다가 또 다시 영토를 빼앗겼다.[12] 1815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에서 전쟁 중 손실한 월경지에 대한 대가로 이탈리아 북부와 달마티아를 차지하였다.
한편 오랫동안 대주교가 다스려 온 잘츠부르크는 다른 주교령들처럼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오스트리아에 합병되었다. 잘츠부르크 대주교령이 1803년 나폴레옹의 침공을 받자 통치자인 콜로레도 대주교[13]가 지배권을 포기하고 빈으로 도피했다. 오스트리아는 잘츠부르크를 선제후령으로 만들고 친척인 토스카나 대공국에게 하사했으나, 이후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기 속에 오스트리아 제국(1805년), 바이에른 공국(1809년)을 거쳐 빈 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하게 되었다.
빈 회의 이후 50여년 동안 독일 연방의 주도권을 놓고 통일 독일의 구축과 자국 내의 오스트로슬라브주의, 헝가리 독립 운동, 이탈리아 반도의 카르보나리 당과 같은 사상들을 모두 억누르며 1848년 혁명에도 제국 유지에 성공했다. 그러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에서 프랑스 제2제국- 사르데냐 왕국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에게 패배하면서 독일 내 영향력과 독일 통일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세력이 축소되었다. 전통적으로 우방이던 가톨릭 국가 바이에른 왕국 또한 프로이센과 동맹을 맺어 오스트리아의 독일 팽창은 저지되었다.
6.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1914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 |
전쟁에서 패배한 후 헝가리 왕국에서 독립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헝가리 분리파에게 이중 제국을 제안한다. 양쪽의 이해 관계가 일치하여 이중 제국을 세우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었고, 마침내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형성되었다.
오스트리아 정부와 헝가리 분리파 사이의 협상은 대타협이라 불린다. 이렇게 변화한 시기인 1867년 오스트리아 지역의 인구는 4,500,000명으로 전체에 비하면 일부에 불과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08년에 보스니아를 합병하였는데, 이러한 행동은 세르비아 왕국의 격렬한 반발을 가져왔다. 1914년,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였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 세르비아의 후원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 독일 제국이 가담하고, 독일의 침공으로 프랑스 제3공화국와 벨기에, 벨기에의 독립을 보장한 영국이 참여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전쟁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다.
7.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오스트리아
1919년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없어지고 독일계 오스트리아 공화국을 거쳐 1919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영토는 크게 축소되었고 인구는 1919년 기준으로 6,800,000명에 불과했다. 위 지도의 붉은 선 안쪽이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영토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독일로 통합되는 것을 막고 있었던 것은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과 많은 영토를 포기할 수가 없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담과 독일 통일을 주도하려던 프로이센이었다. 그래서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제국과 다민족 국가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고, 바이마르 공화국과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이 모두 독일 민족( 독일어권)의 공화국이 되어 버린 전간기에 독일-오스트리아 통일론이 강하게 부상했다.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의결되기도 했지만 독일이 강해지는 것을 우려한 협상국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민족 통합의 기치를 내세우며 오스트리아 내에 나치당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안에서 이미 이탈리아의 후원을 받으며 권력을 구축한 파시즘 정권( 엥겔베르트 돌푸스 수상)은 오스트리아 나치당을 탄압했다.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1934년 돌푸스를 암살하였고, 뒤이어 집권한 쿠르트 슈슈니크는 나치당에 대한 제한을 풀었다. 이 기회로 오스트리아 나치당은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고, 독일과의 합병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1938년 3월, 결국 독일군은 국경을 넘어왔고, 히틀러는 공식적으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독일-오스트리아의 합병( 안슐루스)을 선언한다. 이런 행각은 독일과 이탈리아 사이의 관계를 냉각시켰고, 이탈리아군은 오스트리아 국경에 집결했으나, 결국 외교적인 협상 끝에 이탈리아의 양해를 얻고 무마된다.[14]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로서 제2차 세계 대전에 다시 참전해 패배한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독일과 같이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 4개국이 분할 점령해서 군정 통치를 했다. 다시는 독일과 통일하지 않고, 영구 중립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1955년 독립했다. 오스트리아의 인구는 1955년에 6,900,000명으로 거의 변화가 없었고 더 이상 많은 성장을 하지 않았다.
8. 현대 오스트리아의 성립
현재의 오스트리아 |
냉전 시대에 자유 진영의 서유럽과 공산 진영의 동유럽을 잇는 지리적 위치와 중립국이란 점 때문에 미국-소련 정상 회담도 여러 차례 열리는 등 양 진영 간의 외교와 경제 교류가 빈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냉전이 끝나고 이웃한 공산권 유럽 국가였던 체코와 헝가리, 슬로베니아가 민주화가 되고 EU에 가입하면서 두 진영의 가운데라는 지리적인 입지가 약해졌고 중립국의 성격도 없어지고 있다. 이웃나라이자 현재도 전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영세중립국 스위스와 대비되는 부분이다.
[1]
바이에른 산하 시기 해당 지역의 첫 통치자는 바이에른 총독이었던
게롤드이다.
[2]
해당 주의 첫 총독은
잘리어 가문의
베르너 1세로 비정된다.
[3]
물론 현재
프랑스 동북부 지방인
그랑테스트가 동쪽의 땅이라는 뜻의 아우스트라시아로 불리던 시기도 있었다. 프랑크족의 영토가 점차 넓어짐에 따라
동프랑크 왕국을 지칭하는 호칭으로 변경되었다가, 최종적으로는 오스트리아 지대까지 동쪽의 의미가 확장된 것.
[4]
정확한 위치는 해당 도시의 로르흐라고 불리는 동네이다.
[5]
영어명칭인 Austria는
라틴어에서 유래하였는데 오스트리아 변경백국은 당시 라틴어로 Marchia Orientalis(동부 변경주)라고 불렸으며 Marchia Austriaca로도 불렀는데 Austriaca는 과거 고지 독일어의 ostar를 라틴어식으로 활용한 것으로 의미는 Orientalis와 같다. 이 (Marchia) Austriaca가 변형되면서 현대의 Austria가 되었다.
나치 독일 시대에 오스트리아를 부르던 Ostmark는 Marchia Orientalis라는 라틴어식 표현의 표준 고지 독일어 번역이다.
[6]
19세기 유럽에서 군복 스타일의 국왕 복장이 유행할 때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들이 이 적백적 문양의 제복을 착용하면서 오스트리아를 상징하는 문양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7]
현재 오스트리아 남부의
슈타이어마르크 주와
슬로베니아 북부 지방.
[8]
독일어로는 크라인(Krain),
슬로베니아어로는 크란스카(Kranjska).
[9]
보헤미아 왕으로는 루드비크
[10]
다만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오스만 제국의
쉴레이만 1세가 지속적으로 위협해와 1/3만 획득했다.
[11]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프랑스의
마담 드 퐁파두르,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가 각각 동맹을 주도했다.
[12]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 오스트리아는 현재 독일 남부의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와
바이에른 주에도 현재 오스트리아와 연결되어 있지는 않았던
월경지를 보유했으며, 그 영토 중에는 현재
프랑스 영토인
알자스나
프라이부르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13]
모차르트의 후원자기도 하다.
[14]
이때도 오스트리아 독립주의자가 있었고 오스트리아의 우위를 주장한 세력도 있었지만 나치당에 의해 철저히 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