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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7 23:14:30

봄의 새싹 작전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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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러톤 호 공세 / 너지커니저-쾨르멘드 공세 / 입춘 작전
독소전쟁의 일부
파일:Plattensee-op.png
전투 당시의 지도
시기
1945년 3월 6일 ~ 4월 15일[1]
장소
헝가리 왕국, 벌러톤 호와 헝가리 서부 일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소련|]]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915-1918, 1919-1946).svg
]] 헝가리 국민단결정부
지휘관 [[틀:깃발|]][[틀:깃발|]][[표도르 톨부힌|]] (제3우크라이나전선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오토 뵐러 (남부집단군 사령관)
[[틀:깃발|]][[틀:깃발|]][[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
]] (F집단군 사령관)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독일 국방군의 기갑 전력 궤멸, 소련군 점령
전력 465,000명
전차 407대
돌격포 및 박격포 6,597문
방사포 293문
항공기 965대
260,000명[2]
전차 1,245대
돌격포 및 박격포 3,200문
항공기 850대
피해규모 47,000명 전사
150,000명 부상

기갑차량 152대 손실
대전차포 415대 손실
항공기 400+대 손실
30,000+명 전사[3]
125,000명 포로 및 부상

전차, 돌격포, 구축전차 1,345대 손실
장갑차 446대 손실
화포 2,250문 손실
항공기 200+대 손실
1. 개요2. 작전 준비3. 투입된 독일군 규모4. 공세5. 소련군의 반격6. 결과

1. 개요

Unternehmen ,,Frühlingserwachen‘‘
다른 명칭: 플라텐제[4] 공세(Plattenseeoffensive)
소련군 명칭: 벌러톤 방어 작전(Балатонская оборони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헝가리어: Frühlingserwachen (,,Tavaszi ébredés‘‘) hadművelet

나치 독일군 최후의 공세. 사실상 추축국에게는 마지막 유전지대였던 헝가리 벌러톤 호 인근의 너지커니저 유전을 방어하기 위해 히틀러가 기획한 공세로 제6 무장친위대 기갑군과 국방군 2기갑군이라는 사실상 마지막 기갑 전력들을 총동원했다. 나치는 아르덴 대공세에서의 실패를 만회하려 했고 동시에 발칸 반도 유전지대 점령으로 연료 수급을 원활히 하려 했으나 소련군의 반격으로 다수의 기갑장비들을 잃었으며 전투에서도 대패했다. 이 전투는 사실상 독일 기갑부대와 기계화부대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다고 평가받는다.

2. 작전 준비

1944년 8월 소련군의 진격과 더불어 미하이 1세의 친위쿠데타로 루마니아가 연합군 측으로 전향하면서 루마니아를 점령하는데 성공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주요 석유 공급원이었던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슈티(Ploiești) 유전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플로이에슈티 유전을 잃은 독일군은 석유 공급이 끊겨 극심한 연료 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이후에는 헝가리에서 조금 나오는 석유와 독일 본국의 석탄을 액화시켜 얻은 연료로 근근히 버틸 수 밖에 없었다. 이 헝가리산 석유는 대부분 헝가리 서부 벌러톤 호수 서쪽에 위치한 너지커니저(Nagykanizsa) 유전에서 생산되는 것이었는데 만일 소련군이 너지커니저 유전마저 장악하면 독일은 석탄을 액화하는 것 말고는 석유 공급원이 완전히 끊기게 되는 것이었고 거기에 헝가리 전체가 소련군에게 넘어가 체코와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 남부까지 한번에 뚫리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히틀러는 부다페스트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소련군에게 지연전을 펼쳐 두 배 이상의 병력 교환비를 내자 남쪽에서 활로를 뚫을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소련군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에 맞서서 제6 무장친위대 기갑군을 주력으로 공세를 할 계획을 세우는데. 벌러톤 호수 북쪽에서 진격한 뒤 다뉴브 강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제6 SS 기갑군은 부대를 북쪽과 남쪽으로 나눈 뒤 SS E군과 합류해 최종적으로 소련의 26군과 57군을 모두 포위한 뒤 부다페스트까지 탈환하는 대담한 계획이었고, 조공으로 국방군 제2기갑군은 벌러톤 호수 남쪽으로 공세하고 헝가리 제3군을 동원해 소련군의 발목을 잡을 계획이었다.

작전 수립 과정에서 군부의 만류가 있었지만[5] 히틀러는 또 한번 자신의 운을 믿고 도박을 해볼 작정이었다.

히틀러는 원래부터 판돈을 크게 걸고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었다. 전쟁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를 연달아 점령하고 소련을 모스크바 코앞까지 밀어내자 히틀러의 기세는 더욱 오르게 되었고 주변 참모들의 조언을 경청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운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후 히틀러는 군부 장성들의 조언을 무시하는 것은 물론이고 장성들의 자율성을 저해하며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고집 때문에 독일군 장성들은 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선보였던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독일군이 패하면 그것을 장군들의 책임으로 몰고 가는 것은 물론이고 불리한 상황에서도 갑자기 공세를 하라고 명령하거나 포위당할 위험에 처한 독일군 부대에 대해서도 끝까지 전선을 고수할 것을 명령하는 등의 군사적 전략적 실책을 여러차례 범하는 바람에 독일군의 손실은 더욱 커져만 갔고 결과적으로 나치 독일의 패전을 앞당기게 되었다.

사실 처칠이나 스탈린도 히틀러 못지않게 삽질을 저질렀다. 허나 둘 다 주변 장군들의 말을 들어줄 정도의 정신머리는 있었고 히틀러처럼 전적으로 운에 의존하는 인물은 아니었으며애초 운에나 의존하는게 멍청한거지... 결정적으로 자기가 잘못하거나 실수하면 돌아볼 줄이라도 알아서 히틀러처럼 자기 말대로 해서 안 되었는데 끝까지 자기 말만 밀어붙이진 않았다. 더욱이 처칠이나 스탈린은 각각 해군장관, 정치장교 정도는 해 봤고 스탈린은 아예 전선에서 활약도 했다. 게다가 비록 1차대전 이전에 전역했지만 처칠도 장교 출신이다. 애초에 영국 육사 출신의 직업군인이었다가 정치로 진출한 인물. 보어 전쟁을 포함하여 여러 전쟁터에 장교 또는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실전 경력이 있다. 모병제였던 당시 영국의 정치가들 중에서는 그만큼 전쟁과 군대에 대해 잘 아는 인물도 흔치 않았다. 풍부한 군 경험은 처칠이 2차대전 때 전시수상으로 임명된 이유 가운데 하나다. 즉, 처칠이나 스탈린은 실전에서 지휘를 해봤던 경험이 있는 정치가들이었다.
반면 히틀러는 상병이 전부고 그나마도 연락병으로 활동했다. 즉 애초부터 히틀러는 잘난 군대 경력도 병 계급 수준의 경력이라 전략전술에서는 고위 장교들보다 딸리는게 분명한데도 그들은 예스맨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6] 거기다가 지난 2월의 남풍 작전(Operation Southwind)[7]에서 큰 성공을 거두어 히틀러는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지난 2월의 공세 작전이 독일의 마지막 성공적 공세 작전이될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3. 투입된 독일군 규모

#
아래에 나와있는 기갑차량들의 수는 각 사단들이 실제로 보유하고 있던 수가 아니라 보유하고 있는 전차 중 작전개시 시점에 가동이 가능한 상태였던 기갑차량들의 수이다.

무장친위대
독일 국방군
헝가리 왕국군 보면 알겠지만 대부분의 사단이 완편되지 못한 편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2월의 남풍 공세 작전으로 인해 정비중인 차량들도 많이 있는 상황이라 사단 규모가 그만큼 줄어든 것. 그럼에도 히틀러는 공세를 강행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는 최악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4. 공세

파일:Bundesarchiv_Bild_146-1989-105-13A,_Ungarn,_deutscher_Rückzug.jpg

1945년 3월, 작전 중 기동중인 무장친위대 기계화부대. 5호 전차 판터 Sdkfz250, 동부용 궤도형 트랙터 및 몇 대의 트럭이 보인다.

3월 6일, 제6 SS 기갑군은 배속된 다수의 티거 II 전차들을 동원해 소련의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을 타격했다. 공세는 초반에 순조로웠지만 다뉴브 강을 마주할 때 소련군의 거센 저항에 직면했고 진흙투성이의 지형을 마주하게 되면서 진격 속도는 더디어지게 되었다. 얼어붙었던 지형이 이른 봄이 찾아오면서 진흙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많은 차량과 병력들이 진흙탕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이러한 상황에 마주한 지휘관들은 공세 명령을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3월 14일, 독일군의 공세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했다. 제6 SS 기갑군은 그나마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길목인 작은 호수 벨렌체까지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목표에 한참 미달한 수준으로 진격했으며 제2 기갑군은 벌러톤 호수 남쪽으로 멀리 진격하지 못했다. 합류하려 했던 E군 소속 제13 SS 산악 사단은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지휘하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하고 만다.

독일군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 km 정도 수준까지 돌파하는데 성공했지만 공세 8일 만에 1만 51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1000대의 전차 중 약 332대의 전차만 가동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예를 들어 무장친위대 제2 " 다스 라이히" 기갑사단은 전체 기갑 전력중 42%가 파손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16] 이것만 놓고 보아도 재앙 수준의 타격을 입은 셈인데 아예 숨통을 끊어놓는 수준의 더 큰 재앙이 들이닥친다.

5. 소련군의 반격

파일:1280px-Plattenseeoffensive.jpg
파일:W-Hungary-3-HT-May12.jpg

독일군에 맞서서 불을 뿜는 76mm ZiS-3 사단포.

소련은 이미 2월 하반기 부터 독일군의 대규모 공세 조짐을 포착했다. 소련은 해당 전선에 제3 우크라이나 전선군 소속 26군과 27군을 방어 병력으로 배치했다. 소련군은 가용 포병 전력 65%를 이용해 발라톤 호수 전방의 83km에 걸쳐서 66개의 대전차 매복 지점과 다층 대전차 방어선을 지어놓았다. 거기다가 보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임시 교량과 가스 파이프라인까지 설치하는 등 그야말로 우주방어 수준의 준비를 해놓았다. 1km의 구역 당 평균 17문의 대전차포가 배치되었으며 다수의 대인/대전차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천발의 대전차/대인지뢰들이 매설되었다. 그래서 독일군 전차들은 방어선 돌파과정에서 큰 출혈을 강요당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SU-100 대전차 자주포들을 최초로 투입했다. 이 대전차 자주포들은 광범위하게 투입되어 판터, 야크트판터 그리고 티거 2를 공격해 격파했다. SU-100은 2km 거리에서 125mm 수직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고 1.5km의 거리에서 판터의 80mm 경사 전면 장갑을 관통해 격파할 수 있었다.[17] 그리고 방어선이 독일군에 돌파당할 경우 소련군은 급히 전술 예비대를 재배치하는 유연함도 발휘했다.[18]

그렇게해서 큰 피해를 입었던 독일군은 3월 16일, 소련군 제46군, 제4근위군, 제9근위군의 전면적인 반격을 마주하게 되었고[19] 공세 이전 위치로 다시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아직도 승리가 가능하다고 헛된 망상을 하고 있었다.

3월 19일, 소련 제6 근위 전차군까지 투입되자 독일군의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 야심차게 공세하던 독일군은 벌러톤 호수로 내몰려 포위될 뻔하다가 겨우 탈출하기도 했다. 6 근위 전차군은 이 틈을 타 진격을 계속했다.

3월 22일, 제6 SS 기갑군 잔존 병력들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철수하고 3월 30일, 소련 6 근위 전차군은 제4군, 제9 근위군과의 협동 작전으로 오스트리아 빈까지 공세해서 4월 14일, 소련군에 의해 빈이 점령된다.

6.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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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사진들
6 SS 기갑군이라는 이름 잘 붙였네. 단지 6대의 전차 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6 SS 기갑군 사령관 요제프 디트리히가 던진 농담

독일군은 3만 명 이상의 전사자와 12만 5000명의 포로가 발생하며 궤멸적 타격을 입는다. 장비 손실도 어마어마했는데 일단 숫적으로도 손실한 기갑전력이 거의 2,000대에 달하는데다가 티거 II 야크트판터 그리고 판터와 같은 고급 전력들도 상당수였던지라 질적인 피해 규모도 더 컸다.

1945년 당시에는 날이 갈수록 더 강화되는 미-영 연합공군의 폭격에 군수공장을 제대로 가동하지 못해 엔진과 같은 중요 부품을 제대로 생산하지도 못했고, 심지어 전차 제작에 필요한 희귀 금속의 고갈로 품질 악화 문제가 터져 장갑이 약화된 판터 G형이나 티거가 출고되기도 했다. 알베르트 슈페어도 전선을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해도 재앙을 모면하기 어려웠을거라고 인정했을 정도. 거기에다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내 군수공업지대까지 소련에게 내준 상황이었다. 그리고 티거 II는 이미 서부 전선에서의 아르덴 대공세와 연합군의 프랑스 해방 과정에서 많은 손실을 입은 상황이었다.

또한 반궤도 장갑차 수 백대를 손실했던 것은 당시 독일군의 상황에 있어서 기동능력에 있어서의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당시 독일군은 수송 트럭조차 부족한 형국이었고 철도는 계속되는 연합군의 공습에 파괴되기 일쑤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하노마크 반궤도 장갑차를 비롯한 제대로 된 장갑차들을 대량으로 보유하는 사치를 누리고 있던 제6 SS 기갑군의 궤멸은 사실상 독일군 기동 능력의 상실이나 마찬가지였던 것. 즉, 이 전투에서 상실한 독일군의 기갑 및 차량 전력들은 독일 전역에서 정말로 멀쩡한, 그나마의 마지막 전력이었다.[20]

마켓 가든 작전 당시 대활약했던 9 SS 기갑사단 "호엔슈타우펜"도 많은 병사들이 그대로 겁에 질려 도주하는 바람에 사단이 그대로 붕괴된 경우도 있었다. #그나마 남아있던 독일군의 기갑전력마저도 완전히 궤멸되면서 독일군은 잔존한 전력들과 급조한 장비[21]들로 기갑세력을 겨우 유지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헝가리 유전지대 방어는 커녕 소련군의 역공으로 독일 마지막 유전지대는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까지 내주게 되었으니 나치 입장에선 더욱 뼈아픈 패배였다. 비록 독일의 최후의 한 방인지라 소련도 4만 명이 넘는 전사자와 10만 명이 넘는 부상자가 발생하고 한때 부다페스트로 향하는 교두보까지 밀려나는 큰 피해를 입었지만 소련군은 계속 막대한 병력과 장비들을 충원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소련군 수뇌부 입장에서는 거의 무의미한 피해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내린 무리한 명령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 커녕 적반하장으로 전투에서 패배한 무장친위대 부대는 패잔병이라는 치욕의 표시를 받으라며 무장친위대 사단 칭호가 적힌 소매 띠를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디트리히를 비롯한 무장친위대 장성들과 장병들은 이에 대해 크게 분개했고 상당수의 무장친위대원들은 이를 불복하고 그냥 달고 다녔다. 이미 히틀러에 대한 일선 장성과 장병들의 신뢰도는 떨어지고 있었다는 대표적인 사례.

여담이지만 소련군이 빈을 점령한 뒤에 오스트리아 시민들에게 상당히 친절하게 대우했다. # 베를린 공방전 당시와 비교되는 행동이었는데 일단은 강제로 독일에 합병된 처지이기도 했고[22] 이때 적지않은 오스트리아 민간인들이 소련군의 진격을 도와주었기 때문. 나치는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를 파괴할 것이라고 선전했지만 소련군 야전부대들이 적극적으로 반박하며 오스트리아 시민들에게 계속 생업에 종사할 것을 호소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시민들의 저항도 전무했다. 또한, 소련군이 독일군의 청야전술을 막은 덕에 빈의 주요 세계적 문화유산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1] 3월 16일까지는 독일 국방군의 공세, 이후에는 소련군의 반격. [2] 헝가리군 병력은 불명으로 포함하지 않았음. [3] 독일군 남부집단군만. 독일군 F집단군 및 헝가리군 손실 미포함 [4] 벌러톤 호의 독일어 명칭. [5] 이때 소련은 헝가리만 공격한 것이 아니라 독일 동부에서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폴란드 총독부와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의 숨통을 끊었고, 동프로이센 포메른, 슐레지엔의 함락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6] 다만 실제로는 고위 장교들의 전술 능력은 모를까 전략적 식견은 히틀러보다 딱히 나을것도 없었다. 애초에 독일군은 제국 시절부터 전술적 능력은 분명히 좋은데 전략 능력에서 대단히 무능했다. 딱히 히틀러만 무능한게 아니었다는 것. 긴 말 필요없이 슐리펜 계획의 문제점들이 터진건 1차대전이었다. [7] 소련군이 다뉴브 강 지류를 도하하여 확보한 교두보를 제거하기 위해 독일군이 벌인 공세였다. 공세는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독일군이 소련군을 강 너머로 몰아냈다. 이 공세에서 소련군의 손실은 약 8,200명이었고 독일군의 손실은 약 6,500명이었다. [8]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58대의 전차와 10대의 돌격포/구축전차는 정비 중이였다. [9]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39대의 전차와 49대의 돌격포/구축전차는 정비 중이였다. [10]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티거2 23대는 정비 중이였다. [11]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티거 10대는 정비 중이였다. [12]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41대의 전차와 22대의 돌격포/구축전차는 정비 중이였다. [13]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돌격포/구축전차 13대는 정비 중이라 투입되지 않았다. [14]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2대의 전차와 15대의 돌격포/구축전차는 정비 중이였다. [15] 보유하고 있던 기갑차량 중 5대의 돌격포/구축전차는 정비 중이였다. [16] 자료에 따라선 제9 SS 기갑 사단이 이와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17] Higgins, David R. (2014). Jagdpanther vs SU-100. Eastern Front 1945. Osprey Publishing. [18] 톨부힌은 예비대로 묶여 있는 야전군을 보내줄 것을 요구했지만 스타브카가 거절해서 전술 예비대 투입으로 만족해야 했다. 야전군급의 예비대를 투입하지 못했기 때문에 방어선이 뒤틀리긴 했지만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았다. [19] 독일군이 지연전에 큰 피해를 입고 있던 14일~16일 사이 부다페스트 서쪽에서 소련군의 4개 야전군이 독일군의 좌익과 후방을 노리며 은밀히 배치되고 있었다. [20] 영화나 드라마같은 매체에서도 엄청난 물량으로 전차,항공기,화포로 베를린으로 입성하는 소련군을 상대로 땅보병으로 맞서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바로 이 작전의 실패의 결과였다. 이 작전을 실행하지않고 구데리안의 계획처럼 모조리 베를린 방어에 투입되었더라면 그럼에도 패배했겠지만 소련군을 상대로 큰 출혈을 강요하고 엄청난 접전을 벌이며 패망은 몇주정도 뒤로 미룰수도 있었던 셈. [21] 베를린 공방전을 보면 노획한 전차, 훈련용으로 운용되던 전차, 그리고 온갖 프로토타입이나 다른 형식의 부품들을 끼워맞춘 잡종 전차, 대전차포를 장착한 구형 전차들도 동원한다. 엔진이 제거된 채 고정형 토치카로 운용되는 전차는 물론이고 심지어 1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되던 노획된 영국제 Mk 시리즈와 프랑스제 르노 FT까지 동원한다. 물론 서부전선에서 제대로 운용 중이던 512 중전차 대대 소속 야크트티거 그리고 판터를 비롯한 전차 전력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들은 베를린 공방전에 투입할 수 없었고 결국 연합군 대비 수적 열세와 보급 고갈로 하나 둘씩 궤멸되거나 항복하는 상황이었다. [22] 다만 또 이게 오스트리아는 몰라도 오스트리아인들은 제법 자발적이기도 했던 만큼 미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