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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03:00:28

카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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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전개
2.1.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 포로의 수용2.2. 1940년 4~6월 폴란드 포로의 학살2.3.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소련의 추가 학살2.4. 발견2.5. 연합군의 묵인
3. 전쟁 이후
3.1. 냉전기 연구3.2.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4. 여담
4.1. 일부 정당 및 유사역사학자들의 왜곡 시도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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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폴란드어: Zbrodnia katyńska[1]
러시아어: Катынский расстрел[2]
독일어: Massaker von Katyn, Massenmord, Massanerschießungen von Katyn(Katyn)
영어: Katyn Forest Massacre

카틴 숲의 학살

카틴 학살은 1940년 4월 3일부터 약 2개월 동안 소련 NKVD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Katyn Forest)을 비롯한 소련 서부 일대에 수용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엘리트 2만 1,768명을 학살한 사건을 일컫는다. 사건의 명칭은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소련 서부 전역의 포로 수용소에서 학살이 벌어졌으며, 최초로 집단 매장지가 발견된 카틴 숲의 명칭을 따서 카틴 학살이란 이름이 붙었다.

2. 전개

2.1. 폴란드 침공과 폴란드 포로의 수용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 소련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었고 일주일 뒤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이 발발한 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두 국가에 분할 점령되었다. 당시 소련군에 사로잡힌 폴란드 포로는 25만 명 정도였다. 사병 포로들은 대부분 즉시 석방되었지만 장교 부사관 포로 수만 명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수용된 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짐승 같은 대우를 받으며 고통을 받았다. 이후 소련군은 포로 관리를 대숙청으로 악명 높은 NKVD에게 이관했다.

2.2. 1940년 4~6월 폴란드 포로의 학살

NKVD는 1년간 포로와의 개별 인터뷰를 통해 개별 포로의 성향을 파악했다. NKVD의 수장 라브렌티 베리야는 1940년 3월 5일 반소적이거나 소련에 비협조적인 자들은 소련의 안보에 위험하니 즉시 제거하자고 이오시프 스탈린에게 의견을 상신했고 스탈린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학살이 최종 결정되었다.

이후 폴란드군 포로들을 재분류하여 포로 2만 5,736명(1명 제외 전원 남성)을 카틴 숲을 비롯한 다른 지역으로 끌고 갔고 NKVD는 미리 암매장하려고 파 둔 여러 곳에서 이들 중 22,000여 명을 1940년 4월부터 5월까지 총살했다. 총살당한 이들 중 8,000여 명은 소련의 폴란드 침공 당시 소련에 포로로 잡힌 폴란드 장교였으며 6,000여 명은 폴란드 경찰, 나머지는 폴란드 지식인이었다. 카틴에서만 4,400여 명, 민스크에서 3,870명, 하리코프에서 3,800여 명, 메드노예(Mednoye)[3]에서 6,300여 명이 학살당했고 키예프 헤르손에서도 학살이 벌어졌다.

카틴에서만 제독 1명, 장군 2명, 육군 대령 24명, 해군 대령 17명, 중령 79명, 소령 258명, 대위 654명, 하사관 3,420명, 군종 신부 7명이 학살당했으며 200여 명이 넘는 조종사 대학 교수 20명, 변호사, 기술자, 교사 수백여 명, 난민 131명, 대 지주 3명 등도 학살당했다. 카틴 이외에도 민스크, 하르코프, 메드노예 등지에서 학살된 장교들의 숫자까지 합치면 장성급 인사만 14명이 학살당했다. 학살 피해자 중 8%는 폴란드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학살의 현장에서 막판 분류 작업으로 살아남은 천하의 행운아는 395명에 불과했다. 야니나 레반도프스카(Janina Antonina Lewandowska, 1908~1940) 육군 중위를 제외하고 살해된 사람은 전부 남성이었다. 학살이 끝난 후 NKVD는 불도저로 시신을 흙으로 덮어 버려 사실을 은폐했고 그대로 모든 비극이 묻히는 듯했다.

공식적인 명칭은 "카틴 학살"이지만 실제로는 스몰렌스크 부근의 카틴에서만 학살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카틴에서 죽은 사람들은 코젤스크 수용소에서 나왔고 오스타시코프 수용소의 포로들은 모스크바 북부의 칼리닌 부근에서 학살되었으며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의 포로들은 하리코프 부근에서 학살되었다. 카틴 숲에서 학살의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카틴 학살로 알려졌을 따름이다. 장교들뿐만 아니라 부사관들도 죽었는데 사망자 숫자로는 부사관 계층이 제일 많이 죽었다. "계급각성"이 이루어지 않는다고 판정한 노동자와 농민 출신 병사 250명도 학살되었다고 인정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atyn_massacre_8.jpg

집단학살 현장에서 발견된 폴란드 육군 장교의 견장 지폐.

2.3. 바르바로사 작전 직후 소련의 추가 학살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 소련을 전면 침공하자 소련의 국경 경비대와 NKVD는 서부에 산재한 수용소의 재소자들을 대거 학살했다. 베리야는 원래 서부의 재소자들을 소련 내지로 이송하려고 했으나 독일군의 진격 속도가 상상을 초월하자 24일 소련 서부의 모든 정치범을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이에 북으로는 탈린에서 남으로는 하리코프에 이르기까지, 소련 서부의 각 수용소에서 수백~수천여 명의 재소자들이 학살되었다. 이 학살로 살해된 사람은 1939년 소련이 병합한 폴란드 동부에서만 2만여 명에 달했고, 1939년 이전에도 소련령이었던 지역에서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가장 많은 피해자가 발생한 곳은 우크라이나 서부의 대도시인 리보프로 이곳에서만 최소 3,500명이 학살되었다.

카틴 학살과 달리 1941년에 벌어진 학살은 소련 정권의 반대파로 여겨진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으므로 비폴란드인이 대다수를 차지했다. 한 학자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이 희생자의 70%를 차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글

2.4. 발견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영국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 소련과 협력하여 독일군에게 저항하기를 합의하고 폴란드군 포로를 망명정부의 병력으로 활용할 테니 보내주기를 요청하였지만 소련은 "폴란드군 포로들은 도망쳐서 찾을 수 없다."고 대답하였다. 500여 명만 영국으로 갔을 뿐 소련이 수용했다고 추정한 포로 수천~수만 명의 행방이 묘연했다. 물론 폴란드 인민군 등 공산 계열 폴란드군에 편입된 병력도 적지 않았지만 아예 행방불명 상태가 된 포로가 상당히 많았음이 문제였다. 그 와중에 이들의 행방을 묻는 폴란드 망명정부에게 스탈린은 "죄다 만주로 도망가 버렸다."고 대답했다.

1943년 2월 18일 독일군은 스몰렌스크에서 10마일 떨어진 카틴 숲에서 4,000여 명이 살해당하여 암매장된 사실을 발견했다.[4] 이 사체들이 입은 복장의 형태, 그리고 실종자들의 명단을 찾아본 결과 이들은 폴란드군 장교, 지식인, 교사, 지역 유지, 경찰, 가톨릭 사제, 가톨릭 수도자 등 폴란드 핵심층들[5]인 것으로 밝혀졌다. 보고를 받은 독일 중부집단군의 정보장교 루돌프 크리스토프 폰 게르스도르프(Rudolf Christoph Freiherr von Gersdorff)는 국제적인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직감하여 카틴 학살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상신, 보고를 받은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반소 선전에 사용하여 연합국의 공동보조를 균열시킬 목적으로 4월 9일 사건의 전면적인 조사를 명령했다. 가짜 증거라도 만들어서 소련을 매도해야 할 판인데 진짜 학살 증거가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6]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Zygmunt_Sloninski_passport_-_1939.jpg

1939년 스위스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발급된 폴란드 의사 지그문트 스워닌스키(Zygmunt Słomiński) 박사의 여권. 폴란드 육군 예비역 군의 소령이기도 했던 그는 소련군에 체포되어 1년 후 총살당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83-J15385%2C_Katyn%2C_%C3%96ffnung_der_Massengr%C3%A4ber%2C_Gr%C3%A4ber_polnischer_Generale.jpg

독일의 안내를 받아 학살 현장의 묘지를 방문한 비시 프랑스 수뇌부.

본래 독일은 폴란드 적십자사와 접촉하여 사건을 공표할 예정이었으나 예기치 않게 4월 13일부터 세계 각국에서 학살에 관한 보도가 빗발쳤다. 이후 독일의 베를린 방송도 카틴 학살에 관한 정보를 공식적으로 보도했다. 이틀 후 소련은 독일의 주장에 반박하고 오히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포로들을 학살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들에 따르면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이 스몰렌스크 인근에서 작업에 동원된 폴란드인들을 붙잡아 살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포로가 스몰렌스크에 있었다는 설명은 폴란드에 전달된 적이 없어서 처음에는 학살을 반신반의하던 폴란드 망명정부도 소련에 대한 의혹을 갖게 되었다. 이미 발굴된 시신 250구를 조사한 적십자사는 시신이 폴란드 포로임을 확인하고 이들이 1940년 3월에서 4월에 걸쳐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는 1940년 4월부터 6월까지 학살이 벌어졌으니 비교적 정확하게 시기를 파악한 것이다.

이런 류의 신변 바꾸기는 학살 진상규명에서 흔히 있는 이야기인데 난징 대학살 부인론자들이 수두룩하게 나오는 중국인 시체 사진을 두고 '국민당군이 후퇴하면서 자국 민간인을 처형하고 버린 시체'라고 주장한다든가 6.25 전쟁 당시 좌-우의 학살 증거를 모두 '상대방에서 학살한 후 우리가 한 짓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했던 일처럼 사례를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2.5. 연합군의 묵인

미국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 사건을 듣고 조사관을 파견하여 소련군이 저지른 일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나 당시 같은 연합국 측인 소련과 미국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를 기밀로 처리했다.[7] 이는 영국도 마찬가지였으며 특히 영국은 미국보다도 먼저 통신감청 및 암호 해독을 통해 독일의 매장지 발견 직후 카틴 학살의 실체를 어느 정도는 먼저 접할 수 있었다.[8] 하지만 나치 독일에 맞서기 위해서는 소련과의 협력이 필요했기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 총리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수장인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에게 행방불명자에 대한 개입을 중단하라고 권고했다.

사실을 확인한 폴란드 망명정부는 국제적십자위원회(ICRC)에 카틴 숲의 집단 매장지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하였으며 실종된 폴란드군들이 어디로 갔는지를 소련에 공식적으로 요구하였으나, 소련은 1943년 폴란드 망명정부와의 국교를 단절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어차피 거짓말을 해 봐야 먹히지 않을 게 분명하며 진실을 말하면 아무리 사정이 절실해도 자국 포로 수만 명을 학살한 국가와는 동맹을 유지할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잘 아니 아예 관계를 끊어 버렸다.

이쯤 되자 다른 나라들도 어느 정도 사건의 진상에 대한 냄새를 맡게 되었다. 영국은 소련의 국교단절에 불쾌함을 느꼈으며 미국도 대독일전을 같이 수행하는 폴란드 망명정부에 대한 소련의 태도를 달갑게 여기지 않아 이는 테헤란 회담 얄타 회담을 거치면서 소련-폴란드 간 국경선 확정 문제로 불거지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나치를 먼저 때려잡고 나서 나중에 책임을 묻자는 의견이 대세가 되어 일단 침묵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3. 전쟁 이후

3.1. 냉전기 연구

카틴 학살이 드러났을 때부터 소련의 사법기관들은 나치 독일에 카틴 숲 학살의 책임을 전가했다. 독소전쟁이 끝난 직후인 1945년 12월 28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레닌그라드의 소련 군사 법원은 7명의 독일 국방군 병사들을 재판했다. 그들 중 한 명인 아르노 뒤레(Arno Dürre)는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다수 살해한 혐의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는 카틴에서 폴란드 포로 1만 5천~2만 명을 매장하는데 참여했다고 "자백"했다. 이 자백으로 그는 15년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아 사형만은 면했다. 하지만 그의 자백은 너무나도 엉터리여서 심지어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참여한 소련 검사들마저 그의 증언을 인용하지 않았다. 후일 뒤레는 자신이 조사관에게 고문을 당해서 억지로 자백했다며 이전의 증언을 취소했다.

바르샤바로 환도한 폴란드 임시정부는 폴란드계 소련인들로[9] 구성한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으며 학살의 진상규명을 요구한 사람들은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갖은 불이익을 받았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폴란드 인민공화국 내부에서도 민족주의적인 공산주의자가 득세했고 1970년대부터 폴란드 인민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걸쳐 재조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장군과 폴란드 인민정부는 진상 재조사를 끈질기게 요구하였는데 이는 야루젤스키 장군이 1939년 당시 소련에 합병된 폴란드 동부 출신으로 굴라크에서 시력이 손상될 정도로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부모를 잃는 등의 고역을 치른 경험이 있었던 것과도 관계가 있다고 여겨진다.[10]

서방 역시 더 이상 침묵할 필요가 없었고 더욱이 냉전이 시작되면서 소련의 악행을 선전하는 것은 체제 경쟁에 큰 도움이 되는 행위였으므로 바로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1952년 미국 의회는 카틴 숲의 학살은 소련의 책임이라는 결론을 냈으며 1970년에 영국은 카틴 숲 학살 피해자를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려고 하여 소련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58~1961년 KGB 의장을 지낸 알렉산드르 셸레핀(Александр Шелепин)은 1959년 3월 3일 흐루쇼프에게 카틴 학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해 폴란드인 피살자 2만 1,857명에 대한 정보를 비롯해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을 파기하자는 내용의 메모를 보냈는데 이 제안 자체는 실현되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3월 3일 흐루쇼프에게 보낸 그 메모가 보존되어 훗날 카틴 학살의 증거물 중 하나로 공개되었다.

3.2.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소련의 대혼란기인 1989년과 1990년에 소련 학자들이 카틴 학살 사건과 관련된 문서[11]를 찾아냈는데 결국 1990년 4월 1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NKVD에 의한 포로 학살을 공식 시인하였다. 1990년부터 2004년까지 소련 검찰과 러시아 검찰[12]이 벌인 수사에서도 소련 정부가 카틴 학살을 벌인 사실이 밝혀졌으며 특히 소련 붕괴 후인 1992년 학살 명령이 담긴 스탈린 흐루쇼프 등의 서명이 들어간 다량의 관련 문서들이 기밀 해제되었다. 2010년 11월에는 러시아 연방 국가두마에서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관리들이 학살을 명령했다는 결의안을 채택하여 학살에 대한 소련의 책임을 재확인했다. 2011년 러시아 정부는 카틴 학살과 관련된 사건 파일 11권을 폴란드에게 제공했다.[13] 2012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미국 쪽 문서의 기밀 해제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카틴 학살은 분명히 소련 정부가 벌인 학살이란 사실이 명백해졌다.[14]

그러나 현재의 러시아 정부는 카틴 숲 학살에 대해 '이는 NKVD에 의해 자행된 일이지만 이를 라브렌티 베리야 등 NKVD 쪽이 미리 계획하고 제안, 실행한 점을 들어 현재 러시아에 국가적인 책임은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 아직까지 폴란드와 러시아 간 외교적 마찰의 원인이 되고 있다. 물론 러시아가 소련의 계승국이고 당시 소련의 통치자가 이오시프 스탈린이었으며 그가 학살의 최고 책임자임을 고려하면 말도 안 되는 소리다.[15]

폴란드 MD에 가입하네 마네 하는 입장을 보이자 결국 러시아에서도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이 카틴 학살 추모에 참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심지어 후술할 영화 '카틴'을 방송사들마다 방영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2010년 카틴 학살 70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스몰렌스크로 가던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당시 대통령 및 각료들이 탄 Tu-154 여객기가 스몰렌스크 공항 근방에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16] 조종사 과실[17] 및 공항 시설 미비[18]로 인한 관제 실수[19]가 원인이지만 폴란드의 카친스키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손을 썼다는 음모론도 떠돌았다. 그래서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반러 감정이 확산될까 봐 가진 능력을 총동원해 사고를 수습했다. 원인이 좀 말이 되지 않았는지 폴란드 측에서 재조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블랙박스가 복원되자 카친스키 대통령과 폴란드 수뇌부의 자업자득에 가까운 상황이었다는 게 밝혀졌는데 우선 기장이 착륙할 상황이 아니니 회항해야겠다고 요청하자 폴란드 공군사령관 안제이 브와시크가 직접 조종실까지 들어와서는 조종사를 갈궈서 착륙을 강행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이전에도 카친스키 대통령은 조지아를 방문할 때도 회항하려는 조종사에게 착륙을 요구했으나 안전상의 이유로 조종사가 착륙을 거부해 대체공항을 찾아가게 되자 명령불복종 혐의로 조종사를 검찰 조사에 넘겨 버린 전적까지 있었기 때문에 조종사가 러시아 측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짙은 안개 속에서 무리하게 착륙을 시도하다가 추락해 몰살당했다는 게 밝혀졌다. 결국 권위주의 때문에 매뉴얼을 지키지 않아서 터진 인재였다. 자세한 건 폴란드 공군 Tu-154 추락사고 문서 참조. 이 문제는 잊혀질 만한 듯 싶더니 2022년부터 폴란드 측에서 러시아 음모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사건을 다룬 2007년작 폴란드 영화 '카틴(Katyn)'도 있는데 2010년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폴란드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 부부가 후원했다고 한다. 비행기 추락 사고 이후 러시아측은 애도를 표하고 애도 기간 동안 이 영화를 황금시간대에 TV를 통하여 방영하였다. 참고로 감독은 '재와 다이아몬드'의 감독인 안제이 바이다이며 아버지인 야쿠프 바이다(Jakub Wajda)가 카틴 학살 때 피살됐다고 한다. 한국어 더빙도 되어 KBS 명화극장으로 방영된 바 있다.

만화 고르고13에도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있다.

4. 여담

4.1. 일부 정당 및 유사역사학자들의 왜곡 시도

일부 극좌 정당이나 유사역사학자들(예: 마리오 소사(Mario Sousa))은 여전히 카틴 학살을 소련이 자행한 사실을 부정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 공산당의 청년 조직인 그리스 청년공산주의자(Communist Youth of Greece)가 발행한 Truth and Lies about Socialism이 있다.[25] 이들은 고르바초프와 옐친과 같은 '반스탈린주의자'들과 '서방 학계'만 가해 주체가 소련이라고 주장하고 친소 학계는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학살을 부정하거나 긍정론과 부정론을 동등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26]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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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틴의 범죄 [2] 카틴의 총살 [3] 지금의 러시아 트베르 주 칼리닌 지구에 있는 마을이다. [4] 47년 후 1990년 6월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에서 6,500명의 폴란드 군인, 소련인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24년 후 2014년에는 스탈린 시절에 살해당한 1,000명의 폴란드 군인, 민간인들의 유해가 발견되었다. [5] 흔히 카틴 학살이 폴란드군 장교단만 학살된 사건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는 폴란드가 일종의 군사독재 정권 하에 있었던 탓이 크다. 당시 폴란드는 역사적 배경 때문에 군국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군이 우대를 받는 경향이 커서 지식인의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 계급을 받았다. 대학만 입학해도 일단 소집하면 병이 아니라 사관후보생으로서의 부사관으로 입대한 후 이름만 예비역 부사관인 상태로 곧장 예비역에 편입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이 학살의 희생자는 대부분 일단은 장교 신분이었다. 특히 지식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성과에 따라서 군 계급도 순차적으로 올라가곤 했기 때문에 계급과 연령만 봐서는 현역인지 예비역인지 정도가 아니라 명목상으로만 장교였는지도 알기 어렵다. [6] 덤으로 카틴 학살 현장을 발굴한 나치 독일은 학살한 시신을 매장할 경우 언젠가는 들통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수용소의 시신들을 화장하기 시작했고 이미 매장된 시신도 수용자들을 동원해 도로 파내서 화장해 버렸다. [7] 루스벨트가 소련이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전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공개할 경우 스탈린이 격분해 독일을 상대로 한 전쟁에서 빠져나갈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은 전쟁 전부터 이미 스탈린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해결하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소련의 거짓말과 만행을 묵인하였다. [8] 로버트 해리스의 소설 '에니그마'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했다. [9] 대표적인 사례로 소련군의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는 폴란드계였기 때문에 스탈린의 명령에 따라 새로 생긴 폴란드 인민군의 총사령관으로 부임하였다. [10] 야루젤스키는 폴란드에서 논란이 큰 인물이다. 폴란드에서 1981년 반공 소요 사태가 일어나자 군부를 이끌던 야루젤스키는 소비에트 연방의 후원을 바탕으로 폴란드 인민군을 앞세워 폴란드 공산당의 당권을 빼앗고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군사정권을 출범시켰다. 당연히 전두환 수준의 악명을 뒤집어썼으나 야루젤스키는 프라하의 봄처럼 소요 사태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군의 침공 징후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극약처방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1985년부터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단행할 때 적극 지지하는 등 여러모로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야루젤스키는 1989년까지 군사정권의 수장으로 앉아 있다가 동유럽 혁명이 터지고 레흐 바웬사의 자유노조가 선거에서 압승하자 유혈사태를 일으켜 권력을 붙드는 대신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군에서도 은퇴했다. 2014년 타계했는데 바웬사 등 과거 그에게 탄압받은 전력이 있는 자유노조 지도자들은 '오로지 신만이 아실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고. [11] 이 문서 중에는 1940년 3월 5일 베리야가 스탈린에 상신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수용소에 수감된 폴란드인 중 2만 5,700명을 처형하자는 내용의 문서와 알렉산드르 셸레핀이 흐루쇼프에게 보낸 메모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3월 5일자 문서는 스탈린을 비롯한 소련의 주요 인물들이 직접 서명한 상태여서 카틴 학살을 소련 정부가 저질렀다는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12] 1991년에 소련이 붕괴되었으므로 수사를 러시아 검찰이 이어받았다. [13] 여기에는 유죄 판결 통지서와 폴란드 수감자들이 살해된 매장지에 대한 설명 등이 포함되었다. # [14] 고르바초프와 옐친 같은 반스탈린 정권과 서방 학계만 학살 사실을 인정한다는 부정주의적인 주장이 있는데, 국가두마에서 저 결의안을 채택한 것은 블라디미르 푸틴의 동업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2010년 11월의 일이다. 그리고 메드베데프는 사실상 푸틴의 꼭두각시였으니 그런 시절에 국가두마에서 소련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는 것은 서방이고 반서방이고, 반스탈린이고 친스탈린이고 할 것 없이 소련이 카틴 학살을 벌였다는 것 자체는 인정한다는 것이다. [15] 당장 오늘날 러시아가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자리를 유지하고 핵 자산을 물려받은 것도 소련의 계승국이기 때문이다. 구 소련과 현 러시아의 국체가 다르니 현 러시아의 책임이 없다는 말은 소련의 권리만 승계받고 싶지 책임 따윈 알 바 아니라는 체리피킹이나 다름없고, 또한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국체가 다른 현 독일, 일본도 과거의 악행에 대해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폴란드 침공과 카틴 학살, 겨울전쟁, 발트 3국 점령, 전쟁포로 학살, 동유럽 강제 공산화, 1956년 헝가리 혁명 프라하의 봄 유혈 진압,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등 구 소련이 저지른 만행은 당연히 현 러시아 정부의 책임이다. [16] 이 사건이 뉴스에 나오고 나서야 카틴 학살이라는 역사적 사건 자체를 처음 안 일반인들도 있었다. [17] 안개가 심하여 관제탑에서는 착륙이 어렵다고 안내하였으나 착륙을 강행하였다. 거기다 고도 경보가 울리자 고도계를 수동으로 더 높게 설정하여 경보를 꺼버리기까지 했으니 사고가 안 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18] 계기착륙장치 미비. [19]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애초에 착륙 허가를 내 주지 말았어야 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20] 저위력 호신용 탄종인 .25ACP를 사용한다. [21] 그 유명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들을 지휘했다. 안데르스는 소련이라면 치를 떠는 강경한 민족주의자였다. [22] 위에서 죽은 이들의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한 국가의 군대를 충분히 꾸릴 수 있는 규모다. [23] 이들 중 소련 정부의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종교를 믿던 이들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 신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도 폴란드계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현지 문화에 동화되어 정교회를 믿는 경우가 많으며 폴란드 본토에 사는 소수의 정교회 신도들은 대부분 러시아 등 동슬라브계 후손이거나 러시아 치하에서 러시아화된 폴란드인의 후손이다. [24] 폴란드계 소련인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원수가 스탈린의 명령으로 초대 폴란드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가 소련의 앞잡이라는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쫓겨난 바 있다. [25] 한국에는 "쏘련 사회주의에 대한 진실과 거짓"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유포되었다. # # [26]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 부정과 일본 제국의 난징 대학살 부정처럼, 부정주의자들은 소위 '비주류', '수정주의'라는 수식어를 절찬리에 써먹고 있으며, 당연하지만 이런 부정론은 학계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로, '비주류' 설로 대접할 가치도 없는 완벽한 '부정론'으로 찍혔다. [27] 정식 명칭은 카틴 국제의료위원회(Internationale Ärztekommission von Katyn)이다. [28] Petr Svobodný, František Hájek: A Czech professor of forensic medicine in Katyn, in: Katyn et la Suisse, Experts et expertises médicales dans les crises humanitaires. Ed. D. Debons et al. Genf 2009 [29] Natalia S. Lebiediewa, Komisja Specjalna i jej przewodniczący Burdenko, in: Zeszyty Katyńskie, 23(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