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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1:06:44

독일/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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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3.1. 중세 초기3.2. 중세 전성기3.3. 중세 후기
4. 근대 초기
4.1. 막시밀리안 1세와 제국개혁(1495~1519)4.2. 종교개혁과 교파 시대(1517~1618)4.3. 30년 전쟁(1618~1648)4.4. 바로크와 계몽 시대(1648~1789)
5. 19세기
5.1. 나폴레옹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1789~1815)5.2. 독일 연방의 성립과 3월 전기(1815~1848)5.3. 1848/1849 혁명(1848~1849)5.4. 산업화 독일 통일(1849~1871)
5.4.1. 반동시대5.4.2. 산업화5.4.3. 프로이센 헌법갈등과 비스마르크의 집권5.4.4. 통일전쟁과 독일 제국의 성립
5.5. 독일 제국(1871~1918)
5.5.1. 비스마르크 시대(1871~1890)5.5.2. 빌헬름 시대(1890~1914)5.5.3.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6. 20세기7. 21세기
7.1. 재통일 이후
8. 관련 문서9. 참고 문헌
9.1. 통사9.2. 신성 로마 제국9.3. 중세9.4. 근세
9.4.1. 종교개혁9.4.2. 30년 전쟁
9.5. 근현대
9.5.1. 독일 제국9.5.2. 바이마르 공화국9.5.3. 제3제국

1. 개요

독일 역사를 다루는 문서.
843년 베르됭 조약부터 현재까지의 독일의 역사를 다룬 타임맵.

2. 고대

기원전 스칸디나비아 반도 발트해 연안 지역에 머물던 게르만족 기원전 2세기경 남하를 시작하여 기원전후 무렵 선주민이었던 켈트족들을 몰아내고 라인강 도나우 강까지 진출했다. 이들은 라인 강 동부와 도나우 강 북부의 넓은 땅을 무대로 주로 유목 사냥을 했으며, 추운 날씨를 견디며 척박한 땅에서 생활하다 보니 게르만족은 강인한 성격과 불굴의 의지를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이들에겐 문자는 커녕 그들만의 역사 문화가 없었다. 그들은 짐승 가죽으로 간단한 형태의 을 만들어 을 가렸고, 나무를 쌓아 오두막을 지어서 바람을 피했다. 로마인들은 이 땅을 게르마니아라고 불렀다. 기원전 50년 갈리아 정복에 나선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최초로 접촉했다. 카이사르는 게르마니아의 일부를 차지하려고 시도했으나 게르만족의 호전성과 게르마니아의 울창한 을 이용한 게릴라 전투의 위험성을 깨닫고 곧 포기했다.

그러나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필적할만한 군사적 업적을 세우고자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게르마니아 전역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라인강의 경계를 엘베 강으로 올리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은 로마 제국 역사를 통틀어 최대의 정복 사업이라 할 만했는데, 무려 11개 이상의 군단이 투입되었다. 기원전 12년 시작된 게르마니아 정복은 기원후 4~5년경 엘베 강 유역을 확보하면서 어느 정도 마무리되는 듯 했다. 이렇게 해서 게르만족이 생활하던 땅은 로마의 판도 안에 들어갔다.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는 3개의 정예 부대를 이끌고 게르마니아에 주둔했으며, 게르마니아 지역에 있는 각 부족 족장들을 설득해서 로마가 게르마니아를 통치하는 데 꼭두각시로 이용했다. 로마 정부는 부족을 통치하는 능력이 뛰어난 족장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고 그들을 로마 기사계급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러나 기원후 9년 정치수완이 제법 좋았던 티베리우스가 갑자기 전출을 가게 되면서, 바루스가 부임했다. 바루스는 부임하자마자 군대를 정비하거나 정무를 돌보지 않은 채 군영에서 연회를 열며 놀기 바빴고, 이를 틈타 게르만족은 전쟁을 준비하여 로마군에 대항했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유명한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이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면서 아우구스투스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참패를 당한 로마 제국은 이내 라인 강 건너로 물러나고 만다.

이로써 게르마니아는 오늘날 서유럽 지역에서 유일하게 로마 제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으로 남게 되었고, 게르만족 고유의 언어 문화, 종교 등을 유지할 수 있었다. 토이거부르거 숲의 전투의 승리를 오늘날 독일 정체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1]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시각이 19세기 독일 통일 이후 민족주의를 고양하기 위해 태동한 역사관일 뿐이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근세까지 독일 지방에서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 더 거슬러 올라가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2] 따라서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19세기 민족주의의 열풍 속에서 크게 재부각된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의 정신적 근원으로 보는 시각은 충분히 존재했다. 기독교 가치관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중세 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 개념이 희박했고, 종교로서 기독교도 이교도를 구별하는 기준이 중요했기 때문에 기독교 세계의 일원이라면 언어가 다른 것에 크게 구애되지 않았다. 또한 같은 맥락에서 교황이 있는 로마를 기독교 세계의 중심지로 여겼고 매우 중시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세 시대 독일인들이 로마 제국의 후손이라고 여긴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10세기 신성 로마 제국의 성립 과정에도 이러한 측면이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 중심, 로마 중심의 세계관은 중세 시대에 한정된 세계관일 뿐이며, 그러한 중세 시대조차도 게르만이라는 민족 의식은 분명히 존재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15세기( 1485년) 국명에 '독일 민족'을 추가하여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으로 국호를 고쳤다. 근세 초기 신성 로마 황제였던 카를 5세 라틴계 국가인 스페인의 왕을 겸하고 있었던데다, 독일보다 스페인에 머물며 통치하는 기간이 더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숭고한 게르만'을 들먹거릴 정도였다.

아르미니우스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정체성의 기원으로 본 사람들은 이미 19세기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성경 독일어로 번역했던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독일 민족정신의 근원으로 여긴 사람 중의 하나였다. 아르미니우스라는 라틴어 이름을 헤르만이라는 독일식 이름으로 처음 부른 것도 루터였다. 무엇보다도 고대 시대에 벌어진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 게르만인들은 자신들이 로마인들과 다르다는 점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은 로마군에 굴복한 게르만 부족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나아가 그들은 폭압적인 식민 통치를 하던 로마인들에 대해 엄청난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게르만족은 수많은 로마군 포로들을 생포할 수 있었다. 게르만족은 포로 교환을 통해 로마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금전적 보상을 받을 수도 있었고, 또 포로들을 자신들의 노예로 부려먹거나 외국에 노예로 팔 수도 있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이나 노예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로마인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의 포로들은 잔혹하게 처형되었는데 로마인에 대한 게르만인들의 적개심을 엿볼 수 있는 일면이다. 나중에 복수를 위해 게르마니아로 재출병한 로마군이 토이토부르크 숲에 도착하여 시체들이 나무에 박혀 있는 잔혹한 장면을 보고 전의를 상실하여 복수를 포기하고 시신만 수습하고 돌아갔다.

서기 98년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저술한 유명한 게르마니아에 당시 게르만족의 특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게르만인들은 호전성과 복종심, 일부일처제, 혼전순결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타키투스가 바라보는 게르만인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고귀한 야만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로마 제국 말기인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훈족의 압박 등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이 와중에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했고, 서로마 제국 멸망 직후인 481년 클로비스 1세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세워진다.

3. 중세

독일사의 중세는 일반적으로 중세 초기(Frühmittelalter), 중세 전성기(Hochmittelalter), 중세 후기(Spätmittelalter)의 세 시기로 분류된다. 이 세 시기를 나누는 기준점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3.1. 중세 초기

3.1.1. 프랑크 왕국(481~843)

메로빙거 왕조 클로비스 1세에 의해 세워진 프랑크 왕국(481~843)은 게르만족의 최초의 국가 정치 체계였다. 프랑크 왕국은 처음에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남부, 독일 중서부 지역에서 일어나 점차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는 서부 프랑스와 남서 독일의 슈바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클로비스가 사망한 후인 531년에는 다른 게르만족 국가인 부르군트 왕국을 병합했다.

그러나 프랑크 왕국은 특유의 분할 상속제 때문에 여러차례 왕국이 분열되었다가 재결합되기를 반복했다. 이후 751년 궁재 피핀이 국왕 힐데리히 3세를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메로빙거 왕조가 끝나고 카롤링거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 카를 대제 때 활발한 영토 확장으로 프랑크 왕국은 영토를 크게 확장했다. 특히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작센, 바이에른, 롬바르디아 등이 이때 프랑크 왕국에 병합되었다. [3] 정복 사업과 문화 정책 면에서 큰 업적을 세운 카를 대제는 800년에 그동안 공석이었던 서로마 황제 자리에 대관하여 로마 제국의 명맥을 계승하였다.

3.1.2. 동프랑크 왕국(843~918)

프랑크 왕국의 분열 및 영토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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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됭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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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륌 조약
메르센 조약
리베몽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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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대제 사후 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에 의해 삼분할 되었다. 이때 루트비히가 차지한 동쪽 지역(현재의 독일 지방)이 동프랑크 왕국이 된다.[4] 훗날 프랑스로 이어지는 서프랑크에 비해 동프랑크는 카를 대제 때 새로 병합된 지역이 많았기 때문에 각 공작령들의 독립성이 강했고 이는 독일 분권주의의 기반이 된다. 동프랑크 왕국의 왕권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각 부족들의 독립성과 자치권이 강화되는 흐름이 나타났다. 카롤링거 왕조 마지막 국왕인 유아왕 루트비히가 즉위하면서 왕권이 크게 약화되어 900년경 동프랑크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작령인 작센, 프랑켄, 바이에른, 슈바벤, 로트링겐은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획득했고 이들을 동프랑크 왕국/독일 왕국의 5대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라고 한다.

911년 유아왕 루트비히 4세(재위 900~911)이 어린 나이에 후사없이 죽으면서 카롤링거 왕조의 혈통이 끊기게 되었다. 동프랑크 공작들의 회의를 거쳐 루트비히 4세의 친척인 프랑켄 공작 콘라트 1세(재위 911~918)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1세 시절 왕국 내 각 부족 공국들의 자치가 더욱 강화되었다. 한편 콘라트 1세 이래 공작들의 동의를 얻어 국왕으로 선출되는 관례는 이후 신성 로마 황제를 선출하는 관례로 이어지게 된다.

3.1.3. 오토 왕조(918~1024)

이후 콘라트 1세 역시 후사 없이 죽는데, 콘라트 1세는 죽기 전에 당대 가장 유력한 제후였던 작센 공작 하인리히 1세(재위 919~936)를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그러나 작센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견제했던 경쟁자 바이에른 공작 아르눌프와 슈바벤 공작이 하인리히의 왕위 계승에 반대했다. 결국 하인리히는 바이에른과 슈바벤의 이권과 자치권을 보장해주는 협상을 통해 공작들 모두로부터 승인을 받아 919년 국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인리히는 왕국의 결속력을 강조했으나, 아르눌프의 바이에른 공국 등은 사실상 별도의 왕국과 다름없는 자치권을 누렸다. 공작들은 자치권의 확대를 추구했지만 프랑크 왕국 시절과 달리 더이상 왕국에서 독립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19세기 근대 역사학이 성립된 이래, 한때 역사학자들은 중세 동프랑크 왕국으로부터 독일 왕국이 출현하였다고 파악하였다. 19세기 독일 중세사의 표준이었던 빌헬름 폰 기제브레히트의 '독일 황제 시대의 역사(Geschichte der deutschen Kaiserzeit)'에서 하인리히 1세를 독일 왕국 성립의 기점으로 파악한 이래로, 이는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한편으로 일부 역사가들은 콘라트 1세를 독일 왕국 성립의 기점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20세기를 지나며 역사가들은 점차 후대의 관점이 아닌 당대인들이 사료에서 사용하였던 언어를 토대로 한 당대인의 관점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독일 중세사 연구 역시 이러한 관점이 널리 확산되면서, 독일 국가가 어떤 결정적인 기점을 계기로 탄생하였다는 생각은 점차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요아힘 엘러스(Joachim Ehlers)의 '독일 왕국의 형성(Die Entstehung des deutschen Reiches, 1994)', 카를리하르트 브륄(Carlrichard Brühl)의 '두 민족의 탄생(Die Geburt zweier Völker, 2001)'과 같은 저작들을 계기로, 학계에서는 독일 민족 및 독일 왕국은 장기간에 걸쳐 형성된 개념이었고 그 형성 역시 12세기경에 이르러 구체화되었다고 보고 있다.

즉 하인리히 1세 시대까지는 동프랑크 왕국이라는 개념만이 존재했고, 오토 대제의 대관 이후에도 한동안은 로마 제국(Imperium Romanum)만이 존재했다. 독일인의 왕(Rex Teutonicum/Teutonicorum)이라는 표현은 하인리히 2세 시대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독일 왕국(Regnum Teutonicum/Teutonicorum)이라는 표현은 서임권 투쟁 시기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황제의 권력 기반을 독일에 한정시키려는 의도로 사용하면서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동프랑크 왕국이라는 말은 이후에도 사료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아 독일 왕국과 혼용되어 사용되었다. 현재의 역사학자들은 동프랑크 왕국과 독일 왕국 간의 확고한 구분은 후대의 산물이라고 보고 있다. 독일 왕국이라는 개념이 점차 실체를 얻기 시작한 것은 12세기에나 이르러서였다.

936년 하인리히 1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오토 1세가 동프랑크 왕으로 선출되었다. 오토가 왕위에 오를 당시 왕가의 권력 기반인 작센 공국의 상황은 매우 혼란하고 위험했다. 나라 안에서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나라 밖에서는 외적의 침입이 끊이지 않았다. 937년에는 오토의 이복형 탕크마르가 작센의 여러 귀족을 이끌고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켰으며, 오토는 이를 진압했다. 1차 반란 이후 2차 반란이 일어났는데, 939년 오토에게 불만이 많던 프랑켄 공작과 로렌 공작이 손을 잡고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 이때 오토는 작센 백성의 두터운 지지와 슈바벤 공작의 전폭적인 협력 덕분에 2차 반란도 평정했으며, 반란 세력을 철저히 제거하기 위해 프랑켄과 로렌을 자신의 세력 아래 두고 사위를 로렌 공작으로 봉했다.

오토 1세는 955년 레히펠트 전투에서 당시 서유럽을 위협하고 있던 마자르족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로써 크리스트교 세계의 수호자로 떠오르게 되었다. 오토 1세는 962년 교황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수여받으며 단절되었던 서로마 황제위를 계승하였고, 카를스바트 대제의 뒤를 이어 위대한 황제(대제)라 불리게 되었다. 이로부터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되었다고도 말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이 시기의 제국은 '로마 제국'이었다. '신성 제국(Sacrum Imperium)' 및 '신성 로마 제국(Sacrum Imperium Romanum)'이라는 단어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

3.2. 중세 전성기

3.2.1. 잘리어 왕조(1024~1125)

오토 왕조의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2세가 사망한 후, 프랑켄 지역을 기반으로 하고 있던 잘리어가의 콘라트 2세가 황제로 선출되었다. 콘라트 2세와 그의 아들 하인리히 3세의 시대에 황제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고, 하인리히 3세는 3명의 교황을 폐위시키기도 하였다. 결국 하인리히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4세가 3세의 어린 나이로 선출되면서, 황제의 전제적 권력 행사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대거 분출하였다. 하인리히 4세는 특히나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전면적인 도전을 받아 서임권 투쟁(Inverstiturstreit)에 휘말리면서 카노사의 굴욕을 겪기도 하였고, 말년에는 아들 하인리히 5세에게 제위를 찬탈당하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보냈다.

하인리히 5세 1122년 보름스 협약을 통해 서임권 투쟁을 종결지었다. 이를 통해 황제는 서임권을 포기하는 대신, 성직자에 대해 봉건 영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았다. 독일에서는 봉신으로서의 영주에 대한 충성 맹세가 성직 서임식보다 먼저 거행되어 성직자의 세속적 지위가 강조된 반면, 이탈리아와 부르군트에서는 성직 서임식이 먼저 진행되어 종교적 지위가 강조되었다. 이로부터 세속 권력과 종교 권력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3.2.2. 호엔슈타우펜 왕조(1138~1254)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사망하면서 잘리어가는 단절되었다. 이후 주플린부르크 왕조 로타르 3세의 통치기를 이어 1138년 슈바벤을 근거지로 한 슈타우펜 가문의 콘라트 3세가 황제로 선출되면서 슈타우펜 왕조 시대가 시작되었다. 콘라트 3세의 아들인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사촌이자 작센, 바이에른의 공작으로 큰 권세를 누리고 있던 벨프 가문 하인리히 사자공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하면서 그의 영지를 몰수하여 강한 권력을 행사하였고, 이탈리아 원정 및 십자군 참전 등 군사적으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1세의 적극적인 군사 및 외교 정책은 제후들을 굴복시키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제후들에 대한 정치적 양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바르바로사의 시기를 기점으로, 독일 제후들은 점차 영지에서의 권력을 확대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가 제3차 십자군 원정 도중 익사한 후 그의 아들 하인리히 6세는 시칠리아의 공주 콘스탄체와 결혼하면서 시칠리아 왕위를 획득했다. 1197년 하인리히가 사망한 후 그의 동생 필리프가 선출되었으나, 슈타우펜 가문의 권력 강화를 견제한 제후들과 교황의 지원하에 오토 4세가 동시에 선출되면서 제국은 분열되었다. 1208년 필리프가 암살당한 후 오토 4세는 1209년에 로마 황제로 대관하였으나, 1214년 부빈 전투에서 프랑스의 필리프 2세에게 대패한 후 1215년 하인리히 6세의 아들인 호엔슈타우펜 가문 프리드리히 2세가 독일왕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2세는 독일보다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으로서 시칠리아의 통치에 주력하였고, 독일의 통치는 아들인 하인리히에게 맡겼다. 이 과정에서 프리드리히 2세는 하인리히의 독일왕 선출을 위해 제국의 성직 제후 및 세속 제후들과 각각 교회 군주들과의 동맹(Confoederatio cum principibus ecclesiasticis, 1220), 제후들을 위한 법령(Statutum in favorem principum, 1231)을 체결하여 제국 내 제후들의 영지 내 고급 재판권, 화폐 주조권, 관세 징수권, 축성권을 포함한 레갈리아를 인정하였다. 이 칙령은 프리드리히 1세와 필리프, 오토 4세의 시대를 거치며 이미 확대되고 있었던 제후들의 영지 내 권력을 법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이를 바탕으로 영방 군주(Landesherr)로 성장한 제후들은 자신의 영지를 영방화/영토 국가화(Territorialisierung)하면서 영방 지배권(Landesherrschaft)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정치 질서는 연방주의적 형태로 발전하였다.

한편으로 프리드리히 2세는 통치 기간 내내 교황과 대립각을 세웠고, 교황에게 여러 차례 파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124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프리드리히 2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튀링겐 방백 하인리히 라스페를 대립왕으로 선출하기까지 했다. 1247년 하인리히 라스페가 사망하자 홀란트 백작 빌럼이 뒤이어 대립왕으로 선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1250년 프리드리히 2세가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콘라트 4세 역시 교황에게 파문당하였고, 1254년 콘라트 4세가 2세에 불과한 어린 아들 콘라딘을 남긴 채 사망하였다. 1256년에는 홀란트 백작 빌럼이 사망하면서 개최된 1257년의 황제 선거는 7인의 선제후 체제가 확립되기 시작한 선거이기도 한데, 여기서 잉글랜드 왕 헨리 3세의 동생 리처드와 프랑스 왕 루이 9세의 지지를 받는 카스티야 알폰소 10세가 이중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제위는 사실상 공백 상태가 되었고, 대공위시대가 이어졌다.

3.3. 중세 후기

역사학계에서는 중세 후기를 '쇠퇴' 혹은 '위기'의 시대로 보는 관점이 한동안 지배적이었다. 이는 독일사에서도 마찬가지로, 특히 중세 후기 신성 로마 제국은 중앙 권력이 해체되고 영방 군주들이 권력을 강화하는 제국의 쇠퇴기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중세 후기를 더이상 쇠퇴기로 여기지 않는다. 페터 모라브(Peter Moraw)의 '개방적 헌법에서 구조적 공고화까지(Von offener Verfassung zu gestalteter Verdichtung, 1985)'는 중세 후기를 바라보는 관점을 일신한 결정적인 저작으로, 모라브의 폭넓은 연구를 계기로 그동안 외면받던 중세 후기는 최근부터 집중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모라브는 기본적으로 중세 후기 독일사를 슈타우펜 왕조가 몰락하면서 출현한 소수의 제후들에 의해 주도되던 정치 질서인 개방적 헌법(Offene Verfassung)으로부터 중세 후기의 도전으로부터 대응하는 과정에서 제국의 구조적 공고화(Gestaltete Verdichtung)를 이룩한 시기라고 파악했다. '구조적 공고화'의 핵심은 합스부르크 왕가제국신분(Reichsstande)[5]이 각각 부상하고, 이들이 점차 서로를 의존하게 되면서 제도화된 이원 체제(institutionalisierter Dualismus)가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1495년 보름스 궁정 회의로부터 제국의회가 발전한 것은 그 결실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모라브는 중세 후기를 근대 이후 독일사의 방향을 제시한 결정적인 발전을 이룩한 시기라고 보았고, 중세 후기 독일의 대학 제도 및 세속 문화의 발전에 주목하였다.

권력 공백 기간이었던 대공위시대가 길어지면서 제국 내외에서 황제 선출에 대한 요구가 점차 강해졌고, 결국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 루돌프 1세가 독일 왕으로 선출된 후 교황에게 황제의 관을 받으면서 대공위시대는 종결되었다. 제위를 세습하려 했던 루돌프 1세의 시도는 실패하였으나,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제국 내 중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루돌프 1세의 선출 이후 중세 후기의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바이에른과 라인팔츠의 비텔스바흐 가문, 룩셈부르크와 보헤미아의 룩셈부르크 가문과 같은 대귀족 가문들이 황제위를 경쟁하였다. 루돌프 1세 이후 나사우 가문의 아돌프(재위 1291-1298), 루돌프 1세의 아들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1세(재위 1298-1308), 룩셈부르크 가문의 하인리히 7세(재위 1308-1313)의 시대를 거쳐, 1314년에는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와 합스부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미남왕이 이중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미남왕과의 권력 다툼에서 승리한 루트비히 4세는 1328년 교황의 승인을 얻지 않고 황제로 대관하였는데, 이로부터 황제 선출에 대한 교황의 권한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루트비히 4세의 뒤를 이어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가 선출되었는데, 카를 4세는 조부인 하인리히 7세 시대에 획득한 보헤미아 왕국을 기반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카를 4세 통치 시대인 1356년 제정된 금인 칙서는 대공위시대 이후부터 제도화되고 있던 7인의 선제후 및 황제 선출 관습을 명문화하였는데, 이후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그 작동 원리를 규정하는 중요한 기본법 중 하나로 기능하였다. 금인 칙서에서 선제후의 권한 및 황제 선출 절차를 법적으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이를 통해 1198년 필리프와 오토 4세 이후 계속되고 있던 이중 선출을 근절할 수 있게 되었고, 이후의 제국사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카를 4세는 1373년에는 브란덴부르크를 매입하면서 제국 동부에 브란덴부르크-라우지츠-슐레지엔-보헤미아-모라비아로 이어지는 광대한 영역을 형성하였고, 여기에 서부의 룩셈부르크 및 브라반트까지 아우르는 강력한 통치 기반을 마련하였다. 하지만 후임자인 벤첼은 무기력한 치세를 보내며 그 유산을 대부분 상실하였다. 벤첼의 뒤를 이은 라인팔츠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프레히트 황제 역시 권력 기반이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벤첼의 동생이자 루프레히트의 뒤를 이어 선출된 지기스문트 황제 시대에도 유사하였으나, 지기스문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를 상속받아 도나우 제국을 건설하여 동유럽 전역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또한 지기스문트는 1434년 콘스탄츠 공의회를 개최하여 서방교회 대분열을 수습하였다.

지기스문트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알브레히트 2세가 선출되었다가 그의 급사 이후에는 6촌 형제인 프리드리히 3세가 선출되었다. 오랜 기간 동안 프리드리히 3세의 통치 기간은 무력함으로 점철된 시대로 여겨졌다. 18세기 계몽 시대에 프리드리히 3세는 '게으름뱅이' 혹은 '잠자는 황제'라고 불렸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프리드리히 3세 시대의 사료가 대대적으로 정리되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완전히 수정되었다.[6]

프리드리히 3세의 53년에 달하는 오랜 통치 기간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한 제위 세습의 출발점이자 모라브가 표현한 '구조화된 응고'가 결실을 맺은 시기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시대에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영지들이 통합되었고, 보헤미아와 헝가리 왕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하였으며, 그의 아들 막시밀리안 1세 부르고뉴 공국의 계승권을 확보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 흥기의 기반을 닦았다. 또한 프리드리히 3세는 자신의 생전인 1486년 아들 막시밀리안을 독일 왕으로 선출함으로써 제위 세습을 확고히 하였는데, 이는 중세 후기 동안 카를 4세를 제외하고는 어느 황제도 달성한 적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3세는 정치적으로 많은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흥기하는 결정적인 기반을 마련하였다. 프리드리히 3세의 '강력한'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구조적, 제도적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었고, 이는 근대 초 제국의 발전을 예비하는 것이었다.[7]

4. 근대 초기

4.1. 막시밀리안 1세와 제국개혁(1495~1519)

1493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막시밀리안 1세는 독일사에서 중세와 근대의 과도기에 위치한 황제로 평가된다. 막시밀리안 1세는 우선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 저지대 지방을 획득한데 이어 당시 떠오르던 에스파냐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통해 합스부르크 가문의 흥기 기반을 닦았다. 또한 1508년 최초로 교황의 대관 없이 대관식을 치른 황제가 되어 중세 후기부터 이어져 오던 세속권력의 종교권력에 대한 우위를 확실시하였다.

막시밀리안 1세 치세의 무엇보다도 중요한 업적은 1495년 실시한 제국개혁(Reichsreform)이었다. 1495년 보름스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막시밀리안 1세는 제국 내 사적인 무력 행사인 '페데(Fehde)'를 영구적으로 금지한 영구 평화령(Ewiger Landfriede)의 선포, 제국대법원(Reichskammergericht)의 설치, 제국 차원의 일반세인 일반 페니히(Gemeiner Pfennig)의 도입과 같은 제국의 체제 정비를 위한 개혁령을 선포하였다. 1495년의 보름스 제국의회는 '제국의회(Reichstag)'라는 말이 최초로 사용된 회의로, 여기서 광범위한 제국개혁 조치가 실시됨으로써 중세의 궁정 회의(Hoftag)가 그 기능 및 법적 지위가 크게 확대된 제국의회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제국개혁은 1498년 또다른 최고 법원인 제국추밀원(Reichshofrat)의 설치, 1500년 통일된 중앙 정부인 제국정부(Reichsregiment) 및 제국을 10개의 지역구로 나눈 제국관구(Reichskreis)의 설치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코 의식적으로 통일된 중앙 집권 국가 혹은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를 형성하려는 시도가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제후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독일의 자유(deutsche Freiheit)라고 하면서 이를 황제의 전제로부터 보장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 자신조차도 자신의 특권을 포기하고 제국 차원에서 통합된 중앙 정부를 형성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제국정부는 기본적으로 제국 내 신분 대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기에, 황제는 제국정부가 자신의 권력을 침해한다고 여겼다. 제국정부는 1502년 막시밀리안 1세가 폐지한 이후 카를 5세 시대에 잠깐 부활하였으나, 역시 황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얼마 안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개혁은 1806년 나폴레옹에 의해 제국이 해체되기까지 근 300년 동안 제국이 유지되는 근간을 마련하였고, 중세 제국과 구제국(Altes Reich)[8]을 나누는 분기점으로 평가받는다. 제국의회, 제국관구, 제국대법원, 제국추밀원과 같은 이 시기에 설치된 제도들은 이후 제국의 헌정 질서를 유지하는 근간이 되었고, 널리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현재는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그 기능을 유지하며 제국이 존속하는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받는다.

4.2. 종교개혁과 교파 시대(1517~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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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기존 교회의 타락을 비판한 마르틴 루터 95개조 반박문 발표와 함께 시작된 종교개혁은 근대 초기 독일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종교개혁의 확산에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에 의한 금속 활자 및 인쇄기 발명이 촉진한 '매체 혁명'의 영향이 지대했다. 루터는 성경의 가르침 그 자체에 충실할 것을 요구하면서 라틴어로만 읽을 수 있었던 성경을 구어체 독일어로 번역하였는데, 이 '루터 성경(Lutherbibel)'이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된 것이 종교개혁의 확산에 결정적이었다.

종교개혁의 근원지이자 가톨릭 세계를 보호하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하에 놓인 독일은 구교와 신교 간 갈등이 매우 격렬하게 분출되었다. 1519년 막시밀리안 1세의 사망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카를 5세는 매우 독실한 가톨릭교도로 유럽 내에서 종교개혁의 확산을 막고자 하였으나, 결국 독일에서는 토마스 뮌처가 이끄는 독일 농민전쟁과 구교 제후 및 신교 제후 간의 전쟁인 슈말칼덴 전쟁과 같은 일련의 전쟁들이 벌어졌다.

카를 5세는 막시밀리안 1세에게 상속받은 영지를 바탕으로 세계 제국을 이룩하였으나, 독일에서는 종교개혁 이후 그 권위가 지속적으로 추락하였다. 결국 1555년 카를 5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의 주도하에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체결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파가 공인되었고, 군주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칼뱅파를 배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 국가에서는 가톨릭, 루터파, 칼뱅파의 3대 교파 교회가 세속 권력과 결합하기 시작했다. 신교 제후들은 교황 및 교회 조직 자체를 공격한 루터의 교리를 바탕으로 교회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가톨릭 제후들 역시 가톨릭교회가 신교 교회와 경쟁하기 위해서는 제후들의 지원이 필수적이었기에 교회에 대한 군주의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그러면서 각 영방은 각 교파의 교리에 기초하여 영토 내 질서를 유지하고 신민의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사회적 규율화(Sozialdisziplinierung)를 강화하고자 했는데, 이를 교파화(Konfessionalisierung)라고 한다.[9] 이를 바탕으로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1618년 30년 전쟁이 발발하기 까지 독일을 '교파 시대(Konfessionelle Zeit)'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편으로 가톨릭은 유럽 차원의 종교개혁에 대항하여 트리엔트 공의회를 개최하여 가톨릭 종교개혁을 실시하였다. 가톨릭 종교개혁은 한때 '반종교개혁(Gegenreformation)'이라고 불렸고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30년 전쟁 발발 이전까지의 시기를 '반종교개혁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레오폴트 폰 랑케로 부터 기원하는 이러한 관점은 지나치게 신교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현재는 교파 시대 개념으로 대체되고 있다.

교파 시대 초기의 황제 막시밀리안 2세의 종교 정책은 비교적 관대하였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루돌프 2세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 있는 자신의 거주지에서 점점 현실을 외면하면서 신비주의에 심취하였고, 루돌프 2세의 긴 치세 동안 구교와 신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결국 1608년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주도하에 작센 선제후국,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과 같은 신교도 세속 제후들은 프로테스탄트 연합(Protestantische Union)을 결성하였고, 이에 대항하여 1609년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의 주도하에 마인츠, 트리어, 쾰른과 같은 성직 선제후들은 가톨릭 리그(Katholische Liga)를 결성하였다.

4.3. 30년 전쟁(1618~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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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2세의 후계자 마티아스는 개신교와 타협을 모색했던 총리 멜히오르 클레슬에게 국정을 맡겼다. 한편으로 합스부르크의 세습 지역 내에서 특히 신교세가 강했던 보헤미아 지역에서는 가톨릭 종교개혁 및 교파화 시도가 강화되면서 양자 간의 대립이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1618년에 보헤미아의 신교 귀족들이 황제가 파견한 두 명의 제국 의원을 창 밖으로 내던지는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이 벌어졌고, 이와 함께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후 독일을 30년 간의 전화로 몰아넣는 30년 전쟁이 발발했다.

보헤미아 반란 이후 얼마 안 있어 마티아스 황제가 사망하자 1619년 신교 연합의 지도자 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포되었다. 새로운 황제 페르디난트 2세는 가톨릭 리그의 군대와 함께 보헤미아로 진격하였고, 보헤미아군은 1620년 백산 전투에서 패배했다.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망명하였고,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 백작은 프리드리히 5세가 지배하던 라인팔츠 및 오버팔츠 지방을 점령했으며,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는 팔츠의 선제후 자리를 빼앗았다.

이렇게 30년 전쟁의 첫 번째 국면인 보헤미아-팔츠 전쟁은 가톨릭 및 합스부르크 진영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1625년 신교도인 덴마크 국왕 크리스티안 4세가 홀슈타인 공작 자격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부 독일을 침공했다. 그러나 그는 틸리 휘하의 제국군과 보헤미아의 귀족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패배하였고, 가톨릭 세력은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와 메클렌부르크를 점령하였다. 이후 페르디난트 2세는 발렌슈타인의 권력 강화를 우려하여 1630년 레겐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발렌슈타인을 해임하였다.

황제군은 보헤미아-팔츠 전쟁과 덴마크 전쟁을 연이어 승리로 끝냈지만, 163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참전하면서 최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구스타브 아돌프가 이끄는 스웨덴군은 독일 남부까지 멀리 침투하였고, 틸리 백작이 전사하는 위기 속에서 황제는 발렌슈타인을 복권하였다. 1632년 뤼첸 전투에서 구스타브 아돌프가 전사하고 1634년 발렌슈타인이 암살당하는 일련의 사건을 거친 후, 황제군은 1634년 뇌르틀링엔 전투에서 신교도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황제의 권력을 크게 확장하는 내용을 포함한 1635년 프라하 화약을 통해 전쟁은 종결되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을 견제하고자 한 가톨릭 프랑스가 신교 측에 합류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다시 급변하였다. 이후 전쟁은 프랑스-스웨덴 동맹과 에스파냐-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간의 패권 대결 양상으로 흘러갔고,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교착 상태로 접어들었다. 1637년 선출된 새 황제 페르디난트 3세는 1642년부터 평화 협상을 위해 노력하였고, 서부 독일 베스트팔렌 지역의 뮌스터에서 프랑스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스웨덴과 평화 협상이 진행되었다. 결국 1648년 10월 24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로 칼뱅파가 공인되었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신성 로마 제국으로부터 분리되었다. 종교개혁 시기를 거치며 땅에 떨어졌던 황제의 지위는 제국의회의 주권과 권한을 인정함으로써 재차 강화될 수 있었다. 황제의 권력은 프라하 화약 당시에 비해 제한되었지만 1663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영구 기관으로 정착된 '영구 제국 의회(Immerwährender Reichstag)'를 기반으로 성직 제후 및 군소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제국 정치에서 적극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또한 Cuius regio, eius religio의 원칙이 폐기되고 교파의 자유는 완전히 보장되었다.

한편 베스트팔렌 조약의 또다른 결과로 언급되는 주권 국가의 시대, 즉 '베스트팔렌 체제'의 등장은 현재에 와서는 많은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영방들은 베스트팔렌 조약 이후에도 근대적인 의미의 주권을 완전히 확보하지 못했다. 제국 내 많은 구성국들은 자신의 보호를 보장할 수 있는 제국의 유지에 적극적이었고, 제국의 주요 기능은 제국 내 구성국을 외부(주로 프랑스) 혹은 내부(브란덴부르크, 작센, 바이에른 등)로부터 보호하는 데 있었다. 또한 베스트팔렌 조약의 결과 영방 제후들은 다른 국가와 동맹을 맺을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긴 하였으나, 애초에 이는 그동안 관례적으로 정착되고 있던 것을 명문화한 것이었다. 또한 영방 제후들의 외교권은 제국 전체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만 가능했고, 프리드리히 대왕 이후의 프로이센 정도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영방은 이 제한 속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30년 전쟁은 그야말로 독일사의 대재앙이었다. 제국의 많은 부분은 황폐화되었고, 전쟁 전 1,600만에 이르렀던 독일 지역의 인구는 1/3이 줄어들어 한 세기가 지난 1750년경에야 전쟁 이전의 인구를 회복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전체 인구의 10% 가량이 사망했던 것과 비교했을 때 30년 전쟁은 독일사에서 가장 막대한 피해를 초래한 전쟁이었다.

4.4. 바로크와 계몽 시대(1648~1789)

현재의 역사가들은 1648년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이 유명무실한 체제에 불과하였다는 종래의 통념을 부정하고 있다. 1990년대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의 1648년에서 1806년까지의 제국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기념비적인 저작인 '구제국(Das alte Reich)’ 3부작이 출간된 이후, 학계에서는 1648년 이후에도 제국이 정치 질서의 발전을 이루어 가고 있었다는 데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게오르크 슈미트와 같은 역사가는 상보적 제국-국가(Komplementärer Reichs-Staat)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근대 초 신성 로마 제국의 근대성을 강조하고자 했는데, 이는 제국과 제후국의 관계가 서로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제후국은 제국의 보호를 받고 제국은 제후국을 통해 국내의 자원 동원에 필요한 행정적 지원을 받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였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이러한 역사가들은 근대 초 독일에서 나타나는 초기적인 형태의 민족 의식에 주목하면서 근대 초 제국을 독일 국민 국가의 원형으로 바라보고자 한다.[10][11][12]

30년 전쟁 이후 레오폴트 1세의 긴 치세 동안 제국은 오스만 제국의 위협과 루이 14세 치하의 프랑스의 확장이라는 두 가지 위협에 직면했다.[13] 레오폴트 1세는 우선 1683년 제2차 빈 포위를 일부 독일 제후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의 지원으로 격퇴해내면서 오스만 제국을 물리쳤고, 루이 14세의 팽창 정책에 대해서는 1688년에서 1697년까지의 9년 전쟁으로 대응하였다. 레오폴트 1세는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 내부에서는 성직 제후와 군소 영방의 지지를 바탕으로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봉건적 위계 질서를 복원하였다. 레오폴트 1세의 후계자인 요제프 1세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을 겪으면서 밀라노 공국 스페인령 네덜란드를 병합하였고, 합스부르크 제국은 레오폴트 1세와 요제프 1세 시기를 거치며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금 열강으로 떠올랐다.

한편으로 30년 전쟁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영방 국가들은 30년 전쟁의 파괴와 인구 손실에 대응하기 위해 중앙의 권력을 강화하고 통제된 경제 및 사회 정책을 추진하고자 했다. 특히 브란덴부르크, 바이에른, 작센과 같은 대형 제후국들은 재정권과 군사력을 장악하면서 국가 권력을 확대하고 초기적인 형태의 근대 국가 체제를 수립하고자 하였는데, 이러한 발전에 있어 근대 초기 유럽의 전쟁이 핵심적으로 기능하였다. 군사 혁명으로 대표되는 군사적 혁신과 근대 초기 유럽에서 빈번하였던 종교 전쟁 및 계승 전쟁들은 유럽 각국의 정부에 막대한 재정 지출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근대 초 유럽 국가들은 조세 권한의 독점을 통한 재정의 일원화와 군사력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독점을 달성하면서 국가 자체가 효율적인 전쟁 기구로 거듭났다.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 확보를 위해서 군주는 영방신분/영방등족(Landstände)[14]에 의해 대표되는 영방 의회(Landtag), 즉 신분제 의회와의 관계를 재정립해야 했다. 중세 말 근대 초 유럽의 신분제 의회는 군주의 세금 징수에 대한 동의를 의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근대 초기 유럽 각국에서는 군주와 신분제 의회가 타협하는 영국식, 군주가 신분제 의회의 묵인하에 세금을 직접 징수하는 대륙식의 두 유형이 나타났다.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는 이러한 과정이 각국마다 다르게 전개되었다. 작센 선제후국 뷔르템베르크, 메클렌부르크 같은 곳에서는 신분제 의회의 권력이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하기까지 유지되었다. 군주가 영국의 통치에 점차 집중하였던 하노버 선제후국은 전체 영방 의회가 소집되지는 않았지만 각 지방의 신분제 의회가 그 권한을 계속 유지하였다. 한편으로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선제후국과 바이에른 선제후국, 헤센의 공국들은 17세기에 이르러 군주권이 강화되면서 전체 영방 의회는 점차 소집되지 않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세기까지도 신분제 의회의 권력은 유지되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의 시대를 거치며 군주가 조세 권한 및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어떠한 방식으로든 제국 내 주요 영방 국가들은 국가가 조세를 통해 재정을 충당하는 근대적인 조세 국가(Steuerstaat) 및 상비군을 보유하는 무장 제국신분(Armierter Reichsstand)으로의 발전을 가속화했다.

특히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대륙식의 초기 근대 국가 형성 과정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케이스였다. 30년 전쟁 중인 1640년 즉위한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융커 계급에게 광범위한 특권을 보장하는 대가로 30년 전쟁 기간 동안 전쟁 수행을 위해 도입된 관료 기구들을 상설 관료제로 발전시켜 나갔고, 상비군 역시 도입했다. 이로써 대선제후는 조세 권한과 군사력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또한 1661년 동프로이센의 신분제 의회가 소비세 도입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군사력을 동원해 이를 진압하면서 이들의 충성 역시 확보하였다. 이후 대선제후의 아들 프리드리히 1세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황제를 지지하는 대가로 1701년에 프로이센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인 '군인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적극적인 군국주의 정책을 통해 프로이센 군대를 크게 성장시켜 유럽의 군사 강국으로 거듭나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유산을 계승받은 프리드리히 대왕 1740년 카를 6세의 사망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계 후사가 단절된 것을 노려 마리아 테레지아의 계승을 문제삼으며 슐레지엔을 침공하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을 거치며 슐레지엔을 완전히 병합하고 폴란드 분할을 통해 크게 영토를 확장하면서 프로이센의 독일 내 지위를 오스트리아에 버금가는 양강의 위치로 끌어올렸다.[15]

이러한 영방 단위의 국가 형성을 예전에는 '절대주의(Absolutismus)'의 발전이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현재는 절대주의 군주들의 권력이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해 '재정 군사 국가(Fiscal-Military State)'와 같은 대안적 개념들이 사용되고 있다. 대선제후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군주는 기존의 엘리트인 귀족 계급과 타협을 바탕으로 국가 권력을 확대할 수 있었고, 통치에 있어서도 이들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절대주의 시대라는 표현은 거의 사장된 상황이며, 30년 전쟁에서 18세기 후반부까지의 독일사는 18세기를 기점으로 바로크 시대 혹은 계몽 시대와 같은 표현으로 지칭하고 있다.

5. 19세기

5.1. 나폴레옹 전쟁과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1789~1815)

근대 독일 및 독일 민족주의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19세기, 특히 나폴레옹에 의한 신성 로마 제국의 해체 및 나폴레옹에 대한 저항 과정에서 나타났다고 여겨진다. 전후 독일을 대표하는 대역사가 토마스 니퍼다이는 자신의 19세기 독일사 3부작의 첫권 문장을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Am Anfang war Napoleon)라는 문장으로 시작함으로써 이를 명료하게 표현하였다.[16]

프랑스 혁명은 초기에 독일에서도 열렬히 환영받았으나, 프랑스 혁명이 급진화하면서 이에 대한 거부감 역시 확산되었다. 하지만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연합군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고, 프랑스의 지배자로 대두한 나폴레옹은 점차 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은 우선 1801년 뤼네빌 조약을 통해 라인강 좌안 전체 지역을 프랑스에 합병하였고, 1803년에는 주교령을 폐지하는 세속화(Säkularisation)와 군소 영방을 통폐합하는 중재(Mediatisierung)를 골자로 하는 제국대표단 주요결의안(Reichsdeputationshauptschluss)을 선포하여 300여 개에 달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을 재편하였다. 이 과정에서 크게 이득을 본 것이 뷔르템베르크 바덴이었고, 프로이센과 바이에른도 크게 영토를 넓혔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프랑스의 황제가 된 직후 황제 프란츠 2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모든 영지를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모아 오스트리아 제국을 세웠는데, 이는 이 즈음에 이르러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가 유명무실한 지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격파하였고, 1806년 라인 동맹을 설립한 후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하고 베를린에 입성했다. 결국 1806년 프란츠 2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해체함으로서 제국은 종언을 고했다. 나폴레옹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라인 동맹에선 프랑스를 모델로 한 개혁이 실시되었다. 반면 프로이센은 틸지트 조약에서 엘베강 서쪽의 모든 영토와 폴란드 분할로 얻은 대부분의 영토를 잃었고 국토가 거의 절반으로 축소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굴욕은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국가적, 민족적 대각성 및 개혁을 촉구하였고, 슈타인 남작과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국가 개혁에 돌입하였다. 초기에는 슈타인이, 나폴레옹에 의해 슈타인이 축출된 후에는 하르덴베르크가 주도한 프로이센의 개혁은 행정 개혁과 재정 개혁, 조세 개혁, 농지 개혁 및 길드 특권 철폐와 같은 광범위한 분야에서 개혁을 실시하였다. 또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가 주도한 군대 개혁과 빌헬름 폰 훔볼트가 주도한 교육 개혁 역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특히나 훔볼트의 교육 개혁은 '연구와 교육의 통합'이라는 근대적인 대학 체제의 모델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19세기 독일의 학술적 부흥을 예비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러한 전면적인 개혁을 통해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을 격퇴하고 더 나아가 이후에 열강으로 부상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1813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후 시작된 독일의 해방전쟁(Befreiungskrieg)은 독일의 민족 감정을 매우 고취시켰고, 독일 민족주의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독일의 해방전쟁은 1812년 12월 30일 프로이센의 장군 루트비히 요르크 폰 바텐부르크 백작이 몇 주 동안 머뭇거리던 왕의 명령 없이 러시아와 타우로겐 협약을 체결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렇게 재결성된 프로이센-러시아 동맹은 1813년 2월 말에 공식화되었고, 이는 최후의 대프랑스 전쟁으로 이어졌다. 오스트리아는 1813년 8월에야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참전했지만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결정적 패배에 기여하였고, 이후 라인 동맹이 해체되면서 독일은 해방되었다.

5.2. 독일 연방의 성립과 3월 전기(1815~1848)

빈 회의의 목표는 기본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의 복고에 있었으나,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일으킨 변화는 너무나도 강렬하였기에 완전한 복고는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유럽 열강은 구체제와 혁명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고자 했다. 빈 회의 결과 새로운 체제인 독일 연방이 출범하였는데, 이는 연방 국가가 아니라 41개의 주권 국가로 구성된 국가 연합이었다. 유일한 공통 기관으로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열리는 상설 사절 의회인 연방의회(Bundestag)가 존재했다. 독일 연방에는 하노버 왕국 영국, 룩셈부르크 대공국 네덜란드, 홀슈타인의 덴마크 같은 외국 군주들도 포함되었던 반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통치자들은 연방 외부 지역도 통치하고 있었다.

빈 회의 결의안의 복고적 성격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주도한 신성 동맹에서 특히 분명히 드러났다. 독일 내에서는 전쟁 이후 유럽의 5대 열강으로 자리매김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이러한 복고 정책을 주도하였고, 빈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의 수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는 이러한 복고 체제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나폴레옹 시기 확산된 자유주의 이념에 경도된 학생들은 이러한 복고 정책에 반발하였다. 학생 형제회인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가 주도한 자유주의 운동은 1817년바르트부르크 축제(Bartburgfest)를 통해 대대적으로 표출되었다. 종교개혁 300주년과 라이프치히 전투 4주년을 기념해 루터가 거주하던 튀링겐 지역의 바르트부르크 성 인근의 언덕에서 개최된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자유주의적 학생들은 통일 국가의 수립과 헌법적 자유를 요구하는 공공 시위을 벌였다. 상대적으로 프랑스의 영향이 강했고 자유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바이에른[17], 바덴, 뷔르템베르크, 헤센-다름슈타트 등 남부 독일에서는 자유주의적인 입헌 운동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군주에 의한 흠정 성문 헌법의 도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819년 부르셴샤프트와 대립각을 새우던 보수주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폰 코체부가 신학 대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에게 암살당하면서 정국은 급속도로 경직되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카를스바트 결의(Karlsbader Beschlüsse)의 선포를 주도하면서 자유주의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카를스바트 결의에는 부르셴샤프트의 금지, 반국가 교육에 대한 대학의 감시, 인쇄물에 대한 광범위한 검열 및 독일 연방 내 "제멋대로이거나 혁명적인 회원국"에 대한 집행 권한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었다.

빈 체제 성립 및 카를스바트 결의 이후 독일인들의 일상생활은 예술과 문학에 심취하는 탈정치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고, 문화사적으로 1815년부터 1830년 혹은 1848년까지를 비더마이어(Biedermaier) 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기 시민 계급은 가정과 가족을 중시하고 정치적 저항보다는 체제 순응적인 경향을 보였다. 한편으로 청년 독일파(Junges Deutschland)라고 하는 저항적인 운동 역시 전개되었다.

이러한 반동적 경향은 1830년 프랑스의 7월 혁명이 유럽 ​​전역에 반향을 일으키면서 점차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역시 이 시기부터 3월 전기(Vormärz, 포어메르츠)로 불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접어들게 되었고, 1832년함바흐 축제(Hambacher Fest)에서 다시 한번 자유와 화합에 대한 대중적 열망이 붙타올라 검은색, 붉은색, 금색 깃발 아래 통일된 민주적이고 공화적인 독일에 대한 요구가 이어졌다. 작센, 헤센-카셀, 하노버 등에서도 성문 헌법이 선포되었다.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의 저항 역시 대두하여 1837년 하노버 왕국에서는 국왕의 헌법 개악에 대한 반발로 괴팅엔 대학교의 일곱 교수[18]가 항의 서한을 발표한 괴팅엔 7교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민 계급의 정치적 요구에 더하여 3월 전기의 독일 연방은 사회 경제적으로도 불안을 겪기 시작하였다. 1815년에서 1848년 사이에 독일 연방은 전체 인구가 2,200만 명에서 3,500만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으나 농업 생산의 증가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맬서스 트랩에 봉착하였고, 이는 극심한 빈곤(Pauperismus) 문제를 초래하였다. 1845년부터는 감자 마름병이 확산되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섬유 공업이 발달하였던 슐레지엔에서는 직조공들이 대대적인 폭동을 일으켰다.

5.3. 1848/1849 혁명(1848~1849)

1840년대의 전 유럽적인 사회 경제적 위기 속에서 발발한 1848년 프랑스의 2월 혁명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독일 연방에서는 먼저 빈에서 혁명이 일어나 3월 13일 메테르니히가 사임하였다. 베를린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군대와 시위대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시위대에 굴복하였다. 1848년의 혁명적 움직임은 이윽고 독일을 넘어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윽고 3월 31일 독일 전역에서 온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 500명이 프랑크푸르트에서 예비 의회를 구성하였고, 곧 독일 전체 의회인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Frankfurter Nationalversammlung)가 선출되었다. 국민의회는 통합된 독일 연방국가를 위한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고, 이미 1848년 6월에 임시 중앙 기관인 임시 정부가 설립되었다. 국민의회는 또한 제국법을 제정하고 최초의 통일 독일 함대를 건설하고자 했다.

통일된 독일 연방국가는 원래 독일 연방의 영토에 동프로이센과 슐레스비히까지 포함될 예정이었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의 많은 부분이 연방 영토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대독일주의적 통일을 의미하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에게 널리 환영받은 이러한 통일 방안은 1848년 가을부터 군주국들이 점차 권력을 회복하기 시작하면서 불투명해지기 시작했고, 1849년 3월에 이르러 오스트리아가 통일된 독일 연방국가에 가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주의 해법이 대안으로 여겨지기 시작했고, 1849년 4월 3일 국민의회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하였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왕관을 '돼지의 왕관'이라 부르며 거부하였고, 다른 제후들과 마찬가지로 프로이센 국민의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자격을 불법화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중 일부는 저항을 계속하였으나 입헌 운동과 관련된 드레스덴, 라인팔츠, 바덴에서의 5월 봉기는 진압되었다. 마지막 혁명가들은 7월 23일 라슈타트 요새에서 항복했다.

결과적으로 독일의 1848/49년 혁명은 실패로 끝났으나 이는 이후의 독일사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각국에서는 1848/49년의 실패한 혁명을 수용하기 위한 양보가 이루어졌다. 프로이센을 포함한 모든 가맹국에서는 헌법이 선포되었고, 혁명 이후 수립된 반동 체제 역시 1848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저항에 직면하였다. 1849년 3월 28일에 잠시 발효된 파울교회 헌법은 1919년 바이마르 헌법과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영향을 미쳤다. 근본적으로 혁명은 독일 의회와 정당의 역사에 중요한 전통을 남겼고, 정치 참여 범위를 확대시키고 대중의 정치화를 더욱 진전시켰다.

1848/49년 독일 혁명의 실패 및 독일 자유주의의 패배가 군국주의와 나치즘이라는 파국으로 대표되는 독일의 부정적인 존더베크(Sonderweg, 특수한 길)로 이어졌는지는 이후 역사가들에게 큰 논쟁거리가 되었다. 원래 존더베크 개념은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에게 강력한 독일 제국을 예찬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개념이었다. 하지만 나치 독재와 2차 세계 대전 이후 1960~1970년대 서독의 한스 울리히 벨러와 같은 비판적인 사회사가들은 이를 부정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즉 나치 독재와 같은 독일사의 파국은 1848년 혁명의 실패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달리 부르주아 혁명을 겪지 않은 독일만의 부정적인 '존더베크'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는 것이 이러한 주장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존더베크 개념은 1980년대 이후 독일 국내에서는 토마스 니퍼다이에 의해, 국외에서는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으로 대표되는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의 비판에 처하면서 근본적인 재검토에 직면하였다. 이후 독일 시민 계급에 대한 심층적인 비교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독일의 시민 계급이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고 나약했으며 체제에 순응하면서 '봉건화'하였다는 사회사가들의 주장은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현재 역사가들은 독일의 시민 계급이 영국과 프랑스와 계급적으로 크게 이질적이지 않았고, 충분히 '근대적'이었다고 보고 있다. 독일 자유주의의 상대적 약세는 독일 시민 계급이 서구의 시민 계급과 다르게 봉건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독일의 고유한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서 형성된 정치, 사회적 여건이 그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독일만의 고유한 특수성을 강조하기 보다는 각국마다의 특수성과 유럽사, 세계사적 보편성을 교차하며 독일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5.4. 산업화 독일 통일(1849~1871)

3월 혁명 이후 독일 제국 성립 이전까지의 독일은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독일 통일을 둘러싸고 프로이센과의 오스트리아의 경쟁이 격화되던 시기였다. 독일사에서는 이 시기를 건국 시대(Gründerzeit)라고 하기도 한다.

5.4.1. 반동시대

1848/49 혁명의 실패 이후 프로이센은 작센과 하노버를 끌어들여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적 연합인 에어푸르트 연합을 결성하면서 독일 통합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려 하였다. 이에 오스트리아는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독일 연방을 복구하고자 하였고, 결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압박으로 프로이센은 1850년 올뮈츠 협약을 통해 오스트리아를 의장으로 하는 독일 연방으로 복귀했다. 1850년대 동안 독일 연방은 정치적으로 반동시대(Reaktionsära)가 계속되는 한편, 경제적으로 산업화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848년 혁명의 영향력이 강력하게 남아 있던 1850년대의 반동 정책은 이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었고, 각 국가마다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등 남부 독일 국가들은 기존의 자유주의적 기조를 유지히였다.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1848년 제정되었던 헌법이 폐기되었다. 메클렌부르크와 같은 보수적인 동부 국가에서도 이러한 반동은 강화되었다.

프로이센의 경우 1850년에서 1858년까지 수상을 역임한 오토 테오도어 폰 만토이펠의 주도하에 검열과 자유주의에 대한 탄압이 유지되었지만, 그와 함께 자유주의적 요구를 수용한 부분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다. 1850년 제정된 프로이센 헌법은 1848년 혁명 당시 선포되었던 자유주의적 헌법에서 약간의 수정이 가해지긴 했지만 그 틀을 상당 부분 유지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은 하원 선거에서 재산에 따라 선거인단을 차등적으로 나눈 불평등한 삼계급 선거제(Dreiklassenwahlrecht)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프로이센 헌법과 더불어 1918년 독일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유지되면서 이후 독일 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5.4.2. 산업화

독일 산업화의 중요한 기본 전제 조건은 1834년 프로이센의 주도하에 독일 관세동맹이 설립되어 단일한 경제 지대를 구성한 것이었다. 1840년대에는 초기 산업화가 크게 진전되었는데, 이는 1835년 퓌르트 뉘른베르크를 연결하는 최초의 철도가 개설된 이래 폭발적으로 성장한 철도 시스템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도는 한편으로는 운송에 투입되는 비용을 감소시켰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철이 필요하고 철을 강철로 만드는 데에는 석탄이 필요했기에 철도 산업 자체가 석탄과 철광석의 수요를 자극하여 산업화를 촉진하는 메커니즘으로 기능했다. 또한 19세기 중반부터 성장한 은행은 산업 및 무역 자금 조달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일 내 산업화의 선봉장은 단연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베를린과 라인란트, 슐레지엔을 중심으로 공업이 크게 성장하였고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특히 석탄과 철광석이 풍부하였던 라인란트의 루르 자를란트 지역은 산업화의 핵심적인 지역이었다. 작센 왕국 역시 섬유 산업과 도자기 산업을 비롯한 경공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산업화를 주도하였고, 그 중심지였던 켐니츠는 독일의 맨체스터라 불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불균등한 산업 발전은 농촌 지역에서 공업 지대로의 대규모 이주를 촉발했고, 사회적 유동성이 크게 증가하였다. 그와 더불어 해외 이민 역시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반면 오스트리아에서는 19세기 말에도 여전히 인구의 60% 가량이 농업 인구였다. 오스트리아는 입지상으로도 석탄과 철광석 조달에 불리했고 농업 생산력 및 구매력도 현저히 낮았기에 경제적으로는 점차 쇠퇴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의 관세 동맹 가입은 프로이센의 반대에 부딪혔고, 크림 전쟁과 이탈리아 통일 전쟁 등 대외적으로도 오스트리아의 실패는 계속되었다.

5.4.3. 프로이센 헌법갈등과 비스마르크의 집권

한편 프로이센에서는 185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중병에 걸리면서 그의 동생인 빌헬름 1세가 섭정을 맡게 되면서 반동 체제가 점차 완화되기 시작했다. 빌헬름 1세는 우선 섭정 기간 동안 만토이펠을 비롯한 보수적인 내각 관료들을 전면 교체하였고, 1859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사망하고 정식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정치적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 정책을 펼쳤다. 1858년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는 신시대(Neue Ära)라고 불리는 자유주의적 노선이 이어졌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주의자들의 세력 강화로 이어졌고, 이들은 정치 개혁의 확대를 요구하면서 정부와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1860년 국방장관 알브레히트 폰 론이 제출한 군 복무 기간의 연장 및 군대 예산의 확대를 골자로 하는 군제 개혁안을 둘러싸고 프로이센 헌법갈등(Preußischer Verfassungskonflikt)이 이어졌다. 1861년 군제 개혁을 반대하는 자유주의자들은 독일 최초의 정당인 독일 진보당(Deutsche Fortschrittspartei)를 결성하자, 빌헬름 1세는 신시대 내각을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하지만 1862년 선거에서 진보당은 하원의 2/3를 차지하였고, 군제 개혁을 둘러싼 정부와 하원 간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계속되는 갈등에 지친 빌헬름 1세는 퇴위를 진지하게 고려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론은 강경 보수파로 잘 알려진 파리 대사 오토 폰 비스마르크를 수상으로 임명할 것을 권유했고, 1862년 9월 23일 비스마르크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비스마르크는 정부와 의회 간의 헌법적 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은 헌법상의 허점을 이용하여 의회의 동의 없이 군제 개혁안을 강행하였다.[19]

5.4.4. 통일전쟁과 독일 제국의 성립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내부 갈등을 외부와의 전쟁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우선 1864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덴마크에 대항한 독일 민족주의 운동이 벌어지자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독일-덴마크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전후 처리에서 처음에는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두 공국을 공동으로 관리하다, 1865년에 홀슈타인이 오스트리아령으로, 슐레스비히가 프로이센령으로 귀속되었다.

여기서 1866년 초부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 프로이센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홀슈타인 문제에서 갈등을 부추기는 정책을 펼쳤다. 결국 이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독일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 3세의 중립을 보장받은 반면, 오스트리아는 동맹 독일 국가들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 결국 전쟁 개시 7주 만에 오스트리아는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전쟁의 결과 독일 연방의 최종적 해산과 프로이센이 이끄는 북독일 연방이 결성되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은 독일사에 있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분기를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20] 뿐만 아니라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적대자였던 독일 진보당 역시 전쟁의 승리 이후 비스마르크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출현하면서 분열하였고, 진보당은 비스마르크 지지 세력은 이후 몇 년간 독일 정계를 주도하는 민족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을 결성하였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친비스마르크적인 자유주의자들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어 1866년 9월 26일 1862년 비스마르크 취임 당시의 초법적 예산안 처리에 대한 사후 승인법 혹은 면책조항(Indemitätgesetz)이 통과되었고, 프로이센 헌법갈등은 종식되었다.

북독일 연방은 정치 구조를 비롯한 많은 면에서 이후의 독일 제국으로 계승되었다. 프로이센의 우위가 보장된 상원 연방참사원(Bundesrat), 프로이센 수상과 외무장관을 겸하는 수상 비스마르크, 입법 및 국가 예산에 관한 의사 결정 기관인 하원 제국의회(Reichstag)로 구성된 정치 체제는 독일 제국과 동일했다. 또한 북독일 연방의 의회 선거에서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25세 이상 성인 남성의 보통 선거제를 도입하였는데, 이는 향후 독일 제국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이제 독일 통일의 마지막 걸림돌은 나폴레옹 3세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 제국이였다. 북독일 연방과 프랑스는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중립을 취하는 대가로 프랑스가 요구하였던 룩셈부르크 문제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다. 스페인의 차기 왕위 계승자로 호엔촐레른 가문의 레오폴트 폰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이 지명된 것은 갈등을 격화시켰다. 여기서 비스마르크는 1870년 엠스 전보 사건을 통해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촉발했다. 이렇게 벌어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독일-프랑스 전쟁)은 스당 전투에서 나폴레옹 3세가 포로로 잡히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고 마침내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하여 1871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남독일 국가인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다름슈타트를 포함한 독일 제국 황제로 즉위함으로써 독일 제국이 건국되었다. 그와 더불어 프랑스는 프랑크푸르트 조약에서 알자스-로렌의 할양과 함께 50억 프랑의 전쟁 배상금도 받아들여야 했다. 독일 제국 성립 당시 프로이센과 더불어 규모 있는 제후국이었던 작센,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와 자유도시 함부르크, 브레멘, 뤼베크에 대해서는 유보권(Reservatrechte)이라는 이름의 특혜가 주어졌는데, 이들은 주류세와 우편 및 철도 부문에서 자율성을 보장받았다.

5.5. 독일 제국(1871~1918)

5.5.1. 비스마르크 시대(1871~1890)

독일 제국의 정당 정치는 1848/49 혁명 이후 형성된 보수주의, 우파 자유주의, 좌파 자유주의, 가톨릭주의, 사회주의의 5당 체제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19세기에 조직적인 방식으로 처음 등장한 자유주의자들은 평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 사회, 즉 자유주의 헌법을 가진 국민 국가의 민족적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이후 대두한 우파 자유주의의 민족자유당은 프로이센 군대를 위한 예산 편성에서 비스마르크의 반의회적 노선에 대한 태도를 지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진보당과 구별되었고, 기존의 진보당은 좌파 자유주의 정당을 형성했다. 보수당은 군주, 정부, 농촌 지주, 교회, 군대, 귀족의 특권을 새로운 헌법 질서에 따라 옹호했다.

한편 페르디난트 라살이 독일 노동자 협회(ADAV)를 설립한 이래로 늘어나고 있던 산업 노동자들의 이해 관계는 보통 선거의 시행과 국가 제도 구조 내의 권력 증대를 통한 생활, 노동 및 임금 조건의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후 ADAV는 1875년 고타 통일당 대회에서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아우구스트 베벨이 이끄는 사회 민주 노동자당(SDAP)와 통합하면서 사회주의 노동자당(SAP)이 탄생하였고, 이를 통해 사회주의는 응집력 있고 성장하는 정치 운동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가톨릭 대중 정당인 중앙당의 존재는 개신교도가 주류를 차지하며 부분적으로는 세속적인 독일 제국 사회에서 소수 입장의 가톨릭 신자를 대표하는 데서 그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비스마르크 시대의 정치는 황제 빌헬름 1세에 의해 보장되고 있던 비스마르크 개인의 입지 및 정치적 카리스마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무엇보다도 제국의 내적 통합에 주력하면서 법률과 행정, 경제 정책의 표준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문화투쟁(Kulturkampf)으로 알려진 가톨릭 교회 탄압 정책을 통해 비스마르크는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냈다. 1870년대 초중반 동안 민족자유당은 제국의회 내에서 일종의 여당과 같은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이어지면서 비스마르크는 보호 관세 도입을 비롯한 좀 더 보수적인 경제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은 민족자유당을 분열시켜 그 세력이 약화되었고, 이후 비스마르크의 지지층은 보수 정당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1878년 빌헬름 1세의 암살 미수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자 비스마르크는 이를 체제의 위협으로 여겨졌던 사회주의자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사회주의자법(Sozialistengesetz)을 제정하기 위해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실시하였다. 이어진 선거에서는 비스마르크 지지 세력이 승리하면서 이후 1890년까지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탄압받았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탄압과 동시에 노동자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건강 보험(1883), 사고 보험(1884), 연금 보험(1889)을 포함한 사회 입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세계 최초의 사회보험이 되었다.

하지만 가톨릭교도와 사회주의자 등 제국 내 소수자 그룹을 제국의 적(Reichsfeinde)으로 규정하고 탄압한 비스마르크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탄압 대상이었던 가톨릭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을 정치적으로 단결시켰고, 오히려 이들이 광범위한 지지층의 대중 동원에 성공하면서 고도로 정치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실제로 문화투쟁 이후 중앙당은 제국의회의 의석 수 1/3을 고정적으로 점유하는 주요 정치 세력으로 떠올랐다. 사회민주당의 경우 빌헬름 시대에 접어들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912년에는 제국의회 원내 1당으로 떠올랐다. 이는 또한 비스마르크 자신이 도입한 보통 선거제가 촉발한 대중 정치의 성장과 맞물리고 있었다. 보통 선거제의 도입이 농민 계급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보수 세력을 위한 것이었음을 고려해 보면, 비스마르크의 국내 정치는 그가 의도했던 구도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한편 1873년 이후 지속되었던 전유럽적인 경제적 불황은 사회적으로 이익 집단의 정치적 영향력 증가 및 이들을 중심으로 한 소수자 집단에 대한 사회적 배제 움직임으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사회주의 및 가톨릭에 대한 적대감 뿐만 아니라 반유대주의 경향도 포함되어 우익 세력들은 반유대주의 정당을 결성하고 반유대 청원서를 작성하는 등 정치화하기 시작하였다. 일반적으로 독일의 반유대주의 경향은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온건한 편이었으나, 반유대주의 세력이 정당과 같은 형태로 정치화하는 현상은 독일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외교적 측면에서 비스마르크는 1875년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독일에 맞서 공조한 전쟁 위기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의 방어 동맹을 의존하면서도 러시아와는 1887년 재보장조약(Rückversicherungsvertrag)을 맺어 동맹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이러한 탄력적인 평화 정책을 통해 비스마르크는 항시적인 적국인 프랑스를 견제하고 유럽의 중앙이라는 불안정한 지정학적 위치에 놓인 독일의 입지를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1884년 아프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 시작된 독일의 식민주의 정책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영향력 범위를 두고 서로 대립하고 있던 곳에서 탄자니아(동아프리카), 나미비아(남서아프리카), 카메룬 및 토고(서아프리카) 및 미크로네시아 등 일정 부분 영역을 획득하였다.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식민지가 경제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이득이 없다고 판단하였고, 식민지는 비스마르크 시대의 정치에서 거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5.5.2. 빌헬름 시대(1890~1914)

1888년 빌헬름 1세가 90세의 나이로 사망한 후 황태자였던 프리드리히가 즉위하였다. 자유주의적 정치 사상에 가까웠던 프리드리히 3세는 제위에 오른지 99일만에 후두암으로 사망하였고, 그 해에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 빌헬름 2세가 29세의 젊은 나이로 제위에 오른다. 그래서 독일사에서는 1888년을 세 황제의 해(Dreikaiserjahr)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위 초의 빌헬름 2세는 공개적으로 개인 통치(Persönliche Regimemt)를 주장하며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에 대해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고 있었고, 결국 사회주의자법에 대한 황제와 비스마르크 간의 의견 대립은 1890년 비스마르크의 해임으로 이어졌다. 이후 레오 폰 카프리비(1890-1894), 클로트비히 추 호엔로헤실링스퓌르스트(1894-1900), 베른하르트 폰 뷜로(1900-1909),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1909-1917)의 네 수상이 이어서 집권한 빌헬름 2세의 친정 시대인 '빌헬름 시대(Wilhelminische Zeit)'가 개막하였다.

비스마르크의 퇴임 이후 빌헬름 2세와 카프리비 내각은 신노선(Neuer Kurs)을 외치며 비스마르크 시대 말기 격화되었던 사회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면서 농업관세 인하, 사회주의자법 폐지 및 사회 정책 강화, 세제개혁 및 군대예산법 개혁과 같은 정치, 사회적으로 광범위한 진보적인 개혁을 시도하였다. 여기에 카프리비 내각은 프로이센의 3계급 선거제 개혁과 같은 급진적인 개혁까지 시도하였는데, 이러한 정책은 보수당의 반발에 부딪혔다. 이에 카프리비는 중앙당의 지원을 얻고자 가톨릭 학교에 지원금을 주는 교육법을 제정하려 하였으나, 이는 자유주의 세력의 반발까지 불러와 카프리비 내각은 점차 정치적으로 고립되었다. 결국 카프리비는 황제의 신임을 잃게 되었고 1894년 사퇴하였다.

카프리비의 사퇴와 함께 신노선 정책은 중단되었고, 빌헬름 2세 역시 사회민주당의 약진에 크게 놀라 사회민주당에 대해서도 점차 적대적으로 변하였다. 카프리비의 후임이었던 바이에른 출신의 호엔로헤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기에 빌헬름 2세의 개인 통치에서 배제되었고, 이 시기의 정치는 점차 필리프 추 오일렌부르크 후작과 외무장관 베른하르트 폰 뷜로와 같은 총신들이 중심으로 떠올랐다. 또한 점차 권위주의적 성향을 내보이던 빌헬름 2세는 사회민주당을 겨냥하여 전복법안(Umsturzvorlage, 1894), 투옥법안(Zuchthausvorlage, 1899)와 같은 일련의 반동적인 법안들을 입법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자유주의자들과 중앙당, 사회민주당의 반대에 부딪혀 통과에 실패하였다. 이러한 반동 정책들의 좌절은 독일 제국 정치에서 제국의회의 역할이 핵심적으로 부상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1900년 호엔로헤의 사임 이후 빌헬름 2세의 총신이었던 뷜로가 총리직에 올랐다. 뷜로 내각은 보수당과 민족자유당을 중심 지지층으로 삼으면서도, 중앙당을 회유하고 사회민주당의 수정주의 논쟁을 유발하여 분열을 유도하는 등 지지 세력을 통합하는 결집정책(Sammlungspolitik)을 추진하였다. 이 결집정책의 핵심 수단이 세계 정책으로 대표되는 제국주의 및 건함 정책이었고, 뷜로 내각은 이를 통해 급성장하는 사회민주당을 견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1907년 제국의 식민지 나미비아에서 벌어진 헤레로족 학살 사건을 두고 벌어진 제국의회 선거[21]에서 잘 드러났는데, 뷜로 정권은 제국주의 정책을 비판하는 중앙당과 사회민주당에 대항하여 보수당, 민족자유당, 좌파 자유주의 정당을 규합한 뷜로 블록(Bülow-Block)을 구성하였고 이러한 선거 동맹을 바탕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뷜로 내각 후기에 이르러 빌헬름 체제는 통치자인 빌헬름 2세의 과시적이고 경솔한 태도와 맞물려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봉착하였다. 우선 대내적으로 1907년에서 1909년 사이 빌헬름 체제는 오일렌부르크 스캔들과 데일리 텔레그래프 사건[22]과 같은 정치적 스캔들에 휘말리면서 위신이 실추되었고, 빌헬름 2세의 통치력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국제적으로도 세계정책 및 건함 건설 정책으로 대표되는 팽창 정책은 영국과의 대립을 격화시켰으며, 모로코 위기와 같은 대외적 위기를 겪으며 독일은 외교적으로 점차 고립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빌헬름 2세 정부의 권위에 큰 타격을 입혔다.

결국 이러한 위기 속에서 수상 뷜로는 점차 황제의 신임을 잃어 갔다. 결국 1909년 세계정책으로 인한 무리한 지출이 초래한 재정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제출하였던 직접세, 소비세, 상속세 인상 등을 포함한 재정 개혁 법안이 보수당과 중앙당의 반대로 부결되면서, 뷜로는 사퇴하였다. 뷜로의 후임자인 베트만홀베크는 당시 거세게 제기되고 있던 정치 개혁 요구에 대응하여 온건한 입장에서 개혁을 시도하면서 또한 영국과의 관계 개선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1912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이 원내 1당으로 떠오르고 1913년에는 차베른 사건으로 인해 제국 역사 상 최초로 수상의 불신임안이 통과되는 등 베트만홀베크 내각 역시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제국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들어갔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은 180도 전환했다고 봐도 손색이 없다. 그는 독일과 대대로 앙숙 관계에 있던 프랑스와는 변함없이 적대적으로 대했지만, 러시아와는 비스마르크 시대에 맺은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을 연장하지 않고 폐기했다. 독일-러시아 재보장 조약은 독일과 러시아 중 어느 한 국가가 제3의 국가와 전쟁할 경우 다른 국가는 중립을 지킨다는 내용으로, 1887년 6월 18일에 체결한 비밀 조약이었다. 한편 빌헬름 2세는 영국과 혈연으로 이어진 믿음을 저버렸다. 예를 들어,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영국이 치른 이른바 보어전쟁에서 빌헬름 2세는 보어인을 지지하는 한편, 함선 및 잠수함 제조에 광적으로 잡착하여 영국인의 민감한 신경을 자극했다. 이러한 빌헬름 2세의 정책은 주변국들로하여금 모두 독일에 등을 돌리게 했다.

빌헬름 시대의 외교정책의 또 다른 의미는 바로 비스마르크가 추진했던 평화적 노선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이 시점부터 독일 제2제국 또한 식민지 팽창에 나서게 된다. 빌헬름 2세는 1899년 중국의 자오자우만으로 군대를 파병해서 99년 동안 조차하는 권한을 누리고자 했으며, 따라사 청나라 말기 일어난 의화단 진압 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1905년에는 모로코를 욕심내던 프랑스에 전쟁 가능성을 들먹이며 위협했으며,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07년에는 독일의 아프리카 식민지인 나미비아에서 학살을 벌이기 까지 했다. 이러한 빌헬름 2세의 식민지 팽창은 결과적으로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과의 충돌을 자극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했다.

한편 빌헬름 시대의 독일 제국은 경제적으로 최전성기에 접어들었다. 늦어도 1890년부터 독일의 경제 발전은 중화학 공업을 중심으로 한 '제2차 산업 혁명'이 가속화되면서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다. 독일은 1913년 세계 산업 생산에서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으며, 세계 무역에서도 영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성장과 별개로 세기전환기(Jahrhundertwende)로 불리는 빌헬름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퇴폐적이고 비관적인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세기말(fin-de-siecles)로 불리는 19세기 후반부 유럽의 전반적인 경향이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양가감정으로 공존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급속한 국력의 성장에 대한 자부심과 더불어 산업화가 가져온 급격한 사회변화가 초래한 노동 문제 및 도시 문제와 같은 각종 사회 문제(Soziale Frage)에 봉착하면서 이에 대해 위기감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러한 감정은 학문 및 예술 분야에서도 반영되어 프리드리히 니체의 철학과 데카당스 문학, 미술 등이 유행하였다.

5.5.3.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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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초기 동부에서 독일군은 타넨베르크 전투와 같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슐리펜 계획과 관련된 서부에서의 진격이 1914년 9월부터 참호전에서 중단되면서 독일은 많은 손실을 입었고 전선은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제국 정부는 1916년 8월부터 사실상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 휘하의 최고 육군 사령부(OHL)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고, 황제와 내각은 이들의 허수아비가 되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참전으로 독일군의 상황은 1918년 여름에 이르러 점점 더 지속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1918년 9월 말 OHL은 정치 책임자들이 즉시 정전 협상을 시작해야 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전환은 10월 개혁으로 이어지며, 이를 기반으로 의회 정부가 처음으로 구성되었지만 이들은 전쟁 결과에 대한 책임도 지게 되었다. 짧은 기간 동안 독일은 1918년 10월 28일부터 11월 9일까지 의회 군주제 체제를 경험하였다. 하지만 빌헬름 2세는 이러한 개혁을 거부하고 베를린을 떠나 OHL에 합류하는 오판을 저질렀으며, 휴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는 동안 해군 참모부는 영국 해군에 대한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빌헬름스하펜과 킬의 선원들은 이 명령에 복종하기를 거부하였다. 킬 군항 수병들의 반란은 독일의 군주제를 폐지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11월 혁명으로 확산되었고,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성립으로 이어진다.

6. 20세기

6.1. 바이마르 공화국(1918~1933)

바이마르 공화국은 기본적으로 사회민주당과 중앙당, 그리고 기존의 우파 자유주의 세력을 계승한 독일 인민당과 좌파 좌유주의 세력을 계승한 독일민주당, 그리고 보수 정당을 계승한 독일 국가인민당과 같은 다양한 정당이 난립하는 가운데 의회 정치가 전개되었다.

11월 혁명 및 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독일 국내의 정치적 불안은 계속되어 1919년 1월에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주도하는 사회민주당의 급진파가 스파르타쿠스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여기에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독일에게 부과된 과도한 배상금은 독일인들에게 배후중상설과 같은 내부 불만이 확산되는 데 기여하였다. 1920년대 초반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는 매우 불안정하여, 1920년 카프 폭동 1923년 아돌프 히틀러가 이끄는 맥주홀 폭동을 비롯하여 국내의 극우 및 극좌 세력의 끊임없는 체제 전복 시도에 시달렸다. 여기에 1923년 발발한 하이퍼인플레이션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은 일대 위기에 직면하였다.

그러나 1924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주도한 화폐 개혁이 성공을 거두면서 인플레이션은 안정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1925년 도스 안의 도입으로 배상금이 삭감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은 이후 짧은 기간 동안 '황금의 20년대(Goldene Zwanziger)'라고 불리는 상대적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이 시기 독일은 표현주의 신즉물주의와 같은 문화와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하지만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은 바이마르 공화국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대공황을 틈타 나치당 독일공산당이라는 양대 극단주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정 질서는 위기에 처하였다. 특히 나치당은 대공황을 계기로 폭발적으로 성장하였고,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같은 당시 지도자들은 나치당의 정권 장악에 협력하여 공화국의 몰락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6.2. 제3제국 제2차 세계 대전(1933~1945)

1933년 1월 30일 히틀러의 총리 취임과 3월 4일 수권법 제정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한 나치는 독일 국가를 내부에서부터 파괴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1934년 장검의 밤을 통해 나치당 좌파를 숙청한 나치는 1938년 수정의 밤을 계기로 유대인에 대한 탄압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이후 나치 독일은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슬로바키아 합병 이후 제3제국을 선포하고는 얼마 안되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치 독일은 이탈리아와 일본하고 동맹을 맺어 추축국을 형성했고, 1941년 동유럽으로 팽창하더니 그해 6월 소련을 침공했다. 12월엔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미국하고도 전쟁을 치르게 됐다. 1942년 기준 나치 독일은 소련을 포함하여 유럽의 상당히 많은 영토를 차지했지만,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독일의 참혹한 패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니더슐레지엔, 포메른을 비롯한 동방 영토를 죄다 뜯겼으며, 남은 독일 지역은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전쟁을 시작했던 1913년에 독일 제국의 인구는 65,100,000명으로 빠르게 성장해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전쟁에서 패전하고 나서 성립된 바이마르 공화국도 영토를 일부 할양해야 하긴 했지만 1918년에 60,200,000명으로 여전히 서유럽에서 가장 많았다. 독일이 주변 국가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다시 강력한 국가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에 나치 독일이 발흥했던 1936년에는 인구가 67,300,000명으로 증가해 독일 제국이 가장 많았던 시기의 인구를 이미 넘어섰다. 그렇지만 다시 전쟁을 일으킨 독일은 극심한 인명 피해를 겪어 1945년에는 인구가 57,800,000명으로 감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독일은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졌을 때에 다시 과거에 가장 많았던 인구를 넘어섰는데 아마 동방 영토를 유지하고 분단되지 않았다면 인구가 더 많았을 것이다.

6.3. 전후 분단과 재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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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전쟁에서 패망한 직후 4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각각 미국, 영국, 프랑스[23], 소련이 독일의 영토를 나누어서 점령한 상태였다. 이 당시 독일의 단계적 탈공업화 및 경제적 역량 약화가 시도되었고 1차대전때와 같이 석탄이 풍부한 자르 지역은 자르 보호령으로, 그리고 루르 공업 지대 루르 국제 통치령으로 떼려 시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 영국, 프랑스는 각자 자신들이 점령한 독일의 영토를 합쳐 새로운 독일 정부를 수립시키는 쪽으로 합의를 보았으나 소련만 이를 거부했다. 그 결과 미국, 영국, 프랑스가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는 모조리 합쳐져서 서독이 되었고 소련이 점령했던 독일의 영토 중 폴란드와 소련에 귀속된 동방 영토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이 동독이 되었다. 이에 따라 베를린도 서독과 동독으로 분할되었다. 이후 동독 정부는 동독 사람들이 동독 안에 있는 서독의 영토인 서베를린으로 가지 못하게 베를린 장벽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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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은 미국의 압도적인 지원을 바탕으로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서 육성되어 제1세계 내 3위, 전세계 4위에 달하는 경제 대국이 된다. 동독 또한 발터 울브리히트, 에리히 호네커 등 지도자들 덕에 경제 개발을 바탕으로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 소련, 중국, 폴란드 다음으로 높은 4위의 경제력을 가지게 된다.[24] 하지만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의 결과는 동유럽 공산주의의 와해로 이어졌고, 결국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25]


베를린 장벽 붕괴의 여파로 동독주민들의 자유선거에 따라 1990년 통일을 이루었고 이후 독일은 하나의 국가로서, 유럽연합의 주도적인 국가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6.4. 과거사 청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이후 전후 독일에선 이른바 연합국들이 주도하는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렸다. 뉘른부르크 재판에선 미국 연방법원 판사 로버트 잭슨의 제안에 따라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이 재판을 열어 나치가 저지른 만행을 만천하에 폭로하기로 했다. 1945년 8월 8일에 이 4개국은 영국 런던에서 런던 협정과 유럽 국제 군사법원 헌장에 서명했고 각국에서 법관 1명, 보조 법관 1명을 파견해서 국제 군사법원을 구성하기로 했다. 1945년 11월 20일부터 1946년 8월 31일까지 연합국은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주도했는데, 총 24명을 재판했고, 12명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다만 이 재판은 승리자인 연합국 위주의 재판이어서, 독일인들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회적인 반성을 불러오지는 않았다. 이후 연합군 점령 지역에서도 탈나치화 정책이 추진되었고, 소련 치하의 동독에서도 인적청산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미군정 휘하의 독일에서는 법령 104호에 의거하여 탈나치화 움직임이 있었다. 다만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에서도 나치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크게 처벌받지 않거나 지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1950년대 독일은 주로 경제재건에 주력했고, 홀로코스트에 대한 부분도 어디까지나 개인의 책임으로 사회가 축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1962년 유대인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도 사실 그런 측면이 강하다. 서독 사회에서 과거사 문제가 큰 화제가 된 것은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이 가속화 되며 촉발된 베트남 전쟁 반전 운동의 영향이 컸다. 즉, 68운동의 흐름과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구정책 추진을 통해서 서독 사회가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청산의 길 즉 현재 나치 시대의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의 이미지가 형성됐다.

냉전의 최전선 국가였던 점, 2차 대전의 잔재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점의 부작용이 나타나 70년대에는 바더 마인호프 등 무장 단체 세력의 테러리즘으로 수난을 겪기도 했다. 이 시기를 독일의 가을이라 부른다.

7. 21세기

7.1. 재통일 이후

그러나 서독이 그렇게 경제적으로 강력한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플라자 합의의 여파에 이어 동서 통일 후 지출된 통일 분담금이 독일 경제에 악영향을 끼쳤다. 이 때문에 1990년대 내내 독일의 경제는 통일의 후유증에 제대로 발목을 잡혔고 동독 지역의 경제수준을 서독의 75%까지 끌어올리는 데 25년이나 소요된 반면 물가는 동독 지역의 물가가 순식간에 서독 지역의 90%까지 올라가는 등 동독 지역의 경제 문제가 매우 심각했다. 25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동독 지역의 경제가 그나마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문제는 남아 있다. 그리고 동독 사람들이 통일된 독일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옛 동독을 그리워하는 상황이 일어나자 서독 정부는 이들을 달래기 위해 베를린에 동독 박물관을 만드는 등 옛 동독의 유산들을 최대한 보존하고 있다. 그리고 동독의 국가 국기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사용되지 않고 있지만, 나치 시대의 하켄크로이츠와는 달리 금지되어 있지 않다.

8. 관련 문서

9. 참고 문헌

9.1. 통사

9.2. 신성 로마 제국

9.3. 중세

9.4. 근세

9.4.1. 종교개혁

9.4.2. 30년 전쟁

9.5. 근현대

9.5.1. 독일 제국

9.5.2. 바이마르 공화국

9.5.3. 제3제국



[1] 이원복 교수의 먼나라 이웃나라 등 여러 역사 교양 서적에서도 이러한 시각이 소개되어 있다. [2] 로마인들이 자신들이 트로이인들의 후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3] 율리우스 폰 피커를 비롯한 19세기 역사가들은 나중에 독일 왕국을 구성하는 5대 부족 공국(Stammesherzogtum) 중에서 프랑크 왕국 초기에 병합된 로트링겐, 프랑켄, 슈바벤을 '구 부족 공국(Älteres Stammesfürstentum)'으로, 카를 대제 때 새로 병합된 작센, 바이에른을 '신 부족 공국(Jüngeres Stammesfürstentum)'으로 구분하기도 하였으나, 20세기 후반 이후 헤르비히 볼프람을 비롯한 많은 역사가들은 양자 간의 질적 차이를 부정하고 있다. [4] 중프랑크 왕국은 870년 동서 사이의 영토(지금의 알자스로렌( 로트링겐), 네덜란드 등)를 상실하고 북 이탈리아의 왕국이 된다. [5] 제국의회에 참석권 및 투표권을 가진 제국 구성원을 의미한다. 일본에서는 제국등족이라고도 한다. [6] 1997년 출간된 파울-요아힘 하이니히(Paul-Joachim Heinig)의 전기 3부작은 여기에 있어 중요하게 다뤄진다. [7] 볼프강 라인하르트가 하버드-C.H.베크 세계사 1350-1750편에서 그의 통치를 '강력한' 통치라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8] 구체제(Ancien Regime)에 대응하여 근대 초기 제국(1495~1806)을 가리키는 용어 [9] 이러한 사회적 규율화 및 교파화 개념은 근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사회적, 종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10] 게오르크 슈미트의 Geschichte des alten Reiches(1999), 조아킴 웨일리의 Germany and the Holy Roman Empire(2011)는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저작들이다. [11] 이러한 주장에 대해 볼프강 라인하르트 하인츠 쉴링은 반대 의견을 표하며, 쉴링은 슈미트의 보완적 제국-국가 개념을 비판하며 부분 근대화 제국 체제(Teilmodernisiertes Reichssystem)라는 개념을 제시하였다. 다만 이는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제국을 근대 국가로 여기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제국이 근대적 성격을 어느 정도 띄고 있었음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12] 다만 바바라 슈톨베르크-릴링어의 '상징적 의사소통(symbolische Kommunikation)'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제국의 헌정 질서가 작동하는 데 있어 여전히 중세적인 원리들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기에, 제국의 근대성을 지나치게 과장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우세하다. [13] 레오폴트 1세는 최근에 집중적으로 재조명되어 황제의 흔들리던 권력 기반을 안정시키고 이후 100년간 제국이 유지되는 기틀을 제시하였다는 평을 받는다. [14] Landschaft라고도 한다. 각 영방 내에서 구체제 유럽 사회를 구성하는 신분(성직자, 귀족, 도시민, 농민)의 대표/대표단을 의미하며, 영방 군주(Landesherr)에 대응된다. [15] 1740년 이후 1806년까지의 신성 로마 제국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이원 체제(Dualismus)라고 부르기도 한다. [16] 그렇기에 19세기 독일과 저지대 일대를 포함한 북유럽에서는 1792~1815년의 기간을 '프랑스 시대(Franzosenzeit)'라고도 한다. [17] 바이에른은 1808년에 헌법이 이미 선포되었으나 1818년 새로운 헌법을 도입했다. [18] 그림 형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19]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철혈 연설이 있었다. [20] 토마스 니퍼다이의 19세기 독일사의 시기 구분 기준이 1866년이었다. [21] 호텐토트 선거(Hottentotenwahl)이라고도 불린다. [22] 빌헬름 2세가 영국 언론인 데일리 텔레그래프와의 인터뷰에서 영국인들의 국민 감정을 자극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한 사건. [23] 이 당시 프랑스는 소련 못지않게 눈이 뒤집혀 있었고, 그래서 자국의 점령지를 강제동화시키려 했었다는 소문이 들렸을 정도로 강경한 통치를 했다. 그러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을 재건하고 싶어하는 미국의 압박을 받았고, 프랑스 또한 계속되는 독일인들의 반발 등으로 강경책만 쓸 수는 없는 현실적 상황을 감안해 미국의 뜻을 수용한다. [24] 다른 분야에서도 동독은 무척 발달해서, 1988년 서울 올림픽 등에서도 동독은 2위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실질 기준으로 경제 규모는 시기에 따라서 서독이 동독의 4~6배 정도였다. 물론 시기에 따라서 서독의 인구가 동독의 3~4배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25] 당시 동독인들이 계속 빠져나고 있었고, 동독 정부는 여권 발급 규정을 완화하기로 했다. 이때 동독 주재 이탈리아 기자였던 리카르도 에르만(Riccardo Ehrman)이 대변인에게 언제부터 이 규정이 시행되냐고 물었는데, 대변인은 살짝 당황해서 "지금 즉시, 지연 없이 될 겁니다"라고 말실수를 하자 이 기자는 "여행자유화가 돼서 동독이 지금 즉시 국경을 전면 개방한다, 즉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고 로마로 잘못된 기사를 보냈고, 이 소식이 그대로 서독 뉴스에 보도되면서 동독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몰려들어 동독 국경수비대를 물량으로 압살하며 그대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당시 동독 시민들이 대부분 서독 방송국을 챙겨보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 한국의 신탁통치 오보사건 뺨치는 영향력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