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21:05:57

존더베크

1. 개요2. 기원과 형성
2.1. 19세기 중반: 보루시아 학파2.2. 빌헬름 시대: 랑케 르네상스와 예외주의의 출현2.3.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3. 전환
3.1. 1945년 이후 1960년대까지3.2. 피셔 논쟁과 1960년대의 변화3.3. 사회사의 출현과 존더베크 개념의 전환
4. 존더베크의 재검토
4.1.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4.2. 토마스 니퍼다이
5. 존더베크를 넘어서
5.1. 울리히 헤르베르트
6. 참고 문헌

1. 개요

존더베크(Sonderweg) 독일어로 '특수한 길', '특수경로'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독일사 연구에 있어 독일이 영국, 프랑스, 미국과 같은 ' 서구(Westen)'와 대비되는 특수하고 고유한 근대화 및 발전 경로를 걸었는가라는 물음을 핵심으로 한다. 존더베크 및 독일사의 예외주의 혹은 특수성에 대한 논쟁은 독일사 연구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독일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를 우선적으로 파악할 필요가 있다.

존더베크 및 독일 예외주의에 대한 역사학적 논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에 걸쳐 독일사의 긍정적인 특수성을 옹호하기 위해 출현하였다. 2차대전 패전 이후 나치즘에 대한 전후 세대의 반성과 맞물리면서 존더베크 논의는 독일사의 군국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전통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개념으로 전환되었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풍미한 비판적인 존더베크 테제는 독일사 연구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여기서 파생된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을 비롯한 근대 독일을 부정적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현재까지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한 나라의 역사를 서술하는 데 있어 고유한 특수성만을 강조하기 보다는 비교사적 접근을 통해 보편성과 특수성을 교차하여 서술하고자 하며, 독일사 역시 독일사의 특수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은 배격되고 있는 추세이다.[1] 프로이센과 독일 제국의 경우에도 권위주의와 군국주의적 유산 이외에도 시민 사회의 발전과 대중 정치의 확산과 같은 측면들이 조명되면서, 그 양가적인 면모가 더욱 강조되고 있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근대화가 단선적인 진보가 아닌 빛과 그림자의 양면적 속성을 가지며, 나치즘 역시 독일만의 고유한 특수성만이 아니라 서구 근대성의 양면적 속성으로부터 기원하고 있다는 데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2. 기원과 형성

2.1. 19세기 중반: 보루시아 학파

레오폴트 폰 랑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등의 주도하에 성립된 근대적, 과학적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의 중요한 역할은 당대의 국민국가를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1871년까지 통일된 민족 국가가 없었던 독일의 경우 프로이센 왕국 중심의 소독일주의를 옹호하는 개신교 북독일 역사가들과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를 옹호하는 가톨릭 남독일 역사가들로 나뉘어 각각의 통일 방식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특히 1848년 혁명 이후 드로이젠과 하인리히 폰 쥐벨,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가 주도하는 보루시아 학파(Borussische Schule) 혹은 프로이센 학파(Preussishce Schule)의 역사가들은 독일 통일에 있어 프로이센이 주도하는 소독일주의적 통일 방안을 강력하게 지지하였고, 이를 위하여 프로이센의 역사적 사명을 정당화하는 지극히 프로이센 중심적인 독일사 서술을 발전시켰다. 드로이젠의 프로이센 정치사(Geschichte der preussischen Politik, 1855-1886), 쥐벨의 빌헬름 1세에 의한 독일 제국 건국(Die Begründung des Deutschen Reiches durch Wilhelm I., 1889-1894), 그리고 무엇보다도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im neunzehnte Jahrhundert, 1879-1894)는 이러한 역사 서술을 대표하는 저작들이었다.

2.2. 빌헬름 시대: 랑케 르네상스와 예외주의의 출현

독일 통일 및 비스마르크 시대에 극에 달했던 보루시아적 역사 서술은 빌헬름 2세 시대에 접어들며 막스 렌츠(Max Lenz, 1850-1932)와 에리히 마르크스(Erich Marcks, 1862-1938)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도전받기 시작했다. 랑케 르네상스(Ranke Renaissance)라고 불리는 경향을 주도한 이러한 역사가들은 보루시아 학파의 당파적인 역사 서술을 비판하고, 객관성과 세계사의 이념을 강조했던 랑케로의 회귀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 랑케 르네상스 역시 빌헬름 2세 시대의 세계 정책을 옹호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들의 역사 서술의 중심 역시 독일의 지정학적, 국제 정치적 입지를 정당화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유럽의 중앙(Mittellage)이라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강조하면서 그러한 지정학적 조건으로 인해 독일은 유럽 내 분쟁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그렇기에 이를 방어하기 위한 강력한 군대와 국가가 필요하다는 논리를 발전시켰다. 바로 여기서부터 독일의 예외주의, 즉 존더베크의 기초가 시작되며,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에 근거한 역사 서술은 독일사에 대한 민족주의적, 옹호적 역사관의 핵심적 위치에 있었다.

더불어 당시 독일 지성계에는 독일이 영국 및 프랑스의 천박한 '문명(Zivilisation)'과 구분되는 독일 특유의 교양(Bildung) 이념에 기초한 '문화(Kultur)'를 발전시켰다는 인식이 팽배했다. 프리드리히 마이네케세계시민주의와 민족국가(Weltbürgertum und Nationalstaat, 1908)는 이러한 인식을 대표하는 저작이면서 한편으로는 독일 민족국가의 이념이 세계주의적 보편성과 조화될 수 있다는 빌헬름 시대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반영된 저작이었다.

2.3. 제1차 세계 대전과 바이마르 공화국

빌헬름 시기 발전한 이러한 예외주의적 역사관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더욱 강화되었다. 거의 대부분의 독일 역사가들은 베르사유 조약에 크게 반발하였으며, 제1차 세계 대전의 독일 책임론을 반박하고 지정학적 입지를 바탕으로 독일을 변호하고자 했다. 또한 렌츠와 마르크스 등 보수적, 민족 자유주의적 역사가들은 배후중상설을 신봉하며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서도 적대적인 입장을 취했다. 한스 로트펠스(Hans Rothfels, 1891-1976)와 한스 헤르츠펠트(Hans Herzfeld, 1892-1982) 등 유대계 혈통으로 나치 시대에 외국으로 망명하여야 했던 역사가들 역시 이러한 움직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이와 별개로 마이네케와 오토 힌체, 헤르만 옹켄(Hermann Oncken, 1869-1945) 등 비교적 온건한 자유주의 성향의 역사가들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국가 권력의 양면적이고 '마신적'인 속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마이네케는 '이성적 공화주의자(Vernunftsrepubliker)'[2]라 불리며 바이마르 공화국에도 지지를 보냈으며, 독일사에 대해서도 좀더 성찰적으로 접근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독일 근대사를 더욱 비판적으로 재검토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프란츠 슈나벨과 같은 가톨릭 계열, 파이트 발렌틴(Veit Valentin, 1885-1947), 요하네스 치쿠어쉬(Johannes Ziekursch, 1876-1945), 루트비히 데히오(Ludwig Dehio, 1888-1963)와 같은 좌파 자유주의, 구스타프 마이어(Gustav Mayer, 1871-1948), 아르투어 로젠베르크(Arthur Rosenberg, 1889-1943), 에카르트 케어(Eckart Kehr, 1902-1933) 등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역사가들이 그러했다.

특히 슈나벨의 19세기 독일사(Deutsche Geschichte im neunzehnte Jahrhunert, 1929-1937)는 나치의 검열에 의해 미완으로 남았지만 트라이치케의 프로이센 중심적 역사와 완전히 대비되는 가톨릭-자유주의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쓰여진 저작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가들은 길드(Zunft)에 비교될 정도로 폐쇄적이었던 독일 역사학의 주류 집단에서 소외되었고, 주류 역사학계는 독일 전통의 역사주의적 방법론을 강조하며 독일 예외주의적 역사 서술을 강화하였다.

3. 전환

3.1. 1945년 이후 1960년대까지

나치즘과 2차 세계 대전이라는 '파국' 이후 1945년부터 독일 역사학계의 최대 관심사는 나치즘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 있었다. 전통적인 주류 독일 역사학계는 나치즘으로부터 독일의 역사적 전통을 변호하고자 했다. 마이네케는 전후 출간한 독일의 파국(Die Deutsche Katastrophe, 1946)에서 나치즘이 단순히 독일 근대사의 병리적 문제만이 아니라 서구 근대 문명 자체의 문제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했고, 나치즘의 출현을 우발적인 '사고'로 규정하고자 했다.

독일 우파 자유주의를 대표하는 역사가이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여 투옥되었던 프라이부르크 대학교 게르하르트 리터 역시 독일 군국주의를 분석한 국가 통치와 전쟁술(Staatskunst und Kriegshandwerk, 1954-1968)에서 독일 군국주의와 히틀러 간의 연속성을 부정하고, 프리드리히 대왕과 비스마르크를 비롯한 프로이센-독일 전통을 히틀러로부터 구출하고자 했다. 리터와 로트펠스 등 보수주의, 자유주의 역사가들의 변호적 역사 서술은 1960년대까지 독일 역사학계의 주류를 형성했는데, 이들은 특히 히틀러에 대한 독일의 저항 운동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데히오와 슈나벨 등 바이마르 시기의 아웃사이더 역사가들은 독일 근대사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계속해서 전개해 나갔다. 슈나벨은 1945년 이후 뮌헨 대학교에 재직하면서 독일의 전통은 각 국가들 간의 느슨한 연합 체제에 있으며, 독일 제국 성립 이후의 역사는 이로부터의 일탈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이후 그의 제자들, 특히 카를 오트마르 폰 아레틴이 주도한 근대 초 신성 로마 제국(구제국)에 대한 긍정적인 재검토로 이어졌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적인 접근 역시 독일의 역사적 전통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나치로부터 독일사의 긍정적인 유산을 구출해 내려는 시도이기도 했다.

3.2. 피셔 논쟁과 1960년대의 변화

1961년 함부르크 대학교의 역사가 프리츠 피셔가 출간한 세계패권의 추구(Griff nach der Weltmacht)로부터 촉발된 피셔 논쟁(Fischer-Kontroverse)은 독일사 연구의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피셔는 이 책에서 빌헬름 2세를 비롯한 독일 제국의 수뇌부가 세계패권을 위해 의도적으로 전쟁을 기획했으며, 이것이 1차 세계 대전의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독일 국내 사학계에서 큰 파장을 낳았는데, 특히 리터가 피셔 테제에 대해 맹렬한 반론을 가하였다.

현 시점에서 역사가들은 피셔와 같이 1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어느 한 국가의 탓으로만 돌리려는 시도를 지양하고 있는 추세이며,[3] 피셔 개인에 대해서도 사후 나치 이력 논란이 크게 불거지며 위신에 손상이 가기도 했다. 하지만 피셔 논쟁은 특히 새로운 세대의 독일 역사가들이 주도하는 독일사에 대한 총체적인 재검토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했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나치에 의해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독일계 유대인 역사가들이 주도했다. 마이네케의 제자인 하요 홀보른(Hajo Holborn, 1902-1969)과 한스 로젠베르크(Hans Rosenberg, 1904-1988) 등은 이미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좀더 뒷세대의 조지 모스[4], 게오르그 이거스[5], 프리츠 스턴[6], 레너드 크리거(Leonard Krieger, 1918-1990)[7][8], 프리츠 링거(Fritz K. Ringer, 1934-2006)[9][10] 등은 지성사적으로 독일 정신에서 나타나는 반서구적, 반근대적 면모를 추적하면서 이러한 독일의 '특수성'을 나치즘의 기원으로 위치시키고자 하였다. 이로부터, 존더베크는 점차 부정적인 개념으로 전도되기 시작하였다.

한편으로 독일 내부에서는 기존의 정치사와 외교사 중심의 연구 전통에 대해서도 비판적 움직임이 대두하였다. 쾰른 대학의 테오도어 쉬더(Theodor Schieder, 1908-1984),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베르너 콘체(Werner Conze, 1910-1986), 함부르크 대학의 오토 브루너는 프랑스 아날학파와 영국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주도하고 있던 전 세계적인 사회사적 접근의 대두와 흐름을 같이 하면서 사회 경제사적 접근과 개인에 우선하는 '구조'를 중시하는 구조사(Strukturgeschichte) 역사학을 전개하였다.[11][12]

3.3. 사회사의 출현과 존더베크 개념의 전환

이러한 지적 분위기와 더불어 한스-울리히 벨러, 마르틴 브로샤트, 게르하르트 A. 리터, 볼프강 J. 몸젠, 한스 몸젠,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 위르겐 코카 등 새로운 세대의 역사가들은 사회사적 경향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벨러와 코카는 라인하르트 코젤레크와 함께 신생 대학인 빌레펠트 대학교에 재직하였고, 빌레펠트는 서독 사회사의 요람으로 거듭났다.[13][14] 이들은 모두 구조사의 영향 속에 있던 역사가들로, 브로샤트와 벨러, 볼프강 몸젠은 쉬더의 제자이고, 한스 몸젠과 빙클러는 로트펠스의 제자였다.[15]

더 나아가 이들은 68운동이 초래한 정치 사회적 변화의 영향 속에서 독일 근대사를 더욱 비판적, 반성적으로 재검토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벨러의 역사적 사회과학(Historische Sozialwissenschaft)은 새로운 세대의 사회사를 대표하는 프로그램으로, 벨러는 역사학의 가치를 사회 계몽 및 해방적 가치의 실현에 두면서 전통적인 인간학적 역사학이 아닌 사회과학으로 역사학을 재정립하고자 했다. 무엇보다도 이는 나치즘에 대한 반성을 핵심으로 하며, 벨러에게 있어 독일사 연구의 최우선 과제는 나치 독재가 성립한 원인을 파악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입장을 바탕으로 벨러는 특히 19세기 독일사 및 독일 제국의 연구에 주력했다.

여기에 있어 벨러는 전간기에 요절하여 잊혀져 있던 역사가 에카르트 케어의 저작들을 재조명했다. 마이네케의 제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케어는 박사 논문인 전함건조와 정당정치(Schlachtflottenbau und Parteipolitik, 1930)에서 랑케로부터 내려오는 독일 사학계의 대외 정책의 우위를 거부하고 대내 정치의 우위(Primat der Innenpolitik)를 내세웠고, 빌헬름 시대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이 해군 정책이라는 대외 정책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벨러는 대내 정치의 우위 테제와 더불어 독일 시민 계급의 '봉건화'와 같은 케어의 이론들을 대거 수용하였다.

1973년 출간한 벨러의 독일 제국(Das deutsche Kaiserreich)은 벨러의 비판적 독일 제국관을 집성한 저작으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서 벨러는 독일 제국의 기본적 특징으로 정치적 근대화와 경제적 근대화 간의 불일치를 제시했고,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다르게 '부르주아 혁명'을 통한 사회 변혁을 이루지 못한 독일사의 후진적인 '존더베크'로부터 기원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벨러와 사회사가들은 독일의 권위주의적, 군국주의적 정치 문화와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 시민 계급의 봉건화 및 무력화와 같은 부정적이고 후진적인 독일만의 '존더베크'를 나치즘의 기원으로 놓았다. 이로부터 이미 영미권에서 진행되고 있던 '존더베크' 개념의 부정적 전환은 절정에 달했다.

비슷한 시기에 마르틴 브로샤트와 한스 몸젠은 제3제국 연구에서 기존의 '의도주의(Intentionalism)'적 접근과 대비되는 '기능주의(Functionalism)' 혹은 구조주의적 접근을 주도했다. 카를 디트리히 브라허를 비롯한 전통적인 역사학과 정치학의 제3제국 연구는 히틀러를 비롯한 제3제국 지배층의 '의도'를 가장 우선시하였고, 지배 엘리트들의 연구에 주력했다. 반면 브로샤트를 비롯한 기능주의자들은 나치 체제의 '구조'를 분석함으로써 나치 시대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시키고자 했다. 특히 이들은 히틀러를 비롯한 개인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형성된 체제 및 구조가 나치 체제의 작동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고, 나치 체제 내에서 히틀러 등 개인의 역할을 축소시키고자 했다.

1970년대 동안 사회사는 독일 역사학계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미쳤다. 1975년 빌레펠트를 중심으로 창간한 저널 역사와 사회(Geschichte und Gesellschaft)는 곧 새로운 사회사의 중심 거점이 되었고, 전통적 역사학의 거점인 사학 잡지(Historische Zeitschrift)에 비견되는 위치로 성장했다. 브로샤트와 한스 몸젠의 기능주의 연구에서 벨러와 볼프강 몸젠의 제국주의 연구, 리터와 코카, 빙클러의 노동사 연구, 무엇보다도 코젤레크의 개념사 연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다양한 방면에서 독일 역사학의 경직성을 해소하고 새로운 접근 방식을 개척하였고, 이들의 제자들은 사회사적 방법론을 더욱 확산시켜 나갔다. 전후 독일의 가장 중요한 역사 이론가 중 하나인 외른 뤼젠(Jörn Rüsen, 1938-)[16]은 역사주의에서 사회사로의 '패러다임 교체'를 선언할 정도였다.

4. 존더베크의 재검토

한편으로 안드레아스 힐그루버(Andreas Hillgruber, 1925-1989), 미하엘 슈튀르머(Michael Stürmer, 1938-), 클라우스 힐데브란트(Klaus Hildebrand, 1941-)와 같은 보수적 성향의 역사가들은 전통적인 역사주의와 외교사 중심의 역사학을 옹호하면서 사회사를 비판하는 입장에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회사에 대한 독일 국내의 가장 강력한 비판자는 토마스 니퍼다이였다.

니퍼다이는 1975년 발표한 벨러의 독일 제국에 대한 서평에서 벨러를 '트라이치케의 화신'이라고 비유하면서 그의 접근이 또다른 방식의 당파적 역사 서술임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니퍼다이는 19세기와 독일 제국의 역사를 단순히 나치즘의 전사로 보는 것이 아닌, 그 자체적인 의미를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역사주의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니퍼다이는 전통적 역사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역사주의를 탈민족화, 탈신화화, 탈정치화와 같은 혁신을 거쳐 현대적으로 계승할 것을 주장했으며, 사회사적 접근 역시 폭넓게 수용하였다. 벨러 역시 니퍼다이의 비판에 대해서는 진지한 반응을 보였고 니퍼다이의 서평은 역사와 사회 창간호에 실렸는데, 이는 유일한 비사회사 계열 역사가의 글이었다.

또한 1980년대부터 사회사는 총체적인 도전에 처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우선 '문화로의 전환(Cultural Turn)'을 내세운 문화사의 대두가 있었다. 이탈리아의 미시사, 영미권의 신문화사, 프랑스의 심성사와 같은 새로운 역사학 조류는 페르낭 브로델로 대표되는 구조사 방법론이 가지는 한계점을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사회사 내부에서도 로렌스 스톤과 같은 역사가에 의해 내러티브적 역사 서술의 효용성이 재조명되면서, 구조사와 사회사는 구조에만 천착한 나머지 역사 속에서 개인을 소실시켜 버렸다는 비판에 처하게 되었다. 독일에서도 한스 메디크, 알프 뤼트케, 루츠 니트하머 등의 일상사(Alltagsgeschichte) 역사가들에 의해 문화사적, 인류학적 접근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사회사의 주요한 비판자였고, 사회사가들은 이들에 대해 '신역사주의'라고 부르면서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여기에 더해 사회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도전은 영국의 소장파 역사가들이 주도한 '존더베크' 개념의 총체적인 재검토로부터 시작되었다.

4.1. 제프 일리와 데이비드 블랙번

1980년 갓 서른을 넘긴 영국 역사가 제프 일리(Geoff Eley, 1949-)와 데이비드 블랙번(David Blackbourn, 1949-)은 독일 역사서술의 신화들(Mythen deutscher Geschichtsschreibung)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책자를 독일어로 출간했다. 이 저작은 기본적으로 존더베크로 대표되는 독일사 서술 전반에 뿌리내린 예외주의 서사에 총체적인 비판을 담고 있었는데, 출간된지 얼마 되지 않아 엄청난 파급력을 불러왔다.

일리와 블랙번의 비판은 존더베크에 기반을 둔 독일사 서술 전반에 대한 것이었지만, 가장 중심적인 비판 대상은 당시를 풍미하고 있던 벨러의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 및 부르주아지의 봉건화 테제였다. 일리와 블랙번, 특히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일리는 노동계급과 아일랜드인을 비롯한 소수자를 탄압한 영국 근대사에 매우 비판적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과연 영국의 역사가 '정상적'인지, 독일의 역사가 그렇게 특수하였는지, 더 나아가 정상적인 역사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들에 따르면 모든 국가의 역사는 궁극적으로 유일무이하며 '특수'했다.

먼저 '실패한 부르주아 혁명' 이론에 대해 일리는 독일 시민 계급이 1848년 혁명 이후에도 자신들의 경제적, 문화적 헤게모니를 관철시켜 나갔고, 독일 제국의 성립은 시민 계급의 헤게모니가 달성된 순간이라고 보았다. 블랙번 역시 독일 제국의 시민 사회에서 나타나는 '근대성'을 조명하면서 이는 영국과 프랑스와 큰 차이가 없었다고 주장하였다.

시민 계급의 봉건화 이론에 대해서도 일리는 독일 제국 시기 시민 계급의 보수화가 그들의 타협적, 봉건적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계급의 대두라는 독일의 고유한 정치적 환경 속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합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블랙번 역시 독일 시민 계급의 '상대적' 약세는 벨러가 말한 것과 같은 지배층에 의한 '위로부터의 조작'에 따른 정치적 의지의 거세가 아니라 사회 민주당의 약진으로 대표되는 '아래로부터의 위협' 때문이라고 보았다.

블랙번과 일리의 도전은 독일사 연구에 있어 일대 파란을 불러왔다. 1984년에는 독일어판의 내용을 더욱 확장하여 독일사의 특수성(The Peculiarities of German History)이라는 이름으로 영어판이 출간되었고, 존더베크를 둘러싼 논쟁은 더욱 격화되었다. 사회사가들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비슷한 진영인 그들의 공격은 당혹스럽게까지 여겨졌다. 하지만 이들의 논의를 바탕으로 독일 시민 계급에 대해 국제적인 비교 연구가 이루어졌고, 독일 시민 계급의 성격이 영국, 프랑스와 근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음에는 어느 정도 합의가 이루어졌다.

4.2. 토마스 니퍼다이

비판적 사회사에 대한 또다른 중요한 반박은 니퍼다이의 19세기 독일사(Detusche Geschichte, 1983-1992) 3부작이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사회사에 대한 중요한 비판가로 자리잡고 있었던 니퍼다이는 1983년에 1800년에서 1866년까지의 19세기 전반부 독일사를 종합한 저작을 출간하였고, 이는 압도적인 찬사를 받았다. 니퍼다이는 암으로 투병하는 와중에도 1990년과 1992년에 각각 1866년에서 1918년까지 독일의 사회 경제사와 정치사를 다룬 2, 3권을 출간하였고, 마지막 권을 출간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였다. 니퍼다이 이전 트라이치케와 슈나벨의 19세기 독일사는 모두 1840년 근방에서 중단되었는데, 니퍼다이는 드디어 이 저주를 깨트렸다.

우선 니퍼다이의 19세기 독일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거의 모든 측면을 망라하고 있다는 점이 그 특징이다. 니퍼다이의 독일사는 '전체로서의 역사'를 표방하면서 기본적인 헌법, 정당, 선거, 국제 정치와 같은 정치사의 영역에서 가족, 섹스, 스포츠, 예술, 학문, 종교에 이르기까지 고전적인 역사학에서 다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영역을 다루었고, 19세기 독일사와 관해서는 그 깊이와 해석 면에서도 아직도 비견될 것이 없는 표준적 작업으로 평가된다.

관점의 측면에서 니퍼다이는 벨러와 완전히 반대에 위치하고 있다. 먼저 니퍼다이의 독일사 1권과 3권의 첫 문장은 '태초에 나폴레옹이 있었다(Am Anfang war Napoleon)'와 '태초에 비스마르크가 있었다(Am Anfang war Bismarck)'인데, 이는 구조를 강조한 벨러류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역사에서 개인이 차지하는 역할을 내세운 것이었다. 또한 벨러는 독일 제국을 증오한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부정적으로 묘사했고, 그의 저작에서 드러나는 당대인들은 모두 찌들어 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니퍼다이는 19세기 독일의 근대성과 그 찬란한 성취를 먼저 강조한다. 그는 특히 과학과 음악, 대학을 19세기 독일의 최대 유산으로 내세우며, 프로이센의 개혁에서부터 시작되는 독일사의 온건한 개혁 능력 및 이를 바탕으로 한 갈등의 해결, 독일 제국 시기 나타나는 대중 정치의 발전과 같은 현상 등을 부각한다.

하지만 니퍼다이는 19세기 독일의 빛만을 묘사하려 하지 않았다. '역사는 회색이며, 이는 무한한 그림자 속에 있다.'라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니퍼다이는 트라이치케와 벨러로 대표되는 이분법적, 당파적 역사 서술을 거부하고 19세기 독일이 보여주는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총체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니퍼다이에 따르면 군국주의와 시민 계급의 비정치성은 분명한 독일만의 부정적인 특수성이며, 이는 1933년과 연속성을 가진다. 그렇지만 니퍼다이는 19세기 독일이 바이마르와 서독과도 분명한 연속성을 가진다고 주장하면서, 19세기 독일 및 독일 제국이 보여준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측면을 총체적으로 이해할 것을 강조했다.

니퍼다이에 따르면 19세기 독일의 이러한 양가적이고 복합적인 측면은 결국 서구 근대 문명 자체가 가지는 양면성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며, 나치즘 역시 서구 근대 문명의 병리적 현상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마이네케 및 코젤레크의 관점과도 유사성을 보이는데, 1980년대 이후 미셸 푸코 등의 영향력 속에서 더욱 심도 깊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5. 존더베크를 넘어서

니퍼다이와 일리, 블랙번의 비판을 거치며 존더베크 논의 자체는 학술적 기반을 상당 부분 상실하였고, 벨러를 비롯한 사회사가들은 19세기 독일사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견해를 수정하기 시작했다.[17]

게다가 사회사가들의 제자들은 사회사적 접근을 계승하면서도 존더베크 테제와 상반된 연구를 전개해 나가기 시작했다. 한스 몸젠의 제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일상사적 접근을 대거 수용하면서 미셸 푸코의 논의를 바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을 '고전적 근대성의 위기'로, 홀로코스트를 '근대 문명의 병리'로 파악하였다. 코카의 제자 우테 프레베르트는 시민 계급에서 유행한 결투를 연구하면서 벨러가 이를 시민 계급의 봉건화를 나타내는 징표로 파악한 것과 다르게 피에르 부르디외 아비투스 개념을 가져와 시민 계급에게 결투는 독자적 정체성과 자신감을 드러내는 '사회적 아비투스'였음을 지적했다.

여기에 독일 재통일이라는 역사적 대사건 역시 사회사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었다. 사회사가들은 독일의 분단이 독일사의 존더베크에서 비롯된 것이며, 독일은 분단된 서독에서 민주주의를 실현함으로써 존더베크에서 벗어나 정상 국가로 복귀할 수 있으며, 통일은 오히려 서독의 정체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1990년의 독일 재통일은 그러한 사회사의 사상적 기반을 무너뜨림과 동시에 그 누구도 이를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적 역사학의 효용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이러한 전방위적인 도전에 맞서 벨러는 18세기에서 1990년까지 독일사를 총체적으로 다룬 독일 사회사(Deutsche Gesellschaftsgeschichte, 1987-2008) 5부작에서 비판적, 사회사적 접근을 유지하고자 했다. 독일 사회사의 첫 문장은 '태초에 혁명이 없었다(Im Anfang steht keine Revolution)'이었는데, 이는 여전히 그가 부르주아 혁명의 실패를 독일 근대사의 중심에 놓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벨러는 기존의 독일사의 특수성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특별한 조건들(Sonderbedingungen)'로 다소 완화하여 표현하였고, 현대 독일은 1949년 서독의 성립과 1990년 재통일을 거치며 나치즘과 관련된 그러한 특수성과 작별하고 서방으로 되돌아왔다고 파악했다.

또한 빙클러는 2000년 2권 분량의 독일 근대사 통사 서구로의 긴 여정(Der lange Weg nach Westen)에서 프랑스 혁명에서 독일 재통일까지의 역사를 다루면서 독일 근대사를 존더베크를 극복하고 서방으로의 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 제시했다. 빙클러는 자유주의적이고 서구 중심적 성향이 매우 강한 역사가로, 2009년부터 2015년까지는 서양의 역사(Geschichte der Westen) 4부작을 저술하여 서양의 역사를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을 중심으로 한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 과정으로 묘사했다.

벨러와 빙클러의 종합은 기본적으로 존더베크 테제의 대표자들에 의한 종합으로, 독일사에 대한 비판적 예외주의 시각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었고 이는 그들 저작의 한계점이기도 했다.

5.1. 울리히 헤르베르트

벨러와 빙클러를 넘어서는 포스트-존더베크 시대를 대표하는 독일 근대사 서술은 울리히 헤르베르트20세기 독일사(Geschichte Deutschlands im 20. Jahrhundert, 2014)라 할 수 있다. 헤르베르트는 니트하머의 제자이자 포이케르트의 학문적 동반자였고, 나치 시대 연구의 일상사적 흐름을 선도한 역사가였다. 그는 벨러 및 빙클러와 달리 독일 근대사를 독일만의 특수성에 매몰시키지 않고 1880년경부터 시작된 산업 사회의 형성으로 대표되는 유럽 고도 근대(Hochmoderne, High Modernity)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헤르베르트는 에릭 홉스봄 이래 고전적인 관점인 '짧은 20세기'보다는 '긴 20세기'를 내세웠다. 그는 1871년 독일 제국 성립부터 1990년까지 20세기 독일사를 고도 근대 혹은 산업 근대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서술했다. 그에게 있어 독일 고도 근대의 중요한 특징은 유례없을 정도로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 있다. 특히 제국 시대 극단적으로 가속화된 산업화를 경험하면서 독일의 고도 근대는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극단적인 성격을 띠면서 발전하였다. 20세기 초반 세계대전과 나치즘의 파국은 고도 근대가 제기하는 도전을 폭력적으로 대응한 사례였다. 한편으로 전후 서독의 복지 국가와 민주주의는 이에 대한 평화적인 대응의 성공 사례이며, 1990년은 냉전의 종식 및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고도 근대가 종식되고 새로운 시대가 출현하는 변곡점이었다.

헤르베르트의 고도 근대론은 포이케르트의 '고전적 근대성의 위기' 테제를 더욱 정교하게 발전시킨 것이며, 현 시점에서 20세기 독일사를 설명하는 데 있어 가장 영향력 있는 관점 중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18]

6. 참고 문헌


[1] 역사가 울리히 헤르베르트는 "나는 독일과 다른 나라와의 차이가 그렇게 크다는 것에 확신이 없다."라고 말한 바 있다. [2] 심정적으로는 전통적인 독일 군주제를 지지하지만 현실적, 이성적으로 공화국 체제가 불가피하기에 이를 지지한다는 입장 [3] 크리스토퍼 클라크의 몽유병자들(Sleepwalkers)은 이를 대표하는 저작이다. [4] The Crisis of German Ideology: Intellectual Origins of the Third Reich(1964) [5] The German Conception of History. The National Tradition of Historical Thought from Herder to the Present(1968) [6] The Politics of Cultural Despair. A Study in the Rise of the Germanic Ideology(1961) [7] 미국인이다. [8] The German Idea of Freedom(1957) [9] 1945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했다. [10] The Decline of the German Mandarins. The German Academic Community 1890–1933(1969) [11] 쉬더와 콘체, 브루너는 모두 나치 지지자였고, 쉬더와 콘체는 사후에야 이 사실이 조명되면서 독일 역사학계에서 이를 둘러싼 큰 논쟁이 있었다. [12] 쉬더와 콘체는 모두 한스 로트펠스의 제자였는데, 로트펠스는 비록 나치 시대에 추방되기는 하였지만 그가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에서 재직하면서 발전시킨 민족사(Volksgeschichte)는 나치의 동유럽 정책을 정당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3] 이에 대해 코젤레크와 벨러, 코카를 비롯한 1970~80년대 빌레펠트 사학과 교수진 및 그들의 제자들을 '빌레펠트 학파'라고 부르기도 하나, 코젤레크의 경우 벨러 및 코카와 접근 방향이 다소 이질적이었고 심지어 벨러와 코카도 세부적으로 지향점이 달랐기에 이를 의문시하는 의견도 있다. [14] 코젤레크의 경우 지적으로 콘체와 브루너, 카를 슈미트를 비롯한 독일 신보수주의 경향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고, 프로이센을 비롯한 독일의 보수주의적 전통을 매우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또한 정치적으로도 기독교민주연합을 지지했는데, 벨러를 비롯한 빌레펠트 역사가들은 사회민주당을 지지하였기에 이 역시 이질적이었다. [15] 리터는 한스 헤르츠펠트의 제자이며, 코카는 리터의 제자이다. [16] 쉬더의 제자이며, 빌레펠트에서 재직했다. [17] 애초에 리터와 코카는 존더베크 논의에 있어 절충적인 입장이었다. [18] 일리는 헤르베르트의 20세기 독일사에 대한 서평에서 벨러와 빙클러를 넘어섰다고 말하기까지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