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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13:54:59

계속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투 목록 | 유럽/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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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전쟁 | 제2차 소핀전쟁 ( )
핀란드어: Jatkosota[1] (계속전쟁))
스웨덴어: Fortsättningskriget (계속전쟁)
러시아어: Советско-финская война (1941—1944) (소련-핀란드 전쟁 1941-1944),
Советско-финский фронт (소련-핀란드 전선)
Война-продолжение (계속전쟁)
독일어: Fortsetzungskrieg (계속전쟁)
영어: Continuation War (계속전쟁)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innishTroopsInLaplandWar_1944_crossing_river.jpg
▲ 자전거를 끌고 가는 핀란드 방위군 병사
날짜
1941년 6월 25일 ~ 1944년 9월 19일
장소
핀란드 카렐리야, 소련 러시아 SFSR 무르만스크
원인
겨울전쟁의 연장전
교전국
[[틀:깃발|]][[틀:깃발|]][[핀란드 공화국|]]

[[나치 독일|]][[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소련|]]
지원국

[[이탈리아 왕국|]][[틀:국기|]][[틀:국기|]]
[[틀:깃발|]][[틀:깃발|]][[스웨덴 왕국|]]

[[영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2]
[[틀:깃발|]][[틀:깃발|]][[리스토 뤼티|]]
[[틀:깃발|]][[틀:깃발|]][[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틀:깃발|]][[틀:깃발|]][[이오시프 스탈린|]]
결과
소련의 승리
영향
모스크바 전선 휴전 협정 체결
전력
[[틀:깃발|]][[틀:깃발|]][[핀란드군|]][[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45만 명 [[틀:깃발|]][[틀:깃발|]][[소련군|]]: 90 ~ 150만 명
군인 피해
[[틀:깃발|]][[틀:깃발|]][[핀란드군|]] 총 피해: 약 22만 5000명
전사 및 실종: 6만 3200명
포로: 2370 ~ 3500명
[[틀:깃발|]][[틀:깃발|]][[독일 국방군|]] 총 피해: 8만 4000명
전사 및 실종: 2만 3200명
부상: 6만 4000명
[[틀:깃발|]][[틀:깃발|]][[소련군|]] 총 피해: 89 ~ 94만 명
전사 및 실종: 25 ~ 30만 5000명
부상: 57만 5000명
포로: 6만 4000명
민간인 피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명 사망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명 사망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핀란드의 독소전쟁 참전3.2. 교착3.3. 독일의 패망과 종전
3.3.1. 스텔라 폴라리스 작전
4. 핀란드의 유대인 및 러시아인 탄압5. 미디어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중반인 1941년 6월 25일부터 1944년 9월 19일까지 계속된 핀란드 소련의 전쟁. 보다 공식적인 명칭은 제2차 소련-핀란드/핀란드-소련 전쟁이다. 연속전쟁이라고도 한다.

1939년 11월 30일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면서 시작된 겨울전쟁의 후속 전쟁이다.

2. 배경


"Kuivukoon käteni, jonka on pakko allekirjoittaa tällainen paperi!" #[3]
“이런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 손이여 시들어버려라”
겨울전쟁의 패배 이후 1940년 "모스크바 조약"으로 조국 핀란드의 영토를 소련에게 할양하는 문서에 서명한 퀴외스티 칼리오 핀란드 대통령의 발언.[4]

핀란드는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며 선전했지만 결국 패배하고 말았고, 소련에게 영토의 11%를 빼앗겼다. 그러나 소련은 전쟁 후에도 계속 핀란드를 압박했고, 이에 핀란드는 소련이 언제 침공을 재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러나 영국, 미국 등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과의 협력을 모색하고 있었고, 따라서 핀란드를 외면했다. 그래서 핀란드가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나치 독일밖에 없었다.

핀란드는 겨울전쟁 이후 소련의 압박에 시달리며, 부지런히 군비를 확장하였다. 영국은 베저위붕 작전 이후 북유럽에서 완전히 철수하였고, 독일은 노르웨이까지 진출하였다. 핀란드는 이제 서쪽으로는 독일, 동쪽으로는 소련을 두고 심각한 안보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은 발트 3국을 합병하였으며, 소련의 다음 목표가 핀란드라는 첩보가 속속들이 보고되는 상황이었다.

이미 소련과 불완전한 전쟁을 치룬 핀란드는 소련이 얼마든지 핀란드를 재침공할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베저위붕 작전 이후로 줄곧 핀란드를 외면하였으며, 오히려 소련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핀란드는 "연합국은 소련과의 협력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여 소련의 핀란드 침공을 묵인하고 있으며, 핀란드는 주권을 보호하기 위해서 악마와 손을 잡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라고 영국에 항의하며 독일과의 안전보장, 그리고 동맹을 체결한다. #

독일군은 이후 핀란드에 주둔하였고, 핀란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일은 핀란드와 아무런 상의나 협조도 없이 바르바로사 작전을 실시하며 대대적으로 소련을 침공하였고,[5] 아돌프 히틀러 핀란드가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할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한다. 핀란드는 전쟁 의사가 없다고 필사적으로 해명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소련의 전투기가 핀란드를 폭격하고 있는 중이었다.

노르웨이에 있던 독일 산악군단 소속의 2개 산악사단도 핀란드 페차모로 들어왔다.[6]

그 외에도 핀란드는 소련에 의해 상실한 조국의 영토들을 언젠가는 다시 회복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잘 싸웠다 한들 영토를 상실한 것은 여전했으며 핀란드인들은 잃어버린 조국의 땅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때문에 대다수의 핀란드인들은 소련을 증오하며 잃어버린 땅을 언제가는 반드시 다시 찾아야만 한다고 여기고, 또한 언젠가 적절한 기회가 온다면 기꺼이 활용, 자신들의 잃어버린 땅을 찾을 수 있다고 보고 있었다.

3. 전개

3.1. 핀란드의 독소전쟁 참전

결국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독소전쟁이 시작되자 3일 뒤인 6월 25일 아침, 소련을 폭격한 독일군 비행기에게 연료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소련 공군기들이 핀란드 내 18개 도시를 폭격하면서 핀란드군도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 다른 주장으론 핀란드 주둔 독일 산악사단이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소련을 침공하면서 시작됐다는 의견도 있다. 이렇듯 겨울전쟁의 후속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계속전쟁'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ntinuation_War_December_1941_English.jpg
1941년 12월의 전황.

3.2. 교착

핀란드는 전력의 열세로 전쟁기간 동안 목표였던 무르만스크 함락에는 실패했다. 무장친위대 산악사단이 1941년 11월 말 무르만스크 교외 30km까지 진격했지만, 아직 외교관계를 가지고 있던 미국이 더 이상의 진격을 하지 말라고 핀란드에게 요청하여 친위대의 진격을 보조해줄 핀란드군이 멈춤으로써[7] 이 부대의 진격도 멈췄다.[8] 사실 이 지역은 12월이 되면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지는 극한지라 전쟁 중에도 동계기간 동안에는 대대급 이상의 대규모 부대기동이 힘들었다. 동계기간 동안 활동하는 육군 부대는 극소수의 정찰병들 뿐. 그리고 무르만스크는 미국의 렌드리스 전쟁물자가 소련으로 들어오는 항구였다. 만일 독일군(혹은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면 군수물자 수송이 대단히 힘들어지기 때문에 미국이 핀란드에게 진격 중지 요청을 한 것이다. 어차피 핀란드는 빼앗긴 자국 영토의 회복이 목적이지 굳이 미국과 적대할 이유가 없으니 여기서 멈춘 것이었다.

이후, 핀란드는 1941년부터 1944년까지 7개 사단 병력으로 레닌그라드 공방전에 참여해 독일 북부집단군과 함께 레닌그라드를 포위했지만, 주로 동카렐리야 전선 부근만 지키고 있었고, 여러번 독일의 요청에 따라 독일군과 레닌그라드의 라도가 호수 보급로 및 소련 피난민 대피로인 '생명의 길' 폭격 작전을 비롯해 소규모 공세를 펼쳤지만 만네르헤임은 영토 수복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해 적극적으로 공세에 참여하지 않았다.

핀란드군은 나치 독일과 함께 무르만스크와 레닌그라드를 지키던 소련군과의 전투를 치렀고, 영국과의 공중전을 치르기도 했으며, 위와 같은 영미 연합군의 외교적인 압박을 받았다. 공식적으론 핀란드가 독일군과 동맹을 맺고 전쟁을 시작한 것이므로 미국, 영국 등의 연합군도 핀란드와 교전할 의무가 있었고 실제로 영국은 핀란드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영국이 선전포고를 하자 핀란드군 장병들이 "이제 영국 신사 양반들과 싸워야 하니 군복도 제일 깨끗한 것으로 입어야 하나?"라고 이죽거렸다는 야사가 있다. 유일한 교전사례로 1941년 7월 30일 영국 전투기들이 키르케네스 페차모에 공습을 가한 적이 있는데 이 공습은 16기의 전투기를 잃고 성과없이 끝났다.

핀란드는 계속전쟁 기간 동안 이전에 빼앗긴 동카리알라 지역을 되찾고 1944년까지 유지했다. 하지만 소련이 미국의 쇼미더머니에 힘입은 지원과 자체적인 역량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고, 1944년 6월 바그라티온 작전과 병행해 진행된 소련군의 일제공세에 그 동안 유지되던 방어선이 뚫리면서 핀란드는 동 카리알라[9]를 다시 내주게 된다. 현 핀란드 동쪽의 국경선이 얇은 땅을 사이에 두고 라도가 호에서 격리되어 있는 등 인위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

3.3. 독일의 패망과 종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ontinuation_War_September_1944_English.jpg
1944년 9월의 전황.

이미 독일도 싹 밀려버린데다 자신들도 체급 차이로 인해 더 이상 전선을 유지할 능력이 없어진 핀란드는 필사적으로 외교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핀란드는 독일의 도움으로 전쟁에 나섰지만 공식적으로 독일과 동맹 관계는 아니었고 다만 1944년 6월에 독일의 요구로 방위조약을 체결했는데, 리스토 뤼티 당시 핀란드 대통령과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의 이름으로 체결되어 의회의 동의를 얻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핀란드 의회와 뤼티 대통령, 만네르헤임은 합의를 통해 뤼티를 퇴임시키고, 만네르헤임이 대통령직에 올라 "방위조약은 뤼티 대통령 개인의 이름으로 체결된 것이다"라는 이유로 독일과의 방위조약을 파기하고 소련과 평화 협정을 맺어 전쟁을 끝냈다.

이후 핀란드는 핀란드 영토에 남은 독일 파견군에게 이대로면 소련군이 직접 독일군을 몰아내러 오게 된다 하며 온건하게 후퇴를 종용하였다. 하지만 독일군이 노르웨이로 후퇴하며 분탕질을 치는 통에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라플란드 전쟁을 치러야 했다.[10] 어쨌든 독일 편에 붙었다가 패배했으므로 핀란드는 소련에 6억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11]을 지불했으며, 포르칼라 임차, 동 카리알라 페차모 일대의 완전 할양 등 추가적인 영토 손실을 감내해야 했다. 소련은 평화 협정 이전까지 핀란드에게 무조건 항복을 조건으로 내세웠고 다른 동유럽 국가들처럼 핀란드 소비에트 정권을 세울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으나 당시 소련은 겨울전쟁의 교훈을 기억하고 있었고 나치 독일을 완전히 밀어붙이는데 주력군을 집중해야 했기 때문에 핀란드에 지나치게 발이 묶이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적당한 선에서 협정을 끝냈다.

전쟁의 결과는 이렇게 좋지 않게 끝났지만, 핀란드는 만네르헤임이 외교력을 발휘해, 추축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정치인들만 처벌되는 선에서 전후처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던 게 겨울전쟁-계속전쟁에서 보여준 군사적 역량과 더불어 외교력 덕분에 동유럽 전체가 공산화당하는 동안 독립을 유지하기는 했고, 그렇게 자유진영에 남아있었던 덕에 현재까지도 이웃 동부유럽보다 거진 두 배 이상으로 잘 살고 있는 중.

소련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핀란드의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인간흉기 라우리 퇴르니의 경우와 같이 몇몇 병사들이 독일군으로 적을 아예 옮겨서 2차 대전 종전 때까지 소련군과 싸우기도 했다. 물론 이는 당시 핀란드에서 불법이었고 이들은 종전 후 체포되는데 위의 퇴르니의 경우 교도소를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해 미군으로 적을 옮긴 후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해서 싸우다가 헬기 사고로 전사하였다.[12]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 한스 빈트 등 유명한 핀란드 에이스 전투조종사들은 사실 겨울전쟁이 아니라 이 계속전쟁에서 격추수를 쌓았다.

3.3.1. 스텔라 폴라리스 작전

Operation Stella Polaris, Operaatio Stella Polaris

계속전쟁 이후 소련이 전후에 침공할 것을 대비해 벌인 비밀작전.

핀란드는 자신의 암호 자산을 내주기 싫어했으며, 또한 소련이 침공할 경우 게릴라전을 위한 발판의 마련으로 스웨덴에 암호자재 등을 운반한 작전이다. 그러나 계속전쟁 이후 소련의 침공은 없었고, 비밀경찰 발포(Valpo / Stapo)[13]에서 이 작전을 벌인 자들을 체포했다.

4. 핀란드의 유대인 및 러시아인 탄압

핀란드는 1942년 11월 8명의 유대인 난민을 발트의 에스토니아로 추방했다. 이들은 곧바로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고, 1명만이 살아남았다. 현재 헬싱키에는 이 때 희생된 8명의 유대인 난민에 대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1942년 7월 말 하인리히 힘러가 핀란드를 방문했는데, 당시 핀란드 총리 유카 랑겔과 힘러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 때 유대인 문제에 대한 요구를 전달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재무장관 배이뇌 탄네르와 사회장관 카를아우구스트 파게르홀름은 사회민주당 소속으로, 유대인들을 독일에 팔아넘기는 것에 강경하게 반대해서, 유대인들을 독일에 넘길 경우 내각에서 사퇴하겠다고 통첩하는 한편 랑겔과 힘러의 밀실야합을 사민당 당보들을 통해 폭로했다. 하지만 이에 호응한 것은 좌파 언론들 뿐이었고 우파 언론들은 침묵했다.

결국 내무장관 토이보 호렐리(국민연합당)와 발포의 총수 아르노 안토니가 총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기들이 총대를 메고 결정하여 "형사범죄 혐의"가 있던 유대인 8명을 시범타 삼아 에스토니아로 추방시켰다. 당시 반공우파 정당이었던 국민연합당과 발포에 반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14] 탄네르와 파게르홀름은 빡쳐서 길길이 날뛰었고, 리스토 뤼티 대통령이 간신히 달래서 내각 사퇴는 막을 수 있었다. 이후 사회민주당은 스웨덴 페르 알빈 한손 총리(스웨덴 사회민주당)에게 부탁해 150여명의 유대인 난민들을 스웨덴을 통해 미국으로 탈출시켰다.

이 외에 핀란드와의 전투 중에 전쟁포로로 붙잡힌 유대계 소련인들이 포로수용소를 찾아온 게슈타포에게 끌려가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렇게 넘어간 이들의 수는 39-74명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그 중 이름은 알려진 사람이 없다.

또한 겨울전쟁 이전에 핀란드 영토였던 서카리알라 뿐 아니라 원래 러시아 땅이었던 동카렐리야를 완충지역 확보 목적으로 침공해 점령하고 군정청을 설치했는데, 핀란드의 동카리알라 군정청은 강제수용소를 만들어 러시아계 주민들을 수용했다.

다만, 수를 보면 대충 짐작하겠지만 당시 광기로 돌아가던 유대인 박해에 크게 협조적인 편[15]은 아니었다. 500명의 유대인 피난민 중 오스트리아계 유대인 8명만을 넘겨줬고, 그나마도 사회적 반감이 거셌고 핀란드계 유대인은 넘겨주지 않았다고.

오히려 자국민 유대인 300여 명은 동부전선에서 추축군과 함께(...) 소련에 맞서 싸웠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 꽤나 이질적인 일들이 핀란드군에 한해서 벌어지게 되는데, 동부전선에 참전한 유대계 핀란드인 중 세 명의 유대인들[16]은 독일군에게 철십자 훈장(...)을 권유받았는데 세 명 모두 당연하게도 거절했다고. 게다가 동부전선 말기에 가면 전선에다가 임시 시나고그(유대교 사원)을 건립해서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당시 핀란드는 겨울전쟁과 그 이후에도 이어진 주권 위협 징후로 반소감정이 아주 격화된 상황이었고 그 과정에서 유대계 핀란드인도 소련에게 주권을 위협받은 핀란드인으로서 다른 핀란드인과 동질감을 가졌다는 것이 현재의 추측이다. 독일 헬싱키 대사관 비페르트 폰 블뤼허는 히틀러에게 핀란드는 자국의 유대계 시민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리고 보고한 것[17]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이들은 전쟁기간 동안 시민권을 유지했다. 출처 여튼 이러한 사정으로 핀란드 내 유대인들은 당시 핀란드 내에서 많이 탄압받았다고 느끼지는 않는 듯 하다.

5.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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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역하면 계속전쟁이 맞지만 핀란드인들은 ( 겨울전쟁에 이은) 연장전이라는 느낌으로 쓴다. [2] 제2차 세계 대전/관련 인물 참조. [3] "May the hand wither which is forced to sign such a paper"로도 알려졌다. 출처: The White Death: The Epic of the Soviet-Finnish Winter War - Allen F. Chew p205 [4] 당시 핀란드 대통령이었던 칼리오 대통령의 절규로 조국 핀란드의 영토를 조국을 침공한 소련에게 넘기는 조약문에 서명해야만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통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도 칼리오 대통령은 심적으로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몸상태가 심각하게 악화된다. [5] 핀란드가 바르바로사 작전을 독일로부터 전파받은 날은 작전 개시 하루 전이다. 독일은 총통 지시령 21호에 의하여 긴밀한 동맹국에게도 해당 작전의 내용을 공유하지 않았다. [6] 이와 연관되어서 무장SS 부대인 제11SS의용기갑척탄병사단 '노르트란트'에 핀란드계 장병들이 입대하기도 했다. 이 핀란드계 장병들은 이후 핀란드 전선이 불리해지자 본국으로 복귀해서 핀란드군에 계속 복무했다. [7] 무르만스크 공략은 노르웨이에 주둔해 있던 독일군 2개 산악사단이 주축인 동시에 무장친위대 노르트와 핀란드군 2개 사단이 조공이었으며, 공략이 실패로 돌아간 것은 소련군이 적극적인 방어로 독일군에게 15%에 달하는 병력 손실을 안긴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모스크바 공방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독일군의 미흡한 혹한기 대비에 따른 기동력 저하와 영국 및 소련 함대의 해상 봉쇄로 인한 보급난 등이 무르만스크 함락 실패의 근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8] 앞의 이유도 있지만 사실 핀란드에서 무르만스크까지 가는 길은 거의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지도에는 길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게 동물들이 서로 쫓고 쫓기면서 자연적으로 형성된 길이라 진격하기에도 매우 부담스러웠다. [9] 지금의 카렐리야 공화국 일대. [10] 핀란드의 배신에 분노한 로타르 렌둘릭 휘하 독일군은 후퇴하면서 핀란드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라플란드의 중심도시 로바니에미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후 먹고살 길이 없어진 로바니에미 시민들이 이곳을 산타마을로 포장해서 관광지로 삼게 된다. 다만 렌둘릭의 경우 소련의 겨우 3일만에 핀란드 영토 내에서 모든 독일군을 없애라는 핀란드에 대한 무리한 요구 때문에 빠른 후퇴가 불가능했던 측면도 있다. 렌둘릭 휘하 독일군이 노르웨이까지 빠져나가려면 1000km 가량을 이동해야 했기 때문. 물론 민간인 학살의 경우 어떤 경우에든 정당화될 수 없겠지만 일단 교통과 통신을 차단하기 위해 초토화작전이 병행되었고 실제로 렌둘릭 휘하 독일군은 큰 피해 없이 후퇴할 수 있었다. [11] 소련에 대한 배상 중에는 전쟁 중 파괴된 핀란드 주재 소련 대사관저의 복구도 있었다. 사실 이건 소련 공군이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 폭격할 때 오폭을 맞고 파괴된 것이었지만 핀란드는 이것도 복구해줘야 했다. [12] 즉 군번이 핀란드군, 독일군( 무장친위대), 미군( 그린 베레)의 3가지나 된다(...). [13] Valtiollinen Poliisi / Statspolisen(국가경찰)의 줄임말. 2차대전 당시 핀란드의 방첩기관이었으며 현대 핀란드의 정보기관인 보안경찰국(수포)의 전신이기도 하다. [14] 소련과의 강화협상 이후 핀란드가 친소 국가가 되면서 발포는 나치 협조자, 사회민주당 같은 반소 좌파, 군부 인사들을 숙청하고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이 시기의 발포를 소위 "Red Valpo"라고 한다. [15] 당시 유럽에서는 국가를 막론하고 반유대주의가 팽배해있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라든가, 비시 프랑스는 유대인 차출에 적극적이었고, '쥐' 만화에서 나타난 폴란드의 반유대주의를 보면 알 수 있다. 나치들의 반유대주의가 미친놈 취급받는 것은 단순 차별에서 더 나아가서 한 민족을 공장식으로 박멸해버리겠다는 미치광이식 발상을 한 게 나치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16] Leo Skurnik, Salomon Klass, and Dina Poljakoff [17] Late in the war, Germany's ambassador to Helsinki Wipert von Blücher concluded in a report to Hitler that Finns would not endanger their citizens of Jewish origin in any situ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