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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07 15:18:28

봉소전쟁


반장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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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날짜 벌어진 일
국민당의 2차 북벌 1928년 6월 8일 북양정부 멸망
탕산회의 1928년 7월 6일~7월 12일 신중국의 질서 논의
동북역치 1928년 12월 29일 봉천군벌의 항복
편견회의 1929년 1월 1일~1929년 12월 15일 군대 감축 시작
호남 사건 1929년 2월 21일 루디핑 해임
1차 장계전쟁 1929년 3월 26일~1929년 6월 27일 리쭝런 바이충시의 1차 반란
1차 장풍전쟁 1929년 5월 23일~7월 12일 펑위샹의 1차 반란
중동로 사건 1929년 7월 10일 장쉐량이 중동로 회수
봉소전쟁 1929년 7월 20일~1929년 12월 22일 소련의 만주 침공
2차 장계전쟁 1929년 9월 7일~1929년 12월 19일 장파쿠이의 반란
2차 장풍전쟁 1929년 10월 11일~1929년 11월 20일 펑위샹의 2차 반란
장당전쟁 1929년 12월 5일~1930년 1월 14일 탕성즈 스여우싼의 반란
중원대전 1930년 4월 5일~1930년 11월 4일 옌시산의 반란 }}}}}}}}}

파일:낫질망치질_2.png 소련의 대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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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소전쟁
奉蘇戰爭
Fengtian-Soviet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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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만주 공격도
시기 1929년 9월 19일 ~ 1929년 12월 22일
장소 중화민국 흑룡강성
교전세력 파일:봉천군벌 기.png 봉천군벌 파일:소련 국기.png 소비에트 연방
지휘관 파일:봉천군벌 기.png 장쉐량
파일:봉천군벌 기.png 장징후이
파일:봉천군벌 기.png 장쭤샹
파일:봉천군벌 기.png 여영환
파일:봉천군벌 기.png 차이윈성
파일:봉천군벌 기.png 양충갑
파일:소련 국기.png 바실리 블류헤르
결과 소련의 승리
전력 10만명 4만명
피해 1만 5천명 사상 전사 150명
부상 700명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충돌의 시작과 장쉐량의 단독교섭3.2. 만저우리 회담의 결렬과 교전 발생3.3. 소련의 총공격3.4. 우수리스크 의정서와 하바롭스크 의정서
4. 결과5. 여담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개요

1929년 7월 20일에 시작된 소련과 봉천군벌 사이의 무력충돌. 9월 19일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이끄는 소련군이 전격적인 침공을 가했다. 7월 10일의 중동로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으며 봉천군벌은 12월 5일 우수리스크 의정서와 12월 22일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사실상 소련에 백기투항한다.

2. 배경

동북역치 국민정부에 합류한 봉천군벌의 수장 장쉐량은 소련이 러시아 내전의 여파로 덩치만 컸지 힘이 없다고 오판하고 소련에 대한 고압적인 외교를 전개, 급기야 경제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막대한 수익을 올리던 중동로 철도를 1929년 7월 10일 무력으로 회수하는 중동로 사건을 일으켰다. 장쉐량은 소련이 기껏해야 외교적인 대응에 그칠 것이라 여겼지만 이는 큰 착각이었다.

소련은 초기에 평화적으로 사건을 처리하겠다는 반응을 보여왔으나 봉천군벌과 난징 국민정부가 중동로 회수가 정당했음을 주장하며 강경하게 나오자 역시 강경하게 돌변, 중소단교를 통첩하였으며 7월 20일, 수분하를 공격하여 1천여명의 중국인을 구금하는 등 무력대응으로 나왔고 난징 국민정부와 장쉐량은 모두 당황하였다.

3. 전개

1927년에 소련이 중동로를 일본에 양도한다고 하는 정보가 퍼진 일이 있다. 마침 우리나라가 중동로를 회수한다는 소문이 높아지고 있던 때의 일이었다. 소련은 그 소문이 사실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가장 비열한 수단으로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적색 제국주의자와 백색 제국주의자가 이익의 일치라고 하는 양해 하에 결탁하여 우리를 먹이로 삼으려 하고 있는 사실은 이때 이미 표면화되었다. 사건 발생 후에도 백색 제국주의자 일본은 침묵을 지키기는 커녕 도리어 매스컴을 통해 선전하고 다른 나라의 불행을 기회로 삼아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
1929년 7월 19일 장제스의 일기

3.1. 충돌의 시작과 장쉐량의 단독교섭

7월 20일 수분하 기습사건이 벌어지자 당황한 장쉐량은 중동로 사건은 국부적인 사건도 아니고 동삼성이 단독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서 중앙에서 예정한 방책을 지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당연히 장제스와 국민정부 역시 뚜렷한 대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소련이 경제 위기 때문에 강경대응할 수 없을 것이라 낙관한 봉천군벌처럼 국민정부도 소련이 일본 제국을 의식하여 함부로 무력대응을 하지 않을 것이며 국제사회에 호소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7월 20일의 수분하 기습 사건에 이어 7월 23일 흑룡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삼강구(三江口)에서 중국의 여러 배가 나포당했다. 이후 소련은 만저우리, 수분하 지역에 계속하여 포격을 가하였다.

장쉐량은 이 상황에서도 소련이 전쟁까진 하지 않으리라 낙관하였지만 군사적 열세를 인식하여 길림성과 흑룡강성 쪽에 방어를 지시했다. 장쉐량은 소련에 피체포자 석방, 소련에 의한 중동철도관리국장, 부국장의 임명, 중소회의 개최, 분쟁전의 원상회복 조건 등 대폭 완화된 입장을 타진하며 중앙정부가 파견한 신임 핀란드 공사 주소양의 교섭을 무시한 채 길림교섭원 차이윈성(蔡運升)에게 하얼빈 총영사 메리니코프와 교섭하게 했다. 단교 선언 후에도 총영사 메리니코프와 부이사장 치르킨은 7월 20일까지 하얼빈에 머물고 있었는데 메리니코프는 장쉐량이 화친의 의사를 보이자 7월 23일 차이윈성의 중재로 장춘에서 장쭤샹과 회견했다. 장쭤샹이 조건부로 원상회복 할 수 있다는 답변을 하자 메리니코프는 만저우리에서 차이윈성과 교섭할 것을 약속하고 7월 25일 치르킨과 함께 하얼빈에서 소련으로 귀국하였다. 이에 장쉐량은 주력부대를 만저우리에서 해납이(海拉爾)로 이동시켰다.

7월 26일, 장쉐량은 기자간담회를 개최, 중동로 사건은 전적으로 소련이 조약을 준수하지 않고 적화선전의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자위적 조치를 한 것이라고 정당화하면서도 중국은 중동로 사건이 화평하게 해결되기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장쉐량은 난징 국민정부에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교섭에 임하고자 한다고 알렸다.

장제스는 이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소련이 지방과 중앙의 차이를 이용해 이익을 취하는 일을 막기 위해 외교를 중앙을 통해 함으로 국가위신을 지켜야 한다고 주의를 주었다. 또한 차후의 회담을 반드시 중소-봉소 협정에 근거해서 할 것이며 국장의 날인 문제 등 구체적인 문제를 지방적 차원에서 제안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장쉐량은 전쟁문제는 앞으로 중앙이 처리해야 할 것이고 국부적 교섭으로 중앙의 위신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전하면서도 날인 문제를 봉천에서 처리할 것이라며 중동로의 실질적인 문제를 지방에서 처리하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던 중 10월에 2차 장풍전쟁이 발생하자 국민정부의 관심은 만주에서 서북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3.2. 만저우리 회담의 결렬과 교전 발생

한편 차이윈성은 만철 이사 겸 중동로 부관리국장 이소경(李紹庚)과 함께 7월 30일 메리니코프와 만났다. 차이윈성은 적화선전 중지, 억류 상선 반환, 국경수비대 후퇴, 중소-봉소협정의 개정을 위한 특별회의 개최를 제안하며 군사적 긴장의 완화를 꾀했다. 하지만 메리니코프는 적화선전을 구실로 무력으로 협정을 파기하고 국제신의를 무시하는 상황에서는 소련이 어떤 인물을 파견하더라도 원만한 철도업무의 집행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원상회복을 주장하였다.

8월 1일에 2번째 회담이, 8월 2일에 3번째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소련이 원상회복을 전제로 내걸면서 결국 교섭은 결렬되었다. 그러던 중 소련 입국이 거절당한 주소양이 8월 6일 하얼빈에 도착했다. 주소양 역시 만저우리로 가서 메리니코프를 만나려고 시도했으나 소련이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면서 원상회복만을 요구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하였다. 8월 6일, 소련은 바실리 블류헤르 장군이 지휘하는 특별원동군을 조직, 극동에 주둔한 부대를 3만에서 8만으로 증강시켰고 백군의 잔당을 공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적 위협을 강화했다. 소련군은 해·공군 및 기계화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숫자는 많아도 중화기가 턱없이 부족한 장쉐량 군에겐 큰 위협이었다. 중국은 부전조약 참가국에 대소련 성명서를 배부하여 미국의 개입을 유도하려 했으나 미국은 개입을 거절했다.

8월 16일 첫 교전이 발생하여 중국군의 사상자가 발생하자 결국 봉천과 난징 모두 강경한 자세로 선회, 장쉐량이 8월 18일 방소동원령을 하달, 기자회견을 개최하여 소련에 맞설 것임을 선포했고 난징에서도 왕정팅이 기자회견을 통해 강경태도를 보였다, 8월 20일에서 8월 23일까지 장쉐량은 주소양과 동북 주요인사들을 소집, 군사회의를 개최하여 장쭤샹을 방소군 총사령관에, 만푸린을 부사령관에 임명하고 8월 25일 왕수상을 동로총지휘 겸 제1군장에, 호육곤을 서로총지휘 겸 제2군장에 임명하고 왕수상에게 4여단, 12여단, 1개 기병 여단 등 3개 여단을, 호육곤에게 3여단, 14여단, 15여단 등 3개 여단을 주어 소련군에 대응하게 했다. 하지만 왕수상은 하얼빈에 도착하여 신세계호텔에 머물며 항전하려 하지 않으며 길림군과의 충돌을 피할 뿐이었고 호육곤도 해납위에 머물며 그저 흑룡강군과의 마찰을 피하려 할 뿐이었다. 장쉐량은 또한 중앙에 군비와 군수품을 요청하였으나 중앙군의 개입은 한사코 거절했다.

8월 중순에 소련군의 공격이 거세져서 대규모 월경이 시작되자 국민정부는 8월 27일, 주독 중국대사 장작빈(蔣作賓)으로 하여금 바이마르 공화국의 중재를 통해 협상 의사를 타진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하지만 소련은 난색을 표하며 여영환의 해임만을 요구하며 국민정부의 제안을 거절했다. 장쉐량은 장작빈을 통한 교섭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으나 국민정부는 이에 대한 정보를 장쉐량에게 제공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국민정부는 8월 말 각 지역의 교섭서를 폐지하면서 교섭권이 중앙에 있음을 표명하였다. 8월 28일, 소련군은 길림성 동쪽 왕청(汪淸)과 밀산(密山)을 점령했다.

3.3. 소련의 총공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VZHD_1929_01.jpg
동북육군 15여단의 독전기를 노획한 소련군

9월 19일, 소련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었다. 공군과 해군, 해군 육전대를 앞세운 소련군은 9월 19일 수병을 함락시키고 10월 10일에 아무르 함대를 동원, 동북군의 강방함대를 공격하여 10월 12일 삼강구에서 격멸시켰다. 동북군 포함 1척, 무장함선 3척이 격침되고 250명이 전사, 150명이 포로가 되었다. 이로 인하여 10월 12일 동강이 함락되었다. 하지만 중앙은 2차 장풍전쟁에 대응하느라 장쉐량을 도울 여력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10월 19일, 비밀리에 서북내전을 평정하는 것이 소련군을 방어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면서 중화기의 대여를 요청했다.

이에 장쉐량은 표면적으로 장제스의 의견을 높이 평가하며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한 후 10월 22일 개인 고문인 윌리엄 헨리 도널드를 파견하여 카라한에게 비공식적으로 교섭 의사를 타진했다. 이러한 장쉐량의 교섭 움직임엔, 장쉐량이 군사적으로 너무 참담하게 패배한 것도 있었지만 중도로 회수가 장쉐량의 기대완 달리 만주의 경제적 위기를 돕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도 컸다. 오히려 군사적 긴장과 군사비 지출로 봉표의 가치가 폭락했고 국경봉쇄로 중동로 수입도 격감하면서 만주의 재정 위기는 더욱 커졌다.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상황이 되었으니 장쉐량이 중동로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질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중동로 봉쇄로 인하여 오히려 일본 소유의 만철의 이익만 두둑해져서 장쉐량은 일본 배만 불려주는 뻘짓을 하게 된 것이다.

10월 30일 강방함대의 잔존병력이 전멸당해 10월 31일에 제2 방어선의 중핵인 부금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점령되어 소련군은 송화강을 따라 50킬로미터를 전진했다.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한광제와 양충갑은 장쉐량에게 탄약 지원을 요청했지만 이를 수령하지 못했다. 이에 여영환이 장쭤샹에게 길림군이 방어하던 동쪽 전선에 파병을 요청했으나 원래 대소온건파였던 장쭤샹은 군대를 동원할 비용이 없다고 이를 거절했다.[1]

11월 17일, 소련군은 만저우리 인근의 찰뢰락이 요새를 공격했다. 찰뢰락이를 수비하던 중국군 17여단 소속 7천명의 병력은 대부분 전사하고 여단장 한광제도 전사했다. 이어 15여단이 포위되자 15여단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했다. 소련군은 11월 20일 만저우리와 흥안령을 점령했다. 만저우리를 수비하던 사령관 양충갑과 1500명의 동북군이 전사했다. 소련군은 이어 11월 24일 국경에서 80킬로미터 떨어진 해납이를 함락시켰다. 이로서 방위에 투입된 흑룡강군과 길림군은 대부분 붕괴되었다. 허나 만저우리와 흥안령을 비롯한 봉소국경 지대의 요충지를 대거 점령한 소련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고 하얼빈도 내버려두었고 교섭의 예비조건으로 중동로 사건 이전의 원상회복과 관리국장 및 부국장의 권리 부활, 소련인 석방을 요구했다. 11월 26일, 국민정부는 "각국이 조사단을 조직하여 현지에 와서 침략실태를 조사해 주기 바란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참혹한 패배를 당하게 되면서 봉천군벌 내부의 알력은 극심한 수준에 이르렀다. 길림군이 패배하면서 장쭤샹이 소련과 내통하여 길림의 지반을 사수하려 하고 있으며 메리니코프에게 기밀을 누설했고 장쭤샹의 소극적 태도와 더불어 장쭤샹의 조카 장립정(張立庭)이 정초의 말을 듣지 않아 패했고 이 때문에 장쉐량이 오만한 태도로 장쭤샹을 냉대했다는 둥의 소문이었다. 일단은 소문이었으나 장쉐량은 대단히 당황하였고 길림군의 폭동을 우려하여 장쭤샹을 경질하지 않고 장쭤샹 공관 부근에 편의대를 파견하여 출입자의 행동을 감시하였다.

12월 3일, 미국, 영국, 프랑스 3국이 중소 양국에 정전을 요청하며 조정에 나설 의사가 있음을 통고했으나 소련은 3국의 중재를 거부하고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밝혔다. 이에 미국이 일본에게 공동으로 조정을 나서기를 제안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오히려 주소 일본대사 다나카 도키치는 외무인민위원회 위원장 레프 카라한에게 "이번 사건을 그냥 참고 넘어간다면 귀국의 위신이 크게 실추될 것."이라면서 소련의 실력행사를 부추겼고 만철을 이용해서 병력과 군수품을 수송하게 해달라는 장쉐량의 요청도 거절했다. 일본은 이 사건을 계기로 동북군을 매우 얕잡아보게 되었고 소련군은 고평가하게 되었으며[2] 이는 훗날의 만주사변으로 이어지게 된다.

3.4. 우수리스크 의정서와 하바롭스크 의정서

어쨌거나 소련군의 강화 의사에 장쉐량은 11월 26일 원칙적으로 동의한다는 화답을 보냈다. 소련군은 장쉐량의 강화 의사를 확인한 후 11월 27일 해납이 점령을 마지막으로 공격을 중단하고 장쉐량의 제의에 동의하였다. 11월 30일 장쉐량은 장쭤샹, 여영환 등과 함께 북룡에서 대소련 문제를 토론, 차이윈성과 이소경을 수분하에 보내 소련과 담판하게 하기로 했다. 12월 1일, 차이윈성과 이소경이 우수리스크에서 소련 전권대표 시마놉스키와 담판하여 여영환의 해임, 중동철도 원상회복의 내용을 담은 우수리스크 예비의정서를 조인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2월 5일 장쉐량은 우수리스크 의정서 승인을 외무인민위원회에 통고하고 12월 8일 여영환을 해임, 막덕혜를 중동로 이사장에 임명했다.

12월 11일 차이윈성과 시마놉스키가 하바롭스크에서 다시 회담을 진행, 12월 22일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추가적으로 체결하고 바로 효력을 발휘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30년 1월 5일 동부선이 개통되었고 1월 20일부터 서부선이 개통됨으로 중동로는 1929년 7월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소련군은 전사자 150명과 부상자 700명을 낸 반면 장쉐량은 1만 5천명의 병력을 잃었다.

장쉐량이 하바롭스크 의정서의 체결을 국민정부에 통고하자 국민정부는 차이윈성의 월권 행위를 지적하였고 외교부장 왕정팅은 하바롭스크 의정서를 인정할 수 없단 입장을 밝혔다. 이에 장쉐량은 예비회의는 정식회의 날짜와 장소 및 이행선결조건의 방법을 상의하는 것이지 결코 중요문제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면서 중앙의 공식외교권을 표면적으로 옹호하자 국민정부는 실질적으로 장쉐량의 교섭을 묵인했고 하바롭스크 의정서는 국제법상의 효력을 발휘하였다.

1930년 1월, 국민정부는 막덕혜를 중동로 독판에 임명하여 중소 정식회담 전권대표로 삼았다. 막덕혜는 5월부터 모스크바에서 25차례에 걸쳐 중동로 철도 문제와 중소 외교 복교 문제를 논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31년 만주사변이 발생하면서 중소 문제는 흐지부지해졌다.

4. 결과

1930년 1월 24일 심야, 장쉐량은 봉천성의 사저에서 탕위린, 형사렴, 고유악, 유익비, 허펑린 등을 소집해 군사선후책을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대소련 교섭은 모두 외교부에 위임하고 만약 소련군이 군사행동을 일으켜도 종래의 주둔군 이외의 군대는 모두 철수하며 묵인하기로 결의하였고 옌시산과 제휴하여 필요에 따라 동북군을 평진일대로 이주시켜 산서군과 함께 중원의 잡색군대에 대비하기로 결정하는 등 관심분야를 관내로 옮겼다.

또한 장쉐량은 이번 패배가 국방계획이 불충분하였기 때문으로 보고 길림성과 흑룡강성 양성을 특별국방구로 지정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며 외환방어훈련을 실시하며 함대를 심홍렬 해군사령관에 직속시켜 강화한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그리고 위의 결정을 국민정부에 보고하고 국민정부의 허가를 받아 사성 군민수령 및 민간대표를 소집해 국방회의를 실시,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 이번 봉소전쟁에 대해서는 길림과 흑룡강 지역의 구파들은 온건한 입장을 취하면서 소련과 충돌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장쉐량이 강경론을 부추겨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과의 싸움은 길림과 흑룡강군이 맡았기 때문에 비난은 길림과 흑룡강의 구파들이 받게 되었다. 장쉐량은 무리하게 전쟁을 초래했음에도 구파들의 군사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세력을 확장, 정권을 재편하였고 이에 구파들이 분노하여 만주사변 이후 일본에 협조하는 원인을 낳게 된다.

5. 여담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일부 소스에 따르면 장쭤샹은 길림군 지휘관 정초(丁超)에게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2] 물론 일본이 소련군을 진짜로 고평가하게 되는 계기는 할힌골 전투 이후였다. 할힌골에서 크게 패한 일본은 소련과 전면전을 벌일 생각을 다시는 못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