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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5:35:19

여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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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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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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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color=#e0ffdb,#202210> 제52-54대
정몽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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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축구협회 제2대 회장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초대 위원장
여운형
呂運亨 | Lyuh Woon-hyung[1]
파일:몽양_여운형.jpg
<colbgcolor=#DA251C><colcolor=#ffffff> 출생 1886년 5월 25일[2][3]
경기도 양근군 서시면 묘곡리 (묘골)
(現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사망 1947년 7월 19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자유시 종로구 혜화동 로터리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56)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우이동 서울 여운형 묘소
본관 함양 여씨(咸陽 呂氏)[4]
재임기간 초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1945년 8월 15일 ~ 1945년 9월 7일
초대 조선인민공화국[5] 부주석
1945년 9월 6일 ~ 1946년 2월 2일
서명
파일:여운형 서명(한자).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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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A251C><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여정현, 어머니 경주 이씨
형제자매 남동생 여운홍
여동생 여윤숙
배우자 강릉 유씨 (사별)
진상하 (재혼)
자녀 장녀 여난구, 차녀 여연구, 3녀 여원구, 4녀 여형구, 5녀 여순구
장남 여봉구, 차남 여홍구, 3남 여영구, 4남 여붕구
학력 배재학당 (졸업)
금릉대학교 ( 영문학 / 학사)
종교 개신교 ( 장로교회)
신체 179cm, 80kg
최종 당적

회숙(會叔)
몽양(夢陽)
서훈 건국훈장 추서[6] }}}}}}}}}
1. 개요2. 생애3. 지도자로서의 평가4. 여담
4.1. 자유시 참변 관련 누명4.2. 일제 가담 누명4.3. 인기 많은 호남아4.4.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4.5. 기타
5. 소속 정당6. 어록7. 대중매체에서
7.1. 서적7.2. 영화7.3. 드라마7.4. 웹툰7.5. 소설7.6. 게임7.7. 기타
8. 관련 단체9. 관련 인물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3bc85bc53b42ed0c.jpg
파일:09122103331776.jpg
1947년 5월. 원구단을 배경으로 앉아있는 여운형의 모습. 가까이에서 찍은 사진.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7]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 제국호텔에서의 연설 중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통일운동가, 정치인, 언론인, 체육인. 몽양(夢陽)이라는 아호와 ' 3.1 운동의 기획자'로 일제강점기 시절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최순위권에 꼽히는 인지도와 영향력, 정치적 입지를 가진 혁명가이자 정치인이었다.

독립운동에 있어서는 3.1 운동, 대한민국 임시정부 등에 참여했고 언론 활동, 민족 문화 사업, 체육 활동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 가까워지던 1944년 조선건국동맹을 구성하여 해외 독립운동 단체들과 연계를 시도하였으며 8.15 광복 직후 조선건국동맹의 조직을 확대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혼란 정국을 예방하였으나 미군정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자 여운형은 미군정기 정치인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후에 미군정의 한반도 문제 개입을 반대하고 조선민족이 자력으로 국가를 건설해야 하며 친일파를 제외한 세력 모두가 공평하게 참여한 연대를 통해 통일 국가를 이룩하자고 주장하였다.

정치 성향은 중도좌파 김규식, 안재홍 등과 밀접하게 관련되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한 김구나 중도 세력에 비우호적이었던 박헌영[8], 이승만, 한국민주당 등의 세력과는 거리를 두었다. 연합군정기의 주요 정치인들 중에서는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서 가장 포용적인 입장이었던 동시에 일반 대중과 국론 통합을 우선시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한 지식인이었기에 민중 사이에서 인기는 높았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에는 좌우 대립이 격해지면서 중도 세력의 입지는 좁아져 갔다. 1947년 7월 19일 극우파로 추정되는 한지근(본명 이필형)에게 암살당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실패하게 된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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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지도자로서의 평가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1호
후보 여운형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관술
지지율 33% 21% 18% 16% 12%
후보 김일성 최현배 김규식 서재필 홍남표
지지율 9% 7% 6% 5% 5%
내각이 조직될 경우 적당한 인물
- 선구(先驅) 여론조사 제2호
대통령 내무부장 외무부장 재무부장 군무부장
이승만 김구 여운형 조만식 김일성
사법부장 문교부장 경제부장 교통부장 노동부장
허헌 안재홍 백남운 최용달 박헌영
* 위 표는 잡지 선구(先驅) 1945년 12월호 p.45~51에 실린 정치지도자에 대한 여론조사 자료(편집인 安峰守, 발행인 高麟燦)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여론조사 제1호에서 백분율 합계가 100%를 넘는 이유는 복수 추천이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및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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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의 r88 ( 이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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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임시 정부의 수상 후보는 여운형이다."
1946년 3월 소련 정보 보고서
"미 국무부는 여운형을 당시 해방 이후 조선에서 인기 있고 유능한 지도자로 봤다. 그는 권력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중략)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생각은 틀린 생각이다. 그는 최대한 공산주의를 이용했을 뿐이며, 그는 민중정치기구 결성을 도왔지만, 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지 않았고, 소련편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한국편이었다."
리처드 로빈슨, 미군정 관리로 근무
"이승만이나 김구는 너무 늙고 경륜도 영도력도 없는 망명객이므로 그들보다는 자유적이고 민중의 인기가 높은 여운형이 적합한 지도자이다."
김용중(당시 재미조선사정협의회장), 1946년 초
그러니까 그 당시에 미군이 들어오기 전까지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어. 충천했어. 그 때 군정청에서 여론조사를 할 때도 몽양이 1등을 했다고. 그 당시 건국준비위원회의 인기라는 건 대단한거죠.
이기형(시인), 2005년 KBS 다큐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
1946년 여운형에 대한 박헌영의 발언[9]

개요에서 말했듯 그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엇갈리지만, 양심적 지도자이면서도 당대 정치 선동가로 꼽히긴 했어도 당시 상황에서 대통령이 될 수 있는 사람이었는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해방 직후 한국 정치 상황은 극단 세력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또한 무자비했기 때문에, 권모술수와 당략에 익숙해야 1인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그런 면에서 엄청난 재능과 무서운 추진력을 발휘했고, 당시 조선 사람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있었다. 당시 설문 조사에 따라 가장 이상적인 내각을 구성한 것에 따르면, 대통령 이승만, 외무부 장관 여운형, 내무부 장관 김구, 노동부 장관 박헌영, 군사부 장관 김일성이었다. 목록을 보면 각 정치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10] 그런데 그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남들과 타협하여 남들 말에 따라 이리 기울고 저리 기울고 해서 자신의 성향을 확실히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지독히 냉정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고, 이상주의자였던 김구 등과는 극한 대립을 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그의 이상은 그저 자기 말이 옳으니 모두가 따를 거라고 생각한 어린애 같은 생각이라고 일축하는 비판도 있다. 김구는 이상주의자였지만, 그 실현을 위해 무장 투쟁을 한 반면, 그는 국내에서 언론 위주의 활동을 벌이며 일본 조선 모두에게 존중받은 독립 운동의 경험의 차이가 컸으리라.

실제로 김용기 장로[11]는 그에게 "믿음을 확실히 하고(여운형은 기독교인이다) 정치를 그만 두든지, 정치를 하려면 좌든 우든 명확히 하라"라고 한 적이 있는데, 그는 그 말을 듣지 않아서 죽음을 맞았다고 말하였다. 사실 여운형도 좌우 합작이 안 될 거라는 것을 알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 스스로도 정치에 손 떼고 농사를 지어야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다는데, 그게 생각대로 안 된다고 강원용 목사에게 털어놓은 적 있다. 게다가 여운형 성격이 애초에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상대방을 적대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밀고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이란 씨는, 그의 태도나 능력으로 볼 때 그는 대통령도 아니고 사회주의 지도자도 아니요, 요즘과 같은 부자 세상에서 스테이크 썰고 외국인들을 만나 담소를 나누는 것에 적합한 사람이므로 태평성대나 이보단 못해도 국내 활동을 할 거면 민주화가 어느 정도 진척되어 극심한 갈등이 어느 정도 해소된 사회에서 태어났어야 할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그는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단번에 파악하는데 뛰어난 센스를 지녔고 상대방에게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단 하나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그들을 수긍시키는 데에 남다른 능력을 지녔기 때문에 외교관이 적합한 것 같다고 했다. 여운형과 로마넨코의 회담록

그는 사상을 뛰어넘어 중도적 실용의 좋은 모델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12] 여운형 및 조봉암, 장건상, 조소앙 등은 진보 진영의 기원으로 점쳐지기도 한다. 사회민주주의의 오래된 미래, 다재다능하며 소통을 중시하고 현실주의적 감각을 지닌 여운형이 위인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는 중이다. 남한과 북한에서 동시에 존경받는 유일한 정치인이라는 말도 있는데, "남한에서는 색깔론[13], 북한에서는 자기 사상에 끼워 맞추는 괴이쩍은 평가 기준"이 있어서... 이건 비단 여운형만이 아니라 모든 정치인이 평가받을 때 겪을 수밖에 없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이라 하겠다.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인민 본위의 정치를 옹호하였으나 권력을 잡지 못하였고, 좌우 양쪽에서 존경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쑨원과 비슷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중국어 논문 중에 여운형과 손중산을 비교 연구한 논문도 있다.

4. 여담

4.1. 자유시 참변 관련 누명

여운형이 자유시 참변에서 왜 무죄인가[14]

2020년 이후부터 홍범도가 자유시 참변에서 독립군을 몰살했다는 역사왜곡이 돌아다니다가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라는 사태까지 일어났는데, 여운형도 자유시 참변으로 엮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몽양 여운형 선생기념사업회 황규식 부이사장은 이미 '정부의 다음 과녁이 여운형 선생이 될지 모른다'고 예측하며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대응해 나갈 것"을 대비하고 있는 중이다. #

여운형을 자유시 참변과 엮으려는 선동은 동아일보 기사의 최대 추천 덧글에서도 확인된다. 기사의 내용은 일본군의 조선인 학살을 다뤘음에도 부자연스럽게도 전혀 다른 댓글이 최대 추천수를 받고 있다. 그에 의하면 "6천에 달했다는 독립군 중 주력인 3,500여명이 대한독립군단으로 합쳐 자유시에서 재정비하고 대일전쟁을 수행하려 했지만 고려공산당이 일으킨 자유시참변이 독립투쟁을 망쳤다.공산당이야 말로 친일반동들이다.자유시참변에서 여운형은 독립투사들을 인민재판한 배심원을 한 망나니였다[15]" # 펜앤드마이크의 최대추천 덧글에서도 "교과서에 안 나오는 자유시 참변시 여운형, 여운형은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대표였고 참변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있다. 체포된 독립군들의 재판에 김규식 등과 함께 배심원으로 참석하여 재판의 정당성을 인정해 준 것으로 비판 받는다.[16]" #는 내용이 나오는 등 홍범도에게 누명을 씌우는 과정과 매우 유사한 양상의 움직임이 포착된다.
이정식[17] 교수가 이에 대해 이전부터 연구해 정리해뒀는데, # 이 교수가 집필해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된 '여운형 연구서'에서는 자유시 참변 당시 무장해제된 '독립군'의 실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주목한다.
일본에게 있어서 한국독립군은 어느 곳에 있거나 말살되어야 할 존재였지만 '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을 특별히 증오한 이유가 있었다. 이들 중에는 1920년 4-5월에 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부대가 끼어있었기 때문이다. 니항사건이라고 알려진 이 사건은 너무나 잔인무도한 것...니항이라고 알려진 니콜라예브스크는 흑룡강의 어귀, 즉 흑룡강이 오크츠해(바다)를 만나는 곳에 있는 마을인데 이곳을 점령한 야코부 트리아피친이 이끄는 공산 게릴라들은 반동파 숙청이라는 명목하에 약 6천 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학살하였는데 그중에는 약 700명의 일본거주민들이 있었고 일본영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23세의 트리아피친은 볼셰비키혁명이 성공한 후에는 한국독립을 위해 도울 것이라는 약속뿐만 아니라 그런 뜻의 합의서까지 서명하여 수백명의 한국청년들을 동원했었는데 이들은 트리아피친의 명령을 충실히 시행함으로써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었다....[한국인 부대]부대장은 박이라는 교사였는데 그가 한국청년들의 애국심을 선동하여 부대를 확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한 박이라는 교사는 김홍일이 말한 박 일리아일 것이다.
이정식,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 서울 : 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314~316.
즉, 자유시 참변에서 공격당한 부대는 수천명의 민간인을 학살한 니콜라옙스크 학살에서 주역을 맡은 한국인 부대이며,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주요 원인이라 지목한 것이다.

4.2. 일제 가담 누명

결론부터 서술하자면 논란이 있었지만 여운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등재되지 않았다.

여운형이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총독부 및 일본 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는 점을 근거로 여운형을 친일파, 혹은 일제에 부역한 여타 자치론자들과 동일선상에 두자는 주장이 있다. 여운형이 일본인들에게 능숙한 처세술을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일제에 가담했다고 볼 수는 없다. 일본 총독부의 숱한 노력에도 포섭되지 않았다는 주변인의 증언이 있다. #

2009년 후반부에 여운형이 학도병 지원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언론들끼리 물고 뜯고 싸운 적이 있다.( #1, #2). '여운형 친일반민족행위자설'이 객관적으로 처음 제기되었던 게 1980년대 친일파 연구 권위자인 임종국 선생이 처음이었다. 당시 임종국의 경우, '했다고 하면 지나친 지적이 아닐까?'라면서 '어쨌든 한 건 한 거다'이런 식으로 제기한 정도다. 이에 대해 직접 '역사문제연구소'에서 해명에 나섰다. 역사 비평 출판사, <바로 잡아야할 우리 역사 37 장면> 위의 기사에 나와 있다 이에 대해서 여운형은 명의 도용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친일 의혹설과 반론에 대해서는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 출판부 출간)책(p465 ~ p482)과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활동하는 정병준 교수가 쓴 단행본(1995년), 위키 백과 #,변은진의 《1932~1945년 여운형의 국내활동과 건국준비 = Activities in the Country and Preparation for Nation-building by Lyuh-Woonhyung, 1932~1945》(한국인물사연구, Vol.21 No.-, [2014])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러한 사설이 작성되고 의혹들이 제기된 것이 얼마 뒤 나올 친일인명사전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음모론도 존재했고, 2009년 11월 초, 친일인명사전이 발간되자 뉴데일리를 비롯한 일부 극우파들은 목록 안에 박정희는 있고 여운형이 없다는 사실을 빌미로 친일인명사전과 그 편찬위원회를 공격하고 있다. 기사가 나오자, 일부 보수 세력들은 '여운형은 친일파' → '여운형은 좌파' 이렇게 몰아가면서 '친일좌파'이라는 논리가 결여된 3단 논법을 세우며 일방적으로 몰아가면서 '골수 친일 좌빨 여운형은 건국훈장을 치탈하라'라고 꾸준히 억지를 부리고 있다.

여운형은 1945년 안 팎으로, 당시 한반도에서 활동하던 일부 미군들과 소련군들도 고평가하면서 여운형은 대중적으로도 인기 많은 지도자였다. 이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전적이 있던 극좌/극우[18] 세력들은 여운형의 입지를 줄이는 것에 혈안이었다. 이들은 여운형을 친일파라고 뒤집어씌우고 자신들을 '애국자'라 주장했다. 그 외에 일부에서 '공산당 노획 문서'를 근거로 들고 있는데, 이 문서는 언제 작성되었는지도 시기 불명으로, 타당성이 부족한 글이다. 참고

일제 말기 국내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직접 실천에 옮겨 비밀 지하 단체를 결성하고 활동하면서 독립 운동한 지도자는 거의 없었다.

국내에 남았던 '우파' 세력 가운데 조선총독부로부터 가장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던 인물은 안재홍 정도였다. 일제 말기 당시 좌파고 우파고 막론하고 거의 대부분이 총독부로부터 저항하는 방법이 칩거 생활을 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만큼 일제 말기는 엄청 살벌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수구 진영에서는 '순정 우파' 노선을 지향한 안재홍 조차도 ' 빨갱이'로 몰고, 그를 여운형과 같이 친일 행위 벌였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다. 그런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안재홍 조차도 일제 말 지하 조직을 결성할 생각조차 하지도 못하고 칩거 생활 지내면서 역사서 저술하고 지낸 판국.

1945년 미군이 입성했을 때 미군정 고문으로 위촉된 9명의 한국민주당 인사들이 '여운형은 친일 좌파'이라고 주장하면서 1945년 9월 12일, 미군이 한반도 입성하자마자 작성한 보고서에 '여운형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친일파이며 총독부로부터 2천만 엔 금전수수를 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 내용이 있다. 그러나 1946년 8월 미군정 버치 중위 장교가 ' 일본에 건너가 前 조선총독부 고관들을 심문해서 여운형의 친일 혐의를 수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사령관 존 하지에게 제안했었는데, 사령관 하지는 '일리 있는 말이다. 나는 그(여운형)의 약점을 잡고 싶다.'면서 찰스 오리오단 미군정 외무부 소속의 소령을 일본으로 조사단을 보내 과거 총독부 고관 출신 인사들 찾아가 '여운형이 친일파냐?' 여부에 대해 조사를 했다. 그 결과 1947년 3월, 미군정 보고서 결과에는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왔다.
The result of the investigation of Lyuh's Japanese connections in Japan by Charles 0'Riordan was negative. Not a scrap of supporting evidence. Most of the people 0'Riordan interviewed seemed amazed that any question had come up. They considered him one of the outstanding Korean patriots. Robinson.
찰스 오리오단에 의한 일본에서 시행한 여운형의 친일 관계에 대한 조사 결과는 '아니오'였습니다. 한 조각의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리오단이 인터뷰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의문이 나온 점에 대해 놀라했습니다. 그들은 그(여운형)를 한국의 애국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 중 한 명으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로빈슨(미군정 대령). #

그리고 1949년 반민특위 조사에서 친일 자본가 박흥식의 조사 과정에서 '여운형이 각종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는 소리를 한 것을 근거로 일부에서는 '여운형이 친일파' 근거로 주장한다. 이는 거짓된 주장이다. 반민 특위를 '망민법'이라고 까대다가 체포된 악질 친일파 이종형 조사 문서에는 '그는 ≪大東新聞(대동신문)≫ 사장으로 앉아 큰소리를 쳤고 故(고) 呂運亨(여운형) 先生(선생)이 學兵(학병) 勸誘(권유)를 했다는 거짓말을 大書特筆(대서특필)하여 덤벼들었고'라는 문장이 있다. 실제 이종형은 해방 후 자신이 운영하던 '대동신문'에 여운형의 전향 문을 그대로 실었을 뿐만 아니라 이종형 자신이 친일 시 한편을 짓고, 그것이 여운형이 직접 지은 것이라고 소개까지 했다. # 이종형에 대한 자세한 행적. #

2009년 11월, 조선일보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에서 민족문제연구소에 여운형이 친일파 명단에 실리지 않았음을 '정치 사상의 형평성' 문제를 근거로 항의하였다. 사실 이것도 헛소리다. 친일인명사전 내용을 보면 공산당 핵심 간부 가운데 한명이었던 안준이라던가 강영석(이쪽은 독립유공자까지 받았다), 주련, 김한경 등이 수록되어있고, 북한에서 고위 장관을 역임한 총독부 중추원 출신 장헌근, 북한에서 언론인으로 지낸 김정제, 박팔양, 북한에서 농림부 장관을 맡은 인정식 등등 여러 좌익 계열 친일파들이 수록되었다.

보수 언론들은 "민간단체(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행한 친일인명사전은 그렇다 치더라도 국가 기관(친일진상규명위)의 '친일파' 평가에 대해서 후손들은 불명예를 안고 살아야 한다. 또 공정하게 평가했다고 하더라도 여운형 등 좌익 사회주의 계열은 어디에도 없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라고 친일 진상규명위에 항의했다.

이에 친일진상규명위에서 여운형의 친일 행위를 조사했었다. 친일진상규명위 위원장은 "여운형의 친일 자료는 단 1건이 있었지만,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 동맹(농민 동맹과 건국 동맹)을 만들어 활동을 했고, 이를 11명의 위원들이 논의해 (보고서에 명단을 넣지 않는) 결론을 내렸다."고 입장을 밝혔다. 참고로 친일진상규명위는 우익 계열의 학자들과 심지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도 포함되어 있다. 자세한 자료 그리고 친일인명사전에서는 '반일 후 친일은 기록하지만 친일 후 반일은 다른 문제다'의 시각을 가지고 있다.

즉 여운형 친일파설을 주장하는 단체들의 사료들은 진위성이 불분명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대표적으로 한국논단 경우가 있다. 이쪽은 아예 지어내는 소리를 막 남발하고 있다. 사실 반박하는 쪽은 보수계 사학자들도 대거 포함하고 있으며 반박의 논점과 참고하는 사료 또한 폭넓다. 대표적인 인물이 국사편찬위원회에 몸담고 있는 정병준 교수와 이정식 교수, 이현희 교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이정식 교수는 ' 이승만 대통령을 재평가해야한다'는 등 이승만을 열렬 찬양하는 대표적인 우파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심지어 조갑제조차도 '박정희가 여운형 계열 건국동맹에서 활동했다!' 이런 글 쓴 게 엄청 많다. 전문적으로 사료 들고 입씨름 하지 않아도 기본적인 수사학적 측면에서만 봐도 친일 쪽의 주장은 그 반대에 비하면 미약하다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가 있다.

결론적으로 여운형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등재되기에 사료가 너무나도 부족하고, 있는 사료도 타당성과 정확성이 부족하다. 여운형이 '친일파'라고 규정지으려면 적어도 2가지 자료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나는 1940년 ~ 1945년 기간 동안 중국 난징에 가서 왕징웨이 천궁보, 저우포하이 등의 난징 괴뢰 정부 고위 인사들을 만나서 중일 전쟁 화평 공작을 했다는 자료와, 그 협력의 대가로 반대 급부를 무엇을 얻었는지에 대한 자료, 이 두 가지를 말이다. 신한청년당 시절 여운형의 밑에 있던 이광수나 장덕수만 해도 일제는 이들을 극대화로 이용했다. 또한, 이들의 친일 행적 역시 엄청나다. 여운형 밑에 일했던 이들이 이 정도로 친일 행적을 남겼는데, 신한 청년당 당수였던 여운형이라면 이광수, 장덕수하고는 비교조차도 안 될 정도의 규모로 엄청나게 이용했을 거다. 그러나 폄훼론자들이 제기하는 주장들은 거의 '학병 권유문을 작성했다'/'어용 단체에 가입했다!'라거나 이런 주장들이 전부다. 일제는 성공적인 민족성을 말살하는 통치를 위해 사회적으로 명망 높은 지사들 명의를 도용해서 각종 단체에 집어넣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무렵 여운형은 1942년 ~ 1943년경부터 항일 단체 결성에 준비하고 있었고, 1944년에 조선 건국 동맹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는 사료들은 타당성이 뚜렷하다. 조선중앙일보 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지명도가 높았던 여운형에 대하여 당시 일제 측 인사들은 그를 끌어오기 위해 숱한 회유를 한 것은 사실이다.

4.3. 인기 많은 호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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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중반, 서상천 체육관 앞에서
찍은 사진(47세) #
59세의 여운형. 챙 넓은 모자에 원형 선글라스를 착용하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기골이 장대하여 풍채가 우람한 데다가 운동을 좋아한 근육질 이었다. 유학하던 시절에 키 179cm, 80kg로 당대의 기준으로 거구였다.[19] 카이저 수염까지 멋지게 길렀기 때문에 별명이 ' 터키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의 카이저 수염). '만국부인 잡지'에서도 여운형의 수염이 호남아의 조건으로 선정된 걸 보면 그의 수염은 유명했던 모양이다. # 수염 관련 일화도 있다. 금릉 대학 시절에 카이저 수염을 기르고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학생과 교수들이 붙여준 별명이 콧수염 씨(Mr. Moustache). 나중에 운동 경기를 하면서 다른 학교에 그가 알려져서 편지가 왔는데 이름을 모르므로 Moustache라는 이름 앞으로 왔고, 사람들은 그 편지가 여운형에게 오는 줄 알고 편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옷차림에도 매우 신경을 썼는데,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고위급 외교관들이 옷을 맞춘다는 양장점에서 옷을 빼입었다.[20] 패션 센스도 뛰어나서 어느 곳이든지(그곳이 일본이라도) 길을 지나가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그가 양복을 빼입고 모자 쓰고 지팡이를 돌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은 흡사 할리우드 중년 배우를 연상하게 했다고 한다. 대화하는 태도에서도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대화를 경청하는 자세가 갖춰져 있고 타인 입장에 서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능력을 지녀서 심지어 그를 욕하던 사람들도 그와 대화하고 나면 내가 왜 그를 욕하고 다녔을까 하는 후회를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대표적인 사례가 강원용 목사). 말하자면 한국 근현대사의 몇 안 되는 미중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그와 목욕을 함께한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였던 강원용 목사의 회고록에 이런 대목이 있다.
"비록 몽양의 노선은 내가 따를 수 없는 다른 길이었지만 인간적으로는 그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우선 그는 로맨틱한 사람이었고, 한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는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 모두 뛰어난 남자였다. 나는 그의 외모에도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는 것이 나 하나만은 아니었던지 그는 정치인으로는 예외적으로 광고 모델로도 가끔 등장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잘생긴 사람도 썩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이 어처구니없는 것이었던 만큼, 내가 떠올린 생각도 그런 것이었다. 하도 잘생긴 사람이라 언젠가 한번 그와 얘기를 나누다 어디 못생긴 데가 없나 하고 그의 얼굴을 곰곰이 뜯어본 적이 있는데, 자세히 살펴봐도 역시 흠잡을 데 없는 수려한 용모였다. 그의 외모에 대한 나의 열등감이었는지, 나는 결국 작은 흠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약간 들어간 콧구멍이었다."

우가키 총독의 사위 야노는 이러한 여운형에게 아주 반해버려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만일 여자로 태어났더라면 몽양 여운형 선생과 꼭 결혼했을 것이다. 어떤 수단을 써서든지 여운형 선생과 결혼할 텐데 불행하게도 남자로 태어났다."[출처]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참모는 그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여운형은 한국 정치인 중 타인이 따르지 못할 정치인으로서의 세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로, 그는 누구보다 잘생겼다. 둘째로, 그는 뛰어난 웅변가다. 셋째로, 그는 강한 감화력과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언변과 작문 실력이 탁월하였다. 언변에서 당시 신문 환담 코너에서도 말 잘하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늘 꼽혔다. 무엇보다 그는 연설하기를 좋아했고 유명 인사의 연설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직접 시현하는 데에 능력이 있어서, 흡입력 있고 호소력 있는 언변으로 많은 명언들을 만들었다(목차에서 '그의 어록'을 참고). 그의 연설을 모은 연설집까지 출판되었을 정도. 외모가 출중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며 활발한 제스처를 사용하여 청중을 빨려들게 하는 능력이 있어서 그가 연설하면 사람들이 왁자하게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의 선동 능력은 가히 신기에 가까워서, 기록상으로 그의 선동은 청년 시절 한일 합방 무렵 이를 비판하는 연설을 한 것이 처음이었지만 일진회 소속 군수를 울게 만들었다. 스스로 연설에 대한 강박이 있었는지 어느 날에는 꿈속에서 연설하다가 손으로 책상을 탕탕 치고 발을 구르며 "여러분! 여러분은..."을 외쳤더니 침상을 두드리면서 잠꼬대로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필체가 좋아서 일제 강점기 잡지에서 유명 인사의 글씨체를 비교하며 설명하는 코너에 따르면 "그의 글씨체는 창달하며 영어는 더욱 잘 쓰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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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고마 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血濃於水 : 피는 물보다 진하다)"

활발하고 능동적인 성격을 반영하듯 악수에서도 그 기운이(?) 느껴졌는지 동시대 인물인 소설가 이태준 악수의 효과를 거론하는 글에서는 ' 맹인이라도 몽양 선생의 악수는 악수만으로도 몽양일 줄 알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청장년기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한 활동가였지만 이승만만큼 극단적인 반일주의자는 아니며, 보다 현실적·건설적인 일조(일본과 조선)제휴를 모색하고 있었다. 기골 있는 정치인으로 일조 쌍방에서 인기가 있어 장래가 촉망되고 있었지만 연합군정기에 암살되었다.
일본어 위키백과
현대 한국인의 눈으로 봐도 파격적일 정도로 개방적이어서 당시 청소년들의 우상이었다. 강원용 목사는 여운형을 첫째로 (사회)자유주의자, 둘째로 민족주의자, 셋째로 사회주의자로 평가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이것이 가장 정확한 평가라고 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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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25년 중국 상하이에서 몽양 여운형 선생(앞줄 맨 오른쪽)이 코치로 있던 야구팀이 단체 기념 촬영하는 모습.

그의 개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가 스포츠인데, YMCA 야구단 활동에서부터 시작하여 나이를 먹어서도 스포츠를 매우 좋아했고 다방면의 운동 경기에 능하였으며, 스포츠를 적극 장려하는 연설을 하였고 기고문을 냈다. 경성의 '조선 축구단'이 재정 문제로 해체되려 하자, 스스로 축구 구단 설립을 주도해 경성 축구단을 설립하기도 했다. 각종 스포츠 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여 조선 체육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다. 덴마크식 체조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했고, 청년들과 투포환 던지는 경기를 했는데 1등을 했는가 하면, 경기를 나갈까 망설였던 손기정 선수의 출전을 장려하였고, 각종 스포츠 경기의 심판을 했다. 특히 수영을 잘해서 물놀이 하다 물에 빠진 세 사람을 모두 구출한 적도 있다. 그렇게 스포츠계에서 워낙 유명해져서 광복 후 초대 조선 체육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스포츠가 대중에게 민족 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스포츠 보급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22]

1927년 11월 27일에는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씨름협회가 창립되었으며,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초대회장으로 역임한 이력이 있다.[23]

40대 후반에 각종 화려하고 무거운 직함을 달고 있어 체면을 차릴 법도 한데, 철봉 운동을 보급한다고 웃통을 벗고 현대 철봉 운동법이라는 책의 모델이 되어 철봉 운동으로 다져진 튼튼한 근육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또한 해방 후 처음으로 맞는 어린이날에 환갑의 나이로 어린이들에게 조선의 미래이므로 잘 자라달라면서 연설 단상에서 최경례의 절을 올려 구경하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미소 양측 대표와 함께 참여하는 행사에서 외국 대표들이 어린 아이한테 꽃다발을 받고 관례적으로 인사를 하였으나 그 혼자 꽃다발을 받지 않고 어린아이를 번쩍 들어 안아 청중들에게로 걸어갔고, 청중들은 이를 열렬히 환호하여 남산이 울릴 정도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러한 자유 분방함 때문에 유쾌하고 장난기 어린 행동도 많이 했다고 한다. 높은 직함이 있음에도 야구 경기를 관람하면서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이기고 있으면 양손을 번쩍 들고 왁자하게 응원하거나, 업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아이들을 등에 업고 말 흉내를 내어 말 타기 놀이를 하거나, 새벽 중에 오랜 친구인 야자(也自) 이만규를 만나러 만규 집에 들렀는데 귀신 소리를 내서 만규를 놀라게 하거나, "까꿍! 나 여기 있다" # 등.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숨기는 성격이 아니고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너무나 솔직해서, 말하기 좀 민망할 법한 얘기도 그냥 다 털어놓았다고 한다. 일제 말기에 총독부 관련자들이 자신과 면담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겉으론 태연한 척 했으나 언제 날 죽일지 모르는 상황이라 너무 긴장해서 땀을 많이 흘렸는데 면담 끝나고 소변을 봤더니 오줌이 싯누렇더라는 얘기를 본인이 했고, 생전 처음 보는 기자와 인터뷰하는데 아내를 옆에 두고서 아무것도 모르고 구식 결혼한 것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았다. 이만규라거나 이란 같이 그와 친분이 있는 사람들과의 사이는 볼 거 못 볼 거 다 보여주는 사이였다. 강원용 목사가 이만규에게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데 다 벗은 것도 봤느냐?"고 물었더니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잘생겼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객관적인 지표 측면의 인기로 보자면, 조선에 거주하는 대다수 민중들 입장에서 타지에 멀리 떨어져 있는 독립 운동가보다 국내에서 독립 운동 및 사회 정비 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에 더 호감이 가는 것이 당연했다. 실로 그의 인기는 높았는데, 해방된 지 얼마 안 되어 발간된 우익 언론지 선구에서 실시한 "조선을 이끌어갈 양심적인 지도자" 설문에서 여운형이 33%(1위)를 차지하였다. 2위는 이승만(21%), 3위는 김구(18%). 참고로 당시의 언론지 설문 조사 결과가 그렇듯이 일반 민중이라기보다는 글을 읽을 수 있고, 실생활과 무관한 잡지류를 사서 구독할 여건이 되는 이들의 의견이었다. 뭐 그렇다 치더라도 언론지를 읽을 수 있던 지식인들에게 이 정도 지지를 받은 건 대단하다. 물론 이념적으로 같은 자유주의 노선인 이승만, 김구의 표는 분산된 감이 있다 라는 것은 참고 해야 할것이다.

4.4. 가족 관계와 가정 생활

가정 생활에 있어서 비판이 많다. 이하에서는 간략히 나오지만, 여운형의 사생아 문제는 지금도 결론이 나지 않는 떡밥덩어리며, 양파 껍질처럼 끝이 없다고 한다. 비판자들 입장에서는 도덕성 문제로 커지지만, 옹호자 측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었고, 사생활보다는 공적인 기여로 평가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하의 내용에 대한 판단은 개인이 알아서.

먼저 14살에 집안의 권고에 따라 결혼(조혼)하지만 17세 무렵 아내가 임신 6개월 만에 사망한다. 그 뒤로 일시적으로 어린 기생을 가까이 한 적 있었는데 재미있게 놀고 나니 기분이 찜찜하고 죄책감이 들어서 아버지한테 다 털어놓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한편 위독한 병중이었던 어머니는 죽기 전에 며느리를 빨리 보고 싶다며 혼사를 정해버렸고 몽양은 19세에 자기보다 1살 많은, 학력이 없는 평범한 여인인 진상하 씨와 재혼했다.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짓이 아니라, 삼천리 제7권 제11호(1935년 12월 1일)에 실린 인터뷰 기사[24]와 여운형 측근의 아들이고 실제 그를 알고 지냈던 이란 씨의 회고에 근거해 적어놓은 것이다.

조선 말기에는 여운형도 그렇고 거의 다 집 안에서 혼사를 정해서 멋모르고 구식 결혼을 했는데 애정 없는 결혼 생활은 잘 될 턱이 없었다. 인터뷰 내용을 볼 때 여운형은 아무리 당시 시대가 시대였다고 하지만 스스로 연애 결혼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불만과 앙금이 쌓였던 모양이다. 집을 다녀간 박헌영에게 돈으로 쓰라고 은수저 몰래 준 걸 알아채지 못하고 은수저 어디 갔나, 한참 찾아다니는 아내가 미련하다고 한 얘기에서도 그랬고 내조해주는 아내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아내가 순순한 곰같이 행동한 게 미련해보인다고 싫어한 듯하다.

결혼 2년차 21세의 나이에 홀연히 강원도 강릉으로 떠나서 초당 의숙의 교사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고, 시국이 안 되니 소학교 교사 때려 치고 평양에 있는 예수회 장로교 신학교에 입학한 뒤 중국 금릉 대학에 입학하고 해서 수년간 아내, 자식 간 사실상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하지만 시부모를 모시고 있었던 아내는 자식 부양 문제 때문에 더 이상 못 참겠어서 맏아들 봉구를 데리고 남편이 있는 상하이로 떠버렸다. 이렇게 해서 몽양이 중국으로 건너 간지 8년 만에 가족이 상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기 이전까지 상하이에서 2년~3년 정도 가정을 꾸리고 살았다. 여운형은 인터뷰에서 "부부간의 참사랑이란 것도 그때부터야 비로소 알게 되었구려. 또 그곳에서 지금 있는 아이들 넷을 또 낳았지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깨달음이 그렇게 깊지 못했던 모양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가장으로서는 형편없었다. 사방팔방 분주하게 돌아다녔고 적들에게 쫓기다보니 몇날 며칠 집을 안 들어오는 게 일상이었고 아내 진씨는 걱정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이하 인터뷰 중 진씨의 회상.
"...가슴이 타고 하로밤에 검은 머리 다 희여지는 듯 속을 썩인 적도 여러 번이지만 상해 있슬 적에 한 번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은 늘 잊혀 아니집데다. 「바깥어른」이 한창 몸을 피해서 다니시든 철인데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든지요. 그런 운동에 주야 불분하고 돌아다니실 때 일인데요. 그래서 며칠에 한 번씩 잠깐 잠깐씩 번개같이 집에 다녀오시고 가시고 하던 철인데 하루는 며칠을 어데 나가시어 집에라곤 소식조차 알 수 없더니 새벽녘에 들어오셨지요. 매우 초조하고 긴장한 얼굴빛을 지으시면서 "밥을 좀 달라"고 말씀하기에 얼른 진지 상을 차려드렸더니 황겁하게 마구 잡수실 적에 불시에 어디서 나왔는지 총과 칼을 한 무장한 중국 군대들이 휙-몰려와서 포위를 하려들지요. 그때 주인은 얼는 눈치채이고 밥 숟가락을 그냥 던지고선 그냥 날 새게 뒷 담장을 뛰어너머 어대로인지 종적을 감추셨는데 그 뒤 사오일이 되도록 아무 소식이 없으셧구려. 내 마음이 얼마나 탓겠어요. 그럴 때면 나는 밤마다 이슬을 마저 가며 뒷문박에 서서 행여나 오시는 가고 긴긴밤을 서서 새엇지요."

여운형은 이걸 듣고 옆에서 "그런 일도 있었나?"하면서 허허허 웃었고 부인은 "그것뿐이겠어요?"라고 쏘아붙였다.

게다가 여운형은 밥돌이였다. 그가 야자 이만규 씨의 집에 오랫동안 기거한 적이 있었는데 만규 씨 집에서 그의 별명은 "밥 많이 먹는 손님"이었다고 한다. 어떤 책에서는 이만규가 소식가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운형이 많이 먹는 것처럼 보여서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보인다고 썼으나... 먹성에 대해서는 본인도 인정하였다.
(중략)... 나는 실로 그때 내 건강이 남부럽잖게 상당했더니 만치, 그리고, 기운이 세여서 중국인 2인, 3인을 넘어뜨리고 남을 만했기 때문에 밥 잘 먹기로 또 유명했지요. 한 끼에 여섯 공기, 일곱 공기씩 밥을 먹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며, 그 밥 분량이 중국 학생이 먹는 분량의 2배, 3배였으니 유명하지 않을 리가 있나요. - 敎授로 大學生으로 支那 諸大學 時代의 回想, 南京金陵大學 留學時代(呂運亨)

애초에 체격이 장대하고[25]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게 습관인데다가 연설도 하고 다녔기 때문에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독립 운동이고 뭐고 사실상 밥만 축내고 벌어오는 돈은 형편없는데 애는 계속 만드는 최악의 남편이었다...

몽양이 체포되어 조선으로 송환되고서는 상하이 유학 중인 장남 봉구를 빼고 온 가족이 거처를 조선의 계동 집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런데 장남 봉구가 1933년에 상하이 복단 대학에 재학 중 장티푸스에 걸려 19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되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여운형은 가출옥된지 몇 달 안 되어 형기가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외로 갈 수도 없었고 아버지로서 아무 조처도 할 수 없었다. 차남 홍구는 1940년에 일본의 법정 대학 예과 2년에 유학중 파상풍으로 사망,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을 먼저 떠나보냈다. 먼저 떠난 장남과 차남까지 합하면 진씨 아래로 딸 다섯과 아들 셋이다. 딸 여순구가 1942년생 늦둥이로 가족 중 가장 막내고, 본처 외의 여자 사이에서 낳은 자식 둘까지 합하면 실제로 키운 자식만 총 10명이다.

그의 개방적인 성향 때문인지 당시 조선 평균 남자들과 비교해볼 때 여자들과 어울리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던 편이다. 그의 여성관이나 그가 여자를 후렸을 때 사용했을 법한 미사여구를 볼 수 있는 글은 당시 조선 내의 유명 인사들 글을 모은 학해(學海)라는 책에 기고한 《신춘(新春)을 맞이하는 젊은 여성들》이라 보러가기(17쪽부터)인데, 이 글은 기본적으로 고등 보통학교나 대학교를 졸업하여 사회에 진출할 여학생들을 상대로 계몽적인 의도로 쓴 글이다. 하지만 아무리 당시 문어체의 수준을 고려한다고 해도 '나의 사랑하는 어린 새들', '귀여운 조선의 어린 새들', '학교의 나무 아래에서 높고 먼 이상에 가슴을 태우며 배회하던 젊은 여인의 맑은 눈동자' 같은 표현에서 그의 성향을 다분히 알 수 있다.

외간 여자와 바람난 적이 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몽양이 데려온 아들만 따져서 2번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는 해방될 때까지 주변 사람들끼리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유부남의 몸으로 일본 여자[26]를 만나 1936년에 막내 아들(붕구)을 낳은 것이다. 그 때문에 해방 이후 좌우 갈등으로 여운형이 대차게 까일 때 저명한 독립 운동가가 처자식을 놔두고 일본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낳았다는 얘기가 거대 떡밥이 되어 반대편 진영에 두고두고 씹히게 되었다.

2번째는 1940년대에 도쿄를 들락날락했을 적에 일본에서 조선 미인이라고 소문난 재일 여대생 진옥출과 연애를 한 사건. 차남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27] 그것도 너무 열애를 한 나머지 임신시켜버려서 옥출이 딸(효기)을 낳자 자신이 책임지고 맡아 키우겠다며 조선에 데리고 가서 애를 아내한테 맡겨버렸다. 그 증언으로 아버지가 여운형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이란 씨의 회고에 의하면, 여운형이 재일 유학생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도쿄를 수시로 오갈 때 아는 학생들 학비가 필요하다고 광산업을 하는 아버지께 수시로 돈을 부쳐달라고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가 광산이 잘 안되자 광산을 팔고 도쿄로 가려고 여권을 신청했더니 때마침 도쿄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이란 씨의 누나가 편지로 밀고하길 선생님께 돈 드려봤자 연애 자금 드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고... 여운형 신봉자였던 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이것이 무슨 말이냐. 이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하다니!"하면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여운지은 연애 한 번 못해보고 결혼한 것에 대해 아쉬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성격이 체면 차리는 걸 싫어하는데다가 몸을 가만히 두는 걸 절대 못 견뎌 했다(못 움직이게 가둬놓으면 신경통에 걸렸다). 그리고 1940년대 초 도쿄를 오갔을 때는 여운형 인생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공무적으로 할 일이 없었던 기간이었다, 이는 일본 정치인, 특히 군부 쪽 생각은 대중국 전쟁으로 확고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여운형의 말을 듣지도 않았기 때문. 말하자면 일본에 체류했던 이 기간은 여운형 인생 처음으로 온, 가족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유일한 자유 시간이었고 동료가 광산업을 해서 돈까지 대줬다. 거기에 예쁜 여대생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더 놀라운 건 진옥출과 연애했을 때 여운형은 유부남에 50대 후반이었는데 진옥출은 미혼의 20대 초반 여대생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사나이들에게 불었던 연애 열풍 탓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앞서 이란 씨 아버지가 말한 것처럼 '위대한 지도자가 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후에 유학생들 사이에 화제가 되었다. 당시 재일 유학생들이 진옥출의 임신 소식을 듣자 그녀가 들락날락한 곳이 여경구(여운형의 오촌 조카)의 집이었으므로 여경구를 의심했는데 애 아빠가 여운형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 노인한테 아까운 미인을 빼앗겼다며 내심 부러워하면서 투덜거렸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여운형의 이러한 행보는 한국 근대의 연애사와 일맥상통한다. 연애의 사건으로 돌아본 한국 근대사를 조명한 책 #을 참고하면 구한 말 남성들은 대개 가정의 권유로 바라지 않는 조혼을 한 뒤 성욕에 눈 뜨면 보다 화끈한 연애 대상(좀 더 진전되면 첩으로 들이기도 했지만)으로 기생을 찾았으며, 사회가 근대화되면서 기생들은 매춘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면서 수가 점점 줄어들게 되었고 연애를 권장하는 풍조가 급격히 깔리자 너도 나도(남자라면 신분 고하, 연령을 막론하고 심지어 결혼 여부를 막론하고) 연애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연애 대상은 연애에 개방적인 고보 졸, 대재, 대졸의 신여성(속칭 모던 걸)들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그도 청소년들을 계도하는 성격을 지닌 글에서 "히야까시(ひやかし: '놀리다'라는 뜻의 일본어로 여성에게 수작을 걸거나 하는 것으로 일종의 희롱이라고 볼 수 있다)" 행위를 유난히 불건전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이건 지금 시대에도 맞는 말이다

물론 이러한 행보는 본처인 진씨 입장에서 놓고 본다면 천하에 둘도 없는 웬수이며 당시의 모던 걸 열풍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일반적인 성도덕과는 엇갈리는 것이었다. 그나마 진씨가 이른바 '구식 여인'으로서 자신은 무식쟁이니 잘난 남편의 활동에 대해 그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조용히 내조하는 걸 미덕으로 삼아서 그나마 여운형이 무사했지, 그녀가 여운형 어머니같이 드센 여자였으면 집이 뒤집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화려한 편력 때문에 사생활이 비교적 깨끗한 이승만과 비교당하는 식으로 열심히 까이게 되었다.[28][29]

이렇게 해서 장남, 차남이 먼저 떠나버리고 자식 농사가 늦어졌는데 교육비를 댈 형편이 못 되었다. 게다가 후에는 지속적인 테러 위협에까지 시달리자, 자식들이 죽거나 납치당할까봐 몇몇 딸들과 막내 아들을 북한 김일성한테 보냈다. 여운형이 북한에 건너가서 김일성과 대담을 나눌 때 김일성이 자식들을 자신에게 맡기면 다 해결해주겠다고 했다고 한다. 김일성은 여운형 자식들을 잘 돌봐주었고 모스크바로 유학까지 보내줘서 그들은 고위급 정치인이 되었다. 김일성은 38선을 넘어온 여운형을 몇번 만나면서 회담한 적이 있었고 여운형을 통해 남한 지역 좌익의 세를 늘리려고 했기 때문에 여운형과 나름대로 관계가 괜찮았으며 여운형이 죽은 뒤에도 그를 계속 높게 평가했다. 어찌 보면 이것도 남한에서 여운형이 평가가 절하된 이유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운형 입장에서 자식을 살리려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사실 그런 위협은 이승만 정권 성립 및 6.25 이후의 일이라서, 당시만 해도 지지도 1위를 달리던 여운형이 그런 문제를 걱정할 리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여운형이 직면했던 숱한 백색테러들을 상기해본다면 그가 느꼈을 위협감은 상당했을 것이라 추론 가능하다.

남동생으로 여운홍이 있었다. 여운홍은 형과 함께 독립 운동을 하고 해방 후에는 대한민국 국회의원 활동을 했으나, 일제 강점기 후반 독립 운동에 희망을 잃고 서서히 친일 활동으로 선회했다. 때문에 친일인명사전 전쟁 협력자 72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는 불명예를 안았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여동생도 2명이 있었다고 한다.

자식이 9명으로, 4남 5녀다. 다만 장남과 차남은 병으로 일찍 떠나보냈고, 여운형이 죽을 때까지 7명의 자식이 살아있었다. 재미있는 점은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다 九자 돌림인데, 앞 글자는 모두 새(鳥)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장남 봉구(鳳九 : 봉황), 차남 홍구(鴻九 : 기러기), 3남 영구(鸋九 : 부엉이), 4남 붕구(鵬九 : ), 장녀 난구(鸞九 : 난새 - 중국 전설에 나오는 상상의 새), 차녀 연구(鷰九 : 제비), 3녀 원구(鴛九 : 원앙), 4녀 형구(鶑九 : 꾀꼬리), 5녀 순구(鶉九 : 메추라기)인데 여기에서도 어린이와 청년들을 어린 새들로 생각했던 그 분의 사상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측근들이 진옥출과의 관계로 낳은 아이의 이름은 '효기'라고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출생년도로 볼 때 효기는 여순구인 듯하다.

장녀 난구와 차녀 연구는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닌 걸 보면 공부를 잘 한 듯하다. 난구의 경우 심장병으로 다니던 이화여전을 중퇴했다고 한다. 월북한 난구, 연구는 북한 고위 정치인이 되었고 순구, 붕구도 나름대로 직위가 있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차녀 연구는 <나의 아버지 여운형>(김영사 출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으며, 차녀와 3녀는 남한을 방문하여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간 적 있다. 북한에는 약 30여 명의 유족이 있다고 추정된다.

4.5. 기타

질문: (중국에서) 장개석 독재가 실현될까?

답: 장개석 독재는 한마디로 불가능이라고 말합니다. 독재 정권이 현하 중국 정세에 적절치 않을 뿐 아니라, 장씨의 세력이 미치는 지방이 강소성, 절강성의 2성과 기타 안휘성, 호북성, 강서성 등, 성의 일부분씩 합하여 전국의 6분의 1에 지나지 못하고, 반(反) 장개석 운동이 전국에 편만하였는데 어찌 현실성이 있겠습니까? 만일 장씨가 그 독재 정책을 고집한다면 자기와 가까운 동지와 부하까지 떠나버릴 위험성이 있음으로 장씨가 지혜로운 자라면 그 독재의 몽상을 버릴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하고 말 것임으로 그 정책은 실현되지 못하리라고 생각합니다.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신한청년당|
신한청년당
]]
1918 - 1920 정계 입문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0 - 1921 탈당


1921 - 1922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2 - 1924 탈당

1924 - 1927 입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27 - 1944 탈당

[[조선건국동맹|
조선건국동맹
]]
1944 -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정당 해산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
]]
1945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5 정당 해산


1945 - 1946 창당

[[남조선로동당|
파일:남로당_노랑.png
]]
1946 합당[34]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6 탈당

1946 - 1947 창당


[[무소속(정치)|
무소속
]]
1947 정당 해산


1947 창당
피살[35]

6. 어록

조선의 독립운동은 세계의 대세요, 신의 뜻이요, 한민족의 각성이다. 우리가 건설하려는 나라는 인민이 주인이 되어 인민이 다스리는 민주공화국이다.
-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 제국 호텔에서의 연설 중
노동자, 농민, 일반 대중을 위하는 것이 공산주의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되겠다. 노동 대중을 위해 여생을 바치겠다. 만일 우익 반동적 탄압을 한다면 오히려 공산주의 혁명을 촉진시킬 뿐이다. 나는 공산주의자를 겁내지 않는다. 그러나 급진적 좌익 이론을 나는 정당하다고 보지 않는다.[36]
인간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며 생존권은 신성한 것이다. 시대의 조류는 조만간 인간 세계의 여러 모순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서둘러 이 과거의 껍데기를 벗지 못하면 국가도 개인도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주린 자는 먹을 것을 찾고 목마른 자는 마실 것을 찾는 것은 자기의 생존권을 위한 인간 자연의 원리다. 이것을 막을 자가 있겠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는데 우리 한민족만이 홀로 생존권이 없을 수 있는가? 일본인이 생존권이 있다는 것을 한국인이 긍정하는 바이요, 한국인이 민족적 자각으로 자유와 평등을 요구하는 것은 신이 허락하는 바이다. 일본 정부는 이것을 방해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 세계는 약소 민족 해방, 부인 해방, 노동자 해방 등 세계 개조를 부르짖고 있다. 이것은 일본을 포함한 세계적 운동이다.
- 1919년 11월 27일 일본 도쿄 테이코쿠 호텔에서의 연설 중
원래 조선은 일본의 침략이 없으면[37] 하등 위협이 없다. 설혹 어떤 불행이 있다손 치더라도 국가의 실력은 족히 외타(外他)의 보호를 의뢰치 않고 자립하여 발전할 것이다. 열대의 초목을 한 대에 옮겨 유리창 수증기 속에서 억지로 그 생명을 유지한다고 하자. 그것은 벌써 생명의 가치와 의미를 잃은 것이다. 자연 공기 속에서 우로(雨露)의 혜택을 받을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없으니, 차라리 한풍냉설 속에 십사일생(十死一生)의 곤란을 받아가며 사는 것이, 타인의 보호를 받아 자기 생존의 의의를 잃고 구차하게 기생적 생활을 하는 데 비하여 어느 것이 즐겁겠는가?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엄정 중립을 지킨다. 우리가 통일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미국도 소련도 방해를 하지 않는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이지 어떤 이론이 아니다. 이념은 자주 통일이 되고 난 뒤에 그때 가서 인민에게 물어서 택하면 된다.
우리가 미소 공동 위원회를 환영하는 것은 배외적 노예 근성에서가 아니고 우리 문화 민족이 연합국과 어깨를 같이 하려는 국제적 협조 정신에서입니다. 우리가 덕수궁 석조전에 전하여 둘말은 우리의 옷은 우리 몸에 맞도록 하여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독립도 모든 생활상의 곤란도 우리 정부가 수립되는 데서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독립을 완성하려면 땅의 남북과 사상의 좌우를 가릴 필요가 어디 있는가? 과거의 지하 운동 시대를 생각해 보자. 어두컴컴한 감방에서 더듬더듬 걷다가 탁 부딪힌 후에 "너는 누구냐?"고 묻고 보면 "나는 공산주의자다." "나는 민주주의자다." 말하며 껴안고 어쩔 줄을 모르던 혁명 투사들 간에는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현실에 맞지 않는 이상은 공상이 되고, 이상이 없는 현실은 사물에 불과한 것이다. 정치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실제적 세밀을 필요로 하는 것이요, 공상적 개괄을 허하지 않는다.
나는 연합군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처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즉 만났으니 "하우 두 유 두(How do you do)"라고 인사할 것이고, 둘째 번에는 "땡큐(Thank you)"라고 감사의 뜻을 표해야할 것이고, 셋째로는 "굿 바이(Good bye)"가 있을 뿐이다. 절대로 멀리서 온 연합군을 괴롭혀서는 안 된다. 또 잘 모르는 국내 사정을 호소 의뢰해서도 안 된다. 외래 세력 의뢰심은 우리의 결점의 하나였다. 사대주의와 배외(拜外) 사상은 절대로 배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38]
분열해 있는 것은 소위 지도자뿐이요, 민중은 통일되어 있습니다. 주인은 민중인데 주인의 심부름꾼인 지도자들이 주인의 의사를 무시하고 분열만 일삼으면 주인이 쫓아낼 수밖에 없습니다.
왕년에 필리핀에 갈 때 여객선 항해 실에 들어가서 나침반을 자세히 구경한 일이 있소. 파도가 심한 밤이었는데 나침반을 보니 북쪽을 가리키고 있어야 할 바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란 말이오. 그때 내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소. 정작 움직인 것은 나침반이 아니라 파도에 흔들리는 배였소. 배가 전 후 좌우로 움직이니까 북쪽을 고수하기 위해 나침반이 쉴 새 없이 움직이더군. 나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더러 왜 변덕이 죽 끓듯 하는가하고 손가락질하는 모양이나, 만일 배가 요동하는데 나침반이 계속 한곳에 멈춰 있다면 그 바늘은 어디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게 되고 마오. 지금 파도처럼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오히려 나는 내 노선을 일관되게 고수하기 위해 계속 움직이고 있는 것이오. 바로 이러한 이치로 내가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것이오.
참다운 민주주의란 근로 대중의 복지 실현에 있다. 민주주의 가면을 쓰고 민중을 우롱하는 파쇼 권력은 그 위선과 가면을 폭로시켜야 한다.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의 골고다 희생 정신을 부활시키지 않으면 조선 기독교의 존재는 사회에 해독만 줄 것이다.[39]
의리를 지키려면 불리할 때에 지키는 것이다. 유리할 때에는 의리를 말하고 불리할 때는 배반하는 것은 불가하다.
조선 사람을 죽일 수는 있지만 조선 민족은 없애지는 못한다. 조선 인민은 친일 주구 몇 놈 때문에 일시적 치욕을 당하고 있으나 우리 인민은 영웅들을 무수히 낳고 우리 힘으로 치욕을 씻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진리다. 나의 목을 일초에 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2천만 명의 혼까지도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나의 마음까지를 벨 수는 없을 것이다.
나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죽어도 이 길을 가야 한다.
- 5번째 테러를 당하고 나서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평하든지 거기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할 필요가 없다. 내가 정당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악평해도 내가 정당할 것이요, 내가 참으로 정당치 못한 사람이면 사람들이 나를 훌륭한 사람이라고 찬양할지라도 사실은 내가 훌륭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내 사람 됨됨이에 대해 참으로 알고자 한다면 나를 평하는 그 사람의 사람됨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라. 나 자신의 정당성 여부가 문제이지 참새 떼들의 입방아는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조선 민족은 해방되었다. 어제 오전 8시 나는 조선총독부 정무 총감의 초청을 받았었다. 나는 그로부터 지나간 날 두 민족이 합하였던 것이 조선 민족에 대하여 적절했던가 하는 잘잘못을 지금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서로가 헤어지는 오늘에 있어서 좋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 오해로 서로가 피를 흘리고, 불상사를 일으키지 않도록 민중을 잘 지도해 주기 바란다는 요청을 받았다.(중략)
이제 우리 민족은 새 역사의 첫발을 내딛게 됐다. 우리는 지난날의 아프고 쓰라린 것들은 이 자리에서 잊어버리고 이 땅에 합리적이고 이상적인 낙원을 건설하여야 한다.
- 1945년 8월 16일 휘문고보 연설 중에서. 전문 보기
만일 자기의 공만을 내세우고 자기의 주장만 고집하여 독선적 배타적으로 한다면 민족 통일은 절대로 불가능하고 이 기회를 놓쳐 천추의 한을 우리 나라 역사에 남기게 될 것이니 이점을 절대로 삼가야 될 것이다.
겁쟁이들이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적어도 말려들 수 있는 대담성이 있어야 통일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민족 통일의 대도를 위해서라면 정치적으로 먹고 먹히는 것쯤은 별 문제가 안 된다. 작은 이익을 버리고 큰 이익, 민족적 이익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이미 늙었다. 그러니 나는 너희들에게 부탁한다. 이미 썩은 기둥을 너희들의 손으로 뽑아 버리고 조선의 소나무를 정성껏 다듬어 청년들이 바라는 새 조선의 집을 지어라. 모든 영예, 모든 직위가 청년들의 것이니 내 한 줌 거름이 되어 조선의 소나무를 살찌운들 무슨 한이 있으랴.
때려눕히는 자는 힘이 세지만 일어서는 자는 더 세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억센 풀대는 거센 바람 앞에서 알아본다.
죽는 것이 무서워서야 어떻게 내가 반일(反日)을 하겠는가. 이 길에서 이미 많은 조선 사람들이 생명을 바쳤거늘, 앞으로도 독립이 이룩될 때까지 민족의 넋을 지켜 죽은 사람들이 끝없이 늘어갈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서 지도자라고 떠드는 사람들은 남더러 이리 가라 저리가라 손가락질만 하구 있어. 그나마 그릇된 방향으로 마치 수탉이 세차게 싸우노라 돌진해 나가다가 서로 방향 감각을 잃고 저만치 빗나가버리는 것과 같거든. 몸소 사람들 선두에 서서 살 길을 찾아 내달리는 지도자, 바로 그런 지도자가 필요하단 말이오.
바깥에는 눈이 내리고 한없이 추운 겨울날 밤 싸늘한 독방에서 모진 잠이 깨어 다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근방에서 들려오는 몇 줄기 닭의 울음소리는 고적한 심정에 다시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어느 집 새벽닭이 울면 이웃 닭이 따라 우는 것은 닭 하나하나가 울 때를 기다렸다가 때가 되어서 우는 것이오. 남이 운다고 우는 것이 아니다. 때가 와서 생존권이 양심으로 발작(發作)된 것이 한국의 독립 운동이요. 결코 민족 자결주의에 도취한 것이 아니다.(중략) 담 너머로 은은히 흘러오는 그 계명(鷄鳴)은 우리 조선이 암흑에서 광명의 길을 맞이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 예고로 들렸다. 그래서 닭 울음소리가 들리면 힘이 나곤 했다.
범은 산을 두려워하지 않고 물고기는 깊은 물을 무서워하지 않아. 머리를 짓눌리느니 차라리 다리를 꺾이는 편이 낫지.
나는 지식 계급에 득죄할지언정 결단코 노동 대중에게는 득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 건준 집행 위원 격려 연설에서
이제 당장 해방의 날이 오는 것은 아니지만 고대하던 그 날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고 있어, 불씨에서 산불이 난다는 말이 있지 않나. 우리는 작은 물방울에 지나지 않지만 대하의 흐름에 합세해 나가세.
조용히 앉아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인다면 빙산을 만나 조난당한 배가 구조를 호소하는 SOS의 소리와 같이 각자의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으리라. 어떤 사람들처럼 제 일신의 이익이나 한 가정의 안락만을 생각지 말고 우리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고 희망하는 바를 성실히 생각하며 실현할 의욕과 정열을 가져야 한다.
1. 인류의 종국적 목적인 평화와 행복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압박과 착취가 완전 폐소(廢燒)되는 데서만 비로소 실현되는 것이다. 인류는 역사의 발전에 따라 점차로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무계급사회의 실현을 지향하고 매진한다.

2. 우리나라는 세계 각 민족의 자유 독립으로써 항구적 세계평화의 기초를 세우는데 협력하며 안으로는 일체 민주세력을 망라한 민족통일의 지반위에 우량한 내외문화를 소화하여 민주주의의 신경제를 수립함으로써 만인이 다 자유 평등한 번영생활을 할 수 있는 고급적 신사회로 발전하는 국가로 재건되어야 할 것이다.

3. 민족반역자, 친일파 등 일제잔재와 독점자본가, 모리배, 간상배(奸商輩),악덕지주, 불로유한(不勞遊閑)의 특권계급층 등 봉건자재를 숙청하고 그 정치적 대변기관과 모든 형태의 파시스트 반동파의 책동을 격파하는데서만 민주통일적 임시정부의 수립이 보장된다.

4. 근로자농민, 소시민, 인텔리, 각계각층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우리나라의 민주혁명이 결코 성공적으로 될 수 없다. 이들은 민주혁명을 위하여 한 깃발 아래 모두 집결 통일되어야 한다. 근로인민당은 이들을 굳게 단결시켜 각층 근로인민의 공동이익이 목전에 새로운 사회계급에서 뚜렷하게 전취(戰取)될 확실한 기초를 닦아 줌으로써 우리 사회의 역사와 함께 성숙하고, 민족의 이상과 함께 완성한다.

5. 우리의 민주역량이 집결되지 않고는 끊임없는 우리 선열의 희생과 세계인민의 정의의 피가 허사가 되기 쉽다. 이 귀중한 역사적 순간에 있어서 우리 근로인민당의 깃발은 인민단결과 인민해방의 상징이 되기 위하여 당원제군의 충실하고 과감한 투쟁을 절대로 요청한다. 당원은 인민 속에서 인민과 함께 생활하고 인민의 고통과 비애와 희망을 자기의 것으로 아는 충실한 인민의 벗이 되어야 한다.

6. 끊임없는 자기비판은 추진과 비약의 양식이다. 일상적 실제투쟁의 업무에 태만하면서 자기권리만 주장하는 것은 우리가 숭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원전원으로 하여금 백사(百 事) 과감한 능동적 일군이 되도록 서로 훈련하기를 힘쓰고 독선적 경향과 투쟁 회피적 문약성을 일률로 청산하라.

7. 아무리 당연한 언행이라도 그것이 전체적 역량을 증대강화하고 전체적 일을 더욱 성과적으로 되게 하는 때에만 건설적 가치를 가질 수 있다. 더욱 일을 비판함에는 혁명적 도의를 엄수하여야 하며 전우를 충고할 때는 애중심(愛重心)과 저성면담(低聲面談)으로 하여야 한다.

8. 인민대중에게나 일반 애국인사에게나 또는 민주주의 우당(友黨)에게나 늘 충실하고 겸손한 포옹적 태도로써 그들과 제휴하고 협조하여 반동진영 중에 속하는 인사 중에서도 동지를 만들고 그를 발견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 근로인민당의 특색이 되도록 하자.
여운형의 8대 유훈. 그의 사후 1947년 11월 6~7일에 세계일보에 기고되었다고.
혁명가는 침상에서 돌아가는 법이 없다. 나도 서울 한복판에서 죽을 것이다.
잘 싸워라, 싸워서 꼭 이겨라. 이 나라는 어두워도 가슴속에는 광명을 안아라. 역사는 공정하게 심판할 것이다.
조선 체육회 회장으로서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들에게 환송파티를 열어주었을때, 선수들의 등을 두드려주며 한 말.
내 집 안에서 내가 윗방으로 가든 아랫방으로 가든 객이 웬 상관이냐.
자신의 방북을 미군정이 반대하자 한 말.
국민대회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지지하느냐 인민공화국이냐 또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 것이냐를 국민의 총의에 물을 것입니다. 즉 최후의 재판은 반드시 국민이 내려야 할 것입니다. 무슨 주장, 명령보다 지금의 조선에는 복종이라는 것이 즉 결의에 따라 간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결의라도 나는 것이 있다면 나는 여기에 절대 복종하겠습니다.
1945년 10월 5일 간담회에서.
참담한 심경이다. 나를 비롯해 지도층을 자칭하는 이들이 총퇴각을 할 때라 생각한다. 우리 같은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통일은 벌써 성공했을 것이다. 조선 지도자들은 제1차 시험에서 전부 낙제다.
4당 코뮤니케가 하루 만에 무산된 뒤 1946년 1월 14일 기자회견에서.
조국... 조선...
피격 직후 단말마처럼 내뱉은 최후의 유언. 그만큼 죽을 때까지 화합된 민족과 통일된 조국을 염원했다. 그러나...
[40]
Welcome, Thank you. Good-bye. (환영합니다. 고맙소이다. 안녕히 가시오.)
- 여운형 선생의 연설 끝맺음 중 [41]

7. 대중매체에서

7.1. 서적

아쉽게도 여기 나온 책들 대부분이 현재 절판된 상황이며, 일부 도서는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 디지털 파일로 올려져 있긴 하나 협약 공공/대학도서관 내 원문검색용 컴퓨터로 봐야 한다.

《여운형 평전1 -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운동》(강덕상 지음 / 김광열 옮김, 역사비평사 출간, 2007)
중국, 일본에서 펼친 독립 운동 부분이 두꺼운 책 한 권이다. 여운형의 삶을 유례없이 치밀한 사료 조사(옛날 신문에 여운형 이름 나온 기사는 죄다 긁어모은 듯하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만...)를 통해 추적한 점에서 후덜덜한 책. 서술 태도도 다른 여운형 관련 서적에 비해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어 연구용으로 적합하다는 평가가 있다. 저자가 재일동포이며, 전 3권 기획에 현재(2009년 11월) 2권까지 일본에서 출판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무소식이다. 출판사 측 말로는 일본에서 완결이 되는 즉시 번역, 판매할 계획이라고 한다. 강덕상은 여운형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자 중 하나로 평가된다.[42]

《몽양여운형전집 1,2,3》(몽양여운형전집 발간위원회 지음, 한울아카데미 출간, 1991/1993/1997)
서간문, 기고문, 선전문, 연설문, 정치 강령, 판결문, 기사, 장례식 추도문, 여운형에 대해 연구 논문 등 여운형과 관련된 글을 죄다 실은 책. 여운형 성격이 김구같이 꼼꼼한 학자풍이 아니어서 일기 같이 혼자서 글을 따로 써둔 게 거의 없기 때문에 기초 사료의 성격으로 볼 때 이 책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의 자료도 사실 부족한 게, 여운형이 일본 등지에서 연설하고 모임 다니던 것을 생각하면 사진이라거나 영상 자료, 글 자료가 턱없이 모자란 편이라고 한다. 원문을 그대로 싣다보니 한자가 너무 많고 옛날 말이 많아서 가독성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세월이 흘러 절판되었으나 그나마 국립중앙도서관 홈페이지에서 협약도서관 공개로나마 서비스 중이다. 단 1권 부분의 연설문, 기고문은 범우 출판사에서 나온 《조선독립의 당위성(외)》이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었다. 어려운 한자 투 말들을 알기 쉽게 한글로 바꿔놓았다.

《몽양 여운형 - 시대와 사상을 초월한 융화주의자》(이정식 지음, 서울대학교 출판부 출간, 2008)
분량이 총 800페이지에 달하는 책이다. 두께가 사람을 압도하는 책이라, 방대한 양만큼 내용이 많다. 2008 문화체육관광부 우수 학술도서로 선정됐을정도로 학술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증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해서 발간한 여운형 서적에서 저자로 선정된 변은진은 여운형 연구에 대한 주요 선학(학문에서의 선배)으로 이만규, 이기형, 이정식, 강덕상, 정병준, 강영심이라고 언급하며 이들의 저술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43]

《혈농어수(血濃於水) 상, 중, 하》(강준식 지음, 아름다운책 출간, 2007)
1990년에 한길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된 《적과 동지》라는 소설을 여운형 사망 60주기를 앞두고 여운형이 고마신사 방명록에 남긴 친필 혈농어수(피는 물보다 진하다)를 제목으로 삼아 3권으로 묶어 출간한 정치 소설이다. 분량을 보니 묶는 과정에서 많은 내용을 잘라냈다. 하지만 그동안 새로 발굴된 사료에 근거해 내용을 추가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고마신사 방명록의 "혈농어수" 부분이라거나 성깔 있는. 진옥출에게 낚이는 과정(...)은 적과 동지에 나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혈농어수 필체가 발견된 건 2004년이었기 때문이다. 여운형을 중심 인물로 설정해두고 일제 말기부터 여운형 암살 직후까지 당시 상황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여운형의 삶을 조명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권력을 둘러싼 암투, 비운의 민족 역사를 다루는 것이 주요 테마이다. 하지만 소설이라는 점에서 강단 사학자에서는 참고 자료로 취급된다.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암울한 편이고 애국적 민족주의 성격이 강해서 김진명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분위기가 난다. 특히 미군정과 일본에 대한 음모론적 요소가 자주 등장하는 편이다. 애초에 출판사가 처음으로 상업성을 노리고 출간한 책이었기 때문에 목차의 제목들이 상당히 도발적이고, 내용도 좀 심각하게 거시기하다. 야한 장면이 심심할 무렵에 나타난다. 상권 초반부터 일경이 조선 여자를 성고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생각보다 빨리 자백해서(...) 흥미가 적다는 평도 있다. 야한 장면에는 대부분은 작중 가상 인물인 홍사공과 엮인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박인 부분은 유부남 여운형이 여대생 진옥출에게 낚여서 그녀가 딸을 낳을 때까지 열애하게 되는 부분인데, 역설적이게도 다른 야한 장면은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 인물 주도로 이루어져서 다 뻥이지만 이 부분만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극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생각만큼 안 팔리자 몇 달 안 되어 깔끔하게 관광타고 절판 크리 먹었고 얼마 전에 다시 내놓았다. 역사 왜곡 소설이라고 재미도 없고 감흥도 없다고 평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해방 이후 정국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 성격을 요약하자면 삼국지 (feat. 한반도) +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근데 이 책도 남다른 가치가 있는 게, 작가의 주관이 일정 부분 개입되어있고 떡밥성이 있어서 욕을 먹긴 하지만 자료 조사 측면에서는 감히 이 작가의 덕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소설을 쓰기 위해 몇 년간 여운형의 행로를 추적하여 일본도 가고 중국도 가서 갖가지 조사를 하고 지인들 말도 수집하고 다녔다고 한다. 작가의 엄청난 덕력과 개근성에 경의를 표하자. 심지어 여운형을 연구하는 공식 학계에마저 영향을 미칠 수준의 새로운 자료들을 발굴하기까지 했다. 흠좀무.

단 아쉬운 점이라면 여운형이 태어난 뒤부터 조선 광복 이전 기간, 즉 여운형이 독립 운동가로 한창 잘 활약하던 기간에 대한 서술이 미약하고 엄청 대충대충 넘어 간다는 것. 그래서 내용은 해방 직전부터 여운형이 암살당할 때까지 이야기가 대부분이라 여운형이 어떻게 좌우 틈바구니 사이에서 처참하게 몰락해 가는지 처절하게 묘사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현시창을 느끼게 해준다. 그리고 취향에 따라서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는 편향적인 묘사도 포함되어있다. 아무래도 여운형이 중심 인물이다 보니 주인공 보정으로 인해 극좌나 극우 세력에 대해 대체로 좋게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도 여운형의 한계를 지적하는 등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 편이다. 김구에 대해서는 애매한 입장을 보이지만 송진우에 대해서는 로대로 긍정적으로 묘사한 편이고, 박헌영이 밉상으로(라고 쓰고 얀데레같이) 나온다. 박헌영 측근인 이승엽이 여운형을 음해하는 데에 앞장서는 걸로 부각시켰고, 이승만이야 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다만, 이 소설에서도 은근히 이승만이 여운형 암살을 종용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은 드라마 서울1945 와 비슷하다. 그리고 고하 송진우 암살범인 한현우가 친일파와 내통했다는 식으로 나온 걸 보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진옥출이 무정의 연안 독립 동맹으로 들어갔는데 거기서 와세다 대학 출신인 재일 유학생 허갑과 만나 결혼했으나 허갑이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고 총 쏴서 SALHAE하는 참극이 일어났다는 내용도 여기서 나왔다. 이 소식을 듣고 이만규가 성질 있는 여자라면서 은근히 여운형을 놀리는 대목도 나온다.(...)

참고로, 저자 강준식은 현재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다.

《(산하어린이155) 나뉘면 넘어지고 합하면 반드시 일어난다 - 몽양 여운형》(전상봉 글. 이상권 그림, 도서 출판 산하 출간, 2009)
어린이 위인전. 2009년 11월 16일에 초판을 발행했다. 기념 사업회 추천 도서라는데 단순한 어린이 위인전을 초월해서 여운형 위인전 중에서 실증적인 고증에 가장 충실하며 삽화 또한 질이 좋고 고증도 훌륭하다(대표적으로 여운형이 암살당한 부분 삽화). 구성도 특이한데, 서두에는 해방의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하고 그 다음에는 여운형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서술한뒤 결말에서 딸 여연구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러 온 이야기가 나온다. 부록으로 기념 사업회에서 제공한 사진 자료도 실려 있다. 여운형을 알고 싶은데 두꺼운 평전이 부담스럽다면 입문 격으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나의 아버지 여운형》(여연구 지음, 신준영 편집, 김영사 출간, 2001)
여운형의 차녀이자 북한 고위급 정치인인 여연구가 저술한 아버지 일대기. 주요 특징이라면 공인이 아닌 개인, 아버지로서의 여운형을 조명한다는 점이 있다. 이 때문에 재미있는 일화들도 간간이 섞여있다. 철봉 운동을 하다가 떨어져서 다리를 삐었는데 밤새도록 얼음 찜질을 해주었다거나, 언니의 코트를 물려 입는 게 못마땅하여 코트를 안 입고 학교에 갔더니 아버지가 그날 코트를 사준다고 귓속말을 해주고서 그 다음날에 언니 것보다 더 예쁜 코트를 사주셨고, 그걸 안 어머니가 아버지한테 바가지를 긁었다는 등의 일화가 있다. 딸을 지극히 아끼는 대목들을 보면 딸내미바보 속성이 있었는지도(…) 한편 여연구 여사의 공적 지위나 성장 환경 상 자신을 키워준 김일성에 대해 상당히 우호적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곤란하게 만들고 김일성 라이벌이었던 박헌영, 미국, 이승만은 그야말로 가루가 되도록 까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김구도 제법 까인다. 이거만 보면 김구가 듣보잡 일 거 같은 비중이긴 한데. 무려 이 책은 여운형이 쇼와 천황과 만나서 조선 독립에 대해서 설파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44] 흠좀무

《여운형 투쟁사》(이만규 지음)
여운형의 평생 동료인 이만규가 지은 책으로, 여운형 환갑 잔치 때 여운형에게 원고를 헌정하기도 하였다. 1946년에 총문각에서 출간되었고, 1947년에 민주문화사에서 《여운형선생투쟁사》라는 이름으로 재발간되었다. 객관성은 의심되나 지인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여운형 평전》(이기형 지음, 실천문학사 출간)
원로 시인이자 몽양 여운형의 제자이기도 한 이기형 시인이 저술한 평전. 여운형 생애에 대한 웬만한 자료는 다 있다. 분량은 한 500페이지 정도 된다. 이기형은 여운형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자 중 하나로 평가된다.[45]

《여운형을 말한다》(이정식· 최상용·조영건 외 지음, 이규현 펴냄, 아름다운책 출간, 2007)
몽양 학술 심포지엄 논문 자료집. (사)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가 지난 2007년 7월 19일 몽양 선생 사망 60주기를 기념하여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가진 몽양 추모 학술 심포지엄의 결과물을 수록한 것이다. 논문 뒤에 몽양 여운형의 생각과 행적을 보여주는 글과 자료들을 연도별로 실어 연구자들의 참고 자료가 되도록 했다.

《여운형 평전》( 김삼웅 지음, 채륜 출간, 2015)
전 독립기념관장이자 독립운동가 및 민주화운동가 인물 평전을 다수 집필한 김삼웅이 쓴 책이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출간했다. 전문적인 서적은 아니고, 대중서다.

《건국투쟁》(박명수 지음, 백년동안 출간, 2015)
뉴라이트 계열 학자인 박명수가 쓴 책이다. 출판사 백년동안에서 출간했다. 여운형 관련 서적이라기 보단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의 성향 답게 건국준비위원회를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조명하며 친일파의 집합체인 한민당 계열을 마치 독립운동을 계승한 집단처럼 왜곡하는 결정적인 오류가 있다.[46] 단, 여운형 친일론은 확실하게 부정한다. 뉴라이트 계열에서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기에 주의하여 읽어야 한다.

박명수 주장 중 의아한 건 건국동맹의 성격인데 그의 논문에 의하면 건국동맹에는 "소위 명망있는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참여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고 주장하는데 임시정부 계열의 이유필이 어째서 명망있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여운형》(변은진 지음, 역사공간 출간, 2018)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기획한 독립운동가 시리즈 서적이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저자로 선정한 것에서도 알겠지만 변은진의 여운형에 대한 주요 연구자이며, 이만규, 이기형, 이정식, 강덕상, 정병준, 강영심이라고 언급하며 이들의 저술에 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히며[47] 학계의 주요연구 성과들을 교양서적에 맞게 요약했다.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박병엽 구술, 정창현·유영구 엮음, 선인 출간, 2010)

7.2. 영화

7.3. 드라마

7.4. 웹툰

7.5. 소설

7.6. 게임

7.7. 기타

8. 관련 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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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수정된 로마자 표기법으로는 Yeo Un-hyeong,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따른 표기는 Yǒ Unhyǒng. [2] 음력 1886년 4월 22일 [3] 192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7년 4월 22일생,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885년 4월 24일생으로 등재되어 있다. [4] 경종중(京宗中)-감사공파(監司公派) 29세 운(運) 항렬. [5] 조선인민공화국은 8.15 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중심으로 선포한 공화국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다르다. [6] 2005년 3월 1일 대통령장, 2008년 2월 21일 대한민국장 추서. [7] 실제로 그는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피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8] 원래는 친했으나 후에 알력이 생김. [9] 중앙일보 특별취재반에서 나온 <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실려 있다. [10] 단, 당시 설문 조사 대상은 38도선 이남 한정. [11] 그는 여운형이 설립한 광동학교 학생이었고, 후에 가나안 농군 학교를 설립하여 농업 사회 발전에 공헌을 하여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였다. [12] 다만 여운형의 이미지가 '중도적'이라고 여겨지게 된 이유는 그가 좌우합작운동을 적극 주도한 행적에서 나타난 것이 크다. 실질적으로 여운형의 정치적 위치는 미군정에 반대하며 박헌영과 함께 남로당 결성에 참여한 전적이 있는 등 현대 대한민국에서의 관점에서는 선명한 좌익 성향이다. 여운형이 주로 진보계의 기원으로써 여겨지는 이유이며, 이러한 면은 명백히 우익 혹은 극우적 성향으로도 여겨지는 김구가 민주당계 및 진보진영에서도 호평받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경우와 일맥상통한다. [13] 주로 뉴라이트 계열에서 몽양 여운형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매도한다. 국정교과서를 추진했던 교수 권희영은 몽양 여운형은 스탈린의 선택을 받아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려고 했다며 몽양 여운형을 색깔론으로 몰기까지 했다. [14] 이정식 교수의 책을 요약한 내용이다. [15] 2020-02-04 07:05:40 [16] 2019-07-07 22:28:18 [17] 1961년 UC버클리대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콜로라도대, 다트머스대를 거쳐 1963년부터 펜실베이니아대 정치학과에 재직하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 UC버클리대 교수와 함께 쓴 ‘한국공산주의운동사’을 1973년 미국에서 출간해 이듬해 미국 정치학회가 주는 최고 저작상인 우드로 윌슨 재단상을 받은 후 세계학계에서 한국 현대사 연구자로 인정받으며, 한국 공산주의운동사' 연구의 권위자로 한국에선 국내에서는 위암 장지연상(1990년))과 경암상(2012), 인촌상(2018년)을 받은 '한국 공산주의사'1세대 연구의 권위자이다. [18] 여운형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거나 변형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장하는 등, 해방 이후에 가장 많던 유형의 공산주의자라고 보기엔 어려운 사람이다. 해방 이후 초기에는 좌익들이 여운형에겐 호의적이었으나 이로인해 이후 여운형은 극좌/극우 모두의 눈엣가시같은 존재가 되었다. [19] 2023년 현재의 대한민국 남성 평균 신장도 훌쩍 넘는 훤칠한 체격이다. [20] 그럴 돈이 어디서 났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몽양 평전"에 의하면 사실 옷을 살 돈이 없었는데 양장점 하는 친구가 돈 안 받고 그냥 대줬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비판자들에게는 믿거나 말거나 수준. 한편 한국 양식 역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는 이중일[52] 씨가 회고한 바로는 돈도 없는 양반이 서울역 그릴 주빈석에서 노상 칼질을 하기에 이상해서 알아보니 당시 장안의 거부였던 배석환 씨가 1년 내내 서울역 그릴 주빈석을 예약해 놓다시피 대소 연회를 베풀었기 때문에 배 씨의 양해 아래 몽양 선생은 한쪽 자리를 거저 차지하고 큰 기침을 하면서 칼질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양복도 마찬가지였을 듯하다. 이런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가면서 동시에 트렌드를 선도하는 조선 최고의 인기인으로 요즘으로 치면 탑티어 인플루언서였다. 따라서 그와 가까이 하려는 자발적인 후원자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한국 현대사의 라이벌》 중 "여운형과 이승만" 부분. [22] 그런데 홈페이지에 올려진 그의 프로필을 보면 1914년 경남 금릉대에서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난징(南京)의 오류. [23] http://ssireum.sports.or.kr/gnb/sub/org_3.php|출처 [24] 제목은 夫婦座談會:二十年만에 新婚 氣分나신다는 呂運亨氏 夫妻.(부부좌담회:이십년 만에 신혼 기분 나신다는 여운형씨 부처) 물론 예나 지금이나 기사 제목은 낚시를 위한 떡밥이다. [25] 상하이 시절 그의 몸무게가 80kg이었다. [26] 옹호하는 측에서는 기생이라는 설을 들고, 우파 측이나 일본 측 자료에서는 미인계 차원에서 일본에서 보낸 밀정이라는 설도 나오곤 한다. [27] 이것도 패륜적이라고 대차게 까였다. [28] 이승만도 임영신 전 중앙대 총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긴 하다. 독신이던 이승만이 유학생 임영신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하고 이후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했다는 설, 둘이 모종의 관계였으나 결혼까진 가지 못했다는 썰,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이후에 임영신이 고백했으나 이승만이 거절했다는 썰 등등 자료에 따라서 이야기가 다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이승만이 도덕적으로 비난받을만한 이유는 없다. 그냥 잘 안풀린 남녀 관계 정도. 반면에 여운형은 누가 봐도 여자 관계는 막장이였다. [29] 여운형은 바람을 피우고 외도로 낳은 자식을 본처에게 키우라고 맡기는 당시로서도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는 행위를 했지만 조강지처를 버리지는 않았고 마음 고생은 시켜도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는 않았다. 그에 비해 이승만은 본처 박승선의 (동의되지 않은)양자 입양을 의심하여 본처 박승선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후 외국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중혼을 한데다가 박승선을 강제로 호적에서 말소시켜 버렸다. [30] 영상에서 18분 55초 부분에서부터 들을 수 있다. [31] 그를 싫어하던 우파는 물론이거니와 일본인이나 친일파도 사람 여운형은 좋게 평가하고 있다. [32] 김구 김규식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된 1948년에야 뒤늦게 시도한다. [33] 냉정히 말해 김일성의 북쪽 세력이 여운형에게 공감하여 협업을 추진하려고 했어도 실패했을 가능성이 90% 이상이다. 당시 국제 정세는 냉전화가 가속화되고 있던 시점이었고, 한반도는 그 특성상 냉전 구조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었다. [34] 남조선신민당, 조선공산당과 신설 합당 [35] 1947년 7월 19일, 서울특별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에 의해 암살. [36] 기독교 휴머니즘에 기반을 둔 중도좌파적 성향인 여운형의 사상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당시 한반도에서 일어난 좌우익의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그로 인해 국민이 아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자신들의 사상을 포장하는 곡학아세를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37] 그는 소련, 중국, 미국 등에 관대한 태도를 보였다. 미소에 의해 분단되고 중국의 개입으로 눈앞에서 통일에 실패한 채 오늘날까지 주변 세력에게 고통받고 있는 실제 역사를 떠올리며 씁쓸해하는 의견도 많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틀린 식견은 아니다. 일본은 작은 섬나라였기에 제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자원·생산력·입지 모두가 필요했고, 따라서 반드시 한반도 전체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이나 소련은 자원이든 인구든 영토든 충분한 강대국들인지라 '한반도'가 필요한게 아니라 세력균형의 일환으로 친미 내지는 친소를 유지해 줄 '저울추'가 필요할 뿐이다. 즉, 외교적 해결의 여지가 있는 영역이다. 중국도 당장 지금 대한민국을 친서방세력에 남겨두고도 미국 G2를 두고 자웅을 겨루는 것처럼, 한국을 내버려두면 뒤통수가 찝찝하긴 해도 자체적으로 패권국으로의 도약이 불가능한 체급은 아니다. 거기다 여운형 시대의 중화민국은 옆 나라에 눈독들이기는커녕 분열된 자국부터 정리하고 발전시켜야 했던 처지였기도 하고. 오늘날 한반도의 지정학에서 일본이 큰 위협으로 간주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이 독자적인 패권주의를 포기하고 미국에 종속되는 길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38]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국이든 소련이든, 하다못해 국부천대 이전의 중화민국조차도 자국민의 피를 흘려 얻어낸 전리품을 얌전히 놔줄 생각은 별로 없었다. 다만 전후 생겨난 다른 신생국의 지도자들과 비교해 보자면, 이승만 김일성 모두 미소에 일방적으로 고개를 조아리기보다는 현실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자주 노선을 걸은 편이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일본을 상대로 한국의 입장을 대변하며 미국을 상대로 미치광이 전략까지도 마다하지 않았고, 김일성 역시 중국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특정 국가에 종속되지 않은 채 북한의 외교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길을 택했다. [39] 기독교에서 터지는 부패 사건 관련 기사에 요즘도 가끔씩 댓글로 달리는 말이기도 한다. [40] 이기형의 서사시 중에서 "찬탁, 반탁의 회오리 대혼란 속에서 십여 차례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몽양은 오직 건국 일념에 불타 조선인민당, 민족통일전선, 근로인민당 등을 창설, 김규식 등과 좌우합작에 헌신하던 중 1947년 7월 19일 오후 1시 혜화동 로터리에서 오호라! 조선민족의 대 지도자 몽양 여운형 선생은 반역의 백색테러의 흉탄에 향년 62세를 일기로 큰 별은 떨어졌다. 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씀은 '조선' '조선'이었다."라는 표현이 존재한다. [41] 여운형은 김구처럼 통일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여러 정당과 단체들을 한데 모으려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일제에게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연합국에 대한 감사와는 별개로, 우리나라의 독립은 우리 스스로 자주적인 노력에 의해 이뤄야 한다는 뜻으로 이러한 영어 문장을 연설 끝맺음에 종종 사용하고는 했다고 전해진다. [42] 변은진 (지은이),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역사공간, 2018, 6. [43] 변은진 (지은이),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역사공간, 2018, 6. [44] 뿐만 아니라 김일성이 축지법 그몸으로? 을 쓴다는 내용도 나와서 읽는 이에게 충격과 공포를 심어주기도 한다!!! [45] 변은진 (지은이),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역사공간, 2018, 6. [46] 이는 건국준비위원회를 좌파단체로 보고 해석한 것인데,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과 건국준비위원회는 좌우익을 총망라한 단체다 따라서 건국준비위원회를 좌파단체로만 보는 시각은 사실왜곡이다. [47] 변은진 (지은이),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기획), 여운형 - 독립과 통일 의지로 일관한 신뢰의 지도자 | 독립기념관 :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88, 역사공간, 2018, 6. [48] 같은 작가가 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신라 말의 반란군 우두머리였던 기훤 역. [49] 제작자들 또한 이걸 감안하고 만든 것으로 보인다. [50] 독립 운동의 의의를 알리는 공공, 공익적 작품들이기에 성남문화재단의 요청에 따라 별도의 로그인 절차없이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51] 다만 모든 부분에서 둘의 의견이 일치한건 아니었다. 여운형은 북한만의 토지개혁이 남북의 이질화를 심화시켜 분단으로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고 김일성을 만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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