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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트 애틀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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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클레멘트 리처드 애틀리[1] Clement Richard Attle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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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1월 3일 |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서리 주 퍼트니 |
|||
사망 | 1967년 10월 8일 (향년 84세) | ||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구 | |||
재임기간 | 제62대 총리 | ||
1945년 7월 26일 – 1951년 10월 26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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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애틀리 백작[2] 프레스트우드 자작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
|
학력 | 헤일리버리 컬리지 ( 졸업) (1900년) | ||
옥스퍼드 대학교
유니버시티 컬리지 ( 근대역사학 / B.A.) (1900년 – 190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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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175cm | ||
종교 | 무종교( 불가지론)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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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제62대 총리. 그리고 노동당 출신 두 번째 총리이자[3] 전후 최초의 총리이다.
1935년부터 1955년까지 20년 동안 노동당의 당수를 역임했으며, 1945년부터 1951년까지 영국의 수상을 지낸다. 6년 93일 동안 총리직을 재임하면서 당시 노동당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재선에 성공한 총리였으며, 노동당이 처음으로 보수당을 상대로 의회에서 과반을 확보한 것도 이 사람때의 일이다.[4] 즉, 영국 노동당을 일으켜세운 입지전적스런 인물인데다가 현대 복지국가를 논할 때 절대 빠질 수 없는 학문사적으로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최대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전후 복구와 함께 오늘날까지 영국인들이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는 NHS 도입.[5]
2차 대전 거국내각에서 영국의 내치를 담당해 영국의 전쟁수행능력을 책임지고, 2차 대전 이후엔 전후복구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내 정치력과 업무수행 모두 높은 평가를 받았다. 대중적 인기에 비해서는 역사학자들의 평가가 박한 윈스턴 처칠, 역사학자들에게 평가가 좋은 편이지만 대중들에게 호불호가 극심한 마거릿 대처와 비교하면, 애틀리는 대중과 역사학자 모두에게 고루 높게 평가받는 편이다. 2004년 영국사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역대 최고의 영국 총리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일반 영국시민들에게도 최고의 20세기 영국 총리를 뽑으라 할 때 처칠, 대처와 함께 1~3위권엔 거의 드는 높은 인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처칠과 대처 두 명은 보수당이기에 사실상 역대 최고의 노동당 총리로 평가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상 외치의 처칠, 내치의 애틀리라 봐도 무방한 수준.[6]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영국군을 파병한 총리이기도 하다.
그와 가까운 사람 사이에서는 클렘(Clem)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2. 생애
1883년 런던에서 변호사 가문의 일곱 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즉, 중산층 이상 되는 가문의 자녀로 나름 풍족한 삶을 누렸고 아버지의 바람대로 법학을 전공하여 옥스퍼드 대학교 졸업 후 변호사가 되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허나 변호사 업무 차 자선 단체와 일하는 과정에서 빈민가 아이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고는 그동안의 신념을 바꾸고 노동당에 가입하게 된다.[7]이후 1차 대전 시기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으며 주요 전투 중 하나였던 수블라 (Suvla) 해변에서의 전투에서 총사령관이었던 스톱퍼드 장군(Frederick Stopford)과 함께 마지막으로 해변에서 철수하기도 했다.[8] 애틀리는 종전 후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1919년 보로시의 시장이 된 데 이어 1922년에는 의회로 진출한다.
2.1. 노동당 당수
1935년 램지 맥도널드 내각이 붕괴되고 노동당이 야당으로 밀려난 상황에서 애틀리는 노동당의 당수로 취임하게 된다. 유럽 곳곳에 전운이 점점 짙어지는 당시 상황속에서 야당 지도자로 애틀리의 행보는 외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 시기 애틀리는 국제 연맹 관할 하의 집단 안보를 주장하면서 볼드윈과 체임벌린 내각의 재무장 정책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히틀러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애틀리는 입장을 180도 전환해 정부의 재무장 정책을 지지하기 시작했다.[9]이후 1939년 2차대전이 발발하고 노르웨이 침공과 프랑스 침공으로 영국이 존망의 기로에 서자 애틀리는 보수당과 연정을 통해 이루어진 거국 내각에 부총리로 참여하게 된다. 전시 거국 내각 시기에 애틀리는 부총리로 내치를 담당하면서 전황과 외교를 담당한 윈스턴 처칠 수상을 훌륭히 보좌한다. 프랑스가 함락된 후,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 나치와 협상할 것인지를 놓고 내각에서 투표가 이루어졌는데 애틀리가 협상을 주장하는 노동당 장관들을 호되게 질책해서 처칠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한다.[10]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애틀리와 처칠은 정치적으로 성향이 크게 달랐고 1945년 유럽에서 전쟁이 끝남감에 따라 거국내각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2차 대전을 승리로 이끌면서 국민의 크나큰 지지를 받고 있던 윈스턴 처칠 수상은 보수당 단독으로도 정권을 창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1945년 7월에 총선이 치러진다. 선거 전에는 처칠의 지지율이 81%에 달했던만큼 보수당의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여론조사에서는 노동당의 우세가 나타났다.
게다가 선거전에서 보수당은 노동당에 비해 원론적이고 거기서 거기인 애매모호한 정책만을 제시하며 상대적으로 노동당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선거 말미에 들어서 노동당의 대승이 예측되었으며, 선거 결과는 예측했던 것의 배 이상으로 노동당이 크게 승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수당이 전체의 반도 안되는 197석이었던 반면, 노동당은 무려 393석을 차지한, 그야말로 압승이었다.
이러한 노동당의 압승 배경에는 애틀리가 공약으로 제시한 사회 복지 정책이 6년 넘게 지속된 전쟁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삶에 지칠대로 지친 영국인들의 마음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인기가 높던 처칠 대신 이전 보수당 총리였던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의 실정을 지적한 노동당의 선거전략도 크게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영국인들의 기대를 가득 받은 채로 1945년 7월 26일 애틀리가 수상으로 취임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윈스턴 처칠은 포츠담에서 트루먼, 스탈린과 같이 회의중이었는데 정권이 교체되어서 짐싸서 돌아와야 했다.
참고로 노동당 당수로서 처칠과 대립했던 시절에도 처칠과 개인적인 사이는 나쁘지 않았는지 이런저런 재미있는 일화가 많다. 예를 들어 의회에서 잠시 애틀리가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는 사이 처칠이 들어왔는데, 일부러 애틀리에게서 가장 멀어진 소변기에서 오줌을 누자 애틀리는 "아니, 수상각하, 우리끼리 정치적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럴 필요까지 있습니까?"라고 하자 처칠은 "오, 친애하는 클레멘트, 미안하지만 이건 개인적인 감정에서 그런게 아니라, 당신들( 사회주의자)은 큰 것만 보면 다 국유화하려고 들기 때문이오" 라고 응수한 적이 있다.
이후에도 처칠은 애틀리를 두고 "(내세울 것이 없으니) 겸허한 사람"이라고 비꼬아 칭찬하는 등[11] 디스성 농담을 하곤 했으나, 진지한 석상에서는 그를 조용하지만 뜨거운 용기가 타오르는 신사이자 훌륭한 지도자라고 직설적으로 칭찬했다. 초강대국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서도 유년기의 한량아적 인배와 유머 감각, 다혈질 성격을 유지했던 처칠과 반대로 평생 겸허하고 차분하며, 남들에게 싫은 소리 안 하고, 후대에서도 실제로 그 겸손하고 조용한 성격 때문에 업적이 묻혔다고 평가받을 만큼 범생이 타입이었던 애틀리의 성격 차이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2.2. 영국의 총리
야심차게 집권한 애틀리였지만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파산 직전의 상황이었기 때문에 애틀리 내각은 골머리를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사회보장 제도의 실시는 애틀리 내각의 핵심 공약이었던만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정책이었고, 재정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틀리 내각은 두 가지 묘안을 생각해낸다. 하나는 천조국의 쇼미더머니에 다시 한 번 기대는 것이었고 또다른 하나는 각종 산업을 본격적으로 국유화하는 것이었다.이 중 첫번째 안이었던 미국의 원조는 마셜 플랜을 제외하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전쟁 당시에야 일단 독일을 이기고 보는게 급선무였지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던 것. 미국은 차관의 댓가로 갖가지 조건을 내세웠고 이러한 조건을 그대로 시행했다가는 영국은 전 세계 금융시장에서 그 영향력이 제거될 판이었다. 결국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대의 목소리가 나왔던 탓에 결국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빌린다는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그렇지만 두번째 안이었던 각종 산업의 국유화는 비교적 수월하게 진행된다. 이미 처칠이 수상이던 시기부터 전쟁을 이유로 조금씩 국유화가 진행이 됐던 탓에 야당이었던 보수당도 무조건적인 반대를 하기는 힘들었을 뿐 아니라 노동자 계층들이 국유화를 두 팔 벌려 환영했기 때문. 1947년에 영국의 근간산업이었던 석탄 채굴업이 국유화됐고 이어서 철강/교통/가스 사업들도 차례로 국유화된다.
이를 바탕으로 1948년부터 본격적으로 사회복지정책이 실시되기 시작한다. 실직, 은퇴, 사망 등 모든 발생 가능한 경우를 고려하여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을 명시한 애틀리 내각의 사회복지정책 중에서도 가장 핵심은 바로 의료보험이었다. 전국 병원 중 절반의 가까운 수가 국영화되면서 노동자 계층은 더 이상 개인 병원에서 비싼 금액을 내고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됐다. 의사들 역시 정부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두둑히 받았기 때문에 대만족이었다.
한편 애틀리는 인도와 같은 몇몇 식민지에서도 순순히 독립을 인정하고 물러나면서 옛 식민지 국가들을 대상으로 영연방의 수장으로 존중을 받으면서 외교적으로 최소한의 지위를 유지하는 성과도 누린다. 그러나 케냐라든지 몇몇 식민지에서는 1950년대 독립 요구에 무력으로 억누르며 일부 학살이 벌어지는 등, 결국 그도 프랑스와 네덜란드보다 수가 덜했다 뿐이지 식민지 독립에 무조건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냉전이 격화되면서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데다가, 엎친데 덮친격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애틀리는 방위 예산을 늘려야만 했고, 방위예산의 상승은 필연적으로 복지비의 절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애틀리 내각은 파이를 공평하게 나누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파이의 크기를 충분히 키우는데는 실패했던 것. 그럼에도 애틀리는 1950년 총선에서 보수당을 누르고 재선에 성공하나 보수당과 의석차가 작아서 원활한 국정운영에 어려움을 느꼈고 의석수를 늘리기 위해 조기총선을 열었으나 계획과는 달리 1951년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12] 윈스턴 처칠이 이끄는 보수당이 다시 원내 다수당의 지위를 차지하였고 애틀리는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13]
2.3. 여생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애틀리는 1955년까지 노동당 당수직을 유지했지만 노동당의 지지도는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하락했고 급기야 처칠의 후계자인 앤서니 이든과 총리직을 놓고 겨룬 1955년 총선에서는 4년 전보다 더 격차가 벌어졌다. 처칠과 맞붙었던 1951년에는 보수당이 17석을 더 차지했지만 이든과 맞붙은 1955년에는 그 격차가 60석으로 늘어난 것.그렇게 다시 패배를 맛본 애틀리는 노동당 당수직에서 물러났고 백작 작위를 수여받고 사실상 정계에서 은퇴한다.[14] 이미 고령이었던 애틀리는 오랫동안 골초였던 탓에 얻은 폐 질환으로 결국 1967년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애틀리의 유해는 화장 후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한국에선 전임자였던 윈스턴 처칠에 가려 인지도가 높지 않은 편이지만[15] 영국에서는 평가가 좋은 총리 중 한명으로 더 타임즈에서 윈스턴 처칠을 제치고 '20세기 영국 최고의 총리'로 꼽힌 바 있으며, 2004년 영국 역사학 전공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마찬가지로 처칠을 제치고 '20세기 영국 최고의 총리'로 꼽히기도 했다.
3. 기타
- 영국 노동당 출신 총리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다. 참고로 전체 영국 총리 중 가장 마지막으로 콧수염을 기른 사람은 해럴드 맥밀런이다.
-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에서 영국의 6.25 전쟁 참전이 결정되었지만 전쟁 도중인 1950년 12월 4일, 애틀리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미영정상회담 도중에 중공군의 대공세를 만난 한국을 포기하고 유럽을 지키는 데 집중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을 포기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애틀리 총리의 '한국 포기 건의'를 거절했다.[16]
- 소박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사람과 거의 어울리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는 걸로 소일거리를 삼았을 정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교류도 저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며 경청하는 편에 가까웠지, 본인이 강경하게 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다.
- 사회주의 성향의 총리임에도 한국전쟁 당시 즉각적인 파병을 결정한 총리였다.[17] ‘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 좌파 애틀리 총리, 6·25 파병 왜?. 이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유럽식 사민주의의 구심점을 꿈꾼 애틀리 총리가 소련의 공산주의와 유럽의 사민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미국이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도운만큼 애틀리 총리는 미국과 손잡고 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의 집단방위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 나토)의 창설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핵폭탄 사용이 거론되던 시기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실제 핵은 사용되지 않았다.
- 사회주의자이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사회복지정책을 도입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부르주아를 때려잡고 프롤레타리아를 사회의 주류로 만들자'는 급진적인 사상 대신 '프롤레타리아를 (쁘띠)부르주아로 성장시키자'는 온건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노동당 당수로 재임하는 20년 내내 했던 일 중 하나가 당내의 친공세력들을 때려잡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가 정계에서 은퇴할 쯤 노동당 내에는 공산주의 추종자가 거의 전멸해 있던 상황이었다.
- 이렇게 좌파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지만 기본적인 좌파적 대외관과 반파시즘 자체는 확실한 신념으로 내세웠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조건 불개입 정책을 고집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게 친 프랑코성향을 보였던 당대 영국 정계에서 몇 안되는 친공화파 인사였으며,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주장했고, 스페인 현지 방문과 시찰도 나가 스페인에 있던 영국인 국제 여단 대원들은 애틀리를 기념하여 중대 중 하나를 "애틀리 소령 중대" (Major Attlee Company)라고 개명한 적도 있었다.
- 좌파시오니즘 지지자였다. 유대인들이 과거 자신들이 살았던 땅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권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British Zionist로 평가받는다.[18]
- 말년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동성애 차별법안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란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성관념을 가졌던 셈.[19]
- 집안은 꽤나 독실한 성공회 가문이었고, 형제 중 한 사람은 선교사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불가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가지론을 떠들고 다닌 타입은 아니었고, 내성적인 성격답게 본인의 종교관에 대해서도 짤막한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당신은 기독교를 믿느냐는 질문에) "(기독교적) 윤리관은 믿지만, 허황된 헛소리(mumbo-jumbo)는 믿지 않소."
- 별명은 클램(Clem)이었다고 한다.
-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이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이
시가
골초로 유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틀리는
파이프 담배 애호가였다. 시가를 문 처칠이 "
Keep calm and carry on"이란 유명한 표현이 상징하듯 절박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모습을 보이던 전시 영국의 뚝심, 결의를 상징한다면 애틀리의 파이프는 피면서 중간에 계속 관리와 불조절을 해줘야하는 파이프처럼 전후 재건기의 차분한 냉철함을 보여주는 듯한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 손자(3대 애틀리 백작 존 애틀리)가 보수당 의원으로 현재 영국 상원에 재임 중이다. 이목구비가 할아버지를 아주 빼다박은 듯 생겼다. 애석하게도 백작위의 후계자가 없다. 애틀리 백작의 상속자가 되는 조건은 1대 백작의 남성 직계 후손인데, 남성 후손이 손자 1명밖에 안남았다.
- 반공주의자지만 소련에 어느정도 유화적이였기에 소련의 제트 엔진 기술 요청을 승인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MiG-15 문서 참조. 사실 극렬 반공주의자에다 전후 소련 공격 작계까지 짯던 전임 총리 윈스턴 처칠도 전쟁 중이라지만 소련에 레이더를 통째로 넘겨주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이쪽도 비군사적 용도로만 쓰기로한 제트 엔진처럼 종전 이후 돌려주기로 되어 있었지만 소련이 쌩까고 역설계했다.
4. 매체에서
- 더 크라운 시즌 1에서도 출연한다. 애틀리가 총리일 시기인 1화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결혼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성당에서 서 있는 딱 1컷(...) 나오며, 처칠이 참석자들의 기립박수를 받으며 열화와 같은 환영을 받는데 반해 현직 총리임에도 그야말로 공기급 존재감을 보인다[20]. 야당 당수가 된 시기인 4화에서는 런던을 뒤덮은 사상 최악의 스모그를 보고도 " 그냥 안개"로 취급하며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처칠의 불신임안을 추진하는 등 꽤 비중있게 나온다.
*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오프닝을 장식했다. 히틀러와
나치 독일의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막지 못한 책임에 대해, 보수당
네빌 체임벌린 총리에게 현란한 제스쳐로 극딜을 퍼부으며 사퇴를 촉구하고 동시에
거국내각의 구성을 제안한다. 이후로는 작품 성격상 포커스가 처칠과 보수당 내부의 정치싸움으로 옮겨지면서 애틀리의 비중은 사실상 사라진다. 거국내각의 일원으로 얼굴을 몇번 비추는 정도. 배우는 데이비드 스코필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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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풀네임은 “The Rt Hon. Clement Richard Attlee, 1st Earl Attlee of Walthamstow, Viscount Prestwood, KG, OM, CH, PC, FRS”이다.
[2]
1st Earl Attlee
[3]
노동당 출신 첫 번째 총리는
램지 맥도널드.
[4]
영국은 이전까지만 해도 진보 진영의 거두 자린 노동당이 아닌
자유당이 차지하고 있었다. 20세기 초반 이후 노동당이 자유당 지지층을 갉아먹으며 급격히 치고 올라오기 시작한 것.
[5]
사실 오늘날 말많고 탈많은 미국의 건강보험제도와 영연방의 제도를 비교해보면 영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할 법도 하다.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 때도 NHS를 독립테마로 쇼를 편성했을 정도. NHS가 가지는 위상은 영국드라마를 보면 간간히 나오는 인물들의 말이나 애드리브로도 알 수 있을 정도다.
[6]
게다가 소속 정당도 다르다는 것이 둘의 각기 다른 이점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7]
훗날 애틀리는 빈민가 아이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고 나서야 비로소 ‘왜 국가가 적극적으로 소득을 재분배하고 경제에 개입해야 하는가?’를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8]
전투 중에 부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열악한 환경 탓에 이질에 걸려서 고생했다고 전해진다. 여담이지만, 갈리폴리 전투를 계획한 사람이 그의 정적 윈스턴 처칠(당시 해군장관)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참 얄궂은 운명. 다만 애틀리 본인은 갈리폴리 전투를 구상해낸 것 자체에 대해서는 처칠의 담력에 찬사를 보냈다고 알려졌다.
[9]
애틀리 본인은 반민족주의•평화주의 성향을 지녔기 때문에 정부의 재무장 정책을 반대했으나, 그에 앞서 철두철미한 반파시즘 성향을 갖고 있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스페인 공화국을 수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참전한 영국인들로 구성된 부대를 격려 방문하기도 해서 해당 부대에 그의 이름이 붙기도 했고,
뮌헨 협정 역시도 '히틀러의 야심에 굴복해서 동유럽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고 비판했다.
[10]
전쟁 초기 처칠과 거국내각을 가장 위태롭게 한건 아이러니하게도
에드워드 우드를 위시로 한 보수당내 주화파들이였다.
[11]
"A humble man, then again he has much to be humble about"
[12]
이 선거에서 노동당의 득표율은 48.7%를 기록해 보수당을 근소하게 앞섰지만 보수당과 국가자유당이 후보를 단일화하면서 정권을 상실하였다. 한편 한때의 양대정당이던 자유당은 이 선거에서 득표율 2.5%, 의석수 6석이란 처절한 결과를 내며 몰락했는데 이 몰락이 보수당에 도움이 되었다는 분석도 있다.
[13]
이후로 노동당은 13년간의 야당생활을 하게 된다. 노동당 입장에서는 자폭이었던 셈.
[14]
영국 의회는 귀족작위를 수여받으면서 영국 상원에서 활동이 가능하지만 영국 상원은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사실상 명예직으로 좌천된 셈.
[15]
사실 한국전쟁 파병을 결정한 총리라는 점에서 한국사 관련해선 더 중요한 총리기도 하다.
[16]
이때
더글러스 맥아더 UN군사령관의 리더십을 문제삼아 UN군을 미,영 공동지휘하에 두어야한다고 말했다가 그 자리에 동석한
오마 브래들리 미 합참의장이 UN군 지휘는 합법적으로 미군이 받은 권한이며 이를 거부할거면 UN군에서 빠지라는 강경한 대답에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브래들리가 유럽전선에서
버나드 로 몽고메리에 얼마나 시달렸으면 저랬는지 알 수 있는 대목.
[17]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한반도에 보낸 나라였다. 참고로 3위는 캐나다.
[18]
21세기 기준 서양에서 시오니즘은 좌파 사회주의 진영보다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좀 더 지지받으며 일부 반제국주의 좌파 계열에선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20세기 중반에는 사정이 달라서 오히려 서방에선 세속 좌파진영이 더 친
이스라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세르 등 아랍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에 중동국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북예멘, 튀니지, 모로코, 요르단, 리비아, 이란, 이라크를 비롯해 왕정 체제가 다수를 이루었고, 이스라엘이 아랍 연맹에 밀리는 약자의 입장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정계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다수파를 차지하여서,
이스라엘 노동당이 3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했었기 때문에 노조가입률이 80%에 달하는 등 사회주의의 영향이 강했다 이스라엘식 자율농장으로 유명한
키부츠 역시 이 당시의 유산이다.
[19]
애초에 당시에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2년 앞당긴
앨런 튜링조차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화학적 거세를 당한 세상이었고,(다만 외부에는 앨런의 진짜 업적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동성애를 정신병으로 분류하지 않기 시작한 것도 애틀리 사후인 1973년이었다.
[20]
같은 화에서 조지 6세로부터 좋은 정치인이지만 인간적 매력은 떨어진다는 디스 아닌 디스를 듣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