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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스페인 보르본 왕조 제12대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 Juan Carlos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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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38년 1월 5일 ([age(1938-01-05)]세) | ||
이탈리아 왕국 로마 | |||
재위기간 | 스페인 국왕 | ||
1975년 11월 22일 ~ 2014년 6월 19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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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243><colcolor=#fff> 가문 | 보르본 가문 | |
이름 |
후안 카를로스 알폰소 빅토르 마리아 데 보르본 이 보르본-도스 시실리아스 (Juan Carlos Alfonso Víctor María de Borbón y Borbón-dos Sicilias) |
||
아버지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 ||
어머니 | 부르봉-양시칠리아의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 | ||
형제자매 | 필라르, 마르가리타, 알폰소 | ||
배우자 |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 (1962년 결혼) | ||
자녀 | 엘레나, 크리스티나, 펠리페 6세 | ||
종교 | 가톨릭 | ||
신장 | 188cm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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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페인의 상왕. 1975년부터 2014년까지 약 40여 년간 스페인의 19대 국왕이었다.[1]2. 작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문장 |
스페인 국왕은 과거 보유했던 칭호들은 현재 상태와 상관없이 그대로 보유한다. 당장 예루살렘부터 프랑스령인 코르시카, 포르투갈 독립 전쟁으로 잃은 알가르브,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영국에게 빼앗긴 지브롤터,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미국에게 잃은 동인도 및 서인도 제도, 이탈리아 통일로 없어진 나폴리 왕위와 시칠리아 왕위 및 밀라노 공작위, 합스부르크 동군연합이 유지되던 짧은 시기의 지위인 오스트리아 대공위, 오스만 제국에게 정복되어 사라진 아테네 및 네오파트라 공작위,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벨기에의 독립으로 사라진 브라반트 공작위 및 플란데런 백작위 등이 그러하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후안 카를로스 1세(左),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中), 아들 펠리페 왕세자(右). 1989년 7월 16일 촬영.[2] #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며 1938년 이탈리아 왕국 로마에서 태어났다. 당시 알폰소 13세 일가가 스페인 내전 때문에 로마에 망명해 있던 상황이었다.[3]
3.2. 프랑코의 후계자
1947년에 프란시스코 프랑코는 명목상 스페인의 체제를 왕정으로 돌려놓고 섭정이 되었지만, 자신의 사후 왕을 옹립할 것임을 선언했다.원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 선택되었고 프랑코는 1961년 그에게 공식적으로 왕위를 제안했지만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거절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추천했다.[4]
계승 서열대로라면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이 왕위 계승자가 되어야 했지만[5] 프랑코는 그의 자유주의 성향을 꺼렸다. 후안 백작은 프랑코와 대립했지만, 아들이 스페인에서 교육을 받기를 희망하였고, 프랑코는 왕위 계승자 후보군을 늘릴 필요가 있었다. 이에 후안 백작은 후안 카를로스를 1948년에 프랑코가 통치하는 스페인으로 보냈다.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가 어릴 때부터 그를 신경써서 교육했다. 후안 카를로스는 스페인에서 학교를 졸업했고, 1950년대 후반 프랑코는 그를 스페인의 3군 사관학교에 모두 보내 수학하게 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서 1961년 사이에는 마드리드 콤플루텐세 대학교에서 국제정치와 재정학 등을 수학하였다. 그런데 정작 스페인 내부 정치에 대해서는 일절 교육하지 않았는데, 후안 카를로스 왕자가 프랑코에게 내각 회의에 참여시켜달라고 하자 "전하께서 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통치할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정치에 대해 알아봐야 아무 도움이 안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며 거절한 바 있다.[6] 이 에피소드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자신이 직접 들은 얘기라고 증언했다고 한다.
1962년에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소피아 공주와 결혼했다.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살아 생전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살아있는 신과 같은 존재였기에, 후안 카를로스는 펠리페 6세가 태어났을 때 프랑코에게 제일 먼저 찾아가 아들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읍소할 정도로 설설 기었다. 이에 프랑코가 펠리페와 페르난도 중에 고민하다가 페르난도는 얼마 전에 있었으니 보르본 왕조의 초대 왕인 펠리페가 좋겠다고 펠리페로 지어주었다. 1967년에 자신과 인척관계(처남)인 콘스탄티노스 2세가 장군들의 쿠데타로 망명가는 꼴을 본 후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게 더욱 납작 엎드렸다. 다만, 아버지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과 떨어져 자란 후안 카를로스는 프랑코에게서 일종의 부성애를, 아들이 없었던 프랑코 본인은 국왕을 아들처럼 아끼며 지냈다. 후안 카를로스는 공적인 자리에서 프랑코 옹호 발언을 하지는 않았으나 사석에서 다른 사람이 프랑코를 비판하는 건 용납 안 할 정도로 프랑코에 대한 친밀감이 컸다.
프랑코는 카를리스타나 보르본 왕조의 다른 유력 왕족들을 카드로 저울질하면서 계속 후안 카를로스를 조련했고[7], 그는 프랑코를 따랐다. 그런 후안 카를로스에게 대만족한 프랑코는 자신에게 복종할 생각이 없는 후안 백작 대신에 후안 카를로스를 새 국왕으로 결정하고 1969년 그를 행정법을 통해 '스페인의 왕', 동시에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한다. 전통적으로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에게는 ' 아스투리아스 공'이라는 칭호가 부여되나(영국의 왕위 계승자에게 ' 프린스 오브 웨일스'라는 칭호가 부여되는 것과 같은 이치) 프랑코는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스페인 공(Príncipe de España)'이라는 칭호를 부여했다. 프랑코와의 협상 카드로 스페인에 간 아들이 자신의 뒤통수를 치고 왕위를 물려받았다는 걸 알게 된 후안 백작은 길길이 날뛰며 아들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고 저항했다.
그렇지만 이 때에도 프랑코에게 후안 카를로스는 단순한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실제 프랑코가 자신의 후계자로 내정했던 자는 스페인 내전 이후 함께 해 온 그의 측근이었던 해군 원수 루이스 카레로 블랑코(Luis Carrero Blanco) 제독이었다. 프랑코는 그를 1973년 수상에 임명하여 후계자 과정을 밟고 있었고, 스페인 군부는 후안 카를로스를 두고 애송이(ese niño)라며 공공연하게 비웃었다. 그런데 바스크 분리주의자 단체 ETA의 테러에 블랑코 제독이 암살당하는 변수가 발생했다.[8] 갑작스럽게 후계자를 잃게된 프랑코 체제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1969년, 프랑코(오른쪽)와 악수하는 후안 카를로스.
결국 프랑코는 단순한 얼굴 마담으로 내세웠던 후안 카를로스를 진정한 프랑코 체제의 후계자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군부도 후안 카를로스가 2대 카우디요가 되길 바라는 것으로 여론이 반전되었고, 프랑코는 군부에게 후안 카를로스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주문하는 등[9] 후안 카를로스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3.3. 왕정복고
아버지를 대신해 스페인 왕위 계승자가 된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가 죽은 직후인 1975년 11월 22일 등극하여 보르본 왕조를 복벽했다. 군주제 1차 내각으로 과거 프랑코가 임명했던 아리아스 나바로 내각이 유임되었고 1976년 1월 28일 코르테스 선언은 프랑코 체제와 스페인 왕국의 연속성을 강조하며 과거 지향적인 모습을 보여 후안 카를로스 1세 치하의 스페인이 과거와 다를바 없는 군사독재로 흘러가는 듯하였고 벙커파를 비롯한 프랑코주의자들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카우디요를 대신한 철권통치를 하길 바랐다. 이에 전 세계가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어떤 통치를 할지를 주목했다.[10] 당시 스페인은 마드리드에서만 20만 명이 파업했고 2,400개의 단체가 파업을 일으키는 등 극도로 혼란한 상태였고 스페인 경제는 악화되면서 국민들의 불만은 가중되고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프랑코 체제의 유지는 군주제 자체를 위협할 카드라는 것을 인식했고 나바로 총리를 벙커파의 기수라고 비판하는 등 압박하여 자진 사퇴하게 했다. 그리고 1976년에 아돌포 수아레스를 총리에 임명하고 민주화 개혁에 착수했다. 수아레스 역시 프랑코 정권 시절의 테크노크라트였으므로 민주주의 세력은 처음엔 수아레스의 총리 임명에 독재 체제 유지를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수아레스는 주권재민의 원칙을 천명하고 정치개혁을 위한 국민투표, 좌파 정당( 사회노동당 및 공산당)의 합법화, 다당제 민주주의를 위한 총선 실시를 약속해 실망감을 드러내던 민주주의 세력이 수아레스 내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프랑코의 조합주의 코르테스 해체를 주장하는 등 본격적으로 프랑코 체제의 해체를 '법에서 법을 통한' 체제 안에서의 개혁의 방식으로 추진했다. 한편 그 때까지도 스페인 왕위를 주장했던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은 아들의 민주화 노력을 보고 아들을 스페인의 국왕으로 인정함으로써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 후안 카를로스 1세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977년 6월에는 전국 단위의 국회의원 총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스페인 역사에서 약 40여 년 만의 총선거였다. 총선으로 소집된 새로운 양원제 의회는 1978년에 민주주의, 의원내각제, 지방자치, 양원제, 입헌군주제에 기반한 현행 스페인 헌법을 제정하여 공식적으로 프랑코 체제를 해체시켰다.
3.4. 민주주의의 수호자
"오늘부터 우리는 모두 왕당파다! 후안 카를로스 1세 국왕 폐하 만세!"
산티아고 카리요, 스페인 공산당 당수
산티아고 카리요, 스페인 공산당 당수
1981년, 정치개혁에 반대하는 스페인 군부 내 일부 강경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내각 각료와 국회의원 350여명을 인질로 잡고 그에게 프랑코 체제로 되돌릴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23-F라고 한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지만 후안은 각 지역 사단장들에게 쿠데타에 참여하지 말 것을 명령했고 모두가 이에 복종했으며[11] 육군 원수 예장차림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쿠데타 세력에게 항복을 요구함과 동시에 민주 정부를 지지해 줄 것을 온 인민에게 호소했다.
결국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적극적인 반대로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이 당시 봉건 계급 철폐를 당 노선으로 표방했던 스페인 공산당조차 정책 노선을 사민주의 수립 노선으로 바꾸고 카를로스 1세를 찬양하며 스페인 내에서 그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자세한 내막은 해당 항목 참고.
3.5. 국왕으로서의 업적
1982년에 펠리페 곤살레스가 총리직에 오르면서 프랑코 사후 최초의 사회노동당 정권이 들어섰다. 이후 스페인의 민주정은 안정화되었고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입헌군주정과 민주정의 취지에 맞게 정치 개입을 자제하여 스페인 정치에서의 국왕의 역할을 확립했다. 그의 정치적 역할은 국가 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역할과, 정국 경색을 해소하기 위해 정파 간 협상을 중재하는 정도에 그쳤다. 국왕은 헌법에 따라 여러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한 권한은 오로지 내각의 조언에 따라 행사될 뿐이었다.더불어 스페인의 외교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민주화를 추진하여 프랑코 정권의 독재로 인해 추락한 스페인의 외교적 위상을 복구해 스페인의 NATO 및 유럽공동체 가입에 큰 역할을 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악화되어가던 바티칸과의 관계도 개선했다.
3.6. 재위 말년의 굴욕과 퇴위
2007년에 가장 존경스러운 스페인인 설문조사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할 정도로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왕이었지만 경제난 와중에 각종 병크를 터트리면서 후안 카를로스의 1세의 지지도는 떨어지기 시작했다.2012년 4월 14일, 코끼리 사냥을 하려고 보츠와나를 방문한 국왕이 화장실에 가려다 넘어지는 바람에 엉덩이뼈가 부러져 본국으로 후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불과 몇 주 전에 '청년 실업과 경제 위기를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고 말한 국왕이, 1마리 사냥에 9천~2만 6천 달러가 들어가는 여흥을 즐기러 해외여행을 나갔다가 망신을 당한 것이라 스페인의 여론이 악화된 상황. 게다가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동물보호단체인 '월드 와일드라이프 펀드'의 명예 회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비난 여론이 더 거셌다. 결국에는 사상 최초로 대국민 사과를 하기에 이르렀다. # 사과를 했지만 하기 전에도 '국왕의 사과는 전례 없는 일'이라며 사과를 거절했다는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혹독하게 비난받았다.
참고로 저때 받은 엉덩이뼈 수술의 후유증 때문인지 공식석상에 나올 때 보조 기구를 한동안 차고 다녔다. 상태가 호전되어 보조 기구의 도움 없이 다니게 된 후에도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녀서 건강 악화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비슷한 시기에 독일 여성과 염문설이 터지기도 했다. 안 그래도 2010년대 경제 위기 때문에 스페인 본토의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지는 상황에서 왕가의 여러 추문이 왕실에 대한 여론을 더욱 악화시켰다.[12] 이런 상황에서 소수 의견이었던 왕정 폐지 및 공화정 부활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도 왕년의 업적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고, 그동안 모신 나이든 국왕을 갑자기 끌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아무리 사생활에 문제가 많다고 해도 스페인 인민들은 참고 봐주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경제 위기와 왕실에 실망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다. 불과 2007년만 하더라도 국왕을 비꼬는 만평을 내놓은 잡지가 여론의 몰매를 맞고 공개 사과를 해야 했을 만큼, 왕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그리고 통계 자료에 따라 다르지만 2000년대 후반까지만 하더라도 공개적으로 공화국을 지지한다는 비율은 20%가 안 되었다. 그러나 2013년에는 국민의 과반이 공화국을 지지한다고 응답하였다. # 언론사마다 성향이 다른 걸 감안 하더라도 몇년 사이에 평판이 뒤집어진 것이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게 보내는 스페인 인민들의 존경과 경의는 사실 프랑코 체제 사후였다는 특수성이 상당히 크게 작용했다. 실제로 프랑코 사망 직후 1977년 몬클로아 협정 체결과 내전 이후 최초의 성공적인 총선, 1978년 신헌법 통과, 1981년 2월 쿠데타 시도에 이르기까지 스페인은 몇 년 동안 수많은 정치집단들의 충돌로 혼란스러운 상황을 빚었다. 극좌파계 테러 집단[13], CNT나 UGT 등의 좌파 거대 노조, 당시 '벙커파'라 불렀던 독불장군식의 군부와 정계 내 극우 인사, 합법화된 좌익 노동운동가들이나 변호사 등에게 테러를 가하던 극우 테러단체[14], 바스크의 분리독립을 위해 유혈테러를 자행한 ETA, ETA 본받아 강경해지는 카탈루냐와 갈리시아의 민족주의 세력까지 다양한 집단들이 난립하여 테러가 빈번하게 벌어지다보니 인민 전체가 두려움에 떨던 불안한 시대였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은 2월 쿠데타를 진압하여 민주화 과정에서의 불안정함을 잠재우고 부드러운 체제 변화를 이끌어냈다. 이런 불안한 시대를 잠재우고 안정을 가져다준 국왕에 대해 기성세대들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였으나, 이러한 혼란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기에 태어난 젊은 층에게는 딱히 지지받을 만한 업적이 없다. 말년의 굴욕은 스페인 사회가 프랑코 정권의 그림자를 벗어 나면서 그 그림자의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최대 수혜자였던 후안 카를로스 국왕에 대한 경의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다. 그리고 3년 동안 8차례나 수술을 받는 등 정상적인 공무 수행이 어려워지자, 펠리페 왕태자에게 양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 왕실과 총리는 처음에는 양위 가능성을 부인했으나, 결국 2014년 6월 2일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가 텔레비전 방송을 통한 성명을 통해 국왕의 퇴위를 발표하였다. 즉위한 지 약 40년, 예전같지 않은 건강과 지지, 왕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의 증가 등을 의식해 내린 결정으로 보인다. 그러나 퇴위한 당일 전국에서 개헌 요구 시위가 터지는 등 # 상황이 안정되지는 않았다. 11일, 스페인 하원에서 찬성 299표, 반대 19표, 기권 23표로 국왕의 퇴위 동의안을 가결했다. 17일 상원에서도 퇴위 동의안을 승인하여 펠리페 왕태자가 6월 19일에 펠리페 6세로 즉위했다.
퇴위 후 고작 1달 여 만인 2014년 8월 초에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자신의 친부라고 주장하는 알베르토 솔라(Alberto Sola)라는 남성과 잉그리드 사르티아우(Ingrid Sartiau)라는 여성이 각각 나타나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다시 파문이 커졌다. 급하게 퇴위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냐는 비난의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원래는 재위 기간에만 적용되는 면책특권을 퇴위 후에도 적용되도록 바꾸는 법안을 퇴위 직전 의회에 통과시킨 것으로 알려져 더 비난을 샀다.
이렇게 얻어낸 면책특권 덕에 친자확인소송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고, 스페인의 상급 법원이 친자확인 요구를 할 수 있는 권한은 있다고 하지만 이후로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이에 잉그리드 사르티아우(Ingrid Sartiau)는 2017년 6월 기준 본국인 벨기에에 머물고 있으며, 소송을 절차대로 진행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 스페인 국적인 알베르토 솔라(Alberto Sola)는 상술했듯 전 국왕의 면책특권 때문에 친자확인소송이 기각되어 2015년 이후 특별한 소식이 없다.
그럼에도 2015년 기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지지율은 41%로 높은 수준이다. 펠리페 6세의 지지율은 66%를 기록했다.
2016년에는 피델 카스트로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2018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내연녀[15]로부터 탈세와 돈세탁 혐의로 고발당했다. # 내연녀의 주장에 따르면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의 이름으로 모로코에서 쇼핑을 했으며, 스페인에서 수주한 사우디아라비아 하라마인 고속철도 사업의 공사대금 2억 1천만 유로를 제때 지급하지 못하고 지연된 것을 중재하는 대가로 수수료 8천만 유로를 받아 사촌 명의로 차명계좌를 만들어 스위스 은행에 보관했다고 한다.
2019년 6월 공직 생활에서도 완전히 은퇴하였다. #
2020년 3월에는 왕실 배당금을 박탈당했다. # 결국 위의 부패 스캔들로 여론이 악화되자 스페인을 떠난다고 선언했다. 전직 국왕이라서 고상하게 표현했지만 사실상 해외도피다. 8월 3일에 아랍에미리트로 떠났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
스페인에서는 후안 카를로스의 이름을 없애려는 듯한 움직임도 있다. #
신용카드 부정 사용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이 67만 8천 393.72유로(약 9억원)에 달하는 미신고 세금을 일괄 지불했다. #
정보기관을 동원해 전 연인을 위협한 혐의로 소송에 휘말렸다. # 후에 기각했다. #
고국을 떠난지 2년 만에 귀국했다. #
2023년에는 아내 소피아 왕대비와 함께 처남인 콘스탄티노스 2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동안의 논란 때문인지 서로 눈도 안마주치고 어색한 분위기였다고 전해진다.
4. 가족관계
4.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1녀 | 루고 여공작 인판타 엘레나 | 1963년 12월 20일([age(1963-12-20)]세) |
슬하 1남 1녀 |
2녀 | 스페인의 인판타 크리스티나 | 1965년 6월 13일([age(1965-06-13)]세) |
슬하 3남 1녀 |
1남 | 펠리페 6세 | 1968년 1월 30일([age(1968-01-30)]세)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슬하 2녀[16] |
그리스 출신 공주인 소피아 왕대비[17]와의 사이에서 펠리페 6세 등 1남 2녀를 두었다.
5. 여담
10대 시절 남동생 알폰소(1941~1956)를 살해했다는 의혹이 있다. 1956년 3월 29일 포르투갈에서 부활절 가족 휴가를 즐기던 중 알폰소가 의문의 총기 사고로 사망한 사건인데, 공식적으로는 알폰소의 부주의로 일어난 사고라고 발표되었으나 어머니인 바르셀로나 백작부인 마리아와 그녀의 의상 제작자인 조세피나 카롤로가 후안 카를로스가 동생을 향해 총을 쏘았다는 증언을 했다. 또 그리스의 작가인 헬레나 마테오풀로스도 후안 카를로스의 누이 필라르에게서 후안 카를로스가 총을 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했다.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먼 후손이기도 한데, 정확히는 루이 15세의 장녀 루이즈 엘리자베트의 딸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 공녀의 아들 페르난도 7세의 후손이다.[18]
또한 루이필리프 1세의 5대손이기도 한데, 루이필리프의 장남 페르디낭 필리프의 장남인 파리 백작 필리프의 4녀 루이즈의 외손자이다.[19]
1972 뮌헨 올림픽 때, 요트 선수로 참가한 경력이 있다.
1996년에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초청으로 공식 방한한 바 있다.
2007년 11월 10일, 산티아고에서 열린 이베로-아메리카 공동체[20] 정상회담장에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대통령과 신경전을 벌인 것이 유명하다. 차베스는 제 마이크가 꺼진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전 스페인 총리였던 호세 마리아 아스나르(José María Aznar)를 마구잡이로 헐뜯으면서[21] 그 후임자인 호세 루이스 로드리게스 사파테로(José Luis Rodríguez Zapatero)의 회의 진행 발언을 계속 방해했다. 당시 차베스의 발언은 아스나르( 중도우파)의 정책에 반대했던 당사자인 사파테로( 중도좌파)마저도 듣다 말고 정색할 정도로 심한 막말이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위 영상 16초쯤 됐을 때 직접 나서서 차베스에게 "야!"(¡TÚ!)[22] 하고 한 차례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자, " 그 입 닥치지 못할까?(¿Por qué no te callas?)"라고 일갈하여 정말로 차베스 대통령의 입을 닥치게 하는 데에 성공한다. 저 영상 28초에서 확인해보자.[23] 하지만 차베스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신나게 떠들어댔다.
물론 차베스는 다음날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발언을 놓고 '성난 투우 같았다'고 조롱하기도 했고 스페인과의 외교 관계를 끊을 거라고 징징대기도 했지만, 왕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스페인 국민들 사이에선 "왕이 속 시원한 발언을 했다"며 왕의 발언을 두고 각종 패러디가 쏟아졌으며, 해당 일갈은 한동안 스페인에서 전화벨 소리로 널리 사용되기도 하였다.[24]
2011년,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비센테 델보스케를 후작으로 임명했다.
[1]
참고로, 그에게 정치적으로 큰 영향을 미쳤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재임 기간은 13382일, 후안 카를로스의 재위 기간은 13383일로, 불과 1일 차이이다.
[2]
후안 카를로스에게는 3살
터울의 동생 알폰소가 있었는데, 1956년에 함께 작은
리볼버 권총을 가지고 놀다가 사고로 사망했다.
[3]
후안 백작이 자유주의자임에도 당시 프랑코를 지지하지 않던 사제들마저 급진 공화파에 의해 살해되고 있던 상황이라 계속 남아있다간 언제 총살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4]
하지만 프랑코가 오토 대공에게 스페인 왕위를 제안한 것 자체는 진지한 제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대항하는
알폰소 13세의 4남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을 자극하려는 술책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높다.
[5]
정확히 말하면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위에 이미 유아기 때 요절한 셋째형 페르난도를 제외하고도 둘째형인
세고비아 공작 인판테 하이메가 있었으나
청각 장애인인 이유로
알폰소 13세가 하이메 대신 후안을 지명했다. 다만 왕태자 작위인
아스투리아스 공에는 오르지 못했다. 알폰소 13세의 장남이자 후안의 맏형인 알폰소가 아스투리아스 공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알폰소는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박탈당했다.
[6]
출처: 전 주 스페인 미국 대사 David Brightly와 John Holroyd-Doveton의 대화.
[7]
그래서 카를리스타에 의해 스페인 국왕으로 추대된 보르보네파르마 분가의
사베리오(Saverio di Borbone-Parma 1889~1977,
파르마 공국의 마지막 공작
로베르토 1세의 7남)와 그 아들 카를로스 우고(Carlos Hugo de Borbón-Parma 1930~2010)는 죽을때까지 스페인 왕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아직 살아있는 카를로스 우고의 동생 식스토 엔리케(Sixto Enrique de Borbón-Parma, 1940년생)도 마찬가지이다.
[8]
차에 탄 채로 폭탄이 터져 그대로 폭사했다. 이때 폭발 충격으로 차가 공중으로 이십 미터 가량이나 솟아올랐는데 그때의 사진이 남아서 지금까지도 스페인 인터넷상 '스페인 최초의 우주비행사'
#라는 식으로
조리돌림당한다.
[9]
나에게 바친 충성을 국왕에 바치라는 것이 군부에 대한 프랑코의 유언이었다.
[10]
프랑코 체제 당시 관계 복원이 되었던
미국,
프랑스,
포르투갈 등은 물론이고
소련 등 동구권 국가들도 상황을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
[11]
이 때의 사단장급 장성들 대부분은 후안 카를로스가 각군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 만나 친해진 인물들이었는데, 후안 카를로스를 사관학교에 보낸 인물이 바로 프랑코였다. 결과적으로는 프랑코가 후안의 군 인맥을 잘 만들어둔 덕분에 큰 힘이 된 셈.
[12]
같은
입헌군주제 국가인
영국의 경우 왕실 관련 지출은 거의 대부분 왕실이 자체적으로 관광 상품이나 사업을 통해서 충당하는 반면,
스페인의 왕실 관련 지출은 전적으로 대중들로 거둔 세금으로 집행된다.
[13]
10월 1일 반파쇼 저항 그룹 Grupos de Resistencia Antifascista Primero de Octubre, GRAPO, 반파쇼 애국 혁명 전선 Frente Revolucionario Antifascista y Patriota, FRAP 등이 대표적이다.
[14]
악명 높은 1977년 아토차 총격 사건을 일으킨 Fuerza Nueva 등이 대표적이다.
[15]
참고로 앞서 언급한 그 문제의 코끼리 사냥 여행을 주선한 사람이라고 한다.
[16]
아스투리아스 여공 레오노르,
스페인의 인판타 소피아
[17]
이 때문에 결혼식은
가톨릭 예식(
혼인성사)이 아닌
정교회 예식으로 치러졌다. 참고로 소피아 왕비는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과 5촌 관계이며, 후안 카를로스 1세와는 8촌 관계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5녀
베아트리스 공주의 증손자, 소피아 왕비는
빅토리아 여왕의 장녀
빅토리아 공주의 증손녀이다. 참고로 영국의 국왕
찰스 3세는 모계인 영국 왕실 기준으로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의 현손이 된다.
[18]
여담이지만 보르본 왕조의 시조
펠리페 5세가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이기 때문에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루이 14세의 10대손이다. 루이 15세는 루이 14세의 증손자로 펠리페 5세의 형
프티 도팽 루이의 3남이다. 또한 이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먼 후손이 되기도 하는데, 루이 15세가 찰스 1세의 막내딸
헨리에타의 딸인 안 마리 도를레앙(
사보이아 공국 공작이자 초대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의 왕비)의 외손자이기 때문이다.
[19]
여담이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외할머니 루이즈는
포르투갈 왕국의 마지막 국왕
마누엘 2세의 막내 이모다. 즉 마누엘 2세와 후안 카를로스 1세는 5촌 지간.
[20]
스페인 주도로 창설된 정치, 경제, 문화 공동체이다.
[21]
아스나르는 1996년부터 2004년까지 스페인의 총리로 재직한 정치인으로 인민당(PP) 소속이다. 1996년 총선에서 젊은 이미지를 내세워 총선에서 승리하고, 총리로 재직했을 당시에는 부동산 규제 완화로 자산 가격이 급속도로 올라서(사실 따지고 보면 현
스페인/경제 위기의 원흉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루마니아나 콜롬비아·모로코 등으로부터 이민자가 대거 밀려올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었기에 그럭저럭 인기를 누렸던 총리였지만, 2003년
이라크 전쟁과 2004년 지하철 폭탄 테러 사건의 여파로 지지율이 급락하면서 총선에서 참패해서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즉, 차베스의 발언은 일종의 부관참시인 셈이다.
[22]
tú는 2인칭 단수 대명사 '너'의
낮춤말이다. 원래라면 존칭인 Usted(당신)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적절했을 것이다. 즉 이 때부터 이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야, 임마!' 하고 세게 나갔던 것.
[23]
윗 영상에서는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일갈이 음소거 처리되었으니 좀 더 또렷한 음성을 듣고 싶으면
해당 영상 참조
[24]
정작 왕 본인은 자신의 발언이 이렇게 인기를 끌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귀국한 뒤 딸이 자신에게 "그 입 닥치지 못할까?"라고 농담 섞인 인사를 건네고서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