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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11-04 14:41:14

우빈(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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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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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우빈(于斌)
생몰 1901년 4월 13일 ~ 1978년 8월 16일
출생지 중국 흑룡강성 난서현
사망지 바티칸
매장지 대만 보인대학
추서 건국훈장 대통령장

1. 개요2. 생애3. 한국 독립운동 지원

1. 개요

중국의 가톨릭 주교. 196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2. 생애

우빈은 1901년 4월 13일 중국 흑룡강성 난서현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조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났고 1912년 조부모를 따라 해륜현 약슬둔으로 이사했다. 약슬둔은 지금의 해북진으로, 흑룡강성에서 가장 중요한 가톨릭 촌락이였다. 우빈의 조모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14살이 된 그도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았다. 이후 파리 외방전교회의 앙리 루뱅 신부의 지도로 해륜현의 고등소학교를 거쳐 1916년 흑룡강성 제1사범학교에 입학해 3년만에 졸업한 뒤 치치하얼에 위치한 제1사범학교에 재학했다.

1919년 5.4 운동이 전개되자, 우빈은 학생단장으로 추대되어 가두 연설을 하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체포를 피해 약슬둔에 피했다. 이후 1920년 길림의 신학교인 신라학원에 입학하여 라틴어 등 기초 과정을 배우고 상하이의 진단대학 예과에서 프랑스어를 1년 수학했다. 그리고 길림에 돌아와 신라학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하다가 1924년 로마로 유학을 떠나 전신대학, 우르바노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수학했다. 1925년 성 토마스 데 아퀴노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1928년 12월 22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1929년 우르바노 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우빈은 가을부터 중국 문학 교수로 재임했으며, 1933년에는 중국 철학과 중국 문화사, 중국전교학을 가르쳤다. 또한 1931년부터 1933년까지는 교황청 도서관에서 중문부의 서목과 자료 등을 정리하며, 도서관에 소장된 많은 중국 고서들을 읽고 연구했다. 어렸을 때 유교 경전을 공부했던 그는 중국 문화의 기본 정신을 이해했으며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중국 문화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서양 문화와의 접목을 시도했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우빈은 로마에 와 있던 중국 주재 교황사절 콘스탄티니 대주교를 도와 이탈리아의 명사들과 연락해 중의우선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에 선임되었고, 중국을 위한 선전 활동에 전념했다. 그는 이 일로 이탈리아의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에게 훈장을 받았다. 또한 그는 1933년 이탈리아 국립 페루지아 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으며, 교황청으로부터 평신도 사도직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중화전국공교진행회회(中華全國公敎進行會) 총감독으로 임명받고 1933년 11월에 귀국했다.

1933년 12월 베이징에 도착한 우빈은 교정주화대표공서(敎廷駐華代表公署)의 비서를 맡았고 뒤이어 중화공교교육연합회 위원, 보인대학의 이사와 윤리학 교수를 겸했다. 여기에 1934년에는 중국전국공교학교 시찰주임도 겸해 가톨릭 교육을 주도했다. 1935년 9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중화전국공교진행회 제1차 대회에서 비서장에 선출된 그는 비행기 헌납 운동을 발기해 가톨릭 신자들의 애국심을 드러내는 데 기여했고, 중국인들이 비애국적이라고 여기던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1936년 7월 17일, 교황 비오 11세는 우빈을 난징 대목구장에 임명했다. 우빈은 9월 20일 베이징에서 교황 사절 마리오 자닌 대주교와 베이징 대목구장 폴 몽테뉴 주교, 해문 대목구장 주개민(朱開敏) 주교의 집례로 축성식을 거행했다. 중국 국민정부는 천진에서 난징까지 이어지는 진포철로에 1량의 ‘화차’(花車)를 증설하도록 하여 우빈이 남경에 도착하는 것을 환영했다. 1년 후인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우빈은 교구의 사제와 교우들에게 ‘기도화평’(祈禱和平)과 ‘준비응전’(準備應戰)을 강조했다. 그는 10월 홍콩을 거쳐 유럽으로 가서 국제 사회에 항일 전쟁 지원을 요청했으며, 12월에는 미국과 캐나다의 30여 개 대도시에서 130회의 강연과 방송을 해 국제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이어 그는 파리, 런던, 로마, 스위스에서 활동했으며, 헝가리에서 개최된 성체대회에 중국대표단을 이끌고 참석한 후 베트남을 거쳐 1938년 7월에 귀국했다.

1937년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난징 대학살을 자행했을 때, 그는 유럽과 미국에서 항일전쟁 지원과 난민 구제를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1938년 국민정부가 국론 통일과 국력 결집을 목적으로 내세우고 초당적인 형태로 국책자문기관인 국민참정회(國民參政會)를 설치했을 때, 우빈은 참정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그해 12월 국민정부 행정원의 진제위원회(振濟委員會) 위원에 취임한 그는 위원회를 대표하여 미국의 원조에 사의를 표하기 위해 1939년 1월 출국하여 유럽을 거쳐 미국에서 난민 구제를 위한 모금 활동과 강연 등을 계속했다.

1939년 10월 충칭에 돌아온 우빈은 그해 12월 <영문중국월보(英文中國月報, China Monthly)>가 뉴욕에서 창간하는 데 관여했다. 그리고 1939년 2월 홍콩에서 <우빈주교항전언론집(于斌主敎抗戰言論集)>을 출간해 대중의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우빈은 중국 국내에서도 난민구제와 관련되어 모금이나 의료 등과 관련된 여러 사업에 관여하고, 강연이나 군 위문 활동 등에도 적극 참여하여 1941년에는 전국각계노군단(全國各界勞軍團) 단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난민 아동의 직업 교육에도 관심을 가져 1941년 9월 난동직업학교(難童職業學校)를 비롯한 각종 학교를 설립했다.

그는 문화에도 관심을 두고 중일전쟁 이후 발행되지 못하고 있던 <익세보(益世報)>를 1938년 12월 곤명에서 복간시키고 1940년 3월 충칭으로 옮겨 간행했다. 또한 1941년 6월에는 <교우생활>을 창간했으며, 인생철학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해 12월에는 중국천주교문화협진회를 조직하여 이사장에 취임했다. 1943년 1월부터 준비되어 5월에 창립된 중국종교도연의회(中國宗敎徒聯誼會)의 창립에도 우빈이 깊게 관여했다. 중국종교도연의회는 '기독장군'으로 유명했던 펑위샹, 중국회교구국협회장 백숭희(白崇禧), 중국불교 회장 태허(太虛), 중화기독교전국협진회 총간사 진문연(陳文淵)과 우빈이 상무이사를 맡았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우빈은 워싱턴에 판사처를 설치하고 1943년 3월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미국인의 중국 이해를 촉진하고자 중미문화학회를 창립하으며, 중 국에 한 군사 지원의 확대를 요구했다. 아울러 1943년 5월 11일 하원 외교위원회 단상에 선 그는 전후에 마땅히 동북 지역이 중국 영토로 확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미국 정부에 이민법의 개정을 촉구했다. 당시 미국에 거주하는 중국인은 영주권을 가질 수 없었고 부동산도 구입할 수 없었다. 그는 중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통해 중국인에 대한 차별이 미국의 명성을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음을 강조하여 이민법을 개정하는 데 진력했다. 1943년 11월 백악관으로 초청된 그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중국인 이민 문제를 언급했다. 결국 중국 이민법 개정은 상원과 하원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1944년부터 매년 105명의 중국인의 이민과 영주권 취득이 허가되었다.

1944년 9월 중국으로 귀환한 우빈은 1945년 4월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전후 새로운 세계질서를 구상하기 위한 샌프란시스코회의에 민간표로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국제 정치계의 여러 인물과 미국의 천주교 인사 등을 만났는데, 특히 한국독립운동가인 이승만을 만났다. 중일전쟁이 종결된 후 중국으로 돌아온 그는 천진, 베이징, 난징, 상하이, 시안, 충칭에 <익세보>를 발행하고 익세보총공사를 난징에 설립했다. 이어 난징에 익세광파전대(益世廣播電台), 명원신문전과학교(鳴遠新聞專科學校) 등을 설립했으며, <익세주간(益世周刊)>과 <익세만보(益世晩報)>를 창간했다. 1946년 11월에는 제헌 국민대회 대표에 당선되었으며,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1948년 1월에도 역시 주석단에 추대되었다.

그러나 1949년 2월 베이징을 점령한 중국 공산당은 우빈을 '정치주교'로 단정하고 그를 '문화전범'으로 선포했다. 이에 따라 1949년 7월 교황청의 지시로 대만으로 피한 우빈은 10월 중국천주교문화방문단 단장의 명의로 남미 21개국을 순방하여 라틴아메리카의 자유중국 지지를 호소했다. 그해 12월 미국으로 옮긴 그는 1959년까지 뉴욕에 거주하면서 대만과 한국, 일본, 베트남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반공 강연을 했다. 1954년 2월 타이베이에서 개최된 제1계 국민대회 제2차 회의에 참석했으며, 중국천주교문화협진회 이사장을 계속 맡았고, 한국에 방문하여 이승만 대통령 등을 만났다. 1955년에는 뉴욕에서 자유태평양협회를 조직했으며, 1956년에는 유교의 덕치주의와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의 양양을 목적으로 '자유태평양운동'을 발기했다.

1959년 교황청은 대만에 보인대학을 재건하기로 하고 그 임무를 우빈에게 맡겨 교장에 임명했다. 이후 1960년 2월 제1계 국민대회 제3차 회의에서도 주석단에 당선된 그는 1962년 광복대륙설계위원회 부주임위원을 맡았다. 또한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으며, 1967년 7월 전경신(田耕莘) 추기경이 선종한 이후 1969년 4월 28일 바오로 6세에 의해 중국인으로는 두번째로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78년 8월 6일 바오로 6세가 선종하자 교황의 장례식과 신임 교황 선출을 위해 바티칸에 갔으나 8월 12일 교황의 장례 미사 중에 쓰러졌고 결국 8월 16일에 선종했다. 8월 18일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린 장례미사에는 94명의 추기경이 참석했으며, 그의 유해는 8월 26일 대만으로 운구되어 28일 장례식을 치르고 보인대학에 매장되었다.

3. 한국 독립운동 지원

우빈은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롱빈관에서 개최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 참석했다. 그는 이날 다음과 같이 축사했다.
정의와 공정함이라는 하느님의 2대 진리를 장기적으로 패퇴시킬 힘은 어디에도 없다.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이러한 불멸 의 2대 원칙에 맞서 싸우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터무니없는 야심을 결코 성취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두 가지 원칙을 신념으로 간직하여 정당한 싸움에 좌절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분명히 우리가 승리하도록 도움을 줄 것이다.

또한 그는 중국의 전시 수도에서 광복군 사령부의 창립기념식을 갖는 중요성에 대해 "한국과 중국의 최종적인 승리와 새로운 평화의 새 시대를 여는 여명으로 상진된다"고 했으며, 이러한 의지가 중국과 한국간의 긴밀한 협력을 강화하는 데 적용될 것이며, 이러한 협력은 세계 전체를 행복과 안녕의 방향으로 가리킬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1940년 11월 11일 저녁, 우빈은 익세보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총사령부 관계자들을 초청하여 연회를 베풀었다. 그는 이들에게 자신이 중국 천주교 350만 신도들에게 한국 독립운동에 협조하라는 지시를 내렸음을 알렸으며, <익세보> 역시 한국독립운동을 위해 힘써 선전할 것임을 강조했다.

또한 우빈은 연회석상에서 비단에 '협양정기(協揚正氣)'라고 쓴 기를 임시정부에 선물했다. 이에 대해 김구는 ‘정의사자(正義使者)'라고 수놓은 비단기를 우빈에게 전했다. 또한 엄항섭은 익세보사의 후의에 감격하여 그날 밤 그 감상을 중국어로 적어 <익세보>에 투고하기도 했다. 그 후 임시정부와 광복군 관계자들은 우빈과 중국 천주교회의 한국 지원에 크게 고무되었고, 서로 교분을 나누게 되었다. 김구는 중국 천주교회의 한국독립운동 지원 소식을 그해 12월 4일자와 10일자 공문으로 미국 교포들에게 알렸다.
중국 각 사회단톄 즁 텬주교도 三백 五十만이 우리 광복군의 후원이 되겟다고 셩명한 후 세계에 유명한 우빈 주교가 선봉이 되여 모든 편의를 도와줌으로 일의 발젼이 속히 됨니다.
중국은 물론 셰계뎍으로 유명한 우빈 주교는 중국 三백 五十만의 텬주교도를 총동원하야 우리 광복사업을 후원하기로 졍중셩며[명]한 후 쉬지 안코 우리를 위하야 로력분투하는 바 명년에는 우빈 주교가 다시 도미하야 반분은 중국을 위하여 일하고 반분은 우리를 위하야 특히 션젼하야 우리도 국졔뎍 디위를 가지도록 힘쓰겟다 하니 그는 참으로 한국의 구셩임니다.

한편 우빈은 <익세보>를 통해 만주 방면에 다수 유격대를 파견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협조를 받으며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자고 건의했다. 그리고 1941년 8월 28일 임시정부가 국치 31년을 맞아 충칭의 각 언론기관 대표들을 초청하여 한국독립운동의 경과와 전도에 관한 보고회를 열 때, 우빈도 이 자리에 내빈으로 참석하여 답사를 했다. 그는 먼저 한국인들의 처지에 대해 깊은 동정의 말을 전한 다음, 교황이 제안한 평화 계획을 강조하고, 노예와 같은 처지에 있는 한국인들에게 광명의 날이 머지 않았다며 더욱 분투할 것을 당부했다. 또한 1942년 4월 10일 임시정부가 수립 23주년을 기념해 김구 주석과 조소앙 외교부장의 주고나하에 각계 인사들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베풀었는데, 우빈은 이 자리에도 참석했다.

우빈은 1942년 8월 충칭의 한국광복군에게 2만원의 자금을 기부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11일 충칭에서 발족된 중한문화협회에 참석해 명예이사에 선임되었다. 또한 그는 국민정부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구했고, 장제스는 그의 제의를 받아들여 임시정부를 적극 후원하고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조항에 넣을 것을 강력하게 주장해 성사시켰다. 또한 우빈은 1944년 중국 한국 교민들의 복리사업(福利事業) 추진 명목으로 한인 노약자와 중병자를 위해 5만원의 기부금을 송부했다.

우빈은 1944년 5월 19일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참석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부위원장 김병연과 선전부장 김용성, 그리고 로스앤젤레스 한인장로교회 김성락(金聖樂) 목사에게 환영받았다. 그는 이 자리에서 김구를 "한국의 한 표증(symbol of Korea)'라는 표현을 쓰며 경의를 표했고, 한인들이 망국 이후 독립 정신을 발양하고 혁명당의 존재와 분투를 통하여 한국이 독립할 자격이 있는 것 을 알고, 중국이 한국 독립을 돕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우리는 한국 일과 중국일을 두 일로 보지 말고 한 일로 봅시다"는 표현을 사용해 참석자들을 감격하게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흑룡강 사람이올시다. 내 고향이 한국과 가깝고 한국 일을 잘 압니다. 이 다음 한국이 독립하는 날에 내가 흑룡강으로부터 의주를 지나 서울에 와서 당신들과 여행을 같이 할 적이 오늘 우리가 여기서 만난 것을 기억합시다."

이후 우빈은 주교 정장을 한 자신의 사진에 ‘한국여미우인기념’(大韓國旅美友人紀念)과 영문 인사말을 쓰고 서명해 주었다.이후에도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우빈은 1948년 8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기념식 초청을 받았지만 워낙 일정이 많아서 참석하지 못하고 대신 익세보사 사장인 반조영 신부를 파견했다. 그러면서도 한국을 방문하지 못한 걸 유감으로 여기고 1949년 3월 하순에 미국에서 귀국해 한국을 방문하겠다는 뜻을 이승만 대통령과 서울교구의 노기남 주교에게 알렸다. 그러나 그는 결국 한국 방문을 하지 못했고, 1954년 4월에야 이승만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비로소 방문했다. 이때 처음 내한한 우빈은 1959년 5월과 1961년 2월, 그리고 1969년 8월과 1976년 4월, 모두 다섯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9년 우빈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