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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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무원 총리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외교부장 저우언라이 [ruby(周, ruby=Zhōu)][ruby(恩, ruby=Ēn)][ruby(来, ruby=Lái)] | 周恩來(주은래) | Zhou Enla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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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출생 | <colbgcolor=#fff,#191919> 1898년 3월 5일 | ||
청
강소성
회안현 (現 중국 장쑤성 화이안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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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76년 1월 8일 (향년 77세) | ||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시 시청구 중국 인민해방군 제305의원 | |||
재임 기간 | 초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
1949년 10월 1일 ~ 1976년 1월 8일 | |||
초대 중앙인민정부 외교부장 | |||
1949년 10월 1일 ~ 1958년 2월 11일 | |||
제8기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
1956년 9월 28일 ~ 1966년 8월 1일 | |||
제10기 중화인민공화국 부주석 | |||
1973년 8월 30일 ~ 1976년 1월 8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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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부모 |
아버지 저우이넝(周贻能) 어머니 완둥얼(万冬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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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덩잉차오(邓颖超) | ||
자녀 |
양아들 왕슈(王戍),
리펑 양딸 쑨웨이쓰(孙维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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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은강서원 (단기재학) 펑톈성 관립동관모범2등소학교 (졸업) 사립 난카이중학당 (졸업) 동아고등예비학교 (단기등록학습) 도쿄간다구고등예비학교[1] (비정규학습) 메이지대학 (정치경제과 / 단기등록학습) 난카이학교 대학부 (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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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 → 무종교 ( 무신론)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중화소비에트공화국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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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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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 상우(翔宇)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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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시절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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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인. 초대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을 지냈다.국내에서는 오랜 기간 한국식 한자독음인 "주은래"로 표기했기에 지금도 주은래 총리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국립국어원에 의하면 신해혁명 이전 출생 중국인은 한국식 한자독음으로 부르는 게 타당하므로 틀린 표현은 아니다. 저우언라이와 주은래 모두 표준 표기로 정착되었다.
1917년 도일하여 호세이대학, 메이지대학 등에서 수학하기도 하였으며 학위취득 낙방후 톈진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해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를 창설했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0년대부터 중국공산당의 핵심으로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정권 수립 이후 죽을 때까지 초대 국무원 총리를 지냈으며 외교, 정치, 경제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카리스마만큼 똘기도 있던 마오쩌둥과 달리 학자 스타일로 국내외 문제에서도 꽤 유연한 사고를 보여줘 오늘날 중국에서도 고평가받는 총리이다. 2인자로 평생을 마오쩌둥과 함께 한 동지이자 파트너였기 때문에, 대중매체에서도 마오쩌둥과는 한 세트로 묶여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2]
2. 생애
자세한 내용은 저우언라이/생애 문서 참고하십시오.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마오는 어떤 모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저우는 서서히 하나가 되어갔다. 마오의 열정은 반대파를 압도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저우의 지성은 그들을 설득하거나 이용하려 했다. 마오가 냉소적인 사람이었다면, 저우는 냉철한 인물이었다. 마오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했고, 저우는 행정가나 협상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마오는 역사를 가속화하기를 열망했지만, 저우는 그것의 흐름을 이용하는 것에 만족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중국 이야기 #
현대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음에도 흔히들 "저우 총리"라 부르고 시진핑조차도 저우언라이에 대한 칭송을 규제하지 않을 정도. 성격도 원만하고 관계를 조정하는 데 뛰어나서 동료들이 저지른 실책들을 훈훈하게 마무리하는 미담들이 많이 들려온다. 막장 사건들이 많이 벌어진 격동의 6,70년대 중국 현대사의 중심에 권력을 쥐고 이를 막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마오쩌둥에 붙어 일신의 안녕이나 꾀하며 이미지 관리에 집착한 위선자라는 평도 있다. 허나 적군이던 장제스의 여자 문제를 훈훈하게 마무리해주고, 문화대혁명 시기에 전 왕조의 유산이자 소중한 문화유산인 자금성, 포탈라궁 등을 지켜내는 등, 양면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이다.
그의 청렴성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저우언라이가 총리로 재임하던 당시 파키스탄의 관료였던 사람이 증언에 따르면 파키스탄 탁구 국가대표팀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국빈 대접 차원에서 저우언라이가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저우언라이가 무언가 걱정하는 듯 보이자 파키스탄 국가대표팀 선수가 저우언라이에게 "뭔가 문제라도 있으시냐"고 물었는데 저우언라이가 대답하길, "우리 집에 식기가 부족해서 말입니다. 이웃들에게 좀 빌려달라고 얘기해 뒀었는데, 늦어져서 걱정입니다." 즉 일국의 총리 사저에 기껏해야 수십 명 정도를 대접하는 데 필요한 식기조차 없었던 것.
정치가로서는 평생 마오쩌둥과 함께 한 일생일대의 동지였다. 위에도 나왔지만 저우언라이는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초기에는 적극 찬성했으나 후에 돌아섰고, 이후에도 계속 이런 정책적 과오들을 자신의 권한 내에서 또는 마오쩌둥이 노여워 하지 않는 안에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했다. 마오쩌둥의 카리스마가 화려한 언변과 날카로운 필력에 원천을 둔 것이었다면, 저우언라이는 조용하면서도 유연하고 포용력 있는 성품으로 좀처럼 적을 만들지 않는 카리스마를 가졌다.
내전 당시에도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양 쪽으로부터 폭넓은 존경을 받았으며, 아직까지도 중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현대 중국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다. 심지어는 명 재상의 대명사인 소하나 제갈량과 비교되기도 한다. 과연 저우는 제갈량의 후 출사표에 나온 '국궁진췌 사이후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최근에는 중국에서도 이런저런 잘못들을 갖고 마오쩌둥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굉장히 많지만, 저우언라이를 비판하는 사람은 정말 잘 없다. 일각에서는 사당에 신의 한 명으로 모실 정도라고 하니 그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의 급진적인 잘못을 노여움을 사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권한으로 최대한 완화시키려고 노력했다. 다만 그 당시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의 피해가 너무 크다 보니 생사를 함께한 혁명 동지들이 별의별 이유로 숙청당하는데도 총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못하고 지켜만 보거나, 일이 망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마오의 일에 적극 동참하던 그를 일부에선 고의적 방관자였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것이 저우언라이의 몇 안되는 비판점이다. 대약진운동 문서에도 다뤄지듯이, 저우언라이의 바짝 엎드리는 비굴한 행태, 경제가 망해가고 있는 걸 알면서도 무리한 계획을 열심히 독려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숙청이 두렵다지만 이렇게까지 일조해야 했나 싶을 정도다.
물론 저우언라이라고 해서 이런 점을 후회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2007년에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가 보관하던 저우언라이 개인의 일기가 공개되었었는데 거기에는 저우 본인이 사망 직전 마오쩌둥을 국가 주석으로 세운것을 후회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실 따지고보면 마오쩌둥이 급진적인 경제정책에 집착하지 않고 차근차근 경제성장이 진행되었으면 훨씬 이전에 세계 수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어, 국제적인 입지도 단단해졌을터였다.
또한 저우언라이 자신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완화시킬려고 고생을 사서 했고, 거기에다가 문화대혁명 직후로 동료들이 숙청되는 건 물론 본인도 죽는 그 순간까지도 4인방과 홍위병들의 공격을 받아야했다. 자신의 수양딸인 쑨유스도 장칭에 의해 죽임을 당했으며 사위도 정신적인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으니 당연히 마오쩌둥에 대해서 좋은 감정이 들 수만은 없기는 했다.
게다가 마오쩌둥은 꼭 동지를 출당하거나 혹은 벌을 내릴 때 저우언라이를 통해 발표하도록 하여 책임을 떠밀었고, 저우언라이는 본의 아니게 이런 숙청 명령서에 가장 많이 사인을 하게 되었다. 류사오치의 경우도 출당 발표를 저우언라이가 했을 정도. 허나 역설적이게도 그가 적극적으로 개입했다면 그 역시 숙청의 굴레에서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며, 그가 없었으면 홍위병은 중국의 모든 문화재를 박살내고 자금성은 잿더미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황하가 범람해 현장에 긴급방문했는데 일하던 인부들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가 지시를 어떻게 내릴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한 말은 "여러분, 아무쪼록 의견을 내주세요." 인부들이 깜짝 놀라 아무 말도 못하고 있다 "우리들은 주 총리를 진심으로 환영합니다."라고 판에 박힌 인사를 하자 총리는 "우리는 모두 일가친척입니다. 환영할 필요는 없습니다.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문제는 '다리를 어떻게 하는가'입니다. 모두 다리를 위해 노력한 사람이므로 경험도 풍부합니다. 나는 모두의 의견에 따라하고 싶은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의 평상시 인품이 어떠한지 보여주는 대목. 실제로 이런 점은 덩샤오핑이 상당 부분 본받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도 대인의 면모를 많이 보였다. 중국공산당이 보통 옛 청나라 황족에게 매우 비판적이고 적대적이었던 데 반해 저우언라이는 그들에게 호의적까지는 아니더라도 매우 동정적이었다. 특히 청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남동생인 애신각라 부걸과 그의 일본인 아내 사가 히로가 같이 중국에서 머무는 것을 허락하였고, 그들의 장녀 혜생의 편지를 받고 사가 히로를 초청한 사람 또한 저우언라이 총리였다. 그러나 편지를 보낸 혜생은 어머니가 일본인과의 결혼을 반대하자 애인과 함께 자살했고, 사가 히로는 차녀 호세이(호생)의 결혼은 막지 않았다.
중국과 일본은 적대국이었으므로 편지를 읽고도 그냥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상식적인 일이었지만, 그는 관대하게도 한 소녀의 편지를 읽고 청을 들어준 것이다. 옛 순친왕부에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고 최고의 대우를 해준 것도, 문화대혁명 때 부걸의 집이 홍위병들에게 습격당해 고초를 겪자 경비병을 파견하여 그들을 지켜준 것도 모두 저우언라이였다.
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아버지였던 천두슈는 1930년대 공산당을 탈당했고, 당시 대세였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가, 나중엔 아예 공산주의를 버렸다. 하지만 저우언라이는 국공합작 때 국민정부가 옮겨온 충칭에 머물 당시, 당시 중국 국민 감방에서 출소했던 천두슈가 병석에 눕자 병문안을 왔고, 거금을 치료비로 건내기도 했다(그러나 천두슈는 거절했다.). 당시에도 천두슈가 옌안에 있던 마오쩌둥에게 "트로츠키파 배신자이자 잘못된 지도로 당을 구렁텅이로 이끈 무능력자"로 취급을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저우언라이의 천두슈에 대한 대접은 상당히 대인의 그것이었다.
1957년 전국인민대표회의 민족위원회가 주최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선 "우리는 대민족주의, 특히 대한족주의와 지방 민족주의에 모두 반대한다. 반드시 민족 구역의 자치를 실현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중국 민족의 역사발전과 경제발전, 혁명발전에 가장 부합하는 정책이다. 각 민족들은 완벽한 평등을 누리고 그 어떤 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라고 말하며 배타적 민족주의와 편협한 대국 쇼비니즘을 질타하기도 했다.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정책을 본다면 저우언라이가 저승에서 땅을 칠 것이다. 내몽골 인민혁명당 숙청 사건 때는 내몽골 자치구 정부주석을 맡고 있던 우란후를 지켜주기도 하였다.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을 성사시킨 헨리 키신저는 2012년 출간된 책에서 "나 자신이 살아오며 저우언라이만큼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인물은 없었다"고 그를 극찬했다. 닉슨 역시 자신이 방중했을 때 저우가 "내가 암에 걸려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으니, 내가 살아있을 때 빨리 미중 수교를 성사했으면 한다"는 말을 건네는 걸 보며 감동받았다고 한다.
북한에서도 인기가 많다. 황장엽의 회상에 따르면 정작 원조의 양은 소련이 중공을 앞섰지만, 레오니트 브레즈네프가 "이만큼 도움을 많이 해줬지 않느냐"라며 생색내고 툴툴거렸던 반면 저우언라이는 겸손하게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라고 했다고 한다. 실제로 조중변계조약 때 북한에 양보를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3.2. 부정적 평가
"
마오쩌둥은 비전에 찬 공상가였고, 저우언라이는 바로 그 악몽을 현실로 탈바꿈시키는 산파였다. 언제나 근신 중이었던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입증하기 위해
대약진운동에 지칠 줄 모르고 전념하게 된다."
프랑크 디쾨터, 인민 3부작
프랑크 디쾨터, 인민 3부작
그러나 중국공산당이 아직도 정권을 잡고 있는 와중 공정한 평가가 나오기 힘들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저우언라이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 반대로, 그에 대한 비판론은 상당히 크다. 저우언라이는 1950~1951년에 불어닥친 대규모 우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동조했으며, 당의 권력을 위해 '수백만 명' 정도는 기꺼이 바쳐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임을 잊으면 안된다는 논지다.
각 소수 민족들의 평등을 중시했다는 말 역시, 그것이 마오쩌둥 이하 중국공산당의 기조였기 때문이지[3] 저우언라이가 딱히 대인이여서는 아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대한족주의를 비판하며 소수민족의 인권을 두둔하는 언사를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저우언라이고 마오쩌둥이고, 입만 잘 털었지 결국 별다르게 한 건 없다는 것이다.
이례적으로, 달라이 라마는 "차라리 마오쩌둥은 투박한 시골 사람 같은 면이 있는데, 저우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적을 만들지 않는 것뿐이며 실상은 부드러운 위선자"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는 마오쩌둥의 정책에 반대하기는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꼬리를 내리며 마오의 뜻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앞서 대약진 운동에서도 처음에는 대약진 운동이 너무 과격한 발상이라며 반대했지만 허황된 고속성장의 꿈에 매달렸던 마오쩌둥의 뜻을 꺾지 못하고 결국 자아비판을 하며 꼬리를 내렸으며 이러한 모습은 문화대혁명 때에도 반복되었다.
또한 달라이 라마는 오리아나 팔라치와의 인터뷰에서 마오쩌둥은 똑똑한 지도자였으며 자신에게 큰 애정을 보여주었다고 회고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언제나 눈을 뒤룩뒤룩 굴리는 위험할 정도로 똑똑하고 간사한 인간이라면서 그와는 절대로 친구가 될 수 없을 것이라고 싸늘하게 논평했다.[4][5][6]
저우언라이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한다 한들 마오의 실책을 수습해주는 정도에 그치며 중국을 발전시킨 것은 아니었다.[7] 결과적으로 대약진 운동의 파국이나 홍위병과 4인방의 횡포도 막지 못했으니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달라이 라마 입장에서 말이 통한다면서 기대를 걸었다가도 대차게 실망을 한 경험이 있었으니 좋은 생각이 들리는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저우언라이에 대해 위선자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
저우언라이는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대인적 풍모를 보였고, 공산주의 중국에서는 청렴한 부류였지만 결국 개인의 면모에 그쳤다. 아돌프 히틀러를 비롯한 여러 독재 국가의 정치인들 중,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했다거나 청렴했다거나 하는 사람들은 있지만 그것이 그들의 범죄 행각을 감싸주는 것은 아니다.
결국, 저우언라이는 진실로 마오쩌둥의 (상호보완적) 동지였다는 것이 비판자들의 평가다.
4. 한국과의 관계
장제스와 마오쩌둥, 쑨원이 그렇듯이 한국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1919년 3.1 운동을 지켜보면서 조선에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카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안중근 의사에 대한 연극을 공연했으며, 황푸군관학교에 재직하면서 많은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친해졌고, 많은 조선인 제자를 두었다.
발해-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하던 중국사회과학원에 주의를 주고, 이에 대해 북한 파견단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있다. 이 문제를 다룬 신문기사 또한 1962년 북한측이 고조선의 발원지를 찾기 위해 만주 지역에서 발굴조사 허가를 요청했을 때 이를 승인하기도 했다. #
그러나 한국(남북한)을 소국, 중국을 대국으로 보는 중국 특유의 가치관에서 자유로운 인물은 아니었다. 작은 나라인 한국에 대국인 중국 같은 넓은 시각을 기대할 수 없으니 대국인 중국이 한국 같은 작은 나라들에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그가 한국(북한 포함)을 배려한 것은 진심으로 좋은 사람이어서라기보다는 이웃 사회주의 나라에 대한 배려와 대국으로서 소국을 품어준다는 전통적 중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요즘 중국 어용학계들이 보이고 있는 역사왜곡과는 여러모로 대조적이다. 현재의 중국은 동북삼성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 부여 등 자국 땅에 있는 한민족의 역사 유적에 대해 발굴은 물론이고 참관도 못하게 하며 외국인이 발굴현장을 구경 하려고 하면 들어오지도 못하게 한다. 특히 한국인. 그래서 관련 전공인 한국 역사학자들은 일부러 옷도 패션센스 없게 입기도 한다. 외국인들이 한국인과 중국인을 구분하는 방법 중 하나가 패션 감각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은 최소한 옷을 입는 데는 신경을 쓰는 편이지만 중국인들은 그런 거 없다고... 말투도 조선족으로 위장해서 중국을 드나든다는 이야기도 있다.
발해 - 고구려사 이외에도, 6.25 전쟁 초반 김일성이 승승장구하며 우쭐해있을 때 미국이 개입할 것을 예상하고 김일성에게 이를 경고했다. 그러나 근자감에 쩔어있던 김일성은 이를 듣지 않는다. 저우언라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미리 중공군 26만을 국경에 배치시키고, 한반도 정찰을 명령해 베이징에서 있었던 전략회의에서 " 더글러스 맥아더가 상륙한다면 군산이나 원산이 아닌 인천에 상륙할 가능성이 높다"고 정확히 예측한다. 실제 미 합참과 해군이 처음 제안한 상륙지는 군산이었지만 맥아더가 목표를 인천으로 바꿨다. 군사전략적 안목까지 갖췄었다는 소리. 저우언라이 본인도 대장정, 중일전쟁, 국공내전에 참여했으며 강서 소비에트 시절, 중국국민당의 공세에 맞서 홍군의 총지도부를 운용해본 경험이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저우언라이는 9.28 서울 수복 이후 유엔군과 한국군이 계속 북진하자 미국에 "이 전쟁은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홀로 북진하는 것은 무방하나(즉 중국이 개입하지 않겠다.),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는 것은 중국에 대한 도발로 간주하겠고, 이후 모든 책임은 미국에 있다."고 여러 번 경고했다.[8] 허나 당시 중국의 참전 의사 혹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전력 자체를 경시한 유엔군이 그대로 북진하자 중국은 항미원조전쟁이란 미명하에 참전을 개시하게 된다.
다만 본격적인 출병에 앞서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과는 달리 한반도 출병에 반대했다고 한다. 저우언라이는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이 상황에서 출병을 해 버리면 많은 자원이 그 쪽으로 전용되어 재건이 늦어지게 되고, 미국을 상대로 이긴다는 보장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북한이 망하더라도 외교를 통해 미국의 중국 진공은 저지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2022년 공개된 저우언라이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전문을 보면, 저우언라이는 처음부터 개입에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그러나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강경론이 득세했고, 결국 중공군 참전으로 이어진다. 이때 중공군 개입을 공식 회견으로 표명한 사람이 저우언라이였다. 당시 국무원 총리 겸 외교부장(외교부장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직위에 따른 맡은 바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존속과 김씨 왕조의 성립이었지만 중국 입장에서야 베이징 코앞에다 완충 지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정전 협정을 먼저 제기하였다.
어찌 보면 정주영 회장과 현대자동차의 은인(?)이기도 하다. 1974년 최종 타결된 중국- 일본 간 무역협정에서 " 남조선이나 대만과 거래하는 일본 기업의 중국 진출을 불허한다"는 내용이 들어간 4가지 원칙( 저우 4원칙)을 강력하게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는데, 때문에 토요타와 합작 관계가 끊긴 신진자동차가 도산하면서 현대자동차가 그 반사 이익을 누린 것. 현대자동차는 토요타와 합작하려 했으나, 이 원칙 때문에 합작을 포기하고 대신 미쓰비시와 합작하게 된다. 지금 와서는 합작을 애걸하던 현대자동차가 미쓰비시보다 커졌으니, 격세지감.
잘 알려지지 않지만, 북한과 중국의 국경을 확장하는 조중변계조약에서 많은 양보(?)를 하여 백두산 전체가 아닌 반만 가져갔다. 백두산까지 자기네 땅이라 주창하는 중국의 관점에선 넘겨주었다고 해도 어색한 표현은 아니다. 자세한 건 백두산 문서로. 그래서 중국에서 한동안 매국노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홍위병도 이를 들어 저우언라이를 비난했다.
또한 '깐수 사건'으로 유명한 정수일 교수와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 본래 중국 조선족 출신인 정수일은 조선민족( 한민족)으로서의 민족주의를 자각하고 북한 귀화를 결심하였다. 이 때 정수일은 그냥 망명하는 게 아니라 저우언라이에게 직접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정수일과 같은 인재가 중국을 떠나겠다고 하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 "좋은 여성을 소개해 줄테니 중국에 남아 달라"고 권유했다. 하지만 정수일의 고집을 꺾지는 못하고 귀화를 허락해준 뒤 신원보증을 해 줬다. 이때 저우언라이가 신원을 직접 보증해준 덕에 정수일은 북한에서도 숙청을 당하지 않았다.
1963년 6월 28일, 저우언라이 총리가 북한의 조선과학원 대표단과의 공식 만남에서 중국의 고조선, 고구려, 발해사를 중심으로 한 한반도 역사왜곡과 침탈을 시인하고 사과했던 적이 있다. “역사학의 일부 기록은 진실에 그다지 부합되지 않는다. 이것은 중국 역사학자나 많은 사람들이 대국주의, 대국 쇼비니즘의 관점에서 역사를 서술한 것이 주요 원인이다”라고 고백했다. 이어, “우리는 당신들의 땅을 밀어붙여 작게 하고, 우리들이 살고 있는 땅이 커진 것에 대해 조상을 대신해서 당신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사과의 뜻을 분명히 했다. 덧붙여 요하유역을 고구려와 고조선의 땅이었음을 인정했다. 만주 지방과 요하 지역이 과거에 중국 한족의 땅이 아니었음을 인정한 것이다.[9] 이어진 그의 발언은 감동적인 것이었다. “역사는 왜곡할 수 없다. 두만강, 압록강 서쪽은 역사 이래 중국 땅이었으며 심지어 예로부터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었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고,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모두 역사학자의 붓끝에서 나온 오류이다”는 말로 질타했다. #
5. 가족관계
1925년
1928년
1960년
노년의 덩잉차오
저우언라이는 젊은 시절부터 동지이자 아내인 덩잉차오(邓颖超, 등영초. 1904.02.04.~1992.11.07.)와 백년해로하여 가정적으로도 모범적인 면모를 보여줬는데 여자 문제로 시끄러운 중국 지도층들 중에서 드문 순정파였다.[10] 물론 이것에는 아내 덩잉차오의 능력도 한 몫 했는데 덩잉차오 역시 중국공산당 창당 시기부터 활동한 주요 인사로서 여성 운동을 지도하며 주요 요직을 역임했고 내전 이후 여권 신장과 특히 전족 폐지에 큰 역할을 하였으며[11] 이들은 대장정을 함께 완주해낸 부부이기도 하다. 저우언라이는 아내를 향한 극진한 애정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상당히 사이가 좋은 것을 넘어 진정으로 사랑한 사이의 부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에서 보면 항상 붙어다니고 있고 서로에게 쓴 편지를 보면 낯간지러울 정도. 덩잉차오와 저우언라이 부부는 몇 차례 아이를 가졌으나 가족보다 혁명이 우선이라고 생각한 덩잉차오가 낙태술을 받았다. 이후 가진 아이도 출산 과정에서 잘못되어 몸이 상했고 덩잉차오 자신은 불임이 되었다. 때문에 죽을 때까지 자식을 하나도 얻지 못했으나 조카나 다른 아이들을 대단히 사랑했다고 한다. 특히 국공내전 과정에서 희생된 혁명열사의 유자녀들을 데려다가 사실상의 입양을 하여 친자식처럼 키웠다고 하는데 덩잉차오를 중심으로 한 여성 간부들이 이런 고아들을 돌보았다. 그들 중 공산당 주요 간부가 된 사람들도 많다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3세대 지도부의 핵심이던 국무원 총리 리펑으로 그는 자신을 길러준 덩잉차오를 어머니, 저우언라이를 아버지라 평생 불렀다. 저우언라이는 문화대혁명 시절 양아들인 그를 보호했으며 결국 양부모가 나이들어 모두 죽고 덩샤오핑의 오른팔로 성장해버린 그는 저우언라이가 맡았던 자리와 같은 자리까지 올랐다. 다만, 리펑 본인은 자신이 저우언라이와 덩잉차오의 양자였다는 이야기를 여러 차례 부정한 바 있는데 양부모를 논할 정도로 한 집에서 한솥밥을 먹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는 것. 1980년대 덩잉차오가 자신의 은퇴를 조건으로 리펑이 자신의 자리였던 당 중앙정치국 위원을 차지해야 한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는 걸로 봐서 완전 남남인 사이도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근데 리펑은 존경받는 양아버지와는 달리 중국에서 욕을 바가지로 먹는 인물인데 천안문 사태 당시 계엄령을 선포한 사람이기 때문. 정책 결정은 덩샤오핑과 같은 원로들이 했지만 실제 수행은 이 사람이 했으며 당연히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자 등과 같은 욕을 들으며 엄청난 비난을 들었고 지지율도 바닥쳤지만 장쩌민의 비호로 총리직에는 남아 있을 수 있었다.
6. 기타
- 막내동생의 딸 저우빙젠은 시린하오터시 부시장을 지냈다.
- 저우언라이의 발언 중 위중화지굴기이독서(为中华之崛起而读书)[12]는 중국의 거의 모든 학교 건물에 적혀 있는 유명한 문장이다.
- 저우언라이는 점잖은 성격과 굉장히 절제하는 삶을 살아서 술에 약하다는 이미지가 당, 군 간부들 사이에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술을 마셔야 하는 상황이 오면 굉장히 잘마셨다. 그 중 유명한 사례로 술 잘마시기로 유명했던 쉬스유 장군의 안좋은 술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그와 대작해서 술로 쓰러트린 사례가 유명하다. 그리고 저우언라이는 술 중에서 마오타이주를 가장 좋아했으며 또한 중국 4대명주로 꼽히는 백주의 일종인 서봉주를 좋아하여 생산량이 부족하다는 말에 증산을 지시했을 정도이다. 그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 현재도 주력품목으로 생산되고 있는 "서봉주 그린"이다.
- 국무원 총리로서 정부수반으로 외교를 전담하였는데 이에따라 국빈을 제대로 맞이하기 위해 음식에 대한 전반적인 식견이 굉장히 풍부했고 미식가였다. 그의 이러한 미식 능력은 얼어붙었던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에 분위기를 음식(서양인에게 중국적 특색이있는 북경 오리 구이 등을 제공)으로서 풀어버린 대표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요리를 곧잘하며 맛을 내는 실력도 좋았다. 특히 그중에서 홍소육과 같은 강소 요리를 잘했다.
- 덩샤오핑의 정치인생에서 가장 든든한 후원자이자 사적으로는 덩샤오핑이 형이라 할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다 저우언라이의 사망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했을정도며 덩샤오핑의 회고록에 의하면 주은래의 죽음직후 덩샤오핑에 대한 4인방의 모략이 더욱 악랄해졌는데 이때가 덩샤오핑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고 한다.
- 시진핑의 3기연임 이후부터 심각해지기 시작한 경제불황과 각종 실책들로 인해 더욱 평가가 좋아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마오쩌둥시절에는 저우언라이가 마오의 모든 실책을 수습하고 덩샤오핑이라는 유산을 어떡하든 남겨놔서 중국부흥의 초석을 다졌는데 현재 시진핑의 경우는 저우언라이와 같은 중제자나 2인자도 없고 덩샤오핑과 같은 유망주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지금의 중국을 저우언라이가 이끈다면 미국은 중국과의 관계가 많이 진전됐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기도 할 정도.
7. 주요 경력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국무원 총리 |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 | 1대 | → | 2대 | |||
저우언라이 ( 1949년 10월 1일 ~ 1976년 1월 8일) |
→ | 화궈펑 |
중화인민공화국 역대 외교부장 |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 → | 1대 | → | 2대 | |||
저우언라이 ( 1949년 10월 1일 ~ 1958년 2월 11일) |
→ | 천이 |
8. 참고문헌
- 저우언라이 평전, 바르바라 바르누앙, 위창건, 베리타스북스.
- Zhou Enlai The Last Perfect Revolutionary, Gao Wenqian[13], Peter Rand, Lawrence R. Sullivan, PublicAffairs
- 마오쩌둥 평전, 알렉산드르 판초프, 스티븐 러빈, 민음사.
- 해방의 비극,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마오의 대기근,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문화대혁명, 프랑크 디쾨터, 열린책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권, 개혁과 개방, 조영남, 민음사.
- 장칭 평전, 로스 테릴, 교양인.
- 코민테른과 대장정, 오토 브라운, 일월서각.
- 중국 혁명사, 서진영, 한울 아카데미.
9. 관련 문서
9.1. 인물
9.1.1. 중국공산당
9.1.2. 중국국민당
9.1.3. 외국
9.2. 사건
- 5.4운동(1919)
- 1차 국공합작(1924)
- 광저우 상단 사건(1924)
- 국민당의 1차 동정(1925)
- 1925년 객군 반란(1925)
- 국민당의 2차 동정(1925)
- 중산함 사건(1926)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상하이 폭동(1926~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국공결렬(1927)
- 난창 폭동(1927)
- 8.7 긴급회의(1927)
- 추수폭동(1927)
- 광저우 폭동(1927)
- 정강산 투쟁(1927 ~ 1929)
- 창사 폭동(1930)
- 부전사변(1930 ~ 1932)
- 초공작전(1930 ~ 1936)
- 제1차 초공작전(1930 ~ 1931)
- 제2차 초공작전(1931)
- 제3차 초공작전(1931)
- 제4차 초공작전(1932 ~ 1933)
- 제5차 초공작전(1933 ~ 1934)
- 대장정(1934 ~ 1935)
- 서안 사건(1936)
- 2차 국공합작(1936)
- 중일전쟁(1937 ~ 1945)
- 쌍십협정(1945)
- 국공내전(1946 ~ 1949)
- 6.25 전쟁(1950 ~ 1953)
- 중소결렬(1959)
- 대약진 운동(1957 ~ 1961)
- 해서파관 사건(1965)
- 문화대혁명(1966 ~ 1976)
- 2월 역류(1967)
-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1971)
- 9.13 사건(1971)
- 닉슨-마오쩌둥 회담(1972)
[1]
호세이대학의 부속학교
[2]
다만 말년엔
4인방에게 견제받는 등 마오쩌둥과 항상 뜻을 같이 한 건 아니었다. 중국에선
덩샤오핑과 묶여 저우언라이-덩샤오핑 둘의 사이를 금란지교로 표현하는 경우도 꽤 있다. 이러나저러나 중국 근현대사의 거물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사실 이러한 소수민족의 해방 등 민족주의에서 벗어난 연대는
공산주의의 기본적 입장이다. 다만 이러한 원칙이 공산주의 국가에서 잘 지켜졌냐 하면 그러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러한 점이 잘 지켜지든 안 지켜지든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명목상으로라도 '모든 민족의 평등과 해방'을 주장하긴 했다. 더군다나 저우언라이는 국가 수뇌부에 해당하는 인물인데 저우언라이가 일반적인 공산주의자였던 만큼 그가 유별나게 소수민족에 대한 존중을 한 건 아니다. 다만, 실질적으로 현대 중국이 이러한 원칙을 저버리는 경우가 많아졌으니 저우언라이의 말이 뒤늦게 조명받는 것 뿐이었다.
[4]
다만
달라이 라마 14세의 경우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만났던
니키타 흐루쇼프에 대해서도 '언행이 모두 돼지같았지만 똑똑한 사람'이라며 '저우언라이 같은 사람과는 친구가 될 수 없지만, 그와는 친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라고 평가한 바 있다. 즉, 달라이 라마 14세 자신의 성격이 '남들에게 신사답다는 평가를 받더라도 노회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 사람'보다는 '행동거지가 거칠고 투박하더라도 직설적인 사람'을 더 선호하는 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문제는 달라이 라마 텐진 갸초의 연령과도 함께 생각해봐야 할 문제인데, 1935년생으로 4세에 달라이 라마가 된 그가 저우, 마오, 흐루쇼프 등과 만났던 시기는 1950년대, 즉 겨우 10대 초중반에 불과했던 시기이다. 어린 나이에 정치판의 괴물들과 마주해야 했던 달라이 라마에게는 그나마 솔직하고 직설적인 상대가 대하기 편하고, 저우언라이와 같이 유들유들하고 속을 알기 어려운 상대는 말 그대로 괴물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5]
다만 결국 달라이 라마가 말한 것은 '이미지'로 실제 행적을 놓고보면 마오쩌둥은 똑똑하고 투박한 면도 있을지언정 권력을 위해 국가에 큰 재앙을 내린 최악의 지도자고 저우언라이는 부드러운 위선자이마 간사할지라도 적어도 마오가 싸지른 실책을 어느 정도 수습하는 식으로 최소한 공과를 따지고 보면 저우가 마오보다 낫다. 오히려 너무 단순하고 솔직하고 직설적인 사람보다는 그보다는 좀 더 사리는 사람이 좀 더 살필 줄은 알 것이기에 실수를 저질러도 전자보단 나을 것이다. 실제로도 마오쩌둥은 대약진 운동과 관련해 일체의 비판이나 반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는 그 실패가 뻔히 보인 상황에서
펑더화이가 올린 충언마저 무시, 오히려 펑더화이에게 정치보복까지 가하여 그가 비참하게 죽게 만들었다. 당초에 마오 말고도 독재자들은 적어도 개인으로 보면 좋은 사람도 많다는 점에서 결국 마오 개인이 좋은 면이 있다 한들 그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해줄 이유는 되지 못한다.
[6]
티베트와 관련해서도 티베트의 절들을 때려 부순
홍위병들을 일으킨 건 마오였지만 그들이
포탈라궁까지 박살내려고 할 때 핑계를 대어 막은건 저우였다.
[7]
물론 이는 꼭 저우언라이의 책임인지는 알 수 없다. 저우언라이의 실책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저우의 문제는 노력이지 결과는 아니다. 결과로 책임을 묻자면 마오쩌둥이 심각한 고집불통임을 간과하면 안 된다. 대약진 운동과 관련해서 의견을 개진한 펑더화이의 최후만 보더라도 마오는 충고를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꼭 참담한 결과가 나와야지 겨우 철회할 정도였다.
[8]
저우언라이는 1950년 10월 5일, 유엔군이
삼팔선 이북으로 진격하면 개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는데, 사실 이때도 당시 중국군의 비루한 상황상 공산당 간부들은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는 선에서 멈춘다면 그냥 개입을 포기하고 후퇴할 생각이었다고 한다. 허나 북한이 예상보다 더 빠르게 밀리면서 압록강 근처까지 다가오자 중국도 대만 점령을 포기하고 급하게 동북 지역으로 있는 병력 없는 병력 다 끌어모으게 된다.
[9]
다만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은 중국 내 소수민족 역사도 지들 역사라고 주장하는거라 한족 타령과는 조금 궤가 다르다.
[10]
마오쩌둥은 말할 것도 없고
장쩌민 같은 경우는 자기가 눈에 둔 유부녀 가수를 강제로 이혼시키고 첩으로 삼았다고 한다.
보시라이는 관계 맺은 여자만 자그마치 100여 명에 달한다는 루머성 기사까지 보도됐을 정도이다.
[11]
중국에서는 지금도 그녀를 "中国妇女的骄傲"(중국 여인들의 자랑)이라 부른다.
[12]
국가를 위해 공부한다
[13]
중국공산당 중앙 문서고를 관리하던 역사가로, 저우언라이 관련 기밀자료들을 가지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가오원첸의 저우언라이 평전은 그런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나온 것이다.
분류
- 청말의 인물
- 국민혁명군/군인
- 국공내전/군인
-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
-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주석
- 중국공산당 5기 중앙정치국 위원
- 중국공산당 5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
- 중국공산당 6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중국공산당 6기 중앙서기처 서기
- 중국공산당 7기 중앙서기처 서기
- 중국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중국공산당 9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중국공산당 10기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 중국공산당 조직부장
- 중국공산당 통일전선공작부장
- 1898년 출생
- 1976년 사망
- 화이안시 출신 인물
- 호세이대학 출신
- 메이지대학 출신
- 방광암으로 죽은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