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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4-12 22:36:44

리스쩡

파일:이석증.jpg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감찰위원
본명 이욱영(李煜瀛)
한문 李石曾(이석증[1])
영문 Li Shizeng
확무(擴武)
석증(石曾)
출생 1881년 5월 29일
청나라 직예성 고양현
사망 1973년 9월 30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쉐스니 농업훈련소
소르본 대학교 파스퇴르 연구소
직업 교육가, 사상가,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근공검학 운동2.3. 국민혁명2.4. 반장전쟁 1차 양광사변2.5. 말년
3. 여담4. 참고문헌
4.1. 저서4.2.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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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생물학자이자 아나키스트 정치인.

2. 생애

2.1. 초기 활동

1882년 직예성 고양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청나라 군기대신을 지낸 이홍조였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벌어지자 피난을 떠났다가 팔국 연합군에게 의화단이 진압된 후 베이징으로 돌아왔다. 1902년, 주불 청나라 공사 쑨바오치를 따라 프랑스에 유학하였다. 3년간 농업을 공부한 후 소르본 대학교 산하 파스퇴르 연구소에 들어가서 생물학을 연구했다. 이때 콩에 관해 연구한 사실에 대해 프랑스어로 여러 논문을 내놓았는데 이는 중국인이 최초로 프랑스어로 논문을 낸 사례였다.

프랑스 유학 중에 허버트 스펜서 사회진화론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사회진화론 특유의 적자생존 논리에 거부감을 느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무정부주의를 탐구하였다. 이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1906년 8월, 장런제의 소개로 파리에서 중국 동맹회에 가입했다. 이때 동맹회 규약이 자유의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하늘에 대고 맹세하는 것에 대해 단순한 물질에 불과한 하늘에 어찌 맹세를 하느냐고 했지만 장런제가 쑨원에게 양해를 구해 서약 없이 동맹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1907년 여름, 장런제, 우징헝 등과 함께 <신세기 그룹>을 조직하여 1910년 5월 21일 정간호를 낼때까지 무정부주의를 선전했으며 바쿠닌, 크로포트킨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이때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을 번역하여 중국에 소개하였고 중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11년 신해혁명이 벌어지자 귀국하여 혁명에 참여, 1911년 톈진에서 경진동맹회(京津同盟會)를 조직하여 종사당을 상대로 한 테러를 사주했으며 1912년 2월, 남북화의가 어느 정도 무르익자 왕징웨이, 장쥐, 오경항과 함께 베이징에서 진덕회를 조직, <민의보(民意報)>를 발간하여 혁명에 참여하였다.

리스쩡은 중국의 롤모델을 자신이 유학한 프랑스로 보았기 때문에 1912년 오경항과 함께 베이징에서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창립하여 중국 청년들이 프랑스로 근공검학 유학을 가는 것을 지원하였다. 경진동맹회 활동 중 종사당을 비롯하여 청조 복벽파에 대한 테러를 사주하였으며 1912년 임시대총통 쑨원으로부터 프랑스 공사직을 제안받았으나 무관주의를 내세워 거절했다. 이후 상하이로 이동하여 <세계사>를 조직, 근공검학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장쥐가 참의원 원장이 되자 이를 두고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리스쩡은 장쥐가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타락했다고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공격도 옹호도 하지 않고 조정자의 입장을 맡아 다른 아나키스트들의 칭송을 받았다.

2.2. 근공검학 운동

1913년, 계축전쟁이 일어나자 리스쩡을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위안스카이 타도를 위해 동참했으나 봉기가 진압당하면서 리스쩡은 프랑스로 망명했다. 프랑스 망명 시기 리스쩡은 사회적 평등의 시초는 교육에 있다고 주장하며 노동자, 농민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자는 <교육혁명론>을 주창했다. 또한 위안스카이의 독재가 가능한 것은 시민들의 정치의식이 낮기 때문이라면서 젊은이들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 시민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1915년, 리스쩡은 파리에서 오옥장, 오경항, 차이위안페이, 왕징웨이와 함께 화법교육회를 발기 조직하여 중국인 노동자의 프랑스 유학을 주선하고 <여구잡지>라는 평론지를 창간하여 노동과 학습의 결합을 주장했다. 1915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고 호국전쟁이 벌어지자 오경항, 장쥐, 차이위안페이 등은 호국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했으나 리스쩡은 중국인의 프랑스 이주를 도울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프랑스에 잔류했다. 이후 신문화운동 시기 근공검학 운동을 지원하여 아나키즘의 성장을 도모했다. 1917년이 되어서야 리스쩡은 중국으로 귀국, 차이위안페이, 오옥장과 함께 <유법근공검학회>를 조직하여 학생과 지식인들 사이에서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다.

1917년, 베이징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의 초청으로 베이징대학 생물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한동안 교직에 종사, 베이징대학에 아나키즘 학풍을 불러 일으켰다. 이후 베이징에 법문전수관(法文專修館)이 성립되자 부관장(副館長)을 지냈다. 1918년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자 광동 군정부의 대표로서 파리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북양정부와의 갈등 및 군정부 내부에서 대두된 외교론에 대한 회의 때문에 무산되었다. 1920년, 제1차 세계 대전의 결과로 더 이상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 등에 의화단 운동에 대한 배상금을 갚을 필요가 없자 그 여윳돈을 바탕으로 베이징에서 중법대학(中法大學)을 창립하여 이사장에 취임했다. 1922년, 베이징에서 리다자오, 차이위안페이 등과 함께 비종교대동맹을 창설하여, 과학주의적 반종교주의를 주장하며 반기독교운동에 앞장섰고 이 때문에 국민당 내부에서 드물게 기독교 신자였던 쉬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23년에 차이위안페이가 중법대학 교장에서 물러나면서 중법대학 대리교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저우언라이, 리리싼, 차이허썬 등이 주도한 공산주의 유학생들의 데모로 인하여 1922년 리옹에 설립된 중법대학이 운영 불가 상태에 놓여 오랫동안 힘을 기울여온 교육혁명이 난항을 겪자 리스쩡은 크게 실망하고 정치권력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2.3. 국민혁명

1924년 1월, 1차 국공합작이 결정되고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개최되자 리스쩡은 국민당 1전대회에 참여, 등택여, 오경항, 셰츠, 장쥐와 함께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감찰위원에 선출됨에 따라 중국 국민당에 가입했다. 이를 안국합작이라 한다. 이 때문에 무정부주의자들이 어떻게 당적을 가질 수 있냐는 비판을 받았지만 무정부주의자들도 국민혁명에 참여하여 궁극적으로 아나키즘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4년 10월, 펑위샹 북경정변을 일으켰을 때 쉬첸, 장쥐 등과 함께 좌익 성향의 펑위샹이 정변을 일으키는 일을 부추겼으며 그와 쑨원의 우호관계 구축을 시도했다. 핍궁사건이 일어났을 때 녹종린과 함께 자금성으로 가서 선통제의 퇴거를 요구하였고 청실선후위원회가 조직되자 선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자금성에 나온 유물들을 바탕으로 1925년 국립고궁박물원이 세워지자 초대 고궁박물원장을 맡게 되었다. 1925년 2월, 베이징으로 북상한 쑨원이 위독해지자 위유런, 우징헝, 리다자오, 천유런과 함께 중앙정치위원으로 증원되었다. 서산회의가 열렸을 때는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으며 참가를 거부하였고 이 때문에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국민당 좌파 인사로 분류되었다. 하지만 리스쩡은 무정부주의의 관점에서 공산당에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1926년 3.18 참안이 일어나자 임시집정 돤치루이의 퇴진 운동을 벌였고 이 때문에 돤치루이의 미움을 사서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폭동을 일으킨 죄로 쉬첸, 구멍위, 리다자오, 전 교육총장 역배기 등과 함께 체포령이 떨어졌다. 이에 리스쩡은 중법대학 교장에서 사퇴, 동교민항의 프랑스 병원으로 피신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된 후 장제스 중국 공산당의 알력이 벌어지자 공산당이 국민당을 내부에서 잠식하려 한다고 판단하고 공산당을 비판했다. 천도논쟁 영왕운동을 거치며 국민당 좌우파의 대립이 격화되고 1927년 3차 전국대표대회의 개최에 앞서 장제스가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과 정치위원회 주석 직에서 사임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여러 감찰위원들에게 자신에 있는 난창으로 와달라고 청하자 등택여, 구잉펀 등과 함께 호응하여 베이징에서 장제스가 위치한 난창으로 이동하였다. 상하이 함락 이후 1927년 4월 2일, 오경항의 제안으로 공산당에 대한 감시를 실시하고 중앙집행위원회에 반역한 공산당원의 직권을 정지시켜야 한다는 제안이 중앙감찰위원회에 회부되자 이에 찬성했다. 4월, 왕징웨이가 귀국하자 그에게 잔류하여 청당을 할 것을 설득했으나 왕징웨이는 거부하고 우한으로 이동했다.

1927년 4.12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한 후 4월 15일, 후한민, 우징헝, 장런제, 등택여, 간나이광, 천궈푸 등 상하이에 집결한 중앙감찰위원화 중앙집행위원들과 함께 난징에서 국민당 2기 4중전회 개최를 선포하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 중앙정치위원, 교육행정위원에 추대되었다. 1927년 5월 혁명주보를 창간하여 국민당 내부에서의 아나키즘을 선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의 주장을 추종하여 중국에서 민생혁명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7월, 쉬저우 전역에서 패배한 장제스가 하야하자 장제스와 진퇴를 같이 한다고 통전하고 사퇴했다. 이후 왕징웨이과 장제스의 합작을 추진하였으며 1928년 장제스가 권좌에 복귀했다.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이 일어나자 강경한 처벌을 주장하며 장제스에게 간나이광 등을 처벌하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통첩을 보냈다. 이때 중앙연구원 거립, 프랑스를 본뜬 대학구제 실시, 대학원조직법 등을 주장하여 체계적인 교육개혁을 주도했다. 1928년 8월 베이징 대학 교장에 임명되었으며 1929년 8월 베이핑 연구원 원장에 초빙되어 교육개혁을 이끌어 나갔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거행된 후 봉천군벌이 만주로 패퇴하자 우톄청과 함께 장쉐량에게 특사로 파견되어 국민정부에 합류할 것을 설득하였다. 결국 장쉐량은 1928년 동북역치를 선포함으로 국민정부에 합류하였다. 북벌이 거의 완수됨에 따라 후한민, 오경항, 차이위안페이, 장제스와 함께 상하이에 머물며 국민정부 개편을 논의하였다. 1928년 8월의 국민당 2기 5중전회는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 등 개조파 처벌 문제에 불만을 품어 장제스가 직접 찾아가 설득했음에도 상하이에 침거하여 참석하지 않았으며 지방분권제를 주장하며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남겨두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결국 1928년 10월 10일, 국민정부 조직법이 반포됨에 따라 훈정의 실시가 결정되었다. 이후 10월 8일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국민정부의 인선을 제의하여 국민정부위원, 5원의 원장, 국민정부 주석 등을 추대했다. 1928년 편견위원회가 조직되자 중앙상무위원회의 추천에 따라 편견위원에 선출되었다.

2.4. 반장전쟁 1차 양광사변

반장전쟁이 발발하자 그 기간 내내 장제스를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봉천에 파견되어 장쉐량에게 관내로 출병할 것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1930년 중원대전을 마지막으로 반장파가 패배하면서 중국에는 평화가 오는 듯 했지만 후스 등 자유주의자 인사들이 약법 제정을 요구하면서 사태는 꼬이게 되었다. 장제스는 사회 불만도 잠재울 겸 약법 제정을 주장했지만 입법원장 후한민이 여기에 완강히 반대한 것이었다. 리스쩡은 오경항 등과 함께 약법 제정에 찬성하였다. 후한민은 장제스에게 일부 양보를 하기도 했으나 고집을 끝내 꺾지는 않았고 이는 1931년 2월의 탕산 사건으로 이어졌다.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해버리자 그간 장제스를 지지했던 광동파들이 반발하여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린썬, 구잉펀 등 중앙감찰위원들도 대거 난징 국민정부를 이탈하여 장제스 탄핵을 주장했으나 리스쩡은 장제스 지지를 유지하였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하자 리스쩡은 장쥐, 우톄청과 연명으로 국난에 대처하자고 통전을 보내며 난징과 광저우의 합작을 추진했다. 광저우 측은 이에 동의하면서도 장제스의 하야를 계속 요구하였고 결국 장제스는 1931년 12월 15일 국민정부 주석과 행정원장 직에서 사퇴한다.

1931년 12월, 제4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림에 따라 린썬이 신임 정부주석, 쑨커가 행정원장에 취임함으로 광동파 내각이 수립되었으나 경제위기와 제1차 상하이 사변의 발생으로 한달만에 무너져버렸으며 1932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합작 정권이 수립되었다. 하지만 리스쩡의 운명도 좋지만은 않았다. 리스쩡은 대학가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대학가 내에서 노농대학을 운영함으로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으며 정권과 교육을 분리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국민정부는 1928년 대학원을 폐쇄하고 1929년 대학구를 폐쇄함으로 리스쩡을 좌절시켰으며 이 시기 차이위안페이는 국민당 활동을 중단했다.

국민당 내부에서는 차차 무정부주의에 대해 결국 사회주의의 일부가 아니냐는 식으로 시선이 적대적이 되어갔다. 결국 리스쩡의 많은 추종자들이 투옥되거나 탄압당했으며 리스쩡 역시 고궁박물관의 자금을 유용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932년, 리스쩡은 톈진의 일본 조계지와 상하이를 거쳐 제네바로 망명, 국제연맹 국제지적협력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다. 1933년과 1937년, 리스쩡은 공금 유용 혐의로 2차례 기소되었다. 이 시기 리스쩡은 제네바에서 중외도서관을 설립하였다. 어쨌거나 국민정부에서는 리스쩡을 완전히 제거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리스쩡은 1934년 건설위원회 상무위원에 추대되었다. 1936년에는 차이위안페이, 장인걸과 함께 상하이에서 세계학교를 수립하는 등 계속하여 교육과 연구를 후원했다.

2.5. 말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리스쩡은 뉴욕에 거주하였으며 이따금씩 충칭과 쿤밍을 방문하였다. 1941년에 아내와 사별한 후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맞서 유대인 구출 운동을 벌였으며 동시에 중국의 항일전쟁을 원조하기 위한 외교활동을 벌였다. 종전 후 베이핑 연구원 원장으로 초빙된 리스쩡은 귀국하여 연구 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48년 총통부 자정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전세가 기울자 1948년 12월, 난징을 떠나 제네바로 이동했다. 1949년 국부천대가 행해지고 스위스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자 리스쩡은 1950년 우루과이로 이주했다.

1954년, 대만으로 귀국한 리스쩡은 총통부 국책고문이 되어 장제스를 보좌하였다. 1958년에는 1953년에 사망한 맹우 우징헝의 이름을 딴 치휘초급중학교를 타이난에 개교하였으며 1973년, 92세를 일기로 타이베이에서 병환으로 타계했다.

3. 여담

4. 참고문헌

4.1. 저서

4.2. 논문


[1] 한국식 독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