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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周[1] | Zhou Dynast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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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周)나라의 강역[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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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046년~기원전 256년[3] | |
위치 | 중국 화북 |
수도 | 기산(岐山)[4] → 풍경(豊京)[5] → 호경(鎬京)[6] → 낙읍(洛邑)[7] |
정치 체제 | 봉건 군주제 |
국성 | 희(姬)[8] |
국가원수 | 왕(王) |
주요 군주 |
문왕 희창(기원전 11세기) 무왕 희발(기원전 11세기) 성왕 희송(기원전 11세기) 강왕 희조(기원전 11세기) 유왕 희궁녈(기원전 781~기원전 771) |
주요 섭정 | 문공 희단 |
언어 | 상고 중국어 |
문자 | 금문(서주시대) → 전서(대전체, 동주시대) |
종교 | 토속 종교[9] |
종족 | 화하족 |
통화 | 조개 화폐(서주시대) → 포폐(동주시대) |
성립 전 | 상나라 |
멸망 후 |
서주 멸망 후:
춘추시대 동주 멸망 후: 진나라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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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에 존재한 고대 국가. 대략 기원전 1046년에 멸망한 상나라를 이어, 기원전 1046년부터 기원전 256년[10]까지 약 800년 동안 존속했다. 희주(姬周)라고도 부르는데, 일반적으로 '주나라'라고 하면 이 나라를 가리킨다.약 기원전 1046년 ~ 기원전 771년에는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에 두어서 서주, 약 기원전 771년 ~ 기원전 256년에는 낙읍(현재의 뤄양)으로 천도해서 동주라 칭한다.
후술되어있듯 인문주의, 천(天) 사상, 세계 체제 등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중화권, 더 나아가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의 기틀을 놓았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시대의 나라이기도 하다.
2. 역사
2.1. 갑골문과 사서의 기록: 상의 제후국
주족(周族)은 처음에는 주방(周方)[11]이라고 불리다가, 후기에는 주후(周侯), 서백(西伯)[12]으로 개편되어 상나라의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는데[13], 상나라 말기에 서백(西伯)이라 하니 이는 주나라가 상나라 도읍 은허의 서쪽 관중 분지에 있었기 때문이다.이 시기는 신화, 전설상의 기록으로 간주되던 때도 있었으나, 고고학 성과로 갑골문이 발견, 해독되면서 달라졌다. 갑골문의 기록에 의하면 상나라의 제21대 왕인 무정(武丁) 때부터 주방(周方)을 토벌하는 일에 대해 점을 치고 있어, 상나라 제후국으로 편입된 고공단보 이전부터 주족은 상나라에 상당히 거슬리는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14]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나 종족을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되었다.
사기에 의하면 후직의 후손인 주족들이 오랑캐들과 어울려 지내다 ( 주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 대에 적인(狄人)에게 쫓겨서, 오랜 기간 머물던 관중 북쪽 방향의 산악지대에서 희성 일족과 주민 1천 가구를 이끌고 기산(岐山)으로 본거지를 옮겼는데, 이때 상나라에 의해 이곳의 제후로 봉해졌고, 이후 이곳은 희성(姬姓)의 본거지가 되었다. 이때부터 상나라 서쪽에 정착했다고 추정한다.
주나라 사람들이 원래부터 유목민이었는지, 아니면 정주민이 뒤늦게 유목민으로 전환한 경우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일단 기록상으론 요순 시절 벼슬살이한 후직 시절만 해도, 관중 평야 지대에 머물던 희성 주족들이 이후 후직의 아들 부줄 시절에 오랑캐 땅인 북쪽 산악지대로 갔다는 식으로 되어 있다. 한편, 말을 이용한 목축기술 노하우를 인근의 토하라인에게서 받아들였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 사기》에서 사마천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주나라의 역사는 제대로 알 수 없다고 서술했다. 그가 기원전 841년에 주목했던 이유는 폭정을 일으켰던 주나라 여왕(厲王)이 쫓겨나고, 기원전 841년부터 기원전 828년까지는 공화시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 여왕이 쫓겨날 때 귀중한 사료들이 없어졌기 때문에 그 이전 역사나 연도를 알 수 있는 자료들도 많이 사라져버렸다.[15] 사마천은 공화 원년을 기년(紀年)으로 삼았고 《사기》에 <12 제후 연표>를 세웠는데, 이 시점부터 연대에 따른 기록은 상세하다. 이러한 점 때문에 기원전 841년은 중국 역사에서 문헌을 통하여 주나라 역사를 상고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시기의 연대이다.
한편, 문헌에 대한 연구 못지 않게 고고학적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동안 진행되어 온 발굴의 성과에 따르면, 대략 기원전 1040년대에 해당되는 지층에서 상나라 및 주나라의 유적 및 유물이 발견되었다. 더 나아가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키는 역사가 기록된 청동기들이 출토되었는데, 문자로 구성된 기록과 더불어 그 당시 관측되었던 천문 현상도 함께 병기되었다. 천문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록된 천문 현상의 날짜를 추정할 수 있게 되어, 중국 내외의 많은 학자들은 주나라가 상나라를 무찌른 연도(무왕극상년)를 추정하고자 연구를 수행했다. 이렇게 내놓아진 여러 신빙성 있는 학설들은 기원전 1100년대를 집중적으로 지목하지만, 다른 연대를 추정하는 학설들도 여럿 있어 확정하기가 곤란하다. 위키백과에서도 각 문서에 나온 연도끼리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국가적 프로젝트인 하상주 단대 공정을 통하여 주나라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1046년으로 산정했으나, '무왕극상년' 외에도 주나라 왕들의 재위기간 추정은 쇼우네시 등 구미권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대와 맞지 않으므로, 공정에 참여한 학자들과 이에 반대하는 중국인 학자들 그리고 서양 학자들 간의 논쟁이 계속된다.[16]
한반도 국가에서는 적어도 조선 시대 이후부턴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00년 앞뒤 정도로 여겼다. 이러한 경향으로부터 기인된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교과서에서도 주나라의 건국이 이루어진 추정년도를 기원전 11세기 초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던 듯하다. 재미 한국인 사학자 방선주는 기원전 1030년을 주장했다.
2.2. 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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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왕 시대에 국(國)으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이후 문왕의 아들 무왕 시대에 목야대전 승리로 상나라 왕 제신(주왕)을 몰아내고 주나라가 천자국이 되었으며, 무왕의 동생 주공 단(周公旦)과 아들, 손자 성왕• 강왕의 시대에 삼감의 난[17] 등을 정리하고 사실상 상나라 전역의 통치권을 획득, 이전 신권정치 성향이 강한 상나라보단 좀 더 인본주의적인 통치체계가 만들어졌다(성강지치).
다만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는 주와 연합한 수많은 세력이 함께 동행했으므로 주나라는 자신들만의 통치권을 주장하긴 어려웠는데, 이는 성읍국가 단계에 머문 채로 단순히 타 국가의 상위에 서 있었던 상나라와는 달리 갑작스럽게 통치 범위가 넓어진 주나라로서는 주위의 독자적인 세력들과 정치적으로 타협할 필요성이 높아졌다는 소리였다. 당장 주나라가 상나라를 몰아낸 뒤 주나라는 결코 만만치 않았던 상나라의 잔존세력을 달래야 했다.[18] 주나라는 상나라의 잔존 세력들을 한데 모아 주나라에 협조적이었던 상나라 왕족 출신 미자계에겐 공작의 작위를 주어 송나라를 이루게 했고, 형식상 주나라의 복속하에 넣었다. 나아가 은허를 폐허로 만드는 대신 여러 상나라 유민들을 관중, 낙읍 등으로 분산 이주시켰는데, 이들의 세력이 가장 많이 이주했던 낙읍은 서주 시대에도 호경 다음 가는 제2의 수도로 남았다가 동주 시대엔 아예 수도가 되었다.
주나라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더불어 고대국가의 기술적, 시스템적 한계 때문에라도 좋든 싫든 봉건제를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제법 떨어진 지역의 직할통치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치는 수백 년 동안 여러 정치체가 생존을 위해 서로 경쟁적으로 행정 시스템과 통치 사상을 연구하고 도로와 치수 등의 인프라도 많이 설치한 이후에야 가능해진 일이다. 게다가 상나라~주나라 초기에는 아직 중국 영토들도 제대로 개발되지 않아서 숲과 정글이 매우 많았다. 도로가 미비하여 서로간 통행조차 불편했기에 더더욱 직할 통치가 힘들었을 터이다. 따라서 주나라는 차선책으로 주나라 본국을 지지하는 공신이나 친족들에게 작위를 주어 지방을 통치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를 유지 및 대리 운영했다. 이렇듯 주나라는 넓은 영토를 나누어 유력자들에게 영지로 내려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영지를 독립적으로 통치하도록 하는, 이른바 봉건제도를 시행했다.
봉건제도의 기틀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중앙에는 최고 통치자인 왕이 존재했고, 순서에 따라 공, 후, 백, 자, 남으로 이루어진 오등작을 유력 세력들과 왕 사이의 친밀도, 전략적인 중요성, 군공 등을 고려하여 왕이 직접 수순에 맞게 그들을 책봉했다, 이 중 후작이 가장 많았는데, 이 때문에 귀족들을 지칭하는 말로 여러 후들, 즉 제후(諸侯)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이들은 국(國)을 수여받았다. 이후 제후들도 내부의 공신들을 책봉했는데, 이들은 경(卿) 혹은 대부(大夫)라고 불렀고 가(家)를 수여받았다. 다시 가 내부에서 공신 책봉이 이루어져서 사(士) 계층이 생겨났고,[19] 이들은 단순하게 식읍 정도를 수여받았는데, 기본적으로 주나라 시대에는 읍(邑)이 행정의 최소 단위였으므로 더 이상의 분봉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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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봉건(封建)이라는 용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근대 일본의 영향으로 'feudal'을 번역하는 말이 되었는데,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동양의 봉건제도와 유럽의 'feudalism'이 명확한 유사성 없이 오히려 실제를 오도시키는 경향이 크다고 여긴다. 양자 간의 어의적, 역사학적 유사성보단 차이가 크므로 feudal을 '봉건'으로 번역하기는 현재 역사학계에서 지양하자는 것이 중론이다. 실제로 《케임브리지 중국사》 시리즈(Loewe and shaughnessy [eds.], 1999)에서는 주나라의 봉건제를 번역할 때 'feudal'이라는 용어를 아예 피하였다.[22]
상나라의 시대가 끝나고 주나라의 시대가 되자 국가가 모시는 신관(神觀)도 바뀌었다. 상나라가 숭배하던 신은 제(帝) 혹은 상제(上帝)였으나, 주나라는 천(天), 즉 하늘을 섬겼다. 그런데 하나의 성읍국가에서 중국 전역을 주관하는 봉건제로 통치의 성격이 달라지고 범위가 확장되어, 신의 성격 또한 '통치 계급만의 신'에서 '세계 질서의 신'으로 재확립되었다. 이에 따라 '천'은 통치자에게 운명 혹은 사명을 수여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명(天命)이라고 했으며, 왕은 천으로부터 천하(天下)를 수여받아 천자(天子)로서 통치를 수행하게 되었다. 만약 왕이 왕으로서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면 천명은 다른 사람에게 옮겨갈 수 있었다( 역성혁명). 이는 본래 상-주 교체를 정당화하기 위해 등장한 사상이었으나, 후에 맹자를 위시한 제자백가들의 사상의 일환으로 흡수되었다.
물론 왕뿐만 아니라, 각 지위에 오른 모든 통치자는 제 각기 나름대로 하늘의 대리인인 천자로부터 사명을 수여받았으므로 제 역할을 다해야 했다. 왕은 천하를 고르게 다스리고, 제후는 국을 다스리며, 경과 대부는 가를 다스리고, 사는 식읍을 받아 스스로를 수양하여 국가에 이로운 지식인이 된다는 것이 그들에게 내려졌던 사명이었다. 이를 한자화하면 아래와 같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
뒷날
남송시대 주희가 제창한
성리학에서는 단계적인 개인 수양의 뜻으로 사용된 이 말은 본래 주나라의 통치체계를 표현하고 상징하는 뜻이었다.한편 통치체제의 지속을 위해서도, 상나라 시대의 불분명한 계승을 넘어 종법 질서가 확립되었다. 즉 맏아들은 대종(大宗)이 되어 해당 직위를 계승하지만, 그 이외의 아들은 소종(小宗)이 되어 대종의 신하로만 활동할 수 있었다.[23] 이러한 가부장적인 계승체계는 조상에 대한 제사를 통해 계속해서 재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제사의 묘제를 확립하여 실현한 공간이 종묘였다. 형식상 성씨가 다른, 즉 전혀 다른 계통의 제후들도 주나라의 소종으로서 친(親)의 질서 내에 포괄되었다.
천명론과 종법질서 등 요인으로 주나라는 신정일치적인 상나라보다 상대적으로 인문주의적인 국가로 발전했다. 허나 얄궂게도 단점도 있었으니, 신정으로 권위를 챙기던 상나라와 달리 주나라는 현실 통치가 무력화되면 바로 권위가 떨어질 위험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주나라의 천자는 회맹(會盟)이라는 절차로 군사력을 확보하고, 주나라의 질서에 어긋나는 제후들을 토벌했다. 이로써 초기 삼감의 난 등을 진압하면서 주나라의 통치는 한동안 확고해졌다.
한편 민간에서는 가부장제적인 가족질서와 읍락공동체가 확립된 모양이다. 이들은 사(社)라는 토지신에게 제사를 올리며 풍년을 기원했다. 읍락 단위로 토지를 배분하고 그중 9분의 1을 거두는 정전제가 성립되었다고 하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전반적인 사회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문헌으로 《시》(《 시경》), 《서》(《 서경》) 등이 존재한다고 하여 상•주시대를 가리켜 '시•서시대'라고도 부르나, 편집자인 공자 등 후대인에 의해 일부 사료만이 취합되거나 변모가 있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2.3. 동주( 춘추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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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춘추시대
전국의 제후들이 저마다 제후들 중 최강자가 되고자 했던 시기였다.긴 시간이 흐르자 공신과 친족들이 세운 제후국과의 사이가 멀어졌고[24] 게다가 주변 이민족들도 날로 강성해져서 상대적으로 영역에서 혼자 서쪽으로 툭 튀어나온 주나라는 서서히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이를 방비하기 위해 유사시엔 봉화를 올리는 제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나, 포사 일화에서 전해지듯 거듭된 사기 봉화 행각으로 막상 견융의 침략이 일어나자 봉화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제후국의 군대는 소집되지 않았다.[25] 때문에 수도인 호경이 공격을 받아서 거의 멸망하다시피 쑥대밭이 되었고, 기원전 771년 평왕 때 호경에서 낙읍으로 천도했다. 이를 기준으로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구분하며, 춘추전국시대가 개막되었다.
자기 직할 통치 지역도 제대로 못지킨다는 인증을 해버렸으니 동주 시대부터는 천자의 권위가 극도로 미약해졌다. 본토였던 옛 주나라 지역은 후에 제후국인 진나라가 탈환하여 자기 땅으로 삼기 전까지는 사실상 버려졌다. 빈털터리가 된 채 동쪽으로 이동한 국가가 제대로 기능하려면 엄청난 후폭풍이 따르는건 당연지사였다.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제후의 힘이 강해졌으나, 춘추시대까지만 하더라도 각 제후국은 대체적으로 입에 발린 소리일지라도 동주의 왕이 천자임을 부정하진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이민족들의 침입은 주 천자뿐만 아니라 제후에게도 큰 위협이었으므로[26] 이를 무시하고 당시의 세계 질서를 깨뜨리기는 힘들었다. 서쪽뿐만 아니라 남쪽에서도 초(楚)나라가 서주시대부터 주나라의 책봉을 무시하고, 왕을 칭하며 주변 제후국들을 병탄하며 성장하는 참이었다.[27] 이 때문에 힘을 결집할 필요가 생긴, 하지만 동주 천자의 말을 듣기는 싫은 제후들 중에 힘의 우위에 선 자가 천자를 대신해 회맹을 주도했는데, 이런 제후를 패자(覇者)라고 한다.
패자는 기본적으로 명분상 왕을 보전하고, 오랑캐를 몰아낸다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 천자가 책봉했으나 이민족에게 멸망당한 제후국들의 지위를 이어가게 한다는 계절존망(繼絶存亡)의 질서를 지키는 것을 사명으로 선전했다. 즉, 기본적으로 중화사상의 수호와 동주 천자의 책봉 질서를 보전하는 것을 형식상의 명분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상황은 이민족인 오나라, 월나라, 초나라 등이 점차 중국 내부의 상황에 깊이 관여하여 융화되고 스스로 패자를 자처하기까지 하는 등 이민족과 중국의 구분이 힘들어지면서 무력화되었고, 패자의 의미도 퇴색했다. 아닌 게 아니라 공자는 패자였던 제환공을 찬탄했지만, 맹자는 그런 거 없이 "패자 몹쓸 놈들" 하고 실컷 비난했다. 시대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시대에 등장한 유력한 사상가로는 단연 공자를 먼저 들 수 있다. 특히 공자는 춘추시대의 혼란한 현실을 한탄하고 주나라의 기풍을 되살리기를 평생토록 갈망했다.[28] 그가 노나라의 역사서 《 춘추》에서 주나라의 질서에 어긋나는 예를 뽑아내 지적한 것이 현재 전하는 《 춘추》인데, 주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이 책의 이름이 이 시대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외 이 시대 사람이라고 전해지는 유명한 사상가로는 노자가 있으나, 사실 여부가 불명확하고[29], 남겨진 저서에서도 시대의 흔적을 찾아보기 매우 힘들다.
이 시대는 이민족을 경계하고 전쟁하는 과정 속에서 중화사상이 강고하게 재확립된 시기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오, 월, 초 등 이민족 국가들이 중국에 서서히 진입하면서 마침내는 중국의 구성원으로 인식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의 판도는 기존 주나라 시대의 영역을 뛰어넘어 거대해졌고, 역설적으로 이는 주나라의 통치 질서 무력화를 가져온다.
2.3.2. 전국시대
|
전국시대의 동주 (연두색)[30] |
주나라가 주도하던 중원 질서가 유명무실해지자, 그럼 나도 한번 하면서 제후국들이 제후의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이 되고자 다투었던 시기이다.
전국시대는 진(晉)나라가 한나라, 위나라, 조나라의 세 나라로 쪼개진 데어서 시작한다. 기원전 453년에 일어난 이 ' 삼진분립'에 대하여 주 천자는 50년 동안 손을 쓰지 못하다가 기원전 403년에 들어 결국 희진이 붕괴했고 세 나라가 들어섰음을 인정했다. 이는 국의 폐지와 건립을 명령하는 역할이 주나라 천자의 손을 완전히 떠났다는 사실을 시사했으므로, 주나라의 힘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이후 각국은 힘이 닿는 대로 서로를 병탄하며 부국강병을 추진했으며, 전투의 양상도 귀족들만의 전차전을 넘어 더욱 더 많은 인원들이 동원되기 시작했으므로 많은 인구가 필요해졌다. 이를 위해 집단지배체제를 넘어 인민을 개별적으로 지배하여 백병전의 역량을 키울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31] 봉건제로부터 군현제로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군현제는 초나라와 같이 이민족들이 세운 국가들이 제후국을 병탄한 뒤, 낯설은 주나라의 질서를 파괴하고 나서 대신 도입한 통치체제에서 유래한 새로운 통치제도로 여겨지는데, 기원전 4세기 법가가 주도한 변법(變法)을 통하여 중국 전역에 보급되었다. 한편 정전제가 실존했다면, 봉건제는 집단지배체제에서 개별적인 인민지배체제로 이행되었던 이 시기에 완전히 파괴되었을 터이다.
그러나 이는 주나라의 질서를 아예 뿌리 뽑아버리는 결과를 초래했으므로, 주나라는 완전히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당연히 스스로의 질서에 가장 강고하게 매달려야 했던 주나라는 변법을 주도하고 여러 국들을 병탄할 수 없었다. 한때 주나라 군주가 신적인 제(帝)로 불리기도 했으나, 이것은 제(齊)나라가 제(帝)를 자칭했다가 주변국들로부터 강력한 지탄을 받자[32], 명목상으로 제나라가 '동제'(東帝)로 불리고, 주나라는 '서제'(西帝)로 불리도록 각국의 정상들에게 제시했던 타협안의 결과였을 뿐, 주나라가 이룬 바는 아무 것도 없었다.
사상적으로 주나라의 약화를 잘 증빙하는 예 중 하나는 바로 유가의 태도 변화이다. 주나라 질서의 회복을 부르짖고 제후들을 지적하던 공자와 달리, 맹자는 주 천자를 포기하고 각국의 왕과 제후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천자를 간절히 요구했다. 즉, 주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국 질서의 회복은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이다. 물론 그 내용은 (새로운 통일왕조를 주체로 하는) 옛 주나라 질서의 복원이기는 했지만, 유가가 주나라를 대하는 태도가 변화한 것은 주나라의 위상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를 잘 시사한다.
설상가상으로 주나라 안에서는 왕위를 놓고 형제간에 분쟁이 자주 벌어졌다. 형을 죽이고 즉위한 주나라 고왕은 더 이상의 계승 분쟁을 피하고 싶어서였는지 기원전 440년, 동생을 '서주공'으로 임명했고, 작은 아들을 '동주공'으로 임명하여 그러잖아도 작고 미약해진 주나라는 '서주공'과 '동주공'이 나눠서 다스리는 영역으로 분할되었으며, 주나라의 왕위를 계승하는 주 왕실은 서주공의 영지에 얹혀 사는 기괴한 체제가 되었다.[33] 아예 난왕 때는 서주공국과 동주공국이 서로 싸우기까지 했다.
이렇게 되었으니 전국칠웅 역시 주나라를 존경하기는커녕 무시하고 이용하려고만 했다. 예를 들어 난왕 치세에 한나라가 초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주나라로부터 전쟁에 필요한 갑옷과 곡식을 징발하려고 했다. 이를 막을 힘도 없었던 주나라는 두려움에 떨었는데, 이때 주나라를 섬기던 소대라는 신하가 한나라의 상국 공중을 찾아가 이들을 설득하여 징발을 중단하고 역으로 고도[34] 땅까지 얻어오겠다고 자원했다. 물론 공중은 소대를 만나 그의 제안을 듣자 "아니 징발하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내가 왜 거기에 땅까지 줘야 하는가?" 하였다. 소대는 고도를 주나라에 주면 주나라는 한나라에 의지할 테고, 따라서 진나라는 주나라에 내왕하지 않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피폐한 고도 땅 하나로 빈틈 없는 주나라를 얻게 되는 셈이라 설득했다. 공중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고도 땅을 주나라에게 줬다. 결국 주나라는 한나라로부터 땅을 얻어올 수 있었지만, 이는 명색이 제후들의 위인 주나라가 제후들에게 섬김을 받기는커녕 전국칠웅 중 최약체였던 한나라한테까지 무시당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었다.
점점 인구와 영토가 줄어들며 세가 약해진 주는 진나라[35], 한나라, 위나라에 사정하며 명맥을 이어가려 했으나, 결국 기원전 256년 서주공국이 진나라의 소양왕에게 망했고, 이때 왕실의 상징인 구정을 빼앗김과 동시에 주 왕실과 서주 공실은 소멸하였다. 그나마 동주 공실은 존속하였으나 이미 이때 '주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후 기원전 249년 동주공국까지 진나라 장양왕에게 공격받아 망하면서, 주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나마 사마천의 《 사기》에 의하면, 한나라가 일어서고 90여 년 뒤에 천자가 이왕삼각을 해주기 위해 주나라의 후손을 찾아 그 땅을 주어 다시 조상의 제사를 모실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3. 주나라의 유산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 주나라가 남긴 유산은 생각 이상으로 크다. 특히 성읍국가에 머무르는 상나라 시절의 신정일치 체제를 넘어, 타 지역과 타국에 대해 체계적으로 인식하고 이를 통치하는 세계 체제를 점차 형성한 것은 장기적으로 통일 중국을 마련하는 중요한 기틀이 되었다.이는 내부의 봉건제로 머무르는 것을 넘어[36] 외부에도 중국식 통치질서를 이식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는데, 이것이 책봉 - 조공 체계의 근간이다.[37] 이렇게 형성된 중화 질서에 대한 인식은 청의 국력이 붕괴하는 19세기 말까지 대략 3천 년간 지속되었다.
통치 질서 외에도, 주나라는 인문주의적인 사상의 기틀과 현실적인 정치 체계, 가정 및 종법 질서의 확립을 통해 중국 고대 질서의 기틀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상화되기는 했지만, 유가에서 상정하는 하 - 상 - 주 이상 시대의 이미지도 대체로 주나라 시대의 통치 체계에 근간을 두었다.
대표적으로 맹자가 제시한, 천자 - 제후 - 대부 - 사가 제 역할을 똑바로 지키고 민간에서는 정전제가 시행되는 이상사회의 모습은 주나라의 질서에 철저히 의존한다. 이에 큰 영향을 받은 정약용이 제시한 여전제론과 정전제론도 당연히 주나라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었다. 현실에서는 신나라의 왕망이 주 대의 군주 칭호였던 '왕' 칭호의 권위 회복과 정전제의 재건을 시도했다. 쫄딱 망했지만... 또한, 주나라의 관제는 전근대 중국 역대 왕조들과 고려, 조선의 관제에까지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편, '천( 天)'에 대한 숭배와 천하, 천자라는 용어 또한 근 3천 년간 계속해서 사용되는 관용적 문구가 되었다. 물론 이것은 보편적인 '하늘신'이라는 의미가 강한 점도 있고 상나라의 ' 상제' 개념 또한 후대에 계속 남아 신으로서 모셔졌지만, 천명론을 비롯한 '천'에 관련된 이론은 이후 동양 질서에 크나큰 영향을 남겼다.
4. 역대 군주
주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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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백 西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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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후직 |
2대 국군 부줄 |
3대 국군 국 |
4대 국군 공류 |
5대 국군 경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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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국군 황복 |
7대 국군 차불 |
8대 국군 훼유 |
9대 국군 공비 |
10대 국군 고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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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대 국군 아어 |
12대 국군 주공 |
13대 국군 태왕 |
14대 국군 왕계 |
15대 국군 문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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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 西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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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왕 무왕 |
2대 왕 성왕 |
3대 왕 강왕 |
4대 왕 소왕 |
5대 왕 목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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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 왕 공왕 |
7대 왕 의왕 |
8대 왕 효왕 |
9대 왕 이왕 |
10대 왕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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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기 정공 · 소 목공ㆍ 간왕 |
11대 왕 선왕 |
12대 왕 유왕 |
비정통 휴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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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 東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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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 왕 평왕 |
14대 왕 환왕 |
15대 왕 장왕 |
16대 왕 희왕 |
17대 왕 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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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통 폐왕 |
18대 왕 양왕 |
비정통 후폐왕 |
19대 왕 경왕頃王 |
20대 왕 광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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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왕 정왕 |
22대 왕 간왕 |
23대 왕 영왕 |
24대 왕 경왕景王 |
25대 왕 도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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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통 서왕 |
26대 왕 경왕敬王 |
27대 왕 원왕 |
28대 왕 정정왕 |
29대 왕 애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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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왕 사왕 |
31대 왕 고왕 |
32대 왕 위열왕 |
33대 왕 안왕 |
34대 왕 열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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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대 왕 현왕 |
36대 왕 신정왕 |
37대 왕 난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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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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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 (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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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환공 |
국군 위공 |
국군 혜공 |
국군 무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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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혜공 |
국군 무공 |
국군 소문공 |
국군 동주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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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 문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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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읍 周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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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군 문공 |
2대 국군 평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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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국군 정공 |
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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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국군 환공 |
?대 국군 희공 |
?대 국군 희기보 |
?대 국군 희열 |
?대 국군 희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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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황오제 ·
하 ·
상 · 주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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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는 모두 기원전. 단, 일부 학계를 제외한 대다수 근현대 학자들은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연대 기록을 믿을 수 없다고 보고 있으며, 기원전 841년 이전 왕들의 재위기간을 명시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학자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니 확신하지 말고 참고 정도로만 보는게 좋다.
- 1대 무왕(武王) 희발(姬發) BC 1046년 1043년(3년) : 서주 시대의 첫번째 왕.
- 2대 성왕(成王) 희송(姬誦) BC 1042년 1021년 (21년)
- 3대 강왕(康王) 희조(姬釗) BC 1021년 982년 (39년)
- 4대 소왕(昭王) 희하(姬瑕) BC 982년 963년 (19년)
- 5대 목왕(穆王) 희만(姬滿) BC 963년 908년 (55년)
- 6대 공왕(共王) 희예호(姬繄扈) BC 908년 896년 (12년)
- 7대 의왕(懿王) 희간(姬囏) BC 896년 871년 (25년)
- 8대 효왕(孝王) 희벽방(姬辟方) BC 871년 862년 (9년)
- 9대 이왕(夷王) 희섭(姬燮) BC 862년 854년 (8년)
- 10대 여왕(厲王) 희호(姬胡) BC 854년 841년 (13년)
- 공화시기(기원전 841년 ~ 기원전 828년)[41]
- 11대 선왕(宣王) 희정(姬靜) BC 828년 782년 (46년)
- 12대 유왕(幽王) 희궁열(姬宮涅) BC 782년 771년 (11년) : 서주 시대의 마지막 왕.
- 13대 평왕(平王) 희의구(姬宜臼) BC 771년 720년 (51년) : 동주 시대의 첫번째 왕.
- 14대 환왕(桓王) 15대 장왕(莊王) 16대 희왕(僖王) 17대 혜왕(惠王)
- 춘추오패 : 제환공, 진문공, 초장왕, 오왕합려, 월왕구천. (진목공, 오왕부차.)
- 18대 양왕(襄王) 희정(姬鄭) BC 652년 619년 (33년)
- 19대 경왕(頃王) 20대 광왕(匡王) 21대 정왕(定王) 22대 간왕(簡王) 23대 영왕(靈王) 24대 경왕(景王)
- 25대 도왕(悼王) 26대 경왕(敬王) 27대 원왕(元王) 28대 정정왕(貞定王) 29대 애왕(哀王) 30대 사왕(思王)
- 31대 고왕(考王) 32대 위열왕(威烈王) 33대 안왕(安王) 34대 열왕(烈王) 35대 현왕(顯王) 36대 신정왕(愼靚王)
- 37대 난왕(赧王) BC 315-256 (56년) : 동주 시대의 마지막 왕.
5. 계보
희단보 | |||||||||
희태백 | 희중옹 | 희계력 | |||||||
오/계보 | 희창 | ||||||||
1. 희발 | 희단 | 희도 | 희진탁 | 희봉 | 희석 | ||||
2. 희송 | 희우 | 희백금 | 소주/계보 | 채/계보 | 조/계보 | 위/계보 | 연/계보 | ||
3. 희조 | 희섭 | 노/계보 | |||||||
4. 희하 | 진/계보 | ||||||||
5. 희만 | |||||||||
6. 희예호 | |||||||||
7. 희간 | |||||||||
8. 희벽방 | 9. 희섭 | ||||||||
10. 희호 |
共.
화 ,(계보 불명), |
共.
공화 ,(시기), |
|||||||
11. 희정 | 희우 | ||||||||
12. 희궁열 | 희여신 | 정/계보 | |||||||
13. 희의구 | |||||||||
희예보 | |||||||||
14. 희림 | |||||||||
15. 희타 | |||||||||
16. 희호제 | 희퇴 | ||||||||
17. 희랑 | |||||||||
18. 희정 | 희대 | ||||||||
19. 희임신 | |||||||||
20. 희반 | 21. 희유 | ||||||||
22. 희이 | |||||||||
23. 희설심 | |||||||||
24. 희귀 | |||||||||
25. 희맹 | 26. 희개 | 희조 | |||||||
27. 희인 | |||||||||
28. 희개 | |||||||||
29. 희거질 | 30. 희숙습 또는 희숙 | 31. 희외 | |||||||
32. 희오 | |||||||||
33. 희교 | |||||||||
34. 희희 | |||||||||
35. 희편 | |||||||||
36. 희정 | |||||||||
37(末). 희연 |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한어 발음은 tiw, 현대 중국어로는 Zhōu. 周는 현대의 한자이며, 서주시대의
금문으로는 다음과 같다.
[2]
봉건제의 특성상 수도와 그 근교 지역만 직할 통치하고, 나머지는 제후들이 통치했다. 그리고 초(楚), 오(吳), 월(越), 이(夷) 등의 나라들은 원래는 주나라와 별개의 정체였을 것이며, 언제부터 주나라의 통치 질서에 편입되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상고하기는 어렵다.
[3]
주왕실과 서주공국이 멸망한 해로, 동주공국은 그로부터 7년 후인 기원전 249년 멸망한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 연도들도 추정의 영역이라, 오늘날까지도 학자들간 이견이 있다.
[4]
주나라의 발원지. 현 섬서성
바오지시 치산현(岐山县). 관련 유적이 발굴되어 주원유지(周原遗址)라는 이름으로 관리하고 있다. 치산현의 이웃 동네인 펑샹현(凤翔县)은
진나라의 초기 수도였던 옹(雍)이 위치하고 있었다.
[5]
주나라 문왕 때 기산(岐山)에서 천도.
[6]
주나라 무왕 때 풍경(豊京)에서 천도.
위수의 지류인 풍하(豊河)를 두고 풍경과 마주하고 있다.
[7]
낙양의 과거 이름.
[8]
주나라가 멸망한 후 주나라 왕족은 주(周)씨로 자기의 씨를 정했다. 주나라가 있었을 때는 희성 종가라는 권위 때문에 굳이 다른 씨를 칭할 필요가 없었지만 주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신들의 정체성 유지를 위해서 주씨로 칭했을 것이다. 여담으로 전국 7웅 중 주나라와 동성인 국가는 위나라, 한나라, 연나라였다.
[9]
단, 주나라 사람들은 상나라에 비해 세속적으로 변했다.
[10]
주왕실과 서주공국이 멸망한 해로, 동주공국은 그로부터 7년 후인 기원전 249년 멸망한다. 다만 후술되어있듯 이 연도들도 추정의 영역이라 학자들간 이견이 있다.
[11]
방(方)은 나라를 뜻한다.
[12]
다만 갑골문에는
주 문왕이 상나라에 임명받았다는 '서백'이란 단어는 없고 그보단 격이 낮은 '방백'이란 말만 나온다고 한다. 그래서 후대에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
[13]
작위와
오등작 문서 참고.
[14]
다만 중국 역사학자 리숴의 저서에 따르면 이는 착각으로, 무정이 친 대상은 희성 주족이 아닌 친척뻘 강성 주족이었다. 이때 희성 주족은 북쪽 오랑캐땅에 이주 혹은 피신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정이 관중 평야 지대에 있던 강성 주족을 토벌하면서, 역설적으로 이후 희성 주족이 다시 관중 지대에 내려왔을 때 그 기반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게 된다.
[15]
참고로 공화시대는 근대 일본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오늘날에는 Republic(
공화국), Republicanism(
공화주의)을 번역하는 낱말로서 사용된다. 사기 내용에 따라 공백화 대신 여러 신하가 '함께' 통치했다는 의미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16]
이상은 심재훈, <"발을 잘라 신발에 맞추기" - 하상주 단대공정, 서주 기년의 허와 실> 《하상주 단대공정 - 중국 고대 문명 연구의 허와 실》, (동북아 역사재단)에 따랐다.
[17]
상나라 혈통은 잇게 해달라는 요청으로 제신의 아들 무경에게 일정 지역의 통치권을 주고, 주변에
채숙도 등 무왕의 동생 3명을 배치시켜 감시하게 했는데, 이들을 삼감이라 한다. 허나 성왕 시절
주공 단의 섭정 등에 불만을 품은 이들은 되레 감시하라고 한 무경과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을 삼감의 난이라고 한다. 허나 결국 주공 단과
강태공 등이 보낸 군사들에게 진압당한다.
[18]
이 당시에도 상족의 인구는 주족을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19]
다만 사 계층은 최하위 지배층이었던 만큼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형성되었다.
[20]
동성 제후.
[21]
이성 제후. 이들 중에는 주나라에 적극 협력했던 강족 출신이 가장 많았다.
[22]
로타 폰 팔켄하우젠(Lothar von Falkenhausen), 심재훈 역, 《고고학 증거로 본 공자시대 중국사회》(Chinese Society in the Age of Confucius 1000~250 BC)
[23]
따라서 실질적으로 계층의 하락이 일어났다.
[24]
형제를 분봉했다고 하더라도, 세대가 교체되면서 4촌, 6촌, 8촌, 10촌 등으로 점점 촌수가 멀어진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현대에도 구심점 역할을 하는 부모가 다 세상을 떠나고 나면 특별한 날이 아닌 이상 형제들끼리 연락과 교류를 잘 안하게 되는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주나라에서는 가깝게 살지 않는 이상 자연스럽게 사이가 멀어지게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월이 지날수록 주나라 천자의 회맹 소집이 잘 먹히지 않게 된다.
[25]
사기의 기록대로라면 포사의 일이 결정적이긴 했으나, 당시 주나라 천자의 권위가 떨어져 제후들 중 상당수는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는 주 왕실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었다.
유왕 항목에서도 보이듯 다른 내용의 기록도 있다. 결국 서주의 몰락은 명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으나, 초나라를 무리하게 원정했다가
소왕 이하 수많은 병력이 죽은 일이나,
이왕이
제애공을 불러 삶아죽인 일 등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주 왕실의 삽질들이 누적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26]
실제로 춘추시대 초기, 위나라가 적인(狄人)의 침입을 받고 망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27]
그럴 만도 한 게,
초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묘족이 세운 나라였다. 묘족은 영화 <
그랜 토리노>에도 나오는
몽족의 조상 격인 민족이다. 그래서 원래는 한족과는 별도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심지어는 초나라는 물론, 주나라도
진나라도,
한나라도 모두 멸망한
서진시대에나
한족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한족들이 세운 질서에 순응할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가면
한족들이 중심이 된 여러 제후국들과 주나라 왕실과의 교류가 큰 이득을 가져다 줌을 깨닫고는 뒤늦게 숟가락 좀 얹겠다고 주나라에 칭신하기 시작했으나, 이제 와서 중화권 질서에 끼워달라는
초나라의 태도를 재수없게 여긴 다른 제후국들은 초나라 측에서 자칭하는 제후로서의 작위를 무시하고 초나라 군주를 그냥 왕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당시 정통 주나라의 제후국 사람들은 초나라 등 이민족 국가를 혐오했고, 이 때문에 "
초인목후이관"이라는 모욕적인 말도 생겨났다. 즉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와 다를 바 없다는 뜻이었다.
[28]
공자가 묘사한 주나라의 면면은
유가의
윤리학 및
정치철학으로 정립되었고, 그리하여
한나라 이후로 2천 년 넘게
유교에서 제시하는 바람직한 통치의
모델로 군림했다.
[29]
심지어 공자가 노자의 제자였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기록도 있다.
[30]
진(秦)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31]
사실 봉건제가 먼저 나왔다보니 무조건 낡은 제도 취급하는 경향도 있지만, 봉건제 역시 엄연히 군현제 대비 장점은 있다. 게다가 오늘날 몇몇 국가의 주 시스템도 이런 봉건제적 특성이 남아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32]
당시 제와 양강이던 진나라
소양왕도
제 민왕에게 '동제'(東帝)와 '서제'(西帝)를 나눠 쓰자고 권유했다고 한다.
[33]
서주니 동주니 하는 호칭은 국명 자체가 '주'인 나라를 시대별로 구분하기 위해 일컫는 호칭이지만, 이 공국들은 국명 자체를 '서주'와 '동주'로 지칭했다.
[34]
지금의
산시성
진청시 쩌저우현 가오두진.
[35]
전국시대 초기에는 주나라 바로 옆인 위나라와 한나라가 주나라를 핍박하는 걸 진나라가 구해주기도 했고 회맹을 주도하기도 하여 주나라가 직접 마지막 방백으로 인정해주는 등 가까운 관계였다. 그러나
진효공 이후 전국칠웅들이 죄다 왕을 자칭하게 되고 여기에 진나라가 강대해져 다른 전국칠웅들을 밀어내면서 주나라 왕을 본국으로 일방적으로 소환하려 하기까지 하니 주나라에서 위협을 느끼게 된다.
[36]
봉건제 자체는 이후
군현제에 밀려 거의 소멸한다. 한나라 초기에
군국제라는 애매한 형태로 부활한 정도가 끝이었다. 다만 봉건제의 잔재 혹은 흔적은 남아 신하에게 소유권 대신 조세는 거둘 수 있는 녹읍 따위를 하사하는 행위는 계속 이어진다.
[37]
그리고 앞에서 설명했듯, 이들 중에는 중국으로 흡수되는 이민족도 존재했다.
[38]
상의 제후, 주 건국 후에 증손자 무왕이 태왕(太王)으로 추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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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제후, 주 건국 후에 손자 무왕이 왕으로 추존했으나, 시호가 실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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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제후. 최초로 상나라 정벌을 계획했지만 본격 실행 전 나이가 들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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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자는 사기 주본기 내용을 따를시 공화(공동통치), 죽서기년 내용을 따를시 공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