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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1-02-06 09:26:48

우징헝

파일:오경항.jpg
중화민국 국민정부 중앙감찰위원
본명 오조(吳脁)
정체 吳敬恒
간체 吴敬恒
한국식 독음 오경항
영문 Wú Jìnghéng
치휘(稚暉)
출생 1865년 3월 25일 청나라 강소성 무진현
사망 1953년 10월 30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청나라 수재
에든버러 대학교
직업 교육가, 사상가, 정치가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근공검학 운동2.3. 국민혁명 시기2.4. 반장전쟁에서 중일전쟁까지2.5. 말년
3. 여담4. 참고문헌
4.1. 저서4.2. 논문

1. 개요

중화민국의 아나키즘 철학자, 정치인. 자인 치휘가 유명해서 오치휘( 우쯔후이)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1865년 강소성 상주부 양호현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유학공부를 받다가 1887년 수재가 되었고 1891년 향시에 급제하여 수도 베이징에 올라가 3년 연속 열린 두차례 회시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이때 베이징의 유신파들로부터 서양 학술을 접하게 되면서 중국의 전통교육을 비판하게 되었다. 1897년 북양대학당 교수가 되어 한문을 가르쳤는데 이때 캉유웨이, 량치차오의 변법사상을 접하게 되었고 캉유웨이의 <공차상서>에 연명하여 변법자강운동을 지지했으나 1898년 무술정변이 일어나면서 캉유웨이와 량치차오는 모두 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우징헝은 청일전쟁의 패배와 무술정변 때문에 기존 체제의 의문을 품게 되었으며 과학기술을 기기음교라고 배척하는 사대부들의 태도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우징헝은 1899년 남양공학 학장이 되어 군지회(群智會)를 조직, 차이위안페이 등과 교류하며 과학 보급을 주장하며 서구화를 주장했다.

1902년 일본으로 유학, 홍문사범학원에서 수학하였다. 1902년, 세이죠 고등학교를 입학하고자 하는 청국 유학생들을 위해 주일 청국 공사관 앞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청국공사 차이쥔의 개입으로 쫓겨나고 이 때문에 자결을 기도했으나 일본 경찰의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귀국하여 차이위안페이 등과 함께 <애국학사>를 조직하여 <소보>를 창간, 서태후를 비판하고 반청활동을 벌였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인하여 1903년 5월, 상하이를 떠나 영국령 홍콩을 거쳐 1903년 9월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영국 망명 시기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진화론, 고인류학, 사진술, 인쇄술을 공부하였으며 1905년, 중국 동맹회원인 조아백의 소개로 중국 동맹회에 가입하였다. 가입 시에 동맹회 서약서를 보고 웃으면서 "우리들의 혁명이 문자 그대로 혁명인데 어떻게 캉유웨이가 했던 것에서 배울 수가 있는가?"라고 했지만 옆에 있던 다른 회원들이 "우리가 지옥에 들어가지 않으면 누가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나는 이미 이 서약서에 이미 서명하였다."라고 하자 동맹회에 가입했다.

1906년,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접하게 되어 무정부의자가 되었다. 이에 장런제, 리스쩡 등과 함께 파리에서 <신세기> 그룹을 조직하여 편집인을 맡았고 필명으로 중국의 전통사상의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고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한편 중국을 서구화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당을 부정하고 교육혁명을 통해 중국을 개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08년, 장병린, 도성장 등이 쑨원이 금전을 모으고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크게 비판하여 쑨원이 궁지에 몰리자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던 우징헝은 쑨원의 요청에 따라 쑨원이 사용한 금전내역이 혁명을 위해 사용한 것임을 증명하면서 쑨원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다. 1910년, 왕징웨이가 순친왕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체포되자 베이징에 로비를 하여 왕징웨이를 구해줄 것을 부탁받기도 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1912년 1월에 중국으로 귀국, 중국사회당 집회에서 군국주의와 애국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을 선전했다. 1912년 2월, 진덕회를 조직하여 금욕주의 계율을 따르는 병종 회원이 되었고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를 창립하여 중국 청년들에게 프랑스 유학을 떠날 것을 권유, 지원하였다. 이 과정에서 개량주의 입장을 취하며 민국에 대해 아나키즘 사회혁명을 이룩하기 전까지의 필요악 단계로 규정하고 민국을 옹호하였다. 이 때문에 극렬 아나키즘으로부터 아나키즘의 선봉장은 되지 못할망정 평담이나 일삼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1913년, 일본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 장쥐가 참의원에 선출, 참의원 원장이 되자 아나키스트들은 이를 무관주의를 배반한 것이라고 격렬히 비판하였으나 우징헝은 장쥐의 의원 출마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당에 접근하면서 정당에 몸담으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후 탕산대학 학장이 되어 교육활동에 종사했다. 이때 총통 중심제를 주장하는 위안스카이에 맞서 정당정치를 주장했다. 1913년 8월 장전우 사법살인 사건이 일어나자 차이위안페이와 함께 법률유지회를 조직하여 위안스카이의 독재를 비판했고 1913년 계축전쟁이 일어나자 이를 지지하여 참가하였다가 위안스카이의 탄압으로 다시 영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2.2. 근공검학 운동

영국 망명 시기, 우징헝은 리스쩡이 주도한 교육혁명론을 적극 지지하면서 학생들을 길러 국민들의 정치의식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다른 아나키스트들과 달리 현실적인 정치수단을 통한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노동력이 극도로 부족해진 프랑스는 대량의 중국인 노동자들을 받아들였다. 이에 우징헝은 1915년 프랑스에서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우위장과 함께 근공검학회를 조직하여 노동자들에게 공부와 노동을 병행할 것을 돕는 한편 이들을 상대로 아나키즘을 선전했다. 1915년 12월,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단행하여 황제에 자리에 오르려 하자 차이어, 량치차오, 리례쥔, 탕지야오 등이 이에 맞서 호국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우징헝은 위안스카이 타도에 참가하기 위해 1916년 귀국하였다.

1916년 3월, 위안스카이가 죽고 후임 총통 리위안훙이 구 국회와 약법을 복구하면서 호국전쟁이 종결되자 우징헝은 1917년에 귀국한 리스쩡과 함께 다시 교육혁명에 나섰다. 1917년, 차이위안페이의 초청으로 베이징대학 학감이 되어 대학생들을 상대로 아나키즘을 선전하여 베이징대학 안에 아나키즘 학풍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때 영향을 받은 유명인물이 다름아닌 마오쩌둥이다. 1918년 3월, 우징헝은 노동자 선전잡지 <노동>을 창간하여 근공검학을 선전하였으며 중국 각지에 예비학교를 수립, 수천명의 학생을 프랑스로 유학보냈는데 이때 간 유명한 유학생들로 저우언라이, 덩샤오핑, 리리싼 등이 있었다. 1920년, 경자배상금이라 불리는 의화단 운동 배상금을 더 이상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거나 아예 망해버린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 제국에게 갚을 필요가 없어지자 우징헝은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등과 함께 이 돈을 바탕으로 1920년 베이징에 중법대학을 설립하여 이사를 맡았으며 1922년 중법대학 리옹 캠퍼스를 만들어 근공검학 운동을 지원했다. 5.4운동 시기 후스와 함께 서양화를 주장하며 량수밍의 유교 중시를 비판하며 과학화를 열렬히 주장했다.

허나 프랑스로 보낸 유학생들 중에서 강경한 공산주의자 그룹이 형성되면서 이들이 수십년간 진행해온 근공검학 운동은 위기에 처했다. 저우언라이 등이 주도한 프랑스 유학생들은 생존권 해결을 요구하면서 주불 중국 공사관을 포위하였으며 이어 리옹의 중법대학을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우징헝은 이 분규를 해결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들은 우징헝을 비판하면서 더 이상 근공검학회의 통제를 받지 않으려 했고 결국 리옹의 중법대학은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크게 실망한 우징헝은 정당에 몸을 담지 않겠다는 기존의 노선을 버리고 현실 권력집단과 손을 잡아 아나키즘 혁명을 추구하고자 했다.

2.3. 국민혁명 시기

1924년, 국공합작을 실시한 중국 국민당이 국민당 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자 우징헝은 리스쩡을 비롯한 아나키스들과 함께 참석, 국민당 중앙감찰위원회 위원에 선출되면서 아나키스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안국합작이라 불리는 아나키스트들과 국민당의 합작에 대해 화림, 심중구를 비롯한 아나키스트들은 아나키스트로서의 태도를 분명히 하라고 격렬히 비판했지만 우징헝은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며 이들과 공개논쟁에 들어갔다. 우징헝은 군벌 타도와 점진적 혁명론을 주장하며 아나키즘 혁명을 이룩하기 위해 아나키스트들에게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였다. 심중구 등은 우징헝이 아나키스트라는 사실을 부정하면서 그의 신세기 그룹 활동까지 폄하하였으나 결국 아나키스트들의 여론은 우징헝 쪽으로 기울어서 많은 아나키스트들이 국민당에 가입하였고 심중구조차 우징헝의 주장을 인정하고 국민당에 가입하였다. 가입 초창기에 교육에 관한 저술을 계속하며 상하이의 학생운동을 지원했으며 반기독교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 때문에 1925년 천두슈로부터 국민당 좌파인사로 분류되었다.

1924년 10월, 북경정변이 일어나 펑위샹이 베이징을 장악하고 다시 11월 핍궁사건이 일어나 선통제와 청나라 황족들이 자금성에서 축출되자 우징헝은 청실선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어 고궁박물관 설립과 유물 보호에 참여했다. 1925년, 돤치루이, 장쭤린 등의 초청으로 베이징을 방문한 쑨원이 간암으로 위독해지자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충원되었다. 쑨원이 사망한 후 국공갈등이 심해지다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을 계기로 갈등이 폭발하면서 린썬, 쩌우루, 셰츠 등의 국민당 우파 원로를 중심으로 11월 서산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우징헝은 서산회의가 주도한 국민당 1기 4중전회의 주석으로 참여하여 다이지타오와 함께 왕징웨이와의 화의를 촉구하는 온건론을 주장하였으나 강경파들의 큰 비난을 받고 이후 서산회의파에서 손을 떼고 다시 광저우 중앙에 참여, 1926년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다시 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공인부장 대리를 잠시 맡았다가 진수인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자 감찰위원으로써 공산당을 견제했으며 1926년 9월, 강소 특무위원에 임명되어 상하이에서의 혁명을 지휘했다. 이후 국공갈등이 거세지자 1927년 4월 2일, 리스쩡과 함께 공산당의 계급투쟁론이 중국에 부적합할 뿐더러 공산당원이 북벌을 방해하고 반역을 준비한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날 우징헝은 차이위안페이를 주석으로 상하이에서 감찰위원회 회의를 소집하여 공산당을 탄핵했고 리지선 등 반공군벌들과 장제스의 동맹을 주선했으며 왕징웨이가 국민당과 공산당의 공치를 주장했다고 크게 비판했다. 결국 1927년 장제스 4.12 상하이 쿠데타를 거행했으며 4월 18일 난징 국민정부가 수립되었다. 6월에 펑위샹과 회담했으며 7월에 장제스가 서주 전역에서 패하여 하야하자 후한민, 리스쩡 등과 함께 장제스와 진퇴를 같이 한다는 이유로 사퇴했다. 영한합작 과정에서 장제스를 계속 옹호했으며 이 때문에 천궁보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우징헝도 2기 5중전회에 앞서 왕징웨이와 개조파를 장황사변, 광저우 폭동의 배후로 지목하여 혹독하게 비판하였으며 천궁보, 구멍위, 간나이광 등을 테러리스트로 고발했다. 이 시기 전민혁명론을 주장하며 계급투쟁론을 비판했다.

2.4. 반장전쟁에서 중일전쟁까지

북벌 말기 탕산회의에 참여하였다. 장제스가 장황사변의 주모자들에 대한 온건처리를 고집하자 장제스와 불화를 빚었으며 지방분권을 위해 정치분회 존치를 주장하다가 국민당 2기 5중전회에 불참하고 상하이에 칩거하였으나 장제스의 설득으로 난징으로 복귀, 1928년 10월 8일 중앙상무위원회 회의에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8년 12월 27일, 국민당 중앙상무위원회의 추천으로 편견회의 편견위원으로 지명되었다. 1929년 1월 22일, 편견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월 25일 육군군관학교 교무위원에 선출되었다. 1929년 2월 호남 사건이 발생하자 리쭝런의 요청으로 중재에 나섰으나 결국 장제스가 계계군벌 토벌을 결정하면서 반장전쟁이 발발했다. 1928년~1929년 시기에 꾸준히 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나키즘 운동에 나섰으나 아나키즘을 사회주의의 일파로 인식하게 된 국민당 상층부에서 아나키즘을 탄압하고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에 따라 교육개혁을 위해 설치했던 대학구, 대학원제를 폐지함에 따라 평생에 걸쳐 노력한 교육혁명 운동이 좌절되는 슬픔을 맛보았다. 이후 공직 활동을 거의 중지하였다.

반장전쟁 후반기의 중원대전 과정에서 불거진 약법제정 논란에 있어 약법 제정을 반대하는 입법원장 후한민에 맞서 약법 제정을 지지했다. 1931년 2월 탕산 사건이 벌어진 후에도 장제스 지지 입장을 고수했으며 1931년 3월 2일, 쑨커, 위유런, 주페이더, 왕충후이 등 중앙집행위원들과 함께 훈정 시기 약법 제정을 건의하여 약법제정 기초위원에 선출되었다. 1차 양광사변이 터진 후 광저우와 난징의 통합을 주선했으며 만주사변 후 거국적인 협력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한 후 충칭으로 이동해서 항전을 수행했으며 1943년 국민정부 주석 린썬이 사망하자 국민정부 주석직을 제의받았으나 자신에겐 어울리지 않는 자리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이에 국민정부 주석직은 장제스가 계승했다.

2.5. 말년

1946년 11월, 제헌국민대회가 소집되자 국민대회 주석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12월 25일을 기해 헌정을 실시하기로 결의하였고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에게 중화민국 헌법을 전달하였다. 1948년 제1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에서 위유런, 후스, 왕윈우와 함께 장제스를 총통 후보자로 제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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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국민정부 주석 장제스에게 헌법을 전달하는 우징헝

1949년 국부천대가 단행되자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1952년 중국 국민당 7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 중앙평의위원에 선출되었다. 10월 23일, 7기 중앙위원에 취임한 후 1953년 노환으로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1958년, 리스쩡이 그를 추모하기 위해 우징헝의 자를 따서 타이난에 치휘초급중학교를 개교하였다.

3. 여담

4. 참고문헌

4.1. 저서

4.2.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