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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83년 4월 10일 |
영국 우스터 | |
사망 | 1970년 8월 18일 |
미국 뉴욕 | |
학력 | 드류 신학대학원 (졸업) |
종교 | 개신교 감리회 |
약력 | 미국 연방상원 원목 |
서훈 | 건국훈장 독립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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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감리교 목사.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2. 생애
2.1. 목회 활동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는 1883년 영국 우스터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년 시절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고, 뉴저지 주 드류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트렌튼 그린우드 에비뉴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1924년 워싱턴 D.C. 파운드리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으며, 1925년부터 <파운드리 팩츠(Foundry Facts)>를 발행했고, 1927년 4월 워싱턴교회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해리스는 1924년부터 1955년까지 30여년 간 파운드리교회의 목사로 재임하면서 워싱턴 D.C. 유력 인사들과 교분을 쌓았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뒤,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은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과 함께 파운드리교회에서 열린 성탄절 연합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다.
2.2. 이승만 지원 활동
1939년 말, 이승만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는 파운드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이후 해리스는 이승만과 긴밀한 교류를 가졌고, 1942년 2월 9일 그의 설득을 받아들이고 한미협회 이사장에 부임했다. 또한 그는 기독교인친한회에도 관여했으며, 한미협회 이사회의 법률고문 존 W. 스태커스 변호사, 재무담당 제이 저롬 윌리엄스 기자와 함께 한국 관련 호소문을 작성하여 해리 L. 스팀스 전쟁 장관에게 발송했다.일본인들에 대항하는 혁명의 일환으로 2,300만 한국인들을 도와주십시오. 그들의 지도자인
이승만 박사가 워싱턴 D.C.에 있습니다.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성품, 인품, 민주주의에 대한 노력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한국을 향한 그의 재능과 봉사는 지난 40년간 적들에게도 알려져 10만 달러의 현상금을 걸 정도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의 목소리가 한국인들에게 들리게 해주십시오. 그동안 우리의 국가정책은 압제받는 사람들을 돕는 일에 힘을 기울여왔습니다. 한 국가로서 우리는 코리아의 일본합병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우리는 코리아와 애초에 맺은 조약을 폐지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해리스는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3일동안 열린 대한인 자유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나의 다정한 친구이며 한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있는 쇼우 씨[1]를 통해 오래 전부터 코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중략) 그는 조국 이상으로 코리아를 사랑했으며 지금도 코리아에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지금의 전쟁이 끝나면 새로운 시대가 오리라는 큰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략) 이승만 박사와 한인자유대회에 관여할 수 있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의 전쟁이 끝나면 코리아가 다시 자유와 독립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 되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해리스는 1942년 4월 한미협회 이사회에 참여했고, 그해 10월 10일 미국 상원의 원목에 취임했다. 1942년부터 1946년까지 제77회부터 제79회까지의 상원회기 중 해리스가 상원에서 기도한 내용들은 <기도(Prayers)>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상원에서 회의가 시작되기 전, 원목 해리스와 부통령 해리 A. 윌러스는 부통령 집무실에서 회견을 가진 후 정오가 되면 함께 의장석에 올랐다. 해리스는 공산주의에 호의적인 인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해리스에 대해 "그가 강단에서 올린 기도는 국가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으며, 나는 그의 기도 속에서 영감을 발견했다."며 호평했다.
1945년 4월 12일 루스벨트 대통령이 급서하면서 해리 S. 트루먼 부통령이 제33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트루먼은 대통령 직무를 맡은 직후 해리스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면담했고, 해리스는 상원에서 "신임 대통령에게 역사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국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와 명철을 부어달라"고 기도했다. 이렇듯 미국 정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를 주목한 이승만은 1945년 4월 25일부터 6월 26일까지 샌프란시스코의 오페라 하우스와 재향군인건물 등지에서 개최된 유엔창립총회에 한국대표단이 공식 초청을 받지 못하자 그해 5월 2일 측근에게 다음과 같은 비밀 서한을 보냈다.
만약 미국 대통령이 미국 대표단에게 우리의 주장을 지지하라는 지시를 한 두 마디라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일 것이다. 기밀 정보에 따르면,
송자문이 이번 주 금요일 워싱텅 D.C.로 갔다가 다음주 월요일에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온다고 한다. (중략) 당신이 보기에 바람직하다면 해리스 박사에게 이 상황을 전달해주기 바란다.
실제로 해리스는 1945년 5월 5일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이 이끄는 한국대표단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여기 미국지역에서 한국 정부의 대표로 많이 알려진
이승만 박사는 그의 삶을 코리아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여전히 그는 코리아 독립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전사입니다. (중략) 우리 중 몇 사람은 모든 요건을 갖췄지만 코리아가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것에 대해 매우 실망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이끄는 대표단이 거기 있고, 만약 정의의 힘이 코리안들의 긴박한 요청이 받아들여지도록 한다면, 그들의 자리를 지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트루먼은 3일 후인 5월 8일에 해리스에게 회신을 보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5월 9일에 백악관에서 해리스를 접견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5월 15일,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 모리스 호텔에서 트루먼 대통령에게 서한을 보내 "코리아가 발언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달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한국 대표단은 끝내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2.3. 광복 후 한국 지원 활동
1945년 9월 28일, 이승만은 해리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내면서 트루먼에게 태극기를 선물로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나는 나의 친구이자 목사인 프레데릭 브라운 해리스에게 이것을 부탁합니다. 한국 독립에 대한 애정어린 관심에 대하여 각하께 이 신의와 깊은 감사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이 깃발은 한국
민족(the Korean Nation)을 의미하며, 곧 전체 한국 사람들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대통령께 감사드리며, 하나님께서 당신과 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이승만으로부터 이런 요청을 받은 해리스는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메모를 작성해 윌리엄 D. 하셋을 통해 전달하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승만이 보낸 태극기는 최종적으로 하셋을 통해 트루먼 대통령 비서실에 전달되었고, 비서실의 로즈 A. 콘웨이 양은 이승만에게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한국 민족을 상징하는 깃발에 대해 대통령이 표현한 감사의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1945년 11월 25일자 서울신문 기사에 따르면, 해리스는 그해 11월 1일 한국을 신탁통치하자는 의견을 제안한 미국 국무부 극동부장 존 C. 빈센트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오랫동안 조선독립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의 용감한 투쟁을 찬조하여 오던 한 사람으로서 귀하가 조선통치에 대하여 연합국의 대표자로서 조직된 위원제를 채용하자고 제안하였다는 신문보도에 접하고 크게 슬퍼하는 바이다. 그와 같은 위원제(소위 공동신탁제)는 사태를 일층 분규하게 할 것이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우리는 전연 원치 아니하는 바이다. 우리가 조선에 대하여 약속을 지킬진대 조선의 전부를 조선인에게 돌려 주는 것밖에 아무 정책이 없는 것이오. 조선은 일본인이 조선인민으로부터 도적질 하였던 것이오. 물론 나는 얄타나 기타 어떤 곳에서 무슨 국제적 약속이 있었는지 알지 못하나 현하 조선의 분할 점령상을 참기 어려운 바이오.
당시 한국 언론은 해리스를 "이승만의 개인적 친구요 한미친우회원", "미국 상원 목사인 동시에 트루먼 대통령의 개인적 친구이요, 한미제우회 회원"이라고 소개하며 해리스의 활동에 주목했다. 이승만 역시 워싱턴에 남아있던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서한을 보내 해리스가 신탁통치를 반대해 준 것에 자신이 깊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194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지난 5월 6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사실을 거론하며 "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공회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치 않게 되었으니 우리는 남방만이라도 독립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라고 발언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신탁통치를 여전히 고려하고 있던 미군정과 이승만의 갈등이 첨예해지자, 이승만은 1946년 말 미국으로 향했다.
1946년 12월 7일 워싱턴 D.C.에 도착한 이승만은 칼튼 호텔에 여장을 풀고 회의를 개최했다. 해리스는 이 회의에 참석해 변호사 스태거스, 언론인 윌리엄스, 전 OSS 책임자 굿펠로우, 미군정청사법관 우달, 임영신, 임병직 등과 함께 정세를 분석한 뒤 코리아 문제에 관해 다음과 같은 해결 방안을 도출했다.
1. 코리아의 두 반쪽이 통일되고 총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코리아의 남쪽에 과도적 국민정부가 선출되어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2. 코리아에 관한 미소협의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 과도정부는 유엔에 가입해야만 하며, 미국과 러시아의 코리아 점령과 다른 돌출 사안들과 관련하여 협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3. 코리아의 경제 재건을 위해 일본에 대한 코리아의 배상 주장이 가능한 빨리 검토되어야 한다.
4. 다른 국가와의 평등에 기초해서, 그리고 다른 국가에 대한 편향됨이 없는 완전한 통상권이 코리아에 부여되어야 한다.
5. 코리아의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 원칙에 입각해서 안정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코리아의 남쪽에 주둔해야 한다.
2. 코리아에 관한 미소협의를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 과도정부는 유엔에 가입해야만 하며, 미국과 러시아의 코리아 점령과 다른 돌출 사안들과 관련하여 협의할 수 있어야만 한다.
3. 코리아의 경제 재건을 위해 일본에 대한 코리아의 배상 주장이 가능한 빨리 검토되어야 한다.
4. 다른 국가와의 평등에 기초해서, 그리고 다른 국가에 대한 편향됨이 없는 완전한 통상권이 코리아에 부여되어야 한다.
5. 코리아의 통화는 국제적인 교환 원칙에 입각해서 안정되어야 한다.
6. 미군은 미소 양국의 점령군이 동시에 철수할 때까지 코리아의 남쪽에 주둔해야 한다.
해리스는 칼튼 회의를 마친 뒤 백악관 비서실에 서한을 발송해 이승만이 전한 한국 상황을 트루먼 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해리 S. 트루먼은 에드윈 A. 로크 장관으로부터 이 서한을 전달받은 뒤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국무장관 제임스 F. 번즈에게 전화해 즉시 실행가능한 일이 무엇인지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또 얼 갓윈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에게 "코리아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하며 실행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해리스는 1947년 1월 공화당이 상원의 다수당이 되자 피터 마샬 목사에게 상원 원목직을 물려줬지만 한국 관련 활동을 지속했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에 군사적, 경제적 원조를 제공할 것을 골자로 하는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다음날 트루먼에게 감사 편지를 보내면서 "코리아는 그리스와 비슷하게 전략적으루 중요한 위치에 있으므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남쪽의 코리아와 북쪽의 코리아가 연합하여 통일을 이루어 독립적인 정부를 세우는 데 후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한편 해리스는 1947년 3월 13일 파운드리 교회에서 발행하는 <파운드리 펙츠>에 "KOREA"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두 면에 걸쳐 게재된 이 글에서, 해리스는 코리아의 역사와 지정학적 위치, 국제적으로 중요한 의미에 대해 서술하고 이승만의 역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오래 전에 영국의 아이들은 '러시아인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가질 수는 없다'라고 끝나는 노래를 배운 적이 있다. 이젠 '러시아인들이 코리아를 가질 수는 없다.'라고 끝나는 노래를 부를 때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가져야만 한다."라고 주장했다.
해리스의 글은 감리교회 교인들뿐 아니라 워싱턴 D.C. 정가의 여러 정치인들에게 보내졌다. 그 중에는 트루먼 대통령과 반텐버그 상원의장도 있었다. 또한 해리스는 3월 20일 <파운드리 펙츠>를 트루먼 대통령에게 발송하면서 코리아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트루먼은 3월 24일 해리스에게 답신을 보내 해리스의 글을 읽은 소감을 밝히고 "한국과 모든 곳에 민주적인 방식의 삶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일합시다."라고 밝혔다.
해리스는 이승만과 함께 전 OSS 지휘관 M.P. 굿펠로우를 한국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승만은 트루먼에게 굿펠로우를 코리아 대사로 파견해달라고 제안했고, 해리스는 미군정 고등판무관으로 삼을 것을 건의했다. 이후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정식으로 수립되었을 때, 해리스는 대통령 취임식에 초청될 미국인 중 한 명으로 지명받았다. 그리고 1950년 3월 1일, 대한민국 정부는 독립선언 31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한국독립촉성에 관한 공로를 기리며 해리스에게 태극훈장[2]을 수여했다.
2.4. 6.25 전쟁과 전후 시기 한국 지원 활동
1950년 5월 23일, 해리스는 트루먼에게 이승만 대통령을 미국에 공식 초청할 것을 제안하는 내용의 서한을 발송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이승만을 국빈으로 초청하고 싶지만 당면한 국제정세 속에서 세계의 모든 정상들을 초청하는 것은 가능하고, 특히 한국의 선거를 앞두고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며, 자신은 한국의 상황에 대단히 긴밀한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잘 해결될 것이라고 답변했다.그로부터 한달 뒤 6.25 전쟁이 발발하자, 해리스는 한국과 이승만 관련 비방에 대해 반박하는 글을 기고했고, 한국을 옹호하는 글을 미국의 대통령에게 소개하며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호소했다. 그는 8월 18일 트루먼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을 구하기 위한 신속한 파병 결정을 내려줘사 감사하다고 밝히면서 토인비의 저술을 인용해 "훗날 20세기의 가장 중대한 결정이었다고 회고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당신의 편지에 대해 무척 감사하며, 토인비의 글들에 익숙하고, 토인비는 훌륭한 역사적 안목을 소유하고 있다."고 답변했다.
이후 해리스는 한국 지원에 앞장섰다. 1950년 10월 1일에 파운드리교회에서 전쟁의 포화로 고통받고 있는 한국을 위해 기도할 것을 제안하고, 현금으로 모인 300달러를 한국 정부에 기부했다. 그리고 1951년에 특별 부활절 헌금 1,550달러를 전달했으며, 그해 10월에는 윌리엄 E. 쇼 선교사를 통해 360달러를 한국에 기부하면서 그 중 100달러는 전쟁 중 피해를 입은 한 살배기 아기를 위해 사용해 달라고 특별히 부탁했다. 또 1951년과 1953년에는 방한용품을 모아서 파운드리교회 전 부목사이자 당시 주한미군 군종 목사 랄프 존을 통해 후원했다.
이시기 파운드리교회에서는 약 40여 명의 한인들이 김태묵 목사를 중심으로 매주 오후에 한국을 돕는 일에 힘을 기울였으며, 이 모임이 주축이 되어 1951년 10월 14일부터 워싱턴 D.C. 지역 최초의 한인교회가 설립되었다. 해리스는 이들의 활동 역시 후원해줬고, 아울러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레이몬트 T. 모이어 장관은 해리스에게 한국에 대한 원조 프로그램에 관해 상의했고, 해리스는 모이어에게 이승만과 자신의 교분, 그리고 한국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고자 했던 이승만의 강한 애국심과 굽힐 줄 모르는 결단력 등에 관해 설명했다.
해리스는 6.25 전쟁이 끝난 후에도 한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56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 특사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유엔군 사령관 렘니처와 만나 대한경제원조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8월 25일에 경무대에서 이승만과 대면한 뒤 한국의 재건 상황을 시찰했다. 그는 한국에서 충현영아원, 혜명보육원, 냉천동 감리교 총본부, 이태원동 후생주택, 경기여자고등학교, 덕수초등학교, 대한민국 육군본부교회, 육군사관학교, 진해 해군기지, 이충무공유적지, 그리고 경주 불국사 등지를 방문했고, 유엔가입추진대회에도 이승만 대통령 부부와 함께 참석했다. 또한 중앙소년직업학교 기숙사를 둘러본 뒤 미국 대외식량구호단체 사무실을 방문해 구호품을 전달하는 행사를 갖기도 했다.
1956년 8월 31일, 해리스는 한미 양국의 문화 향상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서울대학교 윤일선 총장으로부터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부인 헬렌 해리스 여사 역시 국제친선과 한국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리스 부부는 9월 2일 조정환 외무부장관 서리, 김일환 상공부장관, 임명직 유엔 상임대사, 오재경 공보실장 등의 환송을 받으면서 여의도 공항을 떠나 렘니처 유엔군사령관 전용기를 타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1958년 1월 미국 정부가 대한원조규모를 축소하려 하자, 이승만은 해리스에게 서한을 보내 이를 막는 데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 이후에도 이승만은 미국과 마찰을 빛을 때마다 해리스에게 서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호소했고, 해리스는 그때마다 이승만과 미국 정부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개인적으로 이승만을 매우 좋아했고, 한국에서 일하게 된 동료 목사에게 " 이승만이 모든 곳에서 한국의 조지 워싱턴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1960년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대통령 직책에서 물러났지만, 해리스는 이승만을 "독재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고결한 인격의 자유애호가"라고 옹호했다. 그는 4월 22일 워싱턴 D.C. 컨스티튜션 홀에서 열린 '제69회 미국 애국 여성회' 대륙의회 폐회연설에서 " 북한의 공산진영에서 지금 남한에서 일어난 봉기에 대해 큰 박수를 보내는지 주의깊게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지금 공산주의자들이 주목하고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로 이승만이며, 그는 한국과 미국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밝혔다.
해리스는 이승만이 하와이로 망명하자 하와이를 방문해 이승만 부부와 재회했고, 이후로는 한국에 대한 지원 활동을 중단했다. 그 후 여생을 뉴욕에서 보내던 그는 1970년 8월 18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