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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colbgcolor=#fe0000> 창설일 | 1924년 6월 16일 | |||||
해체일 | 1947년 12월 25일 | |||||
소속 | 중국국민당 | |||||
규모 | 약 430만명 | |||||
사령 |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 |||||
참전 |
광저우 상단 사건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 국민혁명 반장전쟁 중국-소련 분쟁 중일전쟁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바이타그 보그드 전투 |
|||||
위치 | 중화민국 충칭시 |
[clearfix]
1. 개요
중국국민당의 당군. 중국 대륙에서 활개치던 군벌에 대항하여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중국국민당이 창설했다. 국민혁명군은 삼민주의 사상으로 무장하고 제1차 국공합작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장제스에 의해 조직 구조가 다듬어졌는데, 당시 중국을 자기 편으로 만들어 국제적인 고립을 뚫으려던 소련의 지원으로 황푸군관학교가 세워졌고, 여기서 배출된 군관들이 국민혁명군의 기둥이 된다. 장제스는 이 자원들로 북벌을 개시했고, 4.12 상하이 쿠데타와 영한합작으로 우파가 주도권을 잡고 독자적으로 북벌을 개시, 중국 전역의 군벌들을 정리하고 명목상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1947년 중화민국 국군으로 개편되기 전까지 중국의 정규군 역할을 수행했다. 정당의 명칭 때문에 당군임에도 불구하고 '국민군', '국부군‘, ’국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국민혁명군의 통수권은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있었으며 이 조직의 수장은 위원장(委員長)이다. 장제스 이외의 다른 사람이 이 자리를 차지한 적은 없었고, 그는 결국 이 자리를 놓지 않음으로써 국민정부의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국부군 계급상으로도 그는 최고위 계급인 특급상장(特級上將)을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장개석 총통으로 알려져 있지만 총통직이 신설된 것은 헌정이 실시된 1948년 5월 20일부터로 장제스는 총통 자리에 앉은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국공내전의 패전으로 대륙을 떠나 대만으로 갔기 때문에 이 시절을 기억하는 중국 대륙의 노년층에게 장제스를 대표하는 직책은 위원장이다. 영문 자료에서 그를 Generalissimo라고 칭하는 것도 이 때문.
수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소련, 독일, 일본, 이탈리아를 이러 세계 5위, 연합국에서는 미국, 소련을 이어 3위의 군사력을 지닌 강군이었으나, 결국 여러 한계로 중일전쟁 당시 큰 피해를 입은 뒤 국공내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며 무너졌다.[2] 각종 오해와 편견, 그리고 공산화 이후 중국의 프로파간다 때문에 부패하고 무능하기만 했던 군대라는 평판이 널리 퍼졌지만, 최근 들어 군벌들을 정리하며 혼란했던 중국 대륙을 진정시키고, 중일전쟁에서 분투하며 얻은 승리가 재조명되어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2. 역사
1924년 6월 16일에 소련의 원조를 수용한 혁명군의 창설에 쑨원이 동의하며 창설되었다. 이후 장제스의 북벌 이후 통일 중화민국의 정규 무력으로 등극한다.설립 당시 육군과 해군으로 구성돼 있었으나 1946년 6월에 공군이 육해군처럼 총사령부를 구축하였다. 청나라 시절에 꽤 장대했던 북양해군은 청일전쟁의 여파로 주력함들이 대부분 소멸되었으며, 광서, 선통 연간에 최후의 군비 확충 시도가 있었으나 신해혁명 이후로는 증강이 중단된 상태로 군벌 혼전에 휘말려 소모되거나 만주사변 이후 아예 일본에 투항하는 등 의미 없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고 국민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군비 배분에서 최후순위로 밀려 경순양함 2척을 진수하는게 고작이었다. 이렇게 영세했던 국민혁명군 해군은 중일전쟁 직후에 장인 해전에서 그나마 남은 주력함들도 모조리 소멸하면서 종전시까지 일본 해군에 의해 씨가 말라서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고, 공군 역시 해군보단 규모가 컸지만 일본 육 해군의 항공 대에 크게 밀렸다.[3]
2차 국공내전 중인 1947년 12월 25일에 중화민국 헌법이 시행되면서 " 중화민국 국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국민당의 당군이 아닌 중화민국의 정규군이 되었다.
중일전쟁과 2차 세계대전 당시 정보기관으로는 남의사, CC단이 있었다.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중국군 출신의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국민혁명군 출신이다. 장준하도 일본 육군에서 탈영한 뒤에 국민혁명군 준위로 일했다. 그리고 광복군으로 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및 해방 후 대한민국 국군에서 모두 장성으로 활약했던 김홍일 최용덕도 국민혁명군 출신이다. 국부군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은 해방후 한국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 많이 복무했다.
장제스의 북벌 이후 국부군의 장비 중 중앙군 87사단과 88사단을 비롯한 정예교도사단등의 장비는 전간기의 국가방위군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이 사용하던 장비를 받아다 썼다. 국부군은 1차 국공내전으로 인한 소련 고문단의 추방 이후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을 초빙하고 텅스텐을 비롯한 광물과 독일제 군품을 거래하면서 대대적으로 독일제 군수품을 수입했기 때문이다.[4] 북벌 완료와 독일 재무장 선언 이후부터 1938년 중독관계 악화로 인한 독일의 금수 조치 때까지 수입한 독일제 무기는 전쟁 이전에 20개 사단을 무장시키기 충분했고 전쟁 이후에는 10개 사단을 추가로 독일제 무기로 무장시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중일전쟁 초기 장제스의 직속 부대는 슈탈헬름과 독일제 방독면, Gew98의 라이센스 버전인 24식 보총, 게베어 1888의 라이센스 버전인 한양 88식 보총 같은 독일제 장비 및 화기로 무장하였다. 완제품 수입 뿐만 아니라 Kar98k 소총과 MG08 기관총 같은 화기는 중국 내에서 독일제 설비를 수입해 자체생산해 신해혁명 이후 지리멸렬하던 보급체계 일원화도 시도했다.[5] 전차와 같은 기갑장비도 Sd.Kfz. 221, 222, 223을 "하오쑤"라는 이름으로 수입해오고 이밖에도 1호 전차와 같은 독일제를 사용한 바가 있다. 독일제 무기로 무장하고 독일 군사고문단이 재훈련시킨 30개의 중앙군 사단은 200만 중국군에서 유일하게 일본 육군의 전투력에 대항할만한 전력이었다.[6] 이들의 전투력은 청나라군이나 북양정부군의 형편없는 전과에 익숙해져 있던 일본군에 적잖은 충격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 제2차 상하이 사변에서 국부군의 주력인 중앙군 대다수가 소모되어 버린 탓에 무기 표준화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퇴색된다. 설상가상으로 독일도 1938년부터 군수품 판매를 중단하고 일본과 방공조약을 체결하면서 국민혁명군은 항일전쟁 중단 위기에 몰리게 된다. 대신 소련이 중소불가침조약과 국공합작을 대가로 572기의 전투기,폭격기 322대를 포함한 985대의 항공기,소총 5만정,포병장비 1,317문, 전차 82대,차량 1,550대,탄약 1억 6450만발, 포탄 190만발, 대전차포 50문,항공유를 2억 5천만 달러 상당의 차관까지 함께 쥐어주면서 숨을 돌린다.[7] 중일전쟁 중 중소의 밀월관계는 독소전쟁 발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스탈린 정권이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고문단을 철수시키며 중단된다. 소련의 원조가 지속되는 동안 소련제 무기와 군사원조는 중국의 항일전쟁 노력을 지탱했다. 국민혁명군에 대한 소련의 원조 재개는 독일이 무기 수출을 중단한 이후부터 독소전쟁 발발 이전 사이의 기간 동안 사실상 유일한 무기 출처가 되어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국민혁명군은 소련의 원조로 상하이와 난징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에서 빠르게 회복하고 전쟁을 지속했을 뿐만 아니라 대반격 시도까지 벌일 수 있었다. 우한까지 함락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1939년 동계공세작전 등의 반격은 이러한 소련과의 관계 개선 없이는 불가능했다. #
중일전쟁 후반에 가면 남아있던 독일제 장비, 국공합작 대가로 독소전 직전까지 계속 공급된 소련제 장비들과 공여받은 리-엔필드 나 브로디 헬멧 같은 영국제 장비[8], 스프링필드 M1903, M1 카빈, 톰슨 기관단총 등의 미국제 장비, 노획한 일본군 장비가 짬뽕되어 있었으며, 이 지리멸렬한 장비들에 부실한 보급체계, 전혀 개선되지 않은 지휘관들의 무능, 부패와 그에 말미암은 사기 저하까지 더해져서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의 인민해방군에게 대패하는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사실 항전 초기에는 독일제 무기와 장비,항전 중반부터 독소전쟁 발발 때까지는 소련제 무기와 장비,독소전쟁 이후에는 미영이 원조해준 장비로 나름대로 일원화를 시도했지만 무기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일괄적으로 도태시키지 못하고 혼재되어 쓰인 면도 있다.
육군과 공군의 군복으로 중산복 형태의 옷을 사용하였다. 일본의 국민복과 비슷하게 윗주머니 2개, 아랫 주머니 2개, 단추 5개에 옷깃이 세워져 있는게 특징이다. 전간기 소련군을 모방한 탓에 북양정부군 시절과는 다르게 견장이 없고 카라장으로 계급을 구분한다. 복장으로 소속을 대강 알 수 있었는데, 장제스 위원장이 직접 거느린 중앙군은 여름엔 연두색[9], 봄/가을엔 카키색, 겨울엔 청회색으로 계절마다 색상이 다르며 전쟁이 진행되며 다른 계절의 모자 따위를 섞어서 착용하는 경우도 있으나, 국민당군에 편입된 팔로군 등 군벌들이 거느린 지방군은 거의 일괄적으로 청회색 군복을 착용했다. 거기에 중앙군은 슈탈헬름을 사용하였고 지방군은 브로디 헬멧, 운남의 경우 아드리엔 헬멧을 사용하였다. 전반적으로 청회색 군복에 오스트리아식 야전모를 쓰니 이쪽에 대해서도 아는 밀덕들은 1차대전기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상당히 비슷하게보인다.
군의 편제와 무장을 모두 통일하는 사업은 편견회의 이래로 계속 시도된 일이었지만 각 지방의 군벌들의 반란으로 계속 이뤄지지 못하다가 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겨우 시작되었지만 30개 사단을 정비하는 데에 그치고 중일전쟁으로 중단되어 전국의 군대를 통일적으로 정비하는 일을 끝내 이뤄지지 못하여 각 지방마다 군복과 무장이 중구난방이었다. 가령 군복 색깔의 경우 중일전쟁 시기 장제스 휘하 중앙군 중 독일식 사단은 상술한 하복/춘추복/동복을 모두 지급받아 계절마다 다른 군복을 입었던 반면, 나머지 중앙군은 그냥 북벌 시절의 군복을 받아 쓰거나, 간혹 신규 피복을 받아도 부분적으로 지급받아 완벽하게 깔맞춤이 안되는 경우가 허다했다.[10] 그나마 슈탈헬름이나 군장, 탄입대 같은 독일식 보병장비는 통일을 해 줬으나 중앙군보다 넘사벽으로 규모가 큰
본토의 중화인민공화국이 2015년 9월 3일[13] 인민해방군의 대규모 군사퍼레이드를 계획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14] 중화민국에서는 예비역과 국민당 원로 출신들을 중심으로 중화민국도 군사퍼레이드를 통해 중일전쟁 승리에 관한 중화민국 정부의 역사상 정통성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만 국방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 대신 중화민국 정부는 7월 4일 신주(新竹) 근교의 연병장에서 2차대전 승리 70주년 행사를 거행하고, 국부군 출신 참전용사들을 초청, 국민혁명군 육군 지방군 군복[15]을 지급해 행렬에 포함시켰다. 한국으로 치자면 국군의 날 행사를 서울 중심지에서의 시가행진이 아닌, 계룡대에서 거행한 것과 비슷하다. 중일전쟁에서 일본과 맞서 싸운 중화민국의 주력이 양적, 질적으로 모두 국민혁명군었음을 생각할 때, 중화민국 정부에게는 정말 씁쓸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 시절은 아직 중국 정체성을 버리지 않은 국민당이 여당으로 집권하던 시기였다.
3. 계급
이 항목은 1948년 1월 1일 이전의 중화민국의 군대. 국민혁명군의 계급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중화민국의 국방을 담당하는 중화민국 국군의 계급에 대해 알고 싶으시면 중화민국 국군/계급을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
- 국민혁명군 계급장
구분 |
국민혁명군 계급 |
장관(将官) |
특급상장(特級上將) |
일급 상장(一級上將) 이급 상장(二級上將) |
|
중장(中將) |
|
소장(少將) |
|
교관( 校官) |
상교(上校) |
중교(中校) |
|
소교(少校) |
|
위관(尉官) |
상위(上尉) |
중위(中尉) |
|
소위(小尉) |
|
준군관 (准軍官) |
준위(准尉) |
사관 (士官) |
상사(上士) |
중사(中士) |
|
하사(下士) |
|
사병(士兵) |
상등병(上等兵) |
일등병(一等兵) |
|
이등병(二等兵) |
국민혁명군 계급장
병과가 표현된 계급장 일람 - 바탕의 색은 병과를 구분하는 것으로, 빨간색은 보병, 노란색은 기병, 푸른색은 포병, 흰색은 공병, 연두색은 의무, 검은색은 군수이다. 따라서 상단의 계급장 표는 모두 보병 병과인 셈. 북양정부 시절 중국군과는 달리 견장을 폐지하고 카라장만 남겨놓았다. 봉건주의의 상징이라며 계급 제도를 폐지하고 견장을 제복에서 제거한 러시아 내전기 붉은 군대의 영향이다. 공산군이 1950년대까지 계급이 없었던 걸로 유명하지만 사실 분화되기 이전 국민혁명군도 1929년 이전까지 혁명기 구소련군의 영향으로 계급이 없었다. 1924년 창군 이후 쭉 구소련의 선례를 따르다가 장제스의 북벌 이후 1929년 편견 회의 당시 계급제를 재도입했지만 견장은 부활시키지 않았다.
국민혁명군 장교 대례복 계급장[16] |
3.1. 해군 계급
전반적으로 협력 관계였던 독일 국방군의 전쟁해군 체제를 따라갔다. 상교에서 소장으로 바로 넘어가는 육군과는 달리 상교와 소장사이에 대장이란 계급이 있는것 부터 해서...장교: 특급상장- 1급상장- 2급상장- 중장- 소장- 대장- 상교- 중교- 소교- 상위-중위-소위-준위
4. 육군의 편제
- 제9군단 : 제3사단, 제166사단, 제253사단
- 제10군단 : 제28사단, 제29사단, 제30사단
- 제17군단 : 제12사단, 제17사단, 제48사단, 제84사단
- 제18군단 : 제11사단, 제14사단, 제43사단, 제59사단
- 제33군단 : 제25사단, 제36사단, 제280사단
- 제52군단 : 제2사단, 제25사단, 제195사단
- 제53군단 : 제116사단, 제130사단, 제30사단
- 제60군단 : 제21사단, 제52사단, 제182사단
- 제66군단 : 제66사단, 제185사단, 제199사단
- 제71군단 : 제87사단, 제88사단, 제36사단
- 제73군단 : 제15사단, 제77사단, 제316사단
- 제74군단 : 제51사단, 제57사단, 제58사단
- 제89군단 : 제91사단, 제103사단, 제147보병사단
1937년 기준 국부군 사단 편제 출처
- 사단 사령부
- 참모처(參謀處)
- 부관처(副官處)
- 군계처(軍械處)
- 군수처(軍需處)
- 군법처(軍法處)
- 2개 보병여단
- 보병연대 3개(3개보병대대)
- 보병중대 3개(3개보병소대)와 기관총 중대
- 박격포중대
- 통신소대
- 수송소대
- 후송소대
- 기병중대(4개 소대)
- 기병소대(2개 분대)
- 포병대대(3개중대)
- 포병중대(3개소대)
- 포병소대(2개분대)
- 통신소대
- 수송소대
- 탄약대
- 공병대대
- 특무대대
- 야전병원
- 통신대
- 정비대
사단 공용화기: 경기관총 274정, 중기관총 54정, 경박격포 243문, 박격포 30문, 산포/야포 16문
동북역치로 장제스의 북벌이 끝난 1929년 기준 국민혁명군은 4개 집단군 예하 84개 군[17] 272개 사단 18개 여단 21개 독립연대로 추산되는 막대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랜 내전으로 급하게 임시방편으로 창설된 사단들이 태반이라 3개 보병연대를 지닌 사단이나 6개 보병연대를 지닌 사단도 있을 만큼 국부군의 사단 편제는 통일되어있지는 않았다. 사단의 주력 포병장비는 75mm 산포로 일본군에 비해 화력 열세를 지니고 있었고 야포도 없이 박격포만 가지고 있었던 사단들도 즐비했다. 그나마 북벌 당시에는 여러 부대에 잡다하게 분산되어있던 박격포는 전간기를 거치면서 일괄적으로 보병대대 예하 박격포 소대에 배속시키고 산포는 사단 포병대대에 배속시키는 조치로 화력 증가와 효율적인 운용을 꾀했다. 참조
장제스 직속 사단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앙군 사단들도 개편 계획 당시에는 4개 보병연대에 1개 포병연대를 갖출 계획에도 불구하고 사단 직속 포병은 1개 연대가 아니라 75mm 산포나 야포 1개 대대 수준이었으며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군단 단위 지원 포병부대도 약간의 독일제 15 cm sFH 18 곡사포나 후에 소련에게 원조를 받은 122mm 곡사포 수십 문을 장비하고 있을 정도로 화력이 열세했다. 가장 장비와 인원을 충실하게 갖춘 보병사단들도 4개 보병연대를 갖춘 4각 편제임에도 예하 제대 규모가 작아 9천명 이하의 인원만 편제되어 있는 등 사단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창군된 국민혁명 시기부터 러시아 내전 당시 붉은 군대의 사단 편제를 모방해 창설되었기 때문이다.
편제 목록
4.1. 팔로군
자세한 내용은 팔로군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신사군
자세한 내용은 신사군 문서 참고하십시오.5. 국민혁명군의 인물
5.1. 주요인물
- 장제스
- 옌시산
- 펑위샹
- 장쉐량
- 리쭝런
- 바이충시
- 허잉친
- 천청
- 후쭝난
- 탕언보
- 다이리
- 다이지타오
- 랴오중카이
- 쉐웨
- 순리런
- 루디핑
- 류샹
- 양썬
- 한푸쥐
- 주페이더
- 스여우싼
- 쑹저위안
- 친더춘
- 장자충
- 성스차이
- 장샤오셴
- 슝스후이
- 마치(1869)
- 마린(1873)
- 마부팡
- 마훙쿠이
- 마중잉
- 위한머우
- 리한훈
- 두위밍
5.2. 한국인
5.3. 공산당으로 전향한 인물
5.3.1. 국공내전 이전
5.3.2. 국공내전 이후
6. 국민혁명군의 장비
6.1. 보병 장비
6.2. 기갑 차량
제2차 세계 대전의 중화민국 기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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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및
제2차 세계 대전 국민혁명군의 기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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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 경전차 | <colbgcolor=#fefefe,#393b42> 르노 FT, NC-31, 카든 로이드 Mk.VI, 빅커스 6톤 전차, 빅커스 6톤 전차 F형, 카든 로이드 M1931, 1호 전차, CV-33, CV-35, 97식 전차 치하 | |||
렌드리스 전차 | M3A3, M5A1 스튜어트, M4A3, M4A4, M8 그레이하운드, LVT(A)(4) 아식 구돈반전차, BT-5 유니버설 캐리어 | ||||
장갑차 | 차륜 장갑차 | Sdkfz221, Sdkfz222, BA-10, BA-3/6, FAI, ADGZ | |||
정찰 및 수송, 견인차량 | M3 하프트랙, CCKW, M3A1 스카웃 카, 르노 UE (Chi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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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러보기 : 중화민국의 운용장비 | 대전기 기갑차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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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시기의 국민혁명군 기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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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내전 국민혁명군의 기갑장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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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 경전차 | <colbgcolor=#fefefe,#393b42> 94식 경장갑차 TK, L3/35, 아식 구돈반전차, M3A3 스튜어트, M5A1 스튜어트 | |
중형전차 | 치하, 치하 지휘차형, 치하 개량형, M4A1, M4A2, M4A3, M4A4 | ||
자주포 | 제8식 75포 전차, M10 105호미 자행곡사포, 94식 75mm 산포 탑재 치하 | ||
장갑차 | 91식 소모, LVT(A)(4), LVT (4), M8 그레이하운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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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 기갑차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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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함선
중일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의 국민혁명군 군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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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정 | <colbgcolor=#fefefe,#191919>이싱급, 하이옌급, 하이쿠급, 하이푸급, 하이하오급, 순싱급, 하이힝급 | ||
수뢰정 | 후핑급* | |||
호위함 | 하이차우급* | |||
해방함 | 융펑급, 융젠급 | |||
구축함 | 푸포급, 장펑급 | |||
비방호순양함 | 퉁치급 | |||
방호순양함 | 하이룽급, 하이치급, 자오허급 | |||
경순양함 | 이셴, 닝하이급 | |||
수상기모함 | 전하이, 웨이성, 더성 | |||
연습함 | 페이훙, 잉루이 | |||
건보트 |
전웨이급, 장위안급, 추급, 롄칭급, 우펑급,
융펑급, 융젠급, 시엔닝급, 융수이급, 밍천급,
이셴, 후유급*, 밍센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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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트 (하천용) |
지앙쿵급, 장히시급, 전충급, 리수이*, 충윤급, 천유급, 차이위급, 잉선*, 잉터*, 잉하오*, 메이위안급* | |||
(*) 표기: 해외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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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항공병기
중일전쟁 ~ 제2차 세계 대전의 국민혁명군 항공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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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 복엽기 | CR.30, CR.32, 호크 III, I-15bis, I-153, 충-28을, 글래디에이터 mk.1, 블랙번 린콕 | ||
단엽기 |
드와틴 D.510,
I-16 5식, I-16 10식, I-16 17식, 충-28갑,
P-26 피슈터,
Ki-36c,
Ki-43c,
A6Mc,
Ki-61c, P-66 뱅가드, P-40C, P-40E-1, P-51 머스탱 |
||||
지원기 | 경폭격기/급강하폭격기 | DH-98 모스키토, Ki-48c, 마틴 B-10, 커티스 A-12 슈라이크, Hs 123 | |||
中폭격기 | He 111, DB-3, SB-2, 브리스톨 봄베이 | ||||
重폭격기 | TB-3, P1Yc, B-17, B-24 | ||||
공격기 | 벌티 V-11, 벌티 V-12D | ||||
프로토타입 | 훈련기 |
XT-1 연교일식/옌차오이쉬(研教一式) XT-2 연교이식/옌차오알쉬(研教二式) XT-3 연교삼식/옌차오산쉬(研教三式) |
|||
전투기 |
XP-0 연구영식/옌추이링쉬(研驅零式/研驱零式) XP-1 연구일식/옌추이이쉬(研驅一式/研驱一式) |
||||
수송기 | C-0101 중운일호/중윤이하오(中運一號/中运一号) | ||||
폭격기 | XB-3 연굉-3/옌홍-3(研轰-3) | ||||
기타 | UC-43, C-45 Expeditor | ||||
플라잉 타이거즈 운용기체 |
P-40 워호크 | ||||
소비에트 의용군 운용기체 |
전투기 | I-15bis, I-153, I-16 | |||
폭격기 | TB-3, 투폴레프 SB | ||||
윗첨자c: 노획 기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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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국민혁명군이 참전한 전쟁, 전투 목록
- 광저우 상단 사건(1924)
- 국민당의 1차 동정(1925)
- 1925년 객군 반란(1925)
- 국민당의 2차 동정(1925)
- 국민당의 1차 북벌(1926~1927)
- 4.12 상하이 쿠데타(1927)
- 마일사변(1927)
- 난창 폭동 진압(1927)
- 추수폭동 진압(1927)
- 광저우 폭동 진압(1927)
- 국민당의 2차 북벌(1928)
- 제남 사건(1928)
- 창사 폭동 진압(1930)
- 제1차 초공작전(1930~1931)
- 제2차 초공작전(1931)
- 제3차 초공작전(1931)
- 1차 양광사변(1931)
- 만주사변(1931)
- 제1차 상하이 사변(1932)
- 제4차 초공작전(1932~1933)
- 열하사변(1932~1933)
- 제5차 초공작전(1933~1934)
- 복건사변(1933)
- 대장정 추격(1934~1936)
- 2차 양광사변(1936)
- 중일전쟁(1937~1945)
- 태평양 전쟁(1941~1945)
- 국공내전(1946~1949)
[한어병음]
guó mín gé mìng jūn / 궈민거밍쥔
[2]
일부는 타이완 섬으로 도주해 대만군이 되었다.
[3]
제로기 등장 이전까지만 해도 소련이 제공한 항공기와 일본이 중일전쟁에서 사용한 항공기의 성능은 대동소이했기에 소련제 폭격기가
일본령 대만의 쑹산 비행장까지 날아가서 40여기의 항공기를 파괴하거나 중국 상공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일본군에 적잖은 피해를 입히는 등의 전공은 있었다.
[4]
독일을 경계한
대영제국이 텅스텐과 안티몬의 수출을 제약하자 히틀러 정권은 당시 세계 텅스텐과 안티몬,희토류 생산의 2/3을 차지하던 중국과 우호관계를 구축하려고 했다.
[5]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 스토크블랑식 81mm 박격포를 수입해 국산화하고, 심지어 잠재 적국이었던 일본의 75mm
41식 산포도 수입하긴 했다. 체코슬로바키아제
Vz.26 경기관총은 북양정부 시절부터 중국에서 자체 생산되었다.
[6]
다만 이들조차도 30개 사단 가운데, 그럭저럭 편제 장비를 갖춘 8개 사에 한정해도 중국 자체적으로 3개 개편사(중국의 사단급 편제)는 있어야 일본군 완편 1개 사단에 맞설 수 있다고 봤었다.
[7]
소련이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하면서 이때부터는 군사원조가 감소했다.
[8]
북벌 이후부터 수십만개를 수입해 지방군의 철모로 보급했던 전적이 있다.
[9]
1938년
상하이 전투 이후 폐지된다.
[10]
가령
상하이 전투당시 중앙군 최정예 사단인 87, 88사단은 전투 당시 여름이었기에 연두색 하복을 착용하였고, 중앙군 최초의 기계화사단인 200사단은 3~4월 환절기에 일어난 타이얼좡 전투에선 청회색 동복과 카키색 춘추복을 혼용했고, 겨울철에 일어난 곤륜관 전투에서는 청회색 동복을, 버마에선 하복이 폐지된 관계로 카키색 춘추복을 착용했다.
[11]
루거우차오 사건의
쑹저위안(서북군벌 출신) 휘하의 29군은 남색 군복의
장교와 하늘색이 섞여 있고, 리쭝런의 제5전구(第五战区)는 청회색인 등 당장 아무리 군벌이라지만 엄연히 중화민국 국민정부 소속인 이들도 군복 색이 통일조차 제대로 안 되었는데
팔로군 군복은 어땠을 지는 뭐 안 봐도 비디오다.
[12]
Mk.2 브로디 철모는 중앙군 일부 병력도 사용하긴 했다.
[13]
1945년 지나주둔군이 항복한 날짜. 중화민국은 1946년부터
휴일로 삼았으나 중화인민공화국은 2015년이 돼서야 휴일로 지정했다.
[14]
명목은 중일전쟁 승리 70주년 기념이라고 하지만, 최근
일본과의 갈등에 따른 무력시위 성격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5]
계절 관계상 중앙군 여름 피복이 고증에 맞으나, 중일전쟁 당시 가장 많이 보였던 군복이 청회색이었다는 점과, 중앙군 청회색 제복은 동복이라 울이 많이 포함된걸 감안한 절충안으로 보인다.
[16]
예복 계급으로는 특급상장, 일급상장, 이급상장이 확실히 구별됨을 알 수 있다.
[17]
중국군 편제에서 군은 서구식 야전군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군단급 제대다.
[18]
일본군으로부터 탈영하고나서
충칭시로 향하던 중 잠시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 한국광복군반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국부군 준위계급을 달기도 했다.
[19]
본인의 회고록 <돌베개>에서는 본인이 준위계급을 달았다고 서술했지만, 같이
충칭시로 향하던 평생의 벗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준위가 아니라 소위계급을 달았다고 나온다. 하여튼 국부군 장교신분덕분에
충칭시로 향하던 도중 잠깐 신세를 진
리쭝런 부대로부터 필요한 물자와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