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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04 10:02:29

장황사변


張黃事變
Guangzhou Incident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장파쿠이의 봉기3.2. 국민정부의 대응3.3. 광저우 폭동의 발생3.4. 광동파의 실각
4. 결과5. 여담6. 참고문헌7. 관련문서
7.1. 인물7.2. 사건7.3. 국민혁명

1. 개요

1927년 11월 17일, 월계군벌 장파쿠이와 황기상이 장제스의 복직과 광동파와 장제스의 합작에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이다. 여기에 천궁보 등 개조파가 우한 중앙을 광저우에 재건하고자 사주하였다. 장파쿠이와 황기상이 일으켰기 때문에 둘의 성을 따서 장황사변이라 하며 광저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광저우 사변이라고도 하며 계계군벌과 월계군벌 사이에 싸움이 붙었기 때문에 월계전쟁이라고도 한다.

어차피 이길 가능성도 없었지만 중국 공산당이 중간에 꼽사리 끼어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는 통에 광동파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켰다.

2. 배경

1927년 8월, 우한 국민정부와 봉천군벌의 공격을 동시에 받은 장제스는 우한과 난징의 통합을 조건으로 공직에서 사퇴하여 일본 제국으로 외유를 떠났다. 이후 계계군벌, 서산회의파, 광동파, 개조파, 친장파 등 국민당의 여러 파벌들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성립하여 영한합작을 달성하였지만 정통성 문제를 놓고 서로 다투면서 난항을 겪었다. 한편 일본으로 외유를 떠났던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송씨 가문을 자신의 배경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서산회의파로부터 배척을 받은 왕징웨이 및 서산회의파와 정통성을 다투던 광동파와 합작하여 권력에 복귀하고자 했다.

당연히 서산회의파는 이를 막기 위해 리쭝런, 바이충시 등과 합작하려 했으나 쉬충즈, 쥐정 등 서산회의파의 핵심 인물들이 일본 파견이라는 명목으로 사실상 외국으로 쫓겨나고 셰츠 등은 특위 존속에 실패하자 상하이에 은거하였으며 허잉친, 리쭝런, 바이충시 등도 탕성즈 토벌이나 봉천군벌을 상대하기도 바쁜데 명망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원로들을 위해서 장제스에게 개길 생각따윈 추호도 없었다.

이러한 유리한 정황을 바탕으로 장제스는 은거하겠다는 공약을 번복하고 특별위원회 취소를 요구하는 한편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광동파 리지선 등과 함께 회동하여 정치위원회, 중앙당부를 회복하고 특별위원회의 직권을 정지시키자고 합의하였다. 그런데 광동파의 일원이지만 일찍이 장제스에 반대하여 탕성즈와 함께 난징 공격에 참여하기도 했던 장파쿠이는 광동파와 장제스의 합작에 강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여기에 개조파 천궁보는 광저우에서 리지선과 황샤오훙의 세력을 완전히 제거하여 새로운 중앙당부를 설립하고자 했다.

3. 전개

3.1. 장파쿠이의 봉기

난창 폭동을 진압했던 장파쿠이의 부대는 9월에 강서성을 출발하여 광저우에 도착했다. 허나 배경 단락에서 전술했듯이 광동파의 분위기는 서산회의파에 맞서 장제스와 합작하자는 것이었고 장파쿠이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11월 16일, 리지선과 왕징웨이가 장제스와 회동하기 위해 광저우를 떠나자 장파쿠이는 11월 17일, 황기상과 함께 광저우에서 봉기하여 리지선과 황샤오훙의 부대를 광저우에서 축출했으니 이것이 바로 장황사변이다. 이들은 2방면군장 황기상, 제5군장 리푸린, 총정치부장 천궁보의 연명으로 거사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광저우 장악 직후 허샹닝, 구멍위, 천궁보, 진수인, 왕락평, 간나이광, 리푸린 등의 명의로 상하이의 중앙위원 장제스, 왕징웨이, 탄옌카이에게 거사설명 전문을 보냈다.

11월 18일, 쿠데타 세력은 광저우 정치분회 명의로 장파쿠이를 광저우 군사위원회 주석에, 구멍위를 광저우 정치분회 주석으로, 천궁보를 대리 광동성장에 임명했다. 이는 특별위원회를 사중전회로 대체하려는 합작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우징헝은 이 사건이 공산당원들이 참여해서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피해 당사자 리지선은 즉각 공산당과 관계를 가지고 사변을 일으킨 문제의 중앙집행위원들의 사중전회 출석 자격 정지를 요구했다. 입지가 좁아진 왕징웨이는 자신이 평화보구책(補救策)을 주장했으나 장파쿠이와 천궁보가 말을 듣지 않았다고 변명했다.

리지선, 황샤오훙, 천밍수의 부대가 광저우 탈환을 위해 접근해와 리지선과 황샤오훙이 오주에 집결했다. 장파쿠이와 황기상은 광저우 정권의 기반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모든 부대를 조경과 오주로 집결시켜 황샤오훙을 먼저 상대하고 그 다음에 천밍수를 격퇴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대부분의 부대를 광저우에서 철수시켰다.

3.2. 국민정부의 대응

장황사변에 광동파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고 광동파의 입지는 상당히 좁아졌다. 장제스와 왕징웨이는 담화회를 소집하여 장황사변을 논의 대상에서 제외하고 12월 3일부터 12월 5일까지 열리기로 한 4중전회 예비회의에서 토론하기로 했다. 이것이 정치적 동맹인 광동파를 배려한 것임은 두말할 것 없었고 자신의 기반을 잃은 리지선과 계계군벌은 이에 대해 큰 불만을 품었다.

12월 4일의 2차 담화회에서 특위 취소가 결정된 이후 탄옌카이, 리지선, 쑨커, 리쭝런, 바이충시는 연일 회합하며 장황사변에 대해 철저히 조사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장파쿠이, 황기상 토벌을 결의하는 한편 중전회의 빠른 시일 내 소집, 광동측 위원들이 장황사변에 책임지고 하야, 중전회를 난징에서 거행, 장황사변을 무력으로 진압할 것을 요구했다. 12월 7일, 차이위안페이, 리쭝런이 왕징웨이, 구멍위, 천궁보를 정식으로 고발하며 사중전회 출석 정지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왕징웨이는 장황사변과 공산당원의 관계를 부인하고 반대파의 특위 옹호 양파의 충돌에 불과하다고 변명했다.

장제스의 조정으로 광동측 위원들은 12월 8일의 3차 담화화에 모두 출석할 수 있었다. 3차 담화회에서 왕징웨이, 천궁보 등 3인에 대한 탄핵안과 왕징웨이를 조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차이위안페이, 쑨커와 왕징웨이 사이의 격론이 벌어졌으나 일단 4중전회 소집을 결정하게 되었다. 12월 9일 왕징웨이는 천궁보, 장파쿠이에게 전문을 보내 황기상 휘하의 4군 정치부가 출간하는 간행물들이 용공적인 내용이니 황기상의 용공을 숨길 수 없다고 지적하며 그를 잠시 은퇴시키라고 지시했다. 같은날 왕징웨이는 황기상 군의 용공을 인정하고 사퇴 의사를 밝혔다.

3.3. 광저우 폭동의 발생

그런데 11월 28일 중국 공산당 광동성 위원회는 광저우에서 폭동을 일으키기로 결정, 광동성 위원회 서기 장타이레이가 지휘하는 혁명군사위원회를 수립하고 소련 영사 하시스를 비롯한 소련 기관들의 원조를 받아 12월 7일 공농병 대표대회를 소집했다. 이 정보를 알게 된 장파쿠이는 황급히 병력을 철수시켜 광저우의 치안을 확보하려 했고 공산당의 조종을 받는 예젠잉의 4군 교도단, 주문옹의 노동자 적위대, 4군 경위단 등을 해산하고 12월 10일 광저우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러자 공산당은 12월 11일 새벽 2시 광저우 폭동을 일으켰고 장파쿠이는 리지선과 일단 합작,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3일만에 폭동을 진압하고 장타이레이를 사살했지만 광동파에 대한 비난은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광저우 폭동의 자세한 전개에 대해서는 광저우 폭동 문서 참조.

폭동 진압 후 천궁보와 장파쿠이는 12월 23일 광저우를 떠나며 연명으로 광동 민중에게 고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여 자신들은 반특위, 반공을 계속하며, 당권을 옹호하고,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국민당이 농공 각 계급민중 위에 구축되어 있으므로 농민과 노동자를 옹호할 것이지만 공산당이 주장하는 계급투쟁이 아닌 모든 계급의 이익을 도모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장파쿠이는 일본으로 망명했고 천궁보는 영국령 홍콩을 거쳐 1928년 1월 4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로 인하여 우한 중앙의 법통을 인정받으려는 개조파의 움직임은 완전히 실패로 끝나고 법통은 장제스의 난징 중앙이 이어받게 되었다.

3.4. 광동파의 실각

장황사변에 이어 광저우 폭동까지 일어나자 이에 대한 단초를 제공한 것으로 비난받던 광동파 중앙위원에 대한 탄핵요구는 더욱 거세지게 되어 12월 17일 왕징웨이가 복귀를 포기하고 프랑스 외유를 떠났고 장파쿠이도 일본으로 망명했다. 심지어 간나이광 등이 거주하는 프랑스 조계지에 연락해 이들을 체포하라는 요구가 상하이 시당국에 접수되기도 했다. 광동과의 동맹을 주선하고 있던 장제스는 9명의 광동 위원들을 모조리 탄핵하라는 요구에 몹시 당혹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장제스는 간나이광, 천궁보, 왕징웨이 등 4명의 중전회 출석자격을 박탈하고 나머지 5명의 출석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을 보았으나 장런제 등은 천궁보, 간나이광 등 3명이라도 체포하지 않으면 다시는 장제스를 보지 않겠다고 강경히 나왔고 리스쩡도 장제스에게 불만을 표시했다.

또한 황소횡과 동지였던 리쭝런, 바이충시는 12월 10일 제출된 장제스 복직안에 대해서 청첸의 의사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핑계로 겉으로조차 옹호하지 않았다. 리쭝런은 그나마 1월 7일 장제스 복직을 건성으로 축하했으나 바이충시는 이조차 하지 않고 1월 9일에 장제스의 복직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사건 주모자와 연루자 처벌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리쭝런이 지나친 강경론에 동의하지 않고 휘하 장령들이 장제스에게 회유되면서 결국 광동파 처벌에 대해서는 포기하게 되었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장제스와 합작해서 연정에 참여하나 했던 왕징웨이 계열의 광동파는 우한 중앙의 정통성 인정은 고사하고 정치적으로 거세되어 집단으로 퇴갤하고 빡쳐서 반장대열에 참여하게 된다. 리지선 계열 역시 장황사변 배후에 대한 시원치 않은 처벌에 분노하여 이상하게 원인 제공자인 개조파와 손잡고 훗날 1차 양광사변을 일으킨다.

이후 장제스가 공식 복직하고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어 장쉐량이 국민정부에 합류하는 동북역치로 통일이 이루어졌지만 국민당 내부의 갈등의 씨앗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서산회의파는 개조파와 연계하여 반장전쟁을 선동하고 나섰고 장제스에게 원한이 깊어진 계계군벌도 1929년 호남 사건을 시작으로 1차 장계전쟁에 돌입해 반장전선에 섰다. 이는 1930년 중원대전에서 최고조에 달했으나 결국 모두 진압당했다.

한편 공산당은 한때 6만에 달했던 당원이 1만으로 급감하고 총서기 취추바이가 실각하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공산당은 펑파이를 중심으로 해륙풍 소비에트를 건설하여 광동성에서 무장봉기를 계속했으나 모두 진압당했고 정강산 투쟁을 통해 농촌에서 세력을 확장한 마오쩌둥만 어느 정도 건재할 뿐이었다.

5. 여담

이때 장파쿠이 밑에 있던 쉐웨가 여기에 참여했다가 나중에 광저우 폭동 진압을 맡게 되었다. 훗날 내정부장이 되는 리한훈도 장파쿠이의 부하로 참여하였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7.1. 인물

7.2. 사건

7.3. 국민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