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13 03:13:59

동 공작

1. 개요2. 배경3. 전개
3.1. 홍콩 회담3.2. 만주국 승인 요구3.3. 전영명 공작
4. 결과5. 참고 문헌

1. 개요

[ruby(桐工作, ruby=きりこうさく)]

1940년 3월 장제스와의 교섭을 통해 중일전쟁을 종결시키고자 했던 일본 육군의 외교공작. 하지만 중국에 여전히 가혹한 조건을 강요하였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오동나무 공작으로도 번역한다.
짧게 보면 9월 하순에 종결되었고 길게 보면 11월까지의 전영명 공작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어쨌거나 전영명 공작 역시 실패로 끝나면서 일본은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하고 대중 군사작전에 다시 박차를 가했다.

2. 배경

1937년 7월 7일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화민국 일본 제국은 양국의 운명을 건 중일전쟁에 돌입했다. 육군 참모부의 강경파들은 2~3개월이면 미개한 지나인들을 금방 굴복시켜 소련에 맞서기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일본군은 이기긴 했으되 전에 없이 강력한 중국군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중일전쟁은 일본이 일찍이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현역 전원이 동원되었음은 물론 전역한 지 십년이 넘어가는 예비군들까지 마구잡이로 소집되어야 하는 현실에 일본군 수뇌부까지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고 일본 정부는 외교적인 종전을 타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1937년 말부터 1938년 초까지 주중 독일대사 오스카 트라우트만이 중재자로 나서 트라우트만 공작이 행해졌지만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은 중국 측에 일본 점령지를 모두 괴뢰국으로 삼겠다는 터무니없는 요구를 강요하여 국민정부는 이를 거절하였고 고노에 내각은 이것이 중국이 일본을 업신여기는 증거라고 날뛰며 고노에 담화를 발표해 국민정부를 부정하며 말살하겠다고 천명했으며 왕징웨이를 포섭하는 왕징웨이 공작을 실시해 왕징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지만 한간들을 중심으로 수립한 왕징웨이 정권과 협상해봐야 전쟁이 종결되는 일은 없었고 왕징웨이의 유용성을 의심한 이마이 장군을 비롯한 정부와 군부의 일부 인사들은 장제스와 접촉하여 전쟁을 종결하고자 하였다.

3. 전개

3.1. 홍콩 회담

1940년 봄, 일본 육군은 장제스를 상대로 하는 동 공작을 실시하기로 결정, 3월 7일 이마이 다케오, 참모본부 8과 과장 우스이 시게키 대좌 등이 영국령 홍콩에서 홍콩 기자를 통해 충칭에서 파견된 쑹쯔량[1], 진초림 등을 소개받아 국민정부에 만주국 승인을 제시하였다. 중일 양국의 대표들이 배석한 가운데 심야 비밀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마이 대좌는 일단 쑹쯔량과의 연락관계를 구축하기로 결정하였다. 왕징웨이의 측근 저우포하이 역시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다시 한번 장왕합작을 이루어 대일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장제스와 일본의 접촉을 지원했다.

3월 14일 우스이 대좌가 참모본부에 "만주국 승인은 최후까지 옥신각신할 것이다."라고 보고했다. 우스이의 보고를 받은 육군참모총장 간인노미야 고토히토 친왕은 이타가키 세이시로 중장을 충칭에 파견하여 장제스와 직접 회담하게 하여 장제스의 투항을 권유하게 하려 했다. 그리고 9개 조건을 중국에 제시하여 중국과의 화평교섭을 실시하려 했다. 왕징웨이보다 장제스가 더 믿을만하다고 여겼던 일본 정부는 3월 26일에 거행될 예정이었던 왕징웨이 정부의 환도식을 4일 연기하고 중국측과 접촉하였다. 쑹쯔량은 장제스의 신임장을 제시했고 중국 측은 장제스, 왕징웨이, 이타가키 세이시로 사이의 3자 회담에 동의하였다.

3.2. 만주국 승인 요구

7월 하순, 우스이 대좌가 이타가키 중장을 위한 <정전기초조건>을 기초하여 훈령으로 삼았는데 이중에서 만주국 승인에 대해서 양보적인 태도를 보였다.
승인의 시기는 가능한 한 신속히 할 것을 요하여도 어쩔 수 없는 경우 협약 외의 조건으로 일본군 철수 완료 시기까지의 기간에 승인케 할 것이라는 고려를 더하도록 한다. 승인의 시기 방법 등에 관한 약속은 어쩔 수 없는 경우 비밀 또는 편법에 의하여도 무방하지만 만구국 문제에 관해서는 공식적으로 언급해둘 것을 요한다.

9월 12일, 쑹쯔량은 만주국 승인에 대해서 일본에게 양보의 여지가 있는가, 있다면 그 한도는 어느 정도인가를 물어보았다. 하지만 일본이 만주국 승인을 여전히 중요 조건으로 내걸었으며 중국이 만주국 승인을 망설이는 것은 중국 측이 성의없는 증거라 여겨 동 공작을 단순한 정보 수집 채널로 격하하면서 9월 하순에 동 공작은 실패로 끝났다.

3.3. 전영명 공작

동 공작이 실패로 끝나자 일본 정부는 교통은행 사장 전영명을 중재자로 하여 <전영명 공작>이라 불리는 새로운 화평 교섭을 실시하였다. 9월 17일 국민정부 전철도부 재무사장 장경립, 전영명의 조카 성패동이 도일하여 일본 외상 마쓰오카 요스케와 회담했다. 일본 측은 충칭과 난징의 합작, 중일 방수동맹 체결, 중국에 파병한 군대를 6개월 안에 철수시킬 것이며 중국이 필요한 천연자원을 일본에서 제공할 것을 제시했고 대신에 중국에 장강 유역의 비군사화, 만주국 승인, 화북 5성에 자치정부 수립, 일본이 점령한 모든 항구를 일본에게 조차지로 제공할 것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일본의 무리한 요구에 크게 격노하여 유일하게 가능한 정책은 대일 군사작전 뿐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국민정부는 11월 7일 선제조건으로 일본군의 전면 철병과 왕징웨이 정권의 취소를 일본 측에 요구하였고 마쓰오카는 이를 승인하여 국민정부는 전 주일대사 허세영을 일본에 파견하여 화평교섭을 실시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으나 11월 13일 어전회의는 <지나사변 처리요강>을 통과시켜 중국을 무력굴복하기로 방침을 바꿈에 따라 전영명 공작도 실패로 끝났고 11월 28일, 대본영 연락회의가 왕징웨이 탈출 2년 만에야 왕징웨이 정권 승인을 결정, 11월 30일 아베 노부유키 전 수상과 왕징웨이 사이에서 <일화 기본조약>이 체결되었다.

4. 결과

1941년 7월 나치 독일이 왕징웨이 정권을 승인했으나 왕징웨이 정권은 일본의 괴뢰국에 지나지 않았다.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 공습을 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미국을 적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5. 참고 문헌



[1] 조너선 펜비의 장제스 평전에 따르면, 쑹쯔량 본인이 아니라 다이리가 파견한 대역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