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22:10:16

리덩후이

<color=#FFFFFF>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파일:1170px-Unofficial_emblem_of_the_Republic_of_China_(1912).svg.png
임시정부
초대 제2대
쑨원 위안스카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Twelve_Symbols_national_emblem_of_China.svg.png
북양정부
초대 제2대 제3대
위안스카이 리위안훙 펑궈장
제4대 제5대 제6대
쉬스창 리위안훙 차오쿤
파일:중화민국 대원수기.png
북양정부
육해군대원수
초대
장쭤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3px-Emblem_of_Office_of_the_President_ROC.svg.png
국민정부 · 대만
제1-5대 제6-7대 제8-9대
장제스 장징궈 리덩후이
제10-11대 제12-13대 제14-15대
천수이볜 마잉주 차이잉원
삼황오제 · · · · 춘추시대 · 전국시대 · 진(秦) ·
삼국시대 · 진(晉) · 오호십육국 · 북조 · 남조 · ·
오대십국 · · 서하 · · · · · · 중화인민공화국
}}}}}}}}}


중화민국 부총통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px"
파일:1170px-Unofficial_emblem_of_the_Republic_of_China_(1912).svg.png
임시정부
초대
리위안훙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70px-Twelve_Symbols_national_emblem_of_China.svg.png
북양정부
초대 제2대
리위안훙 펑궈장
파일:대만 국장.png
국민정부
초대
리쭝런
파일:대만 국장.png
대만
제2-3대 제4-5대 제6대 제7대
천청 옌자간 셰둥민 리덩후이
제8대 제9대 제10-11대 제12대
리위안추 롄잔 뤼슈롄 샤오완창
제13대 제14대 제15대
우둔이 천젠런 라이칭더
중화민국 총통
중화인민공화국
}}}}}} ||
중화민국 제8-9대 총통
李登輝
리덩후이 | Lee Teng-hui
파일:attachment/lee_teng_hui.jpg
번체 李登輝
간체 李登辉
한국식 독음 이등휘
영문 Lee Teng-hui
일본 이름 이와사토 마사오
岩里 政男
생년월일 1923년 1월 15일([age(1923-01-15)]세)
출생지 일본제국령 대만 다이호쿠 주 산시 쇼[1]
국적 일본 제국 파일:일본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단수이 구제중학교[2] ( 졸업)
다이호쿠 구제고등학교[3] ( 졸업)
교토제국대학 ( 농업경제학 / 편입)
국립타이완대학 ( 농업경제학 / B.S.)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대학원 ( 농업경제학 / M.S.)
코넬 대학교 대학원 ( 농업경제학 / Ph.D.)
종교 장로회
본관 영정(永定) 이씨
직업 정치가
정당소속 [[중국 국민당|
중국 국민당
]] (1971~2001)
[[무소속|
무소속
]] (2001~)
총통
재임 기간
대행 1988년 1월 13일 1990년 5월 20일
8대 1990년 5월 20일 1996년 5월 20일
9대 1996년 5월 20일 2000년 5월 20일
부총통
재임 기간
7대 1984년 5월 20일 1988년 1월 13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정계 입문
3. 총통 재임 기간
3.1. 1기: 권한 대행(1988년 - 1990년)3.2. 2기: 개혁의 본격화(1990년 - 1996년)3.3. 3기: 드러나는 본심(1996년 - 2000년)
4. 퇴임 이후5. 평가6. 저서7. 트리비아8. 주요 경력


1. 개요

중화민국( 대만)의 정치인이자 8, 9대 총통. 총통 자리에 있으면서 세운 최초 타이틀이 많다. 우선 대만 최초의 대만 출신 본성인 총통이고, 부총통 경력이 있으면서 승계가 아닌 선거로 당선된 유일한 총통이며, 그리고 첫 민선 총통이다.


리덩후이 총통의 육성을 실제로 들을 수 있는 동영상. 뉴스 도입부에서 지금의 CG 떡칠 대만 방송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한국 뉴스데스크 급의 깔끔함을 느낄 수 있다.(...)[4] 아래에서도 언급하겠지만 리덩후이의 모국어가 표준중국어가 아니라 표준중국어 발음이 많이 좋지 않다. 대만어 일본어 어투가 섞여나온다. 총통 중 표준중국어 구사 능력은 마잉주 따라올 사람이 없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파일:201401231542367010849.jpg
교토 제국 대학 재학 시절

현 행정 구역 기준으로 신베이시(新北市) 싼즈 구(三芝區)에서 태어난 본성인이다. 아버지가 일제시대 경찰관이었기 때문에 집안 사정은 괜찮은 편이었다고 한다. 1940년에 일본이 식민지 체제에 충실한 대만인들에게 일본식 이름을 갖도록 하고 우대해주기로 하자[5] 경찰관이었던 리덩후이의 아버지도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 그도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일본식 이름을 얻었다.

공부를 꽤 잘 해서 다이호쿠 구제고등학교[6]를 거쳐 1943년에 교토제국대학 농학부 농업 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7] 그러다가 학도병으로서 징집되어 육군 소위로 임관해 나고야의 고사포 부대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실전에 나가기 전에 일제가 패망하여 실제 전투에 참여한 적은 없다.

전후에는 대만으로 귀국하며 국립타이완대학 농업 경제학과에 편입했는데 국립타이완대학은 갓 재건된 상황이라 2학년 학부까지 밖에 없었고 이미 교토제국대학에서 3학년까지 수료한 리덩후이는 1학년부터 새로 배워 총 6년을 대학을 다녀야 했다.

당시 국민당이 대만에서 벌인 실정에 반감을 가지고 공산주의에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으며 194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1948년 탈퇴했다.[8] 이렇게 본성인 + 일본의 고등 교육을 받음 + 공산주의자 쓰리콤보가 겹쳐 2.28 사건 당시에는 국민당군의 탄압을 피해 시골에 숨어 있었다고 한다.

2.28 사건 이후로도 국립타이완대학에서 계속 농경제학을 전공하였고, 졸업 후 대학 조교를 하다가 1949년에 은행원인 부인 청원후이(曾文惠, 증문혜)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코넬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0년에 행정원 부원장 장징궈의 미국 방문 때 그의 친한 친구가 장징궈를 암살하려 하는 바람에 큰 위기에 처하지만 은사인 내정부장 서경종, 장언사 등이 그를 적극 변호함에 따라 무사할 수 있었다. 귀국 후 국립타이완대학 농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2.2. 정계 입문

파일:ClPBHZb.jpg
(1980년대 부총통 시절의 모습. 왼쪽은 장징궈 당시 총통)

국립타이완대학 교수 재직 중 농업 전문 관료로서 행정원장 장징궈의 눈에 들어 1971년에 국민당에 입당함으로써 정계에 입문하였다. 농업분야의 전문가로 장징궈 총통의 눈에 들어 정무위원에 선출된 것을 시작으로 승승장구해서 1978년부터 1981년까지 타이베이 시장을 맡았고, 1981년에 타이완성 주석에 올라서 3년간 재직하다가, 1984년 전임 부총통 셰둥민이 장징궈의 와병을 틈타 음모를 꾸민게 적발되어 쫓겨나면서 그 후임으로 발탁되어 권력의 정점을 넘보게 된다. 이때 장징궈는 총통의 신분으로 리덩후이가 집무를 보던 주석 관저를 찾아가 직접 축하하는 등 이례적일 정도로 리덩후이를 밀어주었다. 1982년 아들 리셴원(이헌문)을 잃는 비극을 겪었지만 장징궈가 이 때문에 아들이 없는 리덩후이가 권력욕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본성인 출신인 리덩후이가 권력 2인자인 부총통으로 지명되었을 당시[9], 집권 국민당을 위시한 대만 정계는 이를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였다. 장징궈는 마땅한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고, 이미 이 당시에 장징궈의 건강이 좋지 않아, 당시 부총통 자리는 일반적인 부통령 같은 병풍이 아니라 진짜 차기 권력자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아래와 같은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10]
와병 중이던[11] 장징궈 총통에게 국민당의 측근들이 물었다. "총통 각하. 각하의 후계자는 누가 좋겠습니까?" 장징궈가 고향 저장성 사투리로 대답했다. "니 덩 후얼"(你等會兒. 기다려라(아직 결정할 때가 아니다)). 그러자 이를 잘못 알아들은 측근들의 반응. "니 덩 후얼? 아, 후계자는 리덩후이라는 말씀이시군요!"

3. 총통 재임 기간

3.1. 1기: 권한 대행(1988년 - 1990년)

파일:F18.jpg
(1988년 1월. 장징궈의 사망 직후, 권한 대행으로서 취임 선서를 하는 리덩후이)

1984년 당시 총통이자 국민당 주석이었던 장징궈는 리덩후이를 부총통 후보로 지명하고 국민대회에서 당선되어 부총통이 되었지만, 장징궈는 일관되게 자신의 후계가 헌법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만 언급했을 뿐 후계자를 키우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1988년에 장징궈가 죽자 헌법에 따라 리덩후이가 총통(대행)이 되고 국민당 주석 대행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본성인으로 국민당 내에서 비주류에 속했으며, 하오보춘 등의 국민당 보수파의 견제를 받았다. 예를 들면 장징궈가 장제스 사후 바로 국민당 주석 자리까지 물려받은 반면 리덩후이는 꽤 오랫동안 주석 대행에 머물러 있었다. 보수파들은 그를 옌자간처럼 얼굴마담으로 두고 장징궈의 잔여임기만 수행시키려 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덩후이는 외성인 위주의 보수파와 타협을 시도했고, 보수파이지만 리덩후이에 유화적이었던 쑹추위 등의 도움을 얻어 장징궈 사후 6개월만에 주석이 될 수 있었다. 리덩후이는 이 때 국민당 중앙위원회 31명 중 16명을 본성인으로 기용하는 파격을 보여줬지만, 본격적인 개혁을 하지는 못하고 언론자유화, 야당 합법화 등 미미한 개혁만을 시행했다. 정난룽이 분신한 것도 이 무렵의 일.

한편 1980년대 후반에 대만에 민주화 바람과 함께 노동 운동이 격화되고 있었는데 리덩후이 정부에서 반공을 이유로 강하게 찍어내렸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대만 내 노동 운동가에게 욕을 좀 얻어먹기도 한다.

리덩후이는 자신의 파벌을 키워 보수파의 견제를 억제하는 데 성공했다. 1990년에 총통 임기가 만료되고 국민대회에서 선출되는 간선제 총통 선거가 실시되었다. 이 때에 이르면 국민당 내 리덩후이의 세력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보수파들은 리덩후이가 국민당 총통 후보가 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 대신 부총통 후보만큼은 보수파의 인물을 내세우려 했지만, 리덩후이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파벌의 인물인 리위안추(李元簇)를 부총통 후보로 세운다. 보수파들은 이에 반발해 린양강(林洋港)을 후보로 세우려 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간선제 총통 선거에서 무사히 당선되었다.

3.2. 2기: 개혁의 본격화(1990년 - 1996년)

파일:052010.jpg
(1990년 총통직에 정식 취임하는 리덩후이)

정식으로 총통에 당선 및 취임한 후, 리덩후이는 국민당의 전통적인 노선과 반대되는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고, 이를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야당인 민주진보당이 내세운 정책들을 점차 받아들이면서 민주화를 추진했다.[12] 우선 1948년에 선출된 의원이 아직도 의원 노릇을 하고 있는, 만년국회라 불리던 입법원 국민대회의 해산 및 재선거가 시급했는데, 장징궈 정권 때에도 검토가 되었던 것이지만 결국 시행하지 못했다. 장징궈가 제한적인 재선거를 용인하며 재야인사들의 정계 참여를 허용하긴 했으나 입법의원 선거가 마치 정부가 이따금씩 베푸는 수혜처럼 이뤄지는 매우 억압적인 형태였고 입법원의 존재 자체가 국민당 독재를 뒷받침했기 때문이다.[13] 리덩후이가 총통에 재선되자 이미 민주화는 돌이킬 수 없는 대세가 되어 국민 대회 및 입법원 의원 재선거 여론이 고조되고 민주진보당 역시 이를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국민대회 및 입법원 의원들은 그 대가로 고액의 퇴직금 및 연금을 요구했다.

그러나 리덩후이는 전격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고 있었던 학생 운동 지도자들 및 민주진보당 인사들과 회견하여, 여론 및 야당의 요구를 무기로 1991년에 장제스가 제정한 '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動員戡亂時期臨時條款)'을 폐지하고 헌법을 수정했다[14].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 장제스 공산당을 토벌해야 한다는 이유로 국민대회 및 입법원 선거를 중지하는 근거가 되었던 만큼, 1991년과 1992년에 국민 대회와 입법원은 해산되고 재선거가 실시되었다.

파일:e02_wildlily4-4.jpg
(1990년 3월 중정기념당에서 열린 대만 재야 진영의 국민 대회, 입법원 재선거 요구 시위. 백합을 앞세웠다고 해서 '야생백합화 운동'(野百合學運)이라고 불렸다.[15] 리덩후이는 이러한 민주화 여론을 앞세워 국민당 내 입지를 강화시켰다)

아울러 1990년대 초반부터 국민당 내 보수 진영과의 타협을 위해 입각시켰던 군부 출신의 거물 하오보춘을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에서 퇴진시켜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시키고, 군부의 통수권까지 실질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하오보춘이 차지했던 행정원장, 국민당 부주석 직에는 자신의 측근인 롄잔을 임명하여 한층 더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4년에는 타이완 성장, 타이베이 시장, 가오슝 시장을 임명직에서 지역 주민의 선거를 통한 선출직으로 바꾸어 완전한 지방 자치를 실현하였다.[16] 그리고 같은 해에 총통 역시 직선제로 선출하도록 헌법을 수정했다. 국민당 보수파들은 이에 대해 선거인단을 통한 미국 간선제 총통 선거를 제안했으나 리덩후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따라 총통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총통 임기를 6년에서 4년으로 변경했으며 1회만 연임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20130916-05.jpg
(1995년의 첫 2.28 사건 공식 추도 행사에 참석한 모습)

아울러 장제스, 장징궈 시절 억눌려 왔던 과거사 문제를 정리하고 해소하기 위한 조치들도 단행했다. 먼저 대만 사회 최대의 금기였던 1947년의 2.28 사건에 대한 진상 조사를 지시하고, 국가 원수로서 처음 이 사건에 대해 공식적인 책임 인정과 사과를 표시하였다. 이러한 조치 역시 리덩후이 스스로가 대만 출신의 본성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993년에는 시안 사건으로 54년간 가택 연금 상태에 놓였던 장쉐량을 석방하였다. 기사 1994년 1월 1일부로 장쉐량은 자유의 몸이 되었다.

파일:img201208220353030.jpg
(1996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 선거에서의 유세 모습. 오른쪽은 러닝메이트인 롄잔)

아울러 그는 민주화와 함께 조금씩 대만 독립론을 꺼내기 시작했다. 1991년에 국가 통일 위원회 강령을 선포하면서 양안관계는 두 개의 동등한 정치 실체라는 발언을 했다. 이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 정통성을 강조한 측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양안이 똑같이 주장해오던 하나의 중국과는 배치되는 발언이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로 내몰린 보수파들은 반발하여 탈당하였으며, 리덩후이도 자신의 방침에 반발하는 국민당 인사들을 제명하면서까지 자신의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했다. 이렇게 제명되거나 탈당한 국민당 인사들은 신당이라는 정당을 세웠고 1995년 입법원 총선에서 그럭저럭 선전을 거둠에 따라 리덩후이를 위협하는 존재가 될듯 싶었다. 또한 1996년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에서 제명된 린양강(林洋港)과 탈당한 천리안(陳履安)을 후보로 내세웠다. 그뿐만 아니라 총통 직선제에 반발한 중화인민공화국이 그의 3선을 저지하려고 대만 해협에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17] 그러나 리덩후이는 부총통 후보로 지명한 롄잔과 함께 오히려 총통 선거 - 국민 대회 선거에서 압승하였고, 따라서 국민당이 갈라서지는 않았다.

3.3. 3기: 드러나는 본심(1996년 - 2000년)

파일:dwerwer.jpg
(1996년 5월 총통 취임식에서)

그 후 1990년대 후반에 대만의 경제 성장이 주춤해지면서 1997년 지방 선거에서 국민당이 민진당에 참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고 그 틈을 타서 1998년 입법원 총선과 지방 선거[18]에서 국민당이 입법원 과반을 확보하지 못해 여소야대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지만 예상을 뒤엎고 1998년 총선과 지방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며 그럭저럭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그 전에 소극적으로 대만을 중국과 다른 또 하나의 국가라고 주장하는 선에서 머물렀더지만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대만 독립을 주장하기 시작했는데 1999년 5월에 <대만의 주장>이라는 책을 출간하면서 중국을 7개의 국가로 분할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펼쳐 파문을 일으켰고 1999년 7월 양안관계는 (특수한) 국가 대 국가라고 발언하면서 그 동안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냈다. 앞서 말한 1991년의 발언과 마찬가지로 이 발언 역시 어찌보면 중화민국의 정체성을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비하여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하나의 중국 원칙을 사실상 깨는 발언이라 당시 중국 정부가 격노하여 대만을 침공할 것이라는 목소리가 커졌을 정도다. 장쩌민 당시 주석은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사실상 대만 침공 의사를 밝혔다.

물론 당시 중국은 아직까지도 군 현대화 사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않은 상태였고 오랜 고도성장과 기술발전으로 인해 그때까지만 해도 체제경쟁에서 우위에 있다고 자신하고 있던 중화민국 군부 측은 중국군이 얼마든지 오든 죄다 용궁으로 보내버릴 수 있다고 장담하는 보고를 올렸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리덩후이는 한동안 군비 증강을 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 군비를 감축하는 한편, 중국의 반발에 오히려 "대륙이 대만을 침공해올 경우 홍콩, 상하이, 난징도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엄포를 놨다. (!)[19]

2000년 총통 선거에서는 자신의 파벌로 부총통이었던 롄잔(連戰)을 총통 후보로 지명했다. 그러나 이에 강력한 국민당 총통 후보였던 쑹추위가 반발하여 국민당을 탈당하고 독자적으로 총통 선거에 출마했고, 이에 따라 국민당 지지층이 분열되어 어부지리로 민주진보당 천수이볜 후보가 총통에 당선될 수 있었다. 뭔가가 생각나는데... 선거과정은 한치 앞도 내다볼수없는 초접전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국민당의 표가 쏭추위에게 더 몰리면서 롄잔은 3위로 접전에 조차 이르지 못하고 낙선했다.

이에 대해서는 리덩후이가 같은 대만 독립주의자인 천수이볜을 지지했다는 의혹이 있다. 선거 유세 때 인터뷰에서 천수이볜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애송이가 무슨 총통이냐" 등의 힐난을 퍼부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롄잔을 적극적으로 밀어준 것도 아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을 안해서 알 길이 없지만, 1994년에는 황다저우 시장이 민심을 잃은데다 국민당을 탈당한 자오샤오캉까지 신당 후보로 출마한 상황에서 그냥 황시장을 공천해버렸으니 천수이볜에게 타이베이를 조공한거나 다름없었으며, 2000년에는 타이완의 97%를 차지하는 타이완성장을 민선으로 지낼만큼 경쟁력이 있는 인물인 쑹추위에게 기회조차 안 주고 그냥 롄잔을 국민당 후보로 내세워서 기어이 국민당 표를 분산시켜 또 천수이볜을 당선시켰다. 그렇게 해서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연맹이 2004년 총통 선거에서 단독으로도 국민당을 위시한 범람연맹과 겨룰 수 있을 정도가 되었는데 이는 불과 10여 년 전의 민주화 초기 시절에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고, 국민당 소속인 리덩후이가 사실상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한 만큼 범록 연맹의 성장에 많은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

4. 퇴임 이후

4.1. 타이완 독립운동

파일:F201111031614091908611759.jpg
(2000년 5월 후임 총통 천수이볜의 취임식에 참석한 모습 계획대로)

천수이볜의 당선 이후에는 총통 선거 승리 패배를 책임지고 국민당 주석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2001년에는 자신의 파벌이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대만단결연맹이라는 새 정당을 만들자 이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이에 꼭지가 돌아간 국민당은 2001년 9월에 반당행위를 이유로 그를 제명했다.

파일:attachment/ky1214200705310016540.jpg
2000년대 중반의 모습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어진 리덩후이는 퇴임 후에는 '중화민국이라는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발언까지 해가며 대만 독립을 주창했으며, 공공연하게 천수이볜을 지지하고 2004년 총통 선거에서는 지지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수이볜 정권 말기에는 천수이볜의 부패 등을 이유로 그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20]

2012년 대만 총통 선거유세 마지막 날인 1월 13일 저녁,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후보 지원유세를 나가는 등 대만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참고기사

파일:attachment/5993000.jpg
2012년.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지원 유세.

2017년 기준으로 만 94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저술, 강연이나 해외 방문 등의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총통 선거 등 중요한 정치적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고 있기에 지금도 뉴스에서 심심치 않으면 볼 수 있는 존재 중 한 명이다. 자신의 이름을 딴 '리덩후이 기금회'(李登輝基金會)란 이름의 재단까지 설립, 운영하고 있을 정도다.[21]

2016년 5월 20일 차이잉원의 총통 취임식에도 전직 총통 자격으로 참석했다.

2018년 1월 15일 자택에서 96번째 생일을 맞았다. 천수이볜 전 총통도 아들과 함께 참석하여 축하 인사를 전했다.

2월 28일, 천수이볜 전 총통, 분리독립파 단체 등과 함께, 중화민국 국호를 대만으로 바꾸는 국민투표를 주장했다.[22] 4월 7일에는 이들 분리독립파 단체, 인사들의 주도로 독립 국민투표 운동을 전개할 단체 '희락도 연맹'(喜樂島聯盟: Formosa Alliance) 창설에 동참했다.[23]

4.2. 친일

파일:20130408zf0001.jpg
젊은 시절 검도 복장을 한 모습.

대만 정치인 중에서도 대표적인 친일파(2번 항목)이다. 대만일치시기에 대한 평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일단 리덩후이는 그런걸 떠나서 비슷한 진영내에서도 비판이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친일 성향을 보여준다. 특히 이 친일이라는게 일본내 우익 인사들과 교류하는 것이 많다 보니 행보 역시 우익적 행보로 표출될 때가 많아 문제. 대만일치시기에 대한 부정적 발언도 했지만 또 친일은 유지한다는 점에서 묘한 인물.

파일:118124060015516429084.jpg
파일:118124068608416429574.jpg
파일:01oys0611-0201.jpg
이런 연장선상에서 심지어 야스쿠니 신사에도 참배했다. 진정으로 일본을 위한다면 참배하지 말아야 되는거 아닌가 본인의 형 리덩친(李登欽, 일본명 岩里武則, 1921년 ~ 1944년 12월 15일)이 합사되어 있다고 하며, 리덩친은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 해군 병으로 입대해 필리핀에서 전사했다. 겸해서 야스쿠니 신사 문제를 중국과 한국이 만들어낸 문제라고 해서 제대로 중화인민공화국 한국, 심지어 중화민국 범람연맹 어그로를 끌었던 적이 있다. 기사. 근데 사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범록연맹에서도 까는 문제긴 하다.(...) 진보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민주진보당 인사 중 리덩후이처럼 당당하게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하고 자랑하는 인물은 없다. 극단적이라는 이유.

리덩후이 본인의 모어는 당연히 대만어이고, 제2언어가 일본어, 표준중국어는 제3언어이다. 일본어가 표준 중국어보다 편하다고 하며, 지금도 표준 중국어는 유창한 편이 아니라고 한다. 표준 중국어를 하는데 대만어 말투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대만 독립에 매우 긍정적이기에 중국을 싫어하는 일본 우익들과의 교류가 많다. 그리고 이들과 교류하기 위해 일본을 자주 찾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입국 비자 내지 말라고 일본을 압박하지만 일본이 그걸 들어줄 리가 없다. 일본 인사들과 인터뷰를 할 때에는 일본어를 쓴다고 한다.

심지어 센카쿠 열도 분쟁에서 일본 편을 들었다. 이정도면 일관성은 인정해줘야할듯 그러자 대만 외교부가 진화에 나서 "댜오위타이(일본명 센카쿠)는 대만의 영토라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했으며 앞서 밝혔듯 국민당보다 상대적으로 일본에 관대한 민주진보당마저도 "전 총통이라는 작자가 일본인 행세를 한다!"며 더욱 강도 높게 비판했다. 허나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는지 2015년 7월말에는 다시 일본을 방문해서 해당 발언을 반복했고, 당연히 중국과 대만 내부에서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같은 국민당 출신으로 한때 리덩후이를 보좌하기도 했던 마잉주 당시 총통이 대만 유력지 <중국시보>에 직접 글을 기고하여 리덩후이의 발언을 반박했을 정도.[24]

관련 발언이나 주장들을 근거로 종합하자면 리덩후이는 미국보다는 일본 대만의 생존 여부에 대해 지리적, 전략적으로 보다 큰 이해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일본이 중국에 직접 맞설 정치/군사 대국의 행보를 본격화함으로써 대만의 후견 국가 내지는 제1동맹 역할을 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리덩후이가 일본의 우익 진영, 특히 아베 신조 현 수상을 비롯한 정치/군사 대국화 지지 세력과 밀접히 교류하는 것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근데 일본은 이미 중국에 겁먹고 미국에 의지하고 있는게 함정

파일:attachment/a02bc70c.jpg
만화 캐릭터 코스프레를 한 적이 있다. 대상이 바로 에다지마 헤이하치. 왜 친일파 이야기하는 데 나오는지는 저 캐릭터 항목에 들어가보면 안다. 옆의 두 따까리들은 각각 츠루기 모모타로 다테 오미토를 코스프레한 것으로 보이는데 상당히 조잡해 보인다.

2015년 8월 22일에는 일본 우익 잡지 중 하나인 'Voice'와의 인터뷰에서 "70년 전에는 일본인... 조국(일본 제국)을 위해 싸웠다"라는 발언을 하여 대만 정치권 내부에서 큰 파문이 일었다. 69년 전에는 공산당원이었으면서 원래 "70년 전에 일본인이었다"는 발언은 과거 일본 우익 인사들과의 인터뷰에서 꽤 자주 언급했었다. 리덩후이는 이 발언을 좀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복했고 대만의 총통 선거와 겹쳐 다시 이슈화된 것으로 보인다. 훙슈주는 "국민당이 정권을 잡지 못하면 나라가 일본에 다시 넘어간다!"라고 발언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전직 총통 예우를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 반면 차이잉원 주석을 비롯한 민진당 측에서는 "다양한 생각을 가질 수 있고 이를 존중해야 한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결국 리덩후이의 발언은 친일, 반일 논란을 넘어서 대만에 대한 중화민국 정부의 지배 정당성, 대만과 중국 본토와의 관계 등 보다 민감한 역사, 정치, 사회적 논란에 관한 대만 내부의 첨예한 논란을 드러낸 일면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다가 2015년 9월 13일에는 본인도 그동안의 발언이 좀 과했다고 느꼈던지 "대만이 줄곧 외부의 통치를 받고, 대만인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했던 점을 대만인으로서 매우 비통하게 생각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일본이 패전 후 대만에 대한 통치권을 포기하여 대만이 중화민국의 성(省)이 되었는바, 설상가상으로 “가 가더니 돼지가 온 꼴”[25]이라고 말하여 국민당 정권에 대한 디스는 빼놓지 않았다. 사실 리덩후이가 이러한 행동을 하는데도 대만에서 비교적 용인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중국의 위협이 대만에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외성인들에 대한 내성인들의 트라우마도 한몫 하겠고. 즉, 헛소리인거 알면서도 현실적으로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선 친일 노선 역시 어느정도 필요하니깐 묵인해주는 것.

4.3. 기타

90세를 넘긴 고령의 나이는 어쩔 수 없는지, 최근 몇년 동안에는 간간히 병원 신세를 지는 일이 계속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경우 2015년 11월 말 가벼운 뇌경색 증상으로 입원했고, 이로 인해 오른손을 움직이는 데 불편해졌다는 소식.

파일:d1431901.jpg
2015년 근황. 확실히 많이 노쇠했다.

파일:external/img.ltn.com.tw/600_phpYXRjzG.jpg
퇴원 직후인 2015년 12월 16일 손녀 리쿤이(李坤儀)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건재함을 보여줬다. 한 뉴스에 따르면, 리쿤이의 아버지 리셴원(즉, 리덩후이의 아들)은 리쿤이가 어렸을 때인 1982년에 암으로 죽어서 리덩후이가 손녀 리쿤이를 애지중지 키웠다고.

2020년 2월에 우유를 빨리 마셔서 병원에 실려가는 소동이 있었다. #

5. 평가

총통 재임기에는 대만의 민주화 이행을 주도했고, 국제 사회에서 대만의 독자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역사에 남을만한 치적을 세웠고, 경제적으로도 1990년 주식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는 등의 곡절이 있었기는 했지만 어쨌든 대만의 고도성장 기조가 리덩후이때까지 굳건하여 1992년에 한국보다 먼저 1인당 GDP 1만 달러를 달성했고 재임 후반기엔 IMF 외환위기를 거뜬히 넘기는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대만의 경제성장이 절정에 달하여 임금상승률도 높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내수시장도 나름대로 잘돌아가던 시절이었다.[26]

그래서 대만 내에서는 리덩후이 재임기를 좋았던 시절로 추억하기는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에 추진되었던 적극적인 대만 독립 정책과 퇴임 이후 보이는 노골적인 친일 성향은 대만 내에서도 크게 평가가 엇갈린다. 총통 재임 시절 그가 소속했던 중국 국민당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찍혀 오히려 평가가 좋지 못하고 범록연맹 쪽에서의 평가가 괜찮은 편이다.

그의 대중 정책은 영향력이 커서 후임 총통인 천수이볜 마잉주 모두 리덩후이가 내세운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으며, 차이잉원은 아예 리덩후이가 직접 자문 위원으로 임명한 인물이라 어떤 면에선 그의 수제자격이기도 하다.

대만 독립을 추구했기에 중국 대륙에서의 평가는 당연히 좋지 않다. 대륙에서 한간으로 분류되는 인물 중 하나이다. 한국의 경우 애초에 인지도가 적긴 하지만, 안다 하더라도 친일 성향 때문에 비호감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6. 저서

파일:대만의 주장.jpg
  • <대만의 주장>(台灣的主張): 1999년 저작. 총통 임기 막바지에 출간한 책이다. 후술할 동일 제목의 2015년작은 이 책의 후속판이다.
파일:9784569698014.jpg
파일:PreviewResize.jpg
파일:p01-130527-p1r.jpg
파일:A6800514.jpg
리덩후이는 총통 퇴임 이후에도 1~2년에 책을 꼭 한두권씩은 출간한다. 90살 넘게 나이 먹은 사람이 이렇게 다작을 할 수 있는가 신기할 정도. 총통 퇴임 이후에만 9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심심한가보지

7. 트리비아

  • 부인 청원후이(曾文惠) 여사와 1949년 결혼하여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이중 장남인 리셴원(李憲文)은 1982년에 암으로 30대의 나이에 타계했고,[27] 나머지 두 딸 리안나(李安娜)와 리안니(李安妮)가 있다. 특히 리안니는 사회학 박사 출신으로 부친처럼 대만 독립을 지지하는 인물이며, 범록 연맹 계열 정당인 대만단결연맹 소속으로 활동 중이다.
    파일:external/nmstorage.nextmag.com.tw/A733POL02-02_1433145967906_242857_ver1.0.jpg
    파일:external/img.ltn.com.tw/600_169.jpg
  • 2012년 중반, 대학에서 대만 독립 문제를 가지고 대만에서 공부하는 대륙 유학생과 설전을 매우 크게 벌인 바 있다. 하지만 마무리는 직접 싸인한 자기 책을 주고 서로 껴안는걸로 훈훈하게 마무리. 과연 그 책을 불쏘시개로 썼을지 아니면 중국 대륙에 보내서 분노를 유발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베트남에서는 리 왕조의 마지막 왕족이자 왕자인 이용상이 보트 피플 행을 하며 대만과 난징 부근을 지나 옹진[28]에 도착했다고 주장하면서 바로 이 양반이 이용상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그럼 대만에서 현지 살림을 차리고 도망갔다는건가[29]

8. 주요 경력

중화민국 역대 총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3px-Emblem_of_Office_of_the_President_ROC.svg.png
7대 대행 8대
장징궈 리덩후이
( 1988년 1월 13일 ~ 1990년 5월 20일)
리덩후이
대행 8대 9대
리덩후이 리덩후이
( 1990년 5월 20일 ~ 1996년 5월 20일)
리덩후이
8대 9대 10대
리덩후이 리덩후이
( 1996년 5월 20일 ~ 2000년 5월 20일)
천수이볜
중화민국 역대 부총통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83px-Emblem_of_Office_of_the_President_ROC.svg.png
6대 7대 8대
셰둥민 리덩후이
( 1984년 5월 20일 ~ 1988년 1월 13일)
리위안추
타이베이 역대 시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12px-Taipei_City_seal.svg.png
3대 4대 5대
린양강(林洋港) 리덩후이
( 1978년 6월 9일 ~ 1981년 12월 5일)
사오언신(邵恩新)
타이완성 역대 성정부 주석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eal_of_Taiwan_Province.gif
10대 11대 대행
린양강(林洋港) 리덩후이
( 1981년 12월 5일 ~ 1984년 5월 20일)
유조전(劉兆田)


[1] 臺北州 三芝庄. 현 신베이 시 산즈 구 [2] 현 단수이 고등학교. [3] 현 국립 대만 사범 대학교. [4] 사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대만도 지상파 채널이 3개 정도밖에 없었던데다가 케이블 방송이라고해도 보도채널이나 종편채널이 아직은 막 허용되던 시절은 아니라서 당대에도 문제는 많았기는 했지만 이상한쪽으로 튀지는 않았다. 문제는 대만 방송시장의 막장화가 리덩후이 말기인 1999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 [5] 일본은 조선에는 창씨개명을 강제했지만 대만에서는 오히려 대만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갖는 것을 통제했다. [6] 현 국립 대만 사범 대학 [7] 후에 일본 극우와도 관계를 가진것과는 다르게 이때는 좌파 성향의 학생이었다고 한다. [8] 중화민국 역대 총통 중 장징궈 총통과 더불어 두명 뿐인 공산당 경력이 있던 인물이다. 사실 그래서 대륙에서도 초기에는 리덩후이에게 기대를 해보기도 했다. 리덩후이가 대만 독립론을 우회적으로 내밀기 전까지는... 하지만 명백하게 공산당 당적을 가졌던 장징궈와 다르게 리덩후이의 공산당 경력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리덩후이는 2002년 인터뷰에서 공산주의자였던 적은 있었지만 중공에 가입한 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활동하던 좌파 성향 학생회가 중국 공산당에 흡수된 것이 공산당 경력으로 오해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9] 전임 부총통인 셰둥민도 본성인이지만 대륙에서 활동한 경력이 있는 반산(半山)이었다. 순수 대만 본성인으로서는 리덩후이가 최초. [10] 출처 : 최창근, <대만: 거대한 역사를 품은 작은 행복의 나라>(리수 : 2014년), 148쪽. [11] 화장실에 대변을 놓았을 때라는 버전도 있다. 장소만 제외하면 내용은 똑같다. [12] 그러나 민주진보당의 일부 인사들은 이를 두고 리덩후이가 자신들의 주장과 노선을 가로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13] 가령 1979년 중화민국-미국 단교로 정세 불안정을 이유로 입법원 선거가 한동안 금지되는 등 그 선심성으로 조금 베푸는 선거조차 정세불안을 이유로 제대로 치뤄지지 못했다. [14] 중화민국 헌법은 미국처럼 조문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수정 조문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특정 조항의 효력을 중지할 수 있다. [15] 이때를 계기로 백합 꽃은 오늘날까지 범록 진영을 비롯한 대만 내 민주, 독립 계열이 관련 집회에서 애용되고 있다. 이후 발생했던 대만의 주요 정치, 사회 운동에서도 꽃을 상징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등장했다. 예컨대 2014년 중국과의 ECFA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입법원 점거 시위는 '해바라기 운동'(太陽花運動)이라고 불렸다. [16] 현이나 성할시 등의 기초자치단체장은 이미 선거로 선출되고 있었다. 물론 국민당 독재 시절에는 국민당만이 후보를 낼 수 있었지만, 장징궈가 민주진보당 창당을 묵인함에 따라 야당 역시 지방 선거에 후보를 낼 수 있게 되었다. [17] 미사일 발사 훈련으로 촉발된 이 사건을 양안 사태라 말하며 이 양안의 충돌이 미국이 마지막으로 개입한 사태였다. 이 당시 미국은 항모 전단을 파견해 중국의 무력 시위에 맞대응했고 결국 중국이 한 발 물러서며 일단락됐으나 이를 간 중국이 10여년 뒤 내놓은 물건이 바로 랴오닝급이다. [18] 타이베이 시장과 가오슝 시장 선거 [19] 이런 자신만만함은 이후 중국이 대대적으로 군비를 증강하고 반면 대만은 불황과 중국의 견제로 군비 증강이 사실상 스톱된 상황에서 중국 측에게 일방적으로 상황이 바뀌면서 사라졌다.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게 얼마나 쉬운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만 또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의 경제 활동이 집중된 동부 대도시에 미사일 세례를 퍼부을 정도의 능력은 있다. 어차피 죽을 거 고추가루가 아니라 아예 캡사이신을 거하게 뿌리고 죽겠다는 얘기. 만약 대만군이 정말로 홍콩이나 상하이에 미사일을 한두 발 정도만 명중시켜버리면 그야말로 중국이 입게 될 타격이 어느 정도일지는 상상조차 힘들기 때문에 리덩후이의 저 발언은 말이 엄포지 결코 허세가 아니었다. [20] 그래도 대만 독립의 동지라서 그런지, 자신이 만든 정당인 대만단결연맹은 천수이볜 탄핵 소추안 입법원 투표에서 백지표로 무효표를 만들어 부결에 기여했다. [21] 중국어권에서 '기금회'는 한국 등 다른 나라의 '재단'(財團: foundation)에 해당하는 명칭이다. [22] 최근 대만은 국민투표 발의, 투표 참여 연령을 낮추어 특정 주제에 관한 국민투표 실시를 쉽게 하고 있다. 다만 주권 관련 문제는 국민투표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으며, 때문에 독립파가 주장하는 국호 변경 문제의 국민투표 실현 여부는 미지수다. [23] 4월 7일은 대만 독립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대만 언론인 정난룽이 1989년 대만 독립헌법을 반역으로 규정한 당시 정부에 항의해 분신자살로 숨진 기일이다. 당시 총통이 리덩후이였던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 [24] 마잉주 당시 총통은 대만 야당으로부터 친중 반일 정치가라는 딱지가 붙어있으나, 본인은 자신의 대일 외교 방향이 친일도 반일도 아닌 '우일'(友日)이라고 못박은 바 있었다. [25] 이 표현은 리덩후이 개인만의 발언은 아니며, 2차 대전 후 대만을 접수한 국민당의 실정(失政)에 실망한 대만인들 사이에서 공공연히 퍼진 이야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2.28 사건 문서 참고. [26] 그렇지만 2001년에 처음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하고 나서는 이런 저런 이유로 임금이 사실상 동결되었고, 2천년대 중반엔 1인당 GDP도 한국에 역전당하게 된다. 문젠 이게 2010년대 중반까지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다보니 결과적으로 보았을땐 대만 임금수준이 한국보다 많이 떨어지게 되었다. 물론 경제성장률은 한국보다 엄청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지만 그 수익이 국민들에게 제대로 분배되지 않았다는 것. [27] 위에 소개된 손녀 리쿤이가 리셴원의 딸이다. [28] 중국 어디 지명이 아니라 한국의 그 옹진군 맞다. 사실 황해도라 남한 사람들도 잘 모른다 베트남판 환빠들의 망상? [29] 그런데 그 당시 대만에는 대만 원주민들이 대부분이었고 한족은 일부 상인이나 어부같은 사람들 정도나 오갈뿐이었다. 대만에 한족이 들어온 건 17세기 무렵부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