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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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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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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빛낸 백명의 위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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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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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좌진[1]
金佐鎭 | Kim Jwa Jin
파일:Kim Chwa-chin.jpg
<colbgcolor=#0047a0> 출생 1889년 12월 16일[2]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
(現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신기마을)[3]
사망 1930년 1월 24일[4] (향년 40세)
중화민국 흑룡강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
(現 중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
묘소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김좌진 장군묘[5]
본관 신 안동 김씨[6]
자 / 호 명여(明汝) / 백야(白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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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부모 아버지 김형규, 어머니 이중규
형제자매 김경진, 누나 김옥출
남동생 김동진
배우자 오숙근(결혼)
김계월(재혼)
나혜국(삼혼)[7]
자녀 김두한(장남), 김석출(장녀), 김철한[8](차남)
친인척 조부 김병호, 양조부 김병태
11촌 숙부 김옥균, 족제 김종진
친손자 김경민 친손녀 김을동
증손자 김장춘[9], 증손자 김도현[10]
외증손자 송일국
진외현손자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학력 신흥무관학교 (졸업)
종교 유교( 성리학) → 대종교
신장 185cm[11][12]
군사 경력
임관 육군무관학교 (기수 불명)
복무 대한제국 육군
190?년 ~ 1907년
북로군정서군
? ~ ?
주요 보직 북로군정서군 총사령관
주요 참전 청산리 전투 }}}}}}}}}

1. 개요2. 생애3. 기타4. 비판5. 대중매체에서6.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국가보훈부 유튜브 채널에서 소개하는 영상
[스토리박스K]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 국방TV 2021.1.11
청산리 전투 지휘관으로 유명한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교육자, 군인, 독립유공자. 김두한의 친아버지이기도 하다.

2. 생애

1889년 12월 16일 충청도 홍주목 고남하도면 행촌리의 명문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형규 25세손 항렬. 족보명.와 어머니사이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3살 때 부친을 여의었지만 넉넉한 재산으로 경제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며 모친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형 김경진이 한성부에 거주하는 15촌 지간의 족숙 김덕규에게 양자로 가면서 동녕위의 양증손자로 입적했다. 그의 의 위상을 알 수 집안의 차남인 김좌진 자신이 장남 역할을 했다. 날래고 용맹함이 뛰어나 1905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정환덕의 회고에 따르면, 김좌진은 당시 헤이그 특사단을 수행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으나, 무슨 일인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후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나이 17세에 노비들을 해방시키며 전답을 나눠 주고 자신의 집에 호명학교(湖明學校)[13]를 세우는 등 교육 사업도 활발히 펼쳐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사례로 꼽힌다.[14]

1911년 서간도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경기도 경성부 돈의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돈의동)에 거주하던 9촌 지간의 삼종증조부(三從曾祖父) 김종근(金宗根, 1844. 5. 17 ~ 1925. 12. 18)을 방문했다가, 이미 변절하여 일본 경찰과 내통한 김종근의 뒤통수로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서대문형무소에 2년 6개월 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재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재동)에 거주하였다가, 본디 다른 뜻을 품어 항시 조국 독립의 마음이 있던 그는 1918년 만주 망명 의병을 일으켜 대한광복회 부사령관을 맡았다. 대한광복회 와해 후[15] 간도 지역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군을 이끌었으며 청산리 전투(1920년)에서 독립군 연합 부대를 이끄는 등 일본 군대와 교전하여 여러 차례 기이한 공적을 세웠다. 이후 밀산을 거쳐 북으로 이동하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왔는데 이 때 북으로 간 군대들은 자유시 참변(1921년)에 휘말려 큰 피해를 입은 탓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평도 있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 북만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자유시 참변을 계기로 반공 노선으로 전향한 김좌진은 참변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는 만주에서 다시 시작하면서 한족총연합회 주석 등에 임명되는 등 만주의 독립운동 지도자로 활약했다. 1925년 신민부(초기에는 한족연합회),[16] 1929년 한족총연합회 등을 창설하고 활동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을 배척하였다.

이에 김좌진이 눈에 거슬렸던 박상실이라는 공산주의자에게 길림성 해림현 산시진 도남촌(현 헤이룽장성 하이린시 산스진 다오난촌)에서 1930년 1월 24일 40살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다.[17] 이 때 "할 일이… 할 일이 너무도 많은 이 때에 내가 죽어야 하다니. 그게 한스러워서…"라는 유언을 남겼다. 김좌진을 살해한 공산당원 박상실은 얼마 안있어 현지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당시 만주는 봉천군벌의 위세가 남아있던 시기였기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선고된 후에는 봉천으로 이송되어 사형에 처해졌다. 고 김좌진씨 하수인 박상실에 사형판결 1947년 서울특별시에서 정식적으로 장례식을 가졌으며 추도사를 김구가 읽었다. 김좌진의 유해는 아내 오숙근이 1937년 봄에 직접 길림성 해림현으로 잠입해 그 백골을 취하여 가져와서 수습한 후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김복한의 묘소 인근에 가명으로 밀장되었다가 1957년 전답을 노비들에게 나눠주면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남겨진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에 있는 선산에 아들 김두한에 의해 아내 오숙근과 합장되었다. 1999년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어 여러 교육 사업 활동을 펼치고 있다.

3. 기타

4.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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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중매체에서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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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홍범도 · 이범석 · 안무
비판 비판,( 지역주민에 대한 폭력 · 빈주 사건),
대중매체 대중매체,( 야인시대에서),
관련 단체 육군무관학교 · 북로군정서
기타 청산리 전투 · 자유시 참변 · 김좌진 장군묘 ·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 · 김좌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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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은 김사진(金砂鎭). [2] 음력 11월 24일 [3] 도로명 주소 :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 [4] 음력 12월 24일 [5]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 [6] 문충공파 26세손 ○진(○鎭) 항렬.() [7] 나주 나씨 나병수(羅炳洙)의 딸로, 1901년 9월 12일생이다. [8] 김두한의 남동생으로 1929년생이며 1996년 사망했다. [9] 오숙근 사이에서 낳은 자식의 손자로 일방적 주장 근거는없다. [10] 나혜국의 사이에서 낳은 자식의 손자로 알려진 해군 사관 후보생 118기. [11] 외증손자와 키가 똑같으며 현대에도 장신 소리 듣는 키인 만큼 당시 시대에 대비하면 엄청난 장신이다. 지금으로 치면 TV에서 비춰지는 이광수, 김태우보다 크고 서장훈보다는 작은 정도라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 [12] 홍범도, 백석과 더불어 시대상을 감안하면 규격 외의 초장신이다. 김좌진이 20대였던 1910년대의 성인 남성 평균 신장이 160cm 정도였으므로, 지금 신장으로 치면 2m 정도이다. 가장 널리 알려진 아들 김두한은 본인보다 작은 176cm였다. 여담으로 부유한 양반 명문가의 자제였던 김좌진과 달리 홍범도와 백석은 당시 조선의 평균 정도인 그리 부유하지 못한 집안에서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185cm 이상으로 훤칠했다. [13] 현재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에 위치한 갈산중학교 및 갈산고등학교의 자리가 호명학교의 자리였고 당시 90여 칸이나 되는 김좌진의 자택을 학교로 사용하였다. [14] 뒤늦게나마 알려진, 독립운동 투신과 독립군 창설 이후 김좌진 본인의 권위주의적이면서도 잔인하고 무자비했던 행보와는 별개로 이 시기에 노비들을 해방하고 조국 독립을 위해 가산을 전부 때려박은 행위는 아직까지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요소이다. [15] 이 사이 1918년 10월 22일 공주지방법원에서의 궐석 재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공갈 혐의로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 받은 바 있다. [16] 빈주 사건 역시 이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17] 이 사건을 계기로 김두한은 당시 공산당 전위대에 속해 있었으나 박용직이 전말을 알려주면서 대한민청으로 전향했다. 그 전까지 김두한은 김좌진이 친일파에게 암살된 줄 알고 있었다. [18]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5-17 # [19] 박환. (2002). 김좌진장군의 항일독립운동 성격과 역할 -투쟁노선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군사, 46, p.16, 22 # [20] 물론 우익 중에도 극좌와 유사한 파시스트란 이념이 존재하지만 김좌진이 파시스트와 유사하다는 정황은 존재하지 않으며 학계에서도 그런 언급이 없다. 그리고 좌익이 우익보다 민중에 대한 폭력이 약하다는 증거도 없다. [21] 송일국은 김좌진의 증손자. [22] 정확히는 서자가 아버지의 정실을 이르는 표현인 적모(嫡母)다. [23] 김두한의 둘째아들 김현성의 아들이다. #. [24] 김두한의 딸 김을동의 아들이다. [25] 본인의 아들인, 큰 키로 유명했던 김두한보다도 더 큰 장신이다. [26] 방송에서는 우덕순도 거론했는데 우덕순은 의심스러운 행적만 발견될 뿐 밀정 행위는커녕 반민족 행위조차 했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 반면 이정은 실제 역사학자들의 연구에서 밀정 행위가 명백하게 증명되었다는 점이 결정적인 차이다. [27] 원기준은 김좌진의 증손자인 송일국과 함께 주몽에서 호흡을 맞췄다. 원기준 본인도 인터뷰에서도 자신이 송일국의 증조할아버지 역할을 맡게 되었다며 농담을 던졌다. [28] 이제 앞으로들 가시게. 문은 열어 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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