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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16세 구스타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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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AA7><colcolor=#fecc00>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 제7대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 Carl XVI Gusta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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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46년 4월 30일 ([age(1946-04-30)]세) | ||
스웨덴 스톡홀름주 솔나시 하가 궁전 | |||
재위기간 | 스웨덴 국왕 | ||
1973년 9월 15일 ~ 현재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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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6AA7><colcolor=#fecc00> 가문 | 베르나도테 왕조 | |
이름 |
칼 구스타프 폴케 후베르투스 (Carl Gustaf Folke Hubert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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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세습 왕자 | ||
어머니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 ||
형제자매 | 마르가레타, 비르지타, 데시리에, 크리스티나 | ||
배우자 | 실비아 좀멀라트 (1976년 결혼) | ||
자녀 | 빅토리아, 칼 필립, 마들렌 | ||
종교 | 루터교회 ( 스웨덴 교회) | ||
신장 | 179cm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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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ör Sverige i tiden 스웨덴을 위해, 시대와 함께 칼 16세 구스타프가 채택한 스웨덴 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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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위
<rowcolor=#fecc00> 국왕 즉위 이후 사용한 문장 | 출생부터 즉위 전까지 옘틀란드 공작으로서의 문장 | 모노그램 |
- 옘틀란드 공작, 스웨덴의 칼 구스타프 세습 왕자 전하 Hans Kunglig Höghet Carl Gustaf, Sveriges arvfurste, Hertig av Jämtland(1946년 4월 30일 – 1950년 10월 29일)
- 옘틀란드 공작, 스웨덴의 칼 구스타프 왕세자 전하 Hans Kunglig Höghet Carl Gustaf, Sveriges Kronprins, Hertig av Jämtland(1950년 10월 29일 – 1973년 9월 15일)
- 스웨덴의 국왕 폐하 Hans Majestät Sveriges Konung(1973년 9월 15일 – 현재)
칼 16세 구스타프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구스타브 1세 바사에 의해 1544년 세습 군주제가 수립된 이후부터 사용되어온 " 스웨덴인, 고트인, 벤트인의 신의 은총에 의한 왕"[1][2]라는 칭호을 사용했으나, 칼 16세 구스타프는 대신 평이하고 소박한 칭호인 "스웨덴의 왕"[3]을 선택함으로써 수 세기 동안 이어져 온 전통을 종식시켰다.
3. 생애
3.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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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식 직후 4대가 함께 찍은 사진[4][5] |
어머니 지빌라 왕자비는 후에 시누이가 되는 스웨덴의 잉리드 공주[7]의 주선으로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세습 왕자와 만났다. 근데 둘이 결혼할 당시 독일은 나치가 대두되었고, 지빌라 왕자비의 아버지이자 칼 구스타프의 외할아버지인 카를 에두아르트[8]는 T-4 프로그램에 가담할 정도로 나치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조한 사람이었다.[9] 이 때문에 반파시즘이였던 지빌라 왕자비는 나치 지지자였던 아버지 때문에 무척 곤혹스러워 했다.
게다가 지빌라 왕세손비도 결혼한 후 딸만 내리 넷을 낳는 바람에 왕위 계승자를 낳아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막내이자 고명아들인 칼 구스타프가 태어났지만 그가 태어난지 1년도 되지 않아서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다섯 아이를 데리고 홀로 살아가는 지빌라 왕자비를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던 사람은 시아버지이자 국왕의 할아버지인 구스타프 6세 아돌프였다고.
심지어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손자 칼 16세 구스타프가 태어났을 때도 왕세자였다! 당시 스웨덴 국왕이었던 증조할아버지가 살아있었기 때문. 찰스 3세가 2022년에 73세의 나이로 즉위했고, 구스타브 6세 아돌프가 즉위할 때 나이가 68살이니까 찰스와 거의 다름없다.[10]
할란드 공작 베르틸은 릴리안 데이비스라는 웨일스 출신의 평민 이혼녀와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베르틸의 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고령이었고, 맏형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손은 아들이 없었으며 둘째형 시그바르드와 남동생 칼 요한은 평민과 결혼하면서 왕자 칭호를 박탈당하는 바람에 릴리안과 결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지빌라 왕세손비가 칼 구스타프를 낳으면서 왕위 계승자에서 좀 멀어졌으나 형의 사망으로 베르틸 왕자가 1살 밖에 안 된 어린 칼 구스타프에 이어 다시 스웨덴의 제 3 왕위 계승자가 되어버렸다.
또한 만약에 노령의 국왕과 왕세자가 연달아 사망할 경우, 어린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올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섭정이 필요하고 결국 남아있던 스웨덴 가족 중 섭정이 될 만한 인물은 베르틸 밖에 없었다. 결국 베르틸은 왕족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고 이런 삶은 받아들여졌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릴리안과 헤어진 건 아니고 결혼하지 않은 대신 동거를 시작했으며, 릴리안 역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법적으로 그의 아내가 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사례는 스웨덴 왕실에서 베르틸과 릴리안 이전에 이미 있었는데, 베르틸의 숙부였던 쇠데르만란드 공작 빌헬름은 아내인 러시아의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11]과 이혼한 뒤[12], 평민 이혼녀인 잔느 드 트람코트와 사랑에 빠졌다. 허나 구스타프 5세는 이 결혼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결국 빌헬름은 결혼하지 않고 그녀와 동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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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ecc00> 1951년 | 1965년 |
구스타프는 차법원 제도, 사회 조직과 제도, 노동조합, 고용주 협회에 관한 광범위한 연구 프로그램을 따랐으며 또한 그는 의회와 정부, 외교부의 일을 면밀히 연구했다. 구스타프 왕세자는 또한 UN 주재 스웨덴 사절단과 스웨덴 국제 개발 협력기구 (SIDA)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영국 런던에 있는 은행과 그곳에 있는 스웨덴 대사관, 그리고 프랑스의 스웨덴 상공 회의소에서 근무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있는 알파라발 공장에서 일했다. 1970년,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박람회에 스웨덴 대표단을 이끌고 스웨덴을 대표했다. 추후에 서술하겠지만 젊은 시절부터 구스타프는 스웨덴 스카우트 운동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3.2.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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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사진 |
칼 구스타프의 친할아버지 구스타프 6세 아돌프는 당연히 왕족과 결혼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방해했는데, 칼 구스타프는 실비아가 아니면 평생 결혼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6세가 사망하자 칼 16세 구스타프로 즉위하면서 계승법을 바꿨으며[14] 결국 의회의 승인을 얻어 1976년 6월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열린 결혼식은 1976년 6월 19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올로프 순드비 웁살라 대주교가 거행하였다. 국왕이 평민과 결혼한 것은 에리크 14세 이후 처음이었다. 전날의 결혼식 전야제에서는 스웨덴의 유명한 팝그룹 아바가 스웨덴의 미래 왕비를 기리기 위해 " 댄싱퀸"을 공연하였다.
운 좋게 친할아버지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왕위계승 서열 1위의 왕세손이었던 칼 구스타프는 평민과 결혼했다가 귀천상혼에 걸려서 계승권을 잃을 판이었다. 덕분에 스웨덴에서 군주의 역할이 엄청 감소했다. 이를테면 스웨덴에서는 1975년부터 총리(국회에서 선출)를 국회의장이 최종적으로 임명·면직하고, 총리가 직접 장관을 임명·면직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또 국회를 통과한 법안은 바로 법률로 성립되게 바뀌었다. 이전에는 국왕이 총리·장관을 임명·면직하고, 국회에서 가결된 법안을 승인하는 등 상징적인 절차를 밟았다. 물론 실제로는 이미 결정된 걸 국왕이 상징적으로 추인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 스웨덴 국왕은 이런 형식적인 권한도 빼앗겼다. 물론 신임장(특정인을 외교사절으로 파견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에 사인을 하는 등 국가원수로서 몇 가지 역할이 남아 있긴 하지만, 다른 입헌군주국의 군주들에 비하면 역할이 훨씬 적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그 다음엔 부모같이 길러준 숙부 커플을 정식으로 결혼시켰고, 릴리안은 '할란드 공작 부인'이라는 칭호를 얻어 정식으로 스웨덴 왕실에 입성했다.[15] 이후 구스타프와 그의 가족은 1980년에 스톡홀름 서쪽의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와 부인은 여전히 스톡홀름 왕궁에 사무소를 유지해왔다.
3.3. 국왕으로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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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위기념식 |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오르기 전인, 1809년부터 국왕의 권력를 대체할 계획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비록 왕은 서류상으로는 거의 독재자에 가까운 존재였지만, 의회의 영향력은 20세기 초까지 꾸준히 성장했다. 칼 구스타프가 왕위에 오르고 1974년에 만든 새 정부수립기구는 1975년 1월 1일에 처음 발효되었고 공식적으로 새 국왕의 대부분의 공식 정치력을 박탈하여 1917년 의회정부를 수립한 이래의 새로운 관행을 규정하였다.
새로운 정부는 왕이 주로 대표적이고 의례적인 역할을 하는 것을 줄였다. 이전에, 왕이 총리를 임명했지만, 실제로는 거의 항상 의회에서 다수당이나 연립여당의 당수가 총리로 선출되고 왕이 서명하는것이었다. 칼 구스타프가 만든 새로운 정부 수립기구채택 이후 총리 후보자는 의회 의장에 의해 지명되고, 그 후보가 의회에 의해 선출되면 의장이 서명하는것으로 바뀌었다.
또한 그는 스웨덴의 국가원수로서 해외를 국빈 방문하거나 국빈대접을 하고, 4년마다 있을 정부 교체 기간(총선기간) 동안 열리는 특별위원회, 총리 및 내각과 정기적인 정보위원회를 개최하고, 의장직을 맡고 있다. 외무부 회의를 필두로 스웨덴 주재 외국 대사들의 서신을 받고 스웨덴의 서신을 외국에 서명한다. 또한 그는 이런 유형의 국가 원수로서, 중립을 지키므로 그는 스웨덴의 선거에서도 자발적으로 투표에 기권한다.
또한 구스타프는 스웨덴의 육군, 해군, 공군의 가장 높은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1973년 즉위 당시 군대의 총사령관, 즉 최고사령관의 직책을 맡고 있는 군사 전문가와 혼동하지 않기 위해 그의 초기 계급인 육군과 공군에서의 장군과 해군에서의 중위에서 당연직인 장군과 제독이 되었다. 그래도 1975년 1월 1일 발효된 1974년 정부수립기구의 규정에 따라, 왕은 더 이상 헌법상 의무적인 군대의 최고 사령관을 맡지 않게 되어 더 이상 군 지휘권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장군 계급은 유지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칼 16세 구스타프는 아마도 매년 노벨상의 수여자로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18] 그의 손에서 노벨상을 받은 첫 번째 수상자는 일본의 에사키 레오나였다.
2018년 10월 베르나도트 왕조 수립 200주년을 맞아 실비아 왕비, 빅토리아 왕세녀, 다니엘 공과 프랑스 포를 공식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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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주빌리 기념사진 |
2024년 1월 14일,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2세가 퇴위함으로써 현재 유럽에서 가장 오래 재위중인 군주가 되었다.
3.3.1. 스카우트
칼 구스타프는 세계 스카우트 연맹의 명예회장으로 스웨덴과 국외에서 스카우트 활동에 자주 참여한다. 그가 처음 스카우트 대원이 된 것은 어머니 지빌라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어머니 지빌라와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모두 스카우트 운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의 첫 한국 방문도 스카우트 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세계 잼버리를 방문하는데, 예를 들어 스웨덴이 주최하는 태국의 새터십에서 열린 2002년 세계 잼버리, 영국 하이랜드 파크에서 열린 2007년 세계 스카우트 100주년 기념식 등이 있다. 또한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열린 1981년 내셔널 스카우트 잼버리에 참석하여 1982년 월드 스카우트 위원회가 월드 스카우팅에 대한 예외적인 서비스로 수여한 세계 스카우트 운동의 유일한 공로인 브론즈 울프상을 수상하였다. 제22회 세계 스카우트 잼버리에도 참석했다. 2011년 8월 6일 폐막식에서 4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을 했다. 밴드 유럽도 그를 위해 "The Final Countdown"을 불렀다. 칼 구스타프 왕은 웨스트버지니아에 있는 2013년 미국 잼버리의 보이 스카우트에 출연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국왕과 함께 칼 구스타프 국왕은 평화의 전령 프로그램을 지지해 왔다.4.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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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가족사진 |
4.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칼 16세 구스타프 (Carl XVI Gustaf) |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Prince Gustaf Adolf, Duke of Västerbotten) |
구스타프 6세 아돌프 (Gustaf VI Ado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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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5세 (Gustaf V)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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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Baden)[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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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넛의 마거릿 공녀 (Princess Margaret of Connaugh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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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Prince Arthur, Duke of Connaught and Strathearn)[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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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의 루이제 마르가레테 공주 (Princess Louise Margaret of Prus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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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의 지빌라 공녀 (Princess Sibylla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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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 (Charles Edward,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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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Prince Leopold, Duke of Albany)[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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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데크피르몬트의 헬레네 공녀 (Princess Helena of Waldeck and Pyrm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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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빅토리아 아델하이트 공녀 (Princess Victoria Adelai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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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Friedrich Ferdinand, Duk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Glücksbu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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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녀 (Princess Karoline Mathilde of Schleswig-Holstein-Sonderburg-Augustenburg) |
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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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족사진 |
자녀 | 이름 | 출생 | 배우자 / 자녀 |
1녀 | 스웨덴의 왕세녀 빅토리아 |
1977년
7월 14일 ([age(1977-07-14)]세) |
다니엘 베스틀링 슬하 1남 1녀[24] |
1남 | 베름란드 공작 칼 필립 왕자 |
1979년
5월 13일 ([age(1979-05-13)]세) |
소피아 헬크비스트 슬하 3남[25] |
2녀 | 헬싱란드와 에스트리클란드 여공작 마들렌 공주 |
1982년
6월 10일 ([age(1982-06-10)]세) |
크리스토퍼 오닐 슬하 1남 2녀[26] |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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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에
스웨덴 의회에서 장남상속법을 폐지하고 절대적 맏이계승제를 택했기 때문에 현재 장녀인
빅토리아 왕세녀가 1순위 왕위 계승자로 지명되어 있으며, 그녀의 맏이인
에스텔 공주가 2순위 왕위계승권자이다. 사실 칼 16세 구스타프 본인은 외아들 칼 필립 왕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싶어했지만 의회가 이를 무시하고 밀어붙여서 빅토리아 공주가 왕세녀로 책봉됐다.
역사적으로도 스웨덴은 국왕보다 귀족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한 경우가 많았던지라[27] 아무리 왕이라도 어쩔 도리가 없었을 듯. 하지만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은 마음은 여전해서 칼 필립 왕자를 매우 편애했으며 정작 왕세녀 빅토리아는 홀대를 받았다.[28]
그러나 정작 이렇게 대놓고 편애를 받으며 자란 칼 필립 왕자는 한때 파티걸로 유명했던 여동생 마들렌 공주처럼 철없이 노는 것만 즐겼다. 착하고 소탈한 성품을 지닌데다 열심히 공무를 수행하여 칭송받는 왕세녀나 비록 왕년에 철딱서니없이 굴고 왕족로서의 의무보다 파티를 더 좋아해서 가십란을 장식하는 등 말이 많았지만 약혼자와 시끄럽게 파혼한 뒤에는 뉴욕으로 건너가 아동단체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여동생 마들레이네 공주에 비해 칼 필립 왕자는 워낙에 존재감이 옅어서 놀아도 티가 안 났다. 사실 왕실에 딱히 관심을 두지 않는 스웨덴인들조차 종종 "하나뿐인 왕자는 대체 뭐하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일은 하긴 하는거냐?", "자동차만 좋아한다." 등으로만 회자할 정도니 무존재라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나마 유럽 왕실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가끔씩 " 올랜도 블룸을 닮은 잘생긴 왕자"[29]라고 언급해주기는 하는데 정말 그게 다였다.
그러다 2010년부터 누드모델이자 방송인, 요가 강사 출신인 아동복지사업가 소피아 헬크비스트와 교제하기 시작하며 드디어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피아의 대외적인(?) 직업인 '아동복지사업가'는 사실상 이미지 세탁용이라는 얘기가 있다. 참고로 헬크비스트의 과거 행적이 노르웨이의 왕세자비 메테-마리트 못지 않게 난잡해서 말이 많다. 성인이 되기 전부터 누드모델로 일했다는 의혹이 있으며, 사실상 성인방송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수위 높은 리얼리티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리얼리티 쇼에서 3위를 차지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이때 번 돈으로 뉴욕으로 와 요가 강사로 일하고 회계 등을 공부했다고는 하지만 뉴욕에서도 과거를 완전히 청산하진 못했는지 사생활에 대해 좋지 못한 루머가 있다고. 뿐만 아니라 당장 구글에 검색만 해 봐도 누드모델 시절에 거의 전라 상태로 찍은 화보가 수두룩하다.
당연히 어머니인 실비아 왕비는 물론 여동생인 마들렌 공주 그리고 그밖에 다른 많은 사람들이 심하게 반대했으나 2010년부터 동거까지 하며 열애했고, 2013년부터는 같이 공식석상에 나왔으며 2014년 6월에 약혼을 발표했다. 그리고 2015년 6월에 마침내 소피아와 결혼식을 올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피아가 임신 소식을 발표했으며 2016년 4월에 첫아들 알렉산데르 왕자를 출산했다.
- 칼 16세 구스타프가 연하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하얀 데다가 탈모 때문에 실비아 왕비보다 훨씬 늙어보인다... 근데 탈모는 젊었을 때부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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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왕비와 만나기 전부터
바람둥이로 아주 유명했다. 법까지 바꿔가면서 결혼하고도 난봉꾼 기질은 쉽게 사라지지 않은 모양인지 1990년대 후반에는 모델 카밀라 헤넨마르크와
불륜 관계였으며, 2010년 출간된 <칼 구스타프 16세 - 군주가 되길 원치 않은 군주>라는,
구스타프 왕에 대한 소문들을 추적 및 정리한 책에 의하면 "스트립 클럽과 불법 클럽, 그리고 모피 코트 속으론 알몸인 여인네들. 여자들은 그저 식후에 커피와 함께 제공되는 디저트용이었다." "구스타프 왕은 또
세르비아 마피아 밀레 마르코비치가 스톡홀름의 국립 경찰청 아래 지하 클럽에서 베푼 파티에 친구들과 함께 참석해 벌거벗은 여성들과 섞여 자쿠지를 즐기고 짝을 맞춰 '문에 이름표가 붙여진 방들'에서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실제로 결혼생활 도중에 부부끼리 각자 스캔들도 있었으며, 국왕 부부가 공식적인 자리에서만 함께하고 사적으로는 오래전부터 별거하고 있다는 것이 스웨덴 내에서도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그러나 책이 나온 후에 80% 이상의 국민들이 왕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았다고 답변했으며, 50% 이상의 국민들이 왕가의 사생활을 조사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스웨덴 내에서도 분위기가 제법 험악했으며 조기 퇴위 압력도 받았으나 마침 타이밍 좋게 현재 스웨덴 왕족들 중 가장 평판이 좋은 왕세녀가 에스텔 공주를 낳으면서 일단 입헌군주제 폐지는 없던 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그의 이미지는 작살났으며 그동안 다소 조용했던 스웨덴 왕실 이미지에도 먹칠했다. 그래도 에스텔 공주의 탄생 이후로 조금씩이나마 분위기가 나아지려는 찰나 칼 필립 왕자가 전직 누드모델과 결혼하면서 찬물을 끼얹었다.
- 이 국왕에게 굴욕적인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상점에서 빅토리아 왕세녀 등 자기 자녀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서 수표로 지불하려고 했는데, 수표 카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상점 점원이 물건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옆에서 구경하던 사람이 칼 16세 구스타프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을 꺼내들어 점원에게 보여주고 나서야 수표 확인을 한 걸로 간주하고 겨우겨우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올 수 있었다.[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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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인연이 깊다. 재위 중인 국왕 신분으로는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한 사람일 듯하다. 1987년 세계 보이스카우트연맹 관련 사무로 처음 방한한 이래 총 7회 방한했다. 1988년 서울에서 열린 IOC총회에서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방한한 바 있다. 하지만 유치 실패... 1991년
강원도
고성군에서 열린
제17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참석차 비공식 방한한 적이 있으며 2009년 7월에는 스웨덴을 국빈 방문한 대한민국
이명박 대통령을 영접했다. 2012년 5월에는 답례로 국빈 방문하여 이명박 대통령의 영접을 받아
무궁화대훈장을 받고
여수 엑스포를 관람했다.[31] 2018년 2월,
평창 올림픽을 맞아 또 다시 방한하였는데 여자
컬링 결승전[32],
바이애슬론,
아이스하키, 남녀
크로스컨트리 같은 주요 경기를 빠짐없이 관람하며 선수들과 어울리는 등 소탈한 행보로 주목받기도 했다.
# 금메달을 획득한 스웨덴
컬링 대표팀과 사진도 남겼다.
#
또한 구스타프와 그의 부인은 2014년, 2016년, 2018년 등 하계 및 동계 올림픽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왕세손 시절, 첫 차인 볼보 P1800S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
- 스웨덴 왕실의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자동차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자동차 모델인 포르쉐 911 몇 대를 소유하고 있으며, 빈티지 볼보 PV444, 페라리 456M GT, AC 코브라 및 기타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다. 첫번째 차는 1966년형 볼보 P1800S였는데, 한번 타보고는 바로 구매해서 열심히 탔다고 한다. 그와 그의 미래의 아내를 찍은 첫 사진도 그의 포르쉐 911에 앉아있는 사진이었다. 2005년 여름, 그는 노르셰핑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번 사고는 심각한 부상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벤더 벤더'로 묘사됐다. 아들 칼 필립 왕자도 그의 이런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자동차광으로 유명해서 2013년에 영암 레이싱 대회에 방문하기 위해 내한한 적도 있다. 사실 칼 필립은 그냥 좋아하는 것만이 아니라 본격적인 드라이버이기도 해서 2013년부터 2016년까지 STCC에 출전하기도 했다. 성적은 볼품없는 편.
- 2019년 10월 7일(현지시간) 왕실 성명을 통해 칼 필립 왕자의 두 아들과 딸 마들렌 공주의 세 자녀에게 스웨덴 왕족으로서 받는 직함과 금전적 혜택을 제공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들은 앞으로 왕족 직함을 사용하지 않고 왕가의 일원에게 주어지던 봉급을 수령할 수 있는 자격도 잃고 공식적인 왕실의 의무도 따를 필요가 없게 되지만 왕실 구성원으로서 주어지는 공작 작위는 유지된다. 다만 '이론적인 왕실 구성원'으로서 왕실 친목 모임에 계속해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이번 발표가 왕족의 직함을 위해 국민의 세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스웨덴 왕실의 넓은 시각을 반영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
-
현재 유럽 국왕들 중에서
찰스 3세와
펠리페 6세와 함께 부계와 모계 모두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한 명이다.[33][34]
120위권이라 별 의미는 없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이기 때문에 영국의 왕위 계승 서열에도 포함되어 있다.[35]
- 자녀들처럼 난독증이 있다고 한다.
- 2021년 1월에 코로나19 확진받았다. #
- 2023년 2월 20일 심장 수술을 받았다. #
- 저녁형 인간이다.
-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악기는 하모니카다.
- 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한다.
5.1. 훈장
-
외국 훈장[36]
그리스: 구세주 대십자사[37]
남아프리카 공화국: 희망훈장[38]
노르웨이: 올라프 성인 훈장[39]
네덜란드: - 오렌지 왕가 훈장 기사 대십자사
- 금궤 1등 훈장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국: 두칼 왕립 작센 에르네스티네 작센코부르크와 고타 하우스 훈장 기사 대십자사
- 기사단 단네브로크 훈장
- 코끼리 목걸이를 한 기사
- 3성 훈장
- 바이에스터 훈장 대십자사
- 제1183회 황금 양털 기사단
- 찰스 3세 훈장 깃이 달린 기사대십자사
- 자유의 여신상 회원
- 현자 야로슬라프 왕세자 훈장 깃이 달린 대십자사
- 공로대장, 1급
- 제963회 가터 기사단
- 로열 빅토리안 체인의 수령자
- 테라 마리아나 십자 훈장
- 흰별 훈장
- 검의 성 제임스 훈장
- 헨리 왕자의 훈장
독일: 독일 연방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 특별 등급
대한민국: 무궁화대훈장
덴마크:
라트비아:
루마니아: 루마니아의 항성 훈장
룩셈부르크: 나소 가문의 금사자 훈장 기사 대십자사
리투아니아: 비토타스 대왕 훈장
말레이시아: 왕위 훈장
멕시코: 아즈텍 독수리 훈장
바티칸: 교황 비오 9세 훈장
브라질: 남십자 훈장
브루나이: 브루나이 왕족 훈장 기사대십자사
불가리아: 스타라 플라니나 훈장 대십자사
벨기에: 레오폴트 1세 기사단 대십자사
스페인:
슬로바키아: 쌍백십자 훈장
슬로베니아: 특례 훈장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즈 알 사우드 훈장
아르헨티나: 산 마르틴 해방자 훈장
오스트리아: 봉사훈장
요르단: 후세인 빈 알리 훈장
우크라이나:
영국:
이집트: 나일강 훈장
일본: 국화 훈장
에스토니아:
칠레: 공로훈장 칼라
크로아티아: 공로훈장 칼라
태국: 라자미트라브혼 훈장
포르투갈:
폴란드: 흰 독수리 훈장[40]
핀란드: 흰 장미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대십자사
아이슬란드: 팔콘 훈장
이탈리아: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헝가리: 헝가리 공화국 공로훈장
5.2. 상
명예군직
영국 해군 명예 제독, 영국 해군 (장년: 1975년 6월 25일)
영국 해군 명예 제독, 영국 해군 (장년: 1975년 6월 25일)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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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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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럼알렉산더르 | 하랄 5세 | 프레데리크 10세 | 레치에 3세 | |
테멩공 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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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 한스아담 2세 | 이브라힘 이스칸다르 | 알베르 2세 | |
모하메드 6세 | 하마드 빈 이사 알할리파 | 프란치스코 | 필리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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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메 케사르 남기엘 왕축 | 하사날 볼키아 |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 칼 16세 구스타프 | |
펠리페 6세 |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얀 | 조안엔리크 비베스 이 시실리아 | 에마뉘엘 마크롱 | |
들라미니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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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스웨덴어: med Guds Nåde Sveriges, Götes och Wendes Konung,
라틴어: Dei Gratia Suecorum, Gothorum et Vandalorum Rex
[2]
영국 국왕이 "신의 은총으로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과 다른 왕국과 영토의 국왕"이라는 칭호를 쓰는 것과 유사하다.
[3]
스웨덴어: Sveriges Konung
[4]
왼쪽부터 할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 증조할아버지
구스타프 5세, 구스타프 5세에게 안긴 아기는 칼 16세 구스타프이다.
[5]
아버지 구스타프 아돌프 왕자는 이 사진을 찍은 약 1년 만에 항공사고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6]
네 딸들은 평온한 분만을 위해 유모와 호텔로 보내졌다.
[7]
후에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9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8]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로,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유복자이기도 하다. 나치 독일 당시 독일
적십자사 총재를 역임했다.
[9]
당시 적지 않은 독일의 구 왕족들이 나치에 가담하거나 동조하였던 반면, 상당수의 유럽 왕족들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는 나치 때문에 반 나치 활동에 앞장섰다. 물론 독일 구 왕족들도 모두 나치에 동조하는 입장은 아니어서 지빌라 공녀나 바이에른의 왕세자
루프레히트처럼 나치에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10]
찰스 3세도 왕세자 시절인 2013년 손자
웨일스의 조지 공자를 얻은 바 있다.
[11]
알렉산드르 3세의 막내 동생 파벨 대공(1860~1919)과 첫 부인 알렉산드라 공주(
그리스 국왕
요르요스 1세의 큰딸. 1870~1891.) 사이의 1남(드미트리 대공, 1891~1942) 1녀 중 장녀.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아버지가
귀천상혼하자 바로 윗 형인 세르게이 대공(1857~1905)이 입양하였다. 세르게이 대공의 부인이
엘리자베트 대공비이며(
알렉산드라 황후의 친언니), 드미트리 대공은 이후
펠릭스 유수포프와 함께
그리고리 라스푸틴 암살을 주도하였다.
[12]
둘 사이에서는 아들 하나(레나르트, 1909~2004)가 태어났으며, 아들은 이혼 이후 친가(스웨덴)에서 자라났고 1930년대 이후에 모자가 가끔 만났다고 한다.
[13]
다만,
의회의 승인 하에는 여왕이 계승하는것도 가능은 했다.
[14]
그래서 귀천상혼이 폐지되자마자 귀천상혼으로 계승권을 잃었던 친척들이 자기들의 계승권을 돌려달라고 한 일도 있었다.
[15]
베르틸 왕자는 1997년 84세로 세상을 떠났고, 릴리안 왕자비는 2013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
[16]
그 이전까진 '스웨덴인, 고트인과 벤드인의 왕'이란 고색창연한 칭호가 유지되어 왔다.
[17]
스웨덴의 국장이기도 하다
[18]
수상자 발표는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 카롤린스카 의학연구소 등 주관 기관에서 하는 것이고, 실제 상패와 메달은 시상식 때 왕이 직접 수여한다.
[19]
다만
마들렌 공주의 세 자녀들은 참석하지 않았다.
[20]
하랄 5세와는
오스카르 2세를 기준으로 7촌이고, 마르그레테 2세와 아나마리아 왕비와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를 기준으로 사촌이다.
[21]
빌헬름 1세의 손녀이다.
[22]
빅토리아 여왕의 3남이다.
[23]
빅토리아 여왕의 4남이다.
[24]
외스테르예틀란드 여공작 에스텔 공주,
스코네 공작 오스카르 왕자
[25]
알렉산데르 왕자, 가브리엘 왕자, 율리안 왕자
[26]
레오노르 공주, 니콜라스 왕자, 아드리엔 공주
[27]
스웨덴 역사에서 강력한 왕권을 휘두른 국왕은
구스타브 1세 바사,
칼 11세,
칼 12세 정도였다.
[28]
빅토리아 왕세녀는 저런 부모밑에서 홀대받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왕세녀로서 공무에 성실하고 성격도 좋은데다 부모와 사이도 괜찮아서 대인배 취급을 받는다. 가끔 보면 위태로운 왕실을
왕세녀 가족만이 아슬아슬하게 지탱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29]
다른 나라 왕자들과는 달리 칼 필립 왕자는 헤어스타일이 다소 긴 편. 그리고 수염때문인지 단정하게 보이질 않는단 말을 듣고 있다
[30]
<세계의 대중매체3> 212p (
강준만 편저)
[31]
참고로 2019년 6월 문재인 대통령이 스웨덴에 국빈 방문하였을 때 칼 16세 국왕은 보통 스웨덴 국왕이 패용하는 국왕 전용 훈장 대신 이 무궁화대훈장을 착용하고 문재인 대통령을 맞이했다고 한다.
[32]
대한민국 여자 컬링 국가대표팀이 나온 그 경기다.
[33]
아버지
베스테르보텐 공작 구스타프 아돌프 세습 왕자가 빅토리아 여왕의 3남
아서 왕자의 외손자이고, 어머니
지빌라 왕자비는 빅토리아 여왕의 4남
레오폴드 왕자의 손녀였다.
[34]
또한 사촌 누나
마르그레테 2세와 함께 부계와 모계 모두 러시아 제국의 황제
파벨 1세의 후손들 중 한 명이다. 그 외에는
찰스 3세와
펠리페 6세,
빌럼알렉산더르도 파벨 1세의 후손들이다.
[35]
영국은 외국의 국왕이나 확정 상속인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외국 왕이나 왕족이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가령 칼 16세 구스타프의 사촌누나인
마르그레테 2세는 서열이 칼 16세 구스타프의 자손들 바로 다음 순서이고(140위권), 칠촌인
하랄 5세는 80위권으로 계승 서열에 포함되어 있다.
[36]
가나다 순
[37]
[38]
[39]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