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이승만(동명이인)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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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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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 |||
출생 | 1875년 3월 26일[1] | ||
황해도
평산도호부 마산방 삼리 능안골[2] (現 황해남도 봉천군 성기리[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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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5년 7월 19일 (향년 90세) | ||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 카운티 호놀룰루시 카이무키구 마우타네리아 요양원 |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
1948년 7월 24일 ~ 1952년 8월 14일 | |||
제2대 대통령 | |||
1952년 8월 15일 ~ 1956년 8월 14일 | |||
제3대 대통령 | |||
1956년 8월 15일 ~ 1960년 4월 27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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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5ba6><colcolor=#ffc224> 본관 | 전주 이씨[5] | |
부모 | 아버지 이경선, 어머니 김말란 |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3남[6] | ||
배우자 |
박승선 (호적말소)[7] 프란체스카 도너 ( 중혼)[8] |
||
자녀 |
친자 이봉수[9] 양자 이강석, 이인수 |
||
학력 |
배재학당 (졸업) 조지 워싱턴 대학교 ( 정치학 / B.A.)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 사학 / M.A.)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 정치학 / Ph.D.)[10] |
||
병역 | 해당사항 없음 | ||
종교 | 유교 ( 성리학) → 개신교 ( 감리회)[11] | ||
신체 | 키 170cm[12] / 체중 60kg / O형 | ||
의원 선수 | 1 | ||
의원 대수 | 제헌 | ||
약칭 | 李 | ||
호 | 우남(雩南)[1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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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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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취임 선서[14]
|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
2. 약력
- 1879. 낙동서당 입학[15]
- 1885. 도동서당 입학[16]
- 1895.4. 배재학당 입학[17]
- 1896.2. 배재학당 복학
- 1896.11. 협성회[18] 창립발기인, 서기, 회장
- 1897.7. 배재학당 졸업
- 1898.1. 《 협성회회보》 주필
- 1898.3. 독립협회 입당 및 총대(總代)위원
- 1898.4. 《 매일신문》 사장
- 1898.8. 《 제국신문》 창간발기인, 논설위원
- 1898.11. 대한제국 중추원 종9품 의관
- 1902.12. 한성감옥 죄수 교사
- 1904.10.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
- 1905.2.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2학년 입학 ( 철학 과정; 정치학 전공)
- 1907.6.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컬럼비아 과정 학사
- 1907.9.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사학 석사 과정 입학
- 1908.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사학 석사 과정 수료
- 1908.9.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박사 과정 입학 ( 정치학, 국제법 전공)
- 1910.2.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사학 석사[19]
- 1910.7.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박사[20][21]
- 1910.10. 종로 기독교 청년회 총무 겸 학감
- 1913.8. 미국 하와이 한인기숙학교[22] 교장 겸 한인기독학원 원장
- 1913.9. 《 태평양잡지》 창간
- 1914.7. 하와이 한인여자성경학원 설립
- 1918.7. 하와이 호놀룰루 신립교회 설립
- 1919.3. 대한국민의회 국무경[23]
- 1919.4.11. ~ 1919.4.23.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1919.4. 초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총재
- 1919.9.11. ~ 1925.3.21. 초대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대통령[24]
- 1924.11. 대한인동지회 종신총재
- 1930.1. 《태평양주보》 재발간인
- 1932.11.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제연맹 특명전권대사
- 1933.3. 대한민국 임시정부 무임소 국무위원
- 1933.6.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
- 1934.4.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무행서 외무위원장
- 1941.4.20.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외교위원장
- 1941.6.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25] 위원장
- 1942.1.16. 한미협회 설립
- 1945.9.6. ~ 1946.2.19. 조선인민공화국 초대 주석(명목상)[26]
- 1945.10. 독립촉성중앙협의회 회장
- 1945.12.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
- 1946.2. 초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 의장
- 1946.6.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총재
- 1947.1.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최고고문
- 1947.2. 미육해군연합협회 감사장 수상
- 1947.2. 미육해군연합협회 금(金) 명예훈장 수훈
- 1947.9. 대동청년단 총재
- 1948.5. 제헌 국회의원 (동대문구 갑)
- 1948.5.31.~1948.7.24. 초대 국회의장
- 1948.7.24. ~ 1952.8.14. 초대 대한민국 대통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49. 서울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27]
- 1949.8.15. 무궁화대훈장 수훈
- 1949.8.15. 건국공로훈장 중장[28] 수훈
- 1952.3.20. ~ 1960.06.15. 자유당 총재
- 1952.8.15. ~ 1956.8.14. 제2대 대한민국 대통령 ( 자유당)
- 1953.1.18. 미국 법률자문협의회 명예회원
- 1954.7.30.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54.8.2.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
- 1954.8.2. 미국 뉴욕시 공중봉사 공로훈장 수훈
- 1955.3.21. 미국 금영자유훈장 수훈
- 1956.8.15. ~ 1960.4.26. 제3대 대한민국 대통령 ( 자유당)
- 1958.11.6. 사이공대학교 명예 정치학 박사
3. 일생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일생 문서 참고하십시오.1875년( 고종 12년) 조선 황해도 평산에서 아버지 이경선과 어머니 김말란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전주 이씨 왕족의 자손이다.[29] 세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은 태조 이성계의 18대손이자 태종 이방원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16대손이다.[30][31]
이후 배재학당에서 수학하며 신학문을 연마하였고, 독립협회[32], 만민공동회, YMCA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하에서 관직을 맡기도 했으나, 고종이 독립협회 지도자들을 체포 구금하고 만민공동회를 무력 진압하는 과정에서 박영효의 황제퇴위 음모에 가담한 사실이 있어 5년 7개월 간 한성감옥에 투옥되기도 했다. 러일전쟁 중에 사면되어 을사조약의 국제법적 부당함을 주장하는 민영환의 밀사로 미국에 파견돼 활동하였고, 한국의 주권회복을 위한 청원외교를 전개하였다.
이후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고 이후 국무위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등을 지내며 주로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광복 이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를 반대했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주도했다.[33]
초대 대한민국 국회의장을 거쳐서 1948년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제1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으며, 이후 직선제로 바뀐 1952년 2대 대선과 1956년 3대 대선에서도 2연속으로 도전해 왔던 무소속 조봉암 후보를 이기면서 총 12년 동안 대한민국의 대통령을 지냈다.
대통령 재임 중 대한민국 정부 수립,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 농지개혁, 초등학교 의무교육,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대대적인 학교 건립, 평화선 선포 등과 같은 족적을 남겼으며, 6.25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를 겪기도 하였다. 발췌 개헌, 사사오입 개헌 등 독재 권력을 추구하여 국민들의 반발을 샀고 1960년 자유당의 3.15 부정선거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4.19 혁명이 일어나자,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에서 말년을 보냈고 1965년 향년 90세로 세상을 떠나 고국에 안장되었다.
3.1. 이승만 정부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 정부 문서 참고하십시오.4. 평가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평가 문서 참고하십시오.5. 묘소
우남(雩南)[34] 이승만 묘소[35] |
6. 선거 이력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5ba6><tablewidth=100%><tablebgcolor=#fff,#1c1d1f><rowbgcolor=#005ba6>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48 | 제헌 국회의원 선거 | 서울 4[36]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무투표 당선 | 당선 (1위) | 초선[37] |
제1대 대통령 선거 | 대한민국 | 180 (91.84%) | 초선[38] | |||
1952 | 제2대 대통령 선거 |
[[자유당(1951년)|]] |
5,238,769 (74.61%) | 재선[39] | ||
1956 | 제3대 대통령 선거 | 5,046,437 (69.98%) | 3선 | |||
1960 |
|
9,633,376 (100.00%) |
|
재선거 결정[40] |
역대 선거 벽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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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헌 총선 (서울 동대문구 갑) | 2대 대선 | |
3대 대선 | 4대 대선 | }}}}}}}}} |
역대 후보 이력
|
||||||||||||||||||||||||||||||||||||||||||||||||||||||||||||||||||||||||||||||||||||||||||||||||||||||||||||||||||||||
|
7. 소속 정당
<rowcolor=#ffc224> 소속 | 기간 | 비고 |
[[독립협회|]] |
1897 - 1899 | 정계 입문[41]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899 - 1909 | 강제 해산[42] |
[[대한인국민회| 대한인국민회 ]]
|
1909 - 1924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4 | 탈당[43] |
대한인동지회
|
1924 - 1925 | 입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25 | 탈당[44] |
[[흥업구락부| 흥업구락부 ]]
|
1925 - 1938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38 - 1945 | 정당 해산[45] |
[[독립촉성중앙협의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
|
1945 - 1946 | 창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
1946 - 1951 | 합당[46]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51 | 탈당 |
[[자유당(1951년)|]] |
1951 - 1960 | 창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1960 - 1965 |
탈당[47] 정계 은퇴 사망 |
8. 여담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여담 문서 참고하십시오.==# 직(直) 가계 #==
- 18대조 태조(太祖) 이성계 (李成桂, 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 향년 72세)
- 17대조 태종(太宗) 이방원 (李芳遠, 1367년 6월 13일 ~ 1422년 5월 30일, 향년 54세)
- 16대조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 (李禔, 1394년 ~ 1462년 9월 7일, 향년 68세)
- 15대조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 (李訢, 1438년 ~ ?)
- 14대조 부림령(富林令) 이순 (李順, 1489년 ~ 1540년, 향년 51세)
- 13대조 수주정(樹州正) 이윤인 (李允仁)
- 12대조 이충당 (李忠讜)
- 11대조 이원약 (李元約, 1595년 ~ 1650년, 향년 55세)
- 10대조 이경조 (李慶祚, 1619년 ~ 1658년, 향년 39세)
- 비조부(9대조) 이인후 (李仁後, 1634년 ~ ?)
- 원조부(8대조) 이경 (李烱, 1654년 ~ ?)
- 태조부(7대조) 이유원 (李惟源, 1675년 ~ ?)
- 열조부(6대조) 이징하 (李徵夏, 1694년 ~ 1747년, 향년 53세)
- 현조부(5대조) 이오 (李墺, 1732년 ~ 1784년, 향년 52세)
- 고조부 이최권 (李最權, 1756년 9월 13일 ~ 1808년 5월 19일, 향년 51세)
- 증조부 이황 (李璜,1784년 10월 15일 ~ 1845년 2월 27일, 향년 60세)
- 조부 이창록 (李昌祿, 1811년 5월 14일 ~ 1862년 8월 10일, 향년 51세)
- 부친 이경선 (李敬善, 1839년 6월 12일 ~ 1912년 12월 4일, 향년 73세)
9. 어록
선원들이 술에 취해있거나, 잠들어 있거나, 눈이 멀고 팔이 부러져서 배를 움직일수록 위태롭게 만들어 물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데 이 배의 선객들은 구조하는 일을 남에게 미뤄두고 무심히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는가. 선객들은 남이 건져주기를 바라지 말고 선원들에게 버려두지도 말고 각자 자기 일로 생각하고 자기 힘을 다해야 한다. 우리 대한 삼천리 강산은 곧 2천만 생명을 싣고 세찬 바람과 험한 물결이 몰아치는 큰 바다를 외로이 나가는 배와 같다. 우리는 지금 당장 물에 빠져가는 배 안에 앉아있으니 정신을 차리고 보아야 한다.
저서 < 독립정신> 中[50]
저서 < 독립정신> 中[50]
대한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이란 두 글자가 없기 때문이다. 인민들의 마음속에 독립하려는 마음을 넣어주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제일가는 일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사람을 두 가지 부류로 구별할 수 있으니 하나는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전국을 통틀어
양반은 1000분의 1도 못된다. 나머지 999는 모두 그 양반들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실로 나라에서는 1000분의 999는 다 잃어버리고 앉아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서 <독립정신> 中[51]
저서 <독립정신> 中[51]
지금 이 시대에 노예의 풍속을 가진 나라는 대한과 청국밖에 없다. 슬프다, 대한의 형제들이여. 어찌하여 옛 법에 익숙하여 내 나라 내 동포를 소나 말 같이 대접하며 짐승처럼 사고파는가. 미국 사람들은 저들과 생김새가 다른 흑인 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동포끼리 전쟁까지 벌이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 나라는 동포를 노예로 부림을 당연하게 여겨 노예법을 여태껏 폐지하지 못하고 있단 말인가.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우리는 우리 집 종들이나 남의 집 하인배들, 낮고 천하게 여기는 부인과 여자들, 내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어린아이들을 다 한층 올려 생각해야 한다. 그들을 사람의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고 사람에게 속한 물건으로만 알던 모든 악습을 버리고, 국법과 올바른 도리 앞에서 그들을 모두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하여 따로 서서 직업을 갖고 살아가는 국민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52]
저서 <독립정신> 中[52]
모든 정치제도의 성패는 항상 그 나라 백성들의 수준에 달려있다. 굽어 자란 나뭇가지는 갑자기 펴지 못하고, 앉아서만 자란 아이는 하루에 멀리 가지 못한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나라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권리만 주장하고 공공의 이익을 등한시한다면, 개인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 오히려 권리를 훼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교육을 하는 근본 목적은 사람이 가진 지혜와 본성을 거울처럼 맑게 닭아 세상만사를 있는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게 하여 잘잘못과 우열을 가리게 하려는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53]
저서 <독립정신> 中[53]
우리는 선진국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여러 가지를 모두 배우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배우는 데 그치지 말고 실행하고 옮겨야 한다. 남들이 흉보고 욕하는 것을 상관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고 배울 수 있도록 모범을 보여야 한다. 형식적으로 하는 체해서는 소용이 없다. 모범을 보이는 사람은 진심으로 부러워하고 헌신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진실로 만국이 서로 통하여 한 집 같이 섞여 살며 형제같이 사랑하여 정의가 친밀하면
풍속이 스스로 같아지고 인물, 언어, 문자까지도 다 한결같이 될 것이다. 그렇게 지난 100년 동안에 세상이 변해 온 것을 보면 오는 100년에도 또 어떻게 변할지 짐작할 수 있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구구절절이 더없이 적실하여 장부의 혈기를 격동시키는 중에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니, 이 한 구절로 말미암아 모든 조목의 근본이 생겼다. 사람마다 나도 남과 같은 권리가 있음을 깨닫고, 그 권리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 결과 이렇듯이 보배로운 기초를 세우게 된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조물주는 모든 사람에게 다 같이 권리를 주셨으므로 생명과 자유의 안락한 복을 추구하는 것은 다 남이 빼앗을 수 없는 권리이다. 한 사람이나 한 나라가 자기가 제 일을 하는 것을 자주라 이르며, 따로 서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은 것을 독립이라 이르는데, 이는 인류로 태어난 자에게 부여된 천품으로서 인간이라면 모두 다 같이 타고난 것이다.
저서 <독립정신> 中
저서 <독립정신> 中
공산주의는 실패한다.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
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54]
3.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
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
5.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1923년 태평양잡지 '공산당의 당부당' 中
1. 재산을 나누면 근로의욕이 꺾인다.
2. 기업가를 없애면 혁신이 이루어지지 못한다.[54]
3. 지식인을 없애면 모든 사람이 우매해진다.
4. 종교를 없애면 도덕이 타락한다.
5. 소련을 조국으로 믿으면 배반당한다.
1923년 태평양잡지 '공산당의 당부당' 中
One who believes in the democratic principles of government is essentially an individualist. The power of the government is derived from his citizenship. Therefore, his personal rights and personal freedom are the fundamental basis upon which the structure of the nation is built. Different from totalitarian ideology, which holds that the people should obey the government, a democracy, on the other hand, insists that the people's rights should be protected against any possibility of the government's usurpation.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 이념과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권리가 정부에 의한 그 어떤 침해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서 <Japan Inside Out> 中
민주주의적 정부 원리를 신봉하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자다. 정부의 권력은 시민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개인의 권리와 자유는 그 위에 한 국가의 구조가 세워지는 기반이 된다. 국민은 정부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체주의 이념과 달리 민주주의는 국민들의 권리가 정부에 의한 그 어떤 침해의 가능성으로부터도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서 <Japan Inside Out> 中
It has been my task to present the case of Korea as an example to show that she is a victim—the first—of Japan's lust for power. Her destiny cannot be separated from that of the free peoples of the world, nor from the lot of those peoples who once knew freedom and have lost it for a while. At long last—perhaps sooner than we dare to hope—the democratic forces of the world will thrust the Japanese back on their islands, and peace will reign again in the Pacific. In that day Korea will rejoin the ranks of the free and again become known as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한국이야말로 일본의 야욕에 바쳐진 첫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숙업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인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고, 한 때 자유를 누렸지만 지금 자유를 상실한 자들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우리의 바램보다 일찍, 전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을 패망시켜 섬 안으로 밀어넣을 것이고, 태평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한국은 자유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고, 다시금 고요한 아침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리라.
저서 <Japan Inside Out> 中
한국이야말로 일본의 야욕에 바쳐진 첫 희생양이었다는 사실을 조명하는 것은 나의 오래된 숙업이었다. 한국의 운명은 세계의 자유인들의 운명과 분리될 수 없고, 한 때 자유를 누렸지만 지금 자유를 상실한 자들의 운명과도 분리될 수 없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쩌면 우리의 바램보다 일찍, 전 세계의 민주주의 진영이 일본을 패망시켜 섬 안으로 밀어넣을 것이고, 태평양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 날이 오면 한국은 자유 국가들의 대열에 합류하게 될 것이고, 다시금 고요한 아침의 땅으로 알려지게 되리라.
저서 <Japan Inside Out> 中
우리 독립의 서광이 비치나니 일심합력으로 왜적을 파하고 우리 자유를 우리 손으로 회복합시다. 나의 사랑하는 동포여, 이 말을 잊지 말고 전파하며 준행하시오. 일후에 또 다시 말할 기회가 있으려니와 우리의 자유를 회복할 것이 이때의 우리의 손에 달렸으니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 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이다. 싸워라! 나의 사랑하는 2천 3백만 동포여!
1942년 6월 13일, VOA 단파방송연설 中
1942년 6월 13일, VOA 단파방송연설 中
오늘은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을 간단히 설명하고자 한다.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함으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매일신보 1945년 10월 26일
이론상으로
공산주의는 그럴듯하다. 만일 이 주의를 전달하려는 사람들이 단순히 이 주의를 주의대로 전하면 나도 그들을 존경할 것이다. 만일 이 주의가
민주주의와 같이 세계 대중에 복리를 줄 만한 주의가 된다면 아무도 막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산주의를 선전하는 자들이 아름다운 이상으로서 양의 가죽을 만들어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야심자를 덮어 씌워 공산주의를
소련의 앞잡이로 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세계 사람들에게 각각 정부를 파괴시키고 나라를
크레믈린의 독재하에 넣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당신의 동생일지라도 공산주의의 훈련을 과학적으로 받은 뒤에는 당신의 동생이 아니다. 그
동생은 따라서 소련을 자기의
조국이라고 부르고 국가 공업을 파괴하며, 당신의 정부를 뒤엎고 당신의 동포를 넘겨 준다. 그러면 드디어는 당신의 나라가 소련의
위성국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뒤엔 당신의 동생은 집없는 거지가 되고, 가족은 노예가 되며, 그 뒤에는 이것을 깨달아도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1946년 2월, 6주간의 민정 시찰을 위해 지방을 순회하며 돌면서[56]
1946년 2월, 6주간의 민정 시찰을 위해 지방을 순회하며 돌면서[56]
민주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 등 자유를 극력 보호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하여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기념 연설 中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 시행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 시행
배신을 일삼는 일인들은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을 정복하고자 하였소. 그러나 미국은 일본의 경제 구조를 엄청난 규모로 구축해 주었고, 그래서 일부 아시아 국가의 국민들 중에는 일본만큼 대단한 지원을 받으려면 미국에 선전포고를 할 수밖에 없다고 농담을 할 정도라오.
대일 미국 원조와 일본경제의 급속한 부흥에 대해 분개하며 남긴 1951년 4월 25일자 메모
대일 미국 원조와 일본경제의 급속한 부흥에 대해 분개하며 남긴 1951년 4월 25일자 메모
전쟁이 끝나면 하루빨리 부흥 사업을 펼쳐야 할 것이니 그 기초가 되는
철강 산업 진흥책을 마련하라. 특히 주택 건설 사업을 위한 함석, 철판 등의 공급을 담당할 제강 사업 건설 계획을 우선적으로 강력히 추진하라. 미국이 돈을 못 내겠다면 정부가 보유한 자체 보유 달러로 공장을 지으라.
1953년 4월 4일 내각에 특별 지시[59]
1953년 4월 4일 내각에 특별 지시[59]
내가
당 덕종이야?[60]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대전으로 피란을 온 국회의원들이 대국민 사과문 발표를 결의하고, 이를 장택상과 신익희, 조봉암 등 의원들이 전달하자 이승만이 한 대답.
전쟁 발발 직후인 6월 27일, 대전으로 피란을 온 국회의원들이 대국민 사과문 발표를 결의하고, 이를 장택상과 신익희, 조봉암 등 의원들이 전달하자 이승만이 한 대답.
내가
당나라 덕종마냥 덕이 없어서 이런 고초를 겪게 했다고 말하란 말이냐? 나는 사과 못한다. 사과하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해라.[61]"서울 시민 여러분들께 죄송합니다" 라고 공개 사과문을 발표해야만 했다.]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1973, 제2권 제2편 제7장, 547쪽
내무부치안국, "한국경찰사", 1973, 제2권 제2편 제7장, 547쪽
제너럴 원, 자네는 지금
공산
북한으로의 귀환을 반대하는 애국 청년들을
포로라고 생각하나? 그들은 모두 우리의
동포요, 애국하는 청년들이야, 그들을 구해야 해.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불러 자신의 의도를 내비치면서[a]
반공포로를 석방하기 직전, 원용덕 헌병 사령관을 불러 자신의 의도를 내비치면서[a]
나는 내 신분의 권한으로서 전 반공포로를 석방하도록 명령하였다. 나는 이 조치를 단행함에 있어서
유엔군 당국 및 관계 당국과 전연 협의 없이 진행한 것이다. 나는 벌써부터
제네바 협정 및
인권 옹호의 제원칙하에 반공 포로들은 석방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포로 석방 직후 자기 심정을 토로하면서[a]
포로 석방 직후 자기 심정을 토로하면서[a]
저 모습이 얼마나 자유스럽고 평화스럽습니까? 나는 반공 포로를
공산 지옥으로 보내느냐,
광명의 이땅에 머무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근 일주일 동안
기도한 끝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이번 조처를 감행한 것입니다.
아이젠하워 특사로 파견된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휴전을 설득하러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창 밖의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a]
아이젠하워 특사로 파견된 로버트슨 미 국무성 차관보가 휴전을 설득하러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창 밖의 경무대 숲을 날고 있는 까치 한 쌍을 가리키며[a]
나는 정전이라는 것이 결코 싸움을 적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게 하며 고난과 파괴를 더하고 전쟁과 파괴적 행동으로 공산 측이 더욱 전진하여 오게 되는 서곡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정전의 조인을 반대하여 왔던 것이다.
당분간 공산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요,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1953년 7월 6.25 전쟁 정전협정 직후의 성명[65]
당분간 공산압제 하에서 계속 고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우리들의 동포들에게 우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동포여 희망을 버리지 마시요, 우리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모른 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한국 민족의 기본 목표는 계속 남아있으며 결국 성수되고야 말 것입니다.
1953년 7월 6.25 전쟁 정전협정 직후의 성명[65]
언제까지 미국이 사다주는
비료에 의존하고 살아야 하는가. 당장 허리띠를 졸라매더라도 미국이 제공하는 원조자금으로 공장을 건설하고 기술자를 양성해서 필요한 물자를 국내에서 생산해야 우리 민족이 살아날 수 있다. 내각은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 측과 상의하여 반드시 비료 공장을 지어라.
비료 공장 건설안을 거부한 미국에 대해
비료 공장 건설안을 거부한 미국에 대해
내가 산에 올라가 나무 한 토막이라도 베는 사람은 엄벌에 처한다고 공포했지만 소용이 없어요. 당장 땔감 없어 밥도 못 지어먹을 형편인 국민들에게 나무를 베지 말라고 해야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말이오. 다른 땔감을 만들어주고 산에 올라가지 말라고 해야 국가의 영이 제대로 서는 것이지, 지금 우리가
석탄 열심히 캐서 연료를 공급해야 사람들이 나무를 베지 않을 것이오. 내가 어떻게 하든 식량은 미국에서 끌어다 댈 테니 당신은 땔감 문제를 책임지시오. 우리 힘을 합쳐 나라를 살려봅시다. 내 눈에 서울시내에 장작 실은 마차가 다니는 모습이 안 보이게 해 주시오.
1957년경 정인욱 강원탄광 사장을 대한석탄공사 총재로 임명하며[67]
1957년경 정인욱 강원탄광 사장을 대한석탄공사 총재로 임명하며[67]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하야 성명에서
1960년 4월 26일 대통령 하야 성명에서
나는 위로받을 필요가 없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가 있고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이 있으니, 나는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라의 미래는 밝다.
4.19로 하야 후, 망명 전 이화장에서 머무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이 보낸 위로편지에 대한 답장 中[70] [71]
4.19로 하야 후, 망명 전 이화장에서 머무를 때 대만 장제스 총통이 보낸 위로편지에 대한 답장 中[70] [71]
잃었던 나라의 독립을 다시 찾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들었는지 우리 국민은 알아야 하며 불행했던 과거사를 거울삼아 다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 노예의 멍에를 메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내가 우리 민족에게 주는 유언이다.
유언
유언
이제 저의 천명이 다하여 감에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셨던 사명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몸과 마음이 너무 늙어 버겁습니다. 바라옵건대 우리 민족의 앞날에 주님의 은총과 축복이 함께 하시옵소서. 우리 민족을 오직 주님께 맡기고 가겠습니다.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망 직전 마지막 기도
사망 직전 마지막 기도
9.1. 초대 대통령 취임사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오다가 오늘에 이와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은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심당(心當)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極)하면 웃음으로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요사이 나의 치하(致賀)하는 남녀 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합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觸感)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담(木石肝膽)이 아닌만치 뼈에 맺히는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면(表面)되는 까닭입니다.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一層)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 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용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 남녀의 합의 합력함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것을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 남녀가 단순한 애국 정신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주의제로 조직되어 2, 3 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태(左翼色態)로 주목받은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 충돌로 분쟁 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열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 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 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 아무 이의 없이 다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채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 성심으로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국회의장의 책임을 사면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처장으로 임명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투표구(所管投票區)에서 갱선(更選)하게 될 것이니 원만히 표결된 후에 의장은 선거할듯하며 그동안은 국회부의장|부의장 두 분이 업무를 대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의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 여러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여 며칠 안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낭설(浮言浪說)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일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기관이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 명예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한 법률을 민의대로 진행해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 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적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큰 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능히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적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이 하지 않습니다.
기왕에도 누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개과(悔心改過)해서 우리와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만일 종시(終始) 깨닫지 못하고 분열을 주장해서 남의 괴뢰가 되기를 감심(甘心)할진대 인심이 결코 방임치 않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친선해서 평화를 증진하며 외교 통상에 균등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선에 구별이 있으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간에 우리가 국제상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나라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 일도 할 수 있으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 판정해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기어서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주어서 피차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새로운 정부가 절대 필요하지만은 새 정신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패한 정신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奮鬪勇進)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다합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觸感)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담(木石肝膽)이 아닌만치 뼈에 맺히는 눈물을 금하기 어려웁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는 것이요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면(表面)되는 까닭입니다.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무를 다하기로 일층(一層)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국민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 하도록 마음으로 맹서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맡기는 직책은 누구나 한 사람의 힘으로 성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 중대한 책임을 내가 용감히 부담할 때에 내 기능이나 지혜를 믿고 나서는 것이 결코 아니며 전혀 애국 남녀의 합의 합력함으로만 진행할 수 있는 것을 믿는 바입니다. 이번 우리 총선거의 대성공을 모든 우방들이 칭찬하기에 이른 것은 우리 애국 남녀가 단순한 애국 정신으로 각각 직책을 다한 연고입니다. 그 결과로 국회 성립이 또한 완전무결한 민주주의제로 조직되어 2, 3 정당이 그 안에 대표가 되었고 무소속과 좌익색태(左翼色態)로 주목받은 대의원이 또한 여럿이 있게 된 것입니다.
기왕 경험으로 추측하면 이 많은 국회의원 중에서 사상 충돌로 분쟁 분열을 염려한 사람들이 없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중대 문제에 대하여 종종 극열한 쟁론이 있다가도 필경 표결될 때에는 다 공정한 자유 의견을 표시하여 순리적으로 진행하게 되므로 헌법 제정과 정부조직법을 다 민의대로 종다수 통과된 후에 아무 이의 없이 다 복종하게 되므로 이 중대한 일을 조속한 한도 내에 원만히 채결하여 오늘 이 자리에 이렇게 된 것이니 국회의원 일동과 전문위원 여러분의 애국 성심으로 우리가 다 감복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국회의장의 책임을 사면하고 국회에서 다시 의장을 선거할 것인데 만일 국회의원 중에서 정부 처장으로 임명될 분이 있게 되면 그 후임자는 각기 소관투표구(所管投票區)에서 갱선(更選)하게 될 것이니 원만히 표결된 후에 의장은 선거할듯하며 그동안은 국회부의장|부의장 두 분이 업무를 대임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부의장 두 분이 그동안 의장을 보좌해서 각 방면으로 도와 협의 진행케 하신 것을 또한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조직에 대해서 그간 여러가지로 낭설이 유포되었으나 이는 다 추측적 언론에 불과하여 며칠 안으로 결정 공포될 때에는 여론상 추측과는 크게 같지 않을 것이니 부언낭설(浮言浪說)을 많이 주의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정부를 조직하는데 제일 중대히 주의할 바는 두 가지 입니다.
첫째는 일 할 수 있는 기관을 만들 것입니다.
둘째로는 이 기관이 견고해져서 흔들리지 않게 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회 명예나 정당 단체의 세력이나 또 개인 사정상 관계로 나를 다 초월하고 오직 기능있는 일꾼들과 함께 모여 앉아서 국회에서 정한 법률을 민의대로 진행해나갈 그 사람끼리 모여서 한 기관이 되어야 할 것이니 우리는 그 분들을 물색하는 중입니다. 여러분들은 인격이 너무 커서 적은 자리에 채울 수 없는 이도 있고 큰 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이도 있으나 참으로 큰 사람은 능히 큰 자리에도 채울 수 있고 적은 자리에도 채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적은 자리 차지하기를 부끄러이 하지 않습니다.
기왕에도 누가 말한바와 같이 우리는 공산당을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산당의 매국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므로 이북의 공산주의자들은 절실히 깨닫고 일제히 회심개과(悔心改過)해서 우리와 같은 보조를 취하여 하루바삐 평화적으로 남북을 통일해서 정치와 경제상 모든 복리를 다같이 누리게 하기를 바라며 부탁합니다. 만일 종시(終始) 깨닫지 못하고 분열을 주장해서 남의 괴뢰가 되기를 감심(甘心)할진대 인심이 결코 방임치 않을 것입니다.
대외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세계 모든 나라와 친선해서 평화를 증진하며 외교 통상에 균등한 이익을 같이 누리기를 절대 도모할 것입니다. 교제상 만일 친선에 구별이 있으면 이 구별은 우리가 시작하는 것이 아니요 타동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나라든지 우리에게 친선히 한 나라는 우리가 친선히 대우할 것이요 친선치 않게 우리를 대우하는 나라는 우리도 친선히 대우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과거 40년간에 우리가 국제상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것은 세계 모든 나라가 우리와 접촉할 기회가 없었던 까닭입니다. 일인들의 선전만을 듣고 우리를 판단해 왔었지만 지금부터는 우리 우방들의 도움으로 우리가 우리나라를 찾게 되었은즉 우리가 우리 일도 할 수 있으니 세계 모든 나라들은 남의 말을 들어 우리를 판단하지 말고 우리 하는 일을 보아서 우리의 가치를 우리의 중량대로 판정해주는 것을 우리가 요청하는 바이니 우리 정부와 민중은 외국의 선전을 중요히 여기어서 평화와 자유를 사랑하는 각국 남녀로 하여금 우리의 실정을 알려주어서 피차에 양해를 얻어야 정의가 상통하여 교제가 친밀할 것이니 우리의 복리만 구함이 아니요 세계 평화를 보장하는 것입니다.
새 나라를 건설하는데 새로운 정부가 절대 필요하지만은 새 정신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부패한 정신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룩하지 못하나니 이런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나간 40년 동안 잃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삼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奮鬪勇進)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서 새로운 국가를 만년반석(萬年盤石)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9.2. 제2대 대통령 취임사
제2대 대통령 취임식은 음성 전체가 모두 녹음되었다.[72] |
오늘 취임식에서 내가 다시 지게 되는 책임은 내가 할 수만 있었으면 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나간 4년 동안에 행한 정부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 앞으로 오는 일을 좀 쉽게 되리라고 바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민국이
이 위험한 때를 당해서 정부 관료나 일반 평민이나 너 나를 물론하고 누구나 각각 나라의 직책과 민족의 사명 외에는 다른 것을 감히 복종할 생각도 못할 것입니다.
우리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당한 노력과 고초를 다 피하고 우리 몸의 평안과 마음의 원하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할 수 있는 대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할 것입니다. 밭에서는 노력해서 이남 이북의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릴 일을 하든지 전장에 나가서 악독한 원수를 쳐 물리치게 노력하든지 정부 안에서 무슨 직책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든지 각각 실수하거나 실패하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다 희생적으로 공헌할 때입니다. 모든 한인남녀는 다같이 사명을 맡아서 고상하고 영웅스러운 공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만명의 반 수 되는 우리 청년들이 희생적 제단에서 저희 목숨을 바쳐서 냉정한 담량과 백절불굴한 결심으로 무도한 공산당의 침략에서 우리를 구해내려고 해 싸우는 중입니다. 2천만 우리 동포는 가산을 잃어버리고 도로에 방황하니 무염지옥을 가진 적군들이 우리를 정복하자는 희망으로 파괴 소탕한 중에서 우리는 살 길을 구하는 중입니다.
이북의 칠백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적색 학정 아래서 피를 흘리고 애통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구해내지 못하고는 잠시라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전쟁을 참혹한 전제로 우리나라는 거의 다 적색 적지가 되어있으며 이백만 우리 동포가 잔혹한 사상을 당하고 보게된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 한 가족도 비참한 지경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각각 우리의 포악한 원수들의 죄를 징벌하고 우리 파괴된 나라에서 몰아내라는 요청을 하기에 정당한 이유를 아니 가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환란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경력을 배운게 있는 것이니 이것은 곧 동족상애와 호상원조의 뜻을 깊이 배운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몸을 둘째 생각하든지 아주 잊어버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애국심과 통일 정신으로 우리나라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모든 파괴 중에서도 전보다 몇 갑절 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충분히 훈련받은 무장한 국방군이 준비되어서 육지와 해면과 공중에서 모든 방면으로 전투력이 증가되며 무기 무장이 날로 구비해지는 것이니 이 용감한 군인들은 모든 연합군의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우리 원수의 부요함과 두려움을 받고 우리 민중의 영원한 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국민의 방패가 된 것이지만치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이 사람들의 뒤를 바치도록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 당하는 몇 해 동안은 우리의 해결할 문제가 중대하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위로되는 것은 이 문제를 우리가 혼자 당한 것이 아니고 세계 53개 자유국들이 우리 옆에 서서 나가기를 보증한 것입니다. 또 16개국의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같이 서서 원수들을 쳐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는 세계에서 공동의 투쟁과 충돌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문제를 정복하기에는 우리의 도움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우리 도시와 우리 집에서 싸우느니만치 우리나라를 재건하기에도 또한 다수의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쉬지 않는 노력을 시작하셔야 성취할 것입니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중이나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직책을 더욱 행할수록 우리 친구들이 더욱 감격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들이 더 희생할 것입니다.
이 두 해 때 두 해까지 난리를 겪은 뒤에는 우리의 첫째 직책은 전쟁 전선에서 행할 일입니다. 우리가 승전해서 원수들을 다 항복 받을 때까지는 우리에게는 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마크 클라크 장군과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우리 땅에서 토굴을 파고 있는 공산군이 어떠한 강력으로 우리를 쳐들어오던지 우리는 능히 정복시킬 결심과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때와 그 후에도 우리의 행할 보편적 우리의 목적은 악독한 원수들이 우리에게 피를 흘리게 한 상처를 합창시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절한 우방인 북미합중국이 여러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거는 즉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구체적 방책은 우리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우나 얼마쯤은 우리 원수들의 정략과 계획에 달린 것이요 또 얼마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맺힌 결심과 담양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열되거나 얼마라도 남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 제국주의를 허락해서 공산자들이 승리한 것을 길러주게 되고는 자유세계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겁니다. 공산 제국주의는 모든 연합국을 대립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임으로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전은 모든 나라들의 승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일 것입니다.
자유세계에 단결심은 누구나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치는 힘을 힘이 클수록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 안전을 위해서 단결심이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크레믈린에 있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잘만 배우게 되면 집단 안전의 길이 우리 앞에 널리 열려서 모든 자유를 원하는 세계 민족들의 한량없는 물산과 번성이 평화의 새 시기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서도 모든 내정과 지방의 관계되는 문제들은 앞으로 몇 해 동안에는 국제상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살 수 없는 물가고등으로 민중의 혈맥을 모두 말려주는 이 문제도 전답에서와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회복되어야 이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도시와 촌락과 우리 가정과 생산 근원을 우리를 도와주어서 집단 안전을 위하여 싸우는 모든 나라들이 각각 자기들의 부담으로 도와줄 수량을 충분히 내어주어야 해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태평양 전체에 대한 문제와 전 세계에 대한 문제는 지금 한국 내에서의 되어가는 문제와 결연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처음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담대히 일어나서 근대의 제일 악독한 전쟁을 싸워나가며 공산당 제국주의의 오래 내려오는 것을 끝 맺기로 결심한 까닭입니다. 이 끝은 한국에서 막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나의 개인의 메세지로 우리 국민과 또 친근한 우리 우방들에게 대해서 한마디 말을 드립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 운명과 같아도 계속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앞에 장애가 어떻게 또 커서 크든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여러번 있었으나 계속해 나온 것입니다. 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타락하여 가는 군주 정부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을 것을 싸워 온 것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모든 선열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우리 민주정부를 세워서 민의의 굳건한 토대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결심한 친구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일본의 무력과 무력의 폭력과 궤휼로 우리의 독립문을 닫혀놓은 뒤에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조금도 굴복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려한 것입니다. 1919년에 만세 운동으로 우리가 우리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 민주국의 결실이 되어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 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정치상 굴복을 거절해서 싸움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 군정시대 소련과 교섭해서 여러 어려운 문제를 평화적 담판으로 나라를 해결하고 우리나라를 통일시키자는 주의를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자유 국가와 합해서 전쟁으로 결말내기로 시작되고 있은 것이니 이 전쟁도 우리 사람들이 이전에 싸워오던 것 같이 전쟁의 결국을 승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목적이 우리 이웃의 자유를 없이 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여 보유하자는 것이니만치 우리는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간담에 깊이 갈망하며 원하는 바는 내가 60년 동안을 공헌해서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굳건히 안전과 자유와 통일을 민주국가 안에서 성립되는 것을 눈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위 정치상 파동이 일대 위기라고 세계에 전파된 것이 실상은 솥 안의 풍파였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몇몇 외국 친우들과 외국 신문 기자들이 나의 정치적 원수들의 말을 듣고 내가 병력을 이용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민국 정체를 없이하련다는 쾌가 괴이한 언론을 곧이도록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평생 역사와 나의 주장하는 목적을 아는 친우들은 이런 낭설을 듣고 웃었으며 혹은 분개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동포가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우리가 반대자들과 대립해서 그 끝을 완전히 맺게 될 적에 오래 싸워오던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기에 이른 것이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주의가 절대로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나의 공헌을 다 하기를 다시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전 민족에게 대하야 각 개인에게 일일이 말하노니 이 공동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각인의 모든 생각이나 주장을 다 버리고 일심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4천년의 역사를 계속하여 우리의 신성한 조상들이 계계승승하여 내려오며 이 금수강산에서 살며 일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다 일어나서 싸워서 우리의 거룩한 유업을 우리에게 물려주고 주었고 또 앞으로 이 신성한 유업을 보유할 직책을 우리의 손에 맡겨 준 것이니 우리의 오랜 역사상의 어떤 시대를 물론하고 오늘 우리가 당한 형편같이 어려운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 난리를 대담하게 치러 갔고 직책을 다 힘껏 행한 것임을 우리가 다 감복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 합해서 연속 진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일하며 같이 희생하며 우리가 같이 싸워서 마침내 승전 할 것입니다. 승전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간담에 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다 지나갔으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승전과 성공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칩니다.
195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우리 생명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앞에 당한 노력과 고초를 다 피하고 우리 몸의 평안과 마음의 원하는 것은 감히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소를 막론하고 할 수 있는 대로는 우리의 최선을 다해서 할 것입니다. 밭에서는 노력해서 이남 이북의 우리 국민을 먹여 살릴 일을 하든지 전장에 나가서 악독한 원수를 쳐 물리치게 노력하든지 정부 안에서 무슨 직책을 맡아 진행하도록 하든지 각각 실수하거나 실패하고는 아니 될 것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다 희생적으로 공헌할 때입니다. 모든 한인남녀는 다같이 사명을 맡아서 고상하고 영웅스러운 공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백만명의 반 수 되는 우리 청년들이 희생적 제단에서 저희 목숨을 바쳐서 냉정한 담량과 백절불굴한 결심으로 무도한 공산당의 침략에서 우리를 구해내려고 해 싸우는 중입니다. 2천만 우리 동포는 가산을 잃어버리고 도로에 방황하니 무염지옥을 가진 적군들이 우리를 정복하자는 희망으로 파괴 소탕한 중에서 우리는 살 길을 구하는 중입니다.
이북의 칠백만 우리 형제자매들은 적색 학정 아래서 피를 흘리고 애통하고 있는 것을 우리가 다 구해내지 못하고는 잠시라도 편안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불의한 전쟁을 참혹한 전제로 우리나라는 거의 다 적색 적지가 되어있으며 이백만 우리 동포가 잔혹한 사상을 당하고 보게된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 한 가족도 비참한 지경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입니다.
각각 우리의 포악한 원수들의 죄를 징벌하고 우리 파괴된 나라에서 몰아내라는 요청을 하기에 정당한 이유를 아니 가진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 환란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경력을 배운게 있는 것이니 이것은 곧 동족상애와 호상원조의 뜻을 깊이 배운 것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가 나라를 먼저 생각하고 우리 몸을 둘째 생각하든지 아주 잊어버린 데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런 애국심과 통일 정신으로 우리나라는 오늘날에 이르러서 모든 파괴 중에서도 전보다 몇 갑절 강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충분히 훈련받은 무장한 국방군이 준비되어서 육지와 해면과 공중에서 모든 방면으로 전투력이 증가되며 무기 무장이 날로 구비해지는 것이니 이 용감한 군인들은 모든 연합군의 사랑과 칭찬을 받으며 우리 원수의 부요함과 두려움을 받고 우리 민중의 영원한 감격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 국민의 방패가 된 것이지만치 우리는 어디까지든지 이 사람들의 뒤를 바치도록 맹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으로 당하는 몇 해 동안은 우리의 해결할 문제가 중대하고 또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가 한 가지 위로되는 것은 이 문제를 우리가 혼자 당한 것이 아니고 세계 53개 자유국들이 우리 옆에 서서 나가기를 보증한 것입니다. 또 16개국의 군인들이 우리 땅에서 같이 서서 원수들을 쳐 물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반도에서 일어난 어려운 문제는 세계에서 공동의 투쟁과 충돌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어려운 문제를 정복하기에는 우리의 도움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전쟁을 우리 도시와 우리 집에서 싸우느니만치 우리나라를 재건하기에도 또한 다수의 우리의 희생과 우리의 쉬지 않는 노력을 시작하셔야 성취할 것입니다. 우방들이 우리를 도와주는 중이나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직책을 더욱 행할수록 우리 친구들이 더욱 감격되어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들이 더 희생할 것입니다.
이 두 해 때 두 해까지 난리를 겪은 뒤에는 우리의 첫째 직책은 전쟁 전선에서 행할 일입니다. 우리가 승전해서 원수들을 다 항복 받을 때까지는 우리에게는 쉴 수도 없고 끝도 없는 것입니다. 마크 클라크 장군과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우리에게 선언하기를 우리 땅에서 토굴을 파고 있는 공산군이 어떠한 강력으로 우리를 쳐들어오던지 우리는 능히 정복시킬 결심과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 때와 그 후에도 우리의 행할 보편적 우리의 목적은 악독한 원수들이 우리에게 피를 흘리게 한 상처를 합창시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국제연합 제국과 우리의 가장 친절한 우방인 북미합중국이 여러번 선언하기를 자기들의 목적은 우리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 그거는 즉 대한이 통일 독립 민주국가로 완전히 회복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이 통일의 목적을 완수해야 되겠다는 구체적 방책은 우리가 확실히 말하기 어려우나 얼마쯤은 우리 원수들의 정략과 계획에 달린 것이요 또 얼마쯤은 우리의 마음 속에 맺힌 결심과 담양과 목적이 얼마나 공고한가에 달린 것입니다. 우리가 한가지 단언하는 것은 우리 한국은 분열되거나 얼마라도 남의 점령을 당하고는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살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유세계도 공산 제국주의를 허락해서 공산자들이 승리한 것을 길러주게 되고는 자유세계도 부지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겁니다. 공산 제국주의는 모든 연합국을 대립해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타도시킬 목적으로 할 것임으로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은 세계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승전은 모든 나라들의 승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실패한다면 세계 모든 자유국민에게 비극적인 실패일 것입니다.
자유세계에 단결심은 누구나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치는 힘을 힘이 클수록 모든 반공국들의 공동 안전을 위해서 단결심이 더 단단해질 것입니다. 이 과정은 크레믈린에 있는 모든 불의한 사람들이 먼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이 과정을 잘만 배우게 되면 집단 안전의 길이 우리 앞에 널리 열려서 모든 자유를 원하는 세계 민족들의 한량없는 물산과 번성이 평화의 새 시기를 인도할 것입니다.
우리 국내에서도 모든 내정과 지방의 관계되는 문제들은 앞으로 몇 해 동안에는 국제상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살 수 없는 물가고등으로 민중의 혈맥을 모두 말려주는 이 문제도 전답에서와 공장과 광산에서 생산력이 충분히 회복되어야 이 문제가 충분히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 도시와 촌락과 우리 가정과 생산 근원을 우리를 도와주어서 집단 안전을 위하여 싸우는 모든 나라들이 각각 자기들의 부담으로 도와줄 수량을 충분히 내어주어야 해결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태평양 전체에 대한 문제와 전 세계에 대한 문제는 지금 한국 내에서의 되어가는 문제와 결연되고 있는 것이니 이는 처음으로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담대히 일어나서 근대의 제일 악독한 전쟁을 싸워나가며 공산당 제국주의의 오래 내려오는 것을 끝 맺기로 결심한 까닭입니다. 이 끝은 한국에서 막기로 시작된 것입니다. 지금은 나의 개인의 메세지로 우리 국민과 또 친근한 우리 우방들에게 대해서 한마디 말을 드립니다.
내 평생은 우리나라 운명과 같아도 계속적 투쟁과 인내력으로 진행한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앞에 장애가 어떻게 또 커서 크든지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도 여러번 있었으나 계속해 나온 것입니다. 1882년 한미조약 이후로 우리가 밖으로는 각국의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타락하여 가는 군주 정부의 학정을 대항할 적에 희망도 보이지 않을 것을 싸워 온 것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싸움 시작하던 모든 선열들이 다 없어지기 전에 우리 민주정부를 세워서 민의의 굳건한 토대위에 세워놓고 세계 모든 결심한 친구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일본의 무력과 무력의 폭력과 궤휼로 우리의 독립문을 닫혀놓은 뒤에는 세계 모든 나라들이 우리를 포기하고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민중은 조금도 굴복치 않은 것입니다.
우리 국가의 자유를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우리 의병들이 싸우며 보호하려한 것입니다. 1919년에 만세 운동으로 우리가 우리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중국과 만주에서는 우리 국군의 잔병이 1945년까지 싸워오다가 마지막으로는 공화 민주국의 결실이 되어 지나간 4년 동안에 처음으로 민국 정부를 건설케 된 것입니다. 우리는 공산당에게 정치상 굴복을 거절해서 싸움하게 된 것입니다.
미국 군정시대 소련과 교섭해서 여러 어려운 문제를 평화적 담판으로 나라를 해결하고 우리나라를 통일시키자는 주의를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모든 세계 자유 국가와 합해서 전쟁으로 결말내기로 시작되고 있은 것이니 이 전쟁도 우리 사람들이 이전에 싸워오던 것 같이 전쟁의 결국을 승전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 목적이 우리 이웃의 자유를 없이 하자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의 자유를 회복하여 보유하자는 것이니만치 우리는 실패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간담에 깊이 갈망하며 원하는 바는 내가 60년 동안을 공헌해서 분투노력한 이 나라를 내 생명이 끊어지기 전에 굳건히 안전과 자유와 통일을 민주국가 안에서 성립되는 것을 눈으로 보자는 것입니다. 이번에 소위 정치상 파동이 일대 위기라고 세계에 전파된 것이 실상은 솥 안의 풍파였던 것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몇몇 외국 친우들과 외국 신문 기자들이 나의 정치적 원수들의 말을 듣고 내가 병력을 이용해서 국회를 해산하고 민국 정체를 없이하련다는 쾌가 괴이한 언론을 곧이도록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평생 역사와 나의 주장하는 목적을 아는 친우들은 이런 낭설을 듣고 웃었으며 혹은 분개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우리 동포가 나를 전적으로 지지한 힘으로 우리가 반대자들과 대립해서 그 끝을 완전히 맺게 될 적에 오래 싸워오던 개헌안을 통과시켜서 대통령 선거권을 국회에 맡겨두지 않고 민중의 직접 투표로 행하기에 이른 것이므로 우리의 민주정체와 주의가 절대로 굳건해진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와 우리의 통일과 우리의 민주정체를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나의 생명과 나의 공헌을 다 하기를 다시 선언하는 바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전 민족에게 대하야 각 개인에게 일일이 말하노니 이 공동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때까지 각인의 모든 생각이나 주장을 다 버리고 일심 협력하라는 것입니다.
4천년의 역사를 계속하여 우리의 신성한 조상들이 계계승승하여 내려오며 이 금수강산에서 살며 일하다가 필요할 때에는 다 일어나서 싸워서 우리의 거룩한 유업을 우리에게 물려주고 주었고 또 앞으로 이 신성한 유업을 보유할 직책을 우리의 손에 맡겨 준 것이니 우리의 오랜 역사상의 어떤 시대를 물론하고 오늘 우리가 당한 형편같이 어려운 적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국민들이 이 난리를 대담하게 치러 갔고 직책을 다 힘껏 행한 것임을 우리가 다 감복하는 바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다 합해서 연속 진행할 것입니다. 우리가 같이 일하며 같이 희생하며 우리가 같이 싸워서 마침내 승전 할 것입니다. 승전이 우리 마음과 우리 간담에 있을 동안에는 우리가 실패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일 위험한 것은 다 지나갔으며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오직 승전과 성공일 것입니다.
이것으로 마칩니다.
1952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9.3. 제3대 대통령 취임사
나의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내가 오늘 또 한번 우리 민중 앞에 서서 대통령 취임 선언식을 제3차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나의 지도에 신념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내가 겸손한 마음과 영광스러운 뜻으로 평화할 때에나 전쟁 중에서나 또 국내 국외의 관계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내 성심과 능력을 다하기를 맹서하는 바입니다.
이 다음 4년은 우리 역사에 제일 긴절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앞에 당한 여러 가지 큰 문제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당하며 여기까지 나온 역사를 대강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제일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통일입니다. 한국이 분렬된 것을 잠시라도 그저 두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불공평한 것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으로 한국을 통일시키는 것은 유엔의 큰 영예가 될 것이며 또 국제상 관계에 이유와 공의를 믿는 모든 나라에 큰 성공일 것입니다.
우리 국제상의 둘째로 큰 문제는 일본이 공산당과 점점 친밀하여 가는 것입니다. 일본이 사절단을 중공과 한국 이북에 연속 보내서 공산당들과 결속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찰이 날마다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들어오는 공산당들을 잡아드려서 저의들의 행동을 밝히 드려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군기와 재정을 상당히 준비해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난동과 혁명운동을 선동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북경과 모스코의 공산당들의 뒤를 계속 따라간다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 것입니까. 자유세계가 이 위태한 것을 제때에 각오하고 일어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내정을 말하자면 내 생각에는 지나간 첫 8년 동안에 민주정체의 진보를 성취한 것은 실로 역사상 드문 성공입니다. 일본의 선전에 빠진 사람들은 한인들이 능히 자주 국가를 진행할 준비가 되었을가를 의심했던 것입니다.[73]
오늘 와서 보면 우리 정부는 삼권분립으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병행해서 발전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전국적으로 또 지방적으로 여러 번 선거를 집행했었는데 매번에 각오가 깊이 박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민중에게 있다는 것이며 또 우리 유권자들의 권리가 점점 늘어가서 굳건한 토대가 선 것입니다.
사회상이나 교육상의 발전은 막대한 성공입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가 많은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벌서 교육의 나라가 되어서 우리 청년들이 전에 없던 기회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을 만치 교육제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한과 질병을 다 이겨냈으며 우리의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다 넘겨주어서 농민들이 농토의 주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부녀들도 날마다 정치 사회 경제상으로 진전해 나가고 있으며 우리 청년들도 새 세계의 안광을 가지고 앞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상 전도도 크게 진전되고 있는 것이니 1953년 하반기까지는 미국의 원조금액을 대부분 임시 구급책에 쓰고 우리나라의 생산력을 회복하는 데는 쓰지 못했던 것이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그 정책이 고쳐저서 지금은 전쟁에 파괴된 경제를 다시 회복하는데 놀라운 진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주나 춘천같이 전쟁에 전수히 파괴되였던 도시들이 날로 재건축이 되어가는 중이며 지나간 수 년 동안에 새 공장들이 건축되어서 우리 민족이 여러 대를 내려가며 누릴 복리를 양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간단하게 이 몇 마디로 그 동안에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낙관적으로 결심해서 이 앞에 모든 어려운 문제를 이겨나가자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어려운 문제를 다 인정하며 또 우리 민중의 복리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장기계획이 필요한 것을 또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장기계획의 순서를 우리가 만들어서 진전시키는 계획은 대략 5개년을 앞두고 해나갈 것인데 그 동안에 우리가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조건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중소공업을 많이 발전시키는 것이니 이 공업들을 다 민간에서 자유로 해가도록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생산력을 증가해 가지고 국내에서 쓸 것과 해외에 수출할 것을 만들며 동시에 직업을 마련해서 실업자가 없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발명하는 재능과 용진력이 충분함으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양편으로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은행의 필요를 알아서 그리로 달하여 모든 영업을 진전시킬 것이요 중소공업에 대해서는 융자를 해주는 제도를 펴놓게 하며 남은 귀속재산을 속히 다 팔아서 민간 사유물을 만들 것이니 나는 대통령의 책임으로 이 방면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쓸 것이고 또 국회에 요청해서 애국성심으로 협조하며 이 여러 가지 긴요한 사업을 속히 또 정밀하게 도달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 수량이 늘도록 만들기를 힘쓸 것이니 이것은 수리사업과 개간사업을 개량해서 나가야 할 것이며 보통 물건값 수준에는 곡식 값이 표준이 되는 것이니 생산을 증가하는 것이 경제의 안전을 성취하고 또 유지하게 만드는 근본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정부의 공무원과 봉급 생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버는 것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살도록 해주어야 될 것이며 또 여기에 대해서 특히 내가 한 가지 말하려는 것은 우리 국군의 식량 부식물을 좀 더 늘여서 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전력하려는 것입니다.
또 둘째로는 우리나라 농민들을 위해서 재정 순환하는 데와 물건 사고 파는데 새 제도와 개량된 방식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농림부에서 전국농민회 조직을 완성하기에 힘쓰고 있는 중이니 이것이 성공되면 이전 농회에 속했던 재산을 다 그리로 넘겨줄 것입니다. 그전 농회는 전쟁 전에 해산을 시켜서 그 재산이 농림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데 새 농민화가 조직된 후에는 그 재산도 농민회에 넘길 것입니다. 이 새 농민회는 단순히 농업관계 뿐이고 정치상에는 아무 관계가 없게 만들 것이며 이 회의 권한은 농업은행을 주식회사로 차지하고 또 주장할 것이며 이 회에서 비료 발매권과 미곡 매매권리를 가지게 되며 또 농민에게 융자를 주어 농민들이 적은 변리로 돈을 얻어 쓰도록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이 순서 하에서는 농민들이 고리대금을 쓸 필요가 없게 되며 또 우리가 해마다 봄과 여름을 당해서 쌀값이 올라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경제안전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벌써 많이 교정된 것인데 작년에 미국과 협의해서 달라 환산률을 500 대 1로 정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을 늘이고 공장에서는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또 농산물을 매매하는 제도와 물산수출을 전적으로 장려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해외에서 곡식을 수입할 적에는 그 물건이 제때에 들어오게 만들어야 될 것이니 이것이 제때에 들어오지 못하면 쌀값이 졸지에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환산률을 절대로 지켜서 전국이 경제상으로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을 국민들이 다 도와야 될 것이니 이것은 국민된 자의 직책이며 우리 국민이 다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갈 정책이 광대한 것이나 성공할 능력이 자재한 것이며 미국이 우리의 재건축하는 계획을 양해하고 동정해서 도웁는 힘으로 우리의 목적을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중의 복리를 위해서 성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인 것이니 우리는 희생적 정신으로 합동해서 전력을 다하여 진행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는 나라를 제일 먼저 도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행정상의 정신이며 또 국회와 모든 국민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내가 우리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일르고저 하는 말은 지금 세계가 다 공존주의의 함정에 들어가는 것 같으나 이것은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다시 새로 맹서하노니 우리들은 오직 독립으로 또 통일민주국으로 세운 한국을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을 공헌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우리 개인의 자유가 없는 것이며 우리들은 자유가 없는 생명보다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서 밑에서 다 합동으로 나아가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을 나는 아는 바입니다.
1956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내가 오늘 또 한번 우리 민중 앞에 서서 대통령 취임 선언식을 제3차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동포들이 나의 지도에 신념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내가 겸손한 마음과 영광스러운 뜻으로 평화할 때에나 전쟁 중에서나 또 국내 국외의 관계를 막론하고 우리 민족의 복리를 위해서 내 성심과 능력을 다하기를 맹서하는 바입니다.
이 다음 4년은 우리 역사에 제일 긴절한 시대입니다. 우리가 앞에 당한 여러 가지 큰 문제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당하며 여기까지 나온 역사를 대강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제일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는 통일입니다. 한국이 분렬된 것을 잠시라도 그저 두는 것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불공평한 것이며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그 반면으로 한국을 통일시키는 것은 유엔의 큰 영예가 될 것이며 또 국제상 관계에 이유와 공의를 믿는 모든 나라에 큰 성공일 것입니다.
우리 국제상의 둘째로 큰 문제는 일본이 공산당과 점점 친밀하여 가는 것입니다. 일본이 사절단을 중공과 한국 이북에 연속 보내서 공산당들과 결속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경찰이 날마다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들어오는 공산당들을 잡아드려서 저의들의 행동을 밝히 드려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군기와 재정을 상당히 준비해 가지고 들어와서 우리나라에 난동과 혁명운동을 선동하는 것이 목적인 것입니다. 만일 일본이 북경과 모스코의 공산당들의 뒤를 계속 따라간다면 어떠한 결과가 생길 것입니까. 자유세계가 이 위태한 것을 제때에 각오하고 일어설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의 내정을 말하자면 내 생각에는 지나간 첫 8년 동안에 민주정체의 진보를 성취한 것은 실로 역사상 드문 성공입니다. 일본의 선전에 빠진 사람들은 한인들이 능히 자주 국가를 진행할 준비가 되었을가를 의심했던 것입니다.[73]
오늘 와서 보면 우리 정부는 삼권분립으로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병행해서 발전되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전국적으로 또 지방적으로 여러 번 선거를 집행했었는데 매번에 각오가 깊이 박히는 것은 우리나라의 주권이 민중에게 있다는 것이며 또 우리 유권자들의 권리가 점점 늘어가서 굳건한 토대가 선 것입니다.
사회상이나 교육상의 발전은 막대한 성공입니다. 모든 어려운 문제가 많은 중에서도 우리나라는 벌서 교육의 나라가 되어서 우리 청년들이 전에 없던 기회를 가지고 무엇이든지 다 배울 수 있을 만치 교육제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한과 질병을 다 이겨냈으며 우리의 농지들을 농민들에게 다 넘겨주어서 농민들이 농토의 주인이 되게 한 것입니다. 부녀들도 날마다 정치 사회 경제상으로 진전해 나가고 있으며 우리 청년들도 새 세계의 안광을 가지고 앞으로 발전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경제상 전도도 크게 진전되고 있는 것이니 1953년 하반기까지는 미국의 원조금액을 대부분 임시 구급책에 쓰고 우리나라의 생산력을 회복하는 데는 쓰지 못했던 것이나 우리가 감사하는 것은 그 정책이 고쳐저서 지금은 전쟁에 파괴된 경제를 다시 회복하는데 놀라운 진보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원주나 춘천같이 전쟁에 전수히 파괴되였던 도시들이 날로 재건축이 되어가는 중이며 지나간 수 년 동안에 새 공장들이 건축되어서 우리 민족이 여러 대를 내려가며 누릴 복리를 양출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가 간단하게 이 몇 마디로 그 동안에 성취한 것을 말하는 것은 우리가 더욱 낙관적으로 결심해서 이 앞에 모든 어려운 문제를 이겨나가자는 뜻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이 어려운 문제를 다 인정하며 또 우리 민중의 복리를 진전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장기계획이 필요한 것을 또한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장기계획의 순서를 우리가 만들어서 진전시키는 계획은 대략 5개년을 앞두고 해나갈 것인데 그 동안에 우리가 노력해서 성공하려는 조건은 대강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중소공업을 많이 발전시키는 것이니 이 공업들을 다 민간에서 자유로 해가도록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생산력을 증가해 가지고 국내에서 쓸 것과 해외에 수출할 것을 만들며 동시에 직업을 마련해서 실업자가 없도록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발명하는 재능과 용진력이 충분함으로 지금 우리가 가장 필요한 것이 양편으로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은행의 필요를 알아서 그리로 달하여 모든 영업을 진전시킬 것이요 중소공업에 대해서는 융자를 해주는 제도를 펴놓게 하며 남은 귀속재산을 속히 다 팔아서 민간 사유물을 만들 것이니 나는 대통령의 책임으로 이 방면으로 할 수 있는 데까지 힘을 쓸 것이고 또 국회에 요청해서 애국성심으로 협조하며 이 여러 가지 긴요한 사업을 속히 또 정밀하게 도달하여 나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 수량이 늘도록 만들기를 힘쓸 것이니 이것은 수리사업과 개간사업을 개량해서 나가야 할 것이며 보통 물건값 수준에는 곡식 값이 표준이 되는 것이니 생산을 증가하는 것이 경제의 안전을 성취하고 또 유지하게 만드는 근본이 되는 것이며 이렇게 해서 정부의 공무원과 봉급 생활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버는 것을 가지고 자기와 자기 가족들이 살도록 해주어야 될 것이며 또 여기에 대해서 특히 내가 한 가지 말하려는 것은 우리 국군의 식량 부식물을 좀 더 늘여서 주리는 사람이 없도록 전력하려는 것입니다.
또 둘째로는 우리나라 농민들을 위해서 재정 순환하는 데와 물건 사고 파는데 새 제도와 개량된 방식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지금 농림부에서 전국농민회 조직을 완성하기에 힘쓰고 있는 중이니 이것이 성공되면 이전 농회에 속했던 재산을 다 그리로 넘겨줄 것입니다. 그전 농회는 전쟁 전에 해산을 시켜서 그 재산이 농림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인데 새 농민화가 조직된 후에는 그 재산도 농민회에 넘길 것입니다. 이 새 농민회는 단순히 농업관계 뿐이고 정치상에는 아무 관계가 없게 만들 것이며 이 회의 권한은 농업은행을 주식회사로 차지하고 또 주장할 것이며 이 회에서 비료 발매권과 미곡 매매권리를 가지게 되며 또 농민에게 융자를 주어 농민들이 적은 변리로 돈을 얻어 쓰도록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이 순서 하에서는 농민들이 고리대금을 쓸 필요가 없게 되며 또 우리가 해마다 봄과 여름을 당해서 쌀값이 올라가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경제안전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벌써 많이 교정된 것인데 작년에 미국과 협의해서 달라 환산률을 500 대 1로 정한 것이 큰 도움이 된 것입니다. 쌀과 다른 곡식의 생산을 늘이고 공장에서는 생산력을 증가시키며 또 농산물을 매매하는 제도와 물산수출을 전적으로 장려하자는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해외에서 곡식을 수입할 적에는 그 물건이 제때에 들어오게 만들어야 될 것이니 이것이 제때에 들어오지 못하면 쌀값이 졸지에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환산률을 절대로 지켜서 전국이 경제상으로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을 국민들이 다 도와야 될 것이니 이것은 국민된 자의 직책이며 우리 국민이 다 지켜야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해갈 정책이 광대한 것이나 성공할 능력이 자재한 것이며 미국이 우리의 재건축하는 계획을 양해하고 동정해서 도웁는 힘으로 우리의 목적을 도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 민중의 복리를 위해서 성심으로 일을 하는 것이 우리의 정책인 것이니 우리는 희생적 정신으로 합동해서 전력을 다하여 진행할 것이며 우리의 모든 행동과 생각에는 나라를 제일 먼저 도와야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행정상의 정신이며 또 국회와 모든 국민에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내가 우리 사랑하는 동포들에게 일르고저 하는 말은 지금 세계가 다 공존주의의 함정에 들어가는 것 같으나 이것은 오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번 다시 새로 맹서하노니 우리들은 오직 독립으로 또 통일민주국으로 세운 한국을 위해서 우리들은 우리의 생명과 모든 것을 공헌하기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라의 독립이 없으면 우리 개인의 자유가 없는 것이며 우리들은 자유가 없는 생명보다 죽음을 택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선서 밑에서 다 합동으로 나아가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 주실 것을 나는 아는 바입니다.
1956년 8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10. 관련 자료
이승만은 1800년대 후반부터 신문 발행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생애 동안 여러 저서와 논설 등을 남긴 바 있다. 그래서 아래에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2019년부터 이승만 전집도 차례로 발간되고 있다. 동시대 다른 인물들의 전집 발간이 대부분 이미 오래전에 완료된 것과 달리 이승만 전집 발간은 뒤늦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부터 잘 알려졌던 저작들은 이승만 재평가 흐름 이후 산발적으로 출간되어 왔고, 이를 하나의 전집으로 엮어 나오려는 시도가 있지는 않았다. 또한 이화장에 있던 일기와 서간집 등 방대한 분량의 이승만 자료들이 1990년대 중반 이후에서야 학계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본인이 저술한 저서 #===
이승만과 그의 사상을 알기 위해서 읽어봐야 할 주요 서적들이다. 이승만을 다룬 책과 연구 논문들은 많지만, 아직까지 만 90세를 살았던 이승만의 생애에 대해서 세밀한 연구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특히 이승만과 관련된 자료들에 대해서 치밀한 고증을 한 연구는 많지 않은 편이다.
2016년부터 ‘우남이승만전집발간위원회’와 ‘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의 주도 하에 『우남 이승만 전집』 발간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총 35권 발간 예정이다.
이승만의 《독립정신》 표지 이미지. 왼쪽은 1949년 판본, 오른쪽은 1954년 판본이다. |
- 한국교회핍박
- 체역집
- 옥중잡기
- 청년 이승만 자서전
1917년, 하와이에서 출판된 청일전기 표지.[74] |
- 청일전기
이승만이 1941년 7월에 미국에서 출판한 책으로, 일본 제국주의 사상을 낱낱이 분석하여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을 저술하였다. 일본 신화부터 대략적으로 설명하며 일본인들의 성전(聖戰)사명과 전쟁 심리를 분석하여 일본에 대한 전쟁의 대비를 하지 않는 미국의 평화주의자들을 비난하기도 한다. 처음 출판될 당시엔 미국인들에게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그로부터 약 5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 공습을 일으켜 일본과 미국 간 전쟁이 발발하자 그때서야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승만의 일기인 로그북[75] 원본 표지. | 친필로 쓰여진 일기장 내부 사진. |
- 이승만 일기 #
- 신영한사전
===# 전문가들의 저서 #===
실제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이 쓴 책이다.[76]
◈ 유영익
-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 - 생애 사상 업적의 새로운 조명』 (학술서적)
- 유영익, 『젊은 날의 이승만』 (학술서적)
- 유영익, 『이승만의 생애와 건국비전』 (교양서)
◈ 고정휴
- 고정휴, 『이승만과 한국독립운동』 (학술서적)
◈ 오영섭
- 오영섭, 「상해 임정내 이승만 통신원들의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52집(2007)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청일전기』 번역·간행과 자주독립론」, 『한국사학사학보』 22(2010) (학술논문)
- 오영섭, 「1910-1920년대 태평양잡지에 나타난 이승만의 정치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70집(2012) (학술논문)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 위임통치 청원논쟁」,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41집(2012)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치구상」,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61집(2009) (학술논문)
- 오영섭, 「대한민국임시정부 두 대통령 이승만과 박은식의 관계」, 『숭실사학』 제32집(2014) (학술논문)
- 오영섭, 「이승만의 상해 체류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91집(2017) (학술논문)
◈ 이정식
- 이정식, 『이승만의 청년시절』 (학술서적)
-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학술서적)[78]
◈ 정병준
-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 손세일
- 손세일, 『이승만과 김구』 (전 7권) (교양서)
◈ 김명섭
- 김명섭·김석원, 「김구와 이승만의 지정인식 : 일제강점기를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43집 제3호(2009). (학술논문)
- 김명섭·김석원, 「독립의 지정학: 대한제국(1897-1910) 시기 이승만의 지정학적 인식과 개신교」, 『한국정치학회보』 제42집 제4호(2008). (학술논문)
- 김명섭·김주희, 「20세기 초 동북아 반일(反日) 민족지도자의 반공(反共): 이승만과 장개석의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34집 2호(2013). (학술논문)
- 김명섭·김정민,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과 신문 스크랩, 1921-1922」, 『한국정치학회보』 제51집 제2호(2017). (학술논문)
- 유지윤·김명섭, 「프레데릭 B. 해리스의 한국관련 활동: 이승만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0집 1호(2018). (학술논문)
- 김정민·김명섭, 「만주사변 발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제연맹외교: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한국정치학회보』 제53집 제1호(2019). (학술논문)
- 한서영·김명섭, 「미국 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 『국제정치논총』 제59집 2호(2019). (학술논문)
- 김명섭, 「『독립졍신』에 대한 서지학적 재조명」, 『한국정치외교사논총』 제41집 1호(2019). (학술논문)
- 김명섭·박재원, 「제1차 세계대전 전후 하와이 대한인 독립운동: 이승만과 박용만을 중심으로」, 『국제정치논총』 제61집 4호(2021). (학술논문)
- 김명섭·김민식, 「전쟁과 연설 : 6ㆍ25전쟁 시기 이승만 대통령의 연설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보』 제56집 제1호(2022). (학술논문)
◈ 서중석
- 서중석,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학술서적)
-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 해방에서 4월 혁명까지』 (교양서)
◈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공동연구 총서
- 송복 외, 『저서를 통해 본 이승만의 정치사상과 현실인식』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학술서적)
- 김영호 외, 『이승만과 6.25전쟁』 (학술서적)
- 최상오, 홍선표 외, 『이승만과 대한민국 건국』 (학술서적)
- 유영익 외, 『이승만 연구』 (학술서적)
- 오영섭, 홍선표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학술서적)
- 이주영 외, 『이승만 연구의 흐름과 쟁점』 (학술서적)
===#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저서 #===
1942년 8월부터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꾸준히 후원한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교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박사. 해방 후 그는 이승만의 정치고문 역할을 담당했고 그의 공식 전기를 집필했다. |
로버트 T.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이승만의 친구이자 공보·선전분야 고문이자 개인 대변인이었다. 올리버는 연설소통학(Speech Communication)을 전공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등에서 교수를 지냈다.
◈ 신화에 가린 인물: 이승만(원제: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원서
올리버가 1954년에 미국에서 낸 책인데 한글로 번역되었다.
- 박마리아 역, 『리승만박사전: 신비에 싸인 인물』, 합동도서주식회사, 1956.
- 황정일 역, 『이승만: 신화에 가린 인물』, 건국대학교출판부, 2002.
- 서정락 역, 『이승만: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단석연구원, 2009.
◈ 이승만의 대미투쟁 上 下 (원제: Syngman Rhee and American Involvement in Korea 1942-1960)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승만과 주고받은 서한, 전보 등 원사료 중심으로 쓰여져 있으며 이승만이 미국의 정책입안자들과 벌여온 투쟁을 보여준다.
- 박일영 역, 『대한민국 건국의 내막』(전 2권), 계명사, 1998.
- 한준석 역, 『이승만의 대미투쟁: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1942-1960』 상·하, 비봉출판사, 2013.
===# 기타 #===
◈ 회고록 부류
이승만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인물들의 회고록은 방대한 양의 사료들과 비화들을 제공하여 이승만이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아카이브는 전국 각 지역 도서관 내에 지정된 원문 PC를 사용하여 무료로 볼 수 있고, 본문 검색과 저가에 프린트까지 가능하다. 관외 무료인 책들은 도서관이 아닌 어느 PC에서도 열람이 가능하다.
- 임영신, 『My Forty Year Fight For Korea - The Thrilling Personal Story of Korea's Joan of Arc』, A. A. Wyn, 1951. 온라인 아카이브
◈ 전기 부류 이승만이 하와이에서 거진 30여년간 머물면서 그의 조직을 관리하며 독립운동에 투신한 사업가 이원순의 이승만 전기이다. 자료의 종류 자체가 상당해서 버릴 것이 없지만, 1960년대에 나온 책이라 날짜나 숫자면에서 꽤 오류들이 있음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시인 서정주는 그가 청년기였던 1948~9년도에 대통령으로 재직 중인 이승만에게 불려가 구술로 그의 일대기를 기록하였다. 이후 이화장에 기거하던 프란체스카 여사를 찾아가 인터뷰하여 추가 내용을 보강한 후 재출간 되었다.
◈ 이한우의 저서
- 이한우, 『거대한 생애 이승만 90년(전 2권)』, 조선일보사, 1995.
◈ 김인서 목사의 저서
망명노인 이승만 박사를 변호함 서적정보
- 김인서 저, 이주영 편, 『망명노인 이승만박사를 변호함』, 2016, 비봉출판사.
◈ 이덕희의 저서
- 이덕희 외, 『이승만과 하와이 한인사회』,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2 온라인 아카이브
- 이덕희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 2013
- 이덕희 『이승만의 하와이 30년』, 북앤피플, 2015. 서적정보
◈ 이주영의 저서
- 이주영, 『이승만이 대한민국이다: 대륙문명권에서 해양문명권으로』, 북앤피플, 2022.
◈ 김삼웅의 저서
-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 권력의 화신 두 얼굴의 기회주의자』, 두레, 2020.
◈ 김용삼의 저서
- 김용삼, 『이승만의 네이션빌딩 ― 대한민국의 건국은 기적이었다』, 북앤피플, 2014. 서적정보
◈ 최기일의 저서
- 최기일, 『자존심을 지킨 한 조선인의 회상』, 생각의나무, 2002. 서적정보
◈ 공저
- 남정옥·류석춘, 『이승만 깨기:이승만에 씌어진 7가지 누명』, 백년동안, 2015. 서적정보
◈ 청소년용 위인전
- 정현채, 『엄마가 들려주는 이승만 건국 대통령 이야기』, 도서출판보담, 2020. 서적정보
===# 다큐멘터리 #===
▲한국사전: 이승만 2부작 (2008.8.30.~2008.9.6. KBS1)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대통령 이승만 (2011.9.28.~2011.9.30. KBS1)
총 3부작으로 구성돼 있으며, 김정수 CP가 기획한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1부는 '개화와 독립', 2부는 '건국과 분단', 3부는 '6.25와 4.19'로 각각 구성돼 있다. 이 프로그램에선 이승만이 미국과의 원조 협상에서 기선제압식으로 성사시켜 외교 주도권도 양보 못할 사람으로 그려 친미주의자 프레임을 벗었고, 원자력의 필요성을 제창하고 과학자를 키운다거나 의무교육을 확대시킨 점, 반공포로 석방을 지시한 점 등의 공적을 많이 다뤘다. 물론 손세일이나 유영익 등과 같은 이승만에 긍정적인 인물들 중심으로 인터뷰가 나오지만, 이승만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김삼웅이나 주진오, 브루스 커밍스 그리고 김동춘 등의 인물들의 입장과 인터뷰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됐는데, KBS 2노조 측이 '독재자 미화'라며 제작을 반대한 바 있으며, PD저널에서도 문제를 제기했다.[87] 그 1부에선 임시정부 위임통치 파문에 대해 사실만 얘기했지 파장은 안 다뤘고, 2~3부에선 친일청산 실패를 '인력 부족' 탓이라 한다거나 거창 양민학살 사건을 '훈련이 안 된 병사들이 한 짓'이라 하고, 이승만에게 민간인 학살의 큰 책임이 있는 제주 4.3 사건은 일체 다루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승만 최악의 행적이라 할 수 있는 국민보도연맹 학살에 대한 내용이 다큐멘터리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960년 4.19 혁명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을 거론하는 대신 교수 시국선언 후 이승만이 직접 사태를 파악해 병원에서 부상자를 위로하는 모습도 내보냈다. 새로운 사실 전달마저도 이승만이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고종의 선물인 나전칠기를 전달한 얘기 정도다.
2013년에는 청미디어를 통해 단행본으로 나왔다.
▲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2012.11.29. 민족문제연구소)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에서 분석한 다큐멘터리다. 친일파 문제를 주로 연구하고 있는 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제작했으며, 서중석, 정병준, 주진오, 이만열 등의 한국 근현대사 전공자들의 인터뷰와 미국 측 상당히 많은 근거자료를 토대로 만들어 졌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승만의 독립운동 시절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그 후속작은 박정희 편인 프레이저 보고서와 함께 나오지 않고 있다. 독립운동 시절의 이승만에 대해 비판의 강도가 꽤나 높다 보니, 한국 정치사회에서 많은 비판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지나치게 일방적이고 악의적인 편집으로 객관성을 훼손했다며 고등법원에서 중징계 제재 판결을 받기도 했지만, 2019년 대법에서 파기환송되었다.[88]
11. 대중매체에서
자세한 내용은 이승만/창작물 문서 참고하십시오.12. 각종 타이틀
- 최초이자 윤보선과 함께 둘 뿐인 조선 시대 출신이자 19세기에 출생한 대통령[89]
- 유일하게 《 조선왕조실록》과 《 승정원일기》에 기록이 남은 대통령[90]
- 유일하게 과거시험을 본 대통령[91]
- 유일하게 80대에 재임한 대통령[92][93]
- 한국인 최초의 박사 학위 취득자
- 윤보선과 함께 둘 뿐인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
- 유일한 독립유공자 출신 대통령
- 현재[A]까지 유일한 국회의장 출신 대통령
- 최초로 임기를 끝내 마치지 못했던 대통령
- 유일하게 스스로 하야한 대통령[95]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 현재[A] 기준 세 번째로 장수한 대통령[97]
- 현재[A]까지 유일하게 외국에서 사망한 대통령
- 현재[A]까지 유일하게 외국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
- 가장 많은 계엄령을 선포한 대통령 (10번, 경비계엄: 3번, 비상계엄: 7번)
- 유일하게 아들만 있는 대통령[100]
- 현재[A]까지 유일하게 입양 자녀가 있는 대통령
- 최초이자 박정희와 더불어서 이혼 후 재혼 경험이 있는 둘 뿐인 대통령[102]
- 유일한 이북 출신 대통령[103][104]
- 2024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13. 관련 단체
- (사)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 (재)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
- 이승만학당: 2016년 자유통일문화원 부설로 발족되어 2018년 법인화된 이승만 정신계승 교육기관. 이영훈이 설립자 겸 교장으로 재직 중이다.( 관련 기사)
1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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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문식 | 이재형 | 김재순 | 박준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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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섭 | 박관용 | 김원기 | 임채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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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오 | 박희태 | 강창희 | 정의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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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균 | 문희상 | 박병석 | 김진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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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원식 |
}}} 국회부의장 · 임시의정원 의장}}}}}}}}} |
지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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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 |||
<rowcolor=#87ceed> 초대 안경수 |
제2대 |
제3대 서재필 |
제4대 윤치호 |
|
간부 | ||||
위원장 |
|
고문 | 서재필 | |
위원 | ||||
김가진 | 남궁억 | 박정양 | 송헌빈 | |
안창호 | 오세창 | 유길준 | 윤치호 | |
이상재 | 이승만 | |||
* 1898년 7월 17일 제명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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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 |||||||
유진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명예회장 | ||||||
김구 | 김규식 | 이승만 | }}}{{{#!wiki style="margin: -6px -1px -10px" | 감찰부장 | ||||
김두한 | ||||||||
고문 | ||||||||
신익희 | ||||||||
별동대 | ||||||||
김영태 | 조희창 | 문영철 | 김관철 | |||||
김무옥 | 신영균 | 홍만길 | 고경주 | }}}}}}}}} |
대표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254170> 제1-5대 이승만 |
제6대 조경규 |
|||
}}}}}}}}}}}} |
무궁화대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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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한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49년 | 8월 15일 | 이승만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0년 | 8월 13일 | 윤보선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3년 | 12월 5일 | 12월 17일 | 박정희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67년 | 6월 23일 | 육영수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79년 | 12월 7일 | 최규하 | 대통령 | 대한민국 | 12.12 군사반란으로 하야 | ||
1979년 | 12월 7일 | 홍기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전두환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0년 | 8월 29일 | 8월 29일 | 이순자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노태우 | 대통령 | 대한민국 | 무궁화대훈장 이외의 모든 훈장 취소 | |
1988년 | 2월 24일 | 2월 25일 | 김옥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김영삼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3년 | 2월 11일 | 2월 23일 | 손명순 | 영부인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김대중 | 대통령 | 대한민국 | ||
1998년 | 2월 17일 | 2월 25일 | 이희호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노무현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08년 | 1월 28일 | 권양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이명박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2일 | 김윤옥 | 영부인 | 대한민국 | |||
2013년 | 2월 19일 | 박근혜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문재인 | 대통령 | 대한민국 | |||
2022년 | 5월 3일 | 김정숙 | 영부인 | 대한민국 | }}}}}}}}}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외국인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상훈 연도 | 결정일 | 수여일 | 이름 | 직책 | 국적 | 비고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하인리히 뤼프케 | 대통령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4년 | 12월 3일 | 12월 8일 | 빌헬미네 뤼브케 | 영부인 | 서독 | 외국인 최초 상훈자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이스마일 나시루딘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7일 | 틍쿠 인탄 자하라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푸미폰 아둔야뎃 | 국왕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0일 | 시리낏 끼띠야콘 | 왕비 | 태국 | ||
1966년 | 2월 1일 | 2월 15일 | 장제스 | 총통 | 중화민국 | ||
1968년 | 5월 10일 | 5월 18일 | 하일레 셀라시에 | 황제 | 에티오피아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반티에우 | 총통 | 남베트남 | ||
1969년 | 5월 23일 | 5월 27일 | 응우옌티마이아인 | 제1부인 | 남베트남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하마니 디오리 | 대통령 | 니제르 | ||
1969년 | 10월 28일 | 10월 28일 | 아이샤 디오리 | 영부인 | 니제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피델 산체스 에르난데스 | 대통령 | 엘살바도르 | ||
1970년 | 9월 25일 | 9월 28일 | 마리나데 산체스 에르난데스 | 영부인 | 엘살바도르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오마르 봉고 | 대통령 | 가봉 | ||
1975년 | 6월 27일 | 7월 5일 | 조세핀 봉고 | 영부인 | 가봉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대통령 | 세네갈 | ||
1979년 | 4월 17일 | 4월 23일 | 콜레테 위베르트 상고르 | 영부인 | 세네갈 | ||
1980년 | 5월 11일 | 할리드 빈 압둘아지즈 알사드 | 국왕 | 사우디아라비아 | |||
1980년 | 5월 14일 | 자베르 알아흐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1981년 | 6월 25일 | 수하르토 | 대통령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5일 | 시티 하티나 | 영부인 | 인도네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아마드 샤 이브니 아부 바카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1년 | 6월 29일 | 틍쿠 아프잔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1년 | 7월 6일 |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81년 | 7월 6일 | 이멜다 마르코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81년 | 10월 13일 | 로드리고 카라소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1년 | 10월 13일 | 에스트레야 셀레돈 리사노 | 영부인 | 코스타리카 | |||
1982년 | 5월 10일 | 사무엘 도 | 대통령 | 라이베리아 | |||
1982년 | 6월 7일 | 모부투 세세 세코 | 대통령 | 자이르 | |||
1982년 | 6월 7일 | 보비 라다와 | 영부인 | 자이르 | |||
1982년 | 8월 25일 | 압두 디우프 | 대통령 | 세네갈 | |||
1982년 | 12월 21일 | 케난 에브렌 | 대통령 | 튀르키예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자파르 모하메드 니메이리 | 대통령 | 수단 | ||
1983년 | 3월 10일 | 3월 15일 | 부띠나 칼릴 압불핫산 | 영부인 | 수단 | ||
1983년 | 9월 10일 | 후세인 1세 | 국왕 | 요르단 | |||
1983년 | 9월 10일 | 누르 | 왕비 | 요르단 | |||
1984년 | 4월 9일 | 하사날 볼키아 | 국왕 | 브루나이 | |||
1984년 | 4월 21일 | 할리파 빈 하마드 알타니 | 국왕 | 카타르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다우다 자와라 | 대통령 | 감비아 | ||
1984년 | 8월 30일 | 9월 13일 | 치렐 자와라 | 영부인 | 감비아 | ||
1985년 | 5월 17일 |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 대통령 | 파키스탄 | |||
1985년 | 5월 20일 | 루이스 알베르토 몽헤 | 대통령 | 코스타리카 | |||
1986년 | 9월 4일 | 4월 10일 | 엘리자베스 2세 | 국왕 | 영국 | ||
1986년 | 9월 4일 | 4월 16일 | 보두앵 | 국왕 | 벨기에 | ||
1987년 | 4월 7일 | 아메드 압달라 | 대통령 | 코모로 | |||
1988년 | 11월 3일 | 이스칸다르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88년 | 11월 3일 | 자나리아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20일 |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 대통령 | 서독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프랑수아 미테랑 | 대통령 | 프랑스 | ||
1989년 | 11월 3일 | 11월 30일 | 다니엘 미테랑 | 영부인 | 프랑스 | ||
1990년 | 6월 21일 | 안드레스 로드리게스 | 대통령 | 파라과이 | |||
1990년 | 11월 5일 | 괸츠 아르파드 | 대통령 | 헝가리 | |||
1991년 | 9월 13일 | 아즐란 샤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13일 | 투안쿠 바이눈 | 왕비 | 말레이시아 | |||
1991년 | 9월 25일 |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 고르타리 | 대통령 | 멕시코 | |||
1992년 | 8월 13일 | 호르헤 안토니오 세라노 엘리아스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피델 라모스 | 대통령 | 필리핀 | ||
1993년 | 5월 20일 | 5월 25일 | 이멜리타 마르티네스 라모스 | 영부인 | 필리핀 | ||
1994년 | 11월 7일 | 11월 21일 | 에두아르도 프레이 루이스 타글레 | 대통령 | 칠레 | ||
1994년 | 12월 5일 | 12월 9일 | 레흐 바웬사 | 대통령 | 폴란드 | ||
1995년 | 2월 7일 | 2월 16일 | 이슬람 카리모프 | 대통령 | 우즈베키스탄 | ||
1995년 | 2월 21일 | 3월 6일 | 로만 헤어초크 | 대통령 | 독일 | ||
1995년 | 3월 28일 | 4월 3일 | 젤류 젤레프 | 대통령 | 불가리아 | ||
1995년 | 6월 26일 | 7월 7일 | 넬슨 만델라 | 대통령 | 남아프리카 공화국 | ||
1995년 | 9월 26일 | 9월 29일 | 카를로스 메넴 | 대통령 | 아르헨티나 | ||
1996년 | 7월 23일 | 9월 4일 | 알바로 아르수 | 대통령 | 과테말라 | ||
1996년 | 7월 23일 | 페르난두 카르도주 | 대통령 | 브라질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후안 카를로스 1세 | 국왕 | 스페인 | ||
1996년 | 10월 8일 | 10월 20일 | 소피아 마르가리타 빅토리아 프리데리키 | 왕비 | 스페인 | ||
1996년 | 11월 26일 | 자파 이브니 압둘 라만 | 국왕 | 말레이시아 | |||
1996년 | 12월 10일 | 12월 15일 | 레오니드 쿠치마 | 대통령 | 우크라이나 | ||
2000년 | 2월 22일 | 3월 3일 | 카를로 아첼리오 참피 | 대통령 | 이탈리아 | ||
2000년 | 2월 22일 | 3월 6일 | 자크 시라크 | 대통령 | 프랑스 | ||
2006년 | 3월 12일 |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 대통령 | 알제리 | |||
2007년 | 3월 26일 | 사마 알아마드 알자베르 알사바 | 국왕 | 쿠웨이트 | |||
2007년 | 3월 28일 | 하마드 빈 할리파 알사니 | 국왕 | 카타르 | |||
2009년 | 5월 13일 |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 대통령 | 카자흐스탄 | |||
2009년 | 11월 12일 | 알란 가르시아 | 대통령 | 페루 | |||
2012년 | 5월 30일 | 칼 16세 구스타프 | 국왕 | 스웨덴 | |||
2012년 | 11월 21일 |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 | 대통령 | 아랍에미리트 | |||
2018년 | 10월 8일 | 에마뉘엘 마크롱 | 대통령 | 프랑스 | |||
2019년 | 하랄 5세 | 국왕 | 노르웨이 | ||||
2021년 | 6월 14일 |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 대통령 | 오스트리아 | |||
2021년 | 6월 16일 | 펠리페 6세 | 국왕 | 스페인 | |||
2021년 | 6월 16일 | 레티시아 오르티스 로카솔라노 | 왕비 | 스페인 | |||
2021년 | 8월 25일 | 이반 두케 | 대통령 | 콜롬비아 | |||
2021년 | 9월 21일 | 보루트 파호르 | 대통령 | 슬로베니아 | |||
2023년 | 7월 13일 | 안제이 두다 | 대통령 | 폴란드 | |||
2023년 | 11월 21일 | 찰스 3세 | 국왕 | 영국 | |||
2024년 | 11월 16일 | 디나 볼루아르테 | 대통령 | 페루 | }}}}}}}}}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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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
1949 이시영 |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
1953 장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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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
1957 응오딘지엠 |
1958 아드난 멘데레스 |
1962 허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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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김좌진 |
1962 오동진 |
1962 조병세 |
1962 안중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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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윤봉길 |
1962 이준 |
1962 강우규 |
1962 김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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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안창호 |
1962 신익희 |
1962 김창숙 |
1962 손병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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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이승훈 |
1962 한용운 |
1962 최익현 |
1962 이강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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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민영환 |
1964 더글러스 맥아더 |
1964 해리 S. 트루먼 |
1964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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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프랑수아 톰발바예 |
1965 다비드 다코 |
1965 수루-미강 아피디 |
1965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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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펠릭스 우푸에부아니 |
1965 레옹 음바 |
1965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
1965 하마니 디오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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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조모 케냐타 |
1965 무테사 2세 |
1965 필리베르트 치라나나 |
1965 툰쿠 압둘 라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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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 타놈 키티카초른 |
1966 쑹메이링 |
1966 천궈푸 |
1968 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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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천치메이 |
1969 피델 산체스 아르난데스 |
1970 조만식 |
1976 임병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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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필립 제이슨 (서재필) |
1979 박정희 |
1980 최규하 |
1981 시리낏 끼띠야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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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푸미폰 아둔야뎃 |
1983 |
1989 김규식 |
1989 조소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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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장면 |
2008 여운형 |
2019 유관순 |
2021 홍범도 |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및 국가원수}}}}}}}}} |
독립운동사의 삼만 | ||
우남 이승만 | 검은 정순만 | 우성 박용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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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 |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자유당 | |
연립여당 | 한국민주당 · 민주국민당 · 대한국민당 | |
정책 및 방향 | 경제개발 3개년 계획 · 의무교육 · 의무 복무 · 시장경제체제 · 지방자치제 · 한미상호방위조약 · 농지개혁법 · 국가보안법 · 이승만 라인 ( 평화선) · 한국외국어대학교 · 인하공과대학 · 한미상호방위원조협정 · 한미원조협정 · 사면법 · 양곡매입법→양곡관리법 · 심계원법 · 국군조직법 · 국적법 · 임시우편단속법 · 법원조직법 · 변호사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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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라인 | ||
1948년 | 반민족행위처벌법 통과 · 행정권 이양 · 제주 4.3 사건 · 여순사건 · 국가보안법 제정 | |
1949년 | 반민특위 해산 · 해병대 창설 · 공군 창설 · 병역법 제정 · 징병검사 실시 · 국회 프락치 사건 · 백범 김구 암살 사건 | |
1950년 | 6.25 전쟁 발발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 유엔군 참전 · 한강 인도교 폭파 · 부산 수도 이전 · 인천 상륙 작전 · 흥남 철수 · 한강 방어선 전투 · 춘천-홍천 전투 · 주문진항 해전 · 오산 전투 · 동락리 전투 · 진천 전투 · 천안 전투 · 대전 전투 · 장항-군산-이리 전투 · 안동전투 · 다부동 전투 · 흥남철수 · 보도연맹 학살사건 ·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 선거법 제정 · 국민방위군 설치령 · 농지개혁 · 한국은행 발족 · 유네스코 가입 | |
1951년 | 1.4 후퇴 · 거창 양민 학살사건 · 국민방위군 사건 · 한국조폐공사 설립 · 자유당 창당 | |
1952년 | 제2대 대통령 선거 · 발췌 개헌 · 이승만 라인 ( 평화선) 선포 · 백마고지 전투 | |
1953년 | 정전 협정 ( 휴전) ·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 국제시장 대화재 · 노동 3법 제정 | |
1954년 | 사사오입 개헌 · 제3대 국회의원 선거 · 독도의용수비대 파견 | |
1955년 | 단성사 저격 사건 | |
1956년 | 제3대 대통령 선거 · 1956년 지방선거 ·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 한국증권거래소 발족 | |
1957년 | 저작권법 제정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 가짜 이강석 사건 | |
1958년 |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진보당 사건 · 농업협동조합 발족 | |
1959년 |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 조봉암 사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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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제헌 국회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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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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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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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진영 관련 문서 ( 진보 · 민주당계) |
[1]
음력
1875년
2월 19일
[2]
#
[3]
대한민국
이북5도위원회 기준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4]
국문으로 된 한국 정부의 공문서에는 위에 있는 한문 휘호로 서명하였고, 보고서에는 '晩'자를 흘려써서 서명하였다.
[5]
양녕대군파 16대손, 시조 40세손 승○(承○) 항렬.
( 족보) [6] 두 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사실상 장남이었다. [7]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이다.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 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법원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8]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결혼식(중혼)을 올렸고, 소송으로 박승선의 호적이 말소된 사이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를 했다. 1965년 하와이에서 임종하는 순간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9] 아명은 태산. 박승선 사이에서 둔 그의 유일한 친아들이었으나 10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10] 최초의 한국인 박사. 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1912) [11] # [12]
169cm인 장제스보다 더 작은 걸 보아선 노년에는 키가 줄어 165cm 정도였던걸로 보인다. 보다시피 옆의 166cm의 쑹메이링과 비슷한 키였음을 알 수 있다. [13] 족보에는 운남(雲南)이라고 써져 있다. 아마 한자획을 그을 때 잘못 그은 모양. [14] 2대 대통령 취임사는 음성 전체가 모두 녹음되어 있어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 # [15]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서당이었다. [16]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이근수가 운영하는 서당으로, 한성부 용산에 위치해 있었다. [17] 현 배재고등학교. [18] 서재필이 세운 최초의 학생 단체다. [19] 본래 1908년 전 과정을 수료했으나 사회적 이슈들로 미국인 교수들에게 냉대를 받아 석사 학위 수여가 연기되었다. [20] 학위명은 Ph.D.(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 정치학을 전공하여 35살에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되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1912년에 출간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며 원문은 인터넷에서 pdf 파일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번역본도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먼저 3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 및 해제를 하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에서 출간한 것이 있고, 다음으로 외교공무원이 단독으로 완역을 하여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이 있다. [21] 그에게 직접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 훗날 제28대 미국 대통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이었다. [22]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 [23]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2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07&cid=62049&categoryId=62049 [25] 일명 구미위원부 [26] 공식적으로 취임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운형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게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은 해외에 있었으며, 귀국한 이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 취임을 거절했다. 사실 이승만 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요직에 일방적으로 추대되었는데 자세한 건 조선인민공화국 문서 참조. [27] 한국인 최초의 명예박사 취득자다.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박사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28]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9]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홍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30] 조선의 왕가와 비교했을 때에는 익종(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부친), 철종, 흥선대원군과 형제 뻘이였다. 3명 다 이승만의 34촌 형이며 이승만보다 익종이 66년, 철종이 44년, 흥선대원군이 54년 연장자다. [31]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 후손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 둘 다 양녕대군의 둘째 서자 장평부정(長平副正) 이흔(李訢)의 후손은 맞지만 그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32]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일본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며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동한다. # # [33]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북측에서도 일찍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차리는 등 독자적으로 정부 수립 절차를 밟고 있었던 데다 김일성이 건재하는 이상 타협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운 좋게 단일정부가 성립된다 쳐도 공산주의가 혼합될 염려가 있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남쪽에서 따로 자본주의 국가를 세운 뒤에 남측 주도로 통일한다. 라는 판단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니면 그냥 권력을 위해 분열을 감수한 거라는 시각도 있다. 김구나 김규식 등은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반대했다. [34] 어렸을 때 서울 우수현 남쪽에서 자라서 호를 '우남'이라 지었다. [35]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자리하였다. [36] 당시 행정구역 기준 동대문구 갑. 관할 모든 동들이 서울 확장으로 인한 분구와 구간 경계 조정을 거치면서 다른 구로 이관 되었다.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 돈암동, 성북동. [37] 1948.7.20. 사퇴. ( 초대 대통령 당선) [38]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39]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최고 득표율.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2위와 최고 득표율 차 당선. (63.26%) [40] 사유: 당선인의 자진 사퇴. [41]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정계 입문. [42] 독립협회 강제 해산. [43]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탈당. [44] 흥업구락부 창당을 위한 탈당. [45]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인한 정당 해산. [46]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신설 합당. [47] 4.19 혁명으로 인한 대통령직 하야로 탈당. [48]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 헌데 언젠가부터 한자 발음이 와전되어 호열자라고도 불렸다. [49] 출처: 로버트 T. 올리버의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50] 조선이라는 나라를 배에, 지배층을 선원에, 백성들을 선객에 비유하며 무기력하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백성들이 자기 일이라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51] 조선인들의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여전히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양반은 조상이 이름났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어도 자리를 차지하고 비천한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상놈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니 수많은 잠재적 인재들이 썪고 있음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52] 이는 이승만 정부가 20세 이상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하면서 실현된다. [53] 이승만은 교육을 중시한 사람답게 부족한 인건비 예산 중 교사의 봉급을 늘 1순위로 지급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나 군인의 비리가 횡행하는 문제가 있었다. [54] 소련이 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2번이다. 나머지 1, 3, 4, 5번은 소련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지만, 2번은 공산주의 자체의 근본적 결함이기에 도저히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문단 참조. 이승만은 소련이 탄생한 직후부터 이미 소련이 가진 근본적 문제점을 통찰한 셈이다. 1950년대 식민지가 해체되며 탄생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공산주의를 국가 정책 이념으로 채택하는 와중에도 자본주의에 기반한 혼합경제체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55] 이 책이 쓰여진 1941년 당시는 이미 중일전쟁과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정세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평화주의를 배격하자는 전쟁광적 발언이 아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외치는 평화주의는 적국에 이익을 가져다 줄 뿐 진정한 평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일본 내막기를 읽어보면 당시 평화주의자라는 자들이 얼마나 대책없는 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지 오웰 역시 같은 시기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한 쪽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건 다른 쪽의 전쟁 수행을 돕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평화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만 이 발언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이미 평화와의 저울질이 끝나고 결단이 내려진 상태를 의미하기에 평화주의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56]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19-220 [57]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 이후로는 이 말을 패러디해 역으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2009년 1박 2일 혹한기 특집에서 재발굴된 이후 꾸준히 유행어는 아니어도 쓰인 문장이었다. [58] 이승만의 발언 중 제일 유명한 말이라서, 이승만 성대모사를 하는 개그맨들은 십중팔구 다 이 문장을 따라한다. [59] 다만 미국에서 철강 산업에 태클을 건 데다가 보유 기술도 없던 국면이라 전쟁 후에 철강 산업을 진행하지는 못 했다. [60] 출처: 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91쪽 [61]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하자,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민심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승만에게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권유를 하자, 이승만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내뱉은 말로 알려져있다. 당시 서울을 점거한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 색출을 한다면서 무려 55만 915명을 검거하고 # 그들 중에서 800명을 사형시킨 일이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이승만은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344 [a] [a] [65] <38선은 없어졌다. 휴전 결사반대. 38선 대신 압록강을 달라. 38선 대신 두만강을 달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여러개 구호를 번갈아 들면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몇 달 동안 데모를 해야 했다. 이때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결사적인 데모를 하였다. [66] 이는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로 손꼽힌다. 2020년대에도 이 조약의 실용성은 인정받으며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현재와 달리 당시 미국은 극빈국이었던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에 투자하는게 훨씬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약속한 단순한 군사적 지원에 만족했다면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안보 불안에서 비롯한 과도한 군비로 인해 성장 동력을 잃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67] 대체 연료의 공급 없이 녹화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석탄과 도시가스 공급 없이는 나무를 베어 연료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재해 빈발로 이어져 경제 성장 동력을 크게 저하한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68] 출처: 김정렬 국방장관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 [69] 이승만은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열심히 강조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하야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어떻게 하야하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이 어록을 보면 마치 자기자신과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3.15 부정선거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부정선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획책한 건 아니었다는 옹호 의견도 제기된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대선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사망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 정권이 바뀔 수 있었기에 자유당 인사들이 눈치껏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이승만도 혁명 1주일 전에야 국무회의에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선거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인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일명 2.13 담화)를 발표해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나, 당시 최인규(당시 내무부장관)가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었다고 고백한(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것을 보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직접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다 한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제1공화국 내각 인사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70]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그랬지만 외교에 집중하는 국정운영 스타일로 인해 내치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를 지적하며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 평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일품. 이를 옹호하는 이들은 식민정책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가 적어 고졸이 엘리트로 취급받았던 때에 독립하자마자 전쟁까지 겪고 북한군이 사회인사나 학자를 납치해가는 바람에 인재가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독립 당시 한국에는 박사 학위자가 5명(...)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반 이상이 월북해 버렸다. 아무튼 이로 인해 임기 내내 국내 문제에 시달렸고, 급기야 여당의 과잉충성과 여기서 비롯한 부정선거를 예방하지 못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71] 말년에 이승만 스스로가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자조한 것은 자기 스스로가 국정에 있어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을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엄연히 제1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중심이었던 이기붕의 폭주를 막지 못했으니 부정선거를 예방할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을 이야기한 이 발언은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행사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옹호 측에서는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자행한 게 아니기에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결국 그가 예방하지 못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72]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 [73] 이는 확실히 윤치호가 남긴 마지막 글인 '한 노인의 명상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74] 원고는 옥중에서 탈고되었다. [75] Log Book, 항해일지 [76] 여기에는 각 학자들의 연구서중 이승만을 제목/주요 소재로 다룬 연구서만 기술했다. 해당 학자들의 다른 저서에도 이승만의 행적과 평가가 언급된 경우가 많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당 학자들의 다른 연구성과 및 연구사도 찾아보길 바란다. [77] 이인수가 기증한 문서군들은 오늘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많다. [78] 위 저서의 증보판 [79] 손세일은 신동아 및 사상계 편집장 등을 지낸 언론인으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래 주로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 [80]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한국현대사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링크 [81] 조선공산당/남로당과 같은 본래 의미의 좌익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좌우합작 및 통일을 지향한 중도파 세력에게 매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좌익 및 중도파가 모두 사라진 1948년 이후에는 이승만의 대항마로 조봉암을 매우 강력하게 띄워준다. [82] 이승만을 다룬 연구서 전반의 서론을 살펴보면, 1990년대 이후 대두된 이승만 재평가론에 대항하기 위해 이승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83] 주의해야할 점은 1998년에 외교부에서 출판한 버전은 이승만과의 일화들을 빼고 외교적 기록만 부분 발췌한 것이라 내용이 부실할 수 있다. [84] 공교롭게도 본인의 상사 이승만이 재학했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최초의 한국인 학부생이 되기도 했고, 이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85] 단순히 지지를 한 것을 넘어서 김대중에게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과 미국 상원의원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실질적으로 김대중에게 미국 정계 인맥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다. [86] 해방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 최기일은 이승만의 비서를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이 힘을 합쳐서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우익진영에 더할나위 없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장준하의 수기 <돌베개>에 나온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정세가 점점 악화되어가서 결국 이 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최기일은 아예 정부수립 전에 이승만 곁을 떠나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래도 미국에 체류하면서 가끔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에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 [87] 아무래도 2부가 '건국과 분단'이라는 제목을 쓰다보니 그런 듯 하다. [88]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다소 이승만에 대한 '밈(Meme)'적인 표현들도 있다. 그것이 악의적인 편집으로 반대측에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89] 대한제국의 경우 존속기간이 짦아서 대한제국 시기에 출생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다. [90] # # # # # # 단, 이는 《 고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할 경우에 한한다. 조선이 1910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실릴 대통령은 영원히 없다. 참고로 거의 다 독립협회 관련해서 처벌받은 내용이다. [91] 합격한적은 없다. 5살때 서울로 내려와 고명한 스승밑에서 사서삼경을 포함해 수많은 고서들을 달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13살때부터 19살때까지 7번이나 내리 낙방했다. 참고로 문과 최종급제자 평균연령은 35세였다. [9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 한정한다면 가장 최연소 대통령은 1963년 취임한 박정희(1917년생)이며, 다시 민주화 이후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한 노무현(1946년생)이다. [93] 만약 임시정부를 포함하게 된다면 이승만이 최고령 재임과 최연소 재임 두 타이틀 모두 갖게 된다. [A] 2024년 [95]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최규하는 전두환에게 각각 대통령직을 강탈당하였고, 박정희는 임기 중에 암살당했고,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을 당했다. [A] [97] 현재 가장 장수한 대통령은 1990년 92세로 사망한 윤보선이다. 두 번째는 2021년 90세(+10개월)로 사망한 전두환이다. [A] [A] [100] 김대중에게도 김소희라는 딸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A] [102] 김대중과 윤보선도 재혼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이혼이 아닌 사별 후 재혼이다. [103]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황해도 출신은 물론 이북 출신 대통령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19대 국회에서 이북 출신인 사람은 김진표에 더해 조명철이 있었다가 20대 국회에서는 김진표만이 유일하게 되었고, 21대 국회에서는 김진표에 더해 태영호, 지성호가 추가로 이북 출신으로서 당선되었다. 새터민 출신이 아니고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 다만 본적지가 이북인 대통령은 존재한다. 19대 문재인은 양친 모두 이북 출신이다. [104] 이회창도 황해도 출신이어서 만약 당선됐다면 두 번째 이북 출신 대통령이었겠지만, 총 3번의 대선 출마 결과 모두 낙선하면서 결국 이승만이 유일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2022년 기준으로 대권을 도전하는 후보들도 최소 1950년대 이후 출생이니 앞으로는 통일이 되거나 태영호 등의 탈북자 출신 정치인이 대권주자급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나올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 족보) [6] 두 형이 이른 나이에 요절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사실상 장남이었다. [7]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이다. 출처: 《전주이씨족보》 이승만편., 출처2:쿠키뉴스 박승선 취재1 취재2 취재3 오마이뉴스 국민일보 한겨레1891년 혼인. 쿠키뉴스의 취재 등 여러 언론에 따르면 박승선은 이혼에 합의한 적이 없고 해방 이후 면담 역시 거부되었다. 끝까지 자기가 본부인이며, 다른 이가 있다면 첩이라고 주장했다. 박승선의 주장은 무시당했다. 1912년 이혼했다는 설이 널리 퍼져있지만, 사실은 이승만 측에 의해 소송을 당해 1949년 6월 4일 혼인 관계와 호적이 말소되고 말았다. 그리고 지방 법원 판결조차 제대로 거치지 않았다. 이는 1960년대 여러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고, 1965년 8월 8일 조선일보 당대 기사에서 호적 말소는 법적 소송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시정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1960년의 부산일보 9월 20일 기사에서는 이승만이 1912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호적에 손을 댄 적이 없으며, 박승선이 이은수를 양자로 맞아 호적상 이승만의 장남으로 기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이는 박승선이 1912년 이후에도 호적에 부인으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8] 1934년 10월 8일 뉴욕 몽클레어 호텔에서 오랜 친구인 윤병구 목사와 존 헤인즈 홈즈 박사의 주례로 결혼식(중혼)을 올렸고, 소송으로 박승선의 호적이 말소된 사이 1950년 4월 프란체스카와 종로구청에 결혼 신고를 했다. 1965년 하와이에서 임종하는 순간까지 평생을 함께했다. [9] 아명은 태산. 박승선 사이에서 둔 그의 유일한 친아들이었으나 10살 때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10] 최초의 한국인 박사. 학위 논문: 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 1912) [11] # [12]
169cm인 장제스보다 더 작은 걸 보아선 노년에는 키가 줄어 165cm 정도였던걸로 보인다. 보다시피 옆의 166cm의 쑹메이링과 비슷한 키였음을 알 수 있다. [13] 족보에는 운남(雲南)이라고 써져 있다. 아마 한자획을 그을 때 잘못 그은 모양. [14] 2대 대통령 취임사는 음성 전체가 모두 녹음되어 있어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 # [15] 퇴직 대신 이건하가 운영하는 서당이었다. [16]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이근수가 운영하는 서당으로, 한성부 용산에 위치해 있었다. [17] 현 배재고등학교. [18] 서재필이 세운 최초의 학생 단체다. [19] 본래 1908년 전 과정을 수료했으나 사회적 이슈들로 미국인 교수들에게 냉대를 받아 석사 학위 수여가 연기되었다. [20] 학위명은 Ph.D.(Doctor of Philosophy; 철학박사), 정치학을 전공하여 35살에 한국인 최초의 박사가 되었다.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1912년에 출간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이며 원문은 인터넷에서 pdf 파일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번역본도 두 가지가 존재하는데, 먼저 3명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번역 및 해제를 하여 연세대학교 대학출판문화원에서 출간한 것이 있고, 다음으로 외교공무원이 단독으로 완역을 하여 비봉출판사에서 출간한 것이 있다. [21] 그에게 직접 정치학 박사학위를 수여한 당시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이 훗날 제28대 미국 대통령이기도 한 우드로 윌슨이었다. [22] 한인중앙학원으로 개칭. [23] 국무총리 겸 외무부장관. [2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29607&cid=62049&categoryId=62049 [25] 일명 구미위원부 [26] 공식적으로 취임한 것은 아니었으며 여운형이 세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에게 일방적으로 추대된 것이다. 이 당시 이승만은 해외에 있었으며, 귀국한 이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공식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 취임을 거절했다. 사실 이승만 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인민공화국 정부 요직에 일방적으로 추대되었는데 자세한 건 조선인민공화국 문서 참조. [27] 한국인 최초의 명예박사 취득자다.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박사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다. [28]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9]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홍역으로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30] 조선의 왕가와 비교했을 때에는 익종(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부친), 철종, 흥선대원군과 형제 뻘이였다. 3명 다 이승만의 34촌 형이며 이승만보다 익종이 66년, 철종이 44년, 흥선대원군이 54년 연장자다. [31] 무의공 이순신의 직계 후손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무의공 이순신의 방계 10대손이다. 둘 다 양녕대군의 둘째 서자 장평부정(長平副正) 이흔(李訢)의 후손은 맞지만 그의 아들 대에서 갈라졌다. [32] 이승만은 1912년 집필한 '청년 이승만 자서전'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던 중 서재필의 영향을 받아 아시아주의에 경도되었고 자신을 비롯한 배재학당 출신이 박영효계 친일파와 손잡은 것을 '불행한 연결'이라고 표현하며 독립협회 활동의 과오를 인정하였다. 이승만은 출옥한 1904년을 기점으로 일본관이 지일에서 반일로 바뀌며 민영환의 대미 밀사로 활동한다. # # [33]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해서는 북측에서도 일찍이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차리는 등 독자적으로 정부 수립 절차를 밟고 있었던 데다 김일성이 건재하는 이상 타협의 가능성은 희박하고 운 좋게 단일정부가 성립된다 쳐도 공산주의가 혼합될 염려가 있기에 반공주의자였던 이승만으로서는 남쪽에서 따로 자본주의 국가를 세운 뒤에 남측 주도로 통일한다. 라는 판단이었다고 여겨진다. 아니면 그냥 권력을 위해 분열을 감수한 거라는 시각도 있다. 김구나 김규식 등은 처음부터 통일 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반대했다. [34] 어렸을 때 서울 우수현 남쪽에서 자라서 호를 '우남'이라 지었다. [35]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와 같이 안치되었으며, 국립서울현충원 이승만대통령묘소에 자리하였다. [36] 당시 행정구역 기준 동대문구 갑. 관할 모든 동들이 서울 확장으로 인한 분구와 구간 경계 조정을 거치면서 다른 구로 이관 되었다. 현재 기준 서울 종로구 창신동, 숭인동 및 성북구 돈암동, 성북동. [37] 1948.7.20. 사퇴. ( 초대 대통령 당선) [38] 제헌 국회에서의 간접 선거. [39]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최고 득표율.
역대 직선제 대선 당선자 중 2위와 최고 득표율 차 당선. (63.26%) [40] 사유: 당선인의 자진 사퇴. [41] 개화파의 영향을 받아 정계 입문. [42] 독립협회 강제 해산. [43]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인한 탈당. [44] 흥업구락부 창당을 위한 탈당. [45]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인한 정당 해산. [46]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와 신설 합당. [47] 4.19 혁명으로 인한 대통령직 하야로 탈당. [48] 당시 표현으로는 호열랄(虎烈刺). 헌데 언젠가부터 한자 발음이 와전되어 호열자라고도 불렸다. [49] 출처: 로버트 T. 올리버의 『건국과 나라 수호를 위한 이승만의 대미투쟁』 [50] 조선이라는 나라를 배에, 지배층을 선원에, 백성들을 선객에 비유하며 무기력하게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백성들이 자기 일이라는 주체적 의식을 가지고 깨어날 것을 외치고 있다. [51] 조선인들의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것 중 하나로 여전히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양반은 조상이 이름났다는 이유로 능력이 없어도 자리를 차지하고 비천한 출신은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상놈이라는 이유로 배척당하니 수많은 잠재적 인재들이 썪고 있음을 비판하며 한 말이다. [52] 이는 이승만 정부가 20세 이상 국민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보통선거를 실시하면서 실현된다. [53] 이승만은 교육을 중시한 사람답게 부족한 인건비 예산 중 교사의 봉급을 늘 1순위로 지급했다. 이로 인해 경찰이나 군인의 비리가 횡행하는 문제가 있었다. [54] 소련이 망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2번이다. 나머지 1, 3, 4, 5번은 소련도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어느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들이지만, 2번은 공산주의 자체의 근본적 결함이기에 도저히 수정하거나 보완할 수 없었다. 자세한 내용은 이 문단 참조. 이승만은 소련이 탄생한 직후부터 이미 소련이 가진 근본적 문제점을 통찰한 셈이다. 1950년대 식민지가 해체되며 탄생한 수많은 신생독립국들이 공산주의를 국가 정책 이념으로 채택하는 와중에도 자본주의에 기반한 혼합경제체제를 밀어붙일 수 있었던 건 자본주의에 대한 이승만의 확고한 신념이 있기에 가능했다. [55] 이 책이 쓰여진 1941년 당시는 이미 중일전쟁과 폴란드 침공으로 세계정세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평화주의를 배격하자는 전쟁광적 발언이 아니다. 이미 전쟁이 벌어진 와중에 외치는 평화주의는 적국에 이익을 가져다 줄 뿐 진정한 평화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일본 내막기를 읽어보면 당시 평화주의자라는 자들이 얼마나 대책없는 자들이었는지 알 수 있다. 조지 오웰 역시 같은 시기에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한 적이 있다. "한 쪽의 전쟁 수행을 방해하는건 다른 쪽의 전쟁 수행을 돕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상식입니다." 이를 그대로 읽으면 평화주의 자체에 반대하는 것 같지만 이 발언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다. 전쟁이 발발한 것은 이미 평화와의 저울질이 끝나고 결단이 내려진 상태를 의미하기에 평화주의란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상황에서만 유효하다는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56]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219-220 [57]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창궐 이후로는 이 말을 패러디해 역으로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로 패러디되기도 한다. 2009년 1박 2일 혹한기 특집에서 재발굴된 이후 꾸준히 유행어는 아니어도 쓰인 문장이었다. [58] 이승만의 발언 중 제일 유명한 말이라서, 이승만 성대모사를 하는 개그맨들은 십중팔구 다 이 문장을 따라한다. [59] 다만 미국에서 철강 산업에 태클을 건 데다가 보유 기술도 없던 국면이라 전쟁 후에 철강 산업을 진행하지는 못 했다. [60] 출처: 장택상, <대한민국 건국과 나>, 91쪽 [61]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미군과 국군이 서울을 다시 탈환하자, 이승만을 비롯한 정부 인사들은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은 국민들의 민심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이승만에게 서울 시민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권유를 하자, 이승만이 버럭 화를 내면서 내뱉은 말로 알려져있다. 당시 서울을 점거한 북한군에게 협조한 부역자 색출을 한다면서 무려 55만 915명을 검거하고 # 그들 중에서 800명을 사형시킨 일이 너무 지나친 처사라는 비판 여론이 일자 이승만은 사형시키지 않은 시민들을 모두 풀어주었고, 결국 이기붕이 이승만을 대신해서 [a]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342-344 [a] [a] [65] <38선은 없어졌다. 휴전 결사반대. 38선 대신 압록강을 달라. 38선 대신 두만강을 달라.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여러개 구호를 번갈아 들면서 휴전협정이 조인되기까지 몇 달 동안 데모를 해야 했다. 이때 학생들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결사적인 데모를 하였다. [66] 이는 이승만의 외교적 성과로 손꼽힌다. 2020년대에도 이 조약의 실용성은 인정받으며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의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이 되었다는 평을 받는다. 현재와 달리 당시 미국은 극빈국이었던 한국과 상호방위조약을 맺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돈이면 차라리 일본에 투자하는게 훨씬 효과적일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때 조약을 체결하지 못하고 미국이 약속한 단순한 군사적 지원에 만족했다면 신생 독립국이었던 대한민국은 안보 불안에서 비롯한 과도한 군비로 인해 성장 동력을 잃고 현재까지도 여전히 중진국 수준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67] 대체 연료의 공급 없이 녹화사업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석탄과 도시가스 공급 없이는 나무를 베어 연료를 충당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자연재해 빈발로 이어져 경제 성장 동력을 크게 저하한다. 현대 아프리카 국가 대부분이 겪는 문제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68] 출처: 김정렬 국방장관의 회고록 "항공의 경종" [69] 이승만은 역설적이게도 본인이 열심히 강조한 자유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하야하게 되었다. 이승만이 어떻게 하야하게 됐는지 아는 사람이 이 어록을 보면 마치 자기자신과 싸우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데, 3.15 부정선거 문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본인이 부정선거를 처음부터 끝까지 획책한 건 아니었다는 옹호 의견도 제기된다. 당시 이승만은 이미 대선 승리가 보장되었기에 부정선거를 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아 사망시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게 되면 정권이 바뀔 수 있었기에 자유당 인사들이 눈치껏 부정선거를 획책한 것이다. 이승만도 혁명 1주일 전에야 국무회의에서 상황이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고 선거에 대한 우려를 표한 바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3.15 부정선거가 있기 전인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일명 2.13 담화)를 발표해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내가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선언했던 것이나, 당시 최인규(당시 내무부장관)가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왔었다고 고백한(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것을 보면 자유당 정권의 부정선거를 직접적으로 지휘하지 않았다 한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제1공화국 내각 인사들이 "무슨 수를 쓰더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압박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으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70]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시절에도 그랬지만 외교에 집중하는 국정운영 스타일로 인해 내치에 부족한 점이 많았다. 이를 지적하며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 평한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당시 동아일보 기사가 일품. 이를 옹호하는 이들은 식민정책으로 인해 교육의 기회가 적어 고졸이 엘리트로 취급받았던 때에 독립하자마자 전쟁까지 겪고 북한군이 사회인사나 학자를 납치해가는 바람에 인재가 부족했던 것이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독립 당시 한국에는 박사 학위자가 5명(...)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반 이상이 월북해 버렸다. 아무튼 이로 인해 임기 내내 국내 문제에 시달렸고, 급기야 여당의 과잉충성과 여기서 비롯한 부정선거를 예방하지 못해 권좌에서 쫓겨났다. [71] 말년에 이승만 스스로가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자조한 것은 자기 스스로가 국정에 있어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음을 자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엄연히 제1공화국의 수반으로서 자유당 정권의 중심이었던 이기붕의 폭주를 막지 못했으니 부정선거를 예방할 책임이 있음은 분명하다. '불의에 궐기한 백만 학도', '정신이 살아있는 국민'을 이야기한 이 발언은 유체이탈 화법이 아니라 자신의 직무유기에 대한 국민의 저항권 행사를 치하하고 감사하는 발언으로 볼 수 있다는 해석이 있으며, 옹호 측에서는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자행한 게 아니기에 그는 독재자가 아니라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결국 그가 예방하지 못한 것임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72] 녹취된 이승만의 실제 육성과 목소리를 우리말과 영어로 들어볼 수 있다. [73] 이는 확실히 윤치호가 남긴 마지막 글인 '한 노인의 명상록'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것이다. [74] 원고는 옥중에서 탈고되었다. [75] Log Book, 항해일지 [76] 여기에는 각 학자들의 연구서중 이승만을 제목/주요 소재로 다룬 연구서만 기술했다. 해당 학자들의 다른 저서에도 이승만의 행적과 평가가 언급된 경우가 많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해당 학자들의 다른 연구성과 및 연구사도 찾아보길 바란다. [77] 이인수가 기증한 문서군들은 오늘날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에 소장되어 있으며,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이 많다. [78] 위 저서의 증보판 [79] 손세일은 신동아 및 사상계 편집장 등을 지낸 언론인으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국회의원을 지낸 이래 주로 민주당 계열 정당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이력을 갖고 있다. [80]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한국현대사 분야의 박사학위를 받았다. 논문 링크 [81] 조선공산당/남로당과 같은 본래 의미의 좌익에게 매우 비판적이며, 좌우합작 및 통일을 지향한 중도파 세력에게 매우 호의적인 평가를 내린다. 좌익 및 중도파가 모두 사라진 1948년 이후에는 이승만의 대항마로 조봉암을 매우 강력하게 띄워준다. [82] 이승만을 다룬 연구서 전반의 서론을 살펴보면, 1990년대 이후 대두된 이승만 재평가론에 대항하기 위해 이승만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83] 주의해야할 점은 1998년에 외교부에서 출판한 버전은 이승만과의 일화들을 빼고 외교적 기록만 부분 발췌한 것이라 내용이 부실할 수 있다. [84] 공교롭게도 본인의 상사 이승만이 재학했던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여 최초의 한국인 학부생이 되기도 했고, 이후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85] 단순히 지지를 한 것을 넘어서 김대중에게 하버드 대학교 인사들과 미국 상원의원들을 소개시켜주는 등 실질적으로 김대중에게 미국 정계 인맥을 쌓는데 도움을 주었다. [86] 해방 이후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 최기일은 이승만의 비서를 역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둘이 힘을 합쳐서 김구와 이승만의 사이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게 되면 우익진영에 더할나위 없이 힘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고 장준하의 수기 <돌베개>에 나온다. 하지만 신탁통치 문제로 정세가 점점 악화되어가서 결국 이 둘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최기일은 아예 정부수립 전에 이승만 곁을 떠나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래도 미국에 체류하면서 가끔 장준하의 잡지 사상계에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 [87] 아무래도 2부가 '건국과 분단'이라는 제목을 쓰다보니 그런 듯 하다. [88]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다소 이승만에 대한 '밈(Meme)'적인 표현들도 있다. 그것이 악의적인 편집으로 반대측에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89] 대한제국의 경우 존속기간이 짦아서 대한제국 시기에 출생한 대통령은 한명도 없다. [90] # # # # # # 단, 이는 《 고종실록》을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할 경우에 한한다. 조선이 1910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앞으로도 실릴 대통령은 영원히 없다. 참고로 거의 다 독립협회 관련해서 처벌받은 내용이다. [91] 합격한적은 없다. 5살때 서울로 내려와 고명한 스승밑에서 사서삼경을 포함해 수많은 고서들을 달달 외웠음에도 불구하고, 13살때부터 19살때까지 7번이나 내리 낙방했다. 참고로 문과 최종급제자 평균연령은 35세였다. [9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로 한정한다면 가장 최연소 대통령은 1963년 취임한 박정희(1917년생)이며, 다시 민주화 이후로 취임한 최연소 대통령은 2003년 취임한 노무현(1946년생)이다. [93] 만약 임시정부를 포함하게 된다면 이승만이 최고령 재임과 최연소 재임 두 타이틀 모두 갖게 된다. [A] 2024년 [95] 윤보선은 박정희에게, 최규하는 전두환에게 각각 대통령직을 강탈당하였고, 박정희는 임기 중에 암살당했고, 박근혜는 임기 중 탄핵을 당했다. [A] [97] 현재 가장 장수한 대통령은 1990년 92세로 사망한 윤보선이다. 두 번째는 2021년 90세(+10개월)로 사망한 전두환이다. [A] [A] [100] 김대중에게도 김소희라는 딸이 있었지만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A] [102] 김대중과 윤보선도 재혼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경우는 이혼이 아닌 사별 후 재혼이다. [103]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황해도 출신은 물론 이북 출신 대통령은 당분간 없을 듯하다. 19대 국회에서 이북 출신인 사람은 김진표에 더해 조명철이 있었다가 20대 국회에서는 김진표만이 유일하게 되었고, 21대 국회에서는 김진표에 더해 태영호, 지성호가 추가로 이북 출신으로서 당선되었다. 새터민 출신이 아니고서는 깨지기 어려운 기록. 다만 본적지가 이북인 대통령은 존재한다. 19대 문재인은 양친 모두 이북 출신이다. [104] 이회창도 황해도 출신이어서 만약 당선됐다면 두 번째 이북 출신 대통령이었겠지만, 총 3번의 대선 출마 결과 모두 낙선하면서 결국 이승만이 유일이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다. 2022년 기준으로 대권을 도전하는 후보들도 최소 1950년대 이후 출생이니 앞으로는 통일이 되거나 태영호 등의 탈북자 출신 정치인이 대권주자급으로 성장하지 않는 한 나올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