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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5-01 14:20:50

장왕합작

蔣汪合作
Chiang-Wang Cooperati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ang_Jingwei_and_Chiang_Kai-shek.jpg
중산함 사건 직전, 1차 장왕합작 시절의 장제스와 왕징웨이
1. 개요2. 1차 장왕합작(1925~1926)
2.1. 관련문서
3. 2차 장왕합작(1927)
3.1. 관련문서
4. 3차 장왕합작(1931~1935)
4.1. 관련문서
5. 4차 장왕합작(1937~1938)
5.1. 관련 문서
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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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국민당의 거두인 장제스 왕징웨이의 정치적 동맹관계를 말한다. 흔히 1931~1935년까지의 3차 장왕합작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2. 1차 장왕합작(1925~1926)

1925년 7월 1일 광저우 국민정부가 수립되고 왕징웨이가 국민정부 주석에 추대된 이후, 장제스는 군사실력자로서 왕징웨이를 조력하여 국민당의 1차 동정, 국민당의 2차 동정 등 각종 군사적 업적을 쌓았으며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을 빌미로 후한민, 쉬충즈 등 왕징웨이의 권위를 위협할만한 우익 실력자들을 숙청하는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왕징웨이에게 결핍되어 있던 군사적 권위를 제공했다. 쉬충즈 숙청 이후에는 장제스는 으뜸가는 군사적 실력자가 되어 국민정부에서 왕징웨이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었으나 왕징웨이가 장제스에게 군사력을 의존하는 상황을 타파하려 리지천, 주페이더 등의 광동 실력자들과 제휴하고 중국공산당의 주장에 따라 북벌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자 장왕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발생하고 권위가 크게 실추된 왕징웨이가 4월에 프랑스 외유를 결정하면서 1차 장왕합작은 종결되었다. 국민당의 1인자가 된 장제스는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했고 이후 공산당, 국민당 좌파 등 반장파들은 왕징웨이를 다시 국민당의 영수로 옹립하자는 영왕운동을 전개하며 장제스를 견제했다.

2.1. 관련문서

3. 2차 장왕합작(1927)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를 비롯한 반장파들의 성원에 힘입어 왕징웨이는 외유를 떠난지 1년 만인 1927년 4월에 중국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국민당 내 좌파와 우파 간 갈등이 심해질대로 심해진 상황이었고, 장제스는 상하이에 도착한 왕징웨이에게 자신과 힘을 합쳐 국민당을 장악하려는 공산당원들을 몰아내자고 제의하며 만약 왕징웨이가 응한다면 자신은 군사분야에만 주력하면서 왕징웨이를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왕징웨이는 천두슈와 함께 1차 국공합작을 지속하겠다는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우한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결국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발동하여 독자적으로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우한 정부를 영도하는 왕징웨이와 적대관계가 된다.

하지만 1927년 7월 왕징웨이도 국공결렬을 선언하고, 8월 장제스가 쑨촨팡에게 패배한 것에 책임을 지고 하야하면서 영한합작이 이루어졌는데 서산회의파 등이 왕징웨이를 강경하게 공격하면서 왕징웨이 역시 9월에 하야해야 했다. 이에 왕징웨이는 자신에게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탕성즈, 장파쿠이 등과 연대했으나 탕성즈가 너무 안하무인으로 나대다가 분노한 광서파 리쭝런, 바이충시 등에게 토벌당하자 결국 일본 외유를 떠난 장제스의 복귀를 돕기로 결정, 마침 이 둘은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 및 광서파를 억제하고자 하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다시 한번 장왕합작을 추진하여 1927년 12월에 장제스의 귀국과 복직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1927년 11월에 발생한 장황사변과 12월의 광저우 폭동에 연루되어 왕징웨이는 책임을 지고 하야, 다시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게 되면서 장제스의 집권을 도운 보람도 없이 다시 한번 낭인이 되고 말았다.

3.1. 관련문서

4. 3차 장왕합작(1931~1935)

파일:external/images.china.cn/00016c8b41770d0bcc285a.jpg
3차 장왕합작 시기의 왕징웨이를 소개한 타임지

1927년 외유를 떠난 이후 왕징웨이는 국민당 좌파로 이루어진 반장파인 국민당 개조동지회( 개조파)를 영도하면서 개조동지회의 귀국 요청에 응하는 방식으로 1929년 10월 초 중국으로 돌아와 장제스 타도를 주장했다.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이 시작되고 6월에 베이징 함락, 12월에 장쉐량 동북역치를 선포하면서 중국이 통일되었다. 1929년 편견회의를 시작으로 군벌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29년 반장전쟁이 발생하자 서산회의파가 먼저 1차 장계전쟁에 합류, 군벌들과 제휴하여 장제스 타도를 시도했다. 이어 1차 장풍전쟁, 2차 장계전쟁, 2차 장풍전쟁 등이 터지자 왕징웨이도 중국에 귀국하여 반장전쟁에 합류했고 1930년 중원대전에서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장제스 타도를 노렸으나 장쉐량이 제때 장제스 편에 서면서 패하고 다시 홍콩으로 도주해야 했다.

1931년 2월, 장제스가 후한민을 감금하는 탕산 사건이 발생하여 그간 장제스를 지지하던 광동파가 반장대열에 합류,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서파와 연합하여 광저우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1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 여기에 왕징웨이 역시 합류하였지만 광동파에게 괄시를 받으면서 천궁보를 비롯한 측근들의 광저우 입성까지도 거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빈정상한 왕징웨이는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발생 이후 광저우와 난징의 통합을 위해 12월에 사퇴한 장제스와 다시 한번 합작하기로 결정, 마침내 3차 장왕합작이 이루어졌다.

1932년 장제스의 뒤를 이어 행정원장에 취임한 광동파 쑨커가 취임 한달만에 답이 없는 상황에 질려 제1차 상하이 사변 중 gg를 치고 사퇴하자 왕징웨이가 행정원장에 취임, 장제스가 군사위원장에 취임하여 난징 국민정부를 영도하였다. 1933년 열하사변이 발발하고 국민정부의 유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외교부장 나문간이 사퇴하자 왕징웨이는 외교부장도 겸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제스의 권력 장악이 확고하여서 합작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왕징웨이의 권력은 일부 분야에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도 장제스의 견제를 받았다. 그나마도 1935년 왕징웨이 저격 사건이 일어나 왕징웨이가 치료를 위해 다시 외유를 떠나면서 사실상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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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 직후의 왕징웨이

4.1. 관련문서

5. 4차 장왕합작(1937~1938)

그러던 와중 장제스가 1936년 시안 사건에 의해 감금되어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왕징웨이는 기회를 엿보아 귀국했지만, 미처 중국에 도착하기도 전에 장제스가 풀려나버려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왕징웨이는 1937년 1월 14일 상하이에 도착했고 "안내(반공, 군벌 통일)보다 양외(항일)가 먼저다"라는 사람들에게 "안내와 양외는 두 가지 일이 아니라 한 가지 일"이라며 외유를 떠나기 전의 선안내 후양외 정책을 꾸준히 주장하였다.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개조파는 " 행정원을 맡아 조직하는 일에 적극적이다"라며 권력을 얻는 일에만 혈안이라고 에둘러 비판하며, 왕징웨이가 정책에는 열심이지만 능력이 없어서 걱정이라고 말하기도 하는 등 왕징웨이 일파를 신임하지 않았으나 장제스는 1937년 2월 15일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제5계 제3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3중전회)에서 왕징웨이를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추천하였다. 그러나 후항일을 주장하는 왕징웨이와 시안 사건 이후 선항일로 돌아선 국민정부의 정책 노선 차이, 이전부터 있어왔던 친일 논란이 겹쳐 당내의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 장제스는 여러 인물들과 논의하는 등 이리저리 발로 뛰며 노력하여 3중전회 마지막 날인 2월 22일에야 겨우 왕징웨이가 주석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왕징웨이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으로 추대되며 다시 한번 장왕합작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불과 10년 전만 해도 독보적이던 왕징웨이의 명망와 지지 여론이 크게 실추되었음이 드러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뒤이은 1938년 3월에는 장제스가 국민당 총재, 왕징웨이가 부총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석으로 뽑힌 날부터 6개월도 채 지나지 않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벌어졌고, 왕징웨이는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일본군을 보고 무력감과 패배감을 느끼며 일본과의 화평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왕징웨이 공작에 포섭되어 1938년 충칭에서 탈주하여 하노이로 가 독단적인 화평교섭을 준비한다. 장제스는 처음에는 왕징웨이에게 유럽 외유를 권했지만 국내 여론이 급락하자 암살을 시도했고 그 길로 결국 왕징웨이는 1940년 일본군 점령지의 난징에서 왕징웨이 정권을 수립하고 만다. 장제스는 1944년 왕징웨이가 사망하고 1945년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그의 무덤을 폭파해버린다.
파일: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jpg
왕징웨이 정권 취임식에서 맹세를 낭독하는 왕징웨이

5.1. 관련 문서

6.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