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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9167><colcolor=#ff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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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8년 7월 18일 | ||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주 음베조[1] | |||
사망 | 2013년 12월 5일 (향년 95세) | ||
남아프리카 공화국 하우텡주 요하네스버그 | |||
재임기간 | 제8대 대통령 | ||
1994년 5월 10일 ~ 1999년 6월 14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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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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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F9167><colcolor=#fff> 부모 |
아버지 가들라 헨리 음파카니스와 만델라 어머니 노세케니 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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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에블린 마세 (1944년 결혼 / 1957년 이혼) | ||
위니 마디키젤라만델라 (1958년 결혼 / 1996년 이혼) | |||
그라사 마셸 (1998년 결혼) | |||
자녀 | 7명 | ||
신체 | 185cm | ||
학력 |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중퇴) 비트바테르스란트 대학교 명예 법학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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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개신교 ( 남아프리카 감리교회) | ||
최종 당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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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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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 취임 선서 |
2. 생애
2.1. 투사 만델라
1918년 7월 18일 목요일에 남아프리카연방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코사족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로부터 "나뭇가지를 잡아당긴다"[2]라는 뜻의 롤리랄라(Rolihlahla)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받았다.[3] 넬슨(Nelson)은 초등학생 때 교사가 지어준 영어식 이름인데 이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는 그의 정식 이름이 되었다. 16세 때 성인식을 치른 뒤 얻은 이름 달리붕가(Dalibhunga)는 '새로운 권력자' 를 뜻했다. 16세 때 치른 이 성인식은 할례, 즉 포경수술인데, 마취없이 성인식을 했다고 한다. 이것에 대해 만델라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그 정도의 아픔은 아무것도 아니게 참을 수 있어야 된다"면서 포경수술을 찬성하였다. 남아공의 원주민에게 포경수술은 성인식으로 행해지는 풍습이다.학교에 가게 된 만델라는 학교에서 배우게 되는 내용들[4]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했으며, 축구와 복싱, 장거리 달리기 등의 운동도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사망한 아버지 대신 그를 돌봐주던 후견인이자 족장이였던 욘긴타바 달린드예보(Jongintaba Dalindyebo)에게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진실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듣게 된 후 흑인들을 위해 일하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렸을 땐 막연히 후견인인 달린드예보가 추장으로서 재판을 집행[5]하며 진실을 밝히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부족을 위해 일하는 법 상담자가 되기 원했으나,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치고 나서는 넓은 세계를 보고 감명 받으면서 본격적인 변호사의 꿈을 꾸게 된다.
젊은 시절에는 그도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으며 특히 강제 결혼을 시키려는 후견인을 피해 친구 올리버 탐보[6]와 함께 도망가 위장취업을 시도하기도 했다. 정확한 내막은 만델라가 법대에서 주는 학식에 불만[7]을 가지고 투쟁을 벌였다가 정학을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전해 들은 후견인 달린드예보가 너무 과격하다고 생각하여 투쟁을 중단하고 학업에 정진하라고 했지만 만델라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서 강제 결혼을 시키게 된 것. 강제 결혼에 만델라는 도망갔지만 끝내 사람을 보내 수소문한 달린드예보에 의해 그들의 행방도 알려지게 되었고 탐보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만델라는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공부를 마치기로 결심한다.
복귀 후엔 훗날 남아공 민주화 운동을 함께 이끌게 될 동지 월터 시술루(Walter Sisulu, 1912~2003)를 만나게 된다. 여기에 절친 올리버 탐보까지 재회, 합세하여 셋이서 아프리카 민족회의(ANC)를 일으켜 나간다.[8] 아프리카 민족회의(혹은 아프리카 국민회의/ANC; African National Congress)의 지도자로서 남아공 옛 백인 정권의 악명 높았던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9] 맞서는 투쟁활동을 벌였던 만델라와 ANC는 처음엔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주의를 받아들여 평화적 투쟁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남아공 정권이 친영국파인 연합당에서 반영국파인 국민당으로 옮겨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연합당보다 몇배는 더 하면 더 했지 덜 하지 않은 백인 우월주의에 꽉찬 놈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원래 있던 암묵적인 사회적인 차별까지 법으로 확실히 새기는 건 물론이고 거주지 이전법안까지 통과시키며 아파르트헤이트 시대를 정식으로 열어젖혔고, 게리맨더링의 일환으로 컬러드의 투표권을 박탈하며 일당체제를 구축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3월 21일 샤프빌 학살(Sharpville massacre)에서[10] 시위대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하는 경찰을 보고 만델라는 무장투쟁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만델라가 지하투쟁론[11]을 제기하자 ANC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지만, 비폭력을 유지하자고 주장했던 앨버트 루툴리(Albert Luthuli, 1898~1967)의[12] 협상안에 따라 ANC의 법적 근거 및 대외적인 우호적 여론을 위해 독립적으로 운영하기로 합의한다. 그렇게 만델라는 1961년에 무장투쟁 조직인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약칭 MK)'을 결성한다. 아프리카 민족회의에는 백인이 참가할 수 없었지만 MK는 진보계열의 백인들[13]까지 모두 받아들였다. 이후 남아공 정부를 상대로 사보타주와 테러[14]를 벌였지만 활동자금이 부족했기에 만델라는 영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러 해외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경찰의 추적이 끊이지 않은데다 현상금에 눈이 먼 흑인들의 밀고까지 합쳐지는 등 포위망이 좁혀졌고, 결정적으로 만델라와 소련의 우호관계를 우려한 CIA가 만델라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서[15] 만델라는 당국에 체포되어 종신형[16]을 선고받고 무려 27년 동안 투옥되었다. 총 27년의 기간 중 로벤 섬에서 18년을 생활하였고, 이후 일정 기간은 국제 여론에 압박을 느낀 남아공 정부에 의해 감옥이 아닌 교도관의 집에서 보내게 된다.[17] 이러한 장기간의 수감생활로 인해 자식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모친과 맏아들이 사망했을때에도 장례식에 참석을 할 수가 없었을 정도였다. 이러한 수감생활 속에서도 남아공 대통령들에게 편지를 쓰고 ANC 회원들과 연락을 하는 등 할 것은 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고된 시간이었음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투쟁을 통해 교도소의 환경을 개선시킨다거나 하는 일을 벌였다. 그가 갇혀 있는 동안 남아공의 흑인들과 해외 재야인사들이 석방운동을 줄기차게 벌였고,[18] 1988년에는 영국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에릭 클랩튼과 스티비 원더 등 유명 뮤지션 83명이 그의 7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열어 석방을 촉구했다.
그리고 드디어 1990년, 국내외 여론의 압박을 못이긴 F. W. 더클레르크 대통령은 만델라의 석방과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합법화를 발표하여 그를 석방한다. 이후에 당시 남아공 정부와 국민당, 민주당, 인도계 정당, 컬러드계 정당들과 협상을 벌여서 1991년에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폐시키고, 1993년에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만듬으로써 그해 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고, 협상 후반기엔 극우정당인 보수당[19]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이 협상에 반발하고 잉카타 자유당은 협상에 나섰다가 파기하다를 반복하고 ANC와 갈등을 벌여 한때 남아공은 내전으로 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지만, 반투스탄내 기득권층은 반투스탄 내 흑인들의 반발에 결국 굴복했고, 보수당은 자멸함에 따라 대다수 흑인들에게 첫 투표권이 주어진 1994년 총선이 치러졌고, 이 선거에서 ANC가 과반을 훨씬 넘는 의석을 확보함에 따라(252/400 62.7%) 국민당, 잉카타 자유당과 거국정부를 구성함으로써 잉카타 자유당과의 분쟁도 진정되어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된다.[20]
2.2. 대통령 만델라
만델라가 대통령이 된 후, 정부에 있던 모든 백인들은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델라는 '진실과 화해 위원회'를 구성해 과거의 인권 침해 범죄에 대한 진실을 낱낱이 밝혔지만 그들을 사면했다. "용서하되 잊진 않는다."란 슬로건 아래 단 한 명도 과거사로 처벌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시 남아공의 위기를 함께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덕분에 당시 많은 남아공 백인들이 남게 되어 그들의 사회, 경제적 영향력까지 흡수할 수 있었다. 만델라가 사망하였을 때도 일각의 우려와 달리 큰 변화는 없었다.
만델라는 자신의 수감생활에 가장 큰 역할을 한 P. W. 보타 전 대통령에게도 책임을 묻지 않았다. 1984년, 만델라는 코에체 장관에게 보타 대통령과의 협상을 요청했다. 그러나 4년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려 온 만델라에게 보타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되려 보타 대통령은 만델라에게 "폭동을 선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석방을 허락해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는데, 당연히 국제사회에서 남아공이 받는 비난 여론을 무마할 계획에 그런 말을 꺼냈겠지만, 만델라가 이를 거절하는 바람에 보타와 만델라 두 사람 간에는 찬 바람만이 오가게 되었다. 이후 1998년, 만델라가 재임 중이던 남아공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와 관련한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타를 청문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했는데 보타는 거절을 해버렸다. 이후 "아파르트헤이트는 정당하다." 라는 망언을 하다 2006년 노환으로 죽었다.
훗날 만델라는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어떻게 감옥 생활을 하면서 복수심이 아닌 용서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만약 내가 감옥에 있지 않았다면 인생의 가장 어려운 과제, 즉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일을 달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앉아서 생각할 기회는 바깥 세상에서 가질 수 없는 기회였다."고 말했다.
1995년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 선수권 일화도 유명한데, 당시 전형적인 백인 스포츠[21]로 흑인들은 오히려 다른 나라를 응원했을 정도로 흑백 갈등의 상징이었던 럭비를 만델라는 흑백이 하나되는 장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만델라는 1명을 제외하고 전원 백인으로 구성된 럭비 대표팀을 수시로 찾아가 설득하고 격려하며 선수들의 마음을 열었다. 대회 직전에는 대표팀이 흑인 어린이들에게 럭비를 직접 가르쳐주는 행사까지 마련했다. 결승전에서 만델라는 주장 등번호 6번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나타났다. 그리고 기적처럼 남아공 럭비 대표팀은 뉴질랜드 대표팀을 꺾고 우승했고 그 날은 남아공 전체의 축제일이 되었다. 우승 트로피를 백인 주장에게 전달한 것 역시 만델라였다. 이후 이 스토리는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2009년 개봉 영화 인빅터스에서 영상화되었다. 만델라 역은 모건 프리먼, 럭비팀 주장 프랑수아 역은 맷 데이먼이 맡았다.
1999년 옛 동지 고반 음베키의 아들인 타보 음베키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기고 퇴임했다.[22] 존경받다 권력자가 된 후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독재자의 길로 접어든 많은 사례에서 볼 때 단임으로 깔끔하게 권력의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훌륭한 업적이라면 업적.
국내에는 1995년과 2001년 두 번 방한했으며 첫 방한 시에는 서울대에서 명예 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두 번째 방한 때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공동 기자회견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김 대통령 사망 당시 만델라 재단에서 애도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여담으로 두 번째 방한 당시 모 방송사에서 만델라 부부의 투쟁기를 다룬 영화를 틀어주었는데 하필 그때가 부인과 이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여담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선에 출마하자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 교도소 수감 생활을 함께 한 낡은 시계를 선물하였다.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신독재 탄압을 받으며 20년간 사용한 낡은 가방을 선물하였다. 또한 만델라의 자서전을 번역한 것도 김대중 전 대통령.[23]
2.3. 사망
2009년 쯤부터 노환으로 병세가 나타나다 2013년 12월 5일 요하네스버그에서 향년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 고난했던 행보에도 불구하고 장수했다. BBC/ CNN.그의 생전 마지막 모습. 2013년 5월 요하네스버그 저택에서 촬영되었다.
만델라가 타계한 후 전세계에선 추모의 물결이 일었다.
구글은 메인 페이지에 만델라를 추모하며 그의 인생을 돌아보는 만델라 재단의 페이지로 링크를 걸어놨다. 한국어로도 볼 수 있다. 그리고 2014년 7월 18일 넬슨 만델라 두들을 만들었다.
당시 홈페이지 아카이브
Amazing human being. Champion of freedom and human dignity. He set an example for all of the world. RIP Nelson Mandela. We miss you already
넬슨 만델라 타계 다음날 올라온 팀 쿡의 트윗
애플의 CEO
팀 쿡은 "위인. 자유와 인간 존엄성의 대변자. 그는 세계 모든 이들의 본보기가 되었습니다. 평안히 쉬소서, 넬슨 만델라. 우리는 벌써 당신이 그립습니다" 라는 트윗을
올렸고
애플 홈페이지는
스티브 잡스의 사망 직후 스티브 잡스를 추모했던 것처럼 그의 사진, 이름, 출생년도 및 사망년도를 띄워 그를 추모하였다.넬슨 만델라 타계 다음날 올라온 팀 쿡의 트윗
12월 10일 열린 추모식에는 첫 흑인 미국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24],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나루히토 일본 황태자[25], 로버트 무가베 짐바브웨 대통령 등 세계 91개국 정상급 인사, 왕족들이 참석했으며 한국에서는 당시 정홍원 국무총리가 대표로 참석했다.
반기문 UN 사무총장은 "남아공은 영웅이자 아버지를 잃었고, 세계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스승을 잃었다."며 애도했고,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만델라의 투쟁은 당신의 투쟁이었고, 그의 승리는 당신의 승리였다"면서 "만델라는 한 국가를 정의의 길로 이끌었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역사의 거인"이라고 그의 삶을 평가했다.
토크쇼의 여왕인 오프라 윈프리, 락그룹 U2의 보컬 보노와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인 제시 잭슨 목사도 참가했으며 추모식이 열린 요하네스 FNB 경기장[26]에는 10만여명의 인파가 몰려 만델라를 추모했다.
한편, 미국의 보수 정치인들도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추모에 동참했는데, 이에 뿔난 일부 극우파 네티즌들은 피델 카스트로와 친하고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만델라는 공산주의자라는 색깔론성 비난을 하기도 했다. #
장례식은 12월 15일 국장으로 열렸다. 모토는 'Hamba Kahle, Madiba!!'(함바 칼레, 마디바!/잘 가요, 어르신!)
남아공 정부는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정부청사 앞에 만델라의 동상을 건립하였다. 그런데 황당한 해프닝이 벌어졌다. 동상을 건립한 후 사람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동상의 귀 안에 작은 토끼 동상이 만들어져 있던 것. 동상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동상 제작 시간이 촉박해 어려움을 겪은데다 동상에 서명도 남기지 못하게 한 점에 불만을 가져서 이런 행위를 했다고 한다.[27] 그러나 "하필 장난을 해도 만델라 동상에 하냐"는 여론의 비난을 받고 토끼를 제거하기로 했다.
3. 평가
사회 운동가 시기 만델라의 업적은 지금도 국내외적으로 거의 이견없이 호평을 받는다. 대통령 시기 업적에 대해서도 대체로는 좋게 평가되지만 현실정치 분야인만큼 당연히 어느정도 비판도 있다.일단 정치적인 수완으로 봤을 때는 의회 구성 문제로 당시 지리해져가던 협상을 성공적으로 끝맺었으며, 당시 아파르트헤이트 철폐에 반대한 극우 백인들과 반투스탄 내 기득권층의 반발, 잉타카 자유당과의 또다른 분쟁으로 남아공이 거의 내전 상태까지 갈 뻔했던 것을 진화시켜 남아공을 안정시켰다. 허나 후에 그의 후배들이 일으킨 부정부패나 추문이 일어나는걸 적극적으로 제지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인종간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은 것만 해도[28] 다행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으며,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벌어졌던 만행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처분했고 재산몰수같은 조치도 취하지 않았기에[29] 넬슨 만델라가 백인들한테도 많이 존경받는다.
이처럼 만델라가 흑백 간의 갈등을 봉합하고 남아공의 분열을 막았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의 집권 시기에 남아공의 빈부격차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비판은 있다. 실제 그의 집권 시기 남아공 경제는 꽤 성장했지만[30] 기업가와 정기적으로 회동하던 만델라가 당시 트렌드였던 신자유주의적 경제관을 받아들여 그 과실은 백인과 일부 부자 흑인들만 나눠가졌다는게 요지. 물론 애초에 사회민주주의 성향이 있던 만델라도 분배 정책에 신경을 안쓴건 아니라 예를 들어 흑인 경제력 강화(BEE) 프로그램이라 해서 수탈당하던 흑인들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줌으로써 빈부 격차를 줄이기 위한 제도를 시행하기도 했지만, 문제는 일부 흑인만 혜택을 입어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는 것.
그래서인지 지니계수가 많이 높아진 2010년대 중반 남아공 현지에선 만델라가 흑인의 배신자라는 식의 벽보가 붙는 일도 종종 있는 모양이다. # 물론 남아공에서 만델라는 여전히 위대한 어르신(Madiba) 취급받기에 다수를 대표하는 견해라고 볼 순 없지만, 남아공 내에도 반(反) 만델라 세력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애초에 여러 견해가 나오는게 민주주의 사회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실 이 부분은 만델라 입장에선 좀 억울할 법도 한게, 지금도 아프리카에서 남아공만큼 사는 나라가 몇 없다. 다수는 저성장과 빈부격차, 독재의 3단 콤보를 동시에 맞고 있는 게 아프리카의 현실이다. 당장 이웃나라 짐바브웨의 독립투사로 시작해서 경제 폭망의 원흉이 되어버린 로버트 무가베가 있다. 게다가 현재 남아공의 빈부격차는 후임자 들이 훨씬 심화시킨 케이스라 이 부분에선 오히려 만델라가 재평가되기도 한다. 만델라는 최소한 현상 유지는 했지만 후임자들은 그것도 못했다는 것.
4. 저명인사들과의 인연
4.1. 버락 오바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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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워싱턴 DC의 한 호텔에서 면담 중인 오바마와 만델라. 당시 오바마는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와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땔레야 땔 수 없는 관계였다. 비록 두 사람이 생전 직접 대면한 것은 단 한차례에 불과하지만, 만델라 생전 서로에 대해 좋은 평가를 많이 내렸고 오바마는 만델라에 대해 여러차례 존경심을 표한 바 있었다.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여러 원인 중 하나가 바로 만델라의 선례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오바마는 1995년 발간한 자서전에서도 그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으며 그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오바마는 만델라 추모 연설에서, 갓 대학에 들어갔던 1979년 만델라를 처음 알게 되어 그의 사상에 깊이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민족회의의 한 당원으로부터 남아공의 인종차별 정책에 대한 설명을 들은 뒤, 이러한 상황에 분개해 정치 참여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오바마가 생전 처음으로 한 대중 연설이 바로 옥시덴탈 대학교에서 열린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집회에서의 연설이었다. 오바마는 인권변호사 활동을 거쳐 1992년 빌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 캠프에 참여하며 정치에 입문했고, 1996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7년간 재직하다가 2004년 연방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 때 오바마는 2004년 미국 대선 후보로 나선 존 케리 후보에 대한 찬조연설을 통해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되고, 흑인 정치인들 중에서 대권에 가까워진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게 된다.
두 사람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은 2005년 5월 17일, 만델라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위싱턴 DC의 한 호텔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오바마는 만델라의 호텔 방으로 직접 찾아가 짧게 면담을 간졌는데, 만델라는 이 때 오바마를 격려하며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눴다. 당시 만델라는 고령에 컨디션이 좋지 않아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면담을 했으며, 오바마는 만델라가 말하는 내내 선 채로 그의 덕담을 들었다. 이 후 2008년 오바마가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만델라는 축하 서한을 보내며 그의 당선을 기뻐했다.
오바마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기간 두 사람은 만남을 추진하였으나, 끝내 두 번째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다. 대신 2011년 영부인 미셸 오바마가 남아공을 방문해 그의 자택에서 만델라와 가족들을 예방하였고, 오바마는 종종 만델라에게 전화를 걸어 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했다. 만델라는 오바마의 2기 임기 중 사망했는데, 오바마는 "우리 시대의 가장 용기있는 사람이 떠났다" 는 내용의 추모 성명을 발표하고 직접 그의 추도식에 참석해 연설했다.
우리는 다시는 넬슨 만델라 같은 분을 만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세상 모든 곳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당신도 만델라가 보여준 일들을 당신의 일로 만들 수 있다고 말입니다. 30여년 전, 학생이었던 나는 넬슨 만델라를 알게 되었고, 그가 이 아름다운 땅(남아프리카)에서 이끌었던 투쟁들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내 안의 무엇인가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은 나에게 다른이들 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책임감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자리에 서 있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이 여정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만델라 그분에 비한다면 항상 모자른 존재일테지만, 그는 항상 나를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원하도록 만들 것입니다. 그는 내 안에 무엇이 최선인지 알려주고 있습니다.
4.2.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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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3월, 청와대에서 회담 중인 만델라-김대중 |
김대중 전 대통령과는 1980년대부터 인연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인종차별과 독재라는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청산하기 위해 일생을 바쳤고, 이 때문에 부당한 권력에 찍혀 오랜 시간동안 옥살이를 했다는 점이 매우 유사하다. 만델라는 무려 27년동안 감옥에 투옥되었고, 김대중은 6년 이상의 감옥 살이는 물론 도쿄에서 납치되어 죽을 뻔하다가 구출되는 등 여러차례 목숨을 위협받으며 투쟁하였다. 또한 민주적인 선거를 통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두 사람 모두 과거의 정적에 대해 탄압이 아닌 화해와 용서의 정신을 펼쳤다는 점도 똑같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의 비슷한 일생은 세계적으로 큰 주목을 받았으며 한 때 외신이 김대중을 아시아의 만델라라고 호칭한 적이 있었다.
김대중 전(前) 대통령 역시 만델라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1995년 만델라의 자서전을 직접 국어로 번역하였고 자신의 정치적 기치 중 하나로 만델라 정신을 뽑기도 했다.[31] 1997년 대선 당시에는 만델라가 자신의 딸을 통해 27년의 수감 생활동안 차고 있던 낡은 시계를 선물하기도 했다.
2001년 3월, 내한한 만델라는 청와대를 찾아 김대중과 회담을 하고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두 사람의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 대면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만델라는 무지개 공화국이라 소개하며 인류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만델라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추진하던 햇볕정책도 호평하면서, 화해로 대북정책을 풀어나가라고 조언하였다. 김대중이 퇴임한 뒤에도 두 사람은 서신을 주고 받았으며,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만델라는 애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2013년 12월, 만델라가 사망하자 김대중평화센터는 이희호 여사 이름으로 애도 성명을 발표하고 만델라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선물한 낡은 시계 등 여러 자료들을 공개하였다.
4.3. 마이클 잭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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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7월 21일, 만델라의 81세 생일 잔치에 참석한 마이클 잭슨 |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과도 생전 친분이 깊었다. 두 사람 모두 흑인 사회에서는 부정할 수 없는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기도 하고, 한 때 인종차별 반대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인물이었기에 오바마와의 관계처럼 땔레야 땔 수 없는 사이였다. 마이클 잭슨 역시 만델라에 대한 존경심을 거듭 표하며 만델라의 재단을 자신의 콘서트 스폰서로 지정해 많은 금액을 기부하기도 했으며, 1996년부터 1999년까지 여러차례 만델라와 만나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
특히 1999년 열린 'Michael Jackson & Friends' 콘서트는 만델라 재단이 직접 스폰서로 참여했고, 만델라가 콘서트 개최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What More Can I Give의 초판 제작 작업 당시에도 마이클 잭슨은 만델라와 앨범 컨셉에 대한 면담을 하며 조언을 듣기도 했다. 비록 2002년 최종 발매 때는 9.11 테러에 대한 추모와 전쟁 반대의 의미로 컨셉이 바뀌긴 했지만...
2009년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만델라는 재단을 통해 조사를 보내고 그를 애도했다. 참고로 만델라는 생전 마이클 잭슨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 질문에 "He's part of our family.(그는 우리의 가족입니다.)"라고 답한 바 있다. 얼마나 마이클 잭슨을 아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참고로 추도식장에서는 스모키 로빈슨이 조사를 대독해서 읽었다.
5. 여담
- 애칭이자 존칭으로 마디바(Madiba, 말 그대로 "어른")[32]라고 많이 불린다. " 아버지"를 뜻하는 타타(Tata)로도 가끔 불리며, 혹은 "훌륭하다", "위대하다"는 뜻을 지닌 쿨루(Khulu)로 불리기도 한다.
- 넬슨 만델라는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섬나라 국가 카보베르데와 깊은 인연이 있다. 카보베르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반인종 차별 운동에 동참했다. 카보베르데는 1975년에 독립한 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규탄 및 항의의 수단으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의 외교 관계를 끊고, 아프리카 국민회의(ANC)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넬슨 만델라는 카보베르데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했으며, 그는 1992년에 카보베르데를 방문해 카보베르데의 최고 훈장인 아밀카르 카브랄 메달을 수여받았다. 때문에 카보베르데의 사람들은 넬슨 만델라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들은 그가 평등, 관용, 그리고 자유를 옹호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2012년에 카보베르데의 가장 큰 공항인 프라이아 국제공항의 이름을 넬슨 만델라 국제공항(Nelson Mandela International Airport)으로 명명되었다.
- 오랫동안 옥바라지를 했던 아내 위니와 1996년 황혼 이혼을 해서 말이 많았는데 지위를 이용해 국정을 농단하는 등 전횡을 일삼고 외도까지 했다는 게 사유였다고 한다. 민족회의 시절에도 위니가 남편과 달리 추종자들에게 배신자들에 대한 보복행위를 허락하고 특히 스파이로 의심되는 흑인 청년을 살인하도록 사주했다는 의혹이 있는 등 폭력적 행위로 인해 평화적 해결책을 강구하던 만델라와 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다고 한다.[33][34] 참고로 만델라는 총 3번 결혼했다. 위니는 2번째 아내였고 저 때 이혼하고 2년 뒤 모잠비크 대통령 사모라 마셸[35]의 아내였던 그라사 마셸 여사와 삼혼을 했다. 그때 나이가 무려 80세.
- 남아공 월드컵 개막식 당일에 증손녀(1997년생)가 안타깝게도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일이 벌어져 개막식에 불참하였다. 그런데 만델라의 조카가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만델라가 FIFA의 지속적인 경기장 참석 요청을 받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한다. 조카의 표현을 빌리자면 협박 수준이었다고 한다. 때문에 매일 주치의로부터 만델라의 상태를 보고받아야 했고 가족들은 혹여 의사가 경기장 참석에 문제가 없다는 진단을 내릴까봐 노심초사했다고 한다. 사실 FIFA는 넬슨 만델라라는 이름이 가지는 엄청난 상징성을 팔아먹기 위해 바로 얼마 전 증손녀를 잃고 슬픔에 잠긴 91세 노인을 축구장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이다. 이후 폐막식에도 불참하리란 예상을 깨고 만델라는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경기장에서 열린 월드컵 폐막식에 참석하였다. FIFA의 더러운 속내와는 별개로 관중들은 비록 10분이 채 못 되는 짧은 시간이긴 했지만 부부젤라를 불면서 만델라를 환영하였다.
- 저서로 뉴욕 타임스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책에 선정된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등이 있다. 국내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어로 번역해 1995년 처음 출판했고 2012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 에이즈 퇴치 운동에도 앞장섰다. 출소 당시까지만 해도 에이즈는 남아공에서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90년대 중후반으로 갈수록 에이즈가 갈수록 퍼져 에이즈 환자가 급속히 늘어나게 되었고 남아공의 성장잠재력과 평균수명을 갉아먹는 수준에 다다랐다. 재임 당시에 흑백화합 및 인프라 건설, 경제성장같은 여타 현황에 밀려 에이즈 문제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고는 하지만[36] 퇴임 직후에 본격적으로 에이즈 퇴치 활동에 앞장서고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자금을 모금하여 에이즈 고아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또한 에이즈가 문화질병이라며 약을 처방하는 제대로 된 대책 대신 주스 섭취를 권하는 등 삽질을 거듭하던 타보 음베키에게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라며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자신부터 전처 소생인 큰 아들을 2005년 에이즈로 잃었다는 것을 공개하면서 에이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촉구했고, 비싸게 약을 팔던 다국적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기까지도 했다.
- 1996년 헌법 2조 9항의 인권선언에는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금기하는 조항이 있는데, 이것은 헌법에서 성적 지향에 대한 인권을 명시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는 결국 2006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이자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나라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 넬슨 만델라는 1990년대에 대통령직을 수행했고 2013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만델라가 옥살이를 하던 80년대에 사망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대중들 사이에서 거짓 기억이 공유된 것. 여기서 만델라 효과라는 말이 생겨났다.
- 2018년 5월 16일, 스페인의 축구 클럽 FC 바르셀로나가 넬슨 만델라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아공 리그의 챔피언인 마멜로디 선다운즈와 친선경기를 가졌다. # 문제는 바르샤가 비록 리그 우승을 확정짓기는 했으나 영광스러운 무패 우승까지는 2경기가 남아있었다는 것. 더군다나 만델라의 생일은 7월 18일이라서 굳이 시즌 중에 친선전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이 친선전 때문에 37라운드 레반테 UD 원정은 메시, 피케 등 주요 선수들이 벤치에 앉거나 아예 명단에서 제외되는 로테이션을 돌려야 했고, 결국 5:4로 패배하면서 무패 우승이 물건너가고 말았다. 이후 바르샤는 만델라컵에서 가볍게 승리했지만 # 일부 안티와 팬들에겐 "친선경기에 불과한 만델라컵을 무패우승과 맞바꿨다"는 조롱을 들어야 했다. 반대로 말하면 바르셀로나가 그만큼 만델라에 대한 예의를 갖췄다고 봐야 할지도.
- 짐바브웨의 로버트 무가베와 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무가베가 백인 권력자들에 맞서 싸우던 독립영웅이던 시절과 달리, 독립 이후 독재자 겸 극단적 흑인우월주의 성향으로 타락하는 것을 보며 만델라는 살아 생전 안타깝게 여겼다. 그리고 짐바브웨는 나라도 안좋은 상황에서 독재자까지 한명 더 상대해야 하는 이중고를 겪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무가베와 만델라 모두 같은 95세에 죽었다.
-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장녀인 제나니 노시츠웨 들라미니가 2019년 주한 남아공 대사로 부임했다.
- 2020년, 막내 딸이자 주 덴마크 대사를 지낸 진지 만델라가 향년 59세로 사망했다. # 코로나19 양성반응을 보였다고 유족들이 공개했다. # 2023년 9월 25일. 손녀 졸레카 만델라가 향년 43세로 사망했다. #
- 2012년부터 발행중인 현행 남아프리카 공화국 랜드 지폐 앞면에 고정인물로 등장하고 있다.
6. 어록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이 땅의 수많은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를 치러 왔으며,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 1962년 11월, 노동자들의 파업을 유도한 혐의로 받은 재판 중 발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국민과 나라를 위해 마땅히 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일들을 끝마친 사람이라면 누구나 편히 영면할 수 있다. 나 스스로 그런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믿는다. 그렇기에 나는 영원의 시간 속에 잠들 것이다."
"삶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다시 일어섬에 있다. (The greatest glory in living lies not in never falling, but in rising every time we fall.)"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 1994년에 출판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Long walk to Freedom)"에서
"억압받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억압하는 사람도 해방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는다면 남에게 나의 자유를 빼앗긴 것처럼 나는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내가 감옥에서 풀려나왔을 때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둘 다를 해방시키는 것이 나의 사명이었습니다."
"나는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나는 주춤거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도중에 발을 잘못 내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커다란 언덕을 올라간 뒤에야 올라가야 할 언덕이 더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비밀을 알았습니다. 내가 가야 할 머나먼 길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감히 꾸물거릴 수가 없습니다."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누구도 피부색, 배경 또는 종교 때문에 다른 사람을 미워하도록 태어나지 않는다. 미워하게끔 배운다. 미워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면 사랑하는 것도 가르칠 수 있지 않은가. 사랑은 미움보다 더 자연스레 사람 가슴에 다가온다."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 자유를 (사회에 의해) 빼앗겼을 때, 그는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when a man is denied the right to live the life he believes in, he has no choice but to become an outlaw.)"
"여러분이 '성자' 에 대해서 '끝없이 노력하는 죄인' 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는 이상, 나는 성자가 아닙니다."
"교육은 세상을 바꾸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A freedom fighter learns the hard way that it is the oppressor who defines the nature of the struggle,and the oppressed is often left no recourse but to use methods that mirror those of the oppressor. At a point, one can only fight fire with fire."
"투쟁의 방법을 정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이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알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대강으로 나설 수 밖에 없다"
"투쟁의 방법을 정하는 것은 억압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억압하는 사람들이다. 억압받는 사람들은 억압하는 자들이 쓰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을 참으로 어렵게 알게 된다. 어느 시점부터는 강대강으로 나설 수 밖에 없다"
"나는 대단한 인간이 아니다. 단지 노력하는 한 노인일 뿐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살았다는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가 우리 삶의 의미를 결정할 것이다."
7. 대중매체에서
《굿바이 만델라》의 한 장면. 데니스 헤이스버트 분.[39]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의 한 장면. 모건 프리먼 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인지라 할리우드에서도 당연히 그의 생을 영화화한 적이 몇 번 있다. 대니 글로버(영화 《 2012》에서 미 대통령으로 출연)는 만델라가 아직 옥고를 치르고 있던 1987년 HBO에서 제작한 TV 영화에서, 시드니 푸아티에이는 만델라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인 1997년, 데니스 헤이스버트는 2007년작 《굿바이 만델라》(원제 Goodbye Bafana)에서[40], 그리고 모건 프리먼은 2009년작 《인빅터스: 우리가 꿈꾸는 기적》[41]에서 각각 만델라로 열연했다. 모건 프리먼의 경우 만델라 본인이 자신을 연기한 최고의 배우라고 극찬한 적도 있었고, 만델라의 사망 이후 만델라를 추모하는 인파들이 만델라가 아닌 프리먼의 사진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만델라 사진 보여주면 모건 프리먼?이라고 하거나 모건 프리먼 사진을 보고 만델라?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 물론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사례도 몇 번 있다.
2013년 영국에서도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이라는 제목에 영국 배우 이드리스 엘바 주연으로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런던에서 만델라의 딸 등이 참석하여 시사회가 진행되던 도중 만델라의 부고가 전해졌다고 한다.
소설 《 세계대전Z》에서는 조국을 살리기 위해서 레데커 플랜이라는 극약 처방을 내리기로 하고 레데커 플랜을 계획한 인종차별주의자인 폴 레데커를 불러와 도움을 요청한다.
본인이 영화에도 직접 출연한 적이 있는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인 맬컴 엑스를 다룬 동명의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깜짝 출연. 흑인 어린이들에게 엑스의 정신을 가르쳐주는 교사 역으로 등장한다.
남벌에서는 오혜성에게 간접적으로 빅엿과 트롤링을 당하고 만다.
흑인 패션모델인 나오미 캠벨이 친할아버지로 여기고 존경하는 인물이다. 만델라 역시 그녀를 친손녀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모바일 게임 세계 정복 2:나라 키우기에서는 위대한 정치인으로 소개되며 식량과 세금 수입을 5% 늘려준다.
[1]
現
남아프리카 공화국
이스턴케이프주 음베조.
[2]
"말썽꾸러기", "장난꾸러기"라는 뜻이다. 나쁘게 보면
문제아라는 뉘앙스일 수도 있지만, 자식 이름을 그런 뜻으로 짓진 않았을 것이다.
[3]
정부언론외래어공동심의위원회의 심의에 따른 표기는 '롤리랄라'이지만 실제
코사어 발음은 [xolíɬaɬa\]이며 '홀리흘라흘라'로 표기할 수 있다.
[4]
백인 이야기만 있으며 흑인들은 노예나 강도로 나오는 얘기
[5]
영국인들의 지배를 받고 있긴 했지만 소도시에서는 추장들의 권력이 유지되었다.
[6]
만델라의 동료이며 남아공의 정치인 겸 민주화 운동가다.
[7]
사실 만델라의 이유도 정당한 것이 그가 다니는 포트헤어 대학은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흑인을 받는 대학이었으나 학식이 너무 형편없었다.
[8]
물론, 투쟁 과정에서 인도 및 여러 유색인들을 대변하는 당들과도 같이 일한다. 또 공산당과도 손을 잡았는데 자서전에서 만델라는 공산당이랑 손 잡는건 무척 조심스러웠다고 말했다.
[9]
그러나 이는 1948년 이후에나 공식적으로 실시 된 정책이다. 정식적으로 초기에 대항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사회일 뿐, 아파르트헤이트가 아니다. 하지만 시기가 겹쳐서 애매하긴 하다. 다만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신격인 되는 정책들은 그때에도 있었으며 이 당시에도 대다수 흑인들은 참정권이 없었고, 소수의 부자나 토호같은 기득권층이나 투표권을 가졌을 따름이었다. 다만 컬러드 계층이나 아시아인들도 투표권을 가지기는 했기에 그나마 막장으로 흘러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10]
당시 악법 중 하나로서 흑인들을 통제하기 위해 제정된 통행증법에 대해 저항하는 시위였다. 흑인들은 지정된 구역을 벗어날 때 이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제시를 거부하거나 소지하지 않으면 무조건 체포로 이어졌다.
[11]
전면전을 벌이는 게 아니라
사보타주 등의 활동을 통해 경제를 망가뜨려서 정부가 협상에 응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2]
전술한 샤프빌 학살 당시 ANC 의장이었고, 비폭력 운동을 유지한 점을 인정받아 이듬해인 1961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13]
대표적으로 남아공 공산당 서기장이 된 조 슬로보(Joe Slovo)가 있는데, 그는 MK의 사령관직을 맡기도 했다.
[14]
원래는 여러 해 동안 폭격은 건물에만 행해졌으나 나중에는 사람을 상대로 한 테러가 일어나기도 했다.
[15]
미국이 개입했을 거라는 의혹은 당대부터 제기됐으나, 전직
더반 미국 부영사 겸 CIA 첩보원이었던
도널드 리카드(Donald Rickard)가 사망하기 2주 전에 폭로하면서 확정됐다.
가디언지의 관련 기사 미국에서는 만델라를 소련의 완전한 앞잡이로 보고 있었고, 남아프리카에서 전쟁 혹은 내전을 일으킬 수 있었기에 막는 수밖에 없었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ANC에서는 당연히 반발했고 미국의 손길이 오늘날에도 미치고 있다며 비판했으나, CIA에서는 철저히 부정했다.
[16]
본래는 사형을 언도하려고 했으나, 만델라가 이를 잘 간파하여 은연중에 정치적인 재판으로 끌고 가서 살 수 있었다. 만델라의 변호사 경험이 빛을 발한 것이다.
[17]
영화 '굿바이 만델라'에서는 이 시기 만델라를 지켜보던 백인 교도관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참고로 이 교도관하고는 꽤 친하게 지내서 대통령 관저로 초대해올 정도였다고 한다.
[18]
특히 1976년 6월 16일에 벌어진
소웨토 항쟁이 결정적이었다. 처음에는 정부에서
아프리칸스어만을 강요하고 토착언어를 무시하는 데에 분노한 학생들이 벌인 저항운동이었는데, 과격한 경찰들의 발포로 인해 헥터 피터슨(Hector Pieterson)이란 학생이 사망하자 분노한 시민들이 합류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운동으로 확장된 것이다. 훗날 남아공에서 6월 16일은 "청년의 날(Youth Day)"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제정됐다.
[19]
남아프리카 국민당의 일부 과격파들이 탈당하여 만들었다.
[20]
남아공은 '내각제적 대통령제'를 채택해서, 대통령을 내각제 총리 뽑듯 뽑는다. 즉 총선에서 뽑힌 하원의원들이 최다수당의 당대표인 현역 하원의원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때문에 대통령도 하원의원에서 나오지만, 대신 대통령은 취임 즉시 하원의원을 사퇴해야 하고 임기가 하원의원 임기에 종속되지 않아 대통령 임기를 새로 부여받으며 국가원수와 정부수반을 겸한다. 일반적인 내각제 총리는 현역 의원 신분이라서 총리 임기가 의원 임기에 종속되고 정부수반만 맡으며 국가원수는 대통령이나 국왕이 상징적으로 맡는 구조다.
[21]
반대로 흑인들은 축구에 열광했다.
[22]
타보 음베키는 만델라의 경제정책을 이어받아서 그가 재임하던 시기 남아공의 경제가 많이 성장했고 그 결과 아프리카의 맹주로 급부상하였지만, 그 과실은 일부 계층에게만 돌아갔고(이 시기에 남아공내에서 흑인 부유층과 중산층들이 대거 등장했지만 이들의 숫자는 아무리 넓게 잡아봐도 전체 흑인의 20%가 채 안되는 수준이고, 백인층 기득권도 상당수 남겨놔 나머지 흑인들은 여전히 실업과 저임금 문제에 시달리고 있는 형편이다.), 공공서비스 질 향상이나 범죄 문제 대처에도 좋진 않은 성적을 보이다 결국 권력다툼에 밀려 2009년 총선을 6개월 앞둔 시점에서 불명예 중도 퇴진하게 된다. 또 재임 초기 만델라와 대립하면서까지 에이즈에 대해 바보같은 대응을 했다가, ANC내에서도 욕을 먹는 등 망신을 사기도 했다. 그래도 퇴임 이후에는 외교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당내 정적 겸 후임
주마가 각종 스캔들로 욕을 먹으면서 평가가 전보단 나아진 편. 하여튼 그럼에도
시릴 라마포사 대통령까지 2020년대에도 ANC가 쭉 집권하고는 있다.
[23]
김대중 대통령은 국내 언론 및 외신에서
아시아의 만델라라고도 한다. 1970~80년대 민주화 운동과 징역살이, 해외 망명, 반대파의 극심한 저항, 정적 용서, 노벨 평화상 수상 등이 공통점으로 꼽힌다.
#
[24]
여담으로 이날 오바마가 추모 연설을 할 때 남아공 청중들로부터 그야말로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쏟아졌다. 오바마는 평소에도 만델라를 존경한다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었는데, 그런 미국 첫 흑인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 추모식에서 직접 연설을 하니 감회가 남달랐을 것이다.
[25]
일본 황실 인사가 황족이 아닌 주요 인사 추모식에 직접 참석하는 예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후 2019년 덴노에 등극한다.
[26]
구(舊) 사커시티 스타디움.
2010 남아공 월드컵의 주경기장이었다.
[27]
아프리칸스어로 "토끼는 서두르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28]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정도가 달랐을 뿐 독립 직후 백인을 상대로 한 유혈사태는 늘 있었다. 신생 정부의 행정력이 미약해서, 혹은 지도자의 방관 하에 지방에서 크고작은 폭동이 일어나는 일이 다반사였기 때문. 남아공의 경우는 백인으로 구성된 정부가 사전 합의에 따라 흑인에게 이양됐기 때문에 정부가 멀쩡히 작동하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지도자인 만델라가 유혈사태를 원하지 않았다.
[29]
만델라가 집권했을 당시 바로 윗동네인 짐바브웨에서는 소수 부족들을 희생양 삼아 정권을 연장해오던
로버트 무가베가 소수 부족이 거의 전멸하자 백인에게 화살을 돌려 각종 재산을 빼앗고 추방하고 있었다.
[30]
1980년대 각종 제재로 1%를 찍던 남아공 경제는 서방과 관계를 돈독히 한 만델라 집권 시기 4%대까지 상승한다.
[31]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이자 22대 국회의원인
인요한도 1990년대 중반 대북사업과 관련해 조언을 구하려고 김대중 전 대통령을 대면했을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만델라에 대한 강연을 1시간 정도 해주며 보복이 아닌 화해와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실제로 1998년 2월, 대통령 취임식 때 자신의 정적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를 초청하는 걸 보고 김대중에게 큰 감명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모습을 보고 그가 노벨상 감이라고 생각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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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단어 중의
대로(大老: 국가의 큰 원로, 큰 어르신)와 어감이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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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결국 이렇게 노선 갈등 등이 겹쳐 이혼했지만, 2018년 위니가 사망한 이후엔 만델라 손녀들이 남아공 투쟁사에서 빼놓긴 힘든 그녀의 행적을 기념하는 등 그래도 영향력은 남아있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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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이혼과 관련된 말이
명언/결혼 항목에 하나 있다. "결혼은 진짜 빡쎈거야. 결혼이 얼마나 빡쎈 거냐면, 넬슨 만델라도 이혼했어. 넬슨 만델라는 27년을 남아공 감옥에 갇혀 있었어. 그는 27년 간 매일같이 당하는 고문과 매질도 참아냈고 40도가 넘는 남아공 사막에서의 강제노동도 견뎌냈어. 그 지옥 같은 27년 간을 참아내고 감옥에서 나왔는데 부인하고 겨우 6개월 지내고 이혼했다고." - 크리스 록...당연히 웃자고 하는 소리. 6개월만에 이혼한 것도 아니고, 백인정권이 만델라를 고문하지도 않았다. 만약 만델라가 진짜로 가혹한 고문이나 매질을 당했다면 남아프리카의 백인정권은 진작에 흑인들의 폭동이나 내전으로 개박살이 났을 것이다. 그만큼 만델라가 흑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자 영웅으로 떠받들어지고 있었고, 백인정권도 이를 잘 알아서 25년 간은 로벤 섬에 가둬놨다가 그 후부터는 백인 교도관의 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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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933년 ~ 198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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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별개로, 당시 에이즈 운동가이자 가장 장수한 에이즈 환자인
은코시 존슨의 연설에는 찬사를 보냈으며, 이에 영향을 받아 에이즈 퇴치 운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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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당이었던 ANC가 삽질을 할 때마다, 남아공의 반 ANC 세력들이 자주 인용하는 말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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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가 죽은 이후 영미권에 퍼져 그 외 세계에도 만델라가 했다고 알려진 말이나, 실제로는 영국의 수필가인 토머스 칼라일의 어록이다. 만델라의 실제 발언은 Every noble work is at first impossible(모든 고귀한 일은 처음에는 불가능하(게 보인)다)로, 사실 전체적인 맥락은 비슷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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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는 키가 185cm에 젊은 시절 복싱을 했던 경력도 있어서 사진 속의 덩치 꽤나 있는 모습이 고증오류까진 아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의 만델라 사진을 보면 체격이 꽤 큰 편이란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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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가 약 30년 동안 옥중 생활을 할 때 그를 전담했던 백인 간수와의 우정이 주 이야기. 2007년에
토요명화가 폐지된 이후 편성된
KBS 프리미어에서 방영했고 이후 2009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하자 KBS2에서 방송했고, 만델라의 사망 직후 KBS1에서 다시 방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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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델라의 취임 이듬해 남아공에서 열린 세계 럭비선수권 우승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