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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2-26 12:48:18

국민당의 2차 북벌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난징 국민정부의 성립
3.1.1. 당계전쟁 탕성즈의 몰락3.1.2. 장왕합작3.1.3. 4중전회 예비회의3.1.4. 장제스의 복직
3.2. 2차 북벌
3.2.1. 안국군의 반격 준비3.2.2. 국민혁명군의 북벌 준비3.2.3. 장제스의 2차 북벌 선포3.2.4. 제남 사건3.2.5. 장쭤린의 퇴각3.2.6. 베이징 함락3.2.7. 국민정부의 통일 선언과 자주권 회복3.2.8. 동북역치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6.2.1. 국민당의 1차 북벌6.2.2. 2차 북벌 중 사건

1. 개요

1928년 4월, 중국 국민당 장쭤린 북양정부를 무너뜨리고 중국 대륙의 지배자가 된 군사작전을 말한다. 이 시점을 계기로 국민당에 합류하지 않았던 구 북양계 군벌들이 모두 몰락하였으며 마지막 남은 봉천군벌조차 봉천군벌의 2대 수장인 장쉐량 국민정부에 합류하기로 결정하면서 중국 대륙은 국민당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본 문서는 1927년 9월 영한합작 시점에서 1928년 동북역치 시점까지 다루도록 한다.

2. 배경

1926년 7월, 중국 국민당의 영도자 장제스 쑨원의 유지를 실행하기 위해 북벌에 나섰다. 우페이푸, 쑨촨팡 등 군벌의 군세는 국민혁명군에게 잇달아 패하여 1927년 봄에는 국민혁명군이 산동, 하남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국공갈등이 심해짐에 따라 1927년 4월 장제스가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청당을 실시함으로 공산당과 결별했고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기존의 우한 국민정부도 7월 여러 사정으로 공산당과 결렬하였고 군벌과 우한의 공세에 장제스가 8월에 하야함에 따라 난징과 우한이 통합하는 영한합작이 일어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서산회의파의 맹렬한 공격에 9월에는 왕징웨이도 하야하고 탕성즈는 자신의 무력을 믿고 세력 확장을 위해 안하무인으로 날뛰고 있었으며 개조파, 서산회의파, 광서파, 광동파 등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혀 중국 국민당 내부은 합작이란 말이 무색하게 개판이었다. 자연스레 북벌은 12월에 북양군벌들의 공세로 빼앗긴 쉬저우를 탈환하는 정도에 그쳐 1차 북벌의 전선에서의 진전이 없었다.

자세한 사정에 대해서는 국민당의 1차 북벌 문서 참조.

3. 전개

3.1. 난징 국민정부의 성립

3.1.1. 당계전쟁 탕성즈의 몰락

영한합작의 조건으로 하야한 장제스는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의 설립에 대해 "특위가 청당에 적극적으로 임한다면 굳이 이를 반대하진 않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상용한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며 조건부 찬성을 표했다. 이후 장췬을 비롯한 장제스의 맹우들이 항저우로 집결하고 왕징웨이가 항저우에서 장제스와 회담을 하고 있다는 소문 등이 퍼져 장제스가 복귀한다는 소문이 파다해졌고 지지자들은 장제스에게 복직할 것을 권유했다. 9월 20일에는 장제스 지지자들이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열었고 정부가 이를 무력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렇듯 장제스 복귀를 요청하는 많은 요구가 있었으나 장제스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외유를 선언하고 외국 유학을 이유로 세계일주를 떠났다. 일본에서 장제스는 다나카 기이치 일본 총리와 함께 장제스-다나카 회담을 열어 일본의 원조를 구하려 했지만 소득이 없었다. 다만 중국 최고 명문가 중 하나인 쑹씨 일가의 막내딸 쑹메이링과의 결혼을 허락받는 데는 성공했다.

한편 친장파이며 후한민과 관계가 밀접하던 리지선이 9월 중순 시국선언을 발표하여 당 각파의 협력을 주장했는데 그는 특히 장제스, 왕징웨이의 합작을 주장했다. 얼마 후 우징헝, 리스쩡, 차이위안페이 등이 중대 문제를 상의해하기 위해 리지선의 상하이행을 요청함으로 장왕합작에 대한 동의를 표시했다. 이때 왕징웨이가 친공적이라면서 그와 관계가 껄끄러웠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의 합작에 동의하지 않아 동참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때 영한합작에 불응하여 우한 정치분회를 설립하고 특별위원회에게 도전하던 탕성즈는 9월 27일 휘하의 허젠을 안휘성 정부주석에 무단 임명한 사건 때문에 광서파, 광동파, 서산회의파, 펑위샹, 주페이더 등에게 동시에 밉보여서 10월 20일 토벌령 발표로 하남, 강서, 광동, 안휘에서 동시에 공격을 받고 몰락, 11월에 하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던 장제스는 11월에 귀국, 12월에 쑹메이링과 결혼식을 올렸다.

3.1.2. 장왕합작

광저우에서 왕징웨이는 리지선과 회합을 가지고 중앙집행위원회 회복, 광저우 국민정부의 신설, 당내 분규 해결을 위해 4중전회 소집을 주장했다. 왕징웨이, 리지선은 연명으로 4중전회를 광저우에서 개최하겠으니 각 위원들의 출석을 요구했다. 이에 리쭝런, 바이충시는 난징에서의 개최를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는 각자의 기반에서 중전회를 개최하여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싸움이었다. 결국 11월 1일 축석위원의 부족으로 난징에서의 4중전회는 개최되지 못했고 탄옌카이가 광동의 중앙위원들에게 통전하여 출석을 요청했고 여기에 친장 5원로도 동참했다. 이들의 의도는 복잡했는데 왕징웨이와의 합작을 위해 4중전회 개최는 동의하였으나 광동파의 주도권 장악을 막기 위해 난징에서의 개최는 고수하려 한 것이었다. 여기에 후한민마저도 중전회 소집에 찬성함으로 특위에 대한 타격은 더욱 커졌다. 이에 고무된 왕징웨이는 특위의 존재 자체가 4중전회 소집에 큰 장애요인이라면서 특위를 취소하거나 최소한 직권을 정지할 것을 요구했고 그러한다면 소집장소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난징 측은 특위의 취소나 직권 정지는 중전회에서 논의할 문제라면서 거절했으나 중전회 소집을 상하이에서 하는 것을 제안하는 등 중전회 소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한편 광동파는 난징을 무시하고 광저우에 중앙당부를 설치한 것인지, 아님 예비회의 참석 후 진로를 결정한 것인지 이틀 동안 논쟁에 들어갔는데 11월 10일 마침내 귀국한 장제스가 당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모임을 갖자는 전보를 보내왔다. 장제스 역시 중전회 소집에 동의한 것이었다. 이에 참석자들은 광저우를 고집할 것 없이 상하이에서 장제스와 회동하여 회의장소를 결정하자고 했고 이를 위해 왕징웨이와 리지선을 상하이로 파견했다. 그리고 특위 취소, 중앙집행위원회 회복, 4중전회 소집을 협상 조건으로 내걸었다. 어느 하나라도 이뤄지면 특위의 무력화는 확실한 것이었다.

장제스는 귀국 전부터 왕징웨이와 합작이 필수적이라 판단, 쑹쯔원을 광저우로 보내 왕징웨이와 합작의 절차와 방법을 상의하기 시작했고 스스로도 왕징웨이에게 편지를 보내 당국의 중임을 맡아줄 것을 부탁했다. 왕징웨이 스스로도 쑹씨 가문 및 쑹씨 가문과 연결된 쿵씨 가문과 연계가 있었으며 특위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하게 되어 장제스와의 합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장제스는 광서파가 장악한 난징보다는 광동파의 광저우가 낫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있었는데 국내의 분위기가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인식, 상하이를 통해 재기하기로 결정하고 왕징웨이와 본격적인 접촉에 들어갔다. 왕징웨이도 동조하면서 2차 장왕합작이 형성되었다.

3.1.3. 4중전회 예비회의

한편 장제스와 껄끄러운 상태였던 서산파는 장제스와 왕징웨이가 합작함에 따라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장왕합작을 저지하기 위한 움직임에 나섰다. 특히 특위가 붕괴됨에 따라 특위에서 제정한 3전대회 선거법과 조직법이 파기되면 서산파의 정치활동엔 엄청난 타격이 있을 터였다. 이 때문에 서산파는 3전대회 개최에 집착했다. 하지만 서산파의 정통성이 인정되면 입지가 좁아질 것을 우려한 광동파가 3전대회를 막고 4중전회 개최를 주장하며 서산파를 견제하려 했고 이를 위해 장제스와의 동맹을 결정하였다. 궁지에 몰린 서산파는 광서파와 연합하였고 이를 위해 탕성즈와 손을 잡으려 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하지만 서산파의 상황은 좋지 않아서 11월 9일 서산파와 가까운 쉬충즈 등과 서산파의 여러 핵심인물들이 당무시찰을 위한 일본파견이라는 명목으로 제거되었고 장제스는 복직을 거절하고 평당원의 자격으로 당무 발전에 전력하겠다는 표면적인 입장과는 다르게 원로들과 접촉하며 4중전회를 개최하고 여기에서 장제스의 복직을 정식제안하기로 했다.

서산파는 허잉친에게 반장에 동참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잉친은 이를 당연히 거절했고 거기에 동맹세력인 광서파와 관계도 그렇게 밀접하다고 할 순 없었다. 광서파는 서산파를 원로로 어느 정도는 존경했으나 장제스의 재집권이 확실시된 상황에서 서산파에 대한 존경만으로 장제스에게 대놓고 개길 만큼 밀접하지도 않았다. 거기다가 광서파는 탕성즈 토벌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어서 장제스에게 맞설 여유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상하이, 난징에는 장제스 복직에 완강히 저항할만한 세력이 더 이상 없었다. 이에 장제스는 은거를 계속하겠다는 초기 입장을 버리고 특위 취소를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한편 장왕합작을 공식선언하고 4중전회 개최를 요구했다. 특위가 장제스에게 그렇게 거슬리지 않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배려한 부분이 있는데도 장제스가 특위 취소라는 강경한 주장을 한 배경에는 장제스가 자신의 총사령관 직위가 특위에게 간섭받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특위 체제를 기반으로 광서파와 서산파가 성장하면 자신에게 위해가 될 것임이 틀림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정치적 기반을 일찍이 흔들어놓고자 왕징웨이와 입장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27년 11월 장파쿠이와 황기상이 장제스의 복직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장황사변이 발생하는데 이에 대한 광동파의 연계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으나 장제스는 자신의 복직을 위해 광동파를 무리하게 비호하였다. 이에 광서파 등이 반발해 정국은 혼란해졌다.

그러던 중 발생한 11월 22일의 탕성즈 토벌 승리기념 대회에서 서산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시가 행진에 군경이 발포하여 사망자가 발생하는 소위 난징 참안이 발생하자 서산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1] 서산파는 사건의 신속한 조사를 요구하면서 자신들이 당의 단결만을 위할 뿐 개인적 야심은 없다고 호소했으나 광동파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공격하였고 특위는 더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결국 12월 3일 장제스의 자택에서 30여명의 중앙집행위원과 중앙감찰위원외 모여 4중전회 1차 예비회의가 소집되었고 서산파 위원 10명이 직권정지와 행동감시 처분을 당했다. 이로써 특위는 사실상 마비되었다. 왕징웨이는 이날 특위만 취소되면 광동 측 위원들이 난징으로 가서 4중전회에 참석할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2월 4일 2차 담화회에서 특위 취소를 확정했다.

3.1.4. 장제스의 복직

장제스와 광동파 등의 약진에 탄옌카이, 리쭝런, 쑨커, 바이충시 등이 광동파 제재를 요구하고 주모자로 지목된 장파쿠이 토벌을 주장하며 광동 측 위원들의 사태에 대한 책임과 사퇴, 난징에서의 중전회 개최, 광저우 사태의 무력 해결을 요구했다. 장제스는 광동파 위원들에 대한 제거 시도를 견제하며 모든 것을 5중전회에서 처리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이에 일부의 반대에도 3차 회의에 광동파 위원들도 모두 참여하였고 왕징웨이 조사에 대한 문제를 두고 잠시 충돌이 있었던 것을 제외하곤 3전대회 개회지점과 일자를 4중전회에서 결정한다는 합의에 도달했다. 이로써 특위의 1928년 1월 1일 이전 3전대회 소집 결정은 완전히 효력을 상실했다. 12월 10일의 마지막 예비회의에서 왕징웨이 허잉친이 정식으로 장제스 복직안을 제출했다. 왕징웨이는 필요하다면 자신이 정치에서 손을 떼고 하야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에 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장제스 복직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광동파 위원들의 난징에서의 안전을 자신이 직접 보장하겠다고 하였고 광동파는 이에 만족했다. 예비회의 결과 장제스는 사실상 당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귀 동지는 작년에 국민혁명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 직권은 본당 중앙이 부여한 것이며 그 공적은 전 국민이 알고 있다. 현재 군벌은 아직도 저항을 계속하고 있고, 귀 동지는 은퇴할 시간이 아니다. 당내 분규의 근원을 차단하고 북벌을 완수하기 위해 귀 동지가 계속 국민혁명군 총사령의 직권을 집행할 것을 요청한다.
장제스 복직 요구 결의

또한 12월 10일 예비회의는 광저우 폭동을 이유로 대 소련 단교안을 통과시켰다. 장제스는 12월 13일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일찍부터 각지의 소련 영사관이 공산당의 정치기관이 되고, 또 소련의 극동은행이 공산당의 금융기관이 되어 있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기관을 봉쇄하지 않는 한 공산당의 소요는 정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비회의의 마지막 날에 나는 대소 단교안을 제출했다. 혁명이 성공할 때까지는 아무래도 소련과 단교할 필요가 있고, 우리들의 국민혁명이 성공을 거둔 뒤 적절한 기회에 방법을 강구하여 국교 회복을 꾀하면 된다. 지금 서둘러 해야 할 일은 소련 영사관 및 상업기관의 일체 봉쇄이다."

12월 13일 대소 단교안이 발표됨에 따라 12월 14일 국민정부는 국교단절을 선포, 소련 영사관의 철수와 소련 상업기관의 폐쇄를 선포하고 한커우에 체류하는 소련인들을 체포하여 추방했다. 하지만 소련 정부가 이를 수리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29년의 중동로 사건 중이었다. 한편 왕징웨이는 12월 11일 광저우에서 공산당이 주도한 광저우 폭동이 발생하면서 광동파가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리자 장제스의 복직을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사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비등하여 12월 17일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여 프랑스로 요양을 목적으로 다시 외유를 떠났다. 결국 장제스는 반대자를 달래고 당의 단합을 과시하기 위해 광동파와 왕징웨이 중전회 출석자격을 박탈하고 허샹닝 등 5명의 출석을 인정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광동파를 너무 비호하는 장제스의 모습에 장제스를 옹호하던 리스쩡을 비롯한 원로들도 반발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집권 준비는 그 뒤로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12월 28일 특위 해산이 공포되었다.

4중전회는 1928년 1월 1일 난징에서 소집하기로 하였으나 장제스가 난징에 없어서 미뤄지게 되었다. 1월 2일 국민정부는 장제스에게 공전을 보내 난징으로 올 것을 청했다.
귀 총사령은 즉시 수도로 돌아와 복직하여, 함께 혁명의 공을 완수하기 바란다.

이에 장제스는 1월 4일 오전 8시 상하이를 출발하여 탄옌카이, 양수잠, 하성준, 천리푸를 대동하고 저녁에 난징에 도착했다. 장제스의 난징 복귀 자체가 장제스의 사실상의 복직을 의미했다. 각 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와 장제스를 환영했고 탄옌카이는 장제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 민중의 기뻐하는 모양을 보아도, 지난해 8월 당신이 하야하고 난 뒤 전국의 인민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불안을 느끼고 있었는지 아실 것입니다."

1월 7일 장제스는 정식으로 복직하였고 1월 9일, 국민혁명군 직권을 행사할 것을 국민정부와 국민혁명군에게 알리는 공식적인 복직선언을 발표하여 5개월 만에 화려하게 복직하였다.
"돌이켜보건대, 작년에 갑자기 중도에서 은퇴하고, 중앙으로부터 임명된 직책을 허가 없이 떠난 일에 대해서, 나는 마음의 아픔을 느낀다. 오랜 세월 동안 함께 지내온 동지들과 시종 고생을 함꼐 하지 않은 것은 실로 부끄럽고, 또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다행히도 우리 혁명의 장병은 내외의 모든 곤란 속에서, 주의에 입각하여 선두에 서서 적을 몰아내고 전과를 올려왔다. 이 공로를 깊이 가슴에 새기고 진심으로 치하하는 바이다. 바야흐로 당내는 겨우 단결의 조짐이 보이고, 중앙회의의 거행도 임박하게 되었다. 나는 중앙의 의사에 따라 군령을 하나로 하고 힘을 집중하여, 최단기간에 봉천, 산동의 군벌을 섬멸하여, 총리의 유교를 실현하고, 도탄에 빠진 인민을 하루라도 빨리 구출하려 한다. 우리 장병들이 주의를 지키고 성이 되어 함께 혁명의 임무를 다하기 바란다."

이 시점에서도 광서파의 불만도 대단하여 리쭝런은 1월 초에 마지못해 장제스 복직을 환영했으나 바이충시는 그나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완강한 바이충시와는 달리 리쭝런은 장제스와의 타협을 결정하여 광서파는 수그러들었다. 서산파는 사실상 아무런 방해도 되지 못했고 무력하게 일본으로 외유하여 장제스에 대한 비난을 퍼부었으나 그것이 전부였다.

1월 20일 국민정부는 <북벌 전군 전투 서열령>을 반포하여 모든 북벌군이 장제스의 총지휘를 받도록 하였는데 펑위샹, 옌시산, 양수장 등이 즉각 장제스에게 지시에 따르겠다는 통전을 보내왔다.

3.2. 2차 북벌

3.2.1. 안국군의 반격 준비

국민당이 영한합작으로 진통을 겪고 있는 사이, 화북에서는 군벌들간의 충돌이 빚어지고 있었다. 옌시산은 안국군이 펑위샹 토벌을 위해 남하한 틈을 타서 제4사단장 푸쭤이를 파견하여 1927년 10월, 탁주를 공격해 점령했다. 탁주는 베이징에서 불과 100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장쭤린은 즉각 제3방면군 8군 군장 만복린에게 4개 보병 여단, 전차 1개 대대, 공병 1개 중대를 주어 탁주 탈환을 명령했고 추작화에게 중포 1개 대대와 야포 1개 대대를 주어 만복린을 지원하게 하였다. 만복린은 숫적, 화력면에서 우세한 것을 믿고 탁주성을 맹렬히 공격하였으나 푸쭤이는 3개월이나 탁주를 사수하며 물러서지 않았다. 허나 3개월의 공선전 끝에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자 1928년 1월 6일, 성을 빠져나와 만복린에게 투항했다. 만복린은 그를 바오딩의 제3방면군 군단장 장쉐량에게 데려갔는데 장쉐량은 그를 군단 참모장 포문월의 가족 숙소에 기거하게 하며 생활비까지 주고 그의 운신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푸쭤이는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톈진으로 달아나 옌시산 휘하로 복귀, 5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옌시산의 4사단은 1월 10일 백유청을 사단장으로 하는 안국군 36사단으로 개편되었다.

탁주를 탈환한 장쭤린은 국민당에 대한 반격을 준비했다. 1월 25일, 장쭤린은 장쉐량, 장쭝창, 쑨촨팡, 양위팅, 저옥박을 소집하여[2] 베이징에서 안국군 최고 군사회의를 거행하였다. 장쉐량은 장쭤린의 동의를 얻어 양위팅이 제4방면군 군단장을 겸직하게 했고 바오딩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이 회의에서 안국군은 다음과 같은 작전계획을 도출했다.

군사회의는 1월 25일 당일로 끝났고 안국군 장령들은 1월 26일 주둔지로 돌아갔다. 2월 16일 장제스와 펑위샹이 카이펑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다는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베이징에서 다시 회의를 소집했지만 1월 회의와 크게 다른 내용이 나오진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 양위팅과 장쉐량 모두 주둔지로 돌아왔고 3월 26일 주둔지에 병력을 배치했다. 4월 1일 장쉐량과 양위팅이 참모처의 병력을 인솔하여 전용차를 타고 바오딩을 떠나 한단으로 이동하여 전선 지휘부를 설치했다. 참모처장에는 사가가, 후방을 책임질 바오딩의 참모장에는 포문월이 임명되었다.

3.2.2. 국민혁명군의 북벌 준비

1928년 2월 2일, 난징 정가교의 중앙당부 대회의실에서 국민당 제2기 4중전회가 개최되었다. 중앙집행위원 장런제, 리례쥔, 차이위안페이, 진조영, 허잉친, 쑹쯔원, 리쭝런 등 29명이 참석했고 장제스 탄옌카이, 위유런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되었다. 장제스가 주석단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공산당은 전부터 우리들의 혁명과 본당의 주의에 방해를 가해왔으며 그들의 음모는 백일 하에 드러났다. 우리들은 그들의 콧대를 꺾고 추방했다. 따라서 이 대회에는 순수, 충실한 동지밖에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회야말로 본당 중흥의 호기일뿐만 아니라, 중국 중흥의 다시 없는 기회이다."

2월 7일까지 진행된 4중전회에서 국민당과 국민혁명군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있었다. 연소용공 정책이 모두 취소되었으며 73명의 군사위원회 위원이 선출되었고 장제스는 군사위원회 주석 겸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국민정부 주석에는 탄옌카이가 선출되었다. 이로써 명실상부하게 최고 지도자로서의 직위를 확인받은 장제스는 본격적인 북벌에 착수했다. 4중전회가 마무리되자마자 장제스는 진포철로를 따라 북상하여 쉬저우에서 전선을 시찰하였다.

2월 13일, 국민혁명군 재편성이 선포되었다. 허잉친의 제1로군은 제1집단군으로 개편되고 장제스가 직접 1집단군 총사령관에 낮았다. 허잉친은 북벌 전군 총사령부 참모총장에 취임했다. 2월 16일, 카이펑에서 펑위샹, 옌시산의 대표 주진성과 회담한 장제스는 창덕, 대명 및 산서 방향을 지키고 병력을 산동으로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3개월 이내에 모든 부대가 베이징에서 집결하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산동으로 유치의 1집단군 1군단, 진조원의 2군단, 하요조의 3군단, 방진무의 4군단, 손량성의 2집단군 3군, 마훙쿠이의 4군, 스여우싼의 5군, 여수문의 21군, 석액지의 기병 2군을 배치했다. 하북에는 쑨롄중의 2집단군 2방면군, 한푸쥐의 3방면군, 유기의 8방면군, 정대장의 기병 1군을 배치하고 산서에는 3집단군 전체를 배치하기로 하였다. 장제스는 펑위샹의 국민군을 제2집단군으로 편성할 것을 동의하였고 옌시산의 제3집단군 편성도 인정했다. 그리고 약간 늦게 리쭝런의 제4집단군이 추가되었으며 양수장이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4개 함대를 지휘했다. 1집단군은 18개군, 29만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2집단군은 25개군, 31만명, 3집단군은 11개군, 15만명, 4집단군은 16개군과 9개 독립사, 24만 명을 거느렸다.

3월 16일,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북벌 총방략을 발표했다. 이 북벌 총방략은 방침, 전기 작전 임무 및 부서, 후기 임무 및 부서 3개 부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지계, 산동, 열하, 차하얼, 수원의 반동 군대를 섬멸하겠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장제스는 당일의 기자회견에서 국민혁명군은 50만에 달하지만 봉천군벌은 이제 20만에 불과함으로 무기와 병력상 모두 우세한 혁명군의 승리를 장담했다. 물론 봉천군벌의 수가 20만에 불과하다는 것은 장제스의 지나친 축소로, 장쭤린은 7개 군단, 80~100만에 달하는 병력을 아직 보유하고 있었다.

3월 31일, 장제스가 장강을 도하하여 북벌군을 쉬저우에 집결하고 <후방 동지들에게 보내는 북벌 출발 보고서>를 발표하여 후방의 장병들이 직무를 다하여 전방의 걱정이 없게 할 것을 주문했다.

3.2.3. 장제스의 2차 북벌 선포

먼저 행동에 나선 것은 안국군이었다. 1928년 4월 2일, 장쉐량과 양위팅은 펑위샹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우학충, 집익교, 부쌍영 등의 각군 군장들과 기병 1군과 2군이 즉각 출격했고 집익교가 풍락진의 펑위샹 군대를 타격했다. 안국군의 거센 공격에 펑위샹 군대는 4월 5일 장하를 건너 남쪽으로 후퇴했다. 집익교는 안양 북단을 돌파하고 우학충이 회룡진을 점령하여 안양 동쪽으로 접근했다. 안양은 곧 함락되어 주둔한 쑨롄중 부대는 궤멸하였고 1500명이 포로가 되었다. 장쭤샹의 5방면군도 평형관에서 남진하여 대동을 함락시키고 오태로 진출했다. 안양을 함락시킨 장쉐량과 양위팅은 베이징에 잠시 들렀다 바오딩으로 돌아와 옌시산에 대한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안국군의 신속한 공격에 정형이 함락되고 옌시산 군대는 낭자관으로 후퇴했다. 한편 장쭤린으로부터 제녕을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던 1방면군의 쑨촨팡은 장쭤린의 지시를 무시하고 쉬저우를 공세에 나섰다. 하지만 손량성, 방진무가 쑨촨팡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쑨촨팡 부대를 격퇴했고 쑨촨팡은 제녕으로 후퇴했다.

1928년 4월 7일, 이번에는 장제스가 마침내 총공격 명령을 하달하고 모든 집단군에게 동원령을 선포했다.
"당과 국가의 존망, 이념의 성패, 인민의 화복, 동지들의 영욕은 모두 이번 전쟁에 달려있다.

또한 장제스는 4월 10일에 <우방 인민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하여 외국으로 하여금 봉천군벌에게 무기를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하며 국민혁명군이 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자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듯이 보호할 것을 약속했다. 장제스가 직접 14군을 지휘하여 북진을 시작했다. 유치가 신속히 한장을 점령했고 한장을 사수하던 허곤은 패주했다. 장쭝창은 태안과 계수를 사수하라고 지시했으나 주색잡기에 여념이 없던 장쭝창 군대는 빠르게 무너졌다. 4월 10일, 1집단군이 산동성 태아장을 함락시키고 4월 14일, 임성, 임기를 점령하여 5월 1일 오전, 제남을 함락시켰다.

3.2.4. 제남 사건

허나 북벌군의 접근에 경계심을 느낀 칭다오 총영사 니시다, 제남 총영사 니시다와 제남 주재 육군무관 사카이 소좌가 4월 16일 일본군의 파병을 요청하자 다나카 기이치 내각은 4월 19일, 봉천과 내지에서 5천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산동에 파병하는 2차 산동출병을 거행했다. 이들의 지휘관은 파병 병력의 주력을 차지하는 제6사단의 사단장 후쿠다 히코스케였다. 이 소식을 들은 장제스는 4월 20일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좌종당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인의 야망을 막으려면 우선 내부를 안정시키고, 움직일 수 없게 하여 세력을 약화시켜 나갈 수밖에 없다. 옛날 월의 구천은 몸을 굽히고 오를 대했고, 한의 문제도 말을 낮추어 월을 대했다. 몸을 낮추는 것은 강을 위해서이며, 그렇게 함으로 후에 몸을 펴 비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모의 사라고 하는 것이다. 황로의 숲은 병술에 통한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성인이 움직이려 하자 반드시 우색이 있다. 스스로 강함을 꾀하는 자는 경망스럽게 그 봉을 시험하는 일이 없다" 탁견이라고 할만하다., 이것으로써 성공을 얻을 수가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의 침략 야욕은 예년의 러시아에 비길 바가 아니다.
1928년 4월 20일, 장제스의 일기

장제스는 4월 21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일본의 출병은 북벌을 방해하려는 것인데 북벌을 먼저 달성하는 것이 급선무이기 때문에 혼란을 피해야 하고 후방을 안정시켜야 한다"라고 결의했고 다른 국민당 거물들도 일본과의 충돌에서 승산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결의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외교부장 황부의 명의로 4월 21일 일본에 항의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일본군이 작년 5월에 돌연 산동성에 출병했을 때, 우리나라 정부는 국제공법 위반의 침략행위라고 항의했는데, 귀 정부는 또다시 같은 침략행위를 취하려 하고 있다. 일번의 재출병은 노골적인 주권침해이며, 그것으로 인해 민중을 자극하여 예측할 수 없는 사태를 초래하는 일이 있더라도, 중국은 일체 공법상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

또한 장췬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 정부와 교섭하게 했지만 일본 정부는 장췬을 거의 상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일본과 충돌 방지 방침을 굳혔기 때문에 5월 2일 이전까지는 일본군과 중국인 혹은 국민당군 사이의 소규모 충돌 정도는 있어도 일본군과의 무력충돌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본의 파병에 항의하여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유학하던 조서린 등 25명이 항의의 의미로 퇴학하는 등 반일 감정이 전국적으로 솟구쳤고 5월 3일, 일본군과 국민혁명군의 본격적인 무력충돌이 감행하면서 장제스는 제남이 발이 묶이지만 끝내 제남을 빠져나와 북벌에 매진하였다. 자세한 것은 제남 사건 문서 참조.

3.2.5. 장쭤린의 퇴각

안국군의 수는 40만으로 격감했고 장쭤린은 전황이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란현-락정-창려-노령-무녕을 잇는 란동 5현에 2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고 란하에 교량을 가설했다. 그리고 3,4,5,7 방면군에게 모두 신속히 퇴각하여 병력과 관외의 영토를 보전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장쉐량과 양위팅은 펑위샹을 상대하던 안양의 부대를 바오딩으로 옮겨 기차에 태워 란동으로 퇴각시켰고 옌시산을 상대하던 석가장, 낭자관의 부대는 안양에서 후퇴해오는 병력을 엄호하며 바오딩 이남으로 퇴각할 것을 지시했다. 장쉐량과 양위팅의 능숙한 지휘 덕분에 3,4방면군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란동으로 철수했다.

5월 9일, 장쭤린이 양위팅과 장쉐량을 베이징으로 불러 정전을 논의했다. 장쉐량과 양위팅 모두 휴전에 찬성하자 장쭤린은 정태와 창덕의 공격 명령을 중지하고 장제스에게 휴전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
"국내의 정치는 사리의 옳고 그름의 공론에 따라 국민의 공정한 판단을 듣도록 하였다."

하지만 장제스는 5월 12일, 이 휴전 제의가 성의 없다고 거절하고 북벌을 계속했다. 5월 13일 장제스는 평원을 함락시켰고 펑위샹은 덕주로 진출했다. 엔시산도 낭자관을 돌파하고 석가장과 정정을 함락시켰다. 리쭝런도 북상길에 올라 이제 베이징과 톈진이 눈앞에 있었다.

5월 19일 장제스는 정저우로 이동하여 펑위샹, 바이충시를 만났고 5월 30일, 베이징에서 140킬로미터 떨어진 바오딩을 함락시킨 후 석가장으로 이동하여 옌시산과 회담했다. 장쭤린이 더 이상 베이징을 사수할 수 없음은 분명했다. 장쭤린은 대원수부에서 군사회의를 열어 총퇴각을 결정, 봉천으로 떠나기로 했다. 장쭤린은 6월 1일 오후, 베이징의 외교단을 고별 다과회에 초대하여 철수의 뜻을 알리고 한 중국인으로서 대국을 헤아리고 나서 결정한 일이라고 밝혔다.
"대원수부가 베이징에서 봉천으로 이전할 뿐이다. 비록 영락했어도 나는 장이다. 나라를 팔 수는 없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 같은 날 오후 중앙공원에서 경내 기로회의를 열고 베이징 철수 이후 베이징의 질서 유지 방법에 대해 논의한 다음에 허란주에게 명령하여 안국군 대원수 인장, 깃발, 국무원 인장 및 외교부의 중요 문서들을 봉천으로 옮기게 하였다.

6월 2일 장쭤린은 베이징 철수 전문을 통지하고 정무를 국무원에게 대행케 했으며 군사는 각 군단장이 지휘하게 하고 정치 문제를 국민 재결에 따르게 했다. 철수 이후 베이징의 질서는 왕사진이, 치안은 포육린이 맡게 했다. 이날 산동독군 장쭝창이 장쭤린을 찾아가 "왜 베이징을 떠나는 것입니까? 나 혼자라도 장제스와 싸우겠습니다."라고 항의하자 장쭤린은 그럼 그렇게 하라고 대답하였다.[4] 6월 3일 오전 1시, 장쭤린은 진윈펑, 판푸 등 여러 심복을 거느리고 베이징을 떠나는 기차에 올랐다. 장쭤린이 베이징을 떠난 다음날인 6월 4일 아침 5시, 그를 태운 기차가 펑톈 교외의 황구툰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고 이는 만주를 병탄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고모토 다이사쿠를 비롯한 관동군 군관들의 소행이었다. 황고둔 사건 문서 참조.

관동군은 이를 빌미로 만주를 병탄하고자하는 음모를 꾸몄지만 군부에 대한 통제권을 아직까지 일본 정부가 어느 정도 쥐고 있었기 때문에 후속적인 군사작전이 없었고 이에 따라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봉천군벌의 수장이 된다.

3.2.6. 베이징 함락

6월 4일, 봉천성장 짱스이는 황급히 베이징의 장쉐량을 불러들였다. 장쉐량은 포육린에게 베이징에 남아 북벌군이 베이징에 진주할 때까지 치안을 유지하다가 북벌군이 다가오면 철수하라고 지시한 후 취사병으로 변장하여 베이징을 출발하였다. 장쉐량은 일본이 감시하는 역은 일부로 걸어서 우회하였고 마지막에는 자동차로 갈아타 봉천에 도착했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된 장쉐량은 아버지의 사인을 흉내내 장쭤린이 자신에게 대리를 명했다는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봉천군무독판대리에 취임했다.

장쭤린이 죽고 베이징이 사실상 무주공산이 되자 그 외의 군벌들은 버틸 여력이 남지 않게 되었다. 장쭝창과 저옥박은 옌시산에게 투항 의사를 타진했으나 옌시산은 거절했다. 궁지에 몰린 장쭝창은 톈진의 각국 영사들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우리 대군은 먹을 것도 떨어졌다. 각국 거류민의 안전을 보장하기 어렵다."

이에 장제스는 옌시산을 경진 위수사령관에 임명함으로 베이징에 먼저 입성하게 했다. 이 자리에는 원래 베이징을 통치하다가 우페이푸에게 빼앗겼던 펑위샹도 고려되었으나 펑위샹은 신용이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었다. 6월 6일 아침에 3집단군의 선두부대가 베이징에 도착했고 도시 밖의 이화원에서 교전이 벌어졌지만 이화원을 돌파한 후에는 저항이 없었다. 6일 오전 9시, 포육린 부대는 베이징을 버리고 철수했고 도시 곳곳에 청천백일기가 게양되었다. 6월 8일, 국민혁명군이 정식으로 베이징에 입성했고 창의문 일대의 거리에 환영인파가 몰려와 청천백일기를 흔들며 국민혁명군을 환영했다. 또한 시내의 치안유지를 맡던 베이징 임시 치안회와 총상회 대표들이 4대의 승용차를 나눠타고 나타나 성밖에서 국민혁명군을 영접했고 각 학교의 대표와 국민당 베이징 당부의 당원들도 쏟아져나왔다. 오전 10시에 우로군 추격대 지휘관 손초가 자동차를 타고 선무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왔고 16사단 32대대, 28대대, 21대대가 차례로 입성했다. 오후에 7군장 우로군 총지휘관 상진과 장음오, 그 수행원들이 입성했고 상진은 차모부에서 경비사령부를 설치했으며 북경 경비사령관에 장음오를 임명했다. 상진은 치안유지를 위해 포고 1호를 발표했다.

11일 오후, 경진 위수사령관 겸 3집단군 총사령관 옌시산이 4집단군 전선 총지휘관 바이충시를 대동하고 베이징에 입성했다. 톈진에 머물며 저항하던 장쭝창의 부하 서원천이 12일에 투항하면서 톈진도 국민당의 손에 들어왔다. 이날 국민정부는 <대내선언>을 발표했다.

기존 북양정부의 고위층 관료들은 대거 국민당 당원들로 교체되었지만 구웨이쥔을 비롯하여 경제와 외교분야의 일부 실무인재들이 국민정부에 합류했고 이들은 국민정부의 수약외교, 즉 과거의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는 정책에 동참했다. 6월 11일에는 신강성의 군벌 양쩡신이 국민정부에 복종하겠다고 통전하면서 동북삼성을 제외한 전 중국이 국민정부에게 복속되었다.

이때 국민혁명군에 투항한 군벌 쑨뎬잉이 청나라의 능묘를 파헤치는 대량 도굴행위를 자행했고 여기서 얻은 막대한 재물을 국민정부의 요인들에게 뇌물로 바쳐 처벌을 면했다. 톈진에서 그 소식을 들은 푸이는 격노했고 장제스가 북경정변 이전처럼 자금성 안에서 청나라의 황제로서 사는 것을 허용하고 이전 북양정부가 약속했던 특혜를 약속하겠다고 제안했음에도 이를 거절하고 일본 제국에 몸을 의탁하여 훗날 만주국의 괴뢰황제에 즉위하게 된다.

한편 장쭝창은 저옥박과 함께 직로연군을 이끌고 만주로 달아났다가 관내진출을 거부하는 장쉐량에게 불만을 품고 자유행동을 선언, 봉천군벌과 국민정부를 동시에 적으로 돌렸고 결국 봉천군벌의 양위팅과 국민정부의 바이충시의 협공으로 토벌되어 일본으로 도주했다.

3.2.7. 국민정부의 통일 선언과 자주권 회복

6월 15일에는 북벌과 전국통일이 완성되었음과 더불다는 선언과 열강을 상대로 한 <대외선언>이 발표되었다.
중국통일은 전국 인민의 분투와 희생에 의해서 완성을 이룩했다. (...) 국민정부는 중국 민중에게 약속한 대로 국내의 정돈과 건설에 착수할 준비를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 갖가지 속박을 가해 온 불평등조약은 아직도 거의 해제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국민정부는 완전 평등하고 상호의 주권 존중을 취지로 하는 새 조약을 다시 맺도록 여기에 거듭 성명한다. 불행히도 우방 중에는 무력의 힘을 과신하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는 무역이나 거주를 인정한 장소를 마치 자국의 군사 주둔지인 양 생각하고 있는 나라가 있다. 이러한 태도가 고쳐지지 않는 한, 중국 정부는 장차 내지를 이들 국가에 개방하지 않을 것이다. 국민정부는 각국이 중국에 파견하고 있는 군함과 군대를 즉시 철수시킬 것을 특히 희망한다. 국민정부는 산동의 일본군이 즉시 철수하고 다시는 분쟁을 일으키지 말기를 엄중히 요구한다.
대외선언

국민혁명군이 베이징에 입성한 직후인 1928년 6월 9일, 장제스는 국민당 2전 4중대회를 통해 개정된 <국민혁명군총사령조직대강>에서 군사작전의 목적이 완성되면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직은 해체되어야 한다고 규정된 것을 명분으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과 군사위원회 주석에서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이어 6월 11일, 정치위원회 주석직 사퇴서를 정치위원회에 제출하였다. 이는 국민혁명군의 통합과 개편을 위해 장제스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사퇴선언 직후, 국민정부와 각지의 국민당부 및 각 집단군 측에서 사퇴를 반대하는 여러 통전을 보내 국민혁명군을 재병(裁兵)하기 위해서는 장제스가 총사령관직에 있어야 한다고 만류하여 장제스의 입지를 강화시켜 주었다. 이에 장제스는 6월 12일경부터 사퇴 번복 의사를 보이더니 6월 17일에 정식으로 사퇴 의사를 철회했다. 물론 장제스가 6월 18일 하남성에 있던 펑위샹에게 쿵샹시를 파견하여 베이징에 오도록 촉구하였고 같은날 하성준을 옌시산에게 파견하여 역시 북상하도록 촉구한 것 등을 보았을때 장제스가 군정대권에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국민당 중앙정치회의는 난징이 수도임을 확실히 보여주고 북방을 평정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6월 20일, 직예성을 하북성으로, 베이징을 베이핑으로 개칭할 것을 결의하였다. 장제스는 베이징으로 북상하여 7월 6일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과 함께 탕산회의를 개최하였다. 7월 7일, 신임 외교부장 왕정팅이 불평등조약 철폐를 위해 국민정부가 볼 때 효력이 소멸한 조약 대신에 중국이 정한 원칙을 적용하여 새로운 조약을 체결할 것을 선포했다. 이 원칙은 기존에 중국과 조약을 체결한 24개국을 상대로 하고 있었다. 7월 21일 장제스는 외교 사절단을 초청해 연회를 베풀었고 장제스는 영국 공사 램프슨의 초대를 받아 저녁 만찬에 참여했다.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미국으로, 7월 25일 중국의 관세자주권을 승인했다. 이어 8월 17일 바이마르 공화국을 시작으로 노르웨이, 벨기에, 이탈리아 왕국, 덴마크, 포르투갈이 조약개정을 수락했고 12월 7일 중화민국은 중화민국 해관 신세칙을 반포, 1929년 2월 1일부터 시행됨을 각국 공사에게 통보했다. 12월 20일 영국이 중화민국과 중영 신관세조약을 체결하고 국왕 조지 5세의 국서를 전달함과 동시에 국민정부를 승인했다. 12월 22일 프랑스도 중화민국과의 신관세 협약에 조인했다.

국민정부는 7월 19일 일본 제국에 대해 1896년 체결한 청일통상항해조약과 1903년의 추가통상조약이 만기를 넘겼으니 파기하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일본은 격렬히 반발하면서 앞의 두 조약을 인정하지 않는 한 관세자주권 교섭에는 응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열강 대부분은 중국의 이러한 자주권 회복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 1929년까지 대부분의 열강이 중국과 재협상에 들어갔다. 11월에는 일본 측이 니시하라 차관을 승인하고 관세수입을 담보로 이를 상환한다면 관세자주권을 인정하겠다고 하였고 왕정팅은 모든 관세수입 대신에 관세수입 중 500만원을 담보로 한다는 타협책을 내놓았다. 이에 중국 민중은 굴욕외교라 분노하여 12월 13일 왕정팅의 관사를 습격해서 파괴하기까지 했다. 일본 제국은 1929년 6월 3일, 마침내 국민정부를 승인하고 1930년 5월, 관세자주권 문제에 합의하여 중일신관세협정을 체결하였다.

3.2.8. 동북역치

한편 봉천에서는 6월 20일 장쉐량이 봉천독판으로 추대되었고 6월 21일에야 장쭤린의 죽음이 공표되었다.[6] 장쉐량은 7월 4일 동삼성 보안 총사령관에 취임함으로 아버지의 남아있는 기반을 장악했다. 장쉐량은 통일을 막을 생각은 없다고 타전하여 교섭을 시작하였고 일본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1928년 12월 29일 국민정부에 합류했다. 이를 동북역치라 하는데 자세한 것은 동북역치 문서 참조.

4. 결과

북벌 완료 직후인 1929년, 소련의 침공을 받던 시기에 인터뷰하는 장제스 쑹메이링. 장제스는 쑨원과 국민정부의 정치 이념인 삼민주의의 내용에 대해서, 그리고 쑹메이링은 삼민주의 하에서 증진될 신중국 여성의 권리에 대해 설명하였다. 두 명 모두 카메라를 앞에 두고 상당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장제스는 왕정팅의 통역을 거친 반면 미국에 살았던 쑹메이링은 능숙하게 영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금년 1월 4일에 난징에 입성했는데 벌써 연말이다. 다행히도 전국은 이미 통일을 하기에 이르렀고, 일본을 제외한 각국은 모두 우리나라의 관세 자주와 영사재판권을 승인하게 되었다. 우리가 노력을 계속해 나간다면 20년 이내에 우리의 당당한 중국은 반드시 독립, 자유, 평등을 달성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 세대에 실현될 것이다.
1928년 12월 31일, 장제스의 일기

1928년 8월 8일, 난징에서 제2기 중앙집행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 약칭 2기 5중전회가 개최되었다. 2기 5중전회는 훈정시기 약법 발표와 행정원, 입법원, 사법원, 고시원, 감찰원 설립을 의결함으로 5권 분립의 조직을 확립했다. 10월 3일, 중국 국민당 상무위원회는 훈정강령을 발표했다. 10월 8일에는 국민정부의 인선이 의결되었는데 국민정부위원으로 장제스, 탄옌카이, 후한민, 차이위안페이, 다이지타오, 왕충후이, 펑위샹, 쑨커, 천궈푸, 허잉친, 리쭝런, 양수장, 옌시산, 리지선, 린썬, 장쉐량이 있었다. 장제스는 국민정부 주석으로, 탄옌카이는 행정원장으로, 후한민은 입법원장으로, 왕충후이는 사법원장으로, 다이지타오는 고시원장으로, 차이위안페이는 감찰원장에 임명되었고 10월 10일 오전 8시, 난징의 중앙당 대강당에서 장제스가 주석에 취임했다.
"나는 총리의 유촉을 지키고, 당의에 복종하며 국가의 법령을 받들고, 본직을 위해 충성을 다하며, 노력을 바치고, 경비를 절약할 것을 선서한다. 나는 결코 불필요한 인원을 고용하지 않고, 법을 굽혀 사리를 꾀하거나, 뇌물을 수수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만일 선서에 반하는 일이 있으면, 당의 가장 엄중한 처벌을 받기를 원한다."

또한 <국경일에 즈음하여 동포에게 알리는 글>도 발표되었다.
오늘 중국의 존속을 추구하고 독립과 자유의 목적을 달성하길 바란다면, 오직 일심으로 전국통일의 혁명사상을 가질 것이며, 계급 투쟁을 배제하고, 국민의 애국정신을 결집하여 국내의 무장투쟁을 근절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야만 삼민주의의 실현을 촉진하고, 국민혁명의 대업을 완성시킬 수가 있다. 민국 17년 쌍십절에 즈음하여, 여기에 삼가 4가지 목표를 내세워 동포와 함께 힘쓰고자 한다.
1. 국민의 강인한 체력의 육성을 꾀하고, 위미문약한 퇴폐적 기풍을 쇄신한다.
2. 중국 고유의 덕성을 유지하고, 사리를 추구하는 악습을 제거한다.
3. 과학적 상식을 증진하고, 우매한 미신을 일소한다.
4. 세계 최신의 문화를 흡수하여 국가, 사회의 진보를 추구한다.
이상 4가지 점은 우리 국가의 존망에 관계되고, 또 민족의 소장에도 관계가 있다. 그리고 새 중국 건설을 위해서는 하나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관건들이다. 우리 동포가 일치하여 몸으로써 실행하고, 민족자강의 기초를 굳히고, 중화민국 5천년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선양하기를 바란다.

10월 26일에는 <훈정시기 시정 선언>이 발표되어 사회의 안정, 군대 감축, 재정 정리를 정부의 시급한 목표로 내걸었다. 장제스의 주석 취임에 즈음하여 미국 국무장관 프랭크 켈로그, 영국 공사 램프슨 등이 잇달아 축전을 전달하고 자국의 주둔병력을 철수시키겠다고 제안하는 등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일본은 냉담한 반응이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 장제스의 취임식을 무시했으며 오로지 난징 총영사 오카모토 이사쿠가 구두로 축하했다. 이에 장제스도 분노하여 "일본의 협애한 투기심은 이렇다. 나는 더욱 더 자강자분하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심정을 일기에 남겼으나 중화민국과 일본의 악연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12월 29일에 장쉐량의 봉천군벌까지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중국 대륙은 위안스카이 사망 이후 처음으로 통일을 맞이하였다. 하지만 북벌에 협조한 강대한 군벌들의 세력이 강성하였으며 국민당 내부에도 서산파, 개조파, 광서파 등을 비롯한 반장 세력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국민정부는 온전히 통합되었다고 부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1928년, 군사력 감축을 위한 편견회의와 장제스의 중앙집권화 정책에 반발한 군벌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북벌이 완성된지 1년이 되지 않아 반장전쟁이 발발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당의 1차 북벌

6.2.2. 2차 북벌 중 사건


[1] 나중에 서산파는 이를 장제스의 조작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2] 제4방면군 군단장 한린춘은 와병한 상태라서 장쉐량이 3방면군과 4방면군을 동시에 지휘하고 있었다. [3] 산동 이남. [4] 조롱이나 빈정은 아니고 타이르는 대답이었다. [5] 아플때 가는 그 병원이 아니라 군인의 규모를 말한다. [6] 그나마도 6월 4일 사망이 아니라, 발표가 있던 6월 21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