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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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 이승만 |
1949 이시영 |
1953 제임스 A. 밴 플리트 |
1953 장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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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 하일레 셀라시에 |
1957 응오딘지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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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 허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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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구미시 출신/활동 독립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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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fff> 성명 | 운동계열 | 훈격 |
<colcolor=#000> 허위 | 의병 | 대한민국장 | |
박희광 | 만주방면 | 독립장 | |
권쾌복 | 학생운동 | 독립장 | |
장진홍 | 의열투쟁 | 독립장 | |
김정묵 | 임시정부 | 애국장 | |
송병우 | 의병 | 애국장 | |
송세호 | 국내항일 | 애국장 | |
이원길 | 국내항일 | 애국장 | |
허겸 | 의병 | 애국장 | |
허형 | 의병 | 애국장 | |
허훈 | 의병 | 애국장 | |
이내성 | 국내항일 | 애국장 | |
권오환 | 3.1 운동 | 애족장 | |
김영득 | 국내항일 | 애족장 | |
김종철 | 광복군 | 애족장 | |
남상순 | 국내항일 | 애족장 | |
육홍균 | 일본방면 | 애족장 | |
전재덕 | 광복군 | 애족장 | |
장재성 | 문화운동 | 애족장 | |
최재화 | 3.1 운동 | 애족장 | |
황진박 | 의열투쟁 | 애족장 | |
박명언 | 3.1 운동 | 애족장 | |
박몽득 | 국내항일 | 애족장 | |
박봉술 | 3.1 운동 | 애족장 | |
방하영 | 국내항일 | 애족장 | |
이상백 | 3.1 운동 | 애족장 | |
임봉선 | 3.1 운동 | 애족장 | |
장용희 | 국내항일 | 애족장 | |
김관묵 | 3.1 운동 | 애족장 | |
유경흥 | 국내항일 | 애족장 | |
장호관 | 학생운동 | 애족장 | |
장병묵 | 국내항일 | 애족장 | |
이종식 | 국내항일 | 애족장 | |
권영해 | 3.1 운동 | 애족장 | |
김의경 | 3.1 운동 | 건국포장 | |
박희목 | 3.1 운동 | 건국포장 | |
이능학 | 3.1 운동 | 건국포장 | |
장병옥 | 국내항일 | 건국포장 | |
전용신 | 3.1 운동 | 건국포장 | |
허필 | 만주방면 | 건국포장 | |
김구하 | 국내항일 | 건국포장 | |
임장수 | 국내항일 | 건국포장 | |
김구하 | 국내항일 | 건국포장 | |
노명일 | 국내항일 | 대통령표창 | |
권경보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김도길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김성윤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박근술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박명출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박삼봉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박순석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서기옥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서천수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이영래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이윤약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임동석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임삼선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장준현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임점석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임용섭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장주서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장영직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장상건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김종권 | 일본방면 | 대통령표창 | |
이소열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
이범성 | 3.1. 운동 | 대통령표창 |
공식 초상화[1] | |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출생 | 1854년 4월 1일 |
경상도
선산도호부 하고면 임은동 (現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2] # |
|
사망 | 1908년 10월 21일 (향년 54세) |
한성부 서서 반송방 지하계
경성감옥 (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
|
묘소 |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 |
본관 | 김해 허씨[3] |
자 / 호 | 계형(季馨) / 왕산(旺山) |
부모 | 아버지 허조, 어머니 진성 이씨 |
형제자매 |
형 -
허훈, 허신,
허겸 동생 - 허필 |
배우자 |
순천 박씨 (사별) 평산 신씨 (재혼) |
자녀 |
아들
허형, 허영, 허준, 허국 딸 4명 |
친인척 | 조부 허윤 |
종교 | 유교 |
서훈 | 건국공로훈장 중장[4] 추서 |
[clearfix]
1. 개요
2. 생애
1854년 4월 1일 경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진사 허조(許祚, 1817 ~ ?)[5]와 어머니 진성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허운(許𠎉)으로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나 허위가 1904년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자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추증되었고, 증조부 허돈(許暾)은 선산군 임은동 입향조로서 1810년( 순조 10) 식년 생원시에 3등 41위로 입격했다. 마찬가지로 허위가 참찬에 제수된 뒤 장례원 좌장례(左掌禮)에 추증되었다.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의병 해산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1898년 12월 21일 원구단 사제서(祠祭署)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12월 26일 사직했다. 같은 날 다시 영희전 참봉에 임명되었다. 1899년 1월 13일에는 소경원 봉사(昭慶園奉事)에 임명되었으나, 한 달만인 2월 24일 사직했다. 같은 날 성균관 박사에 임명되었으나 이 마저도 한 달만인 3월 18일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904년 2월 16일 주차 일본공사 수행원(駐箚日本公使隨員)에 임명되었고, 그해 3월 26일 영릉 뒷산의 능선을 보수하는 데에 참여한 공로로 6품에서 품계가 올라갔다. 그 뒤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에 임명되었으나 4월 2일 사직했다. 그해 4월 14일에는 평리원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6월 22일 서리평리원재판장사무(署理平理院裁判長事務)에 임명되었다. 6월 29일에는 의정부 참찬에 제수되었다. 7월 9일 평리원 재판장서리사무에서 해임되었다. 9월 19일 관제이정소 의정관(官制釐正所議定官)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3일 고종에 사직 상소를 올리고 사직했고, 12월 13일에는 관제이정소 의정관 직에서도 해임되었다.
1905년 1월 26일 비서원 승(秘書院丞)에 임명되었고, 이튿날인 1월 27일, 순명효황후의 인산 때 별도로 배종한 공로로 품계가 올라갔다. 그러나 끝내 사직하고, 경상북도 지례군 서면 두대리(현 김천시 부항면 어전리 두대배골마을)[6]의 김해 허씨 집성촌으로 낙향해 은거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김진묵(金溱默)· 왕회종(王會鍾) 등이 먼저 경기도 삭녕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그를 불러 맞이했다. 이에 그는 그해 음력 8월 두 의병장의 진영으로 가서 이에 호응했고, 그 뒤 연기우(延基羽)· 이인영과 김규식(金奎植)·황순일(黃淳一)·황재호(黃在浩)·박종한(朴宗漢)·김준수(金俊洙)·이종협(李鍾協)·이홍응(李弘應) 등을 비롯한 각 수백여 명의 의병들을 규합하고 스스로 군사(軍師)의 지위에 올라 작전의 계책을 세워 각 부장들에게 전달, 지휘했다.
그는 이때부터 1908년 5월까지 70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경기도 연천군·삭녕군· 양주군· 장단군, 강원도 철원군, 황해도 토산군 등지에서 10차례 이상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하는 등 활약했다. 이 사이 연천군에서 활약하던 9월 9일, 당시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이 허위가 의병을 일으킨 사실을 순종에게 아뢰어 기존에 갖고 있던 정2품의 품계와 전직 참찬의 벼슬이 삭제되고 법부의 수배령이 공식적으로 내려지기도 했다.
그 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7]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이듬해인 1908년 5월 14일 경기도 영평군에서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한성부로 압송되었고, 그해 9월 18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어 상고했으나 10월 3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었다. 결국 10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하였다. 일본군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가 직접 그를 심문하고 고문했지만 오히려 그는 일제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3. 여담
"우리 이천만 동포에게 허위와 같은 진충갈력 용맹의 기상이 있었더라면
오
늘과
같은
국욕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본시
고관이란 제 몸만 알고 나라는 모르는 법이지만, 허위는 그렇지 않았다. 따라서 허위는 관계 제일의 충신이라 할 것이다."
안중근
안중근
- 허위는 본래 철저한 유학자 가문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유생이었다. 그는 근왕적 충의 사상이 투철하여 을미의병 때 위정척사에 의한 춘추대의론을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관직에 나아간 이후에는 장지연 등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였고 유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서양의 앞선 문물과 기술을 두루 익혀야 한다는 '개신유학'을 주창했다. 의정부 참찬으로 재직할 때 10개조 개혁안을 정부에 건의했는데 그 내용은 철도, 연탄, 은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보인다. 1905년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 투쟁을 전개한 그는 13도 창의군을 주도하여 서울 진공 작전 때 군사장으로서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교전했으며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돌려 일본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의병 투쟁을 단순한 무력 투쟁이 아닌 국제 사회를 인식한 항일 투쟁 노선으로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의병 투쟁이 비단 한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며 한국이 독립되어야 동양 평화가 유지된다고 하는 동양평화론을 강조했다. 허위는 을미의병과 정미의병 때 주도적 역할을 전개하는 한편 관리로서 한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구국 정신은 가문에도 이어져 그의 형제 및 친척 다수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 심문을 받던 중 "의병을 일으킨 주동자와 대장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주동자는 이등이며 대장은 나다."라고 대답하고 이유를 묻자 "이등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지 않았다면 의병 또한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이등이 곧 주동자이다."라고 대답했다는 야사가 있다.
- 서대문형무소 설립 이후 처음로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로 알려져 있다.
- 그의 종질이 일제강점기 시기 동북항일연군에서 항일 무장투쟁 활동을 했던 허형식이다. # 또한 당조카인 허길의 아들이 바로 시인 이육사이다. 직계 자손들은 구 소련 및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 신분으로 어렵게 살다가 2006년 귀화하였다 #. 직계 제자로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인 박상진이 있으며 박상진은 허위가 순국한 후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 순국 이후 경상북도 김천시에 매장되었으나 2009년 후손들이 고향인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 묘를 이장하고 그를 기리는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홈페이지 주소 기념관 자리는 본래 허위의 생가가 있던 곳으로 유허비와 허위의 묘지 및 사당도 있는데 대구광역시 달성공원 안에 왕산 허위 선생 순국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 2018년 10월 21일 순국 110년만에 고향에서 추모 행사를 진행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
2010년 SBS 드라마 제중원에서는 배우 손현주가 연기했다. 외유내강형의 인자한 인물로 그려지는데 총상을 마취 없이 치료하는데도 버텨냈으며 그 대가로 주인공 황정의 호를 지어준다. 주인공이 독립운동가로 각성하도록 돕는 인물 중 1명.2024년 9월 14일 대구 KBS에서 그의 의병 활동을 다룬 다큐드라마인 '왕산 허위'가 방영되었다. 드라마 파트의 주인공인 허위 역은 고려거란전쟁에서 양규 장군 역을 맡은 지승현 배우가 연기하였으며, 마찬가지로 해당 배우가 내레이션도 담당하였다.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결합하여 1896년부터 1908년까지 활동하던 의병으로서의 행적을 보여주었다.
[1]
실제 모습은 아니고 러시아에서 미술을 전공한 증손녀 허미라(3남 허준의 손녀)씨가 설명을 듣고 몽타주처럼 그린 것이다.
[2]
김해 허씨 집성촌이다.
[3]
판서공파-회현파(會賢派)-임은(林隱) 문중 24세 艹 항렬.
[4]
지금의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5]
1864년(고종 1) 증광
진사시에 2등 4위로
입격했다. 사후 넷째 아들 허위가
의정부
참찬(정2품)에 제수되자 1904년 8월 7일 의정부 참찬에
추증되었다.
[6]
#
[7]
허위가 이끌던 13도 창의군이 최종적으로 머물었던 길을 오늘날 그의 호를 따 명명하게 됐는데, 바로
왕산로이다.
[8]
출처. 백범일지. 치하포 사건 후
[9]
그의 고향인 구미시에도 그의 호를 딴
왕산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