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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12-21 02:14:31

국민당의 1차 동정

第一次東征
First Eastern Expedition
파일:1차동정.jpg
국민당의 1차 동정로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쑨원의 북상과 천중밍의 위협3.2. 담수성 전투3.3. 면호 전투3.4. 천중밍의 도주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1925년 2월, 중국 국민당과 광동 군벌 천중밍 사이에 벌어진 전쟁. 천중밍이 크게 패하였으며 1차 국공합작 이후 소련의 지원을 받아 훈련받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교군'의 전투력이 발휘된 첫 전투였다.

2. 배경

군벌 천중밍은 연성자치론자로, 군벌들간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광동을 안정화하여 광동의 인민들을 구제하고 중국 통일같은 과업은 나중에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천중밍은 기존의 광둥 군벌 루룽팅을 정변을 통해 축출하고 광동의 지배자가 되었다. 1920년 천중밍은 명망이 높은 쑨원을 광저우로 초빙하여 2차 군정부를 조직하고 2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하지만 쑨원은 하루빨리 북벌을 거행하여 중국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천중밍과 큰 마찰을 빚었다.

결국 1922년, 쑨원이 자신을 반대하는 천중밍과의 동맹이 실패했다고 선언, 그를 면직하고 북벌에 나서려 하자 분노한 천중밍은 영풍함 사건을 일으켜 쑨원을 광저우에서 축출했다. 이에 쑨원도 1923년, 운남, 광서의 군벌들과 연합하여 천중밍을 축출하고 다시 광저우를 점령했다. 천중밍은 1923년 5월 광서군벌 심홍영의 반란을 틈타 산터우, 조주, 혜주 등 광동 동부를 점거하고 스스로를 구월군총사령관으로 칭하며 임호, 엽거, 홍조린, 사문병 등의 부하들과 3만의 병력을 거느려 권토중래를 엿보고 있었다. 광동에는 그외에도 천중밍에게 우호적인 계계군벌 심홍영, 루룽팅 등의 잔당과 월계군벌 등본은 등의 세력들이 할거하며 국민당을 위협하고 있었다.

3. 전개

3.1. 쑨원의 북상과 천중밍의 위협

원래 쑨원은 1924년 10월 상단 사건을 평정한 이후 천중밍을 토벌하려 했으나 북방의 상황이 급변하면서 후한민에게 천중밍 문제를 일임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끝나면서 대총통 차오쿤 펑위샹 북경정변으로 하야하고, 다시 북방을 지배하게 된 장쭤린 돤치루이가 쑨원을 초청하면서 쑨원은 중앙정치를 바꾸기 위해 북상선언을 발표, 베이징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군벌들은 명망이 높은 쑨원을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려 할 뿐, 그의 주장에 대해서는 사실 거의 관심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천중밍은 1925년 1월 7일 상단군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광저우에 대한 공격을 명령하고 임호를 총지휘관에, 엽거를 부총지휘관에 임명하여 3로군으로 구성된 침공군을 꾸렸다. 우선 홍조린과 엽거가 중로군을 맡아 주공을 담당하고 혜주에 집결하여 석룡에서 석탄으로 진격하며 유지육이 좌로군을 맡아 석룡 동남에서 집결, 광저우와 기타 지구의 연결을 차단하고 주공의 후방과 측면을 엄호하는 동안 임호가 우로를 맡아 하원 이북에서 박라 방향으로 광저우를 공격한다는 것이 천중밍의 계획이었다.

천중밍이 광저우를 다시 점령하기 위해 군사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사위원회는 크게 당황하였다. 이때 장제스가 나서서 선제공격을 강력히 주장했다.
"비록 북벌이 손중산의 일관된 주장이기는 하나 후방이 공고하고, 인접 성의 정세가 유리해야만 비로소 북벌이 주효하다. 현재는 이 두 조건이 아직 구비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동강으로 출병하여 천중밍을 토벌해야 비로소 광동의 정세를 변화시킬 수 있다."

이에 광저우의 대원수대본영은 1월 15일 천중밍 토벌을 결의, 쉬충즈의 월군, 양시민의 전군, 유진환의 계군, 탄옌카이의 상군, 황포군관학교 휘하 교도단으로 동정군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양시민을 연군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1월 하순에 천중밍의 병력이 호문, 석탄으로 진격하기 시작하자 1월 30일 동정군 총사령부는 양시민에게 전군을 지휘하여 좌로를 담당하고 3만의 병력으로 증성, 박라, 하원, 용천을 공격하며 쉬충즈에게 1만명 규모의 월군과 교군을 지휘하여 우로로 진군, 해안을 따라 담수, 평산, 해풍, 육풍, 조산으로 진군하게 하고 유진환에게 6천명의 병력으로 중로를 담당하여 혜주를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1925년 2월 1일, 광동군, 운남군, 광서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이 구성되었고 동정이 시작되었다. 월군 참모장 겸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가 지휘하는 2~3천명의 황포군관학교 출신 교도대도 참여하였으나 세력이 미비하였기 때문에 연합군의 정식멤버로 참여하지는 못하고 광동군의 우익군에 교군이라는 이름으로 배속되었다. 그러나 작전은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었다.[1]

3.2. 담수성 전투

계군은 전군은 비아령과 박라에 도착한 후 병력을 정비하며 더 이상 전진하지 않았다.

2월 3일 오전 9시, 출정을 격려하는 예포가 발사되는 가운데 복안함을 타고 교군이 황푸 섬에서 출정했다. 교군의 우익이 2월 4일 동완을 점령했고 여기서부터 교군은 걸어서 행군했다. '남색 무명 윗도리와 짧은 바지를 입고, 삼끈으로 짠 샌들 위에 각반을 차고, 방수모와 크고 둥근 농립모를 쓴' 교군 병사들은 모든 무기와 탄약을 스스로 짊어지고 이동했는데 이는 중화기를 운반할 때 인근 주민들을 강제로 징발하여 마구 부려먹는 기존 군벌들의 모습과는 크게 달랐기 때문에 교군의 행군을 구경하던 주민들은 이를 매우 신기하게 여겼다. 당연히 민가에 대한 약탈이나 각종 대민범죄도 없었다. 우익군은 신속히 전진했으나 위에서 말했듯이 좌익과 중로의 양시민, 유진환은 진군을 멈추어 동정 내내 전투를 담당한 것은 우익군과 교군이었다.

교군과 월군은 2월 11일 평호와 심천을 점령했고 허잉친의 제1보병단이 2월 14일 아침 담수성 인근의 기차역에서 천중밍의 병력 수백명과 조우하면서 첫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소련 고문 알렉산드르 체르파노프가 전투 상황을 관망하기 위해 작은 산으로 올라가자고 제안하여 체르파노프와 허잉친은 산 위로 올라가 전투를 지휘했다. 체르파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허잉친은 어디가 아팠는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체르파노프가 하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말할 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여 세명의 전령병이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고 한다. 보다못한 체르파노프가 그에게 코코아를 나누어주었고 허잉친은 코코아를 마시고 잠시 후에 안색이 회복되어 전투를 지휘했다.[2] 천중밍 부대는 패주했고 교군이 철로와 기차역을 장악했다. 패주한 부대는 담수성 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걸어 잠그고 농성했다.

담수성의 지휘관은 천중밍의 부총지휘자 홍조린이었는데 천중밍 부대 중에서도 상당한 정예병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담수성의 6미터 높이 성벽에는 3층으로 구성된 사격진지를 만들어놓고 야간 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조명장치까지 갖추어 적이 200미터 안에 접근하면 집중사격을 퍼부어 격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담수성을 향한 2차례의 초기 공격은 모두 격퇴되었다. 장제스는 성을 포위하면 이틀 안에 적이 항복할 것이라 생각하여 포위를 계속하자고 주장했지만 바실리 블류헤르는 그렇게 하면 천중밍의 증원군이 올 시간만 벌어주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장제스는 고민하다가 신속한 공격에 동의했다.

소련 고문들이 남문밖 고지에 캐논포 2문을 배치하였고 2월 15일 오전 6시에 공격이 재개되었다. 7시에 포격이 시작되자 돌격대가 남문으로 돌격했다. 맹렬한 돌격에 방위선이 무너졌고 순식간에 남문에 이르렀는데 황당하게도 돌격대는 사다리를 가져가지 않은 상태였다. 병사들은 성벽을 기어 올라 공격을 하고 있었고 이 모습을 본 허잉친은 얼굴이 창백해져 관목 뒤에 움츠러들었고 장제스는 '까마귀처럼' 소리를 지르며 분노했다. 냉전 시기에 장제스에 대해 비판적인 회고록을 남긴 체르파노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그는 증오심이 가득한 눈으로 고문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우리들 중 누가 돌격대에게 사다리를 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듯 싶었다.

이에 소방대 출신 체르파노프가 한 사람이 양손으로 성벽을 받치고 몸을 구부리게 한 다음에 다른 사람이 그의 등 위에 오르면 아래에 있는 사람이 허리를 펴서 들어올려주는 식으로 성벽을 오르게 할 것을 제안했다. 체르파노프와 다른 소련 고문이 빨리 성벽 아래로 달려가 그 방법을 가르쳐주자 기수가 제일 먼저 그 방식으로[3] 남문 위에 올라갔다. 기수는 총에 맞아 부상을 입었지만 성벽 위에서 공격 신호를 보냈고 나머지 교군이 일제히 담수성 안으로 돌격했다. 2월 15일 내내 담수성 안에서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졌다. 저녁 무렵 천중밍의 증원군이 도착하면서 전투가 길어졌지만 밤새 계속된 전투를 견디지 못한 천중밍 군대가 담수성에서 퇴각하면서 교군이 담수성을 점령했다. 장개석비록은 포로가 2천명이라 기록하고 있고 체르파노프는 700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회고하고 있다. 체르파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교군의 전사자는 10명, 부상자는 40명으로 격렬했던 전투에 비하면 많은 편은 아니었다. 또한 소총 1000자루와 기관총 6정을 노획했다.

2월 16일 정오, 장제스는 쑨원에게 담수성을 점령했음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다.

3.3. 면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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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군은 일부 매복공격을 받기는 했으나 2월 20일 평산을 점령했고 해풍, 육풍을 점령한 데에 이어 3월 7일에 조주와 산터우를 함락시켰다. 저우언라이는 양석혼(楊石魂) 등을 동강지구 각 현에 특파원으로 보내 조주, 산터우, 해풍, 육풍 지역에 공산당과 공청단을 조직하게 했다. 이에 천중밍의 주력부대를 맡고 있던 총지휘관 임호가 흥녕, 매현으로부터 면호와 이호 방면으로 남하하여 교군의 배후를 공략하려 했다. 천중밍과 결탁한 상태였던 운남군은 하원과 노륭에서 철수하여 천중밍의 역습을 도왔다. 광저우에서 400킬로미터나 전진한 상태에서 원시적인 보급수단에만 의존하던 교군은 후방이 함락되면 보급이 거의 끊기게 되므로 임호의 병력을 섬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다. 장제스는 교군 1단과 2단을 인솔해 면호로 퇴각했다.

3월 12일 아침, 면호의 서쪽에서 1단 정찰대가 임호의 소부대를 격퇴했다. 임호의 본대가 인근에 있음을 예측한 교군은 주민들에게 임호의 부대에 관한 정보를 탐문했는데 2~3만에 달한다, 앞산과 숲이 모두 적병으로 가득하다 등의 두루뭉술한 대답만 들었을 뿐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다. 이에 장제스는 1단 1영을 정면 공격대로 하여 전진시키고 2영을 예비대로 둔 다음에 3영을 우익에서 포위 공격하기 위해 배치했다. 12일 심야, 장제스는 총공격 명령을 내렸고 3월 13일 오전 9시 30분에 조석천(曺石泉)이 지휘하는 1영이 면호 교외에서 임호의 부대와 접전을 벌였다. 임호의 군세는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1영을 포위했고 이에 장제스는 조연(曹淵)이 지휘하는 2영을 투입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허잉친이 허계신(許繼愼)의 3영을 투입시켰지만 3영조차도 포위당했다.

3시간 동안의 격전 끝에 1영의 3분의 1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정오가 되어 광동군 7여단 3영의 병력과 교도대 2단이 도착하여 장제스의 병력을 지원했다. 당대표 랴오중카이가 전선으로 나와 지팡이를 휘두르며 독전했고 이에 교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다. 임호의 병력은 퇴각하기 시작했고 교군은 면호 서남쪽 5킬로미터 지점의 화순까지 추격하였다. 하지만 여기에 숨어있던 임호의 매복 병력이 반격하면서 교군 1영 당대표 장담을 비롯한 여러 간부들이 전사하는 등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교군은 화순 주변의 고지를 점령하고 교도 3단을 우회시켜 이호에서 적의 측면을 공략했고 그제야 붕괴된 임호의 병력은 패주하기 시작하였고 교군은 500명의 포로와 700정의 총기를 노획했다.

3월 14일 아침, 장제스가 피해를 점검하자 1단에서만 30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는 등 피해가 가볍지 않았다. 하지만 이로써 후방 차단의 위협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3.4. 천중밍의 도주

교군과 월군은 승기를 몰아 적을 추격, 3월 19일에 오화, 3월 20일에 흥녕, 3월 24일에 매현을 점령했다. 3월 21일 아침에 흥녕에 입성한 3월 21일 장제스는 산터우의 광동군 총사령관 쉬충즈에게 전보로 승전보를 보냈다. 하지만 이날 5시, 후한민으로부터 지난 3월 12일에 쑨원이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는 비보를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천중밍은 3월 24일 영국령 홍콩으로 도주했고 임호와 홍조린도 복건으로 달아났다. 4월 4일에는 양곤여 등이 투항하였다. 천중밍은 2만명 이상의 병력을 잃었으며 천중밍의 잔여세력은 혜주로 퇴각하여 동정은 사실상 완전히 정리되었다.

하지만 혜주 공격을 앞두고 양시민과 유진환이 국민정부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1차 동정은 미완의 상태로 종결되었다.

4. 결과

교군의 총 사상자는 600명이 넘어 황포군관학교 1기생의 삼분의 일 이상이 피해를 입었다. 단순히 교전으로 인한 피해 뿐만 아니라 명령 없이 후퇴하는 부대의 지휘관들이 가차없이 총살되었기 때문에 기율 유지를 위해 사망한 숫자도 어느 정도 될 것으로 추정된다. 장제스는 상당히 가슴아파하는 일기를 남겼다.
너무나 많은 동지들과 부하들이 희생을 당했다. 그리고 그들은 보석이요 꽃이다. 후방으로 달아난 장교들과 정치부원들의 경우는 군율에 따라 처리되어야 한다. 모두 몸소 훈련시킨 이들이다. 어떻게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러나 처형하지 않는다면 군대의 기율은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 솔직히 군대를 지휘해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다!
1925년 3월 14일 장제스의 일기

허나 이득은 확실했다. 공식적으로 소총 1만 2천~1만 3천정, 기관총 110정, 탄약 800만발, 구식 캐넌포 30문, 신식 산포 6문, 무선 통신기 6기를 노획하는 등 많은 전리품을 얻었고[4] 교군의 전투력과 기율의 엄정함을 크게 선전할 수 있었다. 바실리 블류헤르는 교군의 전투력에 대해 크게 만족하며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장제스 장군이 장비가 우수하고 훈련이 잘된 뛰어난 두 연대를 전선에 성공적으로 배치했고, 정치의식 또한 철저하게 배양한 덕분에 그들은 전선을 견고하게 지킬 수 있었으며 평민들을 약탈하지도 않았다."

<자림서보>는 평소에 국민당에 적대적인 언론이었음에도 교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정말로 훌륭한 군대로 장비가 우수하고 기율도 엄격하며, 모든 점에서 그들과 싸울 수 있는 그 어떤 군대보다도 더 강하다.

동정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장제스는 국민당의 무시할 수 없는 군사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지만 쑨원 사후, 국민당 내부의 대권 분쟁과 국공갈등이 빚어지면서 국민당은 격렬한 정쟁에 휩싸이게 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저우언라이도 이때 황포군관학교 정치부 주임으로 참전했으며 예젠잉, 쉬샹첸 등 공산당원들도 일선 간부로 참전했다. [2] 이후 허잉친은 코코아 중독자가 되었다고 한다.(...) [3] 배석한 정치장교와 서로 먼저 오르라고 다툰 다음이었다고 한다.(...) [4] 이중 3분의 1이 황포군관학교에 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