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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31 16:30:04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파일:카메룬 국장.svg
카메룬 공화국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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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폴 비야 }}}}}}}}}

<colcolor=#ffffff> 카메룬 제1-5대 대통령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Ahmadou Babatoura Ahidjo
파일:3450E1E3-37A4-4B14-A004-3268A608F7B9.jpg
1979년 모습.
본명 아마두 바바투라 아히조
Ahmadou Babatoura Ahidjo
출생 1924년 8월 24일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령 적도아프리카 가루아
사망 1989년 11월 30일 (향년 65세)
파일:세네갈 국기.svg 세네갈 다카르
국적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 식민제국(1924~1960)

[[카메룬|]][[틀:국기|]][[틀:국기|]](1960~1984)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세네갈|]][[틀:국기|]][[틀:국기|]](1984~1989)[1]
학력 야운데 무선 고등학교
신체 176cm
출신 정당 카메룬인연합(1960~1966)
카메룬국민연합(1966~1982)
재임기간 제1-5대 대통령
1960년 1월 1일 ~ 1982년 11월 6일[2]
종교 이슬람교

1. 개요2. 생애
2.1. 독립 전2.2. 독립 후2.3. 말년

[clearfix]

1. 개요

1-5대 카메룬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 독재자.

무려 42년 동안 현역 대통령으로 집권한 폴 비야의 악명에 가려진 감이 있지만 그 역시 22년이나 장기집권하며 절대권력을 휘두른 악명높은 독재자였다.[3]

2. 생애

2.1. 독립 전

1924년 8월 24일에 카메룬 북부 지역인 가루아에서 풀라니인 추장인 아버지와 풀라니족의 노예의 후손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고, 야운데의 중등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후 1942년부터 우체국의 교환원으로서 전국에서 일해왔고,[4] 1946년에 정치에 입문한 후 1953~1957년에는 프랑스 연합 의회 의원이었고, 1957년 1월 28일부터 동년 5월 10일까지는 카메룬 입법부의 의장을 역임한 후 앙드레-마리 음비다(Andre-Marie Mbida) 정부의 부총리가 되었고, 1958년 2월 16일에 음비다가 사임하자 아히조는 카메룬의 국가원수에 올랐다. 이후 아히조는 "카메룬의 분리된 파벌을 재결합하고 프랑스 식민 세력과 협력하면서 카메룬의 독립을 향해 나아가겠다"[5]는 목적 하에 프랑스와 협상을 이어나가 동년 10월에 카메룬의 독립 승인을 받아냈고, 프랑스 신탁통치의 종료와 카메룬 독립 날짜는 모두 1960년 1월 1일로 확정지었으며, 1959년 3월에는 유엔 총회에서 카메룬의 독립을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1960년에 프랑스령인 남부 카메룬이 독립하자 아히조는 영국령인 북부 카메룬과의 통일에 관심을 보였고, 카메룬의 재통일을 위한 국민투표를 열었다. 국민 투표 결과 북부 카메룬은 나이지리아에 가입하는 데 투표했고 남부 지역은 북부 카메룬과의 재통일에 투표했는데, 독일령 카메룬 출신의 존 응우 폰차(John Ngu Foncha, 1916~1999) 총리와의 협력 끝에 '프랑스 공동체와 영연방에 가입하지 않을 것'을 합의하고는 1961년 10월 1일에 카메룬의 통일을 결정지었다. 통일된 카메룬 연방 공화국의 첫 대통령은 아히조였고, 부통령은 폰차였다.[6]

2.2. 독립 후

1961년부터 일당제 국가를 원했던 아히조는 1962년에는 자신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정부 당국이나 법률에 대한 전복 혐의'로 간주하고 투옥시킬 수 있는 법을 통과시켰으며, 동년 7월에 아히조의 일당독재화에 저항한 야당 인사들이 재판을 받고 구금되자 많은 야당 지도자들은 겁을 먹고 여당 카메룬 연합(UC)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 후 1965년부터 1980년까지 4차례나 더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였는데, 물론 네 선거 다 아히조의 득표율이 100%에 육박한 명백한 부정선거였다.

1966년 9월 1일에 아히조는 UC와 남부 카메룬 지역의 카메룬 국민민주당(KNDP)을 합병하여 카메룬 국민 연합(CNU)로 바꾸고는 CNU의 당수에 등극하며 일당제 국가를 확립시켰다. 일당제 하의 대통령이 된 아히조는 국회의 모든 지명을 승인하고 그가 입안한 모든 법들을 국회가 승인하게 하는 등 행정권과 입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특히 아히조는 정적들을 재판 없이 감금할 수 있도록 하여 그가 집권할 동안 '전복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수천 명의 카메룬인들이 불결한 수용소에 구금된 채 '노예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경찰은 수감자 구금 기간을 자의적으로 연장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고, '공공 안전을 침해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은 재판에 변호사를 부르는 것과 판결에 항소하는 일이 불가능했으며, 심지어 일부 반체제 인사들은 공개적으로 처형되기도 했다.

그리고 아히조는 야외 집회를 제한하고, 모든 간행물은 간행되기 전에 검열을 거치게 했으며, 동성애는 투옥으로 처벌했고, 통행금지 시간을 설정하며 국민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다. 이러면서 아히조는 자신의 우상화에도 관심을 기울여 1962년에 발행된 100 카메룬 프랑 지폐에 자신의 얼굴을 넣었고, 음악가들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만들게 했으며, 자연스레 아히조는 '국가의 아버지' 등 많은 칭호로 불렸다. 또한 아히조는 유럽과 미국의 신문에서 자신에 대해 호평하는 기사들을 수집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다만 아히조의 통치 하에 카메룬은 당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안정적인 국가 중 하나가 되긴 했지만, 먼 훗날 테오도로 오비앙 적도 기니와 유사하게 1977년에 발견된 석유로 번 돈들 대다수는 석유 회사와 관리들의 주머니로 들어갔고, 인구의 0.1%인 9천여명[7]밖에 되지 않는 프랑스인들이 카메룬의 자원을 착취하는 등 카메룬 경제의 거의 모든 주요 부문을 계속 통제해왔다고 한다.[8]

그리고 아히조는 카메룬의 낙후된 환경과 부실하게 구현된 도시 및 공공 계획 정책이 연방제에 기인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연방제가 카메룬의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부분 사이의 분열과 문제를 야기한다, 가난한 나라에서 별도의 정부를 관리하는 것이 너무 돈이 많이 든다는 등 연방제에 대한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는데, 이에 따라 1972년 5월 20일에 아히조는 국민투표를 열어 '유권자들이 이 아이디어를 지지하면 연방을 폐지하고 단일 국가를 수립할 것'이라고 약속한 후 동년 6월 2일에 대통령령으로 연방제를 폐지하고 카메룬 연합 공화국을 만들었다. 같은 해에 아히조는 개헌으로 부통령직을 폐지해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으며, 1975년에는 남부 카메룬 출신의 폴 비야를 총리에 앉혔다.

2.3. 말년

1982년 11월 4일에 아히조는 건강상태 악화를 이유로 사임하며 폴 비야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그 후 자신이 꼭두각시로 이용하려고 총리로 앉혀놓은 폴 비야는 아히조를 집권당 의장직에서도 물러나게 만들며 되려 철저히 정치적으로 숙청당하며 모든 권력을 내주게 되었다.

아히조의 사임 후 총리였던 폴 비야는 대통령으로 승계를 받았지만 정식적으로 한번 더 선출됐다. 비야는 1984년 4월 5일에 아히조파 경호원들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을 빌미로 아히조 세력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 쿠데타에 연루된 군인 46명을 처형시키고는 아히조를 반역죄로 연루시켜 1984년 사형을 선고했고,[9] 아히조는 자신을 추적하는 세력을 피해 세네갈과 프랑스를 오가며 도피 생활을 하게 된다.

아히조는 이렇게 말년을 비참하게 보내다가 1989년 11월 30일에 세네갈의 다카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의 시신은 아내가 사망한 2021년 기준으로도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다카르에 묻혀 있다. 반면 비야는 2024년 현재까지도 장장 42년간 최고의 권력을 유지하며 현역 최고령 독재자이자 역사상 최장기 집권 독재자 중 한 명으로도 꼽히고 있다.


[1] 이 두 국가에 망명하며 도피 생활을 했으며, 사망할 때까지도도 카메룬에 돌아오지 않았다. [2] 프랑스로부터의 독립 이후 대통령 임기 기준이다. 영국령 카메룬의 독립 이후 통합국가로서의 지도자 기간으로 잡는다면 1961년 10월 1일 ~ 1982년 11월 6일이다. [3] 국제적으로나 자국내에서의 평판은 폴 비야보다 훨씬 안 좋은데, 사실 비야 정도면 아프리카의 독재자 중에서는 온건하다고 평가받는다. 게다가 아히조도 1970년대 아프리카의 독재자 중에서는 온건한 편이긴 했는데, 당연히 이는 당대 아프리카에 상상을 초월하는 악마들이 즐비했기에 가능한 평가이다. 당장 카메룬 바로 밑에 있는 적도 기니의 당시 대통령이 '아프리카의 폴 포트'라고 불린 희대의 독재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였다. [4] 이런 경험은 아히조가 카메룬인으로서의 국가적 정체성을 함양하고 다민족 국가를 통치하는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노련함을 제공했다고 한다. [5] 그러나 아히조의 이러한 주장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프랑스의 지속적인 영향력을 허용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카메룬 민족 연합(UPC)의 반대를 얻었으며, 덤으로 UPC는 "프랑스가 준 독립은 가짜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6] 이후 폰차는 1965년 5월 13일에 총리직에서, 1970년에 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암바조니아 지역의 분리주의 운동을 지원하다가 1999년 4월 10일에 사망했다. [7] 참고로 1977년 기준으로 카메룬 인구가 약 780만 명 정도였다. [8] 사실 카메룬은 전술한 것처럼 경제적으로도 프랑스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명목상으로는' 독립을 하긴 했어도 독립 후에도 프랑스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특히 독립 초기에 프랑스 대사였던 장-피에르 베르나르(Jean-Pierre Bénard)는 때때로 카메룬의 '진정한 대통령'으로 간주될 정도로 막대한 권한을 행사했는데, 이는 샤를 드골 정부가 카메룬 주권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협력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독립한 카메룬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던 것에서 기인한다. 뿐만 아니라 카메룬 내각의 장관들은 프랑스인 고문들의 보좌를 받고 있었고, 통화는 CFA 프랑을 유지했으며, 심지어는 참모총장을 위시한 카메룬 육군 장교 대다수는 친프랑스 성향의 카메룬인도 아닌 순수 프랑스인이었다고 한다. 과장 안 보태고 자치령만도 못한 신세였을 정도. [9] 참고로 아히조는 자신이 쿠데타군과 연루되었다는 주장을 전면 부인했으며, 오늘날에도 아히조가 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