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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ce5b6> 역사 | 역대 정난군절도사 | 서하/왕사 |
정치 | 황제 | 역대 서하 황제 | 서하 시기 비황족 황제 추존자 | |
외교 | 송나라-서하 관계 | |
행정구역 | 흥경부 | |
문화 | 서하어 | 서하 문자 | 서하왕릉 | |
민족 | 탕구트 | |
기타 | 송원시대 | |
수나라&당나라 · 오대십국 · 청나라 · 대만 | 중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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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고대하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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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 대륙 가운데 녹청색 지역이 서하다. 요-북송 시대 때의 서하(西夏). 금나라 때도 별 차이가 없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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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세부 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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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2년[1]/1038년~1227년 | ||
<colbgcolor=#59412c>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탕구트 | 몽골 제국 | |
이칭 |
서하(西夏), 만비국(萬祕國), 방니정국(邦泥定國), 당올(唐兀), 당항(黨項) |
|
위치 | 중국 간쑤, 칭하이, 산시, 닝샤 후이족 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 |
수도 | 흥경부(興慶府) | |
정치 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황제 | |
국성 | 이(李) | |
주요 황제 |
경종 외명낭조/이원호 숭종 이건순 인종 이인효 |
|
언어 | 서하어[2] | |
문자 | 서하 문자, 한자 | |
종교 | 대승 불교, 도교, 유교, 이슬람교 | |
종족 | 탕구트족 | |
통화 | 보전(寶錢), 통보(通寶), 원보(元寶)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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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송 시대, 송나라의 서북쪽에 있었던 티베트 계열의 탕구트족이 세운 왕조이다.본래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라는 뜻의 대백고국(大白高國)[3] 또는 대하(大夏), 백고대하국(白高大夏國)이라고 불렀다. 또한 탕구트를 뜻하는 미으냐(mjɨ-njaa)라고도 했다. 탕구트어와 가까운 티베트어로는 미냑(མི་ཉག་, 彌藥)이었다. 서하는 북송 쪽에서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하나라와 구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국의 서북 지역을 정복하여 지배층이 탕구트족이고, 피지배층이 한족인 서하국을 건국했다. 1032년에 건국한 후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며 현재의 칭하이성, 간쑤성, 산시성 북부 일대를 직접 다스렸으며 200년 동안 중계무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1227년, 몽골 제국의 칭기즈 칸에 의해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2. 역사
2.1. 민족
탕구트인은 《 삼국지연의》에 자주 나오는 강족(羌族)에서 갈라져나온 집단이었다. 강족은 5호 16국시대 때 일시적이나마 좁은 의미의 중원을 지배했다. 이후 강족은 크게 발강(發羌)과 당항강(党項羌)으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서남쪽에 내려가 토번(티베트)을 세웠고, 탕구트로도 불리는 후자는 간쑤성과 산시(섬서)성 일대로 이주하여 서하를 건국했다.한편으론 탕구트인이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의 후손이라는 의견도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인 《 송사》에 의하면, 서하 이씨 황실의 선조는 탁발적사(拓拔赤辭)였는데, 그의 성씨인 '탁발'이 서기 4세기에 만주 북부에서 중원으로 남하하여 북위를 세운 탁발선비족의 부족명에서 유래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씨를 탁발씨로 한 건 자칭에 불과했고, 실제로는 티베트계,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강족계에 해당하는 민족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쪽이 더 유력하다. 실제로 서하어 역시 한장어족에 속했다.
물론 선비족의 영역이 지금의 칭하이 성 및 신장 지역 일대를 점령하면서 티베트와 접하기도 했고, 강족과도 여러 접촉이 있었던 만큼 탕구트족 역시 일부 선비족들과의 혼혈이 있었거나, 서로 접촉 및 동화되어 일부 탕구트족들이 선비화되거나 반대로 일부 선비족들이 탕구트화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탁발씨를 자칭한 건 선비족의 영향[4]을 받았다고 봐야 한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황실이 선비족에서 나왔기에, 해외에서는 양 국가를 '타브가치'(탁발)로 부르며 선비족 국가로 봤지만, 중국의 한족은 수•당을 선비족 국가로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과 비슷하다.
2.2. 건국
서하의 전신은 현대 섬서성 지방의 정난 절도사(定難節度使)였다. 정난절도사는 당나라 때인 787년에 설치되었는데, 탕구트계 왕조가 세력을 잡은 계기는 881년에 탕구트계 장수 탁발사공(拓拔思恭)이 황소의 난 진압때 세운 공을 인정받아 국성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정난절도사이자, 하국공(夏國公)에 봉해진 것이었다. 그 후로 정난절도사의 자리는 이사공의 후손들이 세습했으며 당나라가 쇠퇴하면서 사실상 독립국가로 발전했다.1032년, 조덕명(이덕명)이 죽자 아들 조원호(경종)가 왕위를 계승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29세였다. 1036년에는 하서회골(하서 위구르)을 멸망시켜 하서회랑을 장악했다. 원호는 1038년에 송나라의 국성인 조씨를 버리고 이씨로 성을 다시 바꾼 후[5] 황제의 자리에 올랐는데, 수도는 영하(寧夏) 흥경부(현재의 인촨)였다. 1041년, 동등한 황제국의 관계가 된 것에 반발한 북송과 맞붙어 호수천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이 사상자 1만 3천 명을 내며 거하게 깨졌고, 정천(定川) 전투에서는 갈부민이 이끄는 서하군에게 9천 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했다. 이후 3년 동안 전쟁을 벌인 끝에 양국 사이에 화의가 맺어졌다.
당시 북송은 요나라와도 전쟁 중이어서 양면전쟁을 치러야 했다. 서하와 북송이 화의에 나선 까닭은 전쟁을 마친 요나라가 서하와 북송 중에서 어느 한 편이 될 가능성을 양국 모두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서하가 화의를 제안하고 북송이 동의하여 1044년 북송이 서하에게 매년 공물을 보내는 대신, 서하는 북송의 신하 나라가 되었다(경력의 화의).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북송은 매년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 근을 보냈다.
당시 요나라는 서하를 이용해 북송을 더욱 더 압박하기 위하여 요흥종의 딸인 흥평공주 야율씨를 경종 이원호에게 시집보냈다. 그런데 불운하게도 두 사람 사이의 금슬은 최악이었고, 결국 흥평공주가 병에 걸려 사망할 때도 경종이 외면하는 바람에 요나라는 서하에게 이를 갈게 되었다. 사실 이는 요나라가 서하와의 약조를 어긴 것에서 시작되었다. 송하전쟁이 한창일 때, 요나라는 서하를 꼬셔 북송의 영토를 빼앗아 고립시킬 계획을 짜고 있었다. 하지만 송하전쟁의 이점을 확인한 요나라가 북송을 한 번 더 압박해 전연의 맹에서 약조된 공물의 배를 받는 조건으로 영토를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서하에게 북송과 화의를 맺으라고 압박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경종이 안 그래도 금슬이 안 좋던 요나라 공주를 더욱 더 홀대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공주의 사망 소식은 죽은지 한참 후에 서하에 다녀왔던 요나라의 사신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으며 요흥종은 이를 빌미로 서하를 침공할 명분을 갖게 되었다. 서하 역시 요나라에게 반기를 들어 경종은 하•요 국경에 있는 탕구트족의 이주를 장려하는 한편, 이를 따지러 온 요나라의 사신에게 나라가 휘청이고 싶지 않으면 너네 거란족이나 잘 다스리라는 으름장을 놓아 양국의 관계는 결국 최악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로 인해 제1차 요하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는데 오합지졸이었던 북송군과 달리 요군은 서하군을 다방면에서 패퇴시키면서 압박했다. 이에 경종은 요나라에 화친을 청했으나 요나라의 장수들은 탕구트족을 믿을 수 없다며 화친을 거부했고 흥종은 망설였다. 그동안 서하군은 진영을 후퇴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해 요군이 서하를 침범하는 내내 군량부족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흥종이 마침내 화친을 허락하자 경종은 뜸을 들이는 척하면서 요군을 기습했다. 그러나 실전으로 다져진 요나라는 이미 이 상황을 파악하고, 기습을 물리쳤다. 또 한 번 패배한 서하군은 후퇴하고 요군이 이를 추격했는데 경종이 거의 사로잡힐 뻔했다. 그러나 서하에게는 천운이 따랐으니, 갑작스럽게 모래폭풍이 불어 요군이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를 이용한 서하군은 요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게 된 서하는 요나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며,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요나라도 결국 서하가 요나라의 황제에게 입조한다는 조건으로 화친을 받아들이며 서로 포로를 교환했다. 이로써 북송과 요나라를 다 물리친 경종은 중원의 서쪽에서 요, 송, 서하의 3자 구도를 이루었다.
경종 이원호는 또한 토번을 크게 물리치며 영토를 확장했고 서하 문자를 만들기도 했다.
2.3. 혼란기
하지만 서하는 곧 혼란을 겪게 되었다. 경종은 말년에 태자의 아내, 즉 자신의 며느리를 취하는 바람에 1048년, 태자의 원한을 사 암살당했고 그 태자도 처형된 탓에 막내아들인 이양조(의종)가 황제의 자리를 물려받게 되었다.문제는 의종이 너무 어렸던 탓에 섭정을 받아야 했는데 그의 모친인 태후 몰장씨가 친인척들을 등용해 정사를 어지럽히는 등 국정을 농단한 것이었다. 1056년, 태후는 외간 남자와 사통하다가 또다른 사통하던 사람에게 원한을 사서 죽음을 당했지만, 그녀의 오빠인 몰장와방이 혼란을 수습하여 몰장씨 일가의 전횡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몰장와방도 1061년, 의종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끝내 역으로 살해되었다. 그렇게 하여 외척의 영향에서 벗어나나 싶었는데 1068년에 개혁정책을 펼치던 의종이 전쟁 도중 날아온 화살에 맞아 급사했다.
이 시기에 요나라는 제1차 요하전쟁에서 받은 치욕도 되갚을 겸, 서하 경종의 석연치 않은 죽음과 의종의 어린 나이를 빌미로 삼아 제2차 침공을 감행했다. 나라가 나라꼴인지라 서하는 제1차 전쟁때와는 달리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는데, 이 와중에 나라는 황폐화되었으며 결국 서하는 공물까지 바치며 요군에 휴전을 요청했다. 서하는 요나라에게 땅을 빼앗기는 수모를 겪으며, 막대한 공물까지 바쳐야할 형국이었지만 요흥종은 공물만 허락할 뿐 화친에 대해선 미비한 입장을 보였다. 이는 흥종이 붕어하는 날까지 이뤄지지 않았으며, 요도종 시기에 이르러서야 양국은 화친할 수 있게 되었다.
의종 이후 또다시 어린 황제인 이병상(혜종)이 즉위하게 되었으며, 이번에는 태후 양씨가 섭정하고 외척 양씨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와중에 혜종은 한 번 폐위되었다가 다시 즉위하기도 했다. 게다가 혜종 역시 의종 못지않게 단명했다.
이 시기에는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공해 북송이 접경 무역을 중단시켰다. 충악이 외명산 부락을 투항시킨 데 이어 북송 조정의 승인도 없이 수주성을 점령하자 서하가 보안군을 습격해 보안군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1071년에는 충악이 나올성을 축조했으나, 북송의 축성에 분노한 서하에 의해 무녕성을 빼앗기는 등 서하와 북송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잦았다.
1073년 왕소가 하황 일대를 수복한 뒤, 1081년 혜종 이병상이 양태후에 의해 억류되자 이를 이용해 북송이 5개의 진로로 서하를 공격했으나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고 난주를 수복했던[6] 이헌의 군대가 영주에 오지 않았으며, 결정적으로 군량 보급 문제로 인해[7] 실패했다. 이후 북송이 1082년 서희와 심괄로 하여금 영락성을 신축하여[8] 서하를 공격하려 했으나 오히려 서하의 역공을 받아[9] 성이 함락되고 서희도 난전 중에 전사했다. 이에 송신종은 신료들 앞에서 통곡했으나 서하도 경제적인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2.4. 전성기
이렇게 외척의 전횡은 계속되었고, 이 와중에 이건순(숭종)이 즉위했지만 그 역시도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태황태후 양씨가 섭정했다. 이 시기, 서하는 국력이 약해져 북송과의 전쟁에서도 피해를 입는 등 침체되어 있었다.1099년, 친정을 시작한 숭종이 양씨 일가를 숙청하면서 나라를 안정시켰다. 이후 숭종은 관료제를 정비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비단길을 장악하고, 요나라- 금나라 교체기를 안정적으로 지나가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139년에 붕어했다.
송신종 시절 서하와의 전쟁에서 패배해 하황을 토번에 넘겨주고, 서하가 북송의 국경을 침범하는 등 서하와 북송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있었다. 이후 북송의 휘종 시기 왕후의 지휘하에 하황을 수복한 뒤 황두회흘(황두 위구르)까지 점령하면서 농우도호부를 세웠는데.[10] 이후 환관 동관이 서하와의 전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여기서 동관이 패배한 걸 승전으로 허위 보고했던 일도 있었지만, 서하와 북송 모두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1126년 정강의 변 시기, 서하는 북송이 점령했던 영토들 중 일부를 탈환했다.[11]
이후 즉위한 이인효(인종) 역시도 선정을 펼쳤다. 특히 인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민족을 가리지 않았고, 과거제를 전격적으로 시행했으며 동시에 율령 정비에 힘썼고, 문묘를 정비하며 불교를 후원하는 한편 실록 편찬에도 힘을 기울이는 등 선제인 숭종보다 내치에서 더 많은 업적을 거두었다. 하지만 서하의 전성기는 딱 여기까지였다.
2.5. 멸망
동쪽에서 요나라와 북송 사이에 고려가 끼어들어 3자 구도를 유지하고 있었다면, 서하는 서쪽에서 요, 북송과 함께 3자 구도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다만, 북송과 더 친했던 고려와 달리 서하는 요나라와 더 우호적인 사이였다. 서하의 황후 중에는 숭종의 황후처럼 요나라의 야율씨 황족도 여럿 있었다. 이 때문에 서하는 북송 말기까지 칭신을 하면서도 북송과 언제 깨질지 모르는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한족의 북송과 거란족의 요나라가 여진족의 금나라에게 멸망한 후에는 금나라와도 관계를 유지했다. 1194년 이순우(환종)가 금나라에 의해서 하국왕(夏國王)에 책봉된 것이 그 사례이다.이렇게 서하는 요나라에서 금나라로 교체되는 시기에 어찌저찌 줄을 잘 갈아타서 멸망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인종 시기부터 강해진 몽골이 제대로 대처하기도 전에 성장한 데다가 인종도 이를 어찌하지 못한 채 1193년 붕어했다.
문제는 인종의 뒤를 이은 환종 이순우가 몽골이 성장하는 것을 뻔히 보고도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 몽골의 침공 때 제대로 당했고, 이후 서하는 멸망할 때까지 황제가 시도때도 없이 바뀌는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인종 사후 서하는 겨우 30년밖에 유지되지 못했는데 그 기간 동안 무려 5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숭종과 인종의 치세가 좀 극단적으로 길기는 했지만[12] 둘 다 합쳐서 100년은 넘었고, 시조인 경종 이원호 사후의 혼란스러웠던 의종과 혜종의 치세도 합쳐서 30년을 넘었다는 걸 감안하면 서하 말기의 정치적인 혼란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황제가 바뀔 때마다 몽골에 대한 외교적인 방침이 바뀌는 바람에 지속적으로 침공을 겪는 원인이 되었다.
위구르족을 복속시킨 칭기즈 칸은 이안전(양종)의 치세때 제1차 서하 정벌에 나섰는데, 수도를 포위한 후, 황하를 이용해 수몰시켜버리려고 했으나 성공시키지 못한채 철수했다. 이후 양종은 몽골에게 항복하고 황녀를 보내면서 무릎을 꿇었다. 양종의 황위를 찬탈하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오른 이준욱(신종)은 친몽골적인 태도를 보이며 몽골의 금나라 공격때 지원군을 보내는 등 열심히 줄을 섰다. 하지만 서하 내부의 반몽 감정에 영향을 받고, 원래 친선관계였던 금나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높았던 터라 몽골의 추가지원 요청을 거부하고, 황위마저 자신의 아들인 이덕왕(헌종)에게 넘긴 후 퇴위했다.
그렇게 제위에 오른 헌종은 조정의 여론에 따라 금나라와 화친하고 몽골에게 반기를 들기 시작했는데, 결국 호라즘 정복 이후 몽골은 서하에 대한 전면공격을 감행했다. 원정 도중 칭기즈 칸은 부상을 입게 되었는데 이에 몽골에서는 서하에게 항복을 권유했지만 서하 조정은 비웃으며 사신을 면전박대하고 내쫓았다. 이에 격노한 칭기즈 칸은 공격을 더욱 더 강화시켜 성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으며, 결국 수도 코앞까지 진격했다.
마침내 몽골군의 맹공을 못 버티고, 헌종 사후 제위에 오른 이현(말제)이 직접 항복을 청하게 되었다. 잠시 항복을 위해 수습하고 있는 기간 동안 말에서 낙마한 칭기즈 칸이 붕어했는데, 그의 유언은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고, 서하인을 한 명도 남기지 말라."
는 것이었다.2.6. 멸망 이후
이후 서하인에 대한 대량 학살이 진행되었다. 다만 임시 대칸에 오른 툴루이는 서하인을 모두 죽이지는 않았다. 서하인이 대량 학살당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적지 않은 서하인들이 몽골 제국에 흡수되었다. 서하의 요새들 중 하나가 카라호토(ᠬᠠᠷᠠ ᠬᠣᠲᠠ)였는데 몽골어 이름이었으며, 탕구트어로는 '검은 강'을 뜻하는 zjɨ̱r²-nja̱¹였고, 한자로는 흑성(黑城) 혹은 흑수성(黑水城)이었다. 이 요새는 몽골이 교역상의 이유로 보존한 덕분에 서하인들은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갔다. 서하 출신 장수 차간(察罕, ?~1255)은 몽골군을 이끌고 남송을 공격하기도 했다.살아남은 서하인의 후손들 중 일부는 중국 동부의 안후이 성 근처에서 살다가 원나라가 멸망한 뒤에 한족에 흡수되어 소멸했다. 명나라 중기인 16세기 초까지 서하 문자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카라호토에서 명맥을 이어나가던 서하인들은 1372년 명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카라호토를 침공한 풍승(馮勝)의 명군에 의해 멸망했다.
당시 카라호토는 소빙기에 접어들면서 주변 오아시스가 소멸하기 시작하여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 쳐들어온 풍승은 둑을 쌓아서 카라호토로 들어가는 수로를 차단해버렸다. 결국 카라호토는 명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서하인들은 사라졌다. 사라진 서하의 탕구트인들과 가장 가까운 민족으로는 중국 쓰촨 성, 간쑤 성, 칭하이 성 등지에 사는 강족(羌族)이 있다. 다만 서하의 DNA적 특성은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중국 중앙 텔레비전 보도).
EBS <골라듄다큐>에서 서하 황실의 후손을 촬영했다. 현재는 난창시에서 타바씨[13]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94년 서하 황실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리페이예(李培业)가 서하 황실 족보를 보여줬으며 #, 2000년 7월에는 리페이예와 그의 아들인 리지원(李积文)이 함께 서하왕릉을 방문해 참배했고, 그 이후에도 서하 황실 족보를 정리한 서적을 쓰기도 했다.[14] 다만 족보는 신빈성에 의문이 지적되었다.
3. 역사서
서하인 자신들이 남긴 서하의 역사서는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20세기 초에 둔황에서 아우렐 스타인(Aurel Stein)과 폴 펠리오(Paul Pelliot)가 서하의 탕구트 문자로 기록된 문헌들을 발견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표트르 코즐로프(Пётр Козло́в)가 카라호토를 발굴하면서 탕구트 문헌들을 발견했다. 하지만 이들 문헌들은 대부분 불교 서적이었다.현존하는 역사서가 전혀 없어 '처음부터 역사서 편찬 같은 것을 안 한 건가' 라는 의혹이 일기도 하지만 중원의 왕조를 모방하여 황제국의 제도를 갖춘 나라가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을 리는 없다. 일찍이 인종 시기에 한림학사원(翰林學士院)을 설치하고 실록을 편찬하게 했으며 1225년에는 나세창(羅世昌)이라는 신하가 관직을 그만둔 후 《하국세차》(夏國世次)라는 역사서를 저술한 바 있었다. 하지만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칭기즈 칸의 유언에 의해 자행된 서하인 대학살 기록이나, 옛 서하의 강역 내에 남아 있는 황폐화된 유적들을 보아 종합해보면, 전쟁과 방화 등의 난리로 인해서 역사서들이 모두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현존 사서가 없기 때문에 서하의 역사에 대해서, 서하인들이 남긴 서하 문자로 기록된 편지, 비문, 문집 등을 활용하거나 송나라에서 남긴 기록, 몽골인들이 남긴 기록 등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하의 역사나 문화를 연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대표적으로 서하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부분은 《 송사》 <하국전>(夏國傳)이 있다. 그 외 《 요사》와 《 금사》에 서하에 대한 기록들을 남긴 것이 전부인데, 서하 전기의 기록은 《요사》에 많고, 서하 후기의 기록은 《금사》에 많다.
4.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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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가 거란을 주적으로 대치하게 되면서 적은 인구에 어마어마한 무리를 한 걸로 유명한데, 서하는 300만 명에서 아무리 높게 잡아도 500만 명 선으로 추정되는 인구로[15] 거란은 물론 인구 1억 명인 송나라와도 적대했다. 따라서 서하는 고려조차 뛰어넘은 군사사회가 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측 사료에 기록된 서하의 군대는 최대 50만 명인데, 서하 인구를 500만 명으로 잡아도 인구 10%, 즉 생산가능인구의 절반이 군인이었다는 뜻이다. 말 그대로 다 끌어모은 숫자이고 한 번에 동원가능한 전력은 이보다 적었겠지만 엄청난 무리였음은 분명했다.
성인 남성들을 다 동원하고도 모자라서 당시로선 드물게 여군(女軍)이 정규 편제로 존재했다. 전근대의 양성평등 같은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물량의 송군과 장기간 전쟁을 하는 바람에 남성 인구를 다 끌고가도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이들 여군을 마괴(麻魁)라고 불렀으며, 이들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되었다. 이는 서하의 지리학적인 위치가 한 몫했는데 서하의 주변에는 송, 요, 금을 비롯한 강력한 이웃 국가들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서하는 몽골군에게 정복되기 전까지 위의 세 나라와 정말 박터지게 싸웠다. 이로 인해 탕구트족은 상무정신이 높았으며 송의 기록에도 이들의 기개에 대해 적혀 있다. 다만, 후대로 갈수록 이 상무정신은 약해졌다고 한다.
철요자(鐵鷂子)라는, 직역하면 전갈 기병쯤 되는 병종도 존재했는데, 말과 탑승자의 갑옷을 하나로 묶어 탑승자가 전투 중에 죽어도 말은 계속 전진해 적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특이한 병종이었다. 이 병종은 나중에 여진족의 완안부가 세운 금나라의 '철기병'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철요자'(鐵鷂子)라는 병종은 서하의 고유 병종이라고 할 순 없었다. 마찬가지로 중기병을 다수 운용한 유목제국인 거란족의 요나라에서도 말과 기수를 묶어 낙마를 통한 전투력 저하를 막은 병종이 있었고, 이들과 교전하던 금나라 역시 '괴자마'라는 비슷한 병종을 남송과의 전투에서 운용했다.
1998년에 저술된 《서하의 군사, 과학, 그리고 기술》에 적힌 바로는 기병, 전차, 궁병, 포병, 수륙양용군을 포함한 군사적 기술을 통해 요, 금, 송 등 당대의 왕조들 사이에서 동등한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서하는 남자의 나이가 15세 이상이 되면 모두 어른으로 간주하고, 군인이 될 의무를 적용시키는 징병제 국가였다. 그래서 서하군의 총인원 수는 50만 명이나 되었다. 서하군은 젊고 용감한 사람을 전투병으로 삼았고, 겁이 많거나 나약한 사람은 후방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지원하도록 배려했다.
보통 서하군은 10일 이내로 전투를 끝내는 속전속결을 선호했고, 그래서 병사들이 휴대한 식량도 10일분을 넘기지 않았다. 서하인들은 말을 잘 다루고 굶주림과 갈증과 더위와 추위를 잘 견뎠으며, 전황이 불리하면 재빨리 후퇴하여 남은 전력을 보존했다.
서하의 검 제조법은 매우 뛰어나 송나라 사람들이
"요나라의 안장, 서하의 검이 천하제일이며, 다른 곳에서는 모방을 해도 따라가지 못한다."
고 할 만큼 그 가치가 높았으며, 지뢰같이 폭발하는 마름쇠 역시 유적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에 서하 역시 화약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서하군에는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특수부대인 금생(擒生)도 있었는데, 이들의 인원수는 총 10만명이었다. 대개 '금생'은 송나라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한족들이었고, 간혹 거란족이나 티베트(토번)족도 있었다. 이밖에도 서하군은 주변의 이민족들 중에서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난 자들 5천 명을 뽑아서 육반직(六班直)이라 부르며, 매달 쌀 2석을 급료로 주었다. 또한 서하군에는 외인부대로 복무하는 외부 동맹군도 있었는데, 횡산(橫山)에 사는 강족(羌族)의 일파인 산와(山訛)였다. 《송사》를 보면 이들 산와족은 전장에서 서하인들보다 월등한 용맹성과 기량을 보여, 서하군보다 훨씬 강력했다고 평가받았다.[16]
5. 문화
서하 황릉의 봉분
서하 황릉의 특이한 석상
서하 또는 서하의 정체성을 가졌던 탕구트족은 서하문자를 만든 만큼 이덕명 대에 《서하국사》를 편찬하고 인종 대는 사학원을 설치하여 송나라의 실록을 참고해 《이씨실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하지만 몽골 제국에 의한 파괴 이후 세월이 지나 많은 저서들이 소실되었으며, 그만큼 서하 제국과 탕구트족의 문화가 어땠는지 알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나마 서하 문자들이 존재했고,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분 해독되는 중이라서 조금씩 알려지고 있다. 벽화, 도자기, 칠기, 목제나 석제, 금속제품 등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기도 한 점도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한자를 참고로 한 서하 문자가 대표적이며, 불교와 유교, 토속신앙 중심의 문화가 발전되었다. 불교를 많이 믿다 보니 불화와 대장경들도 남겼다. 대장경은 서하 문자로 쓰기도 했다.
황제는 송나라의 의관을 쓰지 않고, 흰색 의복에 비늘문양이 달린 붉은 털모자를 쓰는 등 위구르와 토번의 복식에 더 영향을 받았지만 관료들은 대체로 송나라 의복을 따라했다고 알려진다.
회화, 서예, 조각, 음악, 가무에서 전부 뛰어난 실력을 보였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둔황의 막고굴에서 그 자취를 찾을 수 있다. 특히 음악면에서 송, 요, 금을 비롯한 다양한 대국들의 문화를 가져와 고유화시켰기에 문화적인 위상 역시 매우 높았다. 수공업 역시 뛰어나 방직, 제련, 목기 제작, 양조, 도자기 등을 자체 제작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하의 법전인 《천성개구법칙령사서행문》에 기록되어 있다. 도자기 제조에서는 송나라에 비해 한참 뒤쳐져 있었으나 서하 고유의 기법을 활용하여 송의 도자기들과는 다른 형태를 띄었다고 한다.
이웃 나라들의 국경 근처에 교섭 장소를 만들어 무역을 성행시켰고 주요 수출품으로는 소, 말, 양, 낙타, 옥 등이 있었으며 수입품으로는 도자기, 철 등이 있었다. 서역과 맞닿아 있었던 만큼 중개무역의 수익도 높았다고 한다.
건축물은 일부 탑들과 성터, 그리고 서하왕릉(서하황릉)이 있다. 개국 초 때부터 송나라의 장인들을 대거 들여와 황궁을 짓게 했으며 황제를 비롯한 귀족들과 관료들은 지붕에 기와를 얹을 수 있었으나, 양민부터는 지붕에 기와를 올릴 수 없게 법으로 제정했다.
토지는 황실, 귀족 및 관료, 사원, 그리고 농목민들에게 분배되었는데 귀족들의 토지는 대체로 원 부족들이 소유했던 토지였으며, 사원들은 황실로부터 땅을 하사받아 부를 축적했다. 농민들 역시 토지 소유가 가능했는데 서민들이 개간한 토지들은 그들에게 종속되어 영원히 점유되며, 팔 권리가 있다고 《천성년개정신율》에 나와 있다.
상업의 호황으로 인해 화폐가 자주 사용되었으며, 주조된 동전들은 정교하게 주조되었다고 한다. 헌종과 말제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모든 시기에 화폐 주조가 활발했다.
다른 북방 유목민 및 기마민족들처럼 변발을 하기도 했다.
탕구트족 고유의 문화를 중심으로 하여 송, 요, 금, 티베트, 위구르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그 외 서역의 여러 민족들의 문화들도 존재했다.
서하의 관료인들
6. 고려와의 관계
서하와 고려와의 관계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느 정도의 교역이 있었던 걸로 보인다. # 훗날 조선과 베트남의 관계처럼 대국인 송이나 요의 수도로 모인 양국의 사신들끼리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7. 왕사
8. 매체에서
- 슈토헬 - 칭기즈 칸이 서하와 금나라를 정복하는 와중에 서하 문자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을 다루는 만화.
- 선더포스Ⅵ - 뜬금없이 서하 문자가 많이 나온다. 그뿐.
- 징기스칸 4 - 시나리오 1에서 흥경과 돈황 두 도시를 보유한 국가로 나온다. 서하가 멸망한 이후 시나리오에서는 돈황은 몽골 제국, 원, 명의 도시로 남아 있지만 흥경은 몽골에게 완전히 폐도 되면서 빈 땅으로 남아있다.
- 회전사 - 홍콩의 손위군의 만화로, 배경이 서하국이다.
- 천룡팔부 - 서하국의 황후로 이추수가, 허죽의 정인으로 은천공주가 나온다.
- 돈황 - 11세기 초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
- 장군재상 - 서하와 송나라의 대결을 다루는 드라마.
- 크루세이더 킹즈 3 - 1066년에 등장한다. 2대 황제 의종이 나온다.
- 고려거란전쟁 - 당항 사신이라는 이름으로 서하인이 한명 등장하며 고려의 제2차 여요전쟁 승전을 축하해준다.[17] 다만 이때는 아직 서하 건국 이전이었다.
9. 같이보기
[1]
882년
당나라가
이사공을 하국공에 책봉.
[2]
중국티베트어족의
티베트버마어파에 속하는 언어였다.
[3]
phôn¹ mbın² lhi̯ə tha²,
서하문자표기
[4]
문화적인 영향
[5]
조씨는
북송이 하사한 것이었다.
[6]
희하로는 희하난회로로 바뀜
[7]
서하의 양태후가
청야전술을 통해 군량 보급로를 끊었다.
[8]
충악이 수원 부족을 이유로 영락성의 신축을 반대했으나 송신종은 이를 강행했다. 이로 인해 원한을 품은 충악은 영락성이 공격을 받고 있음에도 이를 방관했다. 서하군이 영락성을 공격할 즈음 충악은 이 와중에 죽고 말았다.
[9]
서하군은 이헌과
심괄의 지원군이 영락성을 돕는 걸 막았다.
[10]
왕후는
1106년에 죽었다.
[11]
하황 일대는 서하와 금나라가 동시 관할하게 되었다.
[12]
둘 다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된 탓도 있었지만, 그래도 죽었을 때의 나이는 평균적인 수명 수준은 되었다.
[13]
탁발씨의 변형으로 보인다. 아니면 발음이 그렇게 되어있거나. 원래 서하는 자신들의 본성이 탁발씨라고 여겼으니 따지고 보면 회귀를 한 셈이다. 아니면 먼 방계 출신이거나.
[14]
리페이예는 1934년 10월
칭하이성 러두구 출신으로, 과학 및 컴퓨터 기술 교수이기도 했다. 2011년 11월 1일 병으로 사망했다
#,
#.
[15]
동시기 고려와 비슷한 수치였다.
[16]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사람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6~207쪽
[17]
서하도 고려와 마찬가지로 거란과 국가 존망을 건 대전쟁을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