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 동명인 윤봉길인 배우에 대한 내용은 윤봉길(배우) 문서 참고하십시오.
윤봉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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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 | |||
출생 | 1908년 6월 21일 | ||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초량리 139 (現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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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32년 12월 19일(향년 24세) | ||
일본 제국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 미츠코지야마 서북골짜기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공원 삼의사 묘역 | ||
본관 | 파평 윤씨[1] | ||
호 | 매헌(梅軒)[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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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아명(兒名) | 우의(禹儀) | |
부모 | 아버지 윤황, 어머니 김원상 | ||
형제자매 | 동생 윤성의, 윤영석(윤남의), 윤영의, 윤준의, 윤임의, 윤순례 | ||
배우자 | 배용순 | ||
자녀 |
장남 윤종, 차남 윤경, 장녀 윤안순, 삼남 윤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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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손녀
윤주경[4], 윤주영, 손자 윤주웅 종손 윤주빈[5], 증손 윤행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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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 | 약 180㎝[6] | ||
학력 |
덕산공립보통학교[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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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무종교[8] | ||
조직 | 한인애국단 | ||
의거 | 훙커우 공원 의거 | ||
서훈 | 건국공로훈장 중장 추서 | }}}}}}}}} |
윤봉길 의사의 친필 선언문[전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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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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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출생과 독립운동 투신
1908년 6월 21일, 충청남도 덕산군 현내면 조량리(現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목바리마을)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경주 김씨 김원상(金元祥)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禹儀)이다.11살 때이던 1918년에 덕산공립보통학교(現 예산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조선인으로서 우리말도 마음대로 못 쓰고 외국 말인 일본어를 쓰고 배워야 한다는 것과 꼴도 보기 싫은 일본인 교사 휘하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에 불만이 상당히 많았다.[12] 결정적으로 이듬해 3월 초 3·1 운동을 보고 더 일본인을 증오하게 되어 그 길로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부모에게 폭탄선언을 하고는 자퇴하였다.[13] 물론 그렇다고 완전히 학업을 멈춘 것은 절대로 아니었고, 그 대신 한학을 배우러 서당을 다녔다.
학교를 다니던 도중에는 한 번은 일본인 교사 아래에서 일본어 기초를 배우던 도중 일본인 교사가 「[ruby(私, ruby=わたし)]は[ruby(日本人, ruby=にほんじん)]です。」(나는 일본인입니다.)라는 문장을 따라해 보라고 하였으나 아무도 하지 않자 윤봉길의 짝꿍이 따라하여 보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윤봉길은 방과 후 짝꿍을 뒤뜰로 끌고 나가 떡실신시켰고, 그와 함께 "왜놈 된 기분이 어떠냐? 조선 사람이 왜놈 되려면 얼굴 생긴 것부터 뜯어고쳐야 돼!"라는 명언을 남겼다.
대표적인 일화로 동네에서 글자를 몰라 아버지의 묘소를 찾지 못하는 농부[14][15]를 보고 교육에 뜻을 가져 월진회를 조직해 야학과 강습회를 열어 문맹 퇴치 및 계몽 운동에 힘썼다. '월진회'는 설립 초기에는 계몽 운동 조합으로 운영되었지만 현재는 농촌 체험 마을 사업, 마을 도서관 건립 운동, 윤봉길 문화 축제 등을 추진하며 여전히 활동 중이다. 1944년~1946년까지 '우진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했지만 1946년 다시 월진회로 환원했다. 현재 공식 명칭은 초대 회장이던 윤봉길을 기리는 의미에서 '매헌윤봉길월진회'로 사용한다. 윤봉길은 이후 독립운동에 관심하여 만주 등 지역에서 갖가지 사회 활동을 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16] 한인애국단에 소속되었다. 칭다오에서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일하며 때를 기다렸으나 만주사변 이후 윤봉길은 "죽을 자리가 없어졌다." 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가서 김구와 만났다. 이때 " 이봉창 의사와 같은 일로 써 달라." 고 부탁했다.[17] 그리고 윤봉길은 조국을 떠나며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이라고 말하였다.
2.2. 훙커우 공원 의거
2.3. 수감과 순국
윤봉길의 수감 기록 카드[18] |
다운로드 링크 |
윤봉길 의사의 처형을 준비하는 사진 |
(원문) 襁褓에 싸인 두 兵丁에게 너어도 万一 피가 잇고 뼈가 잇다면 반다시 朝鮮을 爲하야 勇敢한 鬪士가 되여라 太極에 旗발을 놉히 드날니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재와 한 잔 술을 부어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을 아비 업슴을 슬처하 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教養으로 成功者를 東西洋 歷史上 보건대 東洋으로 文學家 孟軻가 잇고 西洋으로 佛蘭西 革命家 나푸레옹 이 잇고 米國애 發明家 에듸손이 잇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여라 (번역문)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가 가르치고 길러 성공한 자를 동서양 역사에서 보건대, 동양에 학자 맹가(孟軻)가 있고 서양에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사진][영상] 윤봉길의 유언. 이 유서는 후에 보물 568-2호로 지정되었다.[21] |
청춘의 제군에게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걸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 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曙色)은 점점 밝아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광풍이 일어날 듯 피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 입고 총 메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사진2] 이 시는 윤봉길이 지은 '청년의 제군'이라는 시이다. |
太極旗下正氣如虹。
多君三千萬衆、
春申江上巨彈殲敵、
愧吾四百兆民。
태극기 아래 정기는 무지개와 같구나.
(조선에) 군자가 많아봤자 3천만일 텐데
춘신강변에서 큰 (폭)탄이 적을 쓸어내니
우리 4억 (중국) 백성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多君三千萬衆、
春申江上巨彈殲敵、
愧吾四百兆民。
태극기 아래 정기는 무지개와 같구나.
(조선에) 군자가 많아봤자 3천만일 텐데
춘신강변에서 큰 (폭)탄이 적을 쓸어내니
우리 4억 (중국) 백성을 부끄럽게 하는구나.
어느 중국인이 쓴 한시
현재 조선은 실력이 없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일본에 반항하여 독립함은 당장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믿는다.[23]
의거 후 일인 경찰의 취조 도중 밝힌 거사 이유
그러나 만약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강국피폐(强國疲弊)의 시기가 도래하면 그때야말로 조선은 독립하고야 말 것이다.
현재의 강국도 나뭇잎과 같이 자연 조락의 시기가 꼭 온다는 것은 역사의 필연의 일로서
우리들 독립운동자는 국가성쇠의 순환을 앞당기는 것으로써 그 역할로 삼는다.
물론 한두 명의 상급 군인을 살해하는 것만으로는 독립이 용이하게 실행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사건 같은 것도 독립에는 당장 직접 효과가 없음을 매우 잘 알고 있지만,
오직 기약하는 바는 이에 의하여 조선인의 각성을 촉구하고
다시 세계로 하여금 조선의 존재를 명료히 알게 하는 데 있다.
현재 세계지도에 조선은 일본과 동색으로 채색되어 각국인은 조선의 존재를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 있다.
그러므로 차제에 '조선'이라고 하는 개념을 이러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새겨 넣는 것은
장래 우리들의 독립운동에 결코 헛된 일이 아님을 믿는다.[23]
의거 후 일인 경찰의 취조 도중 밝힌 거사 이유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는가?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사형은 이미 각오했으므로, 하등 말할 바 없다.
3. 사후
처형 이후 일본군은 "윤봉길의 시신은 화장했다." 고 신문에 보도했지만 사실은 근처 노다 산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 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되었다.광복 이후 김구는 박열, 이강훈에게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유해 발굴을 부탁하였다.
윤봉길 의사의 유해, 처형 당시 묶여 있던 목제 형틀과 이를 발굴한 발굴대원들[실제유해] |
자진 참여 발굴단 중에 다행히도 이시카와현에 살던 재일교포 박성조[25]가 있었다. 그가 소학교 일본인 동창들을 찾아다니며 수소문에 나섰는데 요시다(吉田)라는 동창으로부터 "범인이 총살집행의 뜻을 통고받자 형틀까지 20여 미터를 당당하게 걸어가며 무슨 염불 같은 것을 외우고는 눈가리개는 필요없다고 거부했다. 정말로 훌륭한 태도였다. 총살 때에 진노(甚野)라는 육군 헌병이 입회했다."[26]라는 증언을 들었다.
그 진노라는 헌병의 집을 찾아가자 "헌병이었던 동생은 도쿄에 살고 있는데 연락하겠다. 끝에 동생은 그 때 형무관이었는데 아마 무엇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 하는 답을 들었고, 이튿날 다시 박성조와 만난 진노는 암장 때에 독경(讀經)을 해 준 여승이 있었다고 일러주었다. 그 여승이 바로 노다쵸(野田町)의 사찰 가쿠손인(覚尊院)[27]의 주지로 있던 야마모토 료도(山本了道)[28]로, 야마모토는 자신이 독경을 해 주었던 윤봉길이 묻힌 자리를 기억하고 그 지점을 가리키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었는데 과연 그곳에 윤봉길 의사의 유해가 있었다고 한다. #
추도식장으로 향하는 삼의사[29]의 운구 행렬 |
4. 가족계
4.1. 가계도
- 윤재 (파평윤씨 29세)
- 1남 현영
- 2남 필영
- 3남 진영
- 1남 경
- 2남 황(188? ~ 1950) 妻 김원상(1889 ~ 1952)
- 1남 우의(1908 ~ 1932) 妻 배용순(1907 ~ 1988)
- 1남 종(1927 ~ 1984) 妻 김옥남(1936 ~ )
- 1녀 주경(1959 ~ )
- 1남 주웅(1974 ~ )
- 2남 경(1928)
- 1녀 안순(1929)
- 3남 담(1930 ~ 1938)
- 2남 성의
- 1남 호
- 2남 반
- 3남 용
- 4남 해
- 5남 온
- 1녀 숙
- 2녀 여
- 1녀 순례
- 1남 정좌진
- 2남 정우진
- 1녀 정백순
- 3남 남의(1916 ~ 2003)
- 1남 택
- 2남 주(1947 ~ )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 3남 형
- 4남 임의
- 5남 영의
- 1남 홍
- 2남 범
- 6남 준의
- 1남 태일
- 2남 태림
- 1녀 명숙
- 2녀 문숙
4.2. 상세
1922년, 14세에 자신보다 1살 많은 배용순과 결혼했다.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나 둘째 아들 윤경과 딸 윤안순은 홍역으로 어린 나이에 죽었다. 망명 당시 첫째 아들 윤종은 고작 세 살이었으며, 셋째 아들 윤담은 아내의 뱃속에 있었다.1949년 4월 29일 충남 예산에서 거행된 '윤봉길렬사비' 제막식에 참가한 김구와 윤봉길 유족들이다.
부인 배용순 여사는 의거 이후 계속되는 일제의 핍박과 멸시 속에서도 시부모와 함께 광복의 그날까지 꿋꿋하게 집안을 건사해 나아갔다. 광복 후인 1946년 일본에서 돌아온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맞이하고서도 태평양전쟁과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고향으로 귀향하는 장병들을 보면서 '혹시 저 무리에 남편이 섞여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하염없이 거리를 바라볼 정도로 남편을 그리워 했었다. 배용순 여사는 해방 후에도 40여 년을 더 살아 1988년 향년 80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안타깝게도 살아 있던 아들 둘 중 셋째 아들 윤담은 아홉 살 때 복막염으로 사망하였으며, 첫째 아들 윤종에게서 장손녀 윤주경과 장손자 윤주웅이 나와 윤봉길의 직계를 잇고 있다. 윤주웅은 늦둥이로, 그 위에 윤주경을 포함한 누나 여섯 명이 있다.
장남 윤종은 학창 시절부터 일본인 교사한테 온갖 학대를 당했다고 한다. 매일같이 등교하자마자 "나는 반역자, 흉악범의 자식입니다"라고 크게 외치게 했다고 한다. # 해방 이후에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해 농수산부 공무원직을 역임하였다.
장손녀 윤주경은 새누리당 소속으로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근혜 캠프 인수위에서 활동하였으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하였다. 당시 이정희 후보는 박정희가 만주군 장교였던 것을 언급하며 박근혜 후보에 대해 친일파의 후예라고 공격한 적이 있었는데, 윤주경은 이에 대해 한 채널A와의 인터뷰에서 "이 후보가 박 당선인에게 연좌제를 적용했는데 이는 잘못됐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였다.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은 산업화로 나라가 능력이 생기자 가장 먼저 한 일이 국가유공자 자녀들에게 대학교육까지 무상으로 보내줬다[30]", "참여정부에서 친일파들의 재산을 환수해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뭘 해주는 게 치욕스러웠다. 독립운동가 지원은 국가예산으로 해줘야하는 것이지 그들(친일파 후손)도 부당하다고 하는 재산환수를 통해서 도와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는 발언도 하였다.
장손자 윤주웅은 고려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93학번), 고려대 대학원 기계공학과 석박사통합과정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현대자동차 연구원에서 25년째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증손자 윤호석 역시 미국 명문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
친동생 윤남의[31](1916~2003, 호: 죽파)도 독립운동가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가 순국한 직후 동료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예산공립농업학교(현 국립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에서 공부하다가 일본인 교사들이 한인 학생들을 차별하는 것에 분노해 학우인 정종호, 한정희 등과 함께 독서회(讀書會)를 결성했다. 이들은 항일, 반제국주의 투쟁에 관한 서적들을 윤독, 토론했으며, 문맹퇴치운동과 문자보급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다 독서회장 정종호[32]가 독서회사건으로 체포되자 경찰을 피해 출가하여 해방될 때까지 선의라는 법명으로 승려생활을 해야했다. 친형의 추모사업을 주도하며 살다가 1996년 건국포장에 서훈되었다. 좀 뜬금없이 제주특별자치도에 공덕비가 세워져 있는데 그 이유는 3남 윤형이 제주도에 인연이 있던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서귀포시 표선면에 가지고 있던 땅을 팔아 표선해수욕장에 야자수를 심어달라고 마을에 기부했기 때문이다.
친조카 윤주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을 비롯해 윤봉길연구소 이사장, 윤봉길식량지키기연합 공동대표를 지냈다.
6촌 동생 윤명의(1912~2009) 전 대홍기획 회장은 한국 광고업계 초창기부터 활동해 온 산 증인이며 아들 윤용은 고려대 신방과 교수를 지내다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부회장, 윤봉길식량지키기연합 상임대표 등을 지냈고, 1999년 '부정부패추방시민연합(부추연)' 창설을 주도해 초대 대표를 역임했다. 또한 1992년 14대 총선 당시 무소속으로 동대문갑에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교수 시절 1987년 유진오 빈소 설치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행동하는 지식인'처럼 보였으나, 세월이 흘러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태극기 집회에 여러차례 참가하며 계엄령을 선포해서 촛불 시위대를 죽여야 한다거나 탱크로 밀어야 한다는 등 친박 발언들을 쏟아냈으며 이후에도 태극기 집회에 참가해 극우 세력의 유명인들 중 하나가 됐다.
또 다른 조카 윤홍은 남한에서 사업 실패 후 월북(…)한 경력이 있다. 그러나 북한도 대부분의 월북자를 남으로 돌려보내는 추세라 2013년 판문점을 통해 송환 된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자세한 것은 해당 링크로.
윤봉길의 증손인 윤행복은 2017년 8월 15일 대한민국 육군 홍보영상에 등장하기도 했다. # 당시 포병 병장이었으니 윤행복은 전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배우 윤주빈이 윤봉길 동생(죽파 윤남의)의 손자로 밝혀졌다. 기사
앞서 언급된 장손녀 윤주경 독립기념관장은 박근혜 정부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임기가 불과 4개월 남았음에도 피우진 보훈처장으로부터 독립기념관장직을 사퇴하라는 외압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기사 한편 독립기념관장 사퇴 이후 자유한국당, 현 국민의힘에 영입되었다. 기사 이후 미래한국당[33]으로 옮겨 제21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로 출마해 1번으로 당선되었다.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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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거에 실제 사용된 폭탄은 도시락이 아닌 물통 폭탄이었음에도 불발된 도시락 폭탄[34]이 왠지 모르게 '윤봉길 의사 전용 유니크 아이템' 이미지가 더 강해서 어린 아이들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던 시절 도시락을 던지며 윤봉길 의사 흉내를 내는 장난을 종종 하고는 했다. 이런 가짜 정보가 역사책에 아직도 실려 돌아다니고, 대부분 사람들은 윤봉길 의사가 물통 폭탄을 의거에 사용하였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윤봉길 의사가 사용한 폭탄은 독립운동가
김홍일 장군[35]이 제작한 것이다. <백범일지>에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나오는 김홍일 장군은
이봉창 의사가 사용한 폭탄도 제작했는데 폭탄의 위력 부족으로 이봉창 의사가 실패하자 안타까워하면서 윤봉길 의사가 사용할 폭탄을 열심히 제조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성능 실험에서는 성공적으로 폭발했으나 도시락 폭탄은 터지지 못했다. 이봉창과 윤봉길 폭탄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이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어서 설이 2가지 있다. 하나는 김홍일이 제작했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김홍일이 폭탄 제조자 왕백수(왕바이수)를 소개해주었다는 설이다. 결론은 둘 중 무엇이 맞는지는 모르나 김홍일이 이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는 것은 자명한 듯하다. 그러나 2010년 4월 28일 기사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을 제작한 인물이 공개되었는데 이름은 '향차도'라고 하며 19로군 후원회 병기 책임자였다고 한다. 링크
- 위키백과에서 저격수로 분류되어 있어서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뿐 아니라 현재에도 높은 사람을 어떤 형식으로든 처치하면 대개 '저격'으로 분류된다. 저격(狙擊)[36]의 한자를 생각해 보면 이 저격이라는 행동은 ' 총으로 쏴서 죽였다'는 뜻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안중근이나
이봉창 등의 여타 의사들의 의거 행위는 일본 내에선 공식적으로
테러리스트로서의 판결을 받은 점[37]과는 달리 윤봉길은 테러리스트가 아닌 적 군인으로서의 신분으로 판결을 받은 점은 상당한 특이점이다. 공식 문건에서도 한인애국단을 교전 상대 특공대로 규정한 데다 윤봉길을 산하 특공전투원이라고 표기했으며[38] 저격당한 군인들도 '복무 중 사망'이 아닌 '교전 중 전사'로 규정하며 오히려 일본 측에서 테러임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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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한 일본 군인들을 전사라는 명칭으로 추존하거니와 1차 상하이 사변으로 뒤숭숭한 현지에서 뉴스거리를 축소시키려는 목적으로 추정되지만 윤봉길 또한 되려 군인으로서 추존받게 되어 버리는 점이 참으로 기묘하다.[40] 안중근 의사에게 교수형이 선고된 것과 달리 총살형으로 생을 마감한 것도 이러한 의식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41]
- 가끔 윤봉길의 폭탄 투척 직전이 촬영된 사진이 있다고 얘기하는 몇몇 사이트들이 있는데 가능성은 거의 없다. 사진을 보면 윤봉길이라 추정되는 사람이 단상 앞에 위치해 있는데 실제로는 단상 앞이 아니라 뒤에서 폭탄을 던졌다. 게다가 사진을 보면 중절모를 쓰고 있는데 그 당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중절모를 쓰고 있었다는 발언은 단 한 마디도 없다. 고로 이 사진에 찍힌 사람은 윤봉길이 아니라 그냥 다른 행인일 수도 있다.
- 국가보훈처와 충청남도가 윤봉길 의사 관련 홈페이지인 충효넷의 계약을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다가 일본 성인 사이트(…)가 먹어 버리기도 했다. 현재는 warning.or.kr로 넘어간다.[42]
-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현재의
롯데그룹과 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는
시게미츠 하츠코라는
일본인 여성과 1945년 결혼했는데 시게미츠 하츠코는
시게미츠 마모루[44]의 조카라는 설이 있다. 신격호 명예회장은 2020년 사망시까지 일본 내에서 굳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 이름도 안 쓰고 시게미츠란 일본 성씨를 쓰는데 일본 국적 취득 당시 아내 시게미츠 하츠코의 성씨를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45] 시게미츠 하츠코는 신격호 창업주의 둘째 아내이자
신동빈 그룹회장과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어머니이다.
한편 롯데그룹에서는 이 사실에 대해 그동안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다가 2015년 신동빈과 신동주의 경영권 분쟁으로 롯데그룹과 일본과의 연관성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면서 한국 내 여론이 악화되자 이 부분을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롯데그룹은 오히려 시게미츠 하츠코가 남편의 성씨를 따랐다고 주장하는데 근거 자료를 내세운 것은 아니기에 단순히 이미지 메이킹/ 언론플레이인지 아니면 정말 전범 집안과의 연관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이 되지 않았다. 어느 쪽이 정말 진실인지는 정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에 알 수 없는 상황.
사실 시게미츠 하츠코는 사태 후에도 살아있고 경영권 분쟁 당시 김포공항으로 입국할 때 국내 기자들과 대면한 적도 있다. 시게미츠 하츠코가 명확하게 사실을 확인해주면 결론이 나겠지만 특별히 부인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롯데그룹의 해명과는 별도로 아직 명확한 진실은 알 수가 없다. 논란이 커지자 롯데그룹에서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 후원을 했는데 10억 원을 쾌척했음에도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측에서는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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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미주리 함 함상 항복을 다룬
미국 기록영화에서 시게미츠 마모루의 다리를 앗아간 "한국인 애국자(Korean patriot)로 언급되었다. 뉴스릴 영상 2분 10초경을 들어보면
They are headed by Agent Mamoru Shigemitsu, Foreign Minister of the Japanese surrender Cabinet, who was wounded by a Korean patriot in Shanghai years ago and walks on an artificial leg.
'일본 대표단을 이끄는 시게미츠 마모루는 몇 년 전 상하이에서 한국의 애국자에 의해 부상을 입었으며, 현재 그의 한쪽 다리는 의족입니다'
라는 언급이 나온다.
- 형제들에게는 엄하면서도 자에로운 형이었다. 망명하기 전까지 9년간 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는데 이해하기 쉽게 가르쳐주었음에도 대답을 하지 못하면 목침을 던지며 화를 내는 등 무섭게 대해도 다음날 안아주는 성격을 지녔다고 한다.
6. 보물 윤봉길 의사 유품
선서문 | 회중시계 | 월진회통장 |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뒤 항일 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 수뇌부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6.1. 1972-1
대한민국 보물 |
윤봉길의사 유품(1972-1) |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2-1) (尹奉吉義士 遺品(1972-1))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종목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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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서문
선서문
1. 선서문(尹奉吉義士 遺品-宣誓文)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는 것을 직접 손으로 쓴 선서문이다.
이 글의 크기는 가로 21.5㎝, 세로 27㎝이다. -
윤봉길의사 이력서 및 유서
이력서 및 유서
2. 윤봉길의사 이력서 및 유서(尹奉吉義士 遺品 - 尹奉吉義士 履歷書 및 遺書)는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1931년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손으로 직접 쓴 이력서와 유서이다.
유서는 펜글씨로 씌여있고, 크기는 가로 16.5㎝, 세로 29㎝이며, 1책 17매이다.
6.2. 1972-2
대한민국 보물 |
윤봉길의사 유품(1972-2) |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2-2) (尹奉吉義士 遺品(1972-2))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종목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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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중시계
회중시계
1.회중시계 : 상해(上海)의 홍구공원(虹口公園)으로 떠나는 날 아침 김구(金九) 선생과 바꾸어 찬 낡은 시계인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몸에 지닌 유품(遺品)이다 지름 5㎝, 줄길이 30㎝, 두께 1㎝, 스위스제(製)이다. -
지갑부중국화폐
2.윤봉길의사 유품-지갑부중국화폐(尹奉吉義士 遺品-지갑附中國貨幣)는 중화민국건국기념폐인 1원은화 3개, 광서원보인 칠전이분 1개, 이십원지폐인 2각화폐 1매, 이십원동전인 2박주전 5개가 있으며, 지갑의 크기는 가로 7㎝, 세로 11.5㎝이다. -
윤봉길의사인[46]
3.윤봉길의사인(尹奉吉義士 遺品-尹奉吉義士印)은 골각에 '윤봉길신’이라 새긴 것으로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치를 당시의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이다. -
손수건
4.윤봉길의사 유품(尹奉吉義士 遺品)-손수건은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인 손수건으로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치를 당시에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이다. -
안경집
5.윤봉길의사 유품-안경집(尹奉吉義士遺品 - 眼鏡集)은 홍구공원에서 거사를 치를 당시에 몸에 지니고 있던 유품으로, 사다리꼴의 형태로 되어있다. -
일기
6.윤봉길의사 유품-일기(尹奉吉義士 遺品-日記)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일기이다. 이 일기는 윤봉길의사가 직접 묵으로 쓴 것으로, 각 11행이며 27매 1책으로 되어있다. -
월진회창립취지서
7.윤봉길의사 유품-월진회창립취지서(尹奉吉義士 遺品-月進會創立趣旨書)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윤봉길의사가 월진회를 창립하면서 직접 묵으로 쓴 문서이다. -
농민독본
8.윤봉길의사 유품-농민독본(尹奉吉義士 遺品-農民讀本)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 가운데 하나로, 어린아이들에게 글을 깨우치고자 펴낸 농민계몽서이다. 교과서 제1권 8과, 제2권 7과로 되어있으며, 2권 모두 프린트한 것이다. -
형틀대
9.윤봉길의사 유품-형틀대(尹奉吉義士 遺品-刑틀臺)는 1932년 12월 29일 일본대판위수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할 때 윤봉길의사를 묶어 세웠던 것이다. -
편지
10.윤봉길의사 유품-편지(尹奉吉義士 遺品-便紙)는 이 편지들은 총 4통으로 되어 있으며, 충의사에 보관되어 있다.
6.3. 1976
대한민국 보물 |
윤봉길의사 유품(1972-2) |
보물 윤봉길의사 유품(1976) (尹奉吉義士 遺品(1976)) | 국가문화유산포털 | 문화재 종목별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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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진회통장
월진회통장
1. 월진회통장(月進會通帳)-행자수부정(行字數不定) /수량:1매/규격:14.8㎝×17.3㎝/연대:1929년 -
월진회기
2. 월진회기-규격-수량:2매/규격:87.5㎝×131.5㎝ /연대:1929년 -
편지
3. 편지-수량:2매/규격:16.8×125.4㎝/연대: 1931~1932년 -
부흥원대들보
4. 부흥원대들보-수량:1점/규격:길이252㎝, 지름10㎝/연대: 1926~1932년 -
선언사진
5. 선언사진-수량:1매/연대:: 1926~1932년 -
벼루
6. 벼루-수량:1점/규격: 가로11㎝,세로19㎝,두께3.5㎝/연대: 1926~1932년 -
모필통
7. 모필통-수량:1점/규격:높이12㎝,밑지름8㎝,윗지름8㎝/연대: 1926~1932년 -
연적
8. 연적-수량:1점/규격: 세로6.3㎝,가로4.5㎝,높이2.5㎝/연대: 1926~1932년 -
책판
9. 책판-수량:1점/규격: 세로59㎝,가로89㎝,높이37㎝/연대 : 1926~1932년 - 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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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
-가)옥타(시집)-수량:1책/규격: 25.1×19.2㎝/연대: 1920~1930년 -
한시집
-나)한시집-수량:1책/규격: 25.0×19.1㎝/연대: 1920~1930년 -
순운대편
-다)순운대편(서간문-수량:1책/25.1×19.2㎝/연대: 1920~1930년 -
염락
-라)염락(시집)-수량:1책/규격: 25.1×19.2㎝/연대: 1920~1930년 -
임추
-마)임추(시집)-수량:1책/규격: 21.5×19.2㎝/연대: 1920~1930년 -
홀기
-바)홀기(예문집)-수량:1책/규격: 36.7×17.3㎝/연대: 1920~1930년 -
명추
-사)명추(시집)-수량:1책/규격: 22.5×15.0㎝/연대: 1924년 -
명심보감
-아)명심보감-수량:1책/규격:22.8×21.7㎝/연대: 1920~1930년 -
위친계취지서
11. 위친계취지서-수량:1매/규격: 23.6×52.3㎝/연대: 1929년 -
연상
12. 연상-수량:1점/규격:세로24.5㎝,가로17㎝,높이33.5㎝/연대: 1926~1932년 -
담배함
13. 담배함-수량:1점/연대:1926~1932년 -
주발대접
14. 주발대접-수량:2점/놋합 규격: 높이8㎝, 윗지름12.7㎝, 밑굽지름 7㎝, 뚜껑지름 13.5㎝,뚜껑 높이 3㎝,
두께 3㎜,/대접 규격: 높이5.5㎝, 윗지름15.5㎝,밑굽지름 17.3㎝,, 두께 3㎜ -
수 저
15. 수 저-수량:1조/숟가락 규격: 길이 21.3㎝, 넓이 4.8㎝, 대넓이 8㎜, 젓가락 규격: 길이 21㎝/연대: 1926~1932년 -
놋대야
16. 놋대야-수량:1점/규격: 윗지름 38.5㎝, 밑지름 33㎝, 높이 10㎝, 두께3㎜/연대:1926~1932년 -
등잔대
17. 등잔대-수량:1점/규격:높이 39㎝, 대각 8각형의 지름20㎝, 원통대지름:3㎝/연대:연대: 1926~1932년 -
편지봉투
18. 편지봉투-수량 3점/①:4.8×7.2㎝, 편지봉투②: 8.0×18.4㎝, 편지봉투③: 7.5×13.0㎝
7. 관련 단체
-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 매헌윤봉길월진회
- 윤봉길식량지키기연합
- 윤봉길연구소
8. 대중매체에서
- 1947년에 계몽문화협회의 주도로 전기영화 《윤봉길 의사》를 제작한 바 있는데, 윤봉춘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배우 이경선과 고춘반, 정영희, 조희선, 성경수 등이 출연했다. 필름과 대본은 소실됐으나 한국영상자료원에 스틸 1장과 인쇄광고 2점이 남아 있다.
- 1960년작 영화 《아아 백범 김구선생》에서 배우 윤일봉이 연기했다.
- 1967년작 영화 《일본제국과 폭탄의사》에서는 배우 박노식이 연기했는데, 1969년작 영화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79년작 KBS-TV 《일요사극 맥》 '벼랑 위의 파수병(2부작)'에서는 배우 남성식이 연기했다.
- 1984년작 MBC 드라마 《조선총독부》에서는 배우 정성모가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서는 배우 이한승이 연기했다.
- 1986년작 MBC 광복절 특집드라마 《그의 아내》에서는 배우 박영규가 연기했다. 특이한 것은 윤봉길이 아닌 그의 아내 배용순이 주인공이다. 이 작품은 배용순의 회고를 바탕으로 제작한 드라마이며 당시 생존해 있던 실제 배용순도 얼굴을 비춘다. 극본은 〈 제1공화국〉을 맡았던 김기팔, 연출은 황인뢰 PD가 각각 맡았으며 배용순 역은 배우 김용선이 연기했다.
- 1986년 12월 서울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초연된 창극 《윤봉길 의사》에서는 은희진 명창이 연기했다. 극본은 허규, 연출은 손진택, 작창은 김소희, 안무는 국수호 등이 각각 맡았다.
- 1989년작 MBC 특집드라마 《백범일지》에서는 배우 박영태가 연기했다.
- 1992년작 윤봉길 의거 60주년을 기념한 MBC 특집 드라마 《매헌 윤봉길》에서는 배우 김상중이 연기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상물에서는 자주 나왔지만, 윤봉길 의사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은 이 작품뿐. 극본은 이재욱, 연출은 정세호 PD가 각각 맡았으며 김구 역은 배우 정욱이 맡았다.
- 1995년작 KBS 광복 50주년 기획드라마 《김구》에서는 배우 차광수가 연기했다.
- 팩션 웹소설 《재벌강점기》에서는 소년 윤우의로서 일본 몰락 작전에 가담. 1925년 8월 15일에 히로히토 섭정의 연설이 열리는 도쿄 사쿠라다문 광장에 진짜 도시락통을 들고 들어온 뒤[47], 어진 측에서 띄운 애드벌룬을 향해 총을 쏴서 엔화가 광장에 흩어지게 만든다.
- 대체역사물 한국 독립 전쟁에서는 사쿠라다몬 의거가 성공함에 따라 일본의 내분이 폭발해 혼란에 빠진 조선에 잠입, 훙커우 공원이 아닌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져 조선총독과 친일귀족을 폭사시킨 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며, 한인애국단이 통제 불능의 혼란이 이어지는 조선에 기습 상륙해 서울을 점령하자 서대문형무소가 해방되며 여운형과 함께 구출된다.
- 2001년작 영화 《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선 프롤로그에서 훙커우 공원 의거가 실패하며 현장에서 사살됐다고 언급된다.
- 2018년 11월 18일 KBS가 윤봉길의 탄신 110주년을 맞이해 《 열린음악회》를 열었다.
- 2019년 6월 22일 MBC 특별기획 드라마 《 이몽》 제28회~제29회에서는 배우 이강민이 연기했다.
- 2019년 6월 23일 KBS1 《 역사저널 그날》에서도 다뤄졌다.
- 2019년 10월 27일 MBC 예능 프로그램 같이펀딩에서 윤봉길 의사를 다뤘다.
9. 관련 문서
[1]
판도공-제학공-공간공파 32세손 ○의(○儀) 항렬.
[2]
이후 양재시민의숲 명칭이 윤 의사의 호를 딴
매헌시민의 숲으로 변경되었다.
[3]
박승직과 호가 같다.
[4]
제8대
독립기념관장,
제21대 국회의원
[5]
2019년 3·1절 100주년 기념식에서 편지를 낭독했다.
[6]
양재동에 있는
매헌기념관 내의 실물 크기 윤봉길 동상. 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지 무려 그
김구와 키가 비슷한 장신이다.
[7]
現 예산 덕산초등학교.
[8]
일본 경찰의 취조에서 종교를 묻는 질문에 나는 종교가 없지만 굳이 말하자면
불교라고 밝혔다. 윤봉길 본인이 쓴 일기인 매헌일기(梅軒日記)에도 자신이 만 21세가 되는 해에 해당하는 기사년(1929년)에 동서양의 온갖 연호를 표기하는 가운데(심지어 일본식
황기까지 日紀라는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불기 2597년이라고 불기를 표기하기도 하였다.
# 또한 오치서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도 강의가 없을 때는
수덕사에 가서
만공의 법문을 듣기도 했다는 증언이 있다(출처: 이태복 《윤봉길 평전》).
[전문]
선서문.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祖國)의 독립(獨立)과 자유(自由)를 회복(回復)하기 위(爲)하야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一貟)이 되야 중국(中國)을 침략(侵略)하는 적(敵)의 장교(將校)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盟誓)하나이다.
대한민국(大韓民國) 14년(十四年) 4월(四月) 26일(二十六日) 선서인(宣誓人) 윤봉길(尹奉吉)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 앞
[10]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
다대포에서 벌어진 다대포 전투의 지휘관이었던
윤흥신 장군의 12대손이다.
[11]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의 병기역명인 '매헌'이 윤봉길 의사의 호에서 온 것이다. 인근에
윤봉길 의사 기념관이 있어서 붙여진 것. 이후 양재시민의 숲은
매헌시민의 숲으로 이름을 바꿨다.
[12]
게다가 교장도 일본인이었다.
[13]
물론 부모는 말렸지만 윤봉길은 기어이 본인의 뜻을 밀어붙였다.
[14]
농부가 문맹인지라 글을 읽지 못 하니 근처 묘소들에 꽂힌 묘비(무거운 돌로 된 비석이 아니라 비석을 세우기 전 임시로 세워두는 껍질을 깎은 굵직한 나무막대)들을 모조리 뽑아와 윤봉길 앞에 내려놓고 확인해 달라고 부탁했다. 농부로부터 아버지 이름을 들은 윤봉길은 금방 그것이 적힌 묘비를 찾아내고 "근데 이거 어느 무덤에서 가져왔는지 아슈?" 하고 물었는데, 농부는 그제서야 뭔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아버지의 묘를 영영 잃어버렸다며 통곡했다고 한다. 아버지 묘를 찾자고 다른 무덤에 있는 묘비까지 몽땅 뽑았고 설상가상 위치 표시도 하지 않았으니 다른 묘소들의 묘비마저 영영 못찾게 된 어처구니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15]
중학교
교과서에 실린 일화 중에는 길을 가다가 얼굴 한쪽이 흉하게 짓무른 여자아이를 보고 놀라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 어릴 때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을 아이의 어머니가 어디서 선인장을 구해다 짓이겨서 눈에 바르면 다래끼가 낫는다는 말을 듣고 와서 그대로 했다가 그만 부작용만 나서 얼굴 한쪽이 완전히 짓무르고 말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교육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도 있다.
[16]
불교계에서는 이때 윤봉길을 김구에게 보낸 인물이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한용운과 함께 불교계 대표로 나섰던
백용성이었다고 주장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점은 백용성의 제자였던 도문이라는 승려의 구술 말고는 입증할 만한 명확한 증거가 없다.
#
[17]
배경식 교수는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와 개정판인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에서 윤봉길 의사가 김구를 찾아갔음이야말로 대의 수확이라고 주장했다.
[18]
이명(異名)란에 희의(熙儀)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오류이다. 윤봉길의 본명은 우의(禹儀)가 맞다.
[사진]
[영상]
[21]
매헌 윤봉길의 유서는
대한민국이
해방된 이후 27년 뒤, 광복절 하루 뒤인 1972년 8월 16일에 지정되었다.
[사진2]
[23]
일부 독립운동에 회의적이거나 수정주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직접적인 독립을 쟁취해내지 못했단 것을 이유로 독립운동의 의의를 헛된 것이라 폄하하지만, 이 취조를 통해 윤봉길 의사가 독립운동을 하던 때에도 직접적인 독립은 불가능할 것 쯤은 알고 있었으며, 그럼에도 독립운동을 통해 동포와 후손들에게 독립의 시기를 앞당기고 세계에 조선인이 있음을 알리기 위함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실제유해]
[25]
2020년 1월 28일에 일본 카나자와시에서 향년 96세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 그의 동생 박인조는 윤봉길 의사가 암매장되었던 자리를 보존하고 관리하자는 모임인 <윤봉길암장지보존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는데, 지금은 박성조의 아들인 박현택이 회장을 맡았다.
#
[26]
일본 이시카와 현립도서관에 소장된 키타쿠니 신문(北國新聞) 1932년 12월 2일, 4일자에는 윤봉길의 감시를 맡은 상등병 진노(甚野)의 인터뷰가 실렸다. 진노 상등병은 자신은 훙커우 공원 의거 때에는 전선에 나가 있어서 몰랐고 구금소에서 처음으로 윤봉길을 보게 되었으며, 자신이 감시했던 윤봉길의 모습에 대해서 "말이 없는 편으로 결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참으로 태연한 태도로 주눅들기는커녕 오히려 '일본 역사에도 내 이름이 남게 되었으니 만족한다'는 말까지 했다." 라고 한다. 그러면서 빨리 자신을 죽여주면 된다고
독일어로 말을 했다고 한다.
[27]
1910년에 세워진 석가모니를 본존으로 하는
조동종 사찰로 지금도 일본에 남아 있다. 주소는
이시카와현
카나자와시 노다쵸(野田町) 고카츠(後割) 26.
#
[28]
1992년에 입적했다.
[29]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0]
(의도까지야 알 수 없어도)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본격적인 지원은
박정희 시절에 시작된 게 사실이다.
이승만 시기엔 이승만 본인이 독립운동가(정확히는 본인 파벌 외의 다른 독립운동가)를 은근히 견제하는 분위기가 있었던 데다 전후 폐허에서 다들 배고파서 굶어죽는 판에 독립운동가라고 해서 특별히 우대해 줄 국가적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김구와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의 서훈이 된 연도가 196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다.
[31]
집안에서 불리던 이름은 윤영석이다. 윤 의사가 고향으로 보낸 편지에서 영석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되는 인물이 이 사람이다.
[32]
월진회 초대 이사이기도 했다.
[33]
이름을 봐도 알겠지만 미래통합당과 관련이 있는 정당이다. 이 당이 창당된 이유는
연동형 비례대표제 항목 참조.
[34]
자결용이었다. 꺼내기도 전에 잡혀서 못 터트린 것.
[35]
광복 이후 대한민국에서 대한민국 육군
중장까지 진급.
박정희 정권에서
외무부장관을 지냈다.
[36]
노릴 저 칠 격: 노리고 겨냥하여 총을 쏘거나 치는 것
[37]
안중근 본인 스스로도 대한의군 참모총장으로서의 군인 신분을 내세우며 테러리스트가 아닌 군인으로 판결해 줄 것을 요청했고 총살형을 요구했지만, 기각된 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38]
같은 한인애국단이던 이봉창은 특공대로 규정되기 전이라 군인으로서의 취급은 받지 못했다. 애초 이봉창이 한인애국단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리게 해 준 장본인이었으니 일본에선 단체에 대한 탐구가 안 되었을 법하다.
[39]
일본 육군성 인사국이 1932년 9월 외무성에 제출한 '상하이의 천장절 식중 폭탄흉변사건' 中
[40]
다만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조선의 테러리스트라고 등록되어 있다.
[41]
전통적으로 서구에서 군인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는 전쟁에서 사용하는 무기로 처형하는 것이 명예롭게 여겨졌다. 그래서 과거에는 검으로 목을 베었고(이 때문에 만약 상대를 욕보이고 싶다면 도끼로 참수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신분고하의 구분 없이 참수형을 도끼로만 집행하던 영국 같은 사례가 있긴 했지만) 현대에는 총살형을 집행한다. 이러한 관행은 개항 이후 일본 등 아시아 국가로도 이어졌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소련 측
판사 니키타 이오첸코가 "이런 인간 말종들에게 총살형 같은 명예로운 벌을 내릴 수 없다"며 전범들에게
교수형을 선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기인한다. 서구 측 판사들은 원래는 총살형을 고려했으나 딱히 소련 측에 크게 반발하지도 않아서 그대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여담으로 이에 상심한
헤르만 괴링은 몰래 들여온 독약으로 자살했다.
[42]
도중에
튀르키예의 도박 웹사이트로 넘어갔다가 버려졌다. 2023년 11월 27일 기준으로 조회하면 도메인 삭제중이라고 뜬다.
[43]
1850년에 창립되어 1957년에
파산해서 사라졌으나 2021년에 부활했다.
[44]
시게미츠 마모루는 주중 공사였던 1932년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에게 폭탄을 맞아 다리를 잃었으며 그 후 의족을 사용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항복 문서 조인식에
일본 외무대신으로 참석해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인물이며
도쿄 전범 재판에서 형을 확정받은 A급
전범이었으나
6·25 전쟁 와중에 사면된 것으로 알려졌다.
[45]
허나 이 주장은 조금 무리가 있다고 보아야 맞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2015년 8월 5일 기사는 《월간중앙》 1976년 6월호에 실린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기사를 인용하여 신격호 창업주의 본관인
영산 신씨와 뿌리가 같은 '영월 신(寧越 辛)'씨는 중광(重光; 시게미츠), 신도(辛島; 카라시마)'로 창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제로 辛(매울 신)의
고갑자가 '重光'이기도 하고
신상묵(辛相默)의 창씨명도 시게미츠 쿠니오(重光國雄)였으며 독립유공자
신동하(辛東夏)의 창씨명 또한 '重光'을 사용한 '重光東夏'였기에 신격호가 아내의 성씨를 따랐다는 주장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46]
윤봉길의 사인(sign)이 아니고 윤봉길의사 인(印)이다.
[47]
나중에 순사가 이 도시락통을 보려고 몸싸움을 했다가 진짜 도시락인 걸 알고 난 뒤, 모리 순시가 자기 삼촌이라니까 겁에 질려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