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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12-21 02:20:41

중산함 사건

中山艦事件
Zhongshan Incident
파일:external/60-250-180-26.hinet-ip.hinet.net/14-001.jpg
사건의 발단이 된 문제의 중산함

1. 소개2. 배경
2.1.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2.2.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갈등
3. 전개
3.1. 중산함의 출항3.2. 3.20 정변3.3. 키산카의 추방3.4. 왕징웨이의 외유3.5. 당무정리변법
4. 분석
4.1. 공산당 음모론4.2. 우파 음모론4.3. 사실 좌파 토사구팽?4.4. 사실 그냥 우연?
5. 결과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소개

1926년 3월 20일, 국민당의 권력구도를 통째로 바꿔버린 정변. 3.20 사건, 3.20 정변이라고도 부른다. 중화민국 측에서는 공산당이 장제스를 납치하기 위해 수작을 벌이다 발각된 것이라 주장하고 공산당 측에서는 장제스가 공산당을 공격하기 위해 조작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의 주모자와 원인이 누구인지는 아직까지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며 어느 쪽이 확고히 맞다고 단정 짓기 어려운 상태다.

2. 배경

2.1.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

황포군관학교 교장 장제스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수사, 쉬충즈 숙청 등을 통해 왕징웨이의 집권을 도왔고 중국 국민당의 제일가는 군사 실력자로 성장하게 되었다. 광동 동부의 천중밍을 상대로 한 2차례의 동정에서 장제스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어 천중밍을 완전히 축출했다. 장제스는 원래 국민당 좌파나 공산당원에게도 명망이 높은 사람이었고 쑨원이 연소용공에 찬성한다는 것을 알자[1] 연소용공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왕징웨이 집권에도 협조했다. 소련 고문들은 장제스가 '너무나 쉽게 격정에 휩싸이고 난 뒤 똑같이 너무나 쉽게 의기소침해져 중용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냉정함과 확고부동한 면이 부족하다'며 일부 혹평을 하기도 했지만 그를 국민당의 자코뱅파, '파탄의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긴밀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이 덕에 1926년 1월 1일 개최된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 다음으로 많은 표를 얻어 중앙집행위원회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정치적 입지를 닦은 장제스는 펑위샹에 맞서 장쭤린 봉천군벌, 우페이푸 직예군벌, 옌시산 염계군벌이 연합하여 일으킨 직봉풍전쟁을 보고 북방 군벌들이 내분에 휩싸여있는 틈을 타서 쑨원의 유지였던 북벌을 시행하자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하지만 공산당과 소련은 국민당의 기반과 노동자, 농민 정책의 실시가 불충분하여 북벌을 실행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였고 이에 장제스의 북벌 주장을 반대했다. 그리고 장징장을 비롯하여 국민당 우파와의 관계가 상당히 돈독했고 서산회의파 제명에도 반대한 장제스의 성분을 의심하는 과격한 공산당원들은 장제스의 존재를 방해물로 여기고 장제스에 대한 반장, 도장 분위기를 연출하며 장제스를 비난했다. 북벌에 가장 반대하는 사람은 수석 군사고문인 키산카[2]로, 그는 노골적으로 북벌에 반대하며 북벌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장제스를 배제하고 왕징웨이와 다른 군사 실력자들을 지원했다.

북벌 문제와 키산카와의 갈등으로 장제스와 공산당의 갈등이 심해졌고 불안한 조짐이 보였다. 3월에 들어서자 정치주임 교관 고어한이 황포군관학교가 혁명적이지 않다는 비판을 하였고 노골적으로 "우리 단체 안에도 한 사람의 돤치루이가 있다. 북방의 돤치루이를 타도하려면 먼저 이쪽의 돤치루이를 타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2월 3일, 장제스와 돈독하던 미하일 보로딘이 본국의 소환에 따라 귀국한다는 구실로 중국 북방으로 이동하고 적대적인 키산카가 소련 고문단장이 되자 장제스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3월 7일, 군교 교육장 덩옌다가 장제스를 비방하는 삐라가 등사 인쇄되어 배포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3] 장제스의 공식 전기에 따르면, 이때 장제스를 노린 두 차례의 암살 시도가 행해졌다고 한다. 공산당의 갈등을 비롯한 정치적 난관으로 인해 장제스는 극도의 불안감과 피로를 호소하며 정치에 대한 환멸을 드러내었고 중산함 사건 직전에는 산터우로 가서 요양할 것을 준비하기도 하였다. 장제스의 비서가 된 천리푸는 장제스가 조울증과 분노 조절 장애에 시달린다고 평가했을 정도였다.

2.2.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갈등

공산당의 북벌 반대에 분노한 장제스는 2월 1일 국민혁명군 총감 임명을 거부하고 2월 2일, 광저우 위수사령관 및 군사위원회 위원 자리도 사직하겠다고 나섰다. 왕징웨이가 이에 답하지 않자 2월 27일, 장제스는 왕징웨이를 찾아 사직서의 수리와 북벌에 반대하는 키산카의 귀국 중 택일하라고 요구했다.
"혁명의 실권을 소련인의 손에 넘길 수는 없습니다. 코민테른과 제휴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일정한 한계가 있어야 하며, 자주적인 입장을 잃어서는 안됩니다."

장왕관계의 악화는, 단순히 귀 얇은 왕징웨이가 키산카 등 소련 고문의 말에 혹하여 북벌을 외면한다는 장제스 측의 주장보다는 더 복잡한 정황이 있었다. 당시 국민당 내부에서 장제스가 가장 강력한 군사실력자임을 사실이었으나 탄옌카이, 리지선, 주페이더을 비롯하여 무시할 수 없는 군사실력자들이 존재했다. 왕징웨이는 이들 사이를 중재하며 권위를 행사하곤 했는데 이는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장제스에게만 의존할 수 없었던 왕징웨이가 여러 군사실력자들을 포섭하여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으려 한 것이다. 게다가 왕징웨이는 이러한 군사적 권위의 확보를 키산카와 협력해서 행했고 장제스는 왕징웨이의 이러한 움직임에 대노하며 그 의도를 의심했다.

2월 중순, 장제스는 정치적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소련을 방문하기로 결심하고 이 문제를 왕징웨이와 상의했다. 왕징웨이는 소련 외유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장제스는 문건을 정리하고 여행비를 홍콩 달러로 환전한 다음에 부두로 향했다. 그때 차 안에서 비서 천리푸가 어째서 광저우에 머무르지 않은 상태에서 이 난관을 타개할 수 있느냐고 물었고, 이에 마음이 바뀐 장제스는 집으로 가자고 했다가 다시 차를 부두로 향하게 했다. 그러자 천리푸가 강하게 물었다.
"만일 우리가 떠나면 누가 사령관 직책을 이어받습니까?"

장제스는 이번에는 단호하게 돌아갈 것을 결정했다. 장제스는 자신이 소련 외유를 취소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이때, 만일 내가 광동을 떠나지 않으면 뜻밖의 사건이 발생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사직이 정식으로 승인되지 않았다. 만일 스스로 광동을 떠나면 직무를 포기하고 달아난 죄를 입게 되는 것이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친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소련이 합작하여 자신을 제거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게 되었다.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충돌이 격화된 사건은 왕마오궁(王懋功) 사건이었다. 원래 왕마오궁은 쉬충즈의 부하 출신으로, 쉬충즈 숙청 이후 제1군 2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장제스는 그를 광저우 위수사령관 대리로 임명할 정도로 신뢰했었다. 그런데 왕징웨이와 키산카가 왕마오궁에게 접근하여 그에게 3만원의 군비를 지급하자 격분한 장제스는 왕마오궁이 키산카의 사주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고 주장하며 2월 26일, 왕마오궁을 체포하여 2사단장 자리에서 해임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마오궁 사건을, 장제스가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경고로 해석하고 있다.

3. 전개

3.1. 중산함의 출항

장제스와 왕징웨이, 공산당의 갈등이 깊어지던 가운데 중산함이 출항했다. 중산함은 원래 영풍함 사건 때 쑨원의 목숨을 구할 때 결정적인 공을 세운 기함인 영풍함으로 쑨원 사후 그를 기리기 위해 중산함으로 개명되었다.

사건의 문제가 된 중산함이 출항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26년 3월 18일 오후 6시, 황푸군관학교 교통계 직원 리스융이 교장판공청 주임 쿵칭루이에게서 상선 한척이 토비들의 습격을 받았으니 순시선 1척과 위병 16명을 파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리스융은 광저우의 황푸군관학교 사무실에 전화해 순시선 파견을 요청했고 광저우 판사처 교통계 직원 왕쉐천이 이를 교통계장 어우양중에게 보고했다. 이때 전화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에 왕쉐천은 요청의 주체가 교육장 덩옌다라고 생각하여 보고하고 해군국에 교섭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교섭을 기다리지 않고 순시선 1척을 파견하였다.

해군국을 찾아간 어우양중은 마침 자리를 비운 해군국장 리즈룽 대신에 해군국 참모청 작전과장 쩌주이에게 자신의 직원이 교육장으로부터 교장의 명령을 전달받았다고 하면서 병함 2척을 황푸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이 말을 들은 쩌우이는 상황이 급박할지도 모른다 여겨 보벽함을 황푸로 파견한 다음에 리즈룽에게 편지를 보내 사정을 알리고 중산함과 자유함 두척 중 어느 배를 보낼 지 결정해달라고 하였다. 리즈룽은 자유함을 파견하기 위해 함장 셰충젠과 접촉했으나 자유함이 수리 중인지라 중산함을 보내기로 하고 어우양중에게 정식 공문서를 보낼 것을 요청했다. 그리고 보벽함과 중산함 함장에게도 공식 명령서 교부를 요청했다. 이 과정을 살펴보면, 순시선 한척 파견 요구가 병함 두어척 파견 요구로 바뀌고, 교장판공청 주임의 요청이 교육장을 통한 교장의 명령으로 바뀐 것이 보인다.

8시 30분, 해군국으로 돌아온 어우양중이 10시에 황푸로 전화해 해군국과 교섭하여 병함(보벽함) 1척을 보냈으니 12시 쯤 도착할 것인데 보초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조치해달라고 전했다. 중산함은 19일 오전 7시에 출항, 황푸에 도착했다. 황푸에 도착한 후 대리함장 장퉁신은 교육장 덩옌다를 만나려 했으나 그가 바빠 부관 황전우를 대신 만났다. 장퉁신은 황전우에게 리즈룽의 명령서를 황전우에게 보여주고 장제스의 명령을 받으러 왔다고 했다. 이 시점에서 리즈룽은 소련조사단이 중산함을 시찰하려 한다는 쩌우이의 보고를 받고 장제스에게 중산함 회항이 가능하냐고 전화로 묻게 되었다. 당연히 배의 출항을 명령한 적이 없던 장제스는 경악했다.

3.2. 3.20 정변

위에서 봤듯이, 중산함의 출항은 오해로 빚어진 단순 사고로 보였다. 그런데 이때 장제스의 주변에는 매우 정황이 수상쩍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1926년 3월 18일 아침, 왕징웨이의 아내 천비쥔이 장제스의 집에 두시간 동안 다섯 차례나 전화하여 장제스의 일정에 대해 물은 일이 발생했다. 전화가 왔을 때 장제스는 부재 중이어서 장제스의 아내 천제루가 전화를 받았다. 천비쥔은 당뇨병을 앓고 있는 왕징웨이를 대신하여 전화했다고 하면서 장제스가 언제 황푸로 가는지, 어느 부두로 가는지를 물었다. 천비쥔은 매우 부유한 상속녀로 도도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고 장제스에게 일방적으로 이혼당해서 장제스에게 적대적인 회고록을 남긴 천제루조차도 그날 천비쥔의 전화는 매우 수상했다는 회고를 하고 있다.

장제스가 집으로 돌아오자 천제루는 황포군관학교에 가는 시간을 늦추라고 했다. 이에 장제스가 황포군관학교에 전화를 걸자 중산함이 황푸 섬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그리고 3월 18일에서 3월 19일로 넘어가는 자정, 공산당원 후궁몐이 찾아와 장제스와 긴급한 대화를 나누었다. 3월 19일 아침이 되자 다시 정체불명의 전화가 장제스의 행방을 추궁했고 장제스는 급히 집을 뛰쳐나갔다. 그 사이에 교도주임 덩옌다가 초조한 모습으로 장제스의 집을 방문했다. 천리푸는 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그는 장제스의 행방을 묻지 않았다. 마치 그는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를 사전에 알고 있는 듯했다.

장제스가 돌아온 뒤인 오전 10시, 리즈룽이 전화 상으로 전날 밤 황푸에 파견한 중산함을 돌아오게 해도 되겠냐고 물어왔다.
리즈룽:중산함을 광저우로 되돌려 참관단에 참관시키고 싶은데, 좋겠습니까?
장제스:중산함은 언제 황푸에 갔는가?
리즈룽:어젯밤입니다.
장제스:나는 황푸로 가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자네가 광저우에 회항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면 된다. 나에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는가?"
리즈룽:중산함을 회항시킨 것은 교장의 명령입니다.
장제스:그 명령문을 가져와보라.
리즈룽:그것은 전화에 의한 명령이었습니다.

저녁 6시가 되어 중산함은 광저우로 돌아가긴 했으나 군함의 증기를 끊지도 않고 무기도 전투대형으로 배치해 놓았다. 장제스는 이 시점에서 자신에 대한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호문요새 사령이자 장제스의 측근인 진조영의 증언에 따르면, 장제스는 처음에는 산터우로 달아나 재기를 꾀하기로 하고 산터우로 가는 배표를 구입하여 자동차를 타고 부두로 가다가 마음을 바꿔서 광저우 시내로 돌아왔다고 한다. 한편 장제스의 행방을 묻는 전화가 사방에서 쏟아졌는데 그 중에는 또 천비쥔이 있었다. 천리푸의 회고에 따르면, 세번째로 전화했을 때도 장제스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천비쥔은 천리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전화를 세게 끊어버렸다고 한다.

장제스는 광저우로 달려가 해군학교 부교장이자 쑨원주의학회 회원 어우양거(歐陽格)에게 함대사령 권한을 부여하여 중산함을 진압하고 리즈룽을 구속, 심문할 것을 지시했다. 저녁 7시, 어우양거가 파병한 위병들이 리즈룽의 집으로 찾아가 왜 중산함이 여전히 시동을 걸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마침 회항보고를 위해 장퉁신이 리즈룽의 집에 와 있던 참이라 리즈룽은 장퉁신의 말을 인용하여 기적 연돌이 고장나 수리하느라 시동이 걸려 있다고 대답했다. 3월 20일로 넘어가는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장제스는 시멘트 공장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사실상 장제스의 친위부대인 제1군과 우톄청의 공안 병력을 동원해서 기차역과 중앙은행을 포위했으며 소련 고문들의 집을 봉쇄했다. 장제스는 주페이더에게 자신에게 동참할 것을 요청했지만 주페이더는 이를 따르지 않고 탄옌카이와 이 일을 상의하러 갔다.

새벽 3시, 왕바이링이 지휘하는 20사단 병력이 리즈룽을 체포하여 20사단 본부로 압송했다. 리즈룽은 어우양거와 어우양중이 공모하여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사건을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제스의 부하들에 의해 중산함도 점거되었다. 파공위원회 총본부가 급습당해 1천명의 규찰대의 무장이 해제되었으며 저우언라이를 비롯하여 국민당과 국민혁명군 내부의 공산당원들이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다. 소련 고문들은 자택이 포위되고 위병들이 무장해제당한 것에 대해 항의했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 키산카는 급히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수취인 부재라는 이유로 돌아왔다. 이른바 3.20 사건, 3.20 정변이었다.

3.3. 키산카의 추방

한편 왕징웨이는 3월 18일부터 당뇨병으로 몸이 아파서 집에서 와병한 상태였다가 20일 아침 천궁보의 보고를 듣고 정변 발생에 대해 알게 되었다. 잠시 후 주페이더와 탄옌카이가 방문했는데 이들은 조금 전 장제스를 만나 왕징웨이에게 보내는 장제스의 편지를 들고 온 상태였다. 편지 내용은 공산당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니 어쩔 수 없이 긴급조치를 취해야하며 이를 양해해달라는 것이었다. 왕징웨이는 크게 화를 내며 자신에 대한 모반이 아니냐고 했다. 왕징웨이는 탄옌카이, 주페이더에게 장제스를 제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탄옌카이와 주페이더는 2군과 3군의 부군장들을 통해 출동명령을 내릴 수는 있지만 장제스를 제지하기는 어렵다고 대답했다. 왕징웨이는 리지선에게도 군대를 출동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리지선은 계엄령이 선포되어 광저우를 빠져나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대답하며 거절했다. 즉 장제스를 제외한 군사 실력자들은 장제스를 따라 정변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왕징웨이의 편에 서지도 않은 것이다.

국민정부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인 자신의 명령이 전혀 통하지 않자 왕징웨이는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20일 오후, 장제스가 직접 왕징웨이를 찾아와 이것이 공산당에 대한 행동일 뿐이라고 해명했다. 다음날인 21일에도 그를 문병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크게 화를 내며 장제스를 비난했고 장제스는 3월 23일 왕징웨이가 국민당에 충성하지 않고 공산당에 충성했다고 그를 비난했다.

이후 장제스는 정변 정리 단계에 신속히 착수하였다. 그는 파업 노동자들을 포위한 군대를 철수시킨 다음에 노동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으며 리즈룽 등을 석방했고 리즈룽을 체포한 군관을 대신 체포했다.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이 소련의 개가 되어 민족을 배신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반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러시아인들의 구금을 풀었지만 키산카 등에게 중국을 떠날 것을 종용했다. 이날, 소련 광저우 주재 영사관 대표가 "이것은 고문단 안의 특정 개인에 대한 문제인가? 아니면 소련 전체에 대한 문제인가?"라고 물었다. 장제스는 당연히 소련 전체를 적으로 삼고 있지 않다고 대답했다. 광저우를 방문 중이던 부브노프 사절단은 장제스의 주장을 납득하고 키산카의 소환 등에 동의했으며 북벌의 조기 실시와 홍콩 파업의 중단 등도 동의했다. 왕징웨이의 입장에서는, 소련이 장제스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나서 장제스 견제에 나섰어야 했지만 오히려 장제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소련이 장제스의 의향만 존중하다고 생각한 왕징웨이는 마지막 희망까지 잃고 말았다.

3월 22일 중앙정치위원회가 소집되어 소련고문단 대표 키산카 등 ‘의견이 맞지 않는 소련 동지’들에게 중국을 떠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소련 고문단도 자신들의 과오와 오류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해야 했다.

3월 24일 키산카 등 세명의 고문이 추방되었고 4월 14일에 12명이 더 쫓겨났다. 또한 제1군 제2사내 각급 당대표들을 해임한다는 결정도 결의되었다. 이날 장제스도 참석했으나 별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장제스는 3월 23일 군사위원회에서 관례적으로 ‘권한에 벗어난 일’을 한 것이 대해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왕징웨이에게 책임을 돌렸다. 장제스는 자신을 처벌해달라는 상신서를 올렸다.
"이번 사건의 발생에 즈음해서는 긴급을 요하기 때문에 비상조치를 취했다. 그 때무에 사전에 보고할 시간이 없었고, 독단 전행의 죄는 피할 수 없는 바가 있다. 다만 심야이기도 하고, 약간이라도 시간을 늦추었으면 기회를 잃었을 것이다. 임기응변의 조치는 부득이했다. 스스로 엄중히 처분할 것을 바라며, 이로써 징계의 뜻을 나타내고, 기율을 숙정해야 한다."

각 군장들도 찬성했으나 상신서는 불문에 붙여졌고 처벌이 이루어지진 않았다.

3.4. 왕징웨이의 외유

한편 왕징웨이는 3월 22일 중앙정치위원회 회의 이후 중앙상무위원회에 병가를 내고 잠적해버렸다. 3월 23일에 그의 측근 천궁보가 직접 그를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했다. 그의 갑작스러운 잠적에 장제스도 당황하여 중앙정치위원회 결의에서 왕징웨이의 의견이 관철되지 않은 것이 없는데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후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몇차례 화해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뤄지지 않았고 왕징웨이는 4월 1일 프랑스로 떠나기로 결정, 장제스에게 자신의 관인을 내주어버렸다. 왕징웨이는 중앙감찰위원 장런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가 아주 싫어졌다. 이제 두번 다시 정치책임은 지고 싶지 않다!

4월 9일, 장제스는 편지를 보내 왕징웨이에게 황포군관학교 경비 삭감, 키산카가 횡포를 부리는데도 키산카의 편만 든 것, 왕징웨이가 우유부단하고 자주성이 없다는 것 등 10가지 불만을 지적했다.
... 아우가 산터우에서 돌아와 즉시 북벌을 제안했을 때, 은 적극적으로 찬성했고, 북벌을 위한 비용까지 준비하며 결심을 보였다. 그러나 키산카 고문이 반대하자 갑자기 그 태도를 바꾸었다. 이는 형에게 자주성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키산카는 북방에 배로써 군대를 수송하면 된다고 제의했다. 이것은 정말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천박한 전술이며, 이 제의의 이면에는 북벌을 시키지 않겠다는 독침이 있다. 그래서 북벌을 실행할 성의가 없음은 명백하다. 그의 생각은 총리의 일생의 소원이었던 북벌의 뜻에 상반된다.
2전대회 이래 당무, 정치, 군사가 언제나 누군가에 의해서 조종되고 있는 것을 슬퍼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조차도 자주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잃었다. 혁명의 전도는 절망적이다. 중국혁명을 제3자에게 조종당하게 해서는 안된다.
총리의 연소용공 정책의 뜻과, 소련이 중국혁명과 독립을 돕는다고 하는 약속에 위반되어서는 안된다. 이 점을 확실히 교섭하도록 제의한다. 이것은 키산카만의 책임이 아니라, 형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키산카는 또 북방으로 거점을 옮겨 훈련할 것을 권하는데[4], 그 진의가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다. 즉, 아우가 하루라도 광동에 있으면 키산카의 계획은 그만큼 실천이 어려워진다. 그는 나를 광동으로 떼어놓아 군의 중심을 잃게 하고, 우리 당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왕징웨이는 5월 11일 홍콩을 거쳐 프랑스로 떠나버렸다. 장제스는 쑹쯔원을 시켜 왕징웨이에게 돌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왕징웨이는 듣지 않았다.[5] 훗날왕징웨이는 자신이 막강한 정치적 실권을 가진 상태에서 어째서 그렇게 잠적해버렸냐는 질문에 장제스와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했다. 배경한 교수는 왕징웨이의 외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국민정부 주석과 군사위원회 주석, 국민혁명군 총당대표로서 국민정부 내에서 실질적인 정치 주도권을 행사해 온 왕징웨이가 왜 스스로 잠적하고 외유길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다른 해석이 엇갈린다. 왕징웨이의 성격이 정치적 투쟁을 끈질기게 벌이지 못할 만큼 담백하다거나, 고난에 부닥치면 후퇴하거나 회패히버리는 낭만적 혁명가 기질이 있었다며 성격에서 원인을 찾으려는 해석도 있다. 한편, 왕징웨이가 원래 개인적 야심이 없는 데다 자신의 문관 우위적 입장으로 인해 장제스와의 대립이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는 시각도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는 왕징웨이와 장제스 사이에 이념적 경향 차이가 존재하여 결국 분립을 가져왔다는 견해도 있다. (...) 왕징웨이의 성격이 독특하다거나, 그와 장제스의 이념이 달랐다는 사실이 그의 외유와 잠적에 대한 부분적 이유는 될 수 있으나 충분한 설명은 될 수 없다.
(...)
결국 왕징웨이가 택한 잠적은 (군사 실력자들의 불복종과 소련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야기된) 현실적인 무력감과 실추된 권위의 결과일 텐데, 그 표현 방법이 잠적과 도피였다는 것은 그의 이른바 낭만적 혁명이나 성격과 관련있을지도 모른다.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84,92페이지

이후 후한민도 왕징웨이의 실각을 틈타 귀국했으나 왕징웨이는 후한민을 압박하여 홍콩으로 외유하도록 강요했고 5월 11일, 후한민은 왕징웨이와 같은 배를 타고(...) 홍콩으로 떠났다.

3.5. 당무정리변법

4월 29일, 중산함 사건 소식을 듣고 경악한 미하일 보로딘이 광저우로 돌아왔다. 장제스는 보로딘에게 소련에서 귀국한 후한민이 그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위협하며 국민당 내부에서 공산당을 견제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요구했다. 보로딘은 통일 전선 유지를 위해 온화한 태도로 장제스의 요구를 거의 다 수용했고 수 차례의 협의 끝에 1926년 5월 15일 국민당 제2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체회의에 제출했다. 이를 당무정리변법, 혹은 당무정리안이라 하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공산당은 그 당원에 대하여, 국민당에 대한 언론의 태도를 개선하고, 특히 총리 삼민주의에 비판을 가하거나 의심을 품는 것과 같은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훈령한다.

2. 공산당은 국민당 내의 공산당원 전원의 명부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서 교부한다.

3. 중앙당부의 각 부장은 2개 당 이상의 당적을 가지지 않는 자만이 담당한다.

4. 국민당적에 속하는 자는 당의 허가를 받지 않는 한 어떠한 경우에도 국민당의 명의를 가지고 당무회의를 열어서는 안된다.

5. 국민당적에 속하는 자는 최고 당부의 명령을 받지 않는 한 별도로 조직을 만들거나 행동해서는 안된다.

6. 중국공산당 및 제3인터내셔널이 국민당 내 공산당원에 대해 내리는 일체의 훈령이나 책략은 사전에 국공 연석회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된다.

7. 국민당원은 탈당허가를 받기 전에 타당의 당적을 얻을 수 없다. 이미 당적을 이탈하여 공산당에 입당한 자는 금후 다시 국민당에 입당할 수 없다.

8. 당원이 이상의 각항을 위반했을 때는 즉각 그 당적을 취소하는 동시에 위반 정도에 따라서 징벌한다.

위의 초안은 공산당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이 문제되어 공산당을 기타 정당으로, 국공 연석회의를 연석회의로 수정하고 공산당원의 비율에 대해 규정한 3조가 추가되어 최종적인 당무정리안은 다음과 같았다.
1. 기타 당원으로서 국민당에 가입한 자는 모두 국민당의 기초가 쑨원이 제창한 삼민주의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고, 총리와 삼민주의를 의심하거나 비판해서는 안된다.

2. 기타 당원으로서 국민당에 가입한 자는 모두 국민당에 가입한 당원명부를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에게 제출하여 보관하도록 해야 한다.

3. 기타 당원으로서 국민당에 가입한 자는 모두 고급당부의 집행위원을 임명하는데 있어서 그 인원수가 해당 당부 정수의 3분의 1을 초과해서는 안된다.

4. 기타 당원으로서 국민당에 가입한 자는 모두 국민당 중앙기관의 부장직에 임명될 수 없다.

5. 국민당의 당적을 가진 자는 모두 당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국민당 명의로 소집하는 어떠한 당무회의에도 참석할 수 없다.

6. 국민당의 당적을 가진 자는 모두 최고 당부의 허가를 닥하지 못하면 정치와 관련된 별개의 조직을 가지거나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

7. 국민당에 가입한 다른 당의 당원에 대해 해당 당이 하달하는 모든 훈령은 반드시 먼저 연석회의에 제출하여 통과되어야 한다. 만약 특별히 긴급한 사항으로 사전에 보고할 수 없을 경우에는 반드시 차후에 연석회의의 추인을 받아야 한다.

8. 본당의 당원은 탈당을 허가받기 이전까지는 다른 당에 가입하여 당적을 가져서는 안된다. 본당을 탈당하여 다른 당에 가입한 자는 다시 본당에 가입할 수 없다.

9. 당원이 이상의 각 항을 위반할 시는 반드시 그 당적을 즉각 취소하거나 또는 그 위법 정도에 따라 징벌을 가해야 한다.

1926년 7월 12일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2차 중앙집행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천두슈는 "국민정부 내부의 정치적 상황 내지는 국민정부의 실력 등 여러 면에서 볼 때 북벌의 시기는 아직 성숙되지 않았다."면서 북벌의 실행에 대해 비판했지만 중국 공산당은 "노동자, 농민의 역량 재고와 공고, 민족운동의 영도적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대자산계급 상대 소자산계급의 투쟁강화로 국민혁명의 영도권 확보"를 공산당의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하고 조직문제, 선전공작, 노농운동 관련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 민중운동과 연대한 광범한 민족혁명 운동을 전개한다는 조건으로 북벌에 적극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하기로 결정했다.[6]

4. 분석

중산함 사건에 대한 분석은 크게 다음과 같다.

4.1. 공산당 음모론

우선, 공산당과 소련이 장제스의 주장처럼 정말로 음모를 꾸몄다는 주장이다. 장제스의 측근이며 호문요새 사령인 진조영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리즈룽은 중산함을 이동시켜 군교와 광저우의 교통을 차단한 뒤, 군교를 왕징웨이에게 인도하도록 장제스를 협박할 생각이었다. 장제스와 비서인 천리푸 두 사람의 소련행 여권도 사전에 준비되어 있었다. 불온한 움직임을 안 장제스는 19일에 은밀히 작은 배를 타고 황푸에서 광저우로 갔다. 그날 오후 중산함도 역시 광저우로 돌아와 보일러를 계속 때며 출발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에 장제스, 천리푸 두 사람을 체포하여 출항하려는 계획이었다."

장제스 본인도 자신을 납치하려는 시도에 대한 자구책이라 주장하며 천비쥔에게서 걸려온 전화가 그 증거라 보았다. 허샹닝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모욕을 당했다. 예산이 삭감되고 무기는 다른 군단에게 넘어가는 등 러시아인과 중국 공산당원들은 나에게 반대했다. 그리고 나는 코민테른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중산함 사건의 원인은 키산카와 공산당원들에게 있으며, 이들은 공산당원이 아닌 장제스의 존재에 부담을 느껴서 장제스를 납치해서 모스크바로 압송하고 군사정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3월에 행해진 장제스에 대한 음해도 이들 공산당원의 사주란 것이다.

4.2. 우파 음모론

반대로 중산함 사건은 장제스나 우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있다. 중국 공산당의 현재 입장이 이러하며 이들에 따르면,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불만을 품어 좌파의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레고리 보이틴스키는 중산함 사건이 제국주의자들의 작품이라고 논평했으며 장제스 평전의 저자 조너선 펜비 경은 장제스가 자신의 권위를 위해 사건을 일으켰다는 가설을 '가장 그럴싸하다'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장제스가 아니라 서산회의파나 쑨원주의학회를 비롯한 국민당 반공우파들을 배후로 지목하는 경우도 있다. 우파들은 장제스를 확실한 반공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장제스로 하여금 공산당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고 믿게 하였고 결국 장제스가 중산함 사건을 일으키는데 성공시켰다는 것이다. 예컨대, 체포된 리즈룽은 어우양중과 어우양거가 공모하여 자신의 중산함 함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 것이라고 주장하다가 1927년 4월, 서산회의파가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장제스의 의심을 부추겼고 천자오잉, 어우양거 등 쑨원주의학회 회원들을 사주하여 사건을 일으켰다고 말을 바꾸었다. 실제로 중산함 사건에 참여했던 왕바이링, 류즈, 후이둥성, 머우빈 등은 모두 쑨원주의학회의 주요회원들이었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우파들의 모략에 장제스가 과잉대응한 것을 진실이라 추론했다. 하지만 배경한 교수는 서산회의파 배후설이 정황상 제일 그럴듯하다고 하면서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쑨원주의학회 및 시산회의파 회원들이 반공선전을 하고 많은 유언비어를 유포해다는 사실과 어우양거 등이 쑨원주의학회의 주요 회원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 이 사건이 이들의 의도적인 각본에 의해 일어나다고 보는 데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 요컨대 어우양거와 왕바이링이 계획을 세운 후 어우양중을 이용하면서 장제스에게 악의적인 보고를 하여 사건이 발발했다고 보기에는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82페이지.

4.3. 사실 좌파 토사구팽?

조너선 펜비 경은 당시의 언론 자림서보를 인용하여 흥미로운 주장을 소개한다.
4월 <자림서보>는 "정부 고위층과 매우 가까운 일부 사람들"이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좌파 인사들은 우익의 위협을 저지하기 위해 장제스가 그들 세력에 들기를 희망했고, 장제스의 반제국주의적 감언이설을 그가 좌파 편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이 보도문은 덧붙여 말한다. "장제스 장군은 짐짓 의욕적인 척하며, 다음 날 4시에 사병들을 이끌고 광저우로 진입해 이 계획을 실행하겠다고 약속했다." 만일 장제스가 그의 부대를 결집할 때 정말로 좌익과 손잡은 척했다면, 무엇보다도 장제스가 공산당 방문자와 심야에 밀담을 나누었다는 점을 설명할 수 있다. 보로딘의 부재, 왕징웨이의 병, 러시아 군사 고문들이 응대해야 할 부브노프 사절단의 방문 등은 장제스가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완벽한 기회였다. 거짓으로 적을 달래면서 그들의 신경을 마비시키고 반격을 준비하는 것은 장제스의 익숙한 수법이었다.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민음사, 128페이지.

흥미로운 견해지만 어디까지나 근거가 불명한 당시의 언론 보도가 출처이며 조너선 펜비 경이 역사학자가 아니라 언론인이라는 점은 감안해야 하는 주장이다.

4.4. 사실 그냥 우연?

배경한 교수는 다음과 같은 분석을 한다.
주성판사처 직원 왕쉐천이 군교로부터 최초로 전화 통지를 받은 후 누구의 명령인지 알아듣지 못한 채 교육장일 것으로 추측하고 어우양중에게 보고하는 과정에서 상선 보호를 위한 순시선 파견 요청과 군함 파견 요청이 서로 엇갈리게 전달됐다는 점에 주목하여, 불량한 통신과 부정확한 전달로 인한 우연한 사고에서 사건이 발단되었다고 보는 것이 사실에 보다 가깝지 않을까?
왕징웨이 연구, 배경한, 일조각, 82페이지

5. 결과

중산함 사건으로 인하여 왕징웨이가 외유하고 그의 정치적 권위가 실추되면서 1925년 8월 이래로 유지되어 오던 장왕합작 체제는 붕괴되었고 장제스 1인 체제가 열리게 되었다. 좌파와 공산당도 일단 자신들의 과오를 표면적으로 인정하고 장제스가 추진하던 북벌에 협조하게 되었다. 광저우에서 국민당 제2기 2차 중앙전체회의가 개최되어 장런제, 탄옌카이, 장제스, 우징헝, 구멍위를 연석회의에 참석할 대표로 선정했고 공산당은 3인의 대표를 낼 수 있었으나 명단을 제출하지 않았다. 또한 당무정리안에 따라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주석직이 신설되어 감찰위원 장런제가 추대되었으나 곧 장제스로 교체되었다. 또한 당무정리안 4조에 따라 장제스를 군사부장 겸 조직부장, 샤오위안충을 청년부장, 구멍위를 선전부장, 간나이광을 농민부장, 엽초장을 비서장에 임명했다. 당의 대권을 장악한 장제스는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거행되게 된다.

허나 더 이상 장제스가 좌파가 아님을 확신하게 된 코민테른과 중국 공산당, 국민당 좌파 세력은 이러한 장제스 1인 체제의 견제를 최우선 과제로 삼게 되었고 그의 영향력 축소를 위한 정치적 공세에 돌입하게 되었다. 장제스의 정치, 군사적 권력 집중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외유를 떠난 왕징웨이의 복귀를 촉구하는 영왕운동 등 여러 정치적 공세가 국민혁명 내내 이뤄지게 되었으며 양측의 첨예한 정치적 대립은 결국 4.12 상하이 쿠데타에서 폭발하게 된다.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장제스 개인적으로는 소련 방문 이후 소련이 중국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소련에 대한 불만을 품었다. [2] 본명 니콜라이 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93~1938). 소련 건국의 주역이자 소비에트 지도부 중 한 명인 발레리안 쿠이비셰프(1888~1935)의 동생이다. [3] 덩옌다는 공산당원으로 훗날 장제스와 대립하다가 장제스에게 처형되었다. 이 시기의 장제스를 음해하는 각종 선전, 선동에 대해서 중화민국 측은 공산당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다. [4] 이는 친소군벌로 평가되던 펑위샹의 영지로 이동하자는 주장이었다. [5] 조너선 펜비는 이를 연기라고 신랄하게 평가한다. [6] 여기에는 북벌에 실패한 장제스가 실각할지도 모른다는 계산도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