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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0-03-17 22:22:23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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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국가주석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제6대 주석
시진핑
习近平 / 習近平 | Xi Jinping
파일:시진핑.png
이름 간체자: 习近平 / 정체자: 習近平 (Xí Jìnpíng)
한국 한자음: 습근평[1]
출생 1953년 6월 15일 ([age(1953-06-15)]세)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2]
국적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png
신체 180cm, 100kg
가족 부친: 시중쉰(习仲勋)[3]
모친: 치신(齐心)[4]
전처: 커링링(柯玲玲) (이혼) [5]
배우자: 펑리위안(彭丽媛)[6]
딸: 시밍쩌(习明泽)[7]
학력 칭화대학 화공과 학사
칭화대학 대학원 법학과 박사
종교 무종교 ( 무신론)
정당 중국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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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제7대 주석
임기 2013년 3월 14일 - 현직
중국 공산당 제9대 중앙위원회 총서기
임기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중국 공산당 제6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임기 2012년 11월 15일 - 현직
중화인민공화국 제9대 부주석
임기 2008년 3월 15일 - 2013년 3월 14일 }}}}}}

1. 개요2. 정치력 평가3. 생애4. 집권5. 임기 중 행보6. 비판과 논란7. 저서8. 필모그래피9. 별명10. 어록11. 기타

1. 개요

파일:11-8.jpg

중국의 정치인, 독재자.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뒤를 이어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제6대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군 통수권자) 겸 제7대 국가주석 겸 제5대 중국 공산당 총서기이다.

1인 독재와 종신집권을 위하여 반부패 정책[8]을 추진한 한편, 대대적인 개인 우상화 작업을 강하게 밀어붙인 덕분에 대중적인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성공하여 중국에서는 초창기에 "시다다(习大大: 시 아저씨)"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9]

2018년 결국 국가주석 임기 철폐 개헌으로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선언했으며, 이에 따라 마오쩌둥 이후 지도자들이 자제하던 1인 독재와 개인 우상화를 부활시켰고, 더불어 그나마 숨통 트일 정도만큼은 있었던 중국의 사회적 자유화 수준을 급격히 하락시키고 퇴보시켰다. 또한 편협함과 음험함이 역대 중국 지도자 중 최악이라서 자신에 대한 일체의 비판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죽하면 시진핑을 비판하는 인민, 학자, 명사들이 은밀히 혹은 실시간으로 체포되거나 납치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시진핑을 싫어하는 중국 젊은이들은 중국이 북한을 닮아간다며 자신들의 조국을 서쪽에 있는 조선이라는 뜻의 "서조선(西朝鮮: 시차오셴)"이라는 신조어로 조롱하고 있을 정도.[10]

블라디미르 푸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등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지만 명목상으론 민주주의 국가라 야당도 있고 대선이라는 합법적 절차를 밟아야 최고 권좌에 오를 수 있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나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는 달리, 사회주의 국가로서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가 합법화 되어 있는 중국의 시진핑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11] 독재 자체가 중국 헌법과 공산당 당헌에 규정되어 있으므로 본인의 권력 행사에 별다른 우회 수단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역대 최고 지도자들 중에서 처음으로 건국 이후에 태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2. 정치력 평가

  • 도올 김용옥은 한때 시진핑을 푸젠성 위 부서기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 중앙 후보 위원 150명 중에서 151등으로 꼴찌였다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결국에는 당 총서기가 된 인간 승리의 표본이라고 찬양했는데, 그건 그냥 당시 당 간부들이 특채해서 중앙위 후보 위원이 됐기 때문에 서열상 꼴찌였을 뿐이다. 원래 관례상 150명만 뽑는 중앙위 후보 위원 자리에 당 고위 간부들이 시진핑을 억지로 밀어넣어서 151위였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공산당 원로였던 아버지 시중쉰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불문가지다. 애초에 태자당 출신에 당 고위 간부들의 배후 지원까지 받는 중앙 후보 위원이면 승승장구하는 세습 엘리트의 전형이지 핸디캡을 논할 계제가 아니다. 한때 중국의 축복으로까지 찬양하던 김용옥은 시진핑이 종신 집권을 추구하는 걸 보며 자신의 안목이 틀렸음을 마지못해 인정했다.
  • 시진핑이 당시에 대권 후보로는 눈에 띄지 않는 인물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원래 성격 자체도 굉장히 조용한 인물이다. 후진타오 시대에 태자당의 선두주자였던 보시라이가 스스로 무리수를 범하다가 몰락하지 않았다면 시진핑은 절대 대권 주자로 발돋움할 수 없었다는 평이 있을 정도다. 잘해봐야 말석으로나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할 수 있었던 사람이 대권을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원래 금수저인 시진핑이 당 고위 간부에 진입하는 것은 쉬웠어도, 당 최고위직은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본인의 능력뿐만 아니라 공산당 내부의 살벌한 경쟁을 뚫어야 하며, 이것을 뚫고 대권을 장악한 것은 아버지 덕이 아니라 운이 따라주었고 본인이 이뤄낸 것이다. 물론 보시라이의 자충수와 파벌 간 타협이 필요한 시대적 상황이라는 운이 따랐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 사실 총서기가 된 것은 몸을 낮춰서 된 것이지만 총서기가 된 이후 절대 권력자가 된 것에는 시진핑의 정치력을 인정해야 한다. 총서기가 된 2012년에는 사람들은 그가 강력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공청단이나 상하이방 계파 소속이 아니라서 2012년 당시에는 자기 세력이 없었고 온화한 이미지를 내세우며 몸을 낮춰 적을 만들지 않아 당내 계파들의 타협으로 총서기가 되었기 때문이다.[12] 공산당 서열 2위이자 국무원의 총리인 리커창은 사실 성격이 호탕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시진핑은 내성적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색무취하고 안정지향적으로 보였다. 계파의 타협을 통해 총서기가 된 시진핑은 집단지도체제의 허수아비가 될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전임자였던 후진타오도 유약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덩샤오핑이 죽기 전에 장쩌민의 후계자로 직접 지목했다는 정통성이 있었고 공청단이라는 지지 세력이 있었다. 그런 스토리와 뒷배경이 없었던 시진핑은 약한 지도자가 될 것으로 보였다.
  • 실제로 2011년~2012년 당시 기사들을 보면 시진핑은 '조심스럽다.', '튀지 않는다.', '정치적으로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모험을 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았고, 위키리크스에서는 중국 공산당 내부자들로부터 지도력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총서기 취임 이후에도 반부패 운동 초기에는 '권위를 세우기 위한 일시적인 백일 엄포로 고위직은 무사할 것'이라는 과소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자기 성격까지 숨기며 몸을 낮추던 시진핑은 총서기 취임 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만나 "내 생각에 나와 당신은 성격이 닮았다."고 말하며 절대 권력에 대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상이군인 출신 집안에서 흙수저로 자라 KGB에서 비밀업무를 했던 푸틴 입장에서 볼 때 공산당 간부 집안 출신인 시진핑이 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지 불 보듯 뻔하다 김일성 : 스탈린은 내 친구요 그리고 '(부패한 인사는) 호랑이든 파리든 모조리 때려잡겠다.'는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부패 정책을 펴기 시작해 자신의 정적들을 차례차례 숙청해 나가며 반대 세력을 일소했다. 물론 자기 밑에 있던 지지 세력들이 저지르는 부패 행위는 봐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2018년 3월 11일에는 개헌을 통해 국가주석직은 세 번 이상 맡을 수 없다는 조항을 삭제하여 종신 집권으로 가는 문까지 열어버렸다.

3. 생애

파일:Xi_Jinping,_Xi_Yuanping_and_Xi_Zhongxun_in_1958.jpg
5살 때 찍은 사진. 좌측 인물. 부전자전

1953년( 중화인민공화국 5년) 베이징에서, 혁명 원로로 부총리였던 시중쉰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원래 섬서성의 토착 공산주의자로 류즈단(劉志丹, 1903.10.4 - 1936.4.14)[13]과 함께 해방구를 건설했는데, 중국 최남단에 있던 장시 소비에트 국민당군의 공격으로 붕괴하면서 공산당 지도부가 대장정으로 섬서성으로 피신해오자, 시중쉰은 혁명의 새로운 근거지를 건설했다는 공로로 일약 당고위직에 진입한다.

시중쉰은 동료 공산당원 하오밍주(郝明珠)와 결혼했다가 1남 2녀를 낳고 1943년 이혼을 하고, 1944년 치심(齐心)과 재혼했다. 시중쉰은 치신과 2남 2녀를 두는데, 시진핑은 그중 셋째이다. 그러니까 총 3남 4녀 중에서 6번째 자녀이다.

1962년 소설 류즈단 필화 사건[14]에서 시중쉰이 펑더화이[15]로 몰려서 반당(反黨) 집단의 낙인이 찍혀 오지로 귀양갔고, 당연히 초등학생였던 9살짜리 시진핑도 아버지를 따라 산시 성 시골로 하방(추방)되어 불행한 시절을 보냈다.

중국 공산당에서는 이 당시 시진핑이 토굴에서 7년간 힘겹게 살았다고 한다. 어렵게 산 건 사실이다. 아버지가 실각해서 평민이 되었는 데다가, 1966년부터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아버지가 마오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해 항의하다가 실각해서 대역죄인으로 찍힌 펑더화이의 부하에다가 반동을 미화한 소설을 펴낸 주범으로 몰렸기 때문에, 가족 전체가 박해를 받았다. 이때, 아버지가 전처와 낳은 이복 맏누나 시허핑(习和平)은 이때 '반동의 딸'로 홍위병에게 두들겨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시진핑도 이 당시 상당히 힘든 생활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FPQc-fykcpru8013304.jpg
1973년 당시. 왼쪽에서 2번째 인물

소싯적부터 리더십이 있었는지 하방 당한 곳에서 노동자들을 지도하여 최고의 생산량을 올렸다고 한다.[16] 아버지가 반동으로 찍혔기 때문에 입당 신청을 했으나, 여러 번 퇴짜를 맞다가 문화대혁명이 완화된 1973년에야 겨우 입당했다. 이어 베이징으로 올라와 1975년 칭화대학의 화공과에 입학했다. 마오쩌둥이 사망한 후 화궈펑이 정권을 잡고, 중앙군사위 주석, 당 총서기, 국무원 총리 세자리를 모두 장악했지만, 화궈펑은 리더십이 모자랐기 때문에, 결국 1979년 부총리였던 덩샤오핑에 의해 실각했고, 실권은 부총리이자 인민정치협상위원회(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全国委员会) 주석이었던 덩샤오핑이 장악했다. 덩샤오핑은 부총리던 1978년 1962년 이래 16년간 죽 야인으로 지냈던 시중쉰을 정계로 복귀시켰고, 시중쉰은 1970년대 말부터 당고위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즈음 대학을 졸업하게된 시진핑도 당당히 태자당에 진입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3년 후인 1982년부터 허베이성의 정딩현의 당부서기를 맡는 것을 시작으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이후 허베이성을 거쳤다가 1990년대부터는 폭발적인 경제성장을 보이는 남부로 전직했다. 그리하여 푸젠 성, 저장 성 등 동남부 지방 정부에서 지냈는데, 2007년 상하이 시 당위서기를 지내면서 장쩌민 주룽지의 파벌인 상하이방과도 관계를 맺게 되어 태자당 상하이방 양쪽의 후원을 받는 거물로 성장했다. 2008년에는 국가 부주석 직에 올랐다. 하지만 이때까지 보시라이와 리커창에 비해 외국에 덜 알려졌으며 한국에서도 그가 중국의 주석에 오를 것으로 미리 예측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는 부주석을 지냈던 쩡칭훙 외에도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지지와 후원 모두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부주석 겸 정협의장으로 있다가 2010년에 당 중앙 군사위 부주석 직에 오르면서 후진타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공인되었다.

영국 주재 대사의 딸이었던 첫 아내와는 성격 차이로 이혼했고, 재혼한 현 부인 펑리위안 중국 인민해방군 예술단 소속의 가수[17]로 중국의 국민 가수로 불리는 사람인데, 펑리위안의 인기도 시진핑의 권력 상승에 도움이 되었다.

4. 집권

간단하게 선요약부터 하면 원래대로라면 천량위 대체제다.
물론 어디까지나 겉으로일 뿐이지만.
애초에 장쩌민이가 후진타오에게 정권을 양도한건 본인이 원해서 양도해준게 아니다.
바로 덩샤오핑이 생전에 장쩌민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되, 후진타오를 장쩌민의 후계자로 하는 조건으로 정권을 인수인계해준것이기 때문에 장쩌민으로는 좋든싫든 덩샤오핑이 정해준대로 10년만 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장쩌민은 속으로는 매우 조-옷같겠지만 당시 어쩔 수가 없었다. 어차피 칼자루를 쥐고 있는건 덩샤오핑이고 장쩌민으로서는 거부했다가는 나가리가 될게 안봐도 블루레이라 어쩔 수 없이 수락한 것 뿐이다.
이 때문에 장쩌민이 후진타오에게 어쩔 수 없이 주석자리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여기서 장쩌민이 술수를 부리는데, 정권 자체는 후진타오에게 인계해주었지만, 상무위원들을 대부분 상하이방으로 채우는 꼼수썼고 결국,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버리는데 성공했다.
세대 지도부가 출범할때 이 4세대 지도부의 9명중 6명이 전부 상하이방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실제로, 후진타오에게 정권을 인계해줄때 기존에 7명이었던 상무위원의 숫자를 9명으로 늘렸고 그리고 그 상무위원중 6명을 전부 상하이방 계열로 집어넣었으니까.
이 때문에, 주석자리는 넘겨받았지만 주변이 온통 상하이방 투성이니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장쩌민이 가지고 있는 꼴이지, 꼼짝없이 상하이방의 바지사장으로서 살아야하는 처지였다.
그래서 후진타오는 숨죽이면서 하염없이 언제 올 지 모르는 기회를 노려야 하는 처지가 되었지.
그러던 와중, 2004년 여름경에 상하이방의 황태자이자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후임으로 만들려는 천량위(당시 상하이시 당서기)가 당시 총리이자 권력서열 2위인 원자바오를 향하여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짓을 저질렀지만, 당연히 꼬라지가 꼬라지인터라 후진타오는 찍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해 가을 들어서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결국 주긴 했지만 이건 장쩌민이 어차피 중앙군사위 주석 역시 언젠가는 후진타오에게 반드시 물려줘야 했음.
즉, 장쩌민이 중앙군사위 주석까지 줄 무렵에는 더 이상 장쩌민이 더 이상 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무리하게 유지할 필요가 없었던거다. 그래서 물려준거야.
뭐, 그래봐야 후진타오는 반쪽짜리 주석으로 사는건 변함없었다.
이렇게 별 탈없이 장쩌민의 재집권 플랜이 순조롭게 이뤄지나 싶더니, 2006년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뒤를 이을 차기 주석으로 밀던 천량위가 비리문제(를 명분으로 한 권력투쟁)로 낙마해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이건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으로서 칼을 갈고 갈아서 일격을 가한거다. 상하이방에 일격을 먹인거지.
전형적인 와신상담으로 천량위를 들이친건데, 사실 천량위의 비리수준은 장쩌민조차도 실드를 쳐주지 못할정도로 개판을 벌인터라, 천하의 장쩌민조차도 어찌 해 볼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
어쨋든 기회를 잡은 후진타오는 비록 반쪽짜리 주석이라는 신세는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장쩌민의 재집권 플랜에 제동을 가했다는 커다란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마침 1년뒤인 2007년에 17차 공산당 대회가 열리는데 이렇게 천량위의 숙청에 성공한 후진타오는 기회를 놓칠새라 자기가 후계자로 밀던 리커창을 후계자로 내세운다.
천량위 실각 이후 장쩌민은 천량위를 대체할 만한 인물이 없었기에, 후진타오가 내세운 후계자인 리커창에 대해서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등, 잘못하다간 재집권 플랜이 거기서 끝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이게 바로 시진핑이 집권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장쩌민으로서는 천량위를 대체할 만한 확실한 대체제가 필요했으니까. 물론 천량위가 낙마했다고 해서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에선 벗어난게 아니다.
결국 리커창은 주석이 되지 못하고 총리로 만족해야했고, 당시 태자당 소속인 시진핑이 차기 주석으로 결정나버렸으니...
폭풍전야[편집]
17차 당대회에서 벌어진 장쩌민과 후진타오간의 권력투쟁의 승자는 결국 장쩌민이었다.
그 예시로 후진타오가 밀던 리커창은 국무원 총리로 낙점되었고, 후진타오의 후계자는 시진핑으로 결정난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런 배경속에서 시진핑은 차기 주석으로의 행보를 걷게 되지만, 장쩌민이 아무런 생각없이 시진핑을 지명했을리는 없고 사실 보시라이라고 장쩌민 측에서 키우는 조커가 하나 있었다.
일단 보시라이에 대해서 말하자면, 당시 충칭시 당 서기로서 중국 공산당의 8대 혁명원로중 하나인 보이보의 아들이며 태자당의 핵심인물중 하나이자 장쩌민의 사람이었다. 이 정도 스펙이면 천룡인이나 다름없지.
문제는, 보시라이의 경우 야심이 매우 커서 그런지, 사방에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거다. 결국, 2007년경 후진타오에 의해서 상무위원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충칭시 당 서기로 좌천되어버렸다.
이 때문에, 보시라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충칭시의 당 서기로 있으면서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이렇게 보시라이가 충칭시 당 서기로 재임한 동안 자신의 측근인 왕뤼진(당시 충칭시 공안국장)과 함께 창홍타흑 정책(공산당과 사회주의를 예찬하고 범죄 및 부패와의 전쟁)을 추진하여 충칭시의 깡패조직들을 소탕하고 대중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게 된다.
여튼간에 이 범죄와의 전쟁덕에 보시라이는 물론 그 심복 왕뤼진도 치안영웅, 충칭의 포청천 등으로 불릴 정도이니 후진타오 입장으로서는 존나게 좃같겠지
참고로 이 범죄와의 전쟁을 치루는 도중 원창이라고 하는 전직 충칭시 사법국장을 체포하여 사형을 때려버리는데,
이 원창이라고 하는 인물은 전직 광둥성 거시 왕양의 최측근이자 상무위원중 하나인 허궈창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공청단 소속이라, 당시 주석인 후진타오의 최측근이라는 참 웃기는 관계가 성립한다.
즉, 보시라이는 대놓고 후진타오를 엿쳐먹인거지 일전에 자신을 충칭시 당서기로 쫒아보내버린 복수를 한 셈이기도 함.
어쨋든 보시라이는 왕양과 허궈창의 옛날 부하들을 모조리 깡패로 몰아서 처형시켜버리고, 자신을 따르지 않는 민간기업들 역시 흑사회로 몰아서 처벌해버림.
뭐 어쨋든간에 이 창홍타흑 정책덕분에 중국내의 마오쩌둥 추종자들은 보시라이를 마오쩌둥의 정신을 이어받은 후계자라고 치켜세워졌으며,
또한 앞서 말한 왕양의 광동성 또한 후진타오의 지원을 받아 광둥모델을 내세우고 있는 상황이고 자연스럽게 광동모델은 충칭모델과 경쟁하게 된 처지에 이르게 되었어.
이는 사실상 장쩌민 vs 후진타오라고 봐야지.
보시라이는 이를 기반으로 충칭모델과 창홍타흑 정책의 성과를 충칭여론을 통하여 끊임없이 조명하여 후진타오를 압박했고, 이로 인해서 후진타오 역시도 보시라이를 경계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림.
이대로라면 보시라이가 차기 상무위원에 무난히 안착하는건 시간 문제였다.
이렇게 하여, 비록 장쩌민은 천량위가 제거된 후폭풍으로 인해 상하이방 내에서 내세울 만한 인물은 없었지만, 태자당의 맴버이면서도 장쩌민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보시라이가 이렇게 인기를 얻으면서 차츰 입지를 강화해나가니 이를 눈여겨 보기 시작한다.
보시라이는 태자당이지만 굳이 분류하자면 장쩌민의 사람이거든. 즉, 이 충칭모델과 광둥모델은 바로 장쩌민과 후진타오간의 일전의 대리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쩌민은 무난하게 정권을 되찾아오나 싶었다. 여전히 후진타오가 반쪽짜리 주석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으니까.
보시라이 사건
2011년 11월 경 "닐 헤어우드"라는 영국인이 충칭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고, 충칭 당국은 닐 헤이우드가 급성알콜중독으로 사망했다며 사인을 발표했지만,
정작 사망자인 닐 헤이우드는 평소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것이 밝혀지면서 당연히 타살의혹이 제기된 상황이다.
이에 영국정부는 중국정부에 당연히 진상조사를 요청했고, 이로 인해 왕리쥔 당시 충칭시 공안국장이 이 사건을 조사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사건을 수사하던 중에 보시라이의 부인인 구카이라이가 바로 이 사건의 진범임을 알게 되면서부터 상황이 반전된다.
닐 헤이우드에 관해 : 닐 헤이우드는 원래 보시라이 부부의 브로커 역할을 하던 사람으로서, 이 날도 어김없이 구카이라이가 헤이우드에게 거액의 자금을 해외로 송금해줄 것을 부탁했고 헤이우드는 이들의 내세운 조건보다 더 많은 수고비를 요구했다. 이에 구카이라이는 격노하였으나 헤이우드는 자기 요구에 따라주지 않는다면 이 돈세탁 계획을 폭로해버리겠다고 협박해버렸고, 결국 구카이라이는 헤이우드를 죽여버린다.
물론 왕뤼진은 사건의 진범이 누군지 보시라이에게 보고했지만, 당연히 이 사건이 드러나면 좋을것없는데다 본인 역시도 천량위 꼴이 날걸 알던 보시라이는 당연히 덮으려고 들었지 이 떄문에 둘 사이에서 갈등이 생기게 되고,
어차피 보시라이가 충칭의 1짱이기에 왕뤼진은 이런 배경으로 경질당하고 맘
왕뤼진의 경우에는, 이미 보시라이의 최측근으로서 너무 많은 비밀을 알고 있었기에 이대로 가다가는 당연히 보시라이의 손에 쥐도새도 모르게 죽임당할것은 뻔할 뻔 자이기에 결국 왕뤼진이 선택할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미국 대사관 망명[편집]
2012년 2월 6일 충칭이 아닌 청두에 있는 미 영사관에 망명을 하게 된다.
충칭이 아닌 이유는 그곳이 바로 보시라이의 나와바리이기에 절대로 안전한 곳이 아니기 때문. 이런 왕뤼진의 행동에 매우 놀란 보시라이는 당시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충칭의 공안을 청두로 보내서 청두에 있는 미 영사관을 포위해버리는 짓거리를 저지른다.
당연히 미국측은 웬 미친놈들이 난데없이 대사관을 총들고 서있으니 야마가 제대로 돌아버려서 베이징에다 격렬하게 항의했고, 이에 놀랠대로 놀란 당에서도 역시 급히 쓰촨성의 공안병력을 출동시켜서 충칭의 공안병력과 대치하는 상황을 직면케 했다.
이렇게 서로 대치하다가 결국 보시라이측이 물러나면서 상황은 일단 철수했지만, 그래도 왕뤼진의 신변을 손에 넣을 필요성이 있었던 충칭시와 당 중앙은 서로 왕뤼진의 신변을 손에 넣으려고 했고,
결국 당 중앙에서 왕뤼진의 신변을 확보하여 베이징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보시라이라는 거대한 성벽에 잔금이 간 상황에, 이를 바라보고만 있을 정복자가 있을까? 후진타오는 급히 잔금에 공성추를 때려박기 시작했다.
그렇다. 후진타오는 왕뤼진의 신변을 확보한 것이다.
후진타오는 왕뤼진의 신변이 확보한 다음, 그를 조사하면서 보시라이의 비리를 전부 알아차리고, 이를 통해서 장쩌민에게 또 다시 일격을 먹일 수 있는 기회를 포착했다.
비록 10년동안 반쪽짜리 주석이었지만, 결국 장쩌민에게 두번이나 빅엿을 선사하고, 결국 재집권계획마저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커다란 성과를 올리는 쾌거를 올린 것이다.
제2의 천량위[편집]
당연히 보시라이는 이러한 혐의를 부정하기에만 바쁜데다가, 애초에 천량위 떄랑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빼도박도 못한 상황이었고, 결국 3월 8일 원자바오(당시 총리)에게 직접 실명을 거론되면서 맹비난을 받았다.
거기다 원자바오는 문화대혁명이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발언으로 쐐기를 박아넣음으로써, 사실상 보시라이를 완전히 끝장내버렸다.
후진타오는 끝까지 반쪽짜리 주석신세였다는 점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서 리커창이 차기 주석이 되는 이변이 연출되지 않았을 뿐, 장쩌민에게 두 번이나 치명적인 일격을 먹여 결정적인 순간에 핵심 카드가 줄지어서 낙마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하는 것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시진핑이 주석이 될 당시의 배경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비록 상무위원 수에서는 공청단은 리커창 단 하나였고 나머지는 상하이방과 태자당 출신들이 독차지하는등, 여전히 장쩌민이 우위에 있는건 변함없었지만,
시진핑 역시 장쩌민의 바지사장 노릇을 하려고 들지 않았고, 이렇게 장쩌민에 대항하기 위해서 이 둘은 각자 서로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다. 후진타오가 즉석에세 시진핑에게 중앙군사위 주석까지도 이양한건 그런 배경 때문이다.
사실 하다못해서 보시라이가 무난히 상무위원으로 안착해서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서 정법위 서기가 되었다면, 시진핑으로서는 지금과 같은 강력한 부패척결이라는 명분의 정적숙청은 전혀 불가능했다.
사실 장쩌민이 시진핑을 지명한 것 역시 일단은 중립적인 인사를 내세우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핵심기관인 정법위 서기(후진타오 당시 정법위 서기는 공안부장이 겸직했고, 이 때문에 정법위의 위원인 검찰총장과 대법원장이 공안부장의 휘하에 놓이게 된다.
또한 이 정법위 서기는 정보기관등도 총괄하고 준군사조직인 인민무장경찰의 통수권도 가지고 있기에 사실상 또 다른 권좌나 마찬가지다) 보시라이가 저우융캉의 뒤를 이어서 계승하게 된다면 시진핑 역시도 똑같이 반쪽짜리 주석이 되는거고,
당연히 반부패를 이용한 상하이방 숙청 역시 불가능해지게된다.
장쩌민이가 이 정법위만큼은 자기의 측근을 앉히고 이 측근을 통해 정법위를 통제함으로서 후진타오를 반쪽짜리 주석으로 만들어버리고 자신은 장막 뒤의 주석으로서 군림한 것.
뭐 어찌됐건 시진핑이 처음부터 강력한 권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건 바로 이 보시라이가 낙마한 영향이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전임인 후진타오 주석은, 전전임인 장쩌민이 자기 권력을 내놓지 않겠다고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바람에 5년 동안 반쪽짜리 권력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3년 중국 공산당 제18회 당 대회 때 후진타오로부터 당 총서기와 중앙 군사 위원회 주석 자리를 동시에 이양받았고 2013년 3월 후진타오의 국가 주석 임기가 끝나면서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국가 주석 직도 승계하였다. 따라서 공식적으로는 2013년 3월 14일부터 별 일이 없는 한 2018년 3월 14일의 연임을 거쳐서 2023년 3월 14일까지 중국과 중국 공산당 전체를 이끌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었다.

사실 시진핑이 국가 주석에 오른 이면엔 장쩌민 후진타오의 권력 암투가 있었다. 장쩌민은 후임인 후진타오에게 권력을 승계하지 않고 그를 일종의 꼭두각시로 삼으려 했기 때문에 이 둘은 물밑에서 박터지게 싸웠는데 이런 암투 끝에 시진핑이 권력을 잡은 것. 장쩌민 입장에서는 태자당이야 어차피 자기 측근 쩡칭훙이 있으니까, 시진핑 역시 자기 사람이나 마찬가지고 후진타오 입장에서도 공청단 소속이 태자당에도 소속되는 등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원들이 나름대로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시진핑도 장쩌민의 꼭두각시가 될 생각은 없었기에 후진타오와 손을 잡고 장쩌민에 대항했고, 이게 현재 반부패를 핑계로 한 상하이방 대규모 숙청의 원인이 된다. 원래 장쩌민이 차기 주석으로 삼으려던 인물은 천량위였고 천량위가 실각한 이후 보시라이가 뜨자 보시라이를 주석으로 삼으려고 했다.

5. 임기 중 행보

분류:시진핑 시대를 참고하면 좋다.

폭발적인 경제성장의 부작용이 커지는 것을 감안, 개혁 쪽으로 국가 노선을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부정부패를 감시하고 처단하는데 힘을 쏟고, 역시 크게 문제시되는 빈부격차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성장과 복지에 모두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하며. 2000년대 후반기부터 문제시 되어오던 한 자녀 정책은 시진핑 시대를 기점으로 폐지되었다.

1%의 국영 기업이 40%의 비중을 차지하는 경제에 대해서도 메스를 댈 듯하다. 하지만 중국 내 기득권 세력과 개혁 세력의 복합적인 이익 관계를 조정해야 하는 입장이고 게다가 사회적 혼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정치와 법 분야의 개혁은 안정적인 기조로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경제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민간 기업의 몫이 늘어나겠지만, 전면적으로 정부와 무관하게 시장에 권한이 집중될 것으로 보기 어렵다.

임기 초반부터 개방 개혁을 우선 강조하며 강한 의지를 보였으나 이에 대해 보수 세력[18]으로부터 견제를 받았던 것 같다. 그가 공산당 혁명 유적지를 찾기보다 개혁·개방 1번지인 선전을 방문해 덩샤오핑 동상에 헌화한 데 의구심을 표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 이후로는 마오쩌둥 기념식에도 꾸준히 참석하고 있다.

현재 자신의 정책을 실행해나가는 상황이며 계획생육정책의 골자인 한 자녀 정책을, 부모 중 한쪽이 한 자녀일 경우 둘째까지 허용하는 방침이 그중 하나이다. 노동 교화소 폐지도 정책으로 실행된다고 하였는데, 정식으로 폐지되었는지 아직 확인되진 않았다. 대대적으로 출범한 전면 심화 개혁 영도 소조 조장도 직접 맡고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국내외 현안 전반에 걸쳐 추진 작업을 해나갈 것이라고 한다.

물론 중국 공산당 독재 체제에 대한 변화를 근본적으로 꾀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미국 같은 민주 정치에는 부정적이며, 이 점은 여태까지의 다른 중국 권력자와 별반 다른 점이 없다. 2013년 8월 뉴욕타임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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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중국 인민해방군의 군 구조를 대규모로 개편한 데 이어, 2016년 4월에는 ' 중앙군사위 연합 지휘 중심 총지휘'라는 새로운 직함을 달고 군사 훈련을 지휘하는 모습이 보도되었다. 뺨 때리는 거 아니다.

2018년 3월 11일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헌법을 개정하여 임기 제한 규정을 폐지하고 시진핑 사상을 헌법에 추가하였다. 사실상 덩샤오핑 이래 아슬아슬하게 유지되어 온 집단지도체제를 종식하고 1인 독재 체제를 구축한 것으로 평가된다.게다가 헌법 개정안을 사실상 공개투표로 통과시킨 것이 알려졌다. 관련기사 1인독재에 대한 비판과 우려를 의식한 것인지 개헌 직후의 연설에서 "이 개헌은 개인의 공명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인민들의 평판과 역사의 앙금이 가신 뒤 진정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라고 말하며 개헌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

사상적으로는 제2의 마오쩌둥보다는 제2의 이오시프 스탈린을 지향하는 듯하다. 분명 중국 지도자임에도 마오쩌둥이 아니라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을 중점적으로 띄우고, 마오쩌둥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레닌을 계승하려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공산당 당원들에게 마오쩌둥 사상이 아니라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학습할 것을 권하고, 18년 5월엔 마르크스 탄신 200주년 기념식을 열어서 "10월 혁명은 오늘날의 중국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 하고 언급하기도 했다. 사실상 중국판 주체사상이나 다를 바 없고 무엇보다도 경제개발이 진척되어 생산력이 충분히 성장한 중국의 현실에 더 이상 적용되기 어려운 마오주의와는 다소 거리를 두면서 소련식 스탈린주의 개발독재 쪽으로 가려고 하는 듯하다.

이처럼 사회주의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시절에는 없었던 일련의 행보들을 보면 중국을 제2의 소련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 같기도 한데, 아무튼 이러한 노선은 덩샤오핑 이전의 마오주의 노선이나, 덩샤오핑-장쩌민-후진타오 집권기의 사회주의적 정체성이 옅은 개발독재 노선 모두와 비교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020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사태에 대해 시진핑이 영도소조를 세웠다. 그런데 원래라면 모든 조직의 수장에 올라가서 심지어 타이틀 컬렉터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시진핑이 소조 조장을 맡는 게 아니라 리커창 중국 총리한테 수장을 맡겼다. 이번 사태가 시진핑한테 정치 위기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리커창한테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그리고 중국 언론들도 시진핑에 대한 보도를 줄였다. 시진핑 집권 이후 1인 독재 정치를 하고 있는 시진핑의 이런 책임 회피 행태에 중국인들도 분노하고 있다. 기사

오죽하면 타임지에 "중국의 시험"이라는 문구를 대놓고 박았다.
파일:TIM200217v1_China.Cover_.jpg

그리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국면에서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이 어디론가 짱박혀 버리면서 전 세계 언론들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기사 2020년 2월 10일에서야 마스크를 착용하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전염 당할까봐 무서워서 짱박혀 있다가 마지못해 기어나온 모양새라서 중국 내 비판이 강하다.

미국과의 무역 분쟁이나 장기 집권 독재화 문제, 그리고 홍콩 민주화 운동 탄압과 경제적 악화는 서방 부패한 관료들의 문제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할 수 있지만, 이번 우한 신종 코로나 사태는 그러기 어려울 것으로 예측된다. 다들 마스크를 쓰는 바람에 인민들을 감시하는 것도 원천 봉쇄되어버렸다. 어차피 바이러스로 죽을 것이라 인민들이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근데 그걸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출애굽기 again이냐고 우려하는 분위기.

2020년 3월 2일, 중국에서 시진핑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처를 찬양하는 도서를 출간하려다가, 아직 완전히 종식되지 않았다며 출간을 연기했다. 기사

중국에서는 2020년 2월 말부터 후베이성 이외 지역은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의 지시로 기업들 조업 상황을 어느정도 재개시켰다. 그런데 여기서도 시진핑이 제시한 목표 경제성장률에 맞추기 위해서 중국 지방정부들이 대대적인 통계 조작에 나서고 있어서 빈축을 사고 있다. 기사

2020년 3월 10일부터 3월 16일까지는 유럽, 영국, 미국에서 코로나가 진정되지 않고 확산세를 멈추기 어려운 상황에서 공무원들에게 외식을 권하고[19] 학교 등 밀집지역 출입제한을 푸는 비정상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

2020년 3월 17일 시진핑은 파키스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할 때 마스크를 벗고 나왔다. 마스크를 벗고 정상회담을 한 것은 중국 정부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대처에 대한 선전 효과를 노린 것으로 분석된다. 기사 파키스탄 대통령: ㅅㅂ

5.1. 홍콩

2019년 6월 들어서 홍콩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격화하면서 시진핑은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시진핑이 자기 하수인인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시켜서 홍콩인을 중국에서 처벌하는 범죄인 송환법을 만들려고 했다가, 홍콩 국내의 거센 반발 뿐 아니라 세계적인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다. 혈맹인 북한, 우방인 러시아까지 2019년 베네수엘라 정치 위기 때와 달리 중국의 입장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침묵 상황'만 연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2019 G20 오사카 정상회의를 앞두고 시진핑이 궁지에 몰렸다. 2019년 7월 1일 영국 가디언은 이번 홍콩 시위가, 중국 공산당의 1인자가 된 후 권력욕을 드러내며 독재를 강화해 온 시진핑의 독재정치에 개인적으로 거센 도전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기사

결국 2019년 9월 4일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시켜 범죄인 인도법(송환법)을 완전히 철회(Withdraw)시켰다. 700만 홍콩 시민들의 88일간 끈질긴 시위에 결국 시진핑이 굴복한 것이다. 이번 홍콩 송환법 철회 명령은 중국 국내 정치투쟁에서 시진핑이 사상 처음으로 맞는 쓰라린 패배이다. 이 때문에 시진핑의 지도력에 큰 상처가 되었다.

2019년 9월 30일, 국경절 70주년을 앞두고 홍콩에 대해 연설을 했다. 홍콩의 반중국 시위가 17주째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홍콩과 함께 번영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30일 시 주석은 중국 건국 70주년 국경절을 하루 앞두고 이날 열린 기념행사에서 "일국양제(一國兩制·한 국가 두 체제) 및 높은 수준의 자치권 원칙을 완전하고 충실히 이행하겠다." 밝혔다. 이어 "본토의 전폭적인 지지와, 본토를 사랑하는 홍콩과 마카오 주민들의 노력으로 (홍콩은) 본토와 함께 번영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전했다. 시 주석은 "본토의 완전한 통일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라며 "그 누구도, 어떠한 힘도 이를 막을 수는 없다." 말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이 대목에서 대만을 언급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오는 10월 1일 70주년 국경절을 맞아 수도 베이징 텐안먼 광장에서 역대 최대 규모로 열병식을 진행했다. KBS 뉴스

위 연설은 기존의 일국양제에 대해 중국 공산당의 원래 입장을 뒤집는 발언이다. 본토와의 완전한 통일이라고 하여 2047년 6월 30일 이후 홍콩중국이 완전히 병탄할 것이라고 선포했다. 기존 중국 공산당의 입장은 하나의 중국에 기초하여, 일국양제를 보장하여 홍콩의 별도 체제를 존중하고 유지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진핑은 2019년 9월 30일 완전한 통일을 처음 언급하여 하나의 중국이 제도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것은 홍콩의 자치권 기간이 끝나는 2047년 7월 1일 중국은 홍콩을 완전히 병탄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2019년 10월 23일 중국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 경질할 것이라는 뉴스가 파이낸셜 타임즈를 통해 나왔다. 시위대에 밀려서 경질한다는 모양을 피하기 위해, 캐리 람은 2020년 3월경 경질할 것으로 예측됐다. 기사 홍콩 행정장관 대행으로 추정되는 2명에 대해서도 분석 기사가 나왔다,

10월 31일 끝난 중국 공산당 4중전회에서 홍콩만 콕 집어 정책 변환을 강조했다. 이에 홍콩 국가보안법같은 강경 조치를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된다. 기사 결국 11월 1일 오후에 중국 공산당 명의로 선춘야오(沈春耀) 전국인민대회(전인대) 상무위원회 법제공작위원회 주임이 발표했다. 선 주임은 홍콩 문제에 대해 "당연히 4중전회에서 토론한 중요한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중앙이 헌법과 기본법에 따라 특별행정구에 전면적 통제권을 행사하는 제도를 완비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사 이렇게 대놓고 홍콩의 완전 통제를 선언한 것은 처음이다.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지속되면서 시진핑의 지도력은 의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19년 11월 24일 2019년 홍콩 구의회 선거에서 친중파가 참패함으로써, 시진핑의 중국몽은 중국 국내에서부터 뿌리째 흔들리고 있다. 기사 거기다가 우한 폐렴 미중 무역 전쟁이라는 초강력 폭탄까지 받고있다.

5.2. 외교

5.2.1. 서방

시진핑은 국가 부주석일 때 멕시코를 방문하여
中国一不输出革命、二不输出饥饿和贫困、三不去折腾你们、还有什么好说的。
우리는 혁명을 수출한 적이 없고 배고픔을 수출한 적도 없으며 상대를 괴롭히지도 않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한가한 서방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한다.
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중국이 개혁 개방 30년을 지나 경제가 계속 발전하면서 중국에 대한 서방의 간섭이 수위를 높여오자 이에 그가 어떻게 대응하려는지 대충 방식을 보여준 셈이다.

제18회 당 대회에서 취임 기자회견 이후 중화 문화의 부흥에 대해서 강조했고, 채택된 내부 정치 보고 문안에서는 '국제적 위치에 맞고 국가 안보와 발전 이익에 부응하는 강한 군대를 건설하는 것이 전략적 임무'라고 명시함으로써 태평양 지역에서 이제는 미국, 일본과 대립각을 세워 국가 안보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을 것임을 피력하였다.

5.2.2.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에는 오바마가 아시아 쪽에 대한 외교에서 시진핑과 충돌은 하면서도 서로 직접 비난은 자제했다. 그러나 자국 우선주의 기치를 내걸고 당선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완전히 사이가 냉각된 상태가 됐다.

시진핑은 트럼프한테 저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파일:손빼라.gif
소국이 대국을 섬겨야 한다고 하면서 본인이 아예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진이 이 움짤. 2017년 한겨울에 미-중 정상회담을 하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으로, 자금성을 관람하던 중 중국의 수장인 시진핑이 트럼프가 눈치를 주자 바로 차렷자세로 웃도리에서 손을 빼는 장면이다. 그 후 시진핑의 떨떠름한 표정은 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시진핑에게는 자국, 즉 홈그라운드에서 벌어진 일이다. 또한 트럼프의 시선을 주목해 보았을 때 트럼프가 고개를 돌린 것은 눈치를 줄 의도가 아닌 단순히 경치 감상이나 주위를 둘러보려는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시진핑은 트럼프를 크게 의식하고 있다는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시진핑이 미국을 방문해서 저런 장면을 만들어낸 거라면 그럴 수도 있지 싶겠지만, 트럼프가 중국에 찾아왔는데 호스트인 시진핑이 게스트인 트럼프의 눈치를 보고 호주머니에서 손을 뺀 것누가봐도 명백한 저자세 외교이다.[20]

위의 주머니 사건은 기사로도 났다.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에서도 시진핑은 트럼프의 공세가 들어올 때마다 제한적으로 보복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고 적극적인 대응 자세는 보이지 않는다. 결국 2018년 11월 1일 시진핑이 트럼프한테 먼저 전화를 걸어서 '무역분쟁을 원치 않는다.'며 먼저 고개를 숙여야 했다. #

하지만 시진핑과 트럼프의 자존심 싸움 자체는 2019년에도 진행 중이다. 미국 측에서 화웨이 관련 논란 등의 사안으로 공세를 이어가는 가운데 시진핑도 희토류 수출 제한 및 미국산 대두 수입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며 반격을 시도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손해를 자초하는 모양새가 되고 있다. 중국산 희토류의 최대 수입국이 미국이기는 하지만 그 이유는 오직 가격 경쟁력 하나뿐이며, 따라서 중국이 희토류 제한 카드를 꺼내들자 미국에서는 자체 인프라를 가동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21] 미국산 대두 역시 중국이 가장 큰 시장이긴 하지만 미국 측에서는 중국이 아니여도 팔 곳이 많다는 반응. 19년 6월 초 있었던 러시아 방문 과정에서 시진핑이 트럼프를 '내 친구'라 지칭했으므로 2018년과 비슷하리란 전망이다.

2019년 6월 28일, 2019 G20 오사카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인텍스 오사카를 찾아갔다. 그리고 미국 중국은 정상회담 시작 전부터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미국-중국 무역 전쟁으로 인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 정상회담에 앞서서, 일본 아베 신조 총리가 주재한 '디지털 경제 규칙 만들기' 세션에 트럼프와 시진핑이 모두 참가했다. 여기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 황금방패 인터넷 검열을 거론하며 중국을 비난하고, 시진핑 주석은 정보통신 기술 및 서비스 공급망 확보에 관한 행정명령에 따른 화웨이 제재에 대해 미국을 비난하는 거친 설전이 오갔다. 기사

2019년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장기화하자, 본격적으로 미국과 시진핑 정부와의 극한 충돌이 빚어지고 있다. 2019년 8월 8일 사건이 터졌다. 중국 공산당 측에서 폭로한 사진에 따르면, 조슈아 웡이 '미국인으로 보이는' 여성 인물과 이야기하는 사진이 찍혔다. 관련 질문이 이어지자, 조슈아 웡 2019년 8월 6일 홍콩 주재 미국 총영사와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조슈아 웡은 미국 홍콩 정부에 최루탄을 더 이상 수출하지 말라고 요구하고, 미국에서 논의 중인 '홍콩인권 민주법안' 등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고 밝혔다. 이에 중국 공산당은 홍콩 시위에 대해 미국 정부가 배후라며 공격했다. 기사 중국 공산당 정부는 해당 홍콩 주재 미국 총영사의 신원, 일정, 가족관계까지 모조리 폭로해버렸다. 미국 국무부는 이런 중국의 조치에 대해 폭력배들 이나 할 짓을 중국 정부가 하고 있다며 거세게 비난했다. 기사 조슈아 웡과의 만남과 같은 일은 외교관의 일상적인 업무이며,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했다. 폭력배나 할 짓이라고 말한 데에 대해 충격적이라며 미국 국무부에 질문이 폭주하자 모건 오테이거스 국무부 대변인은 "내가 그렇게 (중국은 폭력배라고) 세 번 말했다." 하고 확인사살을 했다. 기사

2019년 하반기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미국에서 지지하기 위해 홍콩 인권 민주주의 법을 통과시켰고, 미국 의회에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 인권법도 통과시켰다. 홍콩 인권법과 신장 위구르 인권법은 공통적으로 홍콩/위구르 인권 탄압에 관련된 중국인에 대한 미국 비자 발급 제한과 미국 내 자산 동결이라고 하는 경제제재가 들어가 있다. 당연히 시진핑이 미국에 제재를 받게 된다. 2020년에 아예 시진핑을 미국에 입국 금지( 페르소나 논 그라타)하는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5.2.3. 영국

2020년 1월 2일, 시진핑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국 상하이증권거래소 영국 런던증권거래소 주식, 채권교차거래, 이른바 후룬퉁(滬倫通) 시행을 전격 연기하기로 했다. 후룬퉁 시행을 연기한 이유는 정치적 긴장이라고 적었다. 영국 정부가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에서 홍콩 시위대를 지지하고 중국 정부의 인권 탄압에 대해 항의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것으로 추정된다. 기사

2020년 1월 3일, 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을 두고 영국 중국 간의 갈등으로 인해, 중국 정부에서 상하이증권거래소 런던증권거래소 주식, 채권 교차거래인 후룬퉁을 완전히 중단할 것이라고 중국 전문가가 전망했다. 기사

5.2.4. 일본

아베 신조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일본 민주당 정권 시절 중일 양국이 희토류 무역 분쟁을 빚는 등 최악의 관계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아베 역시 미일관계에서 미일동맹을 강조하며 반중, 친대만 성향을 그대로 드러내는 등 여러 가지로 시진핑 입장에서 아베의 일본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중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이 상황을 바꿨다. 중국이 미국으로부터 계속된 통상 압박을 받자 그 돌파구로 일본을 선택한 것이다. 대가로 시진핑은 엄청난 대일 저자세 외교도 불사했다. 밑에도 나오지만 2018년 10월 26일 시진핑이 아베를 초청해서 한 정상회담의 공동선언문 제목을 일본과 중국의 2018년 베이징 공동선언이라고 할 정도로 나 먼저 원리가 아닌 전격적으로 일본을 앞에 써줄 정도로 체면을 세워준 것이다.

2018년 10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리커창 중국 국무원 총리, 왕치산 부주석 등이 아베 신조를 초청하였다. 기사1 기사2 전격적으로 경제협력을 하고, 중-일간 무역분쟁은 빠른 시일 내에 타협, 그리고 미국의 자유무역 지대 복귀를 공동으로 촉구하는 등 중일관계가 급속한 화해의 길로 가고 있다.

2018년 10월 23일 10월 26일 발표된 일-중 베이징 공동선언[22]에서는 일대일로 사업에 대한 일본 기업들의 전면 참여 허용, 중국-일본 공동 인프라 투자펀드 1조 달러 어치 창설, 한화 20조원에 상당하는 기업협력, 중국인민은행 일본은행 기존의 10배인 한화 35조원 상당(3조 4000억 엔) 통화스와프 협정 체결 등 여러 분야에서 급속한 화해의 길로 가고 있다. 또한 미국이 이탈하여 일본만이 대형 국가로 남게 된 TPP에 중국이 참여를 검토하는 등 급속도로 중일관계가 화해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 때문에 수상한 중일 밀월이라거나, 아베의 친중행보가 트럼프의 분노를 일으킬 수 있다, 대만까지 이번 중일회담을 경계하는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이렇게 중일관계가 화해를 보이는 것도 잠시였다.

2019년 6월 28일 2019 G20 오사카 정상회의 1일차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시진핑 간 중일 정상회담이 있었다. 여기서 아베 신조 총리는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에 대해 시진핑과 회담을 했다. 중일정상회담에서 아베는 시진핑한테 홍콩에서 발생한 시위 사태에 대해 우려를 표하면서 중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경고했다.

아베 총리는 시진핑 주석한테 ' 일국양제 제도 아래에서 홍콩이 자유롭고 개방적으로 번영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유와 인권, 법에 의한 통치와 다른 보편적인 가치들을 보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상기시켰다고 밝혔다. 기사 G20 오사카 정상회의 주관국인 일본이 공개적으로 중국한테 홍콩 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이에 대한 반발심리가 기인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후 일본에서 대 한국 수출제재를 감행하자 중국 정부가 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낸 바가 있다. 이를 두고 일본의 이번 수출제재 조치는 중국 차원에서 보기에 미국을 따라하는 것으로 보여 중국에서 불편하게 여긴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후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왕이 외교 국무위원이 고노 외무상을 질타하는 발언을 남기는 등 전반적으로 험로가 예상되는 상황이 연달아 이어지고 있다.

5.2.5. 북한

북핵 문제와 관련해서는 중국의 안보 문제와 관련해 북한의 핵 보유[23]에 반대한다는 입장이 단호하고 국제적인 규범을 성실히 이행할 것임을 천명하였지만, 북한의 동향이 줄 영향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므로 북한에 대한 전통적인 외교 경제적인 후견인 역할이 어느 면에서 한국과 안정적으로 공조가 이루어져 변화하고 조정될 수 있는지 주목을 받고 있다.

예전에 " 항미원조전쟁은 조선을 도운 중국의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발언한 적이 있다. 블로그

북한에 대한 영향력은 예전에 비해 제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북한 제재를 조이고 있다. #

2018년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시진핑의 초청으로 김정은이 방중했다. 쑹타오 등 중국공산당의 주요 요인들이 베이징에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직접 단둥역에 가서 김정은을 맞이했고, 김정은이 되돌아갈 때도 고위 간부와 철도 요인들이 단둥역까지 나와 배웅하는 등, 중국 건국 이래 유례가 없을 정도의 규모와 높은 수준의 의전으로 김정은을 맞이했다. 외신에서는 이 의전을 두고 황제급 의전이라 평하기도 했다. 여기에 리설주가 동행했으며 최룡해·박광호·리수용·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및 리용호 외무상 등이 수행했다고 한다. 김정은은 시진핑과의 정상회담에서 단계적 비핵화를 이야기 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韓美, 단계적 조치하면 비핵화"…시진핑과 한반도 대화

시진핑이 김정은을 초청한 이유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중국의 영향력 축소를 우려했고 김정은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상호 이익적인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평가했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차이나 패싱이 나오자 다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북미정상회담 끝난 지 일주일 만에 또 다시 김정은을 베이징으로 초청하여 3차 정상회담을 가졌다. 3개월 사이 북중 정상이 세 번이나 만난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리고 2019년 1월 7일, 2차 북미정상회담 개최 일시와 장소 발표를 앞두고 김정은을 또 다시 베이징으로 전격 초청하였다. #

2019년 6월 19일, 방북을 하루 앞두고 < 중조친선을 계승하여 시대의 새로운 장을 계속 아로새기자>라는 제목으로 북한 로동신문에 기고를 하였다. '새로운 장'을 열어나가는 방안으로 ① 전략적 소통·교류 강화 ② 친선 왕래·실무적인 협조 강화 ③ 대화·조율·협조 강화 등 3가지 의제를 제시했다. #

20일~21일 김정은의 초빙으로, 국가 주석 취임 이래로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였다. 북한은 시진핑 주석에게 최고의 예우를 해주었다고 한다. #

5.2.6. 대한민국

주석 등극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친분이 있고, 박준영 전라남도지사, 새누리당 정몽준 전 의원, 국민의당 손학규 고문, 삼성 이건희 회장, 현대차 정몽구 회장, 포스코 정준양 회장 등 한국의 많은 정·재계 인사들과의 교분도 깊어 지한파로 알려져 있으며, 예전 중국의 지도자들에 비해 한국과의 관계 발전에 더욱 관심이 많다고 한다.

그러한 점이 작용했는지 2014년 7월 3일 대한민국을 방문하게 되는데, 중국과의 수교 이후 처음으로 최고 지도자가 혈맹국인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을 먼저 방문하는 케이스가 되었다. 박근혜 역시 한국 대통령이 취임 이후 일반적으로 미국을 처음 방문하고, 그 다음에 일본을 방문하는 관례를 깨고 미국 방문 이후 중국을 먼저 방문하였다.

한편 박근혜가 당선된 이후 ' 일본에 우호적인 후보가 당선되었다.'는 일본 언론 보도가 있었고 이명박 정부 후반기에 악화된 한일관계를 개선할 대통령으로 알려졌으나, 임기 내 계속된 한중관계의 강화로 박근혜가 졸지에 반일 지도자로 제대로 각인되었다.(...) 한국 내의 친미/친서방 성향의 인사들도 지나친 친중 외교를 비판하기도 했다.

2014년 11월, 베이징에서 열린 APEC에서 시진핑은 박근혜, 버락 후세인 오바마, 아베 신조를 만났는데, 아베 총리에게 보여준 표정은 박근혜, 버락 후세인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할 때는 사뭇 달라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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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전 대통령 때가 가장 좋은 미소를 지었고, 아베 때는 가장 썩는 표정.

2016년 THAAD 한반도 배치에 크게 반발하여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줄곧 우호적이었던 외교 관계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던 적이 있다.

문재인 정부 이해찬 특사를 만났을 때, 본인은 상석에 앉고 이해찬 특사는 그 주위에 앉게 해서 결례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2017년 여름 북한 문제로 한미일과 대립하자, 급기야 "인민군이 항미원조전쟁에서 승리했다."며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2018년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시진핑의 초청으로 김정은이 방중했고 그 사실을 한국 정부에 미리 통지를 했다. 그리고 김정은이 돌아간 즉시 바로 양제츠 정치국 위원을 한국에 특사로 파견했다.

5.2.7. 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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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7일 마잉주 대만('중화민국') 총통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간에 대만-중국 간의 정상회담이 66년 만에 싱가포르에서 진행되었다. '중화민국 총통'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사이 관계를 나타내는 한 사례가 되었다. 기사

하지만 2016년에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회의적인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총통으로 당선되어 사이가 급격히 냉각되어있다.

2018년 8월 2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초청 형식으로 차이잉원 총통이 NASA를 방문했다. 대놓고 트럼프 대통령이 차이잉원한테 초청장을 보냈기때문에 중국에서는 당연히 하나의 중국 위반, 시진핑도 가본 적 없는 NASA를 차이잉원한테 보여주다니!! 등등으로 방방 뛰고 있다. 그래서 2018년 8월 21일 전격적으로 엘살바도르 중화민국과 단교시키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이로써 대만의 수교국이 17개국으로 하나 더 줄게 됐다. 그러나 정말 대놓고 도널드 트럼프가 차이잉원한테 NASA 초청장까지 써줄 정도라 조만간( 2018년- 2019년 경) 미국과 대만이 정상회담 하는 것 아니냐는 설까지 돌고 있다.

2019년부터 강경책을 내놓고 있지만, 이것이 되려 반중을 자극하는 바람에 차이잉원 지지를 높여주는 꼴을 보여주고 있다.

2020년 제15대 중화민국 정부총통 선거 제10대 중화민국 입법위원 선거를 앞둔 2019년 8월 8일,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가 격화하면서 대만 독립 성향 민주진보당 차이잉원 현 총통의 지지율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중국 공산당에서는 ECFA를 폐기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며, 이 조치가 정말 시행되면 대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중국 전문가가 위협했다. 기사

결국 차이잉원이 재선하면서 중국몽에 대한 흔들림이 강화되고 있다.

중국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대체 무슨생각으로 대만을 건드리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언급하고 있다. 홍콩이야 작은 도시인 데다 명목상으로는 중국의 영토이기 때문에 중국이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대만은 중국과 다른 체제를 가지고 있는 별개의 나라이다. 대만은 비공식적이나마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의 군사 강국인 대한민국, 일본, 싱가포르를 동맹국으로 두고 있고 자체적인 군사력도 가지고 있다. 특히나 미국은 대만관계법으로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대만의 방위를 책임지고 있다. 실제로 장쩌민 국가주석이던 시절 대만을 압박하기 위해 대만해협에 해군을 주둔시키며 위기감을 조성하자 미국이 나서 7함대를 대만해협에 보내고 F-16 160대를 대만군에게 양도했던 적이 있다. 이때 장쩌민이나 후진타오 모두 무력으로는 애초에 대만을 삼킨다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닫고 실질적인 현상유지인 92공식을 맺은 것이다. 시진핑은 이를 간과하고 있으며, 시진핑이 대만을 압박하면 할수록 미행정부는 대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오히려 대만은 요즘 시진핑의 압박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최신형 무기들을 받아내거나 아니면 기술지원을 받아내고 외교적으로도 미국의 지원을 받기시작하고 중국에 있던 대만기업들이 대만으로 돌와오기 시작해 경제가 살아나기 시작하는등 시진핑의 압박이 오히려 호재로 작용하고 있다.

5.2.8. 러시아

러시아와는 잘 맞는 듯 잘 맞지 않지만 잘 맞는 것 같은 관계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서로 훈장을 수여하는 등 양국이 미국에 대한 견제를 같이 하려고 시도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도 경제력은 이미 중국이 매우 월등하고 (1인당 소득 마저 거의 비슷해졌다) 서로 군사력 부분에서도 겨우 한 계단 차이가 나고 (군사력이 동급이 되는 순간 러시아는 2등도 아니고 3등으로 떨어진다.)영토도 딱 붙어있어서 겉으로만 우호적일 뿐 내부적으로는 미국 못지 않게 서로 견제 중이다. 자세한 부분은 중러관계 참고.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관계다.

6. 비판과 논란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시진핑/비판과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 저서

책 표지가 많이 뽀샵된 것 같다

8. 필모그래피

9. 별명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시진핑/별명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0. 어록

각급 지도간부들은 모두 자신을 엄격히 단속하고 권력을 엄격히 사용하며 자신을 엄격히 요구하고 또한 일함에 있어 실속이 있고 착실하게 창업하며 성실해야 한다.
2014년 3월 9일 안휘대표단 심의 참가 때.
신형의 정부와 기업가 관계를 총화하면 바로 ‘친(亲)’과 ‘청(清)’ 두 글자이다.
2016년 3월 4일 중국민주건국회, 공상업연합회 위원 방문 때.
자신의 눈을 아끼듯이 민족단결을 아끼고 자신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듯이 민족단결을 소중히 여기며 석류알처럼 굳게 뭉쳐야 한다.
2017년 3월 10일 신강대표단 심의 참가 때.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2017년 8월 1일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을 맞아 국영 매체로 생중계된 베이징 인민대회당 기념식 연설에서.

11. 기타

  • 축빠로 유명하다. 아르헨티나를 방문했을 때는 메시 유니폼까지 선물받고 좋아할 정도. # 2011년 당시 민주당 대표이던 손학규와 만남 당시 "중국이 월드컵에 나가고, 월드컵을 유치하고, 월드컵에서 우승하는 것이 내 3가지 소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의 영향력 때문인지 중국의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서 체육 과목 구기 테스트 종목에 축구가 공식적으로 포함되었다. # 그래서 그런지 AC 밀란을 인수한다는 기사가 떴다. 그러나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잇따른 삽질 현재는 중국 국가 대표팀에 대한 기대감을 어느 정도 접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신 중국 슈퍼 리그를 무지막지하게 키우자는 걸로 방향 전환을 했다고 한다. 축구굴기라 해서 중국 축구 산업을 급속도로 성장시키고 있다. 전국에 축구 전문 학교 2만 개 설립을 하고 있는데, 2만 개면 대한민국 전국에 있는 학교 수보다 많다.
  • 젊은 시절 복싱을 배웠었다고 하며, 자세를 취한 적도 있다. #
  • 바둑을 즐긴다고 하며, 이창호의 팬이기도 하다. 2014년 방한 당시 청와대 만찬에서 이창호의 얼굴을 보고 매우 기뻐하며 악수하기도 했다. # 청와대에서 국가 간 선물 교환 시에도 한국에선 바둑알을 선물했다.
  • 2014년 7월 서울대학교 강연에서 서울대에 책 기증 의사를 밝혔고, 약 1년 후 서울대 도서관에 책, 정기 간행물, 영상물 약 1만 점을 기증하여 약속을 지켰다. #
  • 시진핑이 등려군의 광팬이었다는 사실이 잘 알려졌다. 테이프가 늘어지도록 항상 등려군의 노래만 들었다면서, "내가 젊은 시절에는 등려군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라고 훗날 고백했다.
  • 키가 180cm로 아시아의 정치인 중에서는 상당한 장신에 속한다.
  • 베이징(北京, 북경)이 베이핑(北平, 북평)이던 시절 베이핑 근처에서 태어났다고 이름이 近平(근평)이다. 동생은 가족들이 베이징과 멀리 있을 때 태어나 이름이 위엔핑(遠平, 원평).
  • 인도의 한 뉴스 앵커가 Xi Jinping의 Xi를 로마 숫자 11로 착각해 Eleven Jinping으로 읽었다가 해고된 적이 있다. BBC, WSJ, 연합뉴스
  •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나폴레옹이 중국한테 했던 "중국은 잠자는 사자다. 잠에서 깨면 세계를 진동시킬 것."이라는 말을 인용해서 "중국이라는 사자는 이미 깨어났다. 이 사자는 평화적이고 친절한 문명 사자다."라고 말했었다. #
  • 중국산 스마트폰 골수 마니아라고 하며 현재 사용하는 스마트폰은 ZTE Axon 시리즈 스마트폰 중 하나인 ZTE Axon 이라고 한다.
  • 시진핑 집권 이후의 중국에는 유독 호랑이를 때려잡는 시진핑 그림이 많다. 해당 그림에 나오는 호랑이들은 부패한 고위 관료들을 빗댄 것이다.
  • 중국 대학생 네티즌들이 뽑은 카리스마형 훈남(...)이라고 한다. 참고로 미국 순위 선정 매체 ‘하티스트 헤즈 오브 스테이트’(Hottest Heads of State)[25]에서는 196위를 했다. 즉, 전세계의 지도자들 중에서 외모가 최하위권. 참고로 꼴찌는 북한의 김씨.
  • 김용옥 차이나는 도올 방송에서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과 더불어 매우 칭찬했다. 서방이나 국내 언론에서 시진핑의 부패 척결이 권력 강화의 수단이기만 하다는 일각의 견해를 부정하고, 시중쉰이 어린 나이에 큰 공산주의 조직을 세웠던 것이나 천안문 사태 후야오방을 지지했던 것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진핑이 장기집권 의도를 드러내면서 독재와 우상화를 본격화하고 나선 2018년 시점에는 방송에서 스스로 자신이 "똥이 됐다." 하고 탄식하며 비판파로 돌아섰다.
  • 대기원시보에서는 시진핑을 중국 공산당의 독재를 종식시키고 중국의 민주화를 이룩해낼 중화 민족의 메시아로 보고 있는듯하다. 습비어천가(1), 습비어천가(2), 습비어천가(3)[26]하는짓거리보면 진짜 공산당을 말아먹을것 같다. 역병 뒷수습 못하는것도 그렇고....
  • 청년들에게 "밤을 새면 건강에 나쁘다." 조언하며, 자신은 아무리 늦어도 밤 12시 이후에는 취침한다고 하였다. 네이버 뉴스
  • 전원책 변호사에 따르면 시진핑은 어떤 경우라도 자기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닌 이상 말을 최대한 아낀다고 한다. 아마 과거에 있었던 아버지 시중쉰이 숙청당하면서 온갖 고초를 경험해서 말 한마디가 나중에 발목잡힐 수 있다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27]
  • 2014년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애시 연구소 조사에 따르면 시진핑의 지지율은 내치(內治) 94.8% 외치(外治) 93.8%라고 조사되었다고 한다.[28]
  • 사드 배치 논란 이전까지는 한국에서 호감도가 의외로 높았던 인물. 2013년에는 호감 40% 비호감 20%로 호감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박근혜 대통령의 전승절 참가당시에는 호감도가 55.1%로 오르기까지 했다. 사드 논란 이후에는 혐오대상이되어 호감도가 20%대로 떨어졌으나, 그래도 트럼프, 푸틴, 아베 등 다른 나라의 정치인들보다는 상대적으로 호감도가 괜찮았다. 하지만 당선 이후에도 상당한 기간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던 트럼프는 방한 이후 한국에서 트럼프의 호감도가 괜찮아졌고 시진핑이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서 호감도가 또 내려가는 중이다. 결국 트럼프에게 역전당했다. 지금은 아예 혐중감정이 상당한 지지를 얻게 된 상황.
  • 철찌들 사이에서는 철권 스트리머인 엠아재가 이 사람을 닮은 것으로 유명하다.
  • 중국의 한 초등학생이 '시진핑 할아버지 살 빼세요.'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 블라디미르 푸틴 정도로 뺐으면 좋겠다던 이 편지를 보도한 기사들은 돌연 인터넷에서 삭제됐다고 전해진다.
  • 머리숱이 엄청나다... 머리숱까지 물려받은 금수저... 아버지 시중쉰도 머리숱이 엄청난데 역시 유전의 힘이란... 그동안 흰머리를 감추다가 공식석상에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
  • 시진핑 국가주석의 승인을 받은 감옥은 어떤 모습일까? 시진핑(習近平)식 ‘스마트 교도소’: 비밀 문서 공개되다
  • 펑리위안 도민준을 언급하며 젊은 시절 시진핑이 김수현과 닮았다고 이야기 한 바 있다.
  • 시진핑의 작은 신(新)홍위병.
  • 미얀마를 방문하는 글 시진핑의 페이스북 자동번역 결과 '똥구덩이'로 번역되는 소동이 있었다. #
  • 중화민국에 대해 엄청난 강경책을 펼치는 시진핑이지만 웃기게도 중화민국의 군통령이자 중화권 최고의 여가수였던 등려군의 팬이다. 어느 정도냐면 등려군의 노래가 담긴 테이프의 필름이 다 늘어질 정도로 들었다고. 그래서 혹자는 등려군이 살아있었다면 시진핑의 초청으로 중국에 방문하지 않았을까 라고 한다.(등려군은 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조국에 대한 사랑이 넘치던 인물이라)

[1] 연변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습근평이라고 표기한다. 시진핑이 저술한 서적 중 유일하게 한국에서 출판된 저서가 '시진핑 국정운영을 말하다'인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습근평 국정운영을 론함'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북한 조선중앙TV에서도 한국 한자음으로 뉴스에서 습근평이라고 부른다. (북한은 2010년대 초반 한때 중국 인·지명을 중국식 발음으로 도입하려 시도했으나 정착에 실패한 적 있다. 김정일의 변덕 때문이라는 건 안 자랑) [2] 진핑(近平)이라는 이름도 베이핑(北, 베이징의 당시 이름) 가까이()에서 태어났다는 뜻. [3] 1913년 10월 15일 - 2002년 5월 24일 [4] 1926년 11월 - [5] 1979년 - 1982년 [6] 1987년 - [7] 1992년 6월 27일 출생([age(1992-06-27)]세). 후처 펑리위안 소생. [8] 그러나 외신에서는 '시진핑을 반부패 정치인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하는 비판이 크다. 하술한 '자기 주변의 비리에 대한 관대' 단락 참조. [9] 시진핑을 싫어하는 일부 반체제적 본토 중국인들, 홍콩, 대만 네티즌들은 여기서 한 획 더해 习大( 개진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지금 행보를 보면 딱 그러하다. [10] 서한(西韩: 시한)이 아닌 서조선인 이유는 중국에서 북한을 "조선(朝鮮: 차오셴)"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참고로 홍콩이나 대만에서는 한국에서와 동일하게 북한(北韓: 베이한)이라고 부른다. [11] 블라디미르 푸틴은 시진핑보다 지지를 받기 쉬운 이유가 있는데. 적어도 푸틴은 러시아와 핵심 이익이 걸린 지역들(예: 시리아, 우크라이나.)에 관해서는 물러서지 않는다고 해도 명분과 실리 양쪽을 구별해서 정책을 시행하며 상남자다운 이미지 구축으로 버터보다 강한 이미지를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의 입맛에 더 잘맞춰주는 등 영리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 반면 시진핑은 푸틴에 비해 실리와 명분은커녕 가까운 주변국가들부터 먼나라들까지 적대하는 등 비타협적인 태도만을 고집하다가 괜히 미국의 어그로를 끌어 쳐맞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곰돌이 푸를 자기 이미지를 실추시킨다고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매체에서 금지시키는 것을 보면 거의 사회성 결여증 환자로 보일 지경. [12] 보시라이와 같은 태자당이지만 시진핑은 그 같은 강경파가 아닌 온건파 지도자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13] 대장정으로 중국공산당 중앙지도부가 섬서성 옌안에 도착한 이후 류지단은 마오쩌둥의 명령으로 산서성 군벌 옌시산을 공격하러 원정을 떠났다가 전사한다. 공산당에선 류즈단의 고향 '바오안'을 '즈단'으로 개칭해서 그의 공로를 기념했다. 국내에선 우리식 한자 독음 '유지단'으로 많이 알려졌다. 2000년 이전에 나온 책들은 대부분 유지단으로 표기. [14] 요약하면 시중쉰의 감독아래서 1954년 시중쉰의 동료인 류즈단의 전기가 나왔는데, 이 소설에서 중공정권 수립후 처음으로 숙청사건이 된 가오강 사건의 주범인 '반동' 가오강이 미화되었다는 판정을 받아서 여기에 연루된 여러 사람이 다친 사건이다. 작가뿐만 아니라 이를 펴낸 시중쉰 또한 반동이 되었다. [15] 시중쉰은 중공 정권 수립 후 서북(西北)지역 제1서기, 군정 위원회 주석이던 펑더화이가 6.25 전쟁 지휘관으로 불려가면서 1950년 10월부터 1952년 9월까지 서북 지역 군정위 부주석, 주석 대리와 경제 총책을 맡았다. [16] 다만 이런 류의 일화는 어린이 위인전마냥 후대의 미화가 상당수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한다. [17] 2012년 기준 현역으로 계급은 소장이다. [18] 경제적으로 따지면 중국은 보수 세력이 좌파다. [19] 공무원들에게 외식을 허락하면 해외업무를 보러 다른 나라로 출국하는 공무원 특성상 영미권 및 유럽에서 중국인이 재감염되어 다시 중국 혹은 다른 나라로 바이러스를 유입시키는 상황이기에 더더욱 위험하다. [20] 한 중국 전문가가 말하길 중국은 외교에서 '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 는 찌질한 원칙을 철저하게 지킨다고 한다. 찌질 외교 중국보다 강자인 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게 함정 대한민국 포함한 동아시아국가나 동남아 국가들을 대상으로 수틀리면 대놓고 깔아뭉개려 하는 동네 양아치같은 태도를 보여 왔다. [21] 미국이 석유를 포함한 주요자원을 수입하기에 국제사회에서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미국은 중동이나 중국 못지 않게 자원이 넘쳐나는 나라다. 2차대전 후 중동 유전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계 최대의 산유국이었고, 희토류와 같은 광물자원 역시 환경파괴 문제와 단가 문제 때문에 개발을 하지 않을 뿐 엄청난 양을 축적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알래스카의 광물자원들과, 미국이 개발한 셰일가스 등을 생각해보면 미국이 자국의 자원을 아끼기 위해 수출과 채굴을 자제해서 그렇지 자원보유량도 어디에 꿀리지 않는다. [22] 중국 측에서 전격적으로 공동선언문에서 나 먼저 원리가 아닌 일본을 앞에 쓰는 것을 허용했다. [23] 2014년 7월 4일 한반도 비핵화라고 언급을 하였으나, 이것은 단순히 북한의 비핵화 뿐만이 아닌 대한민국을 포함한 한반도의 비핵화, 즉 미국의 핵우산 전략 목적에 대한 포석이라는 시각도 있다. [24] 잘 보면 아베도 제대로 웃지 못하고 있다. [25] 'Hot'을 평가하는 것이면 단순히 미남이 아닌 매력남을 보는 것이다. [26] 현재 기사 링크 삭제됨 [27] Tvn 유식한 아재들의 독한 인물 평존. 유아독존에서 [28] Tvn 유식한 아재들의 독한 인물 평존. 유아독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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